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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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의 시간

           심보선

   책을 읽을 시간이야

   너는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조용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이혼은 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

   이혼보다 결혼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키스할 때

   서로의 혀를 접으려고 애쓴다

   무언가

   그 무언가를 표시하기 위해

   영원히

   키스하고 싶다

   이별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나는 천성 바깥에서 너와 함께 일생을 헤맬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

   떠나가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어디론가

   그 어디론가

          시집[오늘은 잘 모르겠어] 중에서

   출근 시간이 좀 늦었지 뭐야. 읽고 있던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은 얼마 남지 않았고 다 읽고 나면 어쩌나 싶어서 빼어든 시집이 심보선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 였어. 나란히 꽂힌 세 권의 시집 중 가장 최근 것으로 고른 셈이지. 그렇게 허겁지겁 출발했고 조금 늦어서 허둥대다가 보도블록 튀어나온 걸 못 보고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 뭐야. 작년 겨울에 사고 이후로 얼마나 다치는 걸 무서워하는데, 걸음걸음마다 조심하고는 해도 원체 잘 넘어지는 걸음걸이는 자주 위태위태해. 아무리 조심했어도 무르팍이 성하지 않는 걸 보면 몇 번 넘어지기도 했던 거지. 땅 한 뙈기도 갖지 못한 설움을 몸뚱이가 그렇게 표출하는 것인지, 수원에 이어 용인 땅도 내 것으로 삼으려고 그러는지 쿵~ 찜해두는 영역이 자꾸만 늘어나서 정말 걱정이야.(아, 아니다. 땅 한 뙈기도 갖지 못했다는 말은 수정되어야겠구나. 40년 가까운 낡은 아파트의 지분이 반 있는데, 비록 또 그중 반은 대출이기는 해도. 어쨌든 몇 평 정도는 내 몫의 땅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 수정~땅땅. 이렇게 해 놓으면 덜 넘어지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맨날 빨빨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잖아. 하루에 두 시간에서 네 시간씩 걸어다는 건 기본인 것 같은데. 언제였는지 본 기억이 있는데 인도의 공사가 제대로 마무리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사고를 당한 시민이 지자체를 상대로 소송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어.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느 쪽일까? 아닌 걸 아니라고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의 용기는 부럽고, 꼭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응원하지만 나는 혼자 끙끙대고 말겠지. 나란 사람이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지. 그러니까 그냥 조심하자 그렇게 티셔츠가 조금 젖을 만큼의 땀이 찬 상태로 늦지 않게 출근을 했고 예상대로 『그 남자네 집』은 다 읽고 말았어. 단편으로 실린 적이 있는 글을 장편으로 이어서 쓴 글이어서 읽을 분량이 줄어든 이유도 있었지만 술술 잘 읽히는 책이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분명 다 아는 내용이고 읽었던 책인데도 처음인 것 같아. 기억이 날아가서 그런 걸 테지만 꼭 그럴까? 오래된 글인데 신선한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 다시 읽고 있는 선생님이 책이 현재까지는 다 그래. 다음에 읽을 건 『아주 오래된 농담』인데 이 책도 그럴까? 역시 신선하게 잘 읽힐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어. 가지고 있는 선생님 책들을 다 읽으면 나머지는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을 생각이야. '책을 줄여야겠다'라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려고는 하는데 지킬 수 있을지는 정말 모르겠어.

   『오늘은 잘 모르겠어』는 시집치고는 꽤 두꺼워. 전체적으로 시들도 긴 편이어서 호흡이 힘들어지고 어려운 느낌이 마구마구 들어. 그나마 [독서의 시간]은 짧은 편에 속하고 마침, 독서의 시간을 마쳤잖아.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그 남자의 집]은 결국은 이별 이야기야. 그 남자의 집과, 그 남자와, 그 시절과 이별하는 이야기.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처럼 죽음에 골똘한 적이 있을까 싶어. '모든 이별은 결국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사실을 수행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거라는 현재를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는 거지. [독서의 시간]이 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쏙쏙 들어오지 뭐야.

   그 남자는 시를 좋아할 뿐 아니라 외우고 있는 시가 많았다. 가로등 없는 골목길을 오 리를 십 리, 이십 리로 늘여서 걸으면서, 또는 삼선교의 포장마차집의 새파랗고도 어둑시근한 카바이트 불빛이 무대조명처럼 절묘하게 투영된 자리에서, 그는 나직하고도 그윽하게 정지용, 한하운의 시를 암송하곤 했다. 그 남자는 그 밖에도 많은 시인들의 시를 외우고 있었지만 내가 누구의 시라는 걸 알고 들은 건 그 두 시인의 시가 고작이었다. 포장마찻집에서는 딴 손님이 없을 때에만 그런 객쩍은 짓을 했기 때문에 주인 남자도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다 듣고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한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나에겐 그 소리가 박수보다 더 적절한 찬사로 들렸다.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그 남자의 집 p44]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이 한 줄의 문장으로도 [그 남자의 집]을 다시 읽는 [독서의 시간]은 충분했어. 꼭 그런 시절은 아니지만 가끔 나의 사치에도 '시'가 있으니까. 예를 들자면 지금 같은 때가 그렇고, 어쩌다 타게 되는 아침 버스 안에서, 어쩌다 앉게 되어 읽는 '시 한 편'이 그렇고.

   오늘은 잘 모르겠어. 책이 나를 "어디론가/그 어디론가" 끌고 갈지는. 그래도 책이 있어, 시가 있어, 일이 있어서 나의 하루하루는 완성되어간다는 믿음이 있어. 넌, 어때? 너는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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