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시선 44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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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

           안도현

  그리운 게

  없어서

  노루귀꽃은 앞니가

  시려

  바라는 게

  없어서

  나는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라

  내소사 뒷산에

  핑계도 없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는

  먼 물소리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12월이었다. 90년대 어느 때였으리라. 내변산 산행에서 비를 만났고 길을 헤매면서 쫄딱 젖은 웃기는 사진이 내소사 창살무늬와 함께 있다. 함께했던 직장의 산행 동료들과 시작부터 끝까지 웃어넘기던 겨울 같지 않던 겨울비가 내리던 그날의 풍경이 [우수]를 통해 내게로 온다. (훗~! 우수 지난 지가 언제인데, 시가 그렇다는 거지. 20대, 뭐를 해도 여럿이면 즐겁기만 했던 때이기도 했지. 날마다 다른 걱정에 허덕이기는 했어도.)

   변산은 여러 번 걸음 했는데, 당연 내소사도 사계절 풍경을 그린 듯한데 새로울 것 없는 그날이 갑자기 소환된 것은 내리시는 비 때문일 것이다. 몇 번이나 길을 바꿔서 만난 직소폭포의 어이없음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저게 폭포라고' 우리를 아우성치게 하고 즐겁게 한 어디에도 없는 폭포. 절벽과 팻말로만 폭포라고 짐작될 뿐, 물이 없던 폭포.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 그때의 실망이 컸는지 다시 가본 적이 없는 직소폭포. 이렇게 비가 세차게 내리고 나면 폭포 다운 폭포가 될까?

   아침 퇴근길 봄비치고는 제법 내린 탓에 바지가 홀딱 젖었다. 걸어서 출근을 포기하고 오늘의 일기를 쓴다.

   '노루귀'도 본지 오래되었다. '바라는 게/ 없어'도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나는 '이마에 손을 얹는/ 먼 물소리'를 오늘 긴 근무 중에 창밖을 자주 서성이며 들을 것 같다. 내소사 전나무 숲길에도 짜락짜락 비 내리실까? 바짓가랑이를 적셔가며 그 길, 포행 나온 비구니처럼 사브작사브작 걷고 싶은 노동절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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