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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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그래서

                                  이규리

   산책은 나무에서 나와 나무 아닌 곳으로 들어간다

   해 질 무렵이면

   마음은 곧잘 다른 마음이 되어

   노을을 낭비하였는데

   이어지는 저녁의 이야기는

   흐린 은유는

   아무때나 친절하면 안 된다는 듯

   우리는 지나가는 그늘

   공기조차 알아채지 않도록

   그건 나무에게 이름을 걸어주지 않는 이유와 같을 것

   없는 슬픔이 도와

   그러므로 그래서

   안녕히 가세요

   나의 시간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중에서

 

 

     

 

  

 

  [당신은 첫눈입니까]를 아껴 읽는 중이다. 시어들이 콕콕박혀서 부리로 쪼는 물까치 가족 같다. 어느 때는 홀로 와서 쪼면서 노래하다가 가족을 불러와서 단체 회의를 하듯이 쪼기도 한다. 홀로 왔을 때는 버스 안에서 한 편을, 5인이상 집합금지 적용을 받지 않은 총동원령이 내려진 날에는 옮겨 적으면서 몇 편을 읽는다. 여기, 시 맛집이라고 물까치가 떼로 쪼아대면서 저들끼리 왁자하다. 잔칫집이다. 니들은 좋겠다.

   '해 질 무렵'을 좋아한다. 가만히 있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마음은 곧잘 다른 마음이 되어' '나무에서 나와 나무 아닌 곳으로' 산책을 간다. 열 서너살 무렵부터 노을에 마음이 뺐겼다. 학교를 파하면 훨씬 많이 걷게 되는 둑방길로 패랭이꽃과 노을을 보러 갔다. 그 풀밭에 앉아 유장한 드들강물과 노을을 보는 것으로 애늙은이의 노곤한 하루가 저물어갔다. 집에서는 도통 말없는 아이가 학교에서는 주변이 늘 소란했다. 어느 쪽이 더 좋았는지는 매번 양가의 감정이다. 두 가지 성향을 다 가진 듯하다. 여전하다. 사람, 안 변한다. ' 없는 슬픔이 도와' 마음 깊은 곳에는 울분과 설움이 자리했다. 나이가 드니 그런데서 자유롭다는 사실이 좋다. '안녕히 가세요 나의' 시간, 나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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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마이카상

 

 

                    김태정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닮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중에서

 

 

 

 

  

 

 

   

 

 

 

 

 

 

 

 

 

 

 

 

  호마이카상과 트렁크 하나를 들고 방에서 방으로 전전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읽는 데, 결코 친애할 수 없었던 그 시절들이 생각난다. 집에서 올라올 때 옷가지 등을 담은 은색 트렁크를 가져왔다. 지금의 수하물용 캐리어보다 크고 바퀴도 없던 트렁크를 어떻게 끌고 다녔는지 기억이 없다. 비키니 옷장을 장만하기 전까지는 내 소유물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트렁크다. 그리고 맨 먼저 장만한 다리가 접히는 작은 호마이카상 한 개. 시인처럼 밥상도 되고 책상도 되어주었다. 손바닥만 한 트랜지스터라디오와 함께 호마이카상은 그 시절의 나를 지탱해 준 친구였다. 저 시를 처음 만났을 때, 김태정 시인이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의 다른 시들에서도 나는 동질감과 소속감으로 결속되었다. 시인의 지난한 생애와 살아온 시간들이 같다. 시인은 겸손하게 가난해서 맑은 이마를 가진 시인으로 남았고, 욕심의 곳간을 가진 나는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지금의 원룸이나 독립된 공간인 방 하나가 아닌 한 가족의 오롯한 공간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방들의 시절이다. 그것도 꽤 오래 전전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끼익 소리가 나는 현관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발뒤꿈치를 들고 거실을 통과하면 호마이카상과 트렁크, 이불한 채가 전부인 내 방에 비로소 들어설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차단 효과가 되는 나무 문이 나를 가려주기도 했지만 소위 식모방으로 불리던 주방 뒤쪽의 방일 때는 창호지 문의 미닫이 일 때가 많았다. 가족이 적은 집이거나 생활이 넉넉지 않은 가정은 방 한 칸을 포기하고 세입자를 들여 생활비를 충당하던 세입자나 주인이나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타인이 드나드는 불편함을 서로 감수해야 했으니 집주인이라고 마냥 당당하지만은 않았단 생각이 든다. 그 시절에는 미루어 짐작하지 못했던 상대방의 불편함도 이제서야 생각하게 된다. 집은 누구에게나 하루의 노곤함을 편안한 쉼으로 충전하는 공간이었으니. 그러나 자발적인 눈치 보기는 늦은 튀근 후 욕실을 사용하는 일은 최소한의 시간을 원했으며, 주방을 같이 사용하지 않으려면 끼니는 회사에서 먹는 한 끼나 두 끼가 전부였지만 휴일에는 이도 저도 불가능해서 종일토록 책을 읽거나 뒹굴뒹굴하다 집에 빈 기척을 살피며 삼양라면으로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도서관이나 공원조차도 흔하지 않던 시절, 아마 11개나 12개의 방을 거쳤으리라. 방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기억의 퇴적층을 이루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 단연 최고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그 동네일 것이다. 집장사가 지은 ​비슷한 집들이 가득한 신흥 주택가의 이층, 타원형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던 예쁜 창을 가진 집에서 삼 개월인가 살았다. 그것도 동생이랑 둘이서. 부부만 거주한다기에 단출함이 서로 부담 없을 줄 알았던 생각은 이사 하루를 넘기기 전에 깨지고 말았다. 이사 기념으로 저녁에 새집의 환한 방에서 대패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는데 소란스러운 소리는 우리를 단번에 주눅 들게 만들었다. 집에서 둘이 같이 살던 시절, 우리는 저녁마다 술을 먹고 들어오는 장남의 패악질에 무방비로 놓였던 주눅의 세월이 있었다. 울면서 매달리고 잘못했다고 비는 엄마 때문에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무기력과 고난, 홧증과 속수무책의 절망을 우리는 서로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잘못된 하루일 거라는 외면은 거기 사는 동안 날마다 이어지는 하루들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데려온 동생은 같은 직장에 입사했다. 둘 다 3교대 근무에다 다른 부서였기에 우리는 어쩌다 만났지만 만나도 말이 없는 하루들이 늘어만 갔다. 자매였지만 많이 다른 성향은 무언의 거리로 간극이 넓어졌고, 그 집 가까이 사는 부부의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현관문을 열어 제켰고 문이 열리는 횟수만큼 부부의 싸움도 점점 극을 향해 달려갔다. 세간들은 붕붕 날아다녔고 그런 순간은 우리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참아야 했고 최대한 방에 없는 것처럼 노력을 해야 했다. 결국 그 부부가 이혼을 결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깊은 부엌이 따로 있는 방을 구해 지옥을 벗어 날 수 있었다. 생의 구비에서 길지도 않을 시절을 지냈던 그 방, 지금도 가끔 얼굴 없는 그 부부가 소리만으로 싸우는 꿈을 꾼다. 그 꿈에는 어김없이 얼굴이 선명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부분에서 가위에 눌려 숨을 죽이는 내가 있고 햇살이 찬란하게 쏟어져 들어오는 타원형 창문이 있다. 그때 우리는 그 창에 반해서 그 방을 계약했었다. 그 뽀얀 햇살이 가여운 엄마를 공동묘지에 묻고 온 우리의 설움을 뽀송뽀송하게 말려 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 후론 단 한 번도 그때에 대해 우리 자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때 우리의 주식은 나온 지 얼마 안 된 통통한 너구리 라면이었는데, 문밖에 귀를 기울이고 조용한지 확인한 뒤 재빨리 끓여오던 너구리 라면과 호마이카상. 오늘 점심은 짜파구리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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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정윤조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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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  정윤조옮김 [문학수첩(2014)]

 

 

   '전미도서상 수상', '오헨리단편소설상 수상', '미국예술학회 수상', ' 미국대학위원회SAT 추천도서'

  "고딕문학의 거장 플래너리 오코너 대표작 국내최초출간!"

 

 

  내게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는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가와 동일한 질문이 된다. 책 한 권은 한 사람의 생애와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하찮은 삶에도 (하찮은 삶은 누가 판단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접어두고라도) 기승전결의 희로애락이 있기에 누구도 함부로 타인의 생애를 예단하지 않아야 하며, 아무리 형편없는 글에도(마찬가지로 형편없다는 결정은 누가 내린 것인가의 의문은 접어두고) 그 글을 쓴 사람의 철학과 삶이 반영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읽는 동안 실망스럽더라도 칼을 들지는 않으려고 한다. 글 또한 음식과 같아서 기호에 따라 호불호가 다를 수 있고 각각의 스타일이 있기에 선택하는 자신의 책임도 일정 부분 기여한다. 자신이 쓴 글에 대한 평가의 말이나 글은 칼날과 같아서 받아들이는 상대는 돌이킬 수 없는 창상(創傷)을 입을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고 쓰는 이의 유, 무명을 떠나서 똑같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줄의 댓글도, 서평도 조심스럽다. 쉽게 튀어나간 말이나 잘난 척한 신랄한 한 줄이 상처로 남게 되지 않게 조심하는 편이다. 요즘처럼 독후감을 많이 쓴 적도 없는 데다 온라인상에 떠도는 타인의 소설 한 편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 때문에 갑자기 걱정이 들끓는다. 50년간의 계통 없는 독서가 남긴 기억들이 책 속의 문장을 내가 쓴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의심스럽다. 물론 작정하고 표절한 이들은 다른 문제다. 소설 표절이 드러나자 그 사람 자체가 표절은 아닌가 싶게 전방위적으로 많이도 해왔던 데. 그것이 가능한 제도적 한계의 헛점은 더 큰 문제다.( 한 줄짜리 검색으로도 드러났을 문제인데 이제 와서 허둥지둥하는 주최 측들은 무슨 염치가 있을까) 무엇보다 원작자의 고통이 가장 크겠다. 내가 아는 한정된 세계관이, 내가 가진 부족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용서하시라. 이 책 표지띠의 화려한 수식어들 덕분에 그런 생각이 깊어졌다. 수식어의 화려함에 쉽게 경도되어 이 책을 구입했을 것인데 문제의 표절 때문에 이렇게 시작한다.

 

 

 

  첫 번째 단편이자 표제작인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는 놀라운 흡입력으로 단숨에 읽게 했는데,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가고 등허리가 뻐근하다. 당연히 '플래너리 오코너'는 처음이다. ('오코너', 이 익숙한 느낌은 싱어송라이터 '시네이드 오코너' 덕이다. 박박민머리를 유지하면서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바로 그 '시네이드 오코너'만큼이나 '플래너리 오코너'와의 첫 만남도 강렬하다.) 모르는 작가이기에 역자의 말이 있나 찾아보니 없다. 날개에 붙은 작가에 대한 설명문을 읽고 '고딕문학'을 네이버에 검색해봤더니, 이 서늘함이 어디서 오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미국 조지아 주 출생의 여성 소설가.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문에서 자랐고, 아이오와 주립여자대학과 아이오와 대학에서 수학했다. 25세에 홍반성 낭창이라는 불치병에 걸려오랜 세월 투병 생활을 한끝에 1964년 3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장편소설 2편과 단편소설 32편, 여러 권의 평론집과 에세이를 남겼다.

  오코너는 미국 남부의 고딕문학 계열의 작가로 분류되며, 종교적 색채가 짙은 소설을 주로 썼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종교 이론에 정통했으며,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인간과 죄악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보였다. 형식적인 면으로는 치밀한 이야기 구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상징, 사실적인 묘사가 단연 돋보인다. 부조리한 상황이 초래하는 블랙 유머와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 설정, 인간 본성과 종교적 신념의 시험대 역할을 하는 폭력적인 상황은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만하다.

  작가의 단편 작품들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아서,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영문학과 커리큘럼에서 플래너리 오코너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50, 60년대에 출간된 두 권의 단편집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50년 이상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이다'라는 정희진의 말에 동의한다.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오코너의 가치관과 사상, 생활태도는 각각의 소설 속에서 여실하게 만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작가의 약력을 살펴보기 전에는 1950~60년대의 소설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젊은 우리 작가, 강화길의 '괜찮은 사람'에서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사고들이 관찰된다면 순전히 내 관점과 생각일 뿐이리라. 어쩌면 2014년의 번역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쉬움은 해설이나, 옮긴이의 말이 없는 것과 더불어 원제도 표기되지 않았다는 점은 원어에 관심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안타까웠다. 어떤 책들은 주석이 많이 달려서 읽는데 방해되기도 하지만 전혀 없는 것도 읽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각각의 열 편의 단편들은 연작인 것처럼 읽힌다. 장소도 주인공도 다른 데 연작처럼 읽히는 이유는 뭘까. 우선 뛰어난 가독성이 일관성을 유지하기에 쭈욱 단숨에 읽어버려서 일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패턴의 다양한 인물에 있다. 이름이나 호칭은 다르지만 거의 매 편 등장하는 수다스럽고(영화 속이면 어떤 차림새를 했을지 그려지는) 귀부인스러움을 유지하는 여인들이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의 할머니, [강]의 코닌 부인, [당신을 구하는 생명은]의 노파, [뜻밖의 재산]의 루비, [성령이 깃든 사도]의 어머니, [검둥이 인형]의 할아버지 헤드, [불속의 원] 코프 부인과 프리처드 부인, [적과의 뒤늦은 조우] 샐리 포커 새시, [선한 시골 사람들]의 호프웰 부인과 프리먼 부인, [망명자]의 매킨타이어 부인과 쇼틀리 부인이 그렇다. 이들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남이 보는 내 모습을 더욱 중요시하고 사회적 관점이나 사회적 잣대로,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재단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고 공명정대한 이성에 근거한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들이다. 반대로 악으로 내몰리는 인물 군도 반드시 등장한다.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는 것이니까. 여기서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 가정하에 존재하는 나쁜 사람은, 사회적으로 이미 범죄자로 지목된 '미스핏'을 제외한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얼굴과 차림새를 갖추고 있다. 아무 짓도 안 했지만 그저 검은 얼굴의 검둥이 일 수도 있고, 표정을 알 수 없는 늙은이 일 수도 있으며, 살아온 삶을 예측할 수 없는 이방인 즉, 망명자이기도 하고, 무리 지어 다니는 위악적인 아이들이거나 성경을 팔러 다니는 세일즈맨이기도 하다. 표제작에서 이미 알아채야 했을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나와 내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 중에는 '좋은 사람은'없다,는 항변을 책 전체에서 확인해가는 과정이었다. 나와, 내 가족과 다르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잠재적 인식은 멀쩡한 사람도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조금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 버린다.

 

 

 

  『두 사람은 어떤 거대한 수수께끼를 마주한 듯한, 또는 두 사람 모두에게 패배를 안긴 누군가의 승전 기념물 앞에 선 듯한 얼굴로 흑인 인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들은 누군가 자비를 베풀기라도 한 듯 둘 사이의 불화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늘 바르게 살아온 헤드씨는 다른 사람의 자비를 구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넬슨을 보며, 자신이 아직도 현명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말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보는 아이의 눈빛은 그런 확신을 갈구하고 있었다. 넬슨의 눈은 그가 수수께끼 같은 존재의 신비를 확실히 설명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헤드씨는 무언가 고상한 말을 하려고 입술을 뗐고 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진짜 검둥이가 부족한 거야. 하는 수없이 검둥이 인형을 대신 갖다 놓은 거지."

  잠시 뒤 아이는 입 주변을 묘하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길을 잃기 전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요." 』[p202. 203]

 

 

   [검둥이 인형] 속의 한 대목이다. 조숙한 손자에게 번잡한 도시를 보여주는 헤드씨는 갑자기 닥친 어려움 앞에서 손자를 부인하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협곡만큼 깊어졌으나 길바닥에서 마주친 낡은 검둥이 인형 하나에 저렇듯 극적 자비를 이끌어 낸 것이다. 나는 저 인용 부분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고 생각되었다. 우리의 세계관은 인형 하나로 바뀔 수 있다. '검둥이 인형'의 상징성은 반세기 이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 주변에서 비일 비재한 여성을 향한, 장애인을 향한, 인종을 향한, 이방인을 향한 극단적 혐오와 차별의 논란은 저 때보다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세상의 누군가를 향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관용'이나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온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생각의 전환, 거기서부터 차별은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이래서 독서를 해야 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은 덤으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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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 창비시선 338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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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

​              박성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자두나무 정류장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나흘 폭설 

 

폭설이다

버스는 나흘째 오지 않고

자두나무 정류장에 나온 이는 자두나무뿐이다

 

산마을은 발 동동거릴 일 없이 느긋하다

 

간혹 빈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던 발길도

점방에 담배 사러 나가던 발길도

이장선거 끝난 마을회관에 신발 한 켤레씩을 보탠다

무를 쳐 넣고 끓이는 닭국 냄새 가득한 방에는

벌써 윷판이 벌어졌고 이른 낮술도 한자리 차고앉았다

 

허나, 절절 끓는 마을회관 방엔 먼 또래도 없어

잠깐 끼어보는 것조차 머쓱하고 어렵다 나는

젖은 털신을 탈탈 털어 신고 다시 빈집에 든다

 

아까 낸 눈길조차 금시 지워지는 마당,

동치미 국물을 마시다 쓸고 치직거리는

라디오를 물리게 듣다가 쓴다 이따금

눈보라가 몰려와 한바탕씩 거들고 간다

 

한시도 쉬지 않고 눈을 쓸어내던

싸리나무와 조릿대와 조무래기 뽕나무는

되레 눈썹머리까지 폭설을 당겨 덮고 누웠다

 

하얀 어둠도 눈 발 따라 푹푹 쌓이는 저녁

이번엔 내가 먼저, 긴긴 폭설 밤을 산마을에 가둔다

흰 무채처럼 쏟아지는 찬 외로움도 예외일 순 없다

 

 

 배꼽

​ ​

살구꽃 자리에는 살구꽃비

자두꽃 자리에는 자두꽃비

복사꽃 자리에는 복사꽃비

아그배꽃 자리에는 아그배꽃비 온다

분홍 하양 분홍 하양 하냥다짐 온다

살구꽃비는 살구배꼽

자두꽃비는 자두배꼽

복사꽃비는 복숭배꼽

아그배꽃비는 아기배꼽 달고 간다

아내랑 아기랑

배꼽마당에 나와 배꼽비 본다

꽃비 배꼽 본다​

​ ​

 

살구나무 변소

 

부안 감다리집 마당에는

살구나무 변소가 있는데요

 

볼일 보러 변소로 가면

살구나무가 치마 내리는 것을 훔쳐보다가는요

엉덩이 까고 후딱 앉으면요 후딱

시치미 떼고 서 있는 엉큼한 살구나무가

한눈에 들어오는 변소가 있는데요

안 쳐다본 척하다가는요

볼일 다 보고 치마 올리고 일어서는 순간에요

후딱 변소 안을 들여다보는 엉큼한 살구나무가 있는데요

 

네 칸 널판지 조각을 대어 변소 문짝을 만들었다가는요

뜬금없이 위쪽 한 칸을 떼어내고는

오살헐 살구나무 풍경을 덧대놓은 것이 문제는 문제이겠지만요

 

그보담은 오살헐 살구나무와 은근한 뭣을 즐기기라도 하듯

살구나무 변소를 찾는 사람도 문제는 문제인데요

 

그니깐, 죽으면 죽었지 살구나무 변소에는

얼씬도 못할 줄 알았던 서울내기 제 색시가요

구린내 나는 살구나무 변소를 갔다 오더니만요

살구나무 변소 참 좋다, 하는 것도 문제는 큰 문제이겠지요

 

알고 보면, 살구나무 변소는요

부안 감다리 사는 울 어머니 작품이기도 하지요

 

 

목젖

평소엔 그냥 목젖이었다가

내가 목놓아 울 때​

나에게 젖을 물려주는 젖

젖도 안 나오는 젖

같은 젖,

허나 쪽쪽 빨다보면

울음이 죄 삼켜지는 젖

무에 그리 슬프더냐, 나중에

나중에 내가

가장 깊고 긴 잠에 들어야 할 때

꼬옥 물고 자장자장 잠들라고

엄마가 진즉에 물려준 젖​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창비2011) 중에서

 

 

   그의 시는 바쁜 도시의 일상을 잠시 접어둔 채 무작정 찾아가 보고 싶은 내면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자본과 문명의 근대적 삶을 무조건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 해도,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맹목적인 변화의 속도를 조금은 늦추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는 '의미의 소통'보다는 '감각의 촉발'을 지향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활과 현실의 상처와 고통은 커져가는데, 시는 이러한 현실을 감싸 안는 공동체의 가치를 보여주기보다는 철저하게 개인화된 내면의 감각으로 점점 더 숨어들고 있다.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가장 감성적인 소통의 도구인 시조차 이제는 지식인의 산물로 변질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쩌면 박성우의 시는 조금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발상과 어법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과 문명의 속도를 따라잡기에 분주한 우리 시단의 과잉 언어에도 불구하고 생활과 현실을 중심에 놓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일관된 그의 시 세계는, 낡고 오래되었지만 오히려 가장 미래지향적인 역설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작 자기가/ 이 동네 마지막 일소인 줄도 모르고/ 황순이 앞세워 느릿느릿 비탈밭을 간다"라는 "늙다리 금수 양반"(「일소」)처럼 조금은 어리석고 무심해도 충분히 살아갈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박성우의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별말 없이"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 아마도 지금 시란 무엇인가 혹은 시는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러한 마음과 생각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해설 "별말 없이"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 문학평론가 하상일

 

 

 

시인의 말

어떤 금기처럼

내 방에 들이지 않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거울이다.

 

나를 온전히 비춰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쓴 시뿐이므로.

          2011년 11월

          박성우

 

   이 시집의 시들은 아름답다. 투명하고 정갈하기 짝이 없는 이 시들은 가녀린 듯하면서도 강인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들이 시인의 성품을 닮았다. 살짝 스치는 미풍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금선(琴線)의 울음처럼 여리면서도 강하다. 슬프고 쓸쓸해 보이지만, 결코 애상(哀傷)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이 시집에서 자주 익살을 부리는데, 너무 우습고, 너무 착하고 순수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남도 말맛을 사용한 그의 익살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걸직한 입담과는 전혀 다른 진경을 보여주는데, 구수하면서도 사뭇 고상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투명하고 정갈한 아름다움. 조용하게 던지는 그의 말들이 이러한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새로운 언어의 발견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현기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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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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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벌새

   김보라 쓰고 엮음 최은영, 남다은, 김원영, 정희진, 그리고 앨리스 벡델 [아르테(2019)]

 

 

 

   2020년 시월의 마지막 날 아주대 병원 침상에 누워있었다.

  옆 침대 환자와 보호자는 밤만 되면 부스럭거리고,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고, 급기야는 내 침대를 건드리는 통에 며칠째 옅은 잠은 통증으로 예민해진 신경을 더욱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위중 환자가 대부분인 병실은 무겁고 낮은 고통 속에 신음을 채우고 용도를 파악할 수 없는 장비들에서 나는 기계 소리는 불길하기도 했다. 모두 잠들어야 하는 밤, 멀리 도망간 의식을 붙잡고 침묵 속에 누운 맞은편 건너 환자의 위기 상태가 병실을 긴장으로 훑고 지나간 다음이다. 오늘 밤도 잠은 다 잤다. 병원에서 병을 더 얻을 지경이다.

  시트를 뒤집어쓰고 폰에 매달려서 '지구의 하루'를 보기 시작했다. 장엄한 태양과 함께 깨어나는 지구의 아침은 암울한 병실 상황을 잊어도 좋게 부산스럽고 신비했으며, 나름의 규칙으로 질서정연한 엄숙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때 오르내리며 꽃에 부리를 박고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벌새를 보았다. 영화'벌새'의 그 벌새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다른 동물들처럼 그저 심상하게 보았을 것이다. 버석거리는 신경증과 뻑뻑한 눈, 집요하게 파고드는 통증의 깊이는 화면을 보고 있어도 집중을 방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벌의 공격에도 생명이 위태롭고 빗방울의 무게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다 자라야 5센티 정도이고 1초에 90번까지 날갯짓을 할 수 있단다. 세상에, 일초에 90번을……. 거기다 끊임없이 꿀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벌새의 현란한 날갯짓이 아름답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 쪽으로 날아왔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녹록하지 않은 모양이다. 벌새를 본 것으로 통증은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이 벌새의 상징성이 영화가 의도한 것이구나, 깨달았다. 영화로 이미 만났지만 거기 담긴 중의적인 표현들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는 잔잔하고 담담하게 나를 이끌었지만 몰입되지는 않았다. 중학생 은희의 성장 영화였다. 화려한 수상 소식들과 독립 영화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기는 했는데 젊은 감독이 섬세하게 잘 만든 영화구나, 이상의 특별함은 남지 않았다.

  우선은 서울의 강남이라는 장소가 갖고 있는 상징성에 다른 것들을 놓쳤다. 평생을 변두리의 바깥에서 헐떡헐떡 살았던 경험들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특별시에서, 그것도 강남이라는 공간 자체가 예전에는 어떠했는지를 잊게 만드는 지금의 상징성이 다른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도 놀랍기는 했지만 나는 나대로 그 시절을 살아내느라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겨우겨우 책방을 꾸려가면서 결제 대금을 밀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던 탓에, 어떻게든 자식들에게 평범 이상의 조건을 제공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부부의 부지런함이 더 눈에 들어왔다. 가족을 위해 노동하는 아버지는 나와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 내가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세계의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으로만 인식되고는 한다. 경제적으로 무능해도 가장의 권위는 늘 펄펄 살아있어 무섭고 멀었던 가장들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갑자기 찾아온 오빠로 인해 남편의 눈치를 보던 엄마의 모습은 어쩐지 익숙했다. 은희에게 언어와 몸의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는 더더구나 익숙해서 놀랍기까지 했다.

  퇴원과 함께 책상에 쌓인 책 무더기에서 '벌새'의 대본집을 읽었다. 굳이 대본집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망설이는 마음은 한창 빠져있는 최은영의 글과, 애정 하는 정희진의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다. 대본집을 읽고 나니 <벌새>를 몇 번이고 되돌려본 느낌이 든다. 영지의 옆얼굴도 선명해지고 은희네 가족이 식탁에 있던 모습도 생생하다. 대본집은 책이 아니라 영화를 읽는 일이었다. 이미지를 읽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녀는 은희에게 그런 순간들과 맞서 싸우라고, 긍정적으로 살라고 함부로 충고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도 힘들고 우울한 순간이 있다고,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을 때가 있다고 고백할 뿐이다.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영지 선생님 또한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영지 선생님이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어서 은희의 상처를 볼 수 있었던 걸까. 그러나 나는 깊이 상처받은 사람만이 상처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은 신기한 존재여서 같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오히려 타인의 상처에 무감하고 더 잔인해질 수도 있는 법이니까.

  한국 사회에는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극복'하고 강해지는 서사를 환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상처는 언제나 사람에게 좋은가. 사람으로 살면서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있겠지만, 받지 않아도 될 상처는 최대한 받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나.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는 가해자에게 언제나 얼마간의 정당성을 주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정말 그런가.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사랑은 상처가 상처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을 상처 속에 매몰되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무감한 사람으로 변하도록 두지 않는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과하며 사랑받아 성장했다. 함부로 대우받아 성장한 것이 아니라. p213 [그때의 은희들에게 _최은영]중에서

 

 

   우리가 타자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순간 그 타자는 나의 일부와 연결될 것인데, 그에게서 언젠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의 모습을 미래의 나에게 투영한다. 그 미래가 도래하여 현재가 되면, 이제 우리는 과거의 나를 찾아간다. 기억 속의 바로 그 타자, '영지'의 모습으로 과거의 시간을 방문해 어린 나(은희)를 만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꿈에 복무해야 할지 우리 중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며 삶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이렇게 타인을 동해 미래의 자신을 형성하고, 과거의 자신을 돌보면서, 여러 사람의 존재를 품고 한 사람의 성인이 되어 갈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모두가 믿던 집합적 몽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가 보여 주듯 여전히 94년의 지배적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 앞에서 애도는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불안하고 우울하다. 집단의 꿈과 질서로부터 독립한 개인이면서, 타인을 쉽게 동정하지 않으며, 작고 약한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고, 절대로 부당한 것에는 맞서라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존재해야만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를 통해 미래의 우리를 꿈꾸고, 과거의 우리를 돌보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p235 [붕괴하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이별한다는 것 _ 김원영]중에서

 

 

   여성의 계급은 나이와 외모다. 나이 든 여성이나 장애 여성, 이주 여성이 겪는 세계는 젠더로 환원되지 않는다. 한국의 기혼 중년 여성은 무엇으로 사는가. 남편이 출세하고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완벽한 가정' 은 드물다. 아니, 무엇보다 그것은 남편과 자녀들 분인이 할 수 있는 일이지, 타인이 대신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엄마는 비난만 받을 뿐이다. 여성이 나이가 들면 전업주부든 여배우든 경력 단절 여성이든,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이들을 돕는 인프라가 전혀 없다.

  남성 중심 사회란, 공적 영역의 권력을 남성(남성 연대)이 독점하는 구조를 말한다. 이때 여성의 '가치'는 남성 네트워크의 접근 가능성 혹은 자원 있는 개별 남성과의 관계 여부에 의해 정해진다. 남편이든 아버지든 애인이든 권력 있는 남성의 무한 사랑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동화(신화)에서나 가능하다. 가부장제는 보호해야 할 여성, 그렇지 않은 여성, 그렇지 않아도 되는 여성을 구분하는 권력이다. 여성의 지위는 개인의 능력에 의해 정해지기보다는, 권력 있는 '아버지의 딸(박근혜)'일 때 결정적이다. '아버지의 딸, 공주'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기득권 중 최고의 지위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는 보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폭력과 노동이 따른다. 사회적, 심리적 안정을 성취한 여성들은 아버지가 조건 없는 사랑으로 딸을 응원하는 경우다.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매일매일 긴장하고 싸워야 한다. p245 [지금, 여기의 프리퀄 <벌새> _ 정희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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