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밤에 꿈꾸다 창비시선 43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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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정희성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

어린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하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시집 [흰 밤에 꿈꾸다]중에서

 

 

진달래꽃빛,

해 질 녘에 짙어진다는 걸

어둠이 내리는 산길에서

처음 알았다.

꽃이 지는 자리에 잎이 돋는 것도 보았다.

그렇게 진달래꽃 지나는 자리에

진달래인 줄 알던 여린 나무들

연두 잎이 돋고

철쭉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어릴 때 구분하던, 참꽃 개꽃의 자리 변화

눈 크게 뜨지 않았으면 놓칠 뻔,

이 아이들은 누가 보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자리를 이어받고 세월을 이어받고

봄 계주는 진행형,

참꽃 지는 산야에 개꽃이 피어나는 시절이 온 것이다.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섭섭하기는 해도

거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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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다고,

꽃이 핀다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간다고,

그날 아침의

참담함을

세월이라는 이름을

그냥

바라보기만했던

간절함을

잊지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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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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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편지

                         이문재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떨어지는 꽃잎과

새로 나오는 이파리가

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

접이우산 접고

정오를 건너가는데

봄비 그친 세상 속으로

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진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미간이 순해진다.

멀리 있던 것들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저녁까지 혼자 걸어도

유월의 맨 앞까지 혼자 걸어도

오른켠이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의 오른켠도 연일 안녕하실 것이다.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중에서

 

가문 땅에 봄비 내리신다.                           

자분자분,

촉촉하게 스며들때까지

내리면 좋겠다.

고, 거기까지 썼는데

날이 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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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달

                                 손택수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 보이로

어서 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

나 시켜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라도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

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 한탄을 하며 구두를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시집 [목련전차]중에서

 

 

 

 

 

 

 

 

 

 추석이면 어김없이 추석달의 시구들이 떠오르고 나는 이보다 더 서글퍼지는 명절의 시를 알지 못한다.

 이천십구년 구월 십삼일 모처럼 맑은 날의 추석에 일몰과 월출을 동시에 만났다.

 아니, 만나기를 기다렸다. 광교산 형제봉에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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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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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저 엄마는 된장과 술국밥을, 아니면 된장술과 국밥을 팔아서 아들을 위하려고 섬에서 올라와서, 아들을 위해서 살고있구나 생각했고 그러자 눈물이 핑 돌았다.
 "대화를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사모님, 여기 과일 받으시고 합의금 관련 저희 제안도 봉투를 열어서 보시고요. 저희가 이렇게 사과를 하니까요."
비서관이 준비한 모든 것들을 넘기고 나서도 분위기는 나아지지않았다. 한참 말을 않던 소년의 엄마는 술 드셨죠? 하고 상수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오해 마세요."
아버지는 문득 당황했다.
"반주 정도 일 때문에 했어요. 식당 사장님이니 잘 아실 것 아닙니까."
"맨정신도 아니면서 하는 사과 안 받아요. 돈도 싫어요. 우리 애법대 갈 애예요. 그런 돈으로 안 키운다고요. 그리고 학생, 학생이왜 울어? 형이 그랬으면 형이 사과해야지. 울지 마, 울지 말고 학생은 똑바로 살아, 돌아가신 엄마 생각하면서 공부하며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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