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을 만나던 날부터 생각이 날 듯, 날 듯했다. 목련에 대해 연정을 품게 만든 구절을 만난 적이 있는데 뭐였지? 뭐였지? 그렇게 박완서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 마침 묵혀두고 있는 기나긴 하루도 있겠다. 그래, 이 아픈 사월, 박완서 선생님과 함께하자고 마음먹었다. 당신이 떠난 지 십 년, 멀리 두고 있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기나긴 하루,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친절한 복희씨까지 읽었다. 분명 다 읽은 책들을 다시 읽는 것인데, 처음 읽는 새로움을 만난다. 특히 친절한 복희씨속 작품들은 완전히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고 놀라웠다. 어떻게 10년을 멀리하고 있었던 건지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다.

   그리고 오늘 4월 16일. 벌써 7주기다.

   여전히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퇴근길에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선생님, 이 꼴은 안 보셔서 다행이라고. 그날 아침 뒤집힌 배를 보셨더라면 '천 불은 불도 아니라는'라는 것을, 다시 전쟁을 겪은 것처럼 참혹하셨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우리 세 몸뚱이 추위를 가리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온전한 마을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국도 연변 마을의 파괴상은 참담했다. 꽤 큰 마을이 장독만 남겨 놓고 잿더미만 남은 데도 있었다. 초가집이 불타, 가볍고 고운 잿더미로 폭삭 내려앉은 집터를 지키고 있는 장독대의 아름다움은 너무 천연덕스럽고 기품이 있어서 혼령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마을의 고요는 묘지의 그것처럼 유구해 보였다. 평화로운 농촌을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한 게 미군의 폭격이든 인민군의 방화이든 잊거나 용서한다면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평화의 이름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이런 정당한 분노가 바로 인간다움일진대 어찌 이 땅의 평화를 바라겠는가 싶은 것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기저귀를 구들장에 말리는 것보다는 밖에다 내 너는 게 훨씬 더 잘 마르게 생긴 햇살이 도타운 날이었다. 모조리 불탄 마을에서 좀 떨어진 외딴 집에서 무료한 낮 시간을 보내다가 그 마을에 감도는 고요에 홀려서 그 고운 잿더미 사이를 거닐 때였다. 장독대 옆에 서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으면서도 본 듯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를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p98,99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해 5월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때는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아무 꽃이나 피어나는 시대가 아니었다. 오직 5월만이 잎도 꽃처럼 피어날 때였고,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계절이었다. 교정에 꽃내음이 그득했고, 벌들이 윙윙댔다. p258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50년 5월이다. 다가올 불행을 알고 읽는 화사함은 전혀 화사하지 않다. 아니, 라일락과 모란과 장미와 등꽃의 화사함이 불행을 더욱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지금은 오월이 되기도 전에 라일락이 지는 고온의 시절에 살고 있지만, 1950년 5월은 6월의 무게에 눌려 없는 시절인 줄 알았다. 2014년 4월 이후 도 없는 시절이다. 수돗가에 앉아서 재재거리며 상추를 씻다가 그 소식을 들었던 날로부터 7년,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가족들은 어떨지 나로선 상상조차 안 된다.

   해가 더디 지는 봄날이었다. 밤 벚꽃 놀이는 중단된 채였지만, 전차가 창경원 앞을 지날 때는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릴 정도로 무르익은 화사함이 고궁 담을 넘쳐 전차 속까지 투영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나도 석간신문을 보다 말고,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비틀어 미친 듯이 만개한 벚꽃을 내다보았다. 왜 만개한 꽃만 보면 미쳤단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밤도 아닌 낮도 아닌 시간의 벚꽃이 풍기는 밝음은 화사하다기보다는 숨을 틀어막을 듯이 요기로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p318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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