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의 고독 -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
토르비에른 에켈룬 지음, 김병순 옮김 / 싱긋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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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는 [두 발의 고독]의 부제다. 노르웨이의 저널리스트 토르비에른 에켈룬이 쓴 책이다. 뇌전증 진단을 받은 저자가 면허증을 반납한 후 걷기를 시작하면서 만나는 거리 풍경과 사유를 그리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걸음은 과거의 길, 어릴 때의 숲속 오두막 길을 기억하고 그 시절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시간과 자연을 걷는' 글이다.

   "걷기"를 좋아하고 '길'을 좋아하는 나에게 꼭 맞는 책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책들에 매번 혹한다.) 무엇보다 '뇌전증으로 면허를 반납한 저자'부분에서 끌렸다. 우리나라에서라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뇌전증'이라는 병이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병도 아니고 그 병으로 인해 운전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는 사례도 들어본 적 없다. (물론 내가 들어 본 적 없는 거겠지만.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우리도 이제는 초고령자가 운전하는 것에 대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 그래서 더욱 끌렸다. 결론은 역시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길에 관한 사유로 빛나는 책이었던 것이다. 건강했던 자신에게 들이닥친 병마와의 투쟁이나 좌절로 징징거릴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염려가 있었으나 깔끔하게도 그런 문장은 한 줄도 없었다.

   일 년 전에 사고가 있었다. 정확히는 2020년 10월 25일이다. 여느 때처럼 '바람이'를 타고 출근하는 중이었다. 광교산의 아침 바람은 매일매일 새롭게 황홀했다. 그날은 안개를 약간 머금은 가을 아침치고는 눅지고 차운 바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갑자기 우측에서 튀어나온 파란색 차를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텅~ 이었다. 119차량이 올 때까지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에 큰 소리로 비명을 내지르며 심호흡을 했다. 통증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나 (지나고 보니 엄살이 과했나 싶기도 하고 차량 운전자는 얼마나 놀래고 쫄았을까 싶기도 했다.) 다행히 갈비뼈 두 개의 골절과 염좌, 오른쪽 엄지손가락의 미세한 골절 등의 부상으로 그쳤지만 바람이는 폐차해야 했다. 십 년 동안 시내 곳곳을 함께 다니고, 종류별 바람을 느끼게 해준 나의 도반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내내 뚜벅이다. 한 시간이 못 미치는 길들은 거의 걸어서 다닌다.

   늘 걷는 자였지만 '바람이' 없는 일 년은 온전하게 걷는 사람이다. '걷는 사람'이 된 지금도 처음 도보 여행을 시작했을 때의 길에 관한 생각과 같다. 우리의 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 없다. '탈 것들'를 위한 길만 존재한다.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걸을 길이 없거나 차도 변 좁은 틈 사이로 걸을라치면 25톤 화물차가 경적과 바람으로 겁을 주며 쏜살같이 지나간다. 도심의 인도는 또 어떤가. 차가 점령해있거나 가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나, 보도블록들은 복병처럼 튀어 올라있거나 길은 기울어져 있어 발에 있는 힘을 다 주며 걸어야 한다. 횡단보도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푸른 신호에도 달리는 차들에 건너기가 쭈뼛하고 신호는 어찌나 짧은지 자동적으로 걸음이 빨라진다. 걷는 일이 가장 안전해야 하는데 생각에 빠지거나 방심하고 걷다 보면 위험해진다. 사람을 위한 길은 여전히 없다.

   지금처럼 걷는 길이 상품화된 적도 없을 것이다. 제주 올레의 성공을 지켜본 전국의 지자체에 길 만들기 열풍이 불어닥쳤다. 올레 마니아인 나로선 환호했다. 그러나 몇 개의 길들을 따라가 보고는 바로 실망했다. 과연 그 길을 기획하고 만든 사람이 자주 그 길을 걸어보았을까 싶은 것이다. 도심 사이에서 팻말을 놓치는 것은 기본이고,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 싶은 도로변을 무한정 걷게 되는 경우도 있고, 마치고 나면 뭐 하러 이 길을 끝까지 걸었는지 의미도 몰라서 허무해지는 길들도 많다. 그래도 혹시 하는 기대감을 안고 **길들을 따라 걷는다. 일단은 길에 부여된 이름들이 그 길을 정의하게 만들고 걷는 사람이 있어야만 그 길은 걷기에 최적화된 길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제주 올레의 성공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많아서다. 나는 수원을 좋아한다. 여기서 보낸 시간이 40년이 지났다. 수원의 구석구석을 걸어 다녔다. 그 길들에 걷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내게 걷는 일은 하루의 완성이고 하루의 마감이다. 걷는 동안, 하루 동안 내가 했던 일들을 생각하고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길'은 내게 '쉼'이면서 '일기 쓰기'이고 '사유'의 장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걸으면서 어릴 적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강을 따라 걷던 둑길에서 보낸 그 시간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저자와 같은 사유는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어릴 적의 둑길은 나를 세상으로 이끈 힘이 되어주었다. 그때의 둑길과 같은 광교저수지 둑길에 서면 가슴이 펴진다. 심호흡 몇 번으로 하루 동안 가득 차 있던 세상을 향한 불합리와 이산화탄소들이 산소로 전환된다. 비로소 숨쉬기가 편안해진다. 이 단순한 동작이 가능한 곳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둑에 설 때마다 매번 새롭게 느낀다.

   길은 스스로 생겨났다. 길은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기 위한 산책로나 전시 공간으로 설계된 경치 좋은 통로가 아니었다. 길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길이 만들어질 때 예비 보고서 나 타당성조사도 없었고 길의 등급을 정하거나 포장하기 위한 사전심사도 없었다.

길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길은 자연적으로 생겨나고 분해되며 자연환경에 순응하고 그것이 통과하는 바로 그 자연계의 일부다. 길은 일시적이다. 그것의 용도와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다. 길은 누군가가 그 길을 다니기 때문에 거기에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길을 다닌다. 따라서 길이 그대로 남아 있으려면 누군가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길은 전설과 신화, 민요, 동화와 비슷하다. 그것들은 모두 집단 창작을 통해 생겨나기 때문에 어느 특정 작가를 원작자로 지명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몸과 영혼이 일체다.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이다. 길은 단순한 통로 이상을 의미한다.

   길은 일직선의 반대다. 길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반면에, 일직선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이론적 구성체다. 일직선은 구체적인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물의 표면조차 일직선으로 평평하지 않다. 태양에서 발사되는 광선도 마찬가지다.

길은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자연에 끼어든다. 길은 자연계 영역의 일부로서 거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길은 언제나 작다. 우리가 그것을 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만일 길이 확장되어 더 커지면, 그것은 길이 아닌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 된다. p45,46

 

   이 같은 도보여행길들은 세계 곳곳에 다 있다. 거기서는 온갖 형태의 지형들이 서로 교차하고 길마다 구간 거리와 난이도도 가지각색이다. 일본의 시코쿠 오헨로 사찰 순례길, 페루의 마추픽추까지 가는 잉카 트레일, 태즈메이니아 섬의 오버랜드 트랙,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에 걸친 투르 뒤 몽블랑, 칠레 파타고니아의 더블유 트랙, 킬리만자로 정상의 롱가이 루트,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레이트 오션 워크, 코르시카섬의 GR20 등이 그런 길이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 있는 "왕의 오솔길"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길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그 길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중간 공중에 매달린 발판을 따라 이어진다. 오랜 세월 보수가 안 되어 상태가 악화된 그 길을 가다 떨어져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심각한 상해를 입는 사람 수는 훨씬 더 많아지자 스페인 당국은 길을 폐쇄했다. 그러다 얼마 전, 그 길을 다시 복원했고 지금은 뱃심 두둑한 도보여행자들에게 개방된 상태이다. 그 길을 걷는 여행자들에게 그들이 허공에 떠 있다는 느낌을 높여주기 발판 바닥 일부에 유리 판을 깔았다. 왕의 오솔길은 현대화된 도보여행길의 선구자적 면모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p66,67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고 나서 오랫동안 그 길에 관한 정보를 모았던 적이 있다. 언젠가, 그 길에 있을 언젠가를 위해서. 그렇게 '한비야'와 '김남희'가 쓴 모든 책을 섭렵하고 그들이 걸은 그 길들을 동경해왔다. 길은 책 속에서 간접 체험을 통해서 나를 세계로 이끌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도보여행길이 저렇게나 많다니, 지금의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내 형편이나 나이, 가장 중요한 재정적 상황은 저 길 위에 나를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많은 길들이 있다. 이름을 가진 '추자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해파랑길', '남해 바래길' 등등과 이름을 갖지 못한 소소하고 작은 동네의 미로 같은 골목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개울이나 강은 날이 저물어도 결코 쉬거나 멈추지 않는 자연의 일부이다. 나는 물이 흘러가는 것,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개울과 길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둘 다 동일한 작동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개울은 힘들이지 않고 지형을 헤치며 나아간다. 그리고 똑바로 일직선을 그리며 흐르지 않는다. 또한 가장 짧은 거리나 빠른 길을 골라 가지도 않는다. 개울은 저항을 최소한으로 받는 길을 따라간다. 물은 평형상태를 추구한다.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흐른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개울은 흐름을 멈출 것이다. 그래서 개울은 호수를 만나면 사라진다. 강 또한 바다를 만나면 흐름을 멈춘다. 물은 평형상태에 도달하면 속도를 잃고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평형상태에 도달한 물은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이것은 길도 마찬가지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제껏 함께 걸었던 발걸음을 멈추고 저마다 자기 방향으로 흩어져 가기 때문이다. p105,106

   나는 이제껏 남반구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북반구의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많은 길을 걸었다. 문화적 경관도 지나쳤고, 야생의 황야 지대도 통과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스텝 지역, 축축한 습기로 가득한 열대우림 지역, 용암이 부글부글 끓는 화산 꼭대기도 올랐다. 나는 통과하기 어렵기로 알려진 맹그로브 밀림 속을 걸었다. 고산지대의 빙퇴석 산등성이도 횡단하고, 어깨 높이까지 자란 초록의 거대한 풀들이 굽이치는 초원지대도 통과했다. 너무나 척박하고 황량하고 뼛속까지 훤히 드러난 것처럼 삭막한 돌이 많은 황무지도 걸었다. 그것은 마치 태초 이전 또는 세상이 끝난 뒤의 땅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열대우림 지역을 걷는 것은 대성당 안을 걷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냉랭하고 음울했다. 초록의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마치 성당의 지붕처럼 아치형 천장을 이루고 있는 밀림 속은 성당의 실내와 같은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정찬용 접시처럼 커다란 낙엽들을 밟으며 숲 기슭을 걸었다. 마치 호빗족처럼 나 자신이 아주 작은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걸으면서 그때처럼 행복감을 느껴본 적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결코 없었다. 길은 나의 구세주였다. 내가 길을 잃는다면, 숲은 나를 집어삼킬 것이며, 나는 거기서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맹그로브 밀림 속을 걷는 것이 가능하다면 훨씬 더 길이 험난했다. 맹그로브 나무는 그 자체가 아주 오랜 세월의 흔적이며 지구상에서 가장 강인하고 변함없는 생명체 가운데 하나였다. 맹그로브와 바퀴벌레, 그 둘은 미래에도 지구상에 생존해 있을 유일한 생명체의 두 형태일 것이다. p139~141

   

   '날이 저물어도 결코 쉬거나 멈추지 않는 자연의 일부'처럼 걷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자처럼 맹그로브 밀림 속을 걷지는 못하겠지만 이 글쓰기를 마치면 오늘은 수원 팔색길 중에서 지겟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매일 걷는 산책로의 시작점인데 길의 표지판을 따라 끝까지 걸어 볼 생각이다. 옛날 나무꾼이 걸었다는 그 길이 맞을까 갸웃하면서, 지게 대신 물 한 병과 커피를 채운 텀블러를 담은 배낭을 메고 사브작사브작 걸을 것이다. 나의 시간과 자연 속으로.

   이건 안 비밀인데 11월 말까지 한국관광공사의 '두루누비'앱에서 이벤트를 하고 있다. 길, 따라 걷기를 완료하면 5000원 온라인 상품권을 지급한다. 한 사람당 3번까지 가능하다니 이건 일석이조. 가을 속을 걸으면서 무거운 몸도 가벼운 정신도 살랑살랑해지면서 완료하면 책 한 권이 생기는 것이다. 아, 참! '해파랑길' 후기 공모도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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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넓이 창비시선 459
이문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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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울 수 있도록

   오래된 기도 3

                                     이문재

   혼자 울 수 있도록

   그 사람 혼자 울 수 있도록

   멀리서 지켜보기로 한다

   모른 척 다른 데 바라보기로 한다

   혼자 울다 그칠 수 있도록

   그 사람 혼자 울다 웃을 수도 있도록

   나는 여기서 무심한 척

   먼 하늘 올려다보기로 한다

   혼자 울 때

   억울하거나 초라해지지 않도록

   때로 혼자 웃으며

   교만하거나 배타적이지 않도록

   저마다 혼자 울어도

   지금 어디선가 울고 있을 누군가

   어디선가 지금 울음 그쳤을 누군가

   어디에선가 이쪽 하늘을 향해 홀로 서 있을

   그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혼자 있음이 넓고 깊어질 수 있도록

   짐짓 모른 척하고 곁에 있어주는 생각들

   멀리서 보고 싶어 하는 생각들이

   서로서로 맑고 향기로운 힘이 될 수 있도록

               시집 [혼자의 넓이] 중에서

   늦게까지 이어진 더위 탓인지 갑자기 겨울이 훅~! 들어온 느낌의 아침을 맞는다. 이렇게 쌀쌀해지면 덩달아 쓸쓸해지는 건 유난이 아니라 보편적인 감성이라는 위안을 살며시 가지면서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도 그런 위안에 슬그머니 편해지는 심리는 대체 뭘까?) 시집의 제목에서도 전체적인 시에서도 대놓고 '혼자'가 많은 문재 시인의 시를 펄럭~펄럭~하다가 떠나온 곳, 화장실에 붙여 둔 [오래된 기도]를 잠깐 생각한다. 벌써 몇 달 전이니 과연 붙어있기는 할까? 싶어지면서 더 먼저 떠나온 곳은 여태 붙어 있던데...로 이어진다. (시 제목도 가물가물~하다. 김사인 시인의 [조용한 일], 윤동주 시인의 [무서운 시간]일 거다. 아마도.) 그리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름을 알고, 몸을 기억하는 분들이 이제는 안 계신다 생각하니 참 허망 타. '흔적'은 뭘까? 이런 기억들도 그분들의 흔적이겠지 싶다. '혼자 울 수 있도록' 타인을 바라보는 것, 이 직업에 적응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거리감이 많이 필요하다. 특히 나한테는. 매번 같은 상황에 휘둘릴 때마다 상실에 휘청거리는 어린아이 같은 내가 마음에 안 든다. 그러나 내가 변할 것 같지는 않으니 도망치듯 그런 상황에서 떠나왔는데,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허둥대고 있다니... 쯧~! 사람, 안 변한다.

   "저마다 혼자 울어도// 지금 어디선가 울고 있을 누군가// 어디선가 지금 울음 그쳤을 누군가// 어디에선가 이쪽 하늘을 향해 홀로 서 있을" 그 누군가를 알고 있다. 이런 시를 읽으면 그 누군가에게 "짐짓 모른 척하고 곁에 있어주는 생각들// 멀리서 보고 싶어 하는 생각들이// 서로서로 맑고 향기로운 힘이 될 수 있도록" 들려주고 싶어진다.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도 시는 좋구나. 중의적인 표현들 해석하려 애쓰지 않아도 가만가만 안겨오는 시어들 좋구나. 읽어보고, 읽어보고. 시에서 위안을 얻는 시월, 이 아름다운 시월이 속절없이 가고 있다. 그 누군가들도 이 시월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차운 날씨에 감기 들지 말고 좋은 시 한 편 같이 읽자. 마음을 도둑맞았다고 억울해하지 말고. 누군가 이미 다 써버렸다고 투덜대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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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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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가을의 무늬


   이 가을의 무늬
                                허수경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

             시집[누구도 기억하지 않은 역에서]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 하여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가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여름의 뜨거운 볕과 바람, 습한 기후들과 이별을 견디는 야윈 등과, 무릎을 꿇게 만드는 좌절의 절절함을 지나, 억울하고 화나는 울분의 순간들을 참아온 나날들이 가을의 무늬를 결정한다. 가을은 결국 여름의 결정체구나. 뜨겁게 여름을 건너 온 이만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는˝ 가을을 만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아침노을로 아름다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출근 하는 길, 내게 올 올해 가을의 무늬를 가늠해보았다. 푹 퍼져 쉬었던 이틀의 쉼으로도 찌뿌둥한 걸음이 조금씩, 조금씩 빨라졌다. 오늘은 40분의 도보에도 땀이 나지 않는다.
구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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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직선 창비시선 177
도종환 지음 / 창비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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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나무, 그리운 곳



  배롱나무

                     도종환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루하고 먼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
   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
   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
   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
   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는 말하듯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 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시집「부드러운 직선」중에서




   그랬습니다. 배롱나무를 알게 된 건 유홍준선생의 남도 답사 일 번지를 통해서였지요. 그리고 고향에 갔던 여름, 눈길 닿는 곳 어디에서나 배롱나무꽃을 볼 수 있었어요. 어느 집 마당에든, 가로수든, 논두렁이든, 절집이든 쉽게 눈에 들어오는 배롱나무, 그렇게 흔한 나무가 알게 된 이후에야 배롱나무로 각인 되어 내게로 왔습니다. 어느 해 여름, 명옥헌에서 만난 배롱나무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의 하늘, 그 날의 바람, 그 날의 무등산, 그 날의 쓸쓸하면서도 충만하던 심경으로 마루에 앉아 몇 시간이고 흔들리는 꽃숭어리를 바라보면서 덩달아 흘러가던 마음결까지 고스란히 되살릴 수 있을 듯 해요. 그렇게 향수처럼, 아쉽게 놓쳐버린 한 시절처럼, 애닯은 추억처럼, 애잔하고 그리운 나무가 되었다지요. 도종환 시인도 그러셨나봅니다. 또 다른 시, 목백일홍에서도 그렇고.
   비가 지나간 수원 화성박물관 마당에서 오래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만약에, 혹시라도 마당을 갖게되면 꼭 심고 싶다고 생각하며 지는 꽃을 바라봅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사무치는 마음으로 명옥헌이 그립습니다.
   아, 또 있습니다. 가슴 철렁하게 만들던 절집, 개심사에서 만난 배롱나무도 그러했지요. 무위사는 어떻구요. 그리운 게 나무인지, 장소인지, 추억인지, 떠나고 싶은 열망인지 모호해집니다. 아마도 그 모두겠지요. 팔월이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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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방울에 대고 할 말이 없습니다

                                  이승희



  상처 많은 사람처럼 자꾸만 부딪혀온다. 아무것도 담지 못한 생처럼 자꾸만 그렇게 부딪혀 온다. 세상은 그렇게 완강했다고 한없이 밀리는 나를 또 밀어댄다. 연두의 기억도 새들의 눈웃음도 맨드라미의 옆얼굴도 무엇 하나 적시지 못했는데 빈방들이 자꾸만 비명처럼 머리를 부딪혀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지상에 닿는 무게가 되기까지 살아냈어야 할 생이 있는 것이고, 당신의 얼굴에 내리는 빗방울은 모두 당신의 이야기, 당신이 처형한 사람들의 이야기, 더 할 말도 없으면서 자꾸만 나를 붙드는 마음 같아서 유리창에 대고 마구마구 편지를 쓰네. 불빛 두어 개 붙이면 누군가의 안부처럼 쓸쓸해질 테지. 나는 자꾸만 내 얼굴을 내어준다. 그것은 허공에 대한 이야기, 이젠 허공이 된 이야기, 앞으로 허공이 될 이야기. 그러므로 저 빗방울 속에 불을 켜두고 싶은 마음. 그 사이를 비틀 만한 것도 화해랄 것도 없었다. 낯섦만 깊어져 사이로 사이만 자란다고 어떤 힘만이 사이에서 갇혀 울기도 하였는데, 아주 먼 별의 뒷덜미를 볼 수 있다면 이 진부함이 좀 용서될까. 눈코입도 없는 얼굴을 씻다가 나는 무엇으로 울어야 하나.


     시집[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중에서



  가을장마에다 태풍까지 만나서 많은 비가 오시는 휴일, 정혜윤의 【그의 슬픔과 기쁨 】을 덮고 먹먹해진 마음을 도저히 가눌 길이 없다. 가슴 안으로 폭우가 쏟아진다. 몇 자 끄적거리다 깜박거리는 커서만 들여다본다. 결국 포기하고 집어 든 맨드라미 색상의 이승희 시집, 쩝~! 정말 '빗방울에 대고 할 말이 없'다. 어쩌자고 '상처 많은 사람처럼 자꾸만 부딪혀'오는지. 김대용, 윤충렬, 박호민, 이현준, 박정만, 김정욱, 최기민, 김득중, 한윤수, 서맹섭, 이갑호, 정형구, 고동민, 이창근, 김정운, 김상구, 문기주, 복기성, 한상균, 김남오, 유제선, 박주헌, 염진영, 오석천, 김성진, 양형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담지 못한 생처럼 자꾸만 그렇게 부딪혀 온다.' 빗방울은 거세어졌다 여려졌다를 반복하는데 '아주 먼 별의 뒷덜미를 볼 수 있다면 이 진부함이 좀 용서될까'. 이 비 때문에 누군가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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