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직선 창비시선 177
도종환 지음 / 창비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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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나무, 그리운 곳



  배롱나무

                     도종환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루하고 먼길을 갈 때면 으레 거기 서 있었고
   지치도록 걸어오고도 한 고개를 더 넘어야 할 때
   고갯마루에 꽃그늘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기도 하고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
   건너편에서 말없이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며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
   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는 말하듯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 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시집「부드러운 직선」중에서




   그랬습니다. 배롱나무를 알게 된 건 유홍준선생의 남도 답사 일 번지를 통해서였지요. 그리고 고향에 갔던 여름, 눈길 닿는 곳 어디에서나 배롱나무꽃을 볼 수 있었어요. 어느 집 마당에든, 가로수든, 논두렁이든, 절집이든 쉽게 눈에 들어오는 배롱나무, 그렇게 흔한 나무가 알게 된 이후에야 배롱나무로 각인 되어 내게로 왔습니다. 어느 해 여름, 명옥헌에서 만난 배롱나무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의 하늘, 그 날의 바람, 그 날의 무등산, 그 날의 쓸쓸하면서도 충만하던 심경으로 마루에 앉아 몇 시간이고 흔들리는 꽃숭어리를 바라보면서 덩달아 흘러가던 마음결까지 고스란히 되살릴 수 있을 듯 해요. 그렇게 향수처럼, 아쉽게 놓쳐버린 한 시절처럼, 애닯은 추억처럼, 애잔하고 그리운 나무가 되었다지요. 도종환 시인도 그러셨나봅니다. 또 다른 시, 목백일홍에서도 그렇고.
   비가 지나간 수원 화성박물관 마당에서 오래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만약에, 혹시라도 마당을 갖게되면 꼭 심고 싶다고 생각하며 지는 꽃을 바라봅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사무치는 마음으로 명옥헌이 그립습니다.
   아, 또 있습니다. 가슴 철렁하게 만들던 절집, 개심사에서 만난 배롱나무도 그러했지요. 무위사는 어떻구요. 그리운 게 나무인지, 장소인지, 추억인지, 떠나고 싶은 열망인지 모호해집니다. 아마도 그 모두겠지요. 팔월이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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