야위어서 서희의 눈동자는 커다랗고 한결 짙어진 눈시울은 눈가장자리에 병적인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얇고 부드러운 입술도 다소 푸르스럼한 것 같다. 그러나 병적인 음영과 초췌해 보이는 얼굴은 오히려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여러 시선이 서희에게 집중된다. 여자, 남자, 어린이, 노인 할것없이 모두 두려운 눈으로 서희를 바라본다. 숨이 막히고 고뇌스러우며 탄식하게 되는, 아무튼 보는 사람에게 황홀감을 주기보다 괴로움을 주는 서희의 미모, 용정 바닥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뿌린 여자이던가, 전설과 같은 얘기들, 어떻게 하여 저 흑요석(黑曜石) 같은 눈동자의 어린 여자는 어마어마한 그 재산을 삼사 년 동안 쌓아올렸을까. 기적이다. 그 기적을 상징하는 것이 독특한 그의 용모다. 기품과 요기(妖氣)와 교만과 총명의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여자. 서희의 시선은 일순도 머문 곳이 없었다. 길상에게조차 단 일별을 허용치 않고 마차에 오른다. 털을 바닥에 깐 작은 단화, 역두에 선 사람들이 마지막 본 것은 서희의 그 귀여운 구둣발이었다. - P383
이상한 일이다. 순간적인 심리 변화라는 것은. 서희는 거짓 없이 말했던 것이다. 사실 당초부터 서희에게는 경쟁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얼굴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고 따위는, 그런 것을 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슴푸레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길상은 무엇을 원했으며 어떤 결과를 만들려는가. 서희가 거짓 없이 말했다는 것은 길상이 이 여자와 헤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니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건 설움 때문이야. 서희는 속으로 뇌이며 눈길을 여자도 목도리도 아닌 곳으로 옮긴다. 서희가 알기로도 길상에게는 좋은 혼처가 많았다. 그것을 다 마다하고 볼품없고 가난에 찌들은, 아이까지 딸린 과부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은, 그것이길상의 슬픔이라는 것을 서희는 비로소 느낀다. "앙입매다. 거짓말은 마옵소꽝이. 어째 모르겠습니까. 생각으 해보옵소. 어째 새총각으 처지 알라까지 따른 가스집과 혼인하겠슴? 사람으 괄시하면 앙이 됩매다. 누귀 그 말을 믿겠소꽝이? 그러잖애도 그분이 도와준 돈을 갚겠다아 그 일념으로 밤 새워가문서리 바느질으 하는 기요." - P405
‘고아 같다. 뭐 언제는 내가 고아 아니었었나? 그렇지만 더욱더 고아 같다.‘ 못에 매달린 목도리를 보았을 때 서희는 여자를 집에 데려다놓고 길상에게 고통을 주리니 생각했었다. 길상이 자기를 낯선 여관에다 내버려두고 여자 집을 찾아간 행위가 애정 없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 그 무자비한 감정을 무엇이 풀어놨다. 풀린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서희는 스스로, 자기 자신마저 질곡에서 풀어버린 것이다. 용정에 쌓아 올려놓은 자기 성으로 돌아간다면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나 그끈질긴 숙원과 원한에 사무친 보복심과 잠들 수 없는 자긍을 내어버린 자유, 무겁고 숨막히는 철갑을 벗어버린 자유다. 사랑할 수 있는 자유, 다 버리고 어디든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바람에날려가는 나뭇잎같이 왜 슬프고 외로운지, 고아의 느낌이 가슴을저미는지 서희는 알 수가 없다. 덮어놓고 걷는다. 하늘 끝까지 내처걸어갈 것처럼 걷는다. 여관과는 사뭇 방향이 다른 것도 개의치 않는다. - P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