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마이카상
김태정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닮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중에서
호마이카상과 트렁크 하나를 들고 방에서 방으로 전전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읽는 데, 결코 친애할 수 없었던 그 시절들이 생각난다. 집에서 올라올 때 옷가지 등을 담은 은색 트렁크를 가져왔다. 지금의 수하물용 캐리어보다 크고 바퀴도 없던 트렁크를 어떻게 끌고 다녔는지 기억이 없다. 비키니 옷장을 장만하기 전까지는 내 소유물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트렁크다. 그리고 맨 먼저 장만한 다리가 접히는 작은 호마이카상 한 개. 시인처럼 밥상도 되고 책상도 되어주었다. 손바닥만 한 트랜지스터라디오와 함께 호마이카상은 그 시절의 나를 지탱해 준 친구였다. 저 시를 처음 만났을 때, 김태정 시인이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의 다른 시들에서도 나는 동질감과 소속감으로 결속되었다. 시인의 지난한 생애와 살아온 시간들이 같다. 시인은 겸손하게 가난해서 맑은 이마를 가진 시인으로 남았고, 욕심의 곳간을 가진 나는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지금의 원룸이나 독립된 공간인 방 하나가 아닌 한 가족의 오롯한 공간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방들의 시절이다. 그것도 꽤 오래 전전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끼익 소리가 나는 현관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발뒤꿈치를 들고 거실을 통과하면 호마이카상과 트렁크, 이불한 채가 전부인 내 방에 비로소 들어설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차단 효과가 되는 나무 문이 나를 가려주기도 했지만 소위 식모방으로 불리던 주방 뒤쪽의 방일 때는 창호지 문의 미닫이 일 때가 많았다. 가족이 적은 집이거나 생활이 넉넉지 않은 가정은 방 한 칸을 포기하고 세입자를 들여 생활비를 충당하던 세입자나 주인이나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타인이 드나드는 불편함을 서로 감수해야 했으니 집주인이라고 마냥 당당하지만은 않았단 생각이 든다. 그 시절에는 미루어 짐작하지 못했던 상대방의 불편함도 이제서야 생각하게 된다. 집은 누구에게나 하루의 노곤함을 편안한 쉼으로 충전하는 공간이었으니. 그러나 자발적인 눈치 보기는 늦은 튀근 후 욕실을 사용하는 일은 최소한의 시간을 원했으며, 주방을 같이 사용하지 않으려면 끼니는 회사에서 먹는 한 끼나 두 끼가 전부였지만 휴일에는 이도 저도 불가능해서 종일토록 책을 읽거나 뒹굴뒹굴하다 집에 빈 기척을 살피며 삼양라면으로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도서관이나 공원조차도 흔하지 않던 시절, 아마 11개나 12개의 방을 거쳤으리라. 방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기억의 퇴적층을 이루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 단연 최고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그 동네일 것이다. 집장사가 지은 비슷한 집들이 가득한 신흥 주택가의 이층, 타원형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던 예쁜 창을 가진 집에서 삼 개월인가 살았다. 그것도 동생이랑 둘이서. 부부만 거주한다기에 단출함이 서로 부담 없을 줄 알았던 생각은 이사 하루를 넘기기 전에 깨지고 말았다. 이사 기념으로 저녁에 새집의 환한 방에서 대패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는데 소란스러운 소리는 우리를 단번에 주눅 들게 만들었다. 집에서 둘이 같이 살던 시절, 우리는 저녁마다 술을 먹고 들어오는 장남의 패악질에 무방비로 놓였던 주눅의 세월이 있었다. 울면서 매달리고 잘못했다고 비는 엄마 때문에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무기력과 고난, 홧증과 속수무책의 절망을 우리는 서로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잘못된 하루일 거라는 외면은 거기 사는 동안 날마다 이어지는 하루들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데려온 동생은 같은 직장에 입사했다. 둘 다 3교대 근무에다 다른 부서였기에 우리는 어쩌다 만났지만 만나도 말이 없는 하루들이 늘어만 갔다. 자매였지만 많이 다른 성향은 무언의 거리로 간극이 넓어졌고, 그 집 가까이 사는 부부의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현관문을 열어 제켰고 문이 열리는 횟수만큼 부부의 싸움도 점점 극을 향해 달려갔다. 세간들은 붕붕 날아다녔고 그런 순간은 우리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참아야 했고 최대한 방에 없는 것처럼 노력을 해야 했다. 결국 그 부부가 이혼을 결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깊은 부엌이 따로 있는 방을 구해 지옥을 벗어 날 수 있었다. 생의 구비에서 길지도 않을 시절을 지냈던 그 방, 지금도 가끔 얼굴 없는 그 부부가 소리만으로 싸우는 꿈을 꾼다. 그 꿈에는 어김없이 얼굴이 선명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부분에서 가위에 눌려 숨을 죽이는 내가 있고 햇살이 찬란하게 쏟어져 들어오는 타원형 창문이 있다. 그때 우리는 그 창에 반해서 그 방을 계약했었다. 그 뽀얀 햇살이 가여운 엄마를 공동묘지에 묻고 온 우리의 설움을 뽀송뽀송하게 말려 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 후론 단 한 번도 그때에 대해 우리 자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때 우리의 주식은 나온 지 얼마 안 된 통통한 너구리 라면이었는데, 문밖에 귀를 기울이고 조용한지 확인한 뒤 재빨리 끓여오던 너구리 라면과 호마이카상. 오늘 점심은 짜파구리로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