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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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이지만 이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20킬로미터가 넘었다. 그때는 갈수기여서 웅장한 황하는 아니었지만 드넓은 갈대밭을 헤치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것이 그렇게 유장할 수 없었다. 내가 역사책에서 수없이 만나왔던 그 황하의 실물을 처음 만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맺혔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에 가는 길에 요동벌판의 지평선을 보면서 "사나이로서 한번 목 놓아 울 만한 곳이다"라고 했던 그런 감정이었다.
그때 중국문명의 요람이라는 황하의 도도한 흐름을 보면서 이런 엄청난 땅덩이에서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심오하게 생각하고 정교하게문화를 창조했던 이 욕심 사나운 민족의 역사를 회상했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국토에 거대한 인구와 거대한 문명을 갖고 있는 중국에 비할 때 초라할 정도로 땅은 좁고, 인구도 적은 우리나라의 사정과 역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자니 우리는 그 좁은 영토에서 삶을 영위하면서도 중국 변방의 다른 소수민족과는 달리 끝끝내 중국에 정복당하지 않고 그들의 문명에 버금가는 문화를 창조하여 오늘날 누가 보아도 동아시아에서 당당한 문화적 지분을 갖고 있는 문명국가로 부상해 있음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런 우리 역사의 저력, 그리고 후손들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독립된 민족국가로넘겨준 조상들의 피어린 노력과 희생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기어이나로 하여금 눈물방울을 맺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375년, 서양에서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키족이 바로 이들 북흉노였다는 학설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휴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흉노 제국은 멸망했지만 흉노인은 여전히 유목민으로 살았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전조(前趙304~329), 북량(北凉, 397~439) 등이 흉노의 후예가 세운 나라였다.
 한편 이들이 사용했던 동복(銅)이라는 이동용 가마솥이 우리나라 가야 유적에서도 발굴되어 가야의 상층부가 북방에서 내려왔다는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아무튼 5세기 이후 흉노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지금 하서주랑에 와서 흉노의 역사를 이렇게 일별하자니 중국에 있는 55개 소수민족의 처지를 우리와 자연히 비교해보게 된다. 중국인이 오랑캐라고 부른 변경민족의 흥망성쇠와 영욕을 보자면 오늘날 중국이라는 대국의 힘에 눌려 중국의 자치구 또는 자치주를 이루며 조상들 삶의 방식을 이어가거나, 아예 더 서쪽으로 밀려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스탄 자가 붙어 있는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되어 있다. ‘스탄 이란 땅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동아시아 제민족의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견지한 역사적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하나의 민족이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갈 수 있는 강역을 확보하니대대로 역사를 이어온 것은 피나는 희생과 불굴의 의지 아래 조상들이 우리에 내린 유산이고 축복이다. 하서주랑에 서린 흉노의 역사가 이를 절절히 기르쳐준다.

명사산 명불허전(鳴山鳴不虛傳)"

 명사산의 울림은 헛되이 울리는 것이 아니다‘가 된다. 글자 하나를바꿈으로써 그 감동의 진폭이 이렇게 더 고양된다. 이를 놓치지 않고,
다시 와보게 해준 내 친구 광호가 너무 고마웠다.
 덧신을 반납하러 입구의 광장으로 나와 다시 명사산을 바라보며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는데 명월광장의 이름도 밝을 명(明)자가 아니라 울릴 명(鳴)자를 쓴 ‘명월(鳴月)광장‘ 이었다. 명사산에서는 모든 것이울리고 또 울릴 뿐이다.
 떠나기 싫은 발걸음을 무겁게 옮기면서 가다가는 뒤돌아 명사산의아름다운 능선을 바라보고 또 가다가는 멀어져가는 산줄기를 바라보면서 모두들 오늘 밤 달이 뜰 때 여기에 와서 술 한잔 걸치면 우리 마음을 또 어떻게 울릴 것인가라고 헛기분을 내며 주차장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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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박준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2012)]중에서

눈을 감고 그려보아도
눈을 뜨고 읽어보아도
참 쓸쓸한 시,
허나 쓸쓸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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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잃고 산벚나무에 기대어 울었네
 산벚은 더이상 위로가 아니어서 울었네

 나뭇잎 사이로 실종되던 노을도
 붉은 나비에게서 나던 막걸리 냄새도
 더이상 위로가 아니어서 울었네
          [산벚을 잃고]중에서

두고 간 글들.
다시, 찬찬히 읽겠습니다.
나의 시인이여.....
아픔 없는 곳에서 부디 평온하소서.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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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문지 시선은 이성복, 황지우, 황인숙, 이병률등을 시인으로 만나는 통로였고 그 분들의 시집은 여러권이 상재되었다. 최근에는 김소연, 이수명시인의 시 속에서 지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 기형도시인. ‘입 속의 검은 잎‘은 김현선생의 해설과 61편의 시로 지금도 내 가방에 찬밥처럼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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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는 아무것도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 채 실려간다

 

 한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박소란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중에서

 

 

 박소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자랐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9[문학수첩]으로 등단했다.

 

 박...

 처음 만나는 그녀의 시를 창비 시선 386으로 읽는다.

 이 땅에서, 창비에서 시집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검증의 절차를 거쳐 왔다는 것이리라.

 내게만 생소한 이름이지 그쪽 세계에서는 이미 오래된 시인일지도 모른다. 등단 6년만의 첫 시집의 연륜을 통기타 한채라는 표현에서 읽는다.

 한 시절 누군가의 집이었고 심장 가까운 곳에서 한과 정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지만 이제는 버려진 통기타, 흉터로 남은, 칼로 남은 한 시절의 상징...... 버려지는 것이 어디 통기타뿐이겠는가.

 누군가에게나 한채였을 노래들, 이제는 치기어린 시절의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린 쓸모없는 엇박의 탄식들, 그녀를 통해 만난다.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이 마지막 행은 시집을 세상에 내보내는 시인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아서 쉰 두 편의 시들 중 꽤 많은 시들은 오래오래 아프다. 이를테면

 

 삼양동 시절 내내 삼계탕집 인부로 지낸 어머니

 

 아궁이 불길처럼 뜨겁던 어느 여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까무룩 꺼져가는 숨을 가누며 남긴

 마지막 말

 얘야 뚝배기가, 뚝배기가 너무 무겁구나

 

 그후로 종종 아무 삼계탕집에 앉아 끼니를 맞을 때

 펄펄한 뚝배기 안을 들여다볼 때면

 오오 어머니

 거기서 무얼 하세요 도대체

 

 자그마한 몸에 웬 얄궂은 것들을 그리도 가득 싣고서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느른히 익은 살점은 마냥 먹음직스러워

 대책 없이 나는 살이 오를 듯한데

 

 어찌 된 일인가요

 삼키고 또 삼켜도 질긴 허기는 가시질 않는데

                                     배가 고파요-전문

 

 직업상 이러저러한 뚝배기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가스 불 위에서 쩍 갈라지는 낭패의 연속이다 '배가 고파요'는 열두 화구에서 맹렬한 기세로 끓고 있는 뚝배기를 옮기다 팔을 스친 것 같다. 강렬한 뜨거움 다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쓰라림이다, 흉터다. '삼키고 또 삼켜도 질긴 허기는 가시질 않는데'

 

 

 불현듯 슬프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곳 어느 때 아주 사소한 흐느낌조차

 

 울기 위해 집으로 달려간, 그때는 스무살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제출하고 사려 깊은 학생이 되어

 조금씩 꼬깃해져가는 표정을 가방 깊숙이 밀어넣고 가까스로

 열어젖힌 싸구려 자취방은 더없이 고요해

 너무 낮고 너무 어두워 울음은

 다름 아닌 거기에 살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이 타들어갈 때마다 기꺼이 방문을 열어준

 나의 울음, 엄마가 죽던 밤에도

 사랑이 더운 손을 뿌리치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그 방에 있었다 볕이 들지 않는 방

 아릿한 곰팡내가 명치를 꾹꾹 누르는 방

 울음의 방으로 숨어들수록 울음은 아프고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증발하는 물기처럼 어느새 울음은

 

 거기에 살 수 없음을 알았다

 한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갔음을

 어디로 갔나 울음은

 울음의 빈자리를 몹시 뒤척이던 나는

 

 후미진 골목 끝

 자취방은 헐리고 추진 스무살도 멀리 달아났으니

 어디로, 말수가 적어 겉돌기만 하던 나의 울음은

                                  울음의 방-전문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주소-전문

 

 시인은 지금은 어디에 주소를 두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종점 곁에 산다. 이 도시에 올라왔을 때 살기 시작했던 곳으로 그때도 종점이었는데 여전히 종점인 이곳으로 돌고 돌아서 제자리로 왔다. 지금은 아파트도 여러 개 있고 공원도 여러 개나 있는 그럴싸한 중산층의 동네처럼 화장을 했지만 여전히 숨차게 퍽퍽한 깔끄막 길들은 울음의 방마다 후미진 골목으로 놓여있고 새벽마다 허둥지둥 뛰어 올라탔던 버스들은 부릉부릉 매연을 쏟아놓아 미세먼지 농도에도 아랑곳 않는 꼬깃꼬깃해져가는 동네다. 나처럼 뒤척이는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하루를, 고단한 하루를 각자의 울음의 방으로 돌아가 마감한다. 이제는 울지 않을지라도 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하루의 끝마다 이제 서른 몇 해를 산 젊은 시인에게서 위로와 놀람을 동시에 받는다.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가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다음에-전문

 

 

 따뜻하고 쓸쓸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일일연속극같은, 그러나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같은 맛있는 시집이다. 길어도 읽기를 중간에 멈출 수 없는 매력있는 시편들이 가득하다.

 여기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필사하면서 읽었던,  '너무 깊은 오해', '나의 고양이가 되어주렴', '감', '참 따뜻한 주머니', '노인', '화장실이 없는 집', '통속적 하루', '망명', '지익' 등등.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정서적 주소지를 묻는 시가 있다. 눈으로 몇 번을 읽고 어디서 끊어야 할지 가늠한 다음에 소리내어 읽으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우리가 자주, 꼭 읽어야 할 한 편, "심장에 가까운 말" 이 시집은 이 한 편의 시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고 어설픈 나도 감히 말하고 싶어지는 '용산을 추억함'. 역설적이게도 악몽 같은 이 사건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라도 기억해야 하는데 잊고 산다. 2009년 1월 20일의 용산을. 

 

용산을 추억함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 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 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 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빈 거리를 머리에 이고 잠든 밤이면 자주 가위에 눌렸네 홀로 남겨진 애인이 흉만(胸滿)의 몸을 이끌고 남일당 망루에 올라 오 기어이 날개를 빼앗긴 한 마리 새처럼 찬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꿈이 머릿속을 낭자하게 물들였네 상복을 입은 먹구름떼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네 깨진 유리창 너머 파편 같은 눈발이 점점이 가슴팍에 박혀왔네 한숨으로 피워낸 시간 앞에 제를 올리듯 길고 긴 편지를 썼으나 아무도 돌아올 줄 모르고 봄은 답장이 없었네 애인을,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했네

 

 

 오늘은 5.1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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