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추가로 두 잔이나 넉잔이나 여섯 잔눕자마자 잘 수 있도록 잠자리에 들기 전에 두어 잔, 새벽 4시에 깨었는데 다시 잠이 오지 않을 때 몇 잔 더. 한편 맨정신을 유지하는어려운 일은 그냥 살아가는 일이라고 해도 괜찮지 싶다-술대신 행동을 적정하여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 핵심이다. 두려움과 불안과 불면의 밤을 관리하기 위해서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게 아니라무엇을 할까 하는 것, 삶이 무탈하고 안전하고 유의미하다는 느낌을 북돋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하는 것,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어떤 육체적 자양분이나 정신적 자양분을 흡수할까하는 것. 여기에는 또 다른 시행착오가 필요한데, 이 시행착오는그냥 마시면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해야 겪을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상당히 더 까다롭다. - P196
나는 자유로운 저녁과 주말을 어떻게 쓰기를 좋아할까? 내게 혼자 있는 시간과 함께 있는 시간의 적절한 혼합 비율은 얼마일까? 나는 타인이 나를 얼마나 접촉하고 사랑하고의지하면 좋겠는가? 내가 정말로 허기를 느끼는 대상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재미를 느끼고, 무엇에서 위안을 얻고,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일까? - P197
술을 끊는 일은기차 사고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좀 비슷하다. 당신은 멍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일어나서,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다 머리가 맑아지고 트라우마가 잦아들면, 자신도 모르게 망연히 잔해를보며 서 있게 된다. 저기차에서 내린 나는 이제 누구지? 이제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거기까지 어떻게 가지? 이것은 겁나는 시기이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는사실을 자주 상기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기인 건 맞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이기도 하다고. - P199
저는 아빠에게서, 아빠를 보면서 술 마시는법을 배웠으니까요. 아빠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늘 마티니를 한 피처 가뜩 만들었죠. 그걸 한잔 마시면, 아빠에게서 긴장감이 스르르 빠져나갔어요. 아빠가 마음속에만 꽁꽁 담아둔 어떤 뾰족한 감정들이 술 앞에서는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무뎌진다는 걸, 저는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아빠에게는 늘 슬픔의 기운이 있었죠. 이유는 제가 영영 알 수 없었지만, 아빠의 눈을 보면 그랬어요. 아빠가 가끔 동작을 멈추고 우리를 모두지나쳐서 방 건너편을 응시하는 모습을 보면. 그럴 때 아빠는 미간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고, 표정이 조용히 깊어졌고, 뭔가를 원하고찾는 듯한 분위기였어요. 슬퍼 보였고, 생각이 딴 데 있는 듯했고, 멀게 느껴졌어요. 그걸 보면 전 제가 느끼는 감정이 저런 것이겠구나 싶었어요. 저는 그 표정을 알아요. 아빠가 술을 마시면 한결 편안해졌다는 것, 아빠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나중에 제가 규칙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 그것과 똑같은현상을 경험했다는 걸 알아요. 그건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이 10도쯤 어긋나서 초점이 맞지 않는다는 기분, 그런데술이 그걸 바로잡아줘서 우리가 내면의 균형을 되찾게 되는 듯한기분이죠. - P202
제가 제일 좋아했던 건 아빠와 마시는 술이었다고 말씀드려도놀라지 않으시겠죠. 아빠는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어요. 아빠가 던지는 캐묻듯 분석적인 질문들, 태도에서 드러나는 슬픔의 기색 저는 아빠의 지성과 통찰력에 주눅 들었고, 아빠 앞에서 종종말문이 막혔고, 제가 뭐라고 말하든 부적합하거나 지루한 말일 거라고 확신했어요. 술은 그 상황을 누그러뜨려서, 더 정상적인 평면이라고 느껴지는 차원으로 우리 둘을 내려보냈어요. - P203
어떤 하나의 사건 때문에 건강했던 사람이 아파지는 게 아니고, 어떤 하나의 비정상 세포가 분열하거나 돌연변이를 거쳐서 사람의 미래를 바꾸는게 아니니까요. 그저 느리고 불분명한 과정이 있을 뿐이죠. 우리는자신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죠. 알지만 알지않으려 하죠. 자신이 충분히 끊을 수 있다고, 관리할 수 있다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불안해서 홀짝홀짝, 부정하려고 벌컥벌컥. - P205
한편 술을 끊은 요즘 내가 쓰는 수단은 예의 그 충동들을 더 건전하게 다룰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더 안전하게 스스로를 위로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는 대신그것을 대면함으로써 나아질 수 있는 전략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일은 쉽지 않다. 이 일을 해내려면, 가끔은 불안이 들이닥칠 때 사소하되 낯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든지, 목욕을 한다든지, 가만히 앉아서 차를 마신다든지. 또 가끔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 지난 4월은 내 아버지의 3주기이자 어머니의 2주기가 되는 달이었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다. 어머니의 기일 무렵 어느 날, 저녁에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채로 집에 혼자 있게 되었다. 나는 가끔 내가 감정에 대해서 공포증을 겪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날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니, 감정이 마치 오래되고 익숙한 적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 P221
사라지는 것이 또 있다. 두려움도 약간 사라진다. 마취제 없는삶은 격렬한 운동과도 좀 비슷하다. 각자 선택했던 중독의 대상이없는 채로 고통스러운 순간을 반복하여겪다 보면, 결국에는 감정의 근육이 길러진다. 우리가 술을 마셔서 혹은 굶어서, 먹어서, 도박을 해서, 살을 찌워서-감정을 몰아낼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셈이다. 자신의 두려움과 자기 의심과 분노를 이해해볼 기회를, 마음속에 묻혀 있는 감정의 지뢰들과제대로 한번 싸워볼 기회를. 중독은 우리를 보호해줄지 몰라도 성장을 저지한다. 사람을 한층 더 성숙시키는 인생의 여러 두려운 경험들을 우리가 온전히 겪지 못하도록 막는다. 중독을 포기하면, 그래서 그런 힘든 순간들을 온전히 겪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근육들을 구부리게 된다. 자라게 된다. - P224
중독은 즐거움과 기쁨과 놀라움을 마비시킨다. 우리가 진정한 친밀감, 진짜 웃음, 진실된 통찰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붙잡는다. 마취제를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의 인간성에서 가장 의미 있는 측면들을되찾을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삶을 살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그걸 상상해보라. - P225
여성 해병대가 없다면, 우리는 무력하다. 희망이 없다. 내가 베리처럼 솔직하지 못하고, 걱정이 지나치고, 자존심이 결여된 반응이내 입에서 나오는 걸 듣고 앉았던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일일이 셀 수 없을 지경이다. 어느 편집자가 내게 다른 곳에서 받을 수 있는 돈의 4분의 1에불과한 돈으로 글을 써달라고 하면, 나는 말했다. "아, 그러죠, 그정도면 괜찮습니다." 예전 상사가 내게 불합리한 호통을 백만 번째 치더라도, 나는묵묵히 삼켰다. 일에서만이 아니다. 사귀는 남자가 내게 내 본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치장하는 게 좋겠다고 암시하면, 나는 순순히 따랐다. 그를 만족시킬 일을 하고, 그를 만족시킬 말을하고, 무엇이 되었든 그가 기대하는 바를 행했다. 내가 아는 남자들은 대체로 그러지 않는다. 지금 언뜻 생각해보아도, 개에게 뼈다귀 던지듯 알량한 연봉 인상을 제안받으면 책상에서 고개를 들고 상대에게 이렇게 대꾸할 남자가 다섯 명은 떠오른다. "농담이겠죠." 어쩌면 그들도 그렇게 대응하는 것이 괴롭고 초조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여자들은? - P243
이것이 바로 여성의 분노다. 속에 묻힌 분노 금기가 된 분노우리는 그것을 느낄 줄조차 모를 때도 많다. 그동안 발전해온 페미니즘이 도움이 되기는 했다. 이제 여자들은 사적인 관계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데 좀 더 능숙해졌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생각은 이제 사실상반박의 여지가 없는 생각이다. 여자가 하는 노동의 가치가 남자가하는 노동의 가치와 동등하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신념을 철저히 내면화하기까지는 아직 갈길이 멀다. 우리가 그런 신념을 뼛속까지 새겨서 적절한 말을-가령 "싫습니다" "아쉽지만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같은 말을ㅡ술술 내뱉게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은 너무 많은 여자들이 착해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 P244
그러니, 여성 해병대를 만들자. 새벽같이 일어나서, 자긍심으로 고개를 높이 쳐들고 이층 침대를 박차고 나가자. 무력감을 떨치고, 분노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억지로라도 익히고, 자신의감정과 요구를 남들에게 정확하게 말하는 기쁨을 배우자. 만약 그것으로도 안 된다면, 남성 해병대가 갖고 있는 다른 도구라도 빌리자. 무기 말이다. - P245
내 경우에, 그 교수는 내가 엄청나게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조언을 듣고 싶었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내 글을 칭찬했고, 내게 기자가 되라고 격려했다. 나는? 나는 막 학업을마친 상황이었고, 숫기가 없었고, 자신감이 별로 없었고, 이제 세상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압도되었고, 겁먹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우상으로 여기던 마음을 버리고 그가 잘못된 혹은 도를 넘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또 내가순진했던 게 아닌지, 남자와 함께 마티니를 마시면서 거기에 야릇한 의미가 없다고 가정했던 것이 잘못이 아닌지 걱정되었다. 내가그런 일을 가능케 할 만한 행동을 했던 게 아닌지, 사귀고 싶다는신호라도 내보냈던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내보낸 것은 다른 신호들이었을 것이다. 불안정의 신호,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의 신호,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의 신호, 이것은 강력한 감정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어떤 남자들은 이런 감정을 포착하는 능력이 남다른 것 같다. 그들은 인정 욕구를 정확히 가려내고대상에게 접근한다. - P249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상황이지만 특별할 것은 전혀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일은 노상 벌어진다. 돌아보면, 그때 내가 가장 괴로워했던 문제는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우리 문화는 육체적인 측면이 아닌 측면에서도 자신에게 만족하는 여자아이, 자신을 한 온전한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귀한 존재라고 느끼는 여자아이를 길러내는 데 능하지 못하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겁먹고 불안정했던 스물한 살의 나는 그런 시기의 표본과도 같았다. - P250
그러다 어느 시점에, 너무 수치스럽고 역겨워서 그도 나도 견딜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없는 용기를 끌어모아서 그의 연구실로 그를 만나러 갔다. 너무 불편하고 이상해서 이 상황을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더듬더듬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그가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던 것도 기억난다. "글쎄, 연인이 되지 않을 거라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우리는 다시는 말을 섞지 않았다. 권력 남용은 어떤상황에서도 잔인한 짓이다. 하지만 성적인측면에서의 권력 남용은 특히 더 잔인하다. 몇 해전에 그 교수가심장마비로 돌연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딱히 슬프지는 않았다. - P251
어느 시점에 나는 예전에 거식증과 길고 끈질긴 싸움을 벌일때 입었던 청바지들이 보관된 서랍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작다 못해 해골에게나 맞을 듯한 사이즈의 청바지들은 나쁜 기억이 묻은물건들이었다. 더 건강하게 살려고 애쓰기 시작한 사람의 인생에는 존재할 자리가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오랫동안 그청바지들을 붙들고 있었고, 그럼으로써 언젠가 다시 그 담배 굵기만 한 청바지들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언젠가 다시 그 청바지들이 맞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따라서 지금 거식증으로부터 ‘회복‘했다고 느끼는 상태가 잘해봐야 일시적이고 최악의경우에는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붙들고 있었다. - P257
내가 생각하는 요령은, 두려움과 감정을 관리하는 법을 익히는것처럼 물건을 관리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물건 무더기들에 논리를 좀 적용해보는 것이다.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중요한 전화번호를 몇 개 버린다고 해서 세상이 정말로 무너질까? 기억이 담긴 물건들을 버린다고 해서 내 과거도 정말로 함께버려질까? 저 리본들이 다 없다고 해서 내가 죽을까? 손톱만큼이라도 문제가 생길까? 아니, 아닐 것이다. 그래도 저 은행 명세서들은 계속 갖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혹시 모르잖아. - P259
부모님의 집은 혼돈 그 자체였다. 우리는 38년동안 쌓인 물건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내버리고, 상자에 담아야 했다. 어느 구석을 보나, 어느 표면을 보나 거기에는 수십 년 치의 감정이 숨어 있었다. 그러니 내가 내 집에서 발휘하는 정리벽은 그에대한 아주 강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가 내면의 무질서와격변처럼 느낀 상황에 대한 방어 행동이었다. 그것은 두려움에 압도된 나머지 통제력을 갈구하는 행동인데, 나는 과거에 거식증을겪을 때도 그랬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혼돈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통제하려고 든다. 무엇이든 좋으니 무언가를, 이를테면 자신이 섭취하는 칼로리를, 자신의 몸무게를, 자신의 환경을 공황에 빠진 사람은 이상한 짓도 하게 된다. - P267
난데없이 끔찍한 방식으로 세상에서 지워져버린 수천 명의 사람들과는 달리, 이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의식적으로 또한 준비하면서 다가갈 기회가 있다. 할 말을 할 기회가, 모두를 소집하는 자극으로 작용하는 재난이 없어도 서로를 도울 기회가 있다. 물론 이 또한 지치는 일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일인 데다가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멍한 감정과 수동적인 태도를 가르는 구분선이 아주 희미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헌혈을 할 수 있다. 구호 단체에 후원금을 보낼 수 있다. 편지를 쓰거나 청원서에 서명할 수 있다. 또한 나는 내 작은 세상 안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각자의 작은 세상들은 지금처럼 모두가 뒤엉킨 감정으로 멍한 시기에도 우리가 반드시 알아봐야 할 선물이다. - P281
하지만 순환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계절의 순환도, 감정의 순환도, 여름의 불안은 왔다가도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올여름에 내 몫의 좋은 날을 누릴 것이다. 기분 좋고 낙천적이고 마음 가벼운 날, 내 내면의 풍경이 바깥 풍경과 일치하거나 적어도 좀 더 비슷해지는 날, 내가 맨발에 밟히는 모래와 살결에 와닿는 더운 공기를 즐길 수 있는 날, 그런 것들이 모두 괜찮게 느껴지는 날. 그리고 나는 나쁜 날도 겪을 것이다. 밝고 가벼운 것들이 모두 미워지는 날, 어두운 고치를 그리워하는날,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을 보면서 그 향기 나는 작은 머리통들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날.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요령껏 대처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처방책이 있기 마련이다. 따뜻한 날씨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쓸 전략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확신하는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신이 영화관을 발명하신 것이다. - P295
나는 내 집에 있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11년이 걸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11년하고 일주일하고 사흘이 걸렸다. 나는 1984년 8월 8일여기 보스턴으로 이사 왔다. 그때는 여기서 영원히 살겠다는 생각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1년, 길어야 2년쯤 머물 거라고 생각했다. 보스턴은 기착지라고,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나 런던처럼 더 크고더 색다른 장소로 옮길 때까지 잠시 짐을 내려놓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잠깐 머무르는 거라고, 장소에 대한 나의 애정은 유동적이라고, 내가 애착을 느끼는 대상은 장소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문득 깨달았다. 세상에 내 삶은 여기에 있어,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 내 집에 있어. - P296
그래서 나는 쇼핑하러 갈 것이다. 내 능력껏 문제를 풀 것이다. 어쨌든 이번 고비는 넘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옷장이 언젠가 다시 기능부전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내가 여자라서 그런 것도 있겠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만큼 견고한 내면의 평안을 찾아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이혼을 앞둔 내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은 지난17년 동안 기혼자처럼 옷을 입어왔는데 이제 다가오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서는 어떤 모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하다며, 새 옷과 화장품을 사는 데 한밑천을 쓰고 있다고했다. 이것은 내면과 외면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라고, 두 가지가 발맞추어 가도록 하려는 시도라고, 친구는 말했다. 이것은 평생에 걸치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블루밍데일이 있는 게 그 때문이다. - P307
이제는 나도 자신을 제법 잘 알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한 답도안다. 그날 아침에 나는 싱숭생숭했고, 초조했고, 약간 외롭고 우울했다. 이전 며칠 동안 너무 많이 먹었고, 일을 미뤘고, 친구들에게연락한다거나 푹 잔다거나 하여 기운을 되찾아야 했지만 그러지않았다. 이럴 때 운동이 실제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좀 더 활기찬모드로 전환하는 방법, 무기력함과 그렇게 무기력한 자신이 나태하다는 기분에서 벗어나는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 아침처럼 운동이 과거의 운동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운동이 나 자신을 벌주는 방법, 말그대로 나자신을 때려눕히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날 물결이 거칠 테고 노 젓기가 불쾌하고 힘들고 외로우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나갔다. 그런 것은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혐오 활동이다. 그리고 내가 지겨운 것은 바로 이런형태의 운동이다. - P312
그 산책들은 육체의 움직임과 사교의 즐거움을 둘 다 균형 있게 갖춘 활동이었다. 우리는 걷고, 말하고, 이따금앉아서 쉬면서 물도 마시고 야외에 나오게 되어 지칠 줄 모르고 신난 개들을 지켜본다. 그렇게 걷고 돌아오면, 육체적으로 활기를 되찾은 느낌뿐 아니라 다른 측면으로도 재충전된 느낌이 들었다. 세상과 이어져 있는 기분, 만족스러운 기분, 내 개와 좋은 대화와 숲의 고요함 등등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과 더 가까이 있는기분 사실 나는 걷기를 운동으로 ‘쳐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파야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생각이 든다. 아마 처음 떠올리는 생각인 듯한데, 우리의 마음 또한 여러 면에서 하나의 근육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체육관에서 운동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체육관 밖에서도 돌봐야 하는 근육이라는것이다. - P313
화를 터뜨리는 편이 언제나 효과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화를내면 반드시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상처가 낫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나쁜상황이 열을 내면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싸움을 잘 고르는 것 못지않게 대상을 잘 고르는 것도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정신적으로 치고받을 의향과 능력이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화내는 것이효과가 있으려면 어느 쪽에게든 생산적이거나 유익하려면 관련된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서로 신뢰해야 한다. 두 사람 모두 괴로운 시기를 견뎌보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노라는 동전의 뒷면은 친밀함일 때가 많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겁나면서도 때로 가치 있는 일인 것은 그 때문이리라. 그러니, 비록 싫은 감정이기는 해도 나는 분노에 찬성표를 던지겠다. 열띤 언쟁과 눈물과 분해서 이를 가는 상황에 찬성표를 던지겠다. 내가 그 일에 영젬병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이 갈고닦을 가치가 있는 기술이라고 믿는다. 자, 다 들었으면 그만 좀 꺼져. - P325
신체적 결점이 실제로 있는 것이든 우리 생각일 뿐이든,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가짜라거나 쓰라리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자기 코가 코끼리 코만 하다고믿는 열두 살짜리 아이로 살아가는 것은 절대 재미난 일이 못 된다. 나는 또 이런 과장이 고통의 더 깊은 근원을 알려줄 수 있다고생각한다. 내가 머리카락이나 피부나 몸무게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날, 나는 그 불편함이 사실은 좀 더 복잡한 현상이라는 것, 그것은 외적인 면이 아니라 내적인 면에서 스스로 매력적이지 않다고(초라하다고, 흠 있다고, 나쁘다고) 느끼는 감정과 관련된다는 것, 내가 문제를 밖에서부터 바로잡고자 소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자들이 특히 자주 품는 그 소망의 논리는 이렇다. 내 머리카락이나피부가 완벽해진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내 나머지 부분들도 다 그럴 텐데. 과장은 이 점에서도 도움이 된다. 우리는 결점을 말도 안 되게부풀려 말함으로써 그것이 주는 압박을 좀 덜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비웃을 수 있고, 우리를 너무나 지치게 만드는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 숭배도 비웃을 수 있다. - P330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지점은, 문화적으로 지지받는 판타지와 실제 판타지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새하얀 웨딩드레스의 판타지에도 실제로는 어둡고 복잡한 실들이 엮여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꿈이든 특이한 꿈이든, 여자아이들이 실제로 품는 꿈은 신부가 되고 싶은 꿈보다 훨씬 더 풍성하다. 또한 여성이현실에서 겪는 체험과 훨씬 더 비슷하다. 그런 꿈은 우리가 자신에게 바라는 바를 반영하고(강해지고 싶다, 똑똑해지고 싶다, 아름다워지고 싶다), 우리의 실제 모습을 반영한다.(가족에 대한 혼란한 감정, 분노와 섹슈얼리티, 세상을 안전하지 않은 장소로 느끼는 기분.) 그런 꿈은우리의 은밀한 야망, 연결감에 대한 갈망, 우울의 씨앗을 보여준다. 그런 꿈은 여성으로 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 P336
오늘 아침 일찍 나는 강에 배를 띄우고, 청명한 8월 말 하늘 아래강을 거슬러 오르며, 배의 리듬에 수면에부딪혀 반짝이는 햇빛에 노가 물을 가르는 느낌에 넋을 잃고 몰입했다. 나는 스스로 강하고 유능하다고 느꼈고, 내 몸이 내가 가르친 대로 움직인다고 느꼈다. 그리고 계속 노를 저으면서 나는 내팔을 생각했고, 힘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생각했고, 내가 여성의 몸매와 체형을 규정하는 표준 방정식을 거스르는 데 이 스포츠가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를 생각했다. 평소 내 팔은 스웨터나 긴팔 옷에 싸여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가려져 있다. 나는 팔을 내보이지 않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내가 내 팔에서 느끼는 만족은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고, 이 점이 그 만족감을 특히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몸매에 관한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나 자신의 열정과 어떤 일을 할 줄 아는 능력들에서 비롯한 미적 기쁨, 안에서 나와 밖으로 드러난 아름다움, 날개가 된 나의 팔, 이것이 바로 해방의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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