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정윤조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  정윤조옮김 [문학수첩(2014)]

 

 

   '전미도서상 수상', '오헨리단편소설상 수상', '미국예술학회 수상', ' 미국대학위원회SAT 추천도서'

  "고딕문학의 거장 플래너리 오코너 대표작 국내최초출간!"

 

 

  내게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는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가와 동일한 질문이 된다. 책 한 권은 한 사람의 생애와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하찮은 삶에도 (하찮은 삶은 누가 판단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접어두고라도) 기승전결의 희로애락이 있기에 누구도 함부로 타인의 생애를 예단하지 않아야 하며, 아무리 형편없는 글에도(마찬가지로 형편없다는 결정은 누가 내린 것인가의 의문은 접어두고) 그 글을 쓴 사람의 철학과 삶이 반영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읽는 동안 실망스럽더라도 칼을 들지는 않으려고 한다. 글 또한 음식과 같아서 기호에 따라 호불호가 다를 수 있고 각각의 스타일이 있기에 선택하는 자신의 책임도 일정 부분 기여한다. 자신이 쓴 글에 대한 평가의 말이나 글은 칼날과 같아서 받아들이는 상대는 돌이킬 수 없는 창상(創傷)을 입을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고 쓰는 이의 유, 무명을 떠나서 똑같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줄의 댓글도, 서평도 조심스럽다. 쉽게 튀어나간 말이나 잘난 척한 신랄한 한 줄이 상처로 남게 되지 않게 조심하는 편이다. 요즘처럼 독후감을 많이 쓴 적도 없는 데다 온라인상에 떠도는 타인의 소설 한 편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 때문에 갑자기 걱정이 들끓는다. 50년간의 계통 없는 독서가 남긴 기억들이 책 속의 문장을 내가 쓴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의심스럽다. 물론 작정하고 표절한 이들은 다른 문제다. 소설 표절이 드러나자 그 사람 자체가 표절은 아닌가 싶게 전방위적으로 많이도 해왔던 데. 그것이 가능한 제도적 한계의 헛점은 더 큰 문제다.( 한 줄짜리 검색으로도 드러났을 문제인데 이제 와서 허둥지둥하는 주최 측들은 무슨 염치가 있을까) 무엇보다 원작자의 고통이 가장 크겠다. 내가 아는 한정된 세계관이, 내가 가진 부족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용서하시라. 이 책 표지띠의 화려한 수식어들 덕분에 그런 생각이 깊어졌다. 수식어의 화려함에 쉽게 경도되어 이 책을 구입했을 것인데 문제의 표절 때문에 이렇게 시작한다.

 

 

 

  첫 번째 단편이자 표제작인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는 놀라운 흡입력으로 단숨에 읽게 했는데,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가고 등허리가 뻐근하다. 당연히 '플래너리 오코너'는 처음이다. ('오코너', 이 익숙한 느낌은 싱어송라이터 '시네이드 오코너' 덕이다. 박박민머리를 유지하면서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바로 그 '시네이드 오코너'만큼이나 '플래너리 오코너'와의 첫 만남도 강렬하다.) 모르는 작가이기에 역자의 말이 있나 찾아보니 없다. 날개에 붙은 작가에 대한 설명문을 읽고 '고딕문학'을 네이버에 검색해봤더니, 이 서늘함이 어디서 오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미국 조지아 주 출생의 여성 소설가.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문에서 자랐고, 아이오와 주립여자대학과 아이오와 대학에서 수학했다. 25세에 홍반성 낭창이라는 불치병에 걸려오랜 세월 투병 생활을 한끝에 1964년 3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장편소설 2편과 단편소설 32편, 여러 권의 평론집과 에세이를 남겼다.

  오코너는 미국 남부의 고딕문학 계열의 작가로 분류되며, 종교적 색채가 짙은 소설을 주로 썼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종교 이론에 정통했으며,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인간과 죄악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보였다. 형식적인 면으로는 치밀한 이야기 구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상징, 사실적인 묘사가 단연 돋보인다. 부조리한 상황이 초래하는 블랙 유머와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 설정, 인간 본성과 종교적 신념의 시험대 역할을 하는 폭력적인 상황은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만하다.

  작가의 단편 작품들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아서,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영문학과 커리큘럼에서 플래너리 오코너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50, 60년대에 출간된 두 권의 단편집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50년 이상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이다'라는 정희진의 말에 동의한다.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오코너의 가치관과 사상, 생활태도는 각각의 소설 속에서 여실하게 만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작가의 약력을 살펴보기 전에는 1950~60년대의 소설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젊은 우리 작가, 강화길의 '괜찮은 사람'에서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사고들이 관찰된다면 순전히 내 관점과 생각일 뿐이리라. 어쩌면 2014년의 번역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쉬움은 해설이나, 옮긴이의 말이 없는 것과 더불어 원제도 표기되지 않았다는 점은 원어에 관심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안타까웠다. 어떤 책들은 주석이 많이 달려서 읽는데 방해되기도 하지만 전혀 없는 것도 읽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각각의 열 편의 단편들은 연작인 것처럼 읽힌다. 장소도 주인공도 다른 데 연작처럼 읽히는 이유는 뭘까. 우선 뛰어난 가독성이 일관성을 유지하기에 쭈욱 단숨에 읽어버려서 일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패턴의 다양한 인물에 있다. 이름이나 호칭은 다르지만 거의 매 편 등장하는 수다스럽고(영화 속이면 어떤 차림새를 했을지 그려지는) 귀부인스러움을 유지하는 여인들이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의 할머니, [강]의 코닌 부인, [당신을 구하는 생명은]의 노파, [뜻밖의 재산]의 루비, [성령이 깃든 사도]의 어머니, [검둥이 인형]의 할아버지 헤드, [불속의 원] 코프 부인과 프리처드 부인, [적과의 뒤늦은 조우] 샐리 포커 새시, [선한 시골 사람들]의 호프웰 부인과 프리먼 부인, [망명자]의 매킨타이어 부인과 쇼틀리 부인이 그렇다. 이들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남이 보는 내 모습을 더욱 중요시하고 사회적 관점이나 사회적 잣대로,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재단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고 공명정대한 이성에 근거한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들이다. 반대로 악으로 내몰리는 인물 군도 반드시 등장한다.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는 것이니까. 여기서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 가정하에 존재하는 나쁜 사람은, 사회적으로 이미 범죄자로 지목된 '미스핏'을 제외한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얼굴과 차림새를 갖추고 있다. 아무 짓도 안 했지만 그저 검은 얼굴의 검둥이 일 수도 있고, 표정을 알 수 없는 늙은이 일 수도 있으며, 살아온 삶을 예측할 수 없는 이방인 즉, 망명자이기도 하고, 무리 지어 다니는 위악적인 아이들이거나 성경을 팔러 다니는 세일즈맨이기도 하다. 표제작에서 이미 알아채야 했을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나와 내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 중에는 '좋은 사람은'없다,는 항변을 책 전체에서 확인해가는 과정이었다. 나와, 내 가족과 다르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잠재적 인식은 멀쩡한 사람도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조금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 버린다.

 

 

 

  『두 사람은 어떤 거대한 수수께끼를 마주한 듯한, 또는 두 사람 모두에게 패배를 안긴 누군가의 승전 기념물 앞에 선 듯한 얼굴로 흑인 인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들은 누군가 자비를 베풀기라도 한 듯 둘 사이의 불화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늘 바르게 살아온 헤드씨는 다른 사람의 자비를 구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넬슨을 보며, 자신이 아직도 현명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말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보는 아이의 눈빛은 그런 확신을 갈구하고 있었다. 넬슨의 눈은 그가 수수께끼 같은 존재의 신비를 확실히 설명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헤드씨는 무언가 고상한 말을 하려고 입술을 뗐고 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진짜 검둥이가 부족한 거야. 하는 수없이 검둥이 인형을 대신 갖다 놓은 거지."

  잠시 뒤 아이는 입 주변을 묘하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길을 잃기 전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요." 』[p202. 203]

 

 

   [검둥이 인형] 속의 한 대목이다. 조숙한 손자에게 번잡한 도시를 보여주는 헤드씨는 갑자기 닥친 어려움 앞에서 손자를 부인하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협곡만큼 깊어졌으나 길바닥에서 마주친 낡은 검둥이 인형 하나에 저렇듯 극적 자비를 이끌어 낸 것이다. 나는 저 인용 부분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고 생각되었다. 우리의 세계관은 인형 하나로 바뀔 수 있다. '검둥이 인형'의 상징성은 반세기 이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 주변에서 비일 비재한 여성을 향한, 장애인을 향한, 인종을 향한, 이방인을 향한 극단적 혐오와 차별의 논란은 저 때보다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세상의 누군가를 향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관용'이나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온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생각의 전환, 거기서부터 차별은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이래서 독서를 해야 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은 덤으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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