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시선 44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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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

           안도현

  그리운 게

  없어서

  노루귀꽃은 앞니가

  시려

  바라는 게

  없어서

  나는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라

  내소사 뒷산에

  핑계도 없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는

  먼 물소리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12월이었다. 90년대 어느 때였으리라. 내변산 산행에서 비를 만났고 길을 헤매면서 쫄딱 젖은 웃기는 사진이 내소사 창살무늬와 함께 있다. 함께했던 직장의 산행 동료들과 시작부터 끝까지 웃어넘기던 겨울 같지 않던 겨울비가 내리던 그날의 풍경이 [우수]를 통해 내게로 온다. (훗~! 우수 지난 지가 언제인데, 시가 그렇다는 거지. 20대, 뭐를 해도 여럿이면 즐겁기만 했던 때이기도 했지. 날마다 다른 걱정에 허덕이기는 했어도.)

   변산은 여러 번 걸음 했는데, 당연 내소사도 사계절 풍경을 그린 듯한데 새로울 것 없는 그날이 갑자기 소환된 것은 내리시는 비 때문일 것이다. 몇 번이나 길을 바꿔서 만난 직소폭포의 어이없음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저게 폭포라고' 우리를 아우성치게 하고 즐겁게 한 어디에도 없는 폭포. 절벽과 팻말로만 폭포라고 짐작될 뿐, 물이 없던 폭포.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 그때의 실망이 컸는지 다시 가본 적이 없는 직소폭포. 이렇게 비가 세차게 내리고 나면 폭포 다운 폭포가 될까?

   아침 퇴근길 봄비치고는 제법 내린 탓에 바지가 홀딱 젖었다. 걸어서 출근을 포기하고 오늘의 일기를 쓴다.

   '노루귀'도 본지 오래되었다. '바라는 게/ 없어'도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나는 '이마에 손을 얹는/ 먼 물소리'를 오늘 긴 근무 중에 창밖을 자주 서성이며 들을 것 같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에도 짜락짜락 비 내리실까? 바짓가랑이를 적셔가며 그 길, 포행 나온 비구니처럼 사브작사브작 걷고 싶은 노동절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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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시선 44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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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척인다

                    안도현

   뒤척인다 부스럭거린다 구겨지고 있다

   펼쳐졌다가 돌아눕고 있다 떠돈다 가라앉아있다가

   풀어졌다가 뜨거워지고 있다 눅눅하다 흐르고 있다 깊어진다

   너 언제까지 이러고 살래, 엄마, 고시랑고시랑하더니

   운다 서늘하다 짜깁고 있다 수수하다 드러눕는다

   둘러싼다 쌓인다 다그치고 있다 스멀댄다 기어가고 있다

   들이마신다 타박거린다 망설인다 쿨럭거린다 쥐어박고

   있다 헐씨근거린다 올라탄다 몽그작몽그작하더니

   이 나쁜 년아, 애비 없는 자식이란 말 아니? 이 씨발 년아,

   미끌거린다 매슥매슥하다 뜨고 있다 추근거리는데

   콩당콩당한다 띄운다 뜬다 흘러들어든다 아롱거린다

   차오르고 있다 켜진다 따돌린다 떼쓰고 만지고

   다짐받고 투항하고 촐랑대는데 싸르륵거린다 내린다

   망해도 좋아, 날 좀 내버려둬, 작렬하고 있다 모여든다

   흩어진다 뿌린다 두드러진다 더듬거린다 쿨럭이다가

   다물어진다 수런댄다 미끌어지고 있다 갈망한다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안도현의 시집을 만났다. 시집을 펴면 차례를 읽고, 첫 번째 시를 읽고 시인의 말을 읽은 다음 맨 마지막 시를 읽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어디에 그러라는 법도 없는데 매번 새로운 시집을 만나면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딴에는 시집 전체와 제목과 어떤 시들이 묶여있나 보려는 심사일 터인데 그 과정은 매번 기대감으로 '콩당콩당'하다. 시집의 제목에서 '능소화'를 만났는데 마침 읽고 있는 박완서 선생의 [아주 오래된 농담]의 부분도 능소화로 기억되는 첫사랑(화자는 첫사랑이라고 이름하지는 않지만 독자는 그렇다고 우겨본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규중의 꽃이라는 능소화의 화들짝 피어서 '수런대'는 요염을 한 여름에 본 적이 있는 이라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공감이다. 두 이미지가 겹치고 있는데 마지막 시는 "식물도감"이라는 긴 시다. *로 연결된 따로여도 좋고 연결해도 좋은 식물들의 시어다. 좋았다. 그냥 좋았다. 우리들이 좋아해 마지않던, "스며드는 것"이후 무작정 좋구나 싶다. 거기에 실린 한 부분을 제목으로 차용해 왔다. 그러나 더욱 좋은 시는 어머니 "임홍교 여사 약전"이나 "고모"였다. 두 편의 시를 읽으며 이별을 준비하는 시인도 이제는 늙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잣말로 '고시랑고시랑'해봤다. 그렇게 치열하게 만들어 낸 우리 말의 리듬감을 가볍게 읽는다.

  동료가 묻는다. "능소화가 뭐예요?" 질문에 당황했다. 능소화를 모르는 환갑이 넘은 어른이라니. 시집의 표지 그림 '능소화 앞에 서서'를 보여주며 시집의 마지막 행을 읽어 주는 걸로 당황한 티를 숨기고 넘어갔다.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봄꽃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꽃으로 아우성을 친다. 누가 더 목소리가 큰지는 화려함으로 대체한다. "벚꽃 진다고 아쉬워하지 말자/ 벚꽃 지면 아까시꽃 피니 괜찮다" 그래, 괜. 찮. 타.

 능소화 필 때까지 한참을 함께 다닐 것 같다.  예전에 봄빛샘이 전해 준 능소화사진을 덧붙인다. 잘 계시는지 늘 궁금하지만 잘 계시리라 믿는다. "녹색 머플러 두르고 등교했구나/ 부안시장 가서 샀니?// 중학교 1학년/ 변산바람꽃" 변산바람꽃 이미지로 떠오르는 봄빛샘, 고마워요.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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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4-27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활련화(?)라고 기억하는.꽃과도 비슷해보이네요..능소화 어감도 독특하고 예뻐요

2021-05-01 16:41   좋아요 1 | URL
활련화는 아마도 한련화일 거예요. 식용이 가능해서 비빔밥의 데코레이션도 쓰이는 꽃인데, 능소화는 독성이 있어요. 꽃을 만진 손으로 눈을 비비면 눈이 먼다는 속설인지 전설인지 때문에 규중의 꽃이라 불린다는... 능소화는 관능적이고 아름다워요^^
 
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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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의 시간

           심보선

   책을 읽을 시간이야

   너는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조용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이혼은 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

   이혼보다 결혼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키스할 때

   서로의 혀를 접으려고 애쓴다

   무언가

   그 무언가를 표시하기 위해

   영원히

   키스하고 싶다

   이별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나는 천성 바깥에서 너와 함께 일생을 헤맬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

   떠나가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어디론가

   그 어디론가

          시집[오늘은 잘 모르겠어] 중에서

   출근 시간이 좀 늦었지 뭐야. 읽고 있던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얼마 남지 않았고 다 읽고 나면 어쩌나 싶어서 빼어든 시집이 심보선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 였어. 나란히 꽂힌 세 권의 시집 중 가장 최근 것으로 고른 셈이지. 그렇게 허겁지겁 출발했고 조금 늦어서 허둥대다가 보도블록 튀어나온 걸 못 보고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 뭐야. 작년 겨울에 사고 이후로 얼마나 다치는 걸 무서워하는데, 걸음걸음마다 조심하고는 해도 원체 잘 넘어지는 걸음걸이는 자주 위태위태해. 아무리 조심했어도 무르팍이 성하지 않는 걸 보면 몇 번 넘어지기도 했던 거지. 땅 한 뙈기도 갖지 못한 설움을 몸뚱이가 그렇게 표출하는 것인지, 수원에 이어 용인 땅도 내 것으로 삼으려고 그러는지 쿵~ 찜해두는 영역이 자꾸만 늘어나서 정말 걱정이야.(아, 아니다. 땅 한 뙈기도 갖지 못했다는 말은 수정되어야겠구나. 40년 가까운 낡은 아파트의 지분이 반 있는데, 비록 또 그중 반은 대출이기는 해도. 어쨌든 몇 평 정도는 내 몫의 땅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 수정~땅땅. 이렇게 해 놓으면 덜 넘어지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맨날 빨빨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잖아. 하루에 두 시간에서 네 시간씩 걸어다는 건 기본인 것 같은데. 언제였는지 본 기억이 있는데 인도의 공사가 제대로 마무리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사고를 당한 시민이 지자체를 상대로 소송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어.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느 쪽일까? 아닌 걸 아니라고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의 용기는 부럽고, 꼭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응원하지만 나는 혼자 끙끙대고 말겠지. 나란 사람이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지. 그러니까 그냥 조심하자 그렇게 티셔츠가 조금 젖을 만큼의 땀이 찬 상태로 늦지 않게 출근을 했고 예상대로 『그 남자네 집』은 다 읽고 말았어. 단편으로 실린 적이 있는 글을 장편으로 이어서 쓴 글이어서 읽을 분량이 줄어든 이유도 있었지만 술술 잘 읽히는 책이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분명 다 아는 내용이고 읽었던 책인데도 처음인 것 같아. 기억이 날아가서 그런 걸 테지만 꼭 그럴까? 오래된 글인데 신선한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 다시 읽고 있는 선생님이 책이 현재까지는 다 그래. 다음에 읽을 건 『아주 오래된 농담』인데 이 책도 그럴까? 역시 신선하게 잘 읽힐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어. 가지고 있는 선생님 책들을 다 읽으면 나머지는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을 생각이야. '책을 줄여야겠다'라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려고는 하는데 지킬 수 있을지는 정말 모르겠어.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시집치고는 꽤 두꺼워. 전체적으로 시들도 긴 편이어서 호흡이 힘들어지고 어려운 느낌이 마구마구 들어. 그나마 [독서의 시간]은 짧은 편에 속하고 마침, 독서의 시간을 마쳤잖아.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그 남자의 집]은 결국은 이별 이야기야. 그 남자의 집과, 그 남자와, 그 시절과 이별하는 이야기.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처럼 죽음에 골똘한 적이 있을까 싶어. '모든 이별은 결국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사실을 수행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거라는 현재를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는 거지. [독서의 시간]이 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쏙쏙 들어오지 뭐야.

   그 남자는 시를 좋아할 뿐 아니라 외우고 있는 시가 많았다. 가로등 없는 골목길을 오 리를 십 리, 이십 리로 늘여서 걸으면서, 또는 삼선교의 포장마차집의 새파랗고도 어둑시근한 카바이트 불빛이 무대조명처럼 절묘하게 투영된 자리에서, 그는 나직하고도 그윽하게 정지용, 한하운의 시를 암송하곤 했다. 그 남자는 그 밖에도 많은 시인들의 시를 외우고 있었지만 내가 누구의 시라는 걸 알고 들은 건 그 두 시인의 시가 고작이었다. 포장마찻집에서는 딴 손님이 없을 때에만 그런 객쩍은 짓을 했기 때문에 주인 남자도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다 듣고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한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나에겐 그 소리가 박수보다 더 적절한 찬사로 들렸다.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그 남자의 집 p44]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이 한 줄의 문장으로도 [그 남자의 집]을 다시 읽는 [독서의 시간]은 충분했어. 꼭 그런 시절은 아니지만 가끔 나의 사치에도 '시'가 있으니까. 예를 들자면 지금 같은 때가 그렇고, 어쩌다 타게 되는 아침 버스 안에서, 어쩌다 앉게 되어 읽는 '시 한 편'이 그렇고.

   오늘은 잘 모르겠어. 책이 나를 "어디론가/그 어디론가" 끌고 갈지는. 그래도 책이 있어, 시가 있어, 일이 있어서 나의 하루하루는 완성되어간다는 믿음이 있어. 넌, 어때? 너는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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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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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박소란

 

 

   우리는 자주 다툰다

   너는 고집이 세고 언제나 나를 이긴다

 

   한 사람을 향해 갈 때

 

   한 사람으로부터 힘겹게 돌아서 올 때

   느닷없이 너는

   한 사람을 부른다 더없이 긴한 몸짓으로

   불러 세운 뒤 그 팔을 목을 끌어다 잡는다

 

   나는 당황스럽다

   너의 상스러운 행동이 지나치게 진지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한 사람은 놀란다

   마음을 호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재빨리 달아난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는 붙든다

   버림받은 자 특유의 파리한 몸뚱이를 다섯개의 가느다란 리본으로 얼기설기 포장한

   너를

 

   누군인가

   누구의 슬픈 애인인가

 

   나는 껴안은다 껴안고야 만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면 그만 한 줌 꿈으로 부서져버릴 것 같은

   너를

 

   나는 왜 고작 손인가 우두커니 생각에 잠긴

   너를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중에서

 

 

 

   왼쪽 엄지손가락을 살짝 베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상처 부위에서 피가 나오길래 밴드를 붙이고, 그 위에 반창고까지 붙였다. 고작 손가락의 작은 상처도 이렇게 확실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내친김에 손톱을 깎고 핸드로션을 발랐다. 손가락이 휘어지고 튀어나온 관절들이 이제는 쉽게 눈에 띈다.

  누군가를 만나면 손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상대방의 손짓이나 손 모양, 손을 쓰는 방식, 손가락 길이, 손톱 상태 등. 손은 그저 손일뿐인데도 참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이야기를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신체의 일부분인 손 하나로 그 사람의 전부를 다 알 순 없지만 손으로 그 사람을 파악하려는 은밀하고 나쁜 짓거리가 고쳐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재주가 있는 손인지, 고생을 많이 한 손인지, 손을 정성스레 가꾸는 사람인지 혼자 유추해보고는 한다.

   "나는 왜 고작 손인가 우두커니 생각에 잠긴" 손을 떠올렸다. 손가락이 길고 가늘고 얇은 손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은 어쩐지 악기도 잘 다루고 그림도 잘 그릴 것만 같아서다. 내게 부족한 예술가적 기질이 짧은 손가락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긴 손가락의 소유자는 다재다능할 것이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내 손은 짧고 뭉툭한 손이다. 울 엄마의 손도 그랬고 살아있던 세월보다 이제는 떠난 세월이 길어버린 귀안 오빠의 손이 그랬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던 거칠고 따뜻하고 뭉툭하던 두 사람의 손이 생각난다. 오늘은 벌써 34년 전 서른에 세상을 떠난 버린 귀안 오빠의 기일이다.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것을, 사라져가는 흔적을 나라도 기억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한번도 이생에서 평안하지 못했던 오빠는 그곳에서는 평안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생전에도 평생을 속깨나 썩이던 자식이 너무도 일찍 당신을 만나러 왔을 때 엄마가 어떻게 했을지 알 것만 같다. 등짝을 후려치면서 어쩌자고 벌써 왔냐고 대성통곡을 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발을 동동 구르며 또 한 번 등짝을 후려치면 단춧구멍 보다 작은 눈의 오빠는 잘못했다고 눙치며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다. 그것도 벌써 34년 전이네. 두 사람은 그쪽에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여전히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사람 안 변한다. 그래도 두 분, 평안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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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련을 만나던 날부터 생각이 날 듯, 날 듯했다. 목련에 대해 연정을 품게 만든 구절을 만난 적이 있는데 뭐였지? 뭐였지? 그렇게 박완서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 마침 묵혀두고 있는 기나긴 하루도 있겠다. 그래, 이 아픈 사월, 박완서 선생님과 함께하자고 마음먹었다. 당신이 떠난 지 십 년, 멀리 두고 있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기나긴 하루,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친절한 복희씨까지 읽었다. 분명 다 읽은 책들을 다시 읽는 것인데, 처음 읽는 새로움을 만난다. 특히 친절한 복희씨속 작품들은 완전히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고 놀라웠다. 어떻게 10년을 멀리하고 있었던 건지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다.

   그리고 오늘 4월 16일. 벌써 7주기다.

   여전히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퇴근길에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선생님, 이 꼴은 안 보셔서 다행이라고. 그날 아침 뒤집힌 배를 보셨더라면 '천 불은 불도 아니라는'라는 것을, 다시 전쟁을 겪은 것처럼 참혹하셨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우리 세 몸뚱이 추위를 가리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온전한 마을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국도 연변 마을의 파괴상은 참담했다. 꽤 큰 마을이 장독만 남겨 놓고 잿더미만 남은 데도 있었다. 초가집이 불타, 가볍고 고운 잿더미로 폭삭 내려앉은 집터를 지키고 있는 장독대의 아름다움은 너무 천연덕스럽고 기품이 있어서 혼령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마을의 고요는 묘지의 그것처럼 유구해 보였다. 평화로운 농촌을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한 게 미군의 폭격이든 인민군의 방화이든 잊거나 용서한다면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평화의 이름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이런 정당한 분노가 바로 인간다움일진대 어찌 이 땅의 평화를 바라겠는가 싶은 것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기저귀를 구들장에 말리는 것보다는 밖에다 내 너는 게 훨씬 더 잘 마르게 생긴 햇살이 도타운 날이었다. 모조리 불탄 마을에서 좀 떨어진 외딴 집에서 무료한 낮 시간을 보내다가 그 마을에 감도는 고요에 홀려서 그 고운 잿더미 사이를 거닐 때였다. 장독대 옆에 서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으면서도 본 듯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를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p98,99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해 5월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무 꽃이나 피어나는 시대가 아니었다. 오직 5월만이 잎도 꽃처럼 피어날 때였고,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계절이었다. 교정에 꽃내음이 그득했고, 벌들이 윙윙댔다. p258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50년 5월이다. 다가올 불행을 알고 읽는 화사함은 전혀 화사하지 않다. 아니,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화사함이 불행을 더욱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지금은 오월이 되기도 전에 라일락이 지는 고온의 시절에 살고 있지만, 1950년 5월은 6월의 무게에 눌려 없는 시절인 줄 알았다. 2014년 4월 이후 도 없는 시절이다. 수돗가에 앉아서 재재거리며 상추를 씻다가 그 소식을 들었던 날로부터 7년,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가족들은 어떨지 나로선 상상조차 안 된다.

   해가 더디 지는 봄날이었다. 밤 벚꽃 놀이는 중단된 채였지만, 전차가 창경원 앞을 지날 때는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정도로 무르익은 화사함이 고궁 담을 넘쳐 전차 속까지 투영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나도 석간신문을 보다 말고,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비틀어 미친 듯이 만개한 벚꽃을 내다보았다. 왜 만개한 꽃만 보면 미쳤단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밤도 아닌 낮도 아닌 시간의 벚꽃이 풍기는 밝음은 화사하다기보다는 숨을 틀어막을 듯이 요기로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p318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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