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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 제3의 詩 6
강연호 지음 / 문학세계사 / 1995년 6월
평점 :
절판
저 별빛
강연호
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
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
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
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방뇨되어
어디론가 흘러갈 만큼만 흐를 것이다
흐르다 말라붙을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이라기에 옷섶 채 여미기도 전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구겨버릴 테지만
지금은 삼류 주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너에게
가고 싶다 빨래집게로 꾹꾹 눌러놓은
어둠의 둘레 어디쯤 너는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마음은 늘 송사리 떼처럼 몰려다니다가
문득 일행을 놓치고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는 것
저 별빛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가슴이 저릿한 '저 별빛'이다.
치통처럼,
노름꾼처럼,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
언제나 경계들은 현실을 막고 선다.
먹먹한 삶의 반성과 두터운 회한의 그리움이
쓰지 못하는 너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먼 길
먼 길이 그를 규정한다
미친 세월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억새 무늬에 밀려 여기까지 왔어도
여전히 먼 길, 혼자서는 갈 수 없어서
누군가 잡아 주길 기다려 남겨둔 그의 빈손은
아직도 텅 비어 허공만 움켜쥐고
혼자서는 갈 수 없어서
동행 찾아 헤맨 발걸음이 그를 이끌어
올 데까지 왔어도 여전히 먼 길
혼자서는 갈 수 없어서 결국 혼자 가는
먼 길이 그를 규정한다
먼 길은 그의 유일한 존재 증명이다
'먼 길'은 서럽다.
그의 유일한 존재 증명이어서 라기보다는
그것만이 유일한 존재 증명이 될 수밖에 없는
길.
멀고 먼 길.
부득이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이 생애의 고단함이 …….
월식月蝕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시집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문학세계사1995)]
날이 흐리다.
'별빛'도 '달'도 가려진 저녁.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데,
길은 잘못 들고
지도는 없구나.
내 그림자에 가려진 길
'먼 길'
칠흑의 어둠에도 찾아 나서야겠지.
自序
날이 갈수록 삶은 누추하다. 세상에 비 오고 눈 내릴 때마다 나는 깨끗이 닦인 칠판처럼 내 발자국도 지워지길 원했다. 처음부터 다시 걷고 싶은데 별은 새벽까지 욱신거리고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모두 세 묶음으로 나누었고 별다른 의미는 없다. 마지막 묶음은 첫 시집에 빚진다.
1995년 6월
강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