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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어나더커버 특별판, 양장 합본)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세 여자 --20세기의 봄
조선희 장편소설 (한겨레출판)
정숙이 덤불 위로 고개를 빼고 보니 의용대 세 사람이 총을 쏘며 뛰어가고 있었는데, 하나는 능선 쪽으로 올라가고 하나는 산허리를 가로질러 가고 또 하나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가운데는 윤세주가 틀림없었다. 뛰며 구르며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대원은 진광화 같았는데 그 뒤를 일본군 수색대가 장총을 쏘아 대며 뒤쫓고 있었다. 일본군 하나가 총을 맞고 덤불 속으로 고꾸라지는 게 보였다. 계곡 쪽에서 콩 볶는 듯한 총성이 한동안 계속됐다. 총소리는 점점 먼 데서 들려오더니 마침내 최후의 총성이 산울림을 남긴 뒤 사위는 고요해졌다.
적막 속에서 삼사십 분쯤 흘렀을까. 정숙의 일행은 두리번거리며 하나둘씩 덤불 속에서 걸어 나왔다. 모두 창황함으로 얼굴에 푸른빛이 돌았다. 세 사람은 일행의 퇴로를 만들어 주기 위해 스스로 표적이 되어 일본군 수색대를 유인했던 것이다. 일행이 세 명 줄어들었다.
계곡 가까이 내려왔을 때 그들은 절벽 아래서 진광화의 시신을 보았다. 얼굴이며 가슴이며 팔다리가 구멍투성이 벌집이 되었고 핏물이 흘러 계곡을 벌겋게 적시고 있었다.
정숙은 그 모습을 외면하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연안에서 진광화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중국 공산당원이었고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재원이었다. 평양에서 중학교를 나온 그는 광주廣州에서 중산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마르크스주의 서클활동 때문에 감옥살이하고 나와서는 대륙의 남쪽 끝인 광주에서 황하 이북의 연안까지 혼자 찾아왔다. 홍군 이동연극단 단장으로 태항산 전선에 파견돼 온 것을 조선의용대로 끌어들인 게 여섯 달 전이었다. 그는 선전용 단막극도 예술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고 진중陳中에서도 틈틈이 쉴러나 브레히트를 읽었다. "농부가 호주머니에 노신魯迅 문집이나 황신파黃新波의 연환화를 넣고 다니는 날이 오겠죠?" 그런 꿈을 꾸던 그는 1911년생, 이제 서른둘이었다.
그들은 시체를 바위 아래 후미진 곳에 옮기고 나뭇가지를 덮어 은폐했다. 위치를 기억해두었다가 전투가 끝난 뒤 수습하러 오기로 했다.
벌써 아침 해가 중천을 향하고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빗줄기는 황토 먼지 날리는 밭을 버리고 떠나오는 길에 뿌리더니 하늘은 다시 구름 하나 없이 파랗게 메말라 있었다. 태항산 지리에 밝은 그들은 총성이 들리는 반대편으로 우회해 종일 산길을 걸어서 저녁 무렵 팔로군 진지에 도착했다.
1942년 5월 27일이었다.
마전의 포위를 뚫고 나오면서 팔로군도 격전을 치렀고 부사령관 팽덕회와 정치위원 등소평 등 지휘부는 무사했지만 부참모장 좌권이 전사했다 한다. 전투는 일주일쯤 더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퇴각한 뒤 의용대가 진광화의 시신을 찾아왔다.
며칠 뒤 윤세주가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정숙은 방을 치우다 말고 달려 나갔다.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이론가, 불굴의 용기와 기백을 가진 이 남자가 의용대 공동숙소의 마당에 누워 있었다. 날이 더워 주검은 이미 심하게 훼손되었다 했다. 정숙은 그 선량하게 생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거적때기를 들춰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계림에서 의용대를 이끌고 태항산으로 오지 않고 의형제 지간인 김원봉 옆에 남았다면 이런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숙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안으로 삼켰다.
평양 사람 진광화와 밀양 사람 윤세주가 중국 대륙 깊숙이 태항산 골짜기에 묻혔다. 해질 무렵이었다. 정숙은 비 뿌리고 진한 핏빛으로 젖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몸이 땅에 묻히면 영혼은 노을에 묻히는가. 이곳에서 세주의 고향은 너무 멀구나. 그의 노모는 이 시각에 무얼 하고 있을까. 밭에서 호미질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려나. p551~553
출처; 네이버이미지, 포토그래퍼; 이봉섭
태항산, 세 여자를 읽기 전까지 태항산이 어디에 있는 어떻게 생긴 산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태산이나 황산처럼 험준하리라는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저 페이지를 읽고 나서 네이버 이미지로 찾아보았다. 전체는 아닐 것이지만 대강은 감이 오는 '태항산'이다. 저 압도하는 스케일에서 무엇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중국 내륙 저 깊숙한 골짜기에서 죽음으로 내몰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들의 후손인 나는 그들이 죽음으로도 지키고자 했던 이념과 국가에 부합한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자신 없다.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지만 그들의 죽음 앞에서 서늘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소설로 불러내는 개인은 "평양 사람 진광화와 밀양 사람 윤세주가 중국 대륙 깊숙이 태항산 골짜기에 묻혔다. 해질 무렵이었다. 정숙은 비 뿌리고 진한 핏빛으로 젖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몸이 땅에 묻히면 영혼은 노을에 묻히는가. 이곳에서 세주의 고향은 너무 멀구나. 그의 노모는 이 시각에 무얼 하고 있을까. 밭에서 호미질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려나."로 그려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소설이 있어, 책이 있어,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영영 그들을 모른 채로 살았을 것이다.
우리의 근 현대사가 이념에 휘말려서 사회주의자인 이 사람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한 세기가 지난 이 봄, 소설 속에서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들을 소환해보고 그들의 기록을 살펴본다. 이제 이 이름은 기억될 것이다. 진광화, 윤세주, 김원봉. 사는 동안 치열했던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후손인 나의 소임이다.
진광화 陳光華, 1911년 ~ 1942년
일제강점기 용진학회 집행위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본명은 김창화(金昌華).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다.
1925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의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서회’에 가입해 진보적 학생들과 함께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식민지 조국의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해 숭덕중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일제 경찰 당국의 추적을 받게 되자 동지들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남경 오주(五州)중학교에 입학해 중국어 등을 수학하는 한편, 한국인 학생들의 비밀조직인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33년 오주중학을 졸업하고 광주(廣州)의 중산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한국인 학생단체인 ‘용진학회(勇進學會)’에 가입했고, 1933년 10월에는 이 학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중국내 항일운동과 반봉건운동을 주도하였다.
또 1935년 여름에는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중국청년항일동맹’에 가입해 중국 학생들의 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 이 해 12월 12일 중국 광주(廣州)의 중산대학 학생 3,000여 명이 참가한 항일시위운동 ‘12·12학생운동’에 주요 지도자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12월 중순과 하순에 전개된 광주(廣州) 학생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광동 군벌 진제당(陳濟棠)의 탄압으로 1937년 1월 중순 체포되어 잠시 옥고를 치렀다.
1936년 7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37년 6월 중산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뒤 광주 교외 농촌의 소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광주청년항일선봉대’ 등 항일조직을 건립해 항일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같은 해 9월에는 중국공산당의 근거지 연안(延安)에 있는 중앙당학교에 가서 공산주의 사상과 이론을 학습하였다.
그 뒤 중국 관내지역의 한국인 독립운동 조직인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진기로예(晉冀魯豫) 변구(邊區) 당학교 교무과장과 조직과장 등을 맡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말에는 한국인들의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또는 중앙특파원)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진기로예 지회 지회장을 겸하며 중국 관내지역 한인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42년 1월에는 ‘조선혁명청년간부학교’ 건립에 참여했으며, 이 학교의 부교장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의 교육에도 헌신하였다. 장기간의 독립운동에 따른 과로와 영양실조로 폐렴을 앓고 있었으나,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항일전투에 동참하였다.
1942년 5월 일본군의 태항산(太行山) 일대 포위공격에 맞서 ‘반소탕전(反掃蕩戰)’을 전개하다 산서성(山西省) 마전(麻田)의 화왕산(花王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중국 하북성(河北省) 한단시(邯鄲市) 혁명열사능원(革命烈士陵園)에 가묘가 있고, 하북성 섭현(涉縣) 석문촌(石門村) 뒷산에 묘와 기념비가 있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윤세주 尹世胄, 1900년 ~ 1942년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에 입단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
일명 석정(石正)·소용(小用)·소룡(小龍). 경상남도 밀양 출신.
1919년 3·1운동 때밀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주길림(吉林)으로 망명,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만주에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한 뒤, 이해 10월 단원 곽재기(郭在驥)·황상규(黃尙奎)·이성우(李成宇) 등 수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성일보사 등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0년 3월 중국인으로부터 3개의 폭탄을 구입한 뒤, 동지들과 폭탄과 무기의 국내반입 및 군자금모금, 폭파공작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한 다음 각기 별도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이해 6월 매일 숙소를 바꾸면서 비밀리에 거사시기와 지점을 물색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력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7년김원봉(金元鳳)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고, 그해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윤세주의 최후에 대하여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1942년 화북(華北)의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하였다는 것이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원봉 金元鳳, 1898년 ~ 1958년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약산(若山). 독립운동 때에는 최림(崔林)·이충(李冲)·진국빈(陳國斌)·천세덕(千世德) 등의 가명을 썼다. 경상남도 밀양 출생. 아버지는 김주익(金周益), 어머니는 이경념(李京念)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의열단·조선의용대를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잔류하여 활동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였으며, 1910년에 인근 동화중학(同和中學) 2년에 편입하였다.
1913년에는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니기도 하였으며, 1916년 중국에서 독일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김약수(金若水)·이여성(李如星) 등과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면서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귀국하는 김약수·이여성 등과 헤어져 길림(吉林)을 거쳐 서간도에서 폭탄제조법을 습득하는 등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1919년 12월 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의백(義伯: 단장)에 피선되었다. 의열단의 암살대상은 이른바 칠가살(七可殺)에 해당되는 자들로서 조선총독 및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와 매국적 친일파 거두 등이었다. 그들은 본거지를 만주와 상해·난징 등지로 전전하면서 국내의 경찰서 폭파,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속하였다.
6년 여에 걸쳐 의열단 단장으로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 조종하며 무력 항쟁에 의한 일제와의 투쟁을 지속하였으나, 연합투쟁 및 조직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에는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훈련생으로 입소하여 투쟁노선을 변경하였다.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北伐)에 합류하였고, 1929년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하고 1932년 난징에서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창설하는 데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았다. 1930년경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엠엘파(朝鮮共産黨ML派)인 안효구(安孝駒)와 제휴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기관지 『레닌』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2년 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혁명세력의 결집을 꾀하였다.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武漢)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혁명자연맹·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대일선전전(對日宣傳戰)에 주력하였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장개석(蔣介石)의 주선으로 김구(金九)와 함께 각 혁명단체가 공동 정강하에 단일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을 1939년 5월 발표하였다.
이러한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합작노력은 최창익(崔昌益) 등과 달리 당시의 민족운동은 계급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운동이 아니라, 일본과의 투쟁을 위한 연합전선 결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노선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는 ‘소시민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영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자신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이 이탈하여 김두봉(金枓奉)의 독립동맹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시에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전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으로 명단에 올랐으며, 귀국 후 계속 환국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어 임시약법기초위원(臨時約法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구축에 노력하였으나, 여운형(呂運亨)이 암살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하여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세칭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내각 노동상·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숙청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