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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의 고독 -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
토르비에른 에켈룬 지음, 김병순 옮김 / 싱긋 / 2021년 5월
평점 :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는 [두 발의 고독]의 부제다. 노르웨이의 저널리스트 토르비에른 에켈룬이 쓴 책이다. 뇌전증 진단을 받은 저자가 면허증을 반납한 후 걷기를 시작하면서 만나는 거리 풍경과 사유를 그리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걸음은 과거의 길, 어릴 때의 숲속 오두막 길을 기억하고 그 시절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시간과 자연을 걷는' 글이다.
"걷기"를 좋아하고 '길'을 좋아하는 나에게 꼭 맞는 책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책들에 매번 혹한다.) 무엇보다 '뇌전증으로 면허를 반납한 저자'부분에서 끌렸다. 우리나라에서라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뇌전증'이라는 병이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병도 아니고 그 병으로 인해 운전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는 사례도 들어본 적 없다. (물론 내가 들어 본 적 없는 거겠지만.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우리도 이제는 초고령자가 운전하는 것에 대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 그래서 더욱 끌렸다. 결론은 역시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길에 관한 사유로 빛나는 책이었던 것이다. 건강했던 자신에게 들이닥친 병마와의 투쟁이나 좌절로 징징거릴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염려가 있었으나 깔끔하게도 그런 문장은 한 줄도 없었다.
일 년 전에 사고가 있었다. 정확히는 2020년 10월 25일이다. 여느 때처럼 '바람이'를 타고 출근하는 중이었다. 광교산의 아침 바람은 매일매일 새롭게 황홀했다. 그날은 안개를 약간 머금은 가을 아침치고는 눅지고 차운 바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갑자기 우측에서 튀어나온 파란색 차를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텅~ 이었다. 119차량이 올 때까지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에 큰 소리로 비명을 내지르며 심호흡을 했다. 통증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나 (지나고 보니 엄살이 과했나 싶기도 하고 차량 운전자는 얼마나 놀래고 쫄았을까 싶기도 했다.) 다행히 갈비뼈 두 개의 골절과 염좌, 오른쪽 엄지손가락의 미세한 골절 등의 부상으로 그쳤지만 바람이는 폐차해야 했다. 십 년 동안 시내 곳곳을 함께 다니고, 종류별 바람을 느끼게 해준 나의 도반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내내 뚜벅이다. 한 시간이 못 미치는 길들은 거의 걸어서 다닌다.
늘 걷는 자였지만 '바람이' 없는 일 년은 온전하게 걷는 사람이다. '걷는 사람'이 된 지금도 처음 도보 여행을 시작했을 때의 길에 관한 생각과 같다. 우리의 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 없다. '탈 것들'를 위한 길만 존재한다.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걸을 길이 없거나 차도 변 좁은 틈 사이로 걸을라치면 25톤 화물차가 경적과 바람으로 겁을 주며 쏜살같이 지나간다. 도심의 인도는 또 어떤가. 차가 점령해있거나 가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나, 보도블록들은 복병처럼 튀어 올라있거나 길은 기울어져 있어 발에 있는 힘을 다 주며 걸어야 한다. 횡단보도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푸른 신호에도 달리는 차들에 건너기가 쭈뼛하고 신호는 어찌나 짧은지 자동적으로 걸음이 빨라진다. 걷는 일이 가장 안전해야 하는데 생각에 빠지거나 방심하고 걷다 보면 위험해진다. 사람을 위한 길은 여전히 없다.
지금처럼 걷는 길이 상품화된 적도 없을 것이다. 제주 올레의 성공을 지켜본 전국의 지자체에 길 만들기 열풍이 불어닥쳤다. 올레 마니아인 나로선 환호했다. 그러나 몇 개의 길들을 따라가 보고는 바로 실망했다. 과연 그 길을 기획하고 만든 사람이 자주 그 길을 걸어보았을까 싶은 것이다. 도심 사이에서 팻말을 놓치는 것은 기본이고,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 싶은 도로변을 무한정 걷게 되는 경우도 있고, 마치고 나면 뭐 하러 이 길을 끝까지 걸었는지 의미도 몰라서 허무해지는 길들도 많다. 그래도 혹시 하는 기대감을 안고 **길들을 따라 걷는다. 일단은 길에 부여된 이름들이 그 길을 정의하게 만들고 걷는 사람이 있어야만 그 길은 걷기에 최적화된 길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제주 올레의 성공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많아서다. 나는 수원을 좋아한다. 여기서 보낸 시간이 40년이 지났다. 수원의 구석구석을 걸어 다녔다. 그 길들에 걷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내게 걷는 일은 하루의 완성이고 하루의 마감이다. 걷는 동안, 하루 동안 내가 했던 일들을 생각하고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길'은 내게 '쉼'이면서 '일기 쓰기'이고 '사유'의 장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걸으면서 어릴 적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강을 따라 걷던 둑길에서 보낸 그 시간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저자와 같은 사유는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어릴 적의 둑길은 나를 세상으로 이끈 힘이 되어주었다. 그때의 둑길과 같은 광교저수지 둑길에 서면 가슴이 펴진다. 심호흡 몇 번으로 하루 동안 가득 차 있던 세상을 향한 불합리와 이산화탄소들이 산소로 전환된다. 비로소 숨쉬기가 편안해진다. 이 단순한 동작이 가능한 곳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둑에 설 때마다 매번 새롭게 느낀다.
길은 스스로 생겨났다. 길은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기 위한 산책로나 전시 공간으로 설계된 경치 좋은 통로가 아니었다. 길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길이 만들어질 때 예비 보고서 나 타당성조사도 없었고 길의 등급을 정하거나 포장하기 위한 사전심사도 없었다.
길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길은 자연적으로 생겨나고 분해되며 자연환경에 순응하고 그것이 통과하는 바로 그 자연계의 일부다. 길은 일시적이다. 그것의 용도와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다. 길은 누군가가 그 길을 다니기 때문에 거기에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길을 다닌다. 따라서 길이 그대로 남아 있으려면 누군가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길은 전설과 신화, 민요, 동화와 비슷하다. 그것들은 모두 집단 창작을 통해 생겨나기 때문에 어느 특정 작가를 원작자로 지명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몸과 영혼이 일체다.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이다. 길은 단순한 통로 이상을 의미한다.
길은 일직선의 반대다. 길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반면에, 일직선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이론적 구성체다. 일직선은 구체적인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물의 표면조차 일직선으로 평평하지 않다. 태양에서 발사되는 광선도 마찬가지다.
길은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자연에 끼어든다. 길은 자연계 영역의 일부로서 거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길은 언제나 작다. 우리가 그것을 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만일 길이 확장되어 더 커지면, 그것은 길이 아닌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 된다. p45,46
이 같은 도보여행길들은 세계 곳곳에 다 있다. 거기서는 온갖 형태의 지형들이 서로 교차하고 길마다 구간 거리와 난이도도 가지각색이다. 일본의 시코쿠 오헨로 사찰 순례길, 페루의 마추픽추까지 가는 잉카 트레일, 태즈메이니아 섬의 오버랜드 트랙,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에 걸친 투르 뒤 몽블랑, 칠레 파타고니아의 더블유 트랙, 킬리만자로 정상의 롱가이 루트,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레이트 오션 워크, 코르시카섬의 GR20 등이 그런 길이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 있는 "왕의 오솔길"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길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그 길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중간 공중에 매달린 발판을 따라 이어진다. 오랜 세월 보수가 안 되어 상태가 악화된 그 길을 가다 떨어져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심각한 상해를 입는 사람 수는 훨씬 더 많아지자 스페인 당국은 길을 폐쇄했다. 그러다 얼마 전, 그 길을 다시 복원했고 지금은 뱃심 두둑한 도보여행자들에게 개방된 상태이다. 그 길을 걷는 여행자들에게 그들이 허공에 떠 있다는 느낌을 높여주기 발판 바닥 일부에 유리 판을 깔았다. 왕의 오솔길은 현대화된 도보여행길의 선구자적 면모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p66,67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고 나서 오랫동안 그 길에 관한 정보를 모았던 적이 있다. 언젠가, 그 길에 있을 언젠가를 위해서. 그렇게 '한비야'와 '김남희'가 쓴 모든 책을 섭렵하고 그들이 걸은 그 길들을 동경해왔다. 길은 책 속에서 간접 체험을 통해서 나를 세계로 이끌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도보여행길이 저렇게나 많다니, 지금의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내 형편이나 나이, 가장 중요한 재정적 상황은 저 길 위에 나를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많은 길들이 있다. 이름을 가진 '추자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해파랑길', '남해 바래길' 등등과 이름을 갖지 못한 소소하고 작은 동네의 미로 같은 골목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개울이나 강은 날이 저물어도 결코 쉬거나 멈추지 않는 자연의 일부이다. 나는 물이 흘러가는 것,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개울과 길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둘 다 동일한 작동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개울은 힘들이지 않고 지형을 헤치며 나아간다. 그리고 똑바로 일직선을 그리며 흐르지 않는다. 또한 가장 짧은 거리나 빠른 길을 골라 가지도 않는다. 개울은 저항을 최소한으로 받는 길을 따라간다. 물은 평형상태를 추구한다.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흐른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개울은 흐름을 멈출 것이다. 그래서 개울은 호수를 만나면 사라진다. 강 또한 바다를 만나면 흐름을 멈춘다. 물은 평형상태에 도달하면 속도를 잃고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평형상태에 도달한 물은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이것은 길도 마찬가지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제껏 함께 걸었던 발걸음을 멈추고 저마다 자기 방향으로 흩어져 가기 때문이다. p105,106
나는 이제껏 남반구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북반구의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많은 길을 걸었다. 문화적 경관도 지나쳤고, 야생의 황야 지대도 통과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스텝 지역, 축축한 습기로 가득한 열대우림 지역, 용암이 부글부글 끓는 화산 꼭대기도 올랐다. 나는 통과하기 어렵기로 알려진 맹그로브 밀림 속을 걸었다. 고산지대의 빙퇴석 산등성이도 횡단하고, 어깨 높이까지 자란 초록의 거대한 풀들이 굽이치는 초원지대도 통과했다. 너무나 척박하고 황량하고 뼛속까지 훤히 드러난 것처럼 삭막한 돌이 많은 황무지도 걸었다. 그것은 마치 태초 이전 또는 세상이 끝난 뒤의 땅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열대우림 지역을 걷는 것은 대성당 안을 걷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냉랭하고 음울했다. 초록의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마치 성당의 지붕처럼 아치형 천장을 이루고 있는 밀림 속은 성당의 실내와 같은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정찬용 접시처럼 커다란 낙엽들을 밟으며 숲 기슭을 걸었다. 마치 호빗족처럼 나 자신이 아주 작은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걸으면서 그때처럼 행복감을 느껴본 적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결코 없었다. 길은 나의 구세주였다. 내가 길을 잃는다면, 숲은 나를 집어삼킬 것이며, 나는 거기서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맹그로브 밀림 속을 걷는 것이 가능하다면 훨씬 더 길이 험난했다. 맹그로브 나무는 그 자체가 아주 오랜 세월의 흔적이며 지구상에서 가장 강인하고 변함없는 생명체 가운데 하나였다. 맹그로브와 바퀴벌레, 그 둘은 미래에도 지구상에 생존해 있을 유일한 생명체의 두 형태일 것이다. p139~141
'날이 저물어도 결코 쉬거나 멈추지 않는 자연의 일부'처럼 걷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자처럼 맹그로브 밀림 속을 걷지는 못하겠지만 이 글쓰기를 마치면 오늘은 수원 팔색길 중에서 지겟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매일 걷는 산책로의 시작점인데 길의 표지판을 따라 끝까지 걸어 볼 생각이다. 옛날 나무꾼이 걸었다는 그 길이 맞을까 갸웃하면서, 지게 대신 물 한 병과 커피를 채운 텀블러를 담은 배낭을 메고 사브작사브작 걸을 것이다. 나의 시간과 자연 속으로.
이건 안 비밀인데 11월 말까지 한국관광공사의 '두루누비'앱에서 이벤트를 하고 있다. 길, 따라 걷기를 완료하면 5000원 온라인 상품권을 지급한다. 한 사람당 3번까지 가능하다니 이건 일석이조. 가을 속을 걸으면서 무거운 몸도 가벼운 정신도 살랑살랑해지면서 완료하면 책 한 권이 생기는 것이다. 아, 참! '해파랑길' 후기 공모도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