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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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벌새

   김보라 쓰고 엮음 최은영, 남다은, 김원영, 정희진, 그리고 앨리스 벡델 [아르테(2019)]

 

 

 

   2020년 시월의 마지막 날 아주대 병원 침상에 누워있었다.

  옆 침대 환자와 보호자는 밤만 되면 부스럭거리고,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고, 급기야는 내 침대를 건드리는 통에 며칠째 옅은 잠은 통증으로 예민해진 신경을 더욱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위중 환자가 대부분인 병실은 무겁고 낮은 고통 속에 신음을 채우고 용도를 파악할 수 없는 장비들에서 나는 기계 소리는 불길하기도 했다. 모두 잠들어야 하는 밤, 멀리 도망간 의식을 붙잡고 침묵 속에 누운 맞은편 건너 환자의 위기 상태가 병실을 긴장으로 훑고 지나간 다음이다. 오늘 밤도 잠은 다 잤다. 병원에서 병을 더 얻을 지경이다.

  시트를 뒤집어쓰고 폰에 매달려서 '지구의 하루'를 보기 시작했다. 장엄한 태양과 함께 깨어나는 지구의 아침은 암울한 병실 상황을 잊어도 좋게 부산스럽고 신비했으며, 나름의 규칙으로 질서정연한 엄숙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때 오르내리며 꽃에 부리를 박고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벌새를 보았다. 영화'벌새'의 그 벌새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다른 동물들처럼 그저 심상하게 보았을 것이다. 버석거리는 신경증과 뻑뻑한 눈, 집요하게 파고드는 통증의 깊이는 화면을 보고 있어도 집중을 방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벌의 공격에도 생명이 위태롭고 빗방울의 무게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다 자라야 5센티 정도이고 1초에 90번까지 날갯짓을 할 수 있단다. 세상에, 일초에 90번을……. 거기다 끊임없이 꿀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벌새의 현란한 날갯짓이 아름답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 쪽으로 날아왔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녹록하지 않은 모양이다. 벌새를 본 것으로 통증은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이 벌새의 상징성이 영화가 의도한 것이구나, 깨달았다. 영화로 이미 만났지만 거기 담긴 중의적인 표현들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는 잔잔하고 담담하게 나를 이끌었지만 몰입되지는 않았다. 중학생 은희의 성장 영화였다. 화려한 수상 소식들과 독립 영화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기는 했는데 젊은 감독이 섬세하게 잘 만든 영화구나, 이상의 특별함은 남지 않았다.

  우선은 서울의 강남이라는 장소가 갖고 있는 상징성에 다른 것들을 놓쳤다. 평생을 변두리의 바깥에서 헐떡헐떡 살았던 경험들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특별시에서, 그것도 강남이라는 공간 자체가 예전에는 어떠했는지를 잊게 만드는 지금의 상징성이 다른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도 놀랍기는 했지만 나는 나대로 그 시절을 살아내느라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겨우겨우 책방을 꾸려가면서 결제 대금을 밀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던 탓에, 어떻게든 자식들에게 평범 이상의 조건을 제공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부부의 부지런함이 더 눈에 들어왔다. 가족을 위해 노동하는 아버지는 나와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 내가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세계의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으로만 인식되고는 한다. 경제적으로 무능해도 가장의 권위는 늘 펄펄 살아있어 무섭고 멀었던 가장들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갑자기 찾아온 오빠로 인해 남편의 눈치를 보던 엄마의 모습은 어쩐지 익숙했다. 은희에게 언어와 몸의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는 더더구나 익숙해서 놀랍기까지 했다.

  퇴원과 함께 책상에 쌓인 책 무더기에서 '벌새'의 대본집을 읽었다. 굳이 대본집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망설이는 마음은 한창 빠져있는 최은영의 글과, 애정 하는 정희진의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다. 대본집을 읽고 나니 <벌새>를 몇 번이고 되돌려본 느낌이 든다. 영지의 옆얼굴도 선명해지고 은희네 가족이 식탁에 있던 모습도 생생하다. 대본집은 책이 아니라 영화를 읽는 일이었다. 이미지를 읽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녀는 은희에게 그런 순간들과 맞서 싸우라고, 긍정적으로 살라고 함부로 충고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도 힘들고 우울한 순간이 있다고,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을 때가 있다고 고백할 뿐이다.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영지 선생님 또한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영지 선생님이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어서 은희의 상처를 볼 수 있었던 걸까. 그러나 나는 깊이 상처받은 사람만이 상처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은 신기한 존재여서 같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오히려 타인의 상처에 무감하고 더 잔인해질 수도 있는 법이니까.

  한국 사회에는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극복'하고 강해지는 서사를 환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상처는 언제나 사람에게 좋은가. 사람으로 살면서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있겠지만, 받지 않아도 될 상처는 최대한 받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나.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는 가해자에게 언제나 얼마간의 정당성을 주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정말 그런가.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사랑은 상처가 상처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을 상처 속에 매몰되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무감한 사람으로 변하도록 두지 않는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과하며 사랑받아 성장했다. 함부로 대우받아 성장한 것이 아니라. p213 [그때의 은희들에게 _최은영]중에서

 

 

   우리가 타자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순간 그 타자는 나의 일부와 연결될 것인데, 그에게서 언젠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의 모습을 미래의 나에게 투영한다. 그 미래가 도래하여 현재가 되면, 이제 우리는 과거의 나를 찾아간다. 기억 속의 바로 그 타자, '영지'의 모습으로 과거의 시간을 방문해 어린 나(은희)를 만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꿈에 복무해야 할지 우리 중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며 삶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이렇게 타인을 동해 미래의 자신을 형성하고, 과거의 자신을 돌보면서, 여러 사람의 존재를 품고 한 사람의 성인이 되어 갈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모두가 믿던 집합적 몽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가 보여 주듯 여전히 94년의 지배적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 앞에서 애도는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불안하고 우울하다. 집단의 꿈과 질서로부터 독립한 개인이면서, 타인을 쉽게 동정하지 않으며, 작고 약한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고, 절대로 부당한 것에는 맞서라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존재해야만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를 통해 미래의 우리를 꿈꾸고, 과거의 우리를 돌보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p235 [붕괴하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이별한다는 것 _ 김원영]중에서

 

 

   여성의 계급은 나이와 외모다. 나이 든 여성이나 장애 여성, 이주 여성이 겪는 세계는 젠더로 환원되지 않는다. 한국의 기혼 중년 여성은 무엇으로 사는가. 남편이 출세하고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완벽한 가정' 은 드물다. 아니, 무엇보다 그것은 남편과 자녀들 분인이 할 수 있는 일이지, 타인이 대신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엄마는 비난만 받을 뿐이다. 여성이 나이가 들면 전업주부든 여배우든 경력 단절 여성이든,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이들을 돕는 인프라가 전혀 없다.

  남성 중심 사회란, 공적 영역의 권력을 남성(남성 연대)이 독점하는 구조를 말한다. 이때 여성의 '가치'는 남성 네트워크의 접근 가능성 혹은 자원 있는 개별 남성과의 관계 여부에 의해 정해진다. 남편이든 아버지든 애인이든 권력 있는 남성의 무한 사랑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동화(신화)에서나 가능하다. 가부장제는 보호해야 할 여성, 그렇지 않은 여성, 그렇지 않아도 되는 여성을 구분하는 권력이다. 여성의 지위는 개인의 능력에 의해 정해지기보다는, 권력 있는 '아버지의 딸(박근혜)'일 때 결정적이다. '아버지의 딸, 공주'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기득권 중 최고의 지위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는 보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폭력과 노동이 따른다. 사회적, 심리적 안정을 성취한 여성들은 아버지가 조건 없는 사랑으로 딸을 응원하는 경우다.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매일매일 긴장하고 싸워야 한다. p245 [지금, 여기의 프리퀄 <벌새> _ 정희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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