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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평점 :
올해 가을의 무늬
이 가을의 무늬
허수경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
시집[누구도 기억하지 않은 역에서]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 하여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가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여름의 뜨거운 볕과 바람, 습한 기후들과 이별을 견디는 야윈 등과, 무릎을 꿇게 만드는 좌절의 절절함을 지나, 억울하고 화나는 울분의 순간들을 참아온 나날들이 가을의 무늬를 결정한다. 가을은 결국 여름의 결정체구나. 뜨겁게 여름을 건너 온 이만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는˝ 가을을 만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아침노을로 아름다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출근 하는 길, 내게 올 올해 가을의 무늬를 가늠해보았다. 푹 퍼져 쉬었던 이틀의 쉼으로도 찌뿌둥한 걸음이 조금씩, 조금씩 빨라졌다. 오늘은 40분의 도보에도 땀이 나지 않는다.
구월,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