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내 앞의 길은 텅 비어 있었고, 하늘은 검지만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아기가 자신을 창조하고 안식처가 되어주었으며 이제부터는 자신을 더 넓은 세상으로 안내해줄 몸에서 고픈 배를 채우려 젖을 빠는 모습을 떠올렸고,
아기를 위한 기도를 읊조렸고, 변화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우주에게 속삭였다. 이 아기가 가득 채워지게 해달라고.

[욕구들] 마지막 페이지

내 어머니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기겁했을 테지만,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고,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은심지어 어머니가 나를 좋아하고 기특해하고 가깝게 느끼는 것같다는 느낌까지 받았지만, 생애의 많은 부분을 나는 우리 사이에 몇 가지 배선이 초기부터 어긋났고 중추적 접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거나 유지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지닌 채 살아왔다. 어머니와 나의 언니 오빠 사이에는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나는 체질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아버지와 더 비슷했고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와 더 잘 맞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내가 매우 결정적인 측면에서 어머니의 원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나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이얼마나 확실한지 혹은 안정적인지 결코 확신하지 못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나와 어머니의 대화에는 언니와 어머니의 대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껄끄러움이 있었고, 우리 둘 사이에는 서로 진정으로 잘 맞는다고 느끼지 못했던 듯 약간이지만 조심스러워하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수년간 나는 어머니와함께 있을 때면 내향적이고 화가 나 있고 어두운, 마치 질풍노도를 겪는 청소년처럼 느껴졌다.  - P328

분노는 식별하기가 쉽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이를 악물게되고 피가 뜨거워진다. 화를 내고 침을 뱉고 싶어진다. 나는여러 해 동안 어머니가 나를 화나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그근원이 뭔지는 몰라도 우리 사이의 거리가 나를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씁쓸한 분노로 가득 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이해하게 된것, 혹은 다가가게 된 것이 있다. 프로비던스에서 만난 그 8월오후 같은 날들을 돌이켜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들춰본 적도없었던 그것은 그 분노 아래 깊이 흐르고 있던 슬픔이었고, 너무나 격렬해서 평범한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도 없는 연결에 대한 갈망이었다. 목소리로 표현했다면 그것은 울부짖음으로, 더없이 길고 더없이 외로운 곡소리로 나왔을 것이다. - P329

유년기의 그 상실들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 허기는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 상실과 허기에는 혼란이 거부가, 혹은 상처가 얼마나 섞여 있었을까?
그리고 그 후 자아의 고갱이는 얼마나 결핍되고, 얼마나 권리를 박탈당하고, 얼마나 슬픔과 자기혐오로 가득한 상태가 되었을까? 본질적으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정도에 관한 답이며, 또한 강박적으로 훔치는 이와 자기를 베는 이와 억지로 토하는 이, 그리고 그보다 덜 극단적인 방식이지만 역시나 자신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이들의 차이 역시 정도의 차이다. - P334

재닛과 캐슬린은 표현 수단은 다르지만 표현하는 감정은 동일하다. 그것은 감정들이 자신을 너무 가득 채우고 있다는 느낌, 너무 배가 고프고 너무 절실히필요하고 자신의 몸에 비해 그 감정이 너무 크다는 느낌, 그러므로 그 느낌들을 방출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애초에 그런느낌을 가진 것에 대해 자신을 벌하려는 강박이다.
이 모든 행동에는 말할 것도 없이 분노가 있다. 당신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너무나많은 필요를 느끼게 했으면서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엇이었든 필요를 느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 아래에는 가장 강력한 슬픔도 자리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아이의 슬픔,  - P335

알리는 것. 물론 이것이 굶기의 목표이며, 너무나 조심스레감춰져 있어서 자기 자신조차 모를 수 있는 숨겨진 의제다. 자해하는 이는 자기 존재의 중심에 있는 고통을 눈에 보이게 만들기 위해 칼로 긋는다. 거식증 환자는 자신의 허기와 취약성을 분명히 보이게 만들기 위해 굶는다. 극단적인 이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이게 나라는 사람이고, 이게 내가 느끼는 것이고,
이게 내가 필요한 걸 얻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들은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갈망에, 그러니까 인정받고 알려지고자하는 욕망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서 또한 당신이 어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 서라운드 입체음향으로 목소리를 부여한다. 또한 그 갈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뿌리를 내리는 슬픔에도. - P338

다른 사람들이 믿음직하게 그 필요를 충족해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허기는 참을 수 있는 것이 되고 분노와 막막함은 견디기 쉬워질 것이다. 한마디로 당신은 안전하다고, 당신이 알려져 있다고, 혹은 최소한 알려질 수 있다고 느낀다. 반대로 만약 그런초기의 조율과 안심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러한 안전함과 인정의 감각을 내면화하지 못했다면, 허기는 더욱 까다로운 문제가 되고, 분노와 막막함은 표면에 더 가까운 곳으로 옮겨가고, 슬픔의 바다는 더 넓고 깊어진다. - P339

무언극이 시작되는 시점은 허기가 우리를 압도할 때, 허기가 언어의 체계화 역량을 초과할 때다. 언어가 제 역할을 하지못할 때 우리는 다시 몸에 의지하게 되고, 우리가 느끼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려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몸의 행동과 강박과 충동을 허락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여자는 손으로 초코바 하나를 감싸 쥔다. 자기 팔의 여린 피부에서 피를 뽑아낸다. 목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다. 상징으로재편성된 사물과 신체 부위와 음식의 세계들이 세계들이우리 문화에서 여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할당된 세계들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속에는 여성의 슬픔의 언어 전체가 감춰져 있다. 이 언어가 평범한 언어를 대신하고, 평범한 언어에대한 절망을 드러낸다.  - P339

철학자 헤겔은 욕망을 결여, 부재로 상정했다. 라캉 역시 이관념을 한층 더 전개하여, 욕망을 이전에 유쾌한 것 혹은 만족스러운 것으로 경험했으나 이후 상실하고 만 무엇에 대한 갈망으로 묘사했다. 두 사람 다 불완전함, 빠져 있는 무엇, 초기에 발생하고 이후 결코 회복되지 않은 어떤 분리에 대한 근본적인 의식이 욕망의 본질적 부분이라 믿었다. 그 ‘무엇‘이 묻혀버린 기억이든, 아니면 한때 경험했으나 이제는 놓쳐버린 사랑이든 인정이든 안전함이든, 아니면 그런 경험에 대한 결코 충족된 적 없는 소망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를 계속 쫓아다니며괴롭히고, 우리 정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고, 영원히 순환하는 허기의 회로를 만든다.  - P340

하지만 균형 감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어쩌면 여자들에게는 유난히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페미니스트 저메인 그리어는 1999년에 완전한 여성』을 출간한 뒤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의 프로그램 <더 커넥션>과 한 인터뷰에서자신이 점점 더 자주 목격하게 된 어떤 광경을 묘사했다. 그것은 울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리던 눈물,
화장실에서 나오던 어떤 여자의 울어서 빨갛게 된 눈, 영화관에서 클리넥스 티슈를 한 움큼 쥐고서 털썩 자리에 주저앉던여자 우는 것은 언제나 사적인 일이며, 실컷 우는 것은 남몰래 하는 일이지만, 그리어는 우는 행위의 배후에 있는 슬픔이개인적 현상일 뿐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라고 보았고, 그것은수십 년에 걸친 사회변화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여전히 여자 - P341

지난 몇 년 동안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느냐고물을 때면 나는 매우 축약적이고 반어적인 답변을 내밀었다.
"아, 여자들과 식욕에 관한 책이에요. 알잖아요. 뭐, 불안, 죄책감, 자기혐오, 소외, 슬픔, 그런 얘기요." 이 대답은 효과가 있었다. 적어도 사람들을 질리게 하고, 이어질 질문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것 같았다는 점에서는 (나는 프로젝트 진행 중에 내 작업에 관해 말하는 걸 아주 싫어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지나자 그런 대답을 반복하는 일에 진저리가 났다. 무엇보다저 말이 내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더 어둡고 냉소적으로 들리기 때문이었다. 욕구-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만족시키는 일 -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엄청나게 고군분투하며, - P347

욕구가 고통스러운 감정의 조류를 헤쳐나가야 하는 장거리 수영인 것은 맞지만, 만약 내가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다른 조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면, 즉 어느 정도 희망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 주제를 다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내가 욕구라는 주제에 관해 보인 그 모든 어두운아이러니와, 한 여자가 만족을 향해 묵묵히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동안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걸림돌에 관한 나의 그 모든확신에도 불구하고, 내 책상 위에는 작은 희망의 토템들도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종잇조각, 인터뷰 원고, 자료 폴더, 컴퓨터 파일 들이, 고통의 조류를 거슬러 헤엄쳐 마침내 반대편 해안에 도착한 여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들과 그들이 해안 기슭에지은 새로운 욕망의 제단들이. - P348

또한 힘겹게 이뤄낸 변화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희망에 이르는 과정이 갑작스럽거나 극적인 경우는 매우 드물며, 자아의 - 새로워지고 향상되고 마침내 충만되는 수리가 우리가원하는 만큼, 혹은 소비주의 문화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암시하는 만큼 깔끔하게 성취되거나 온전하게 실현되는 일은 결코 없다. 희망은 의지와 끈기와 믿음에 관한 것이고, 대개 감지하기도 어려울 만큼 너무나 점진적인 개인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에 관한 것이며, 사람이 일상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고군분투, 그 진부하고 혹독한 영광에 관한 것이다.  - P349

흑백논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는 식욕 관련 강박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하는 방법이다. 초점을내면으로 (혹은 당신의 선택에 따라 천국 쪽으로) 돌리고, 자아를고요하게 만들고, 허기에 단순히 반응하기보다 허기의 진짜근원을 파악하는 법을 배울 것. 그과정에서 더 영양가 높은것으로, 그러니까 관계는 아름다움이는 신이든, 당신이 채움을어떻게 정의하든, 무엇이든 당신을 채워주는 것으로 그 공허의 일부를 채우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 P352

우리가 원하는 것, 중요함이라고 표시된 선반에 들어 있는것은 물론 연결이고 사랑이다. 인간 허기의 가장 깊은 근원에이름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들어가 살고 있는 억제의 상자들을 조각조각 박살 낼 수 있는도구는, 공허함을 산산조각 내고 그 밑에 묻혀 있는 희망을 드러낼 수 있는 커다란 망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사랑-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안고 안기고자 하는 사랑받아야 하는입장에서 당신이 한 경험이 훼손되었거나 불완전했더라도 사랑을 주고자 하는 욕망은 모든 허기에 항상 붙어 있는 상수이며, 거식증 환자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다이어트하는 사람들을 잇는 연결고리이고, 음식을, 섹스를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노력 뒤에 자리한 필요와 간절함의 끊임없는 박동이다. 우리는 이 광막한 느낌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묻혀 있던 갈망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일종의 영적 갈망의 한 형태로 볼수도 있고,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결국 이해는 이해에 그칠 뿐이다.  - P357

그때의 나는 모든 집착에 따라붙는 전형적인 착각, 즉 욕망의 대상을 문제가 아닌 해결책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체중과 먹는 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나머지는 따라서 해결될 것이며 평화로운 상태를 찾게 될 것이고 엄밀히 말해 내가 음식을 먹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먹어도되는 자유는 느끼게 될 거라는 착각. 그리고 그다음에는... 내게 딱 맞는 남자가 나를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평화를 찾게 될 거라는 착각. 내가 세련되고 성숙하고 침착하게 보일 수 있다면, 그러면 나는 세련되고 성숙하고 침착한 사람이 될 거라는 착각. 내 인생을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형태와 형식에 끼워 맞출 수 있다면, 그러면 나도 정상적으로 느껴질 것이고 문제들은 해결될 거라는 착각. 이런 착각의 잡탕에다음주까지 더하니 명료한 정신과 변화의 가능성은 모두최소한도로 줄어들었고, 내가 얻은 건 망상의 회전목마, 끝없이 맴도는 서글픈 악순환의 세월이었다. - P361

작은 걸음마들은 아무리 자신 없어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고요점을 벗어난 것처럼 보여도, 변화로는 아니라도 최소한 정보로는 이끌어준다. 걸음마를 내딛는 것은 고통스럽다. 멀쩡한한 끼를 다 먹으면 당신이 얼룩처럼, 암소처럼 무가치하고 역겹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당신에게는 들여다볼 무언가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검토해야 할 감정들이 남겨진다. 헤어진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그러면 집에 혼자 앉아 갈망과 공포로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지만, 그래도 당신이 그 불편한 감정을 참아낼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배우게 된다. - P363

내 생각에 열쇠는 통찰보다는 기꺼이 해보겠다는 마음과 더깊은 관계가 있고, 통찰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쓸모가 없다. 내 식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나는 아흔 살이 되어서도 상담치료를 받고 있었을 것이고, 그때까지도 가족과 과거에 관해 한탄조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족시켜야 할 필요와 인정받아야 할 저 필요, 이 작은 상처와 저작은 실망, 누구, 무엇, 어디, 언제, 왜, 왜 나야.
기꺼이 할 마음-기꺼이 실험하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끌을 집어 들고 바위와 저항을 쪼아나가는 일에 동참하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는 상당히 공허할 수 있으며, 그런 서사에는 행위가 없고 갈등도 별로 없으며극도로 희미하게 남은 플롯의 윤곽만 있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통찰의 맷돌에 넣고 돌릴 곡물이다.  - P364

당신 자신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고저 서사의 빈틈을 채우거나 서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된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막막함에 대한 해독제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믿음의 낟알이다. 당신은 아기처럼 작은 한 걸음을 떼고, 또 한 걸음을 옮긴다. 이 작은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저 작은 벼랑에서 뛰어내린다. 그 일을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하면 그러는 사이 어디쯤에선가 자신이 공허함과 절망의 순간들을 지나 살아남을 수 있음을, 고통을 기쁨으로 상쇄할 수 있음을, 공포 대신 안전함을 느낄 수 있음을 이해하기시작한다. 이 믿음을 영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아니든, 갓 생겨나기 시작한 이 믿음을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든 호의적인 우주나 어떤 더 높은 힘이나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든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믿음이란 당신이 힘든 밤들을 견디게 도와주고 좋은 밤들을 음미하게 도와주는 신비로운 감정의 저수지를 의미한다. 이것이 있으면허기가 나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걸, 나에게 필요한 도움과 영양을 실제로 내가 찾아낼 수 있다는 걸, 내가 괜찮으리라는 걸마음속에서부터 믿을 수 있다.
- P365

그래서 이대로 충분한가?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날, 더없이 괜찮은 날 나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축복을 하나하나 꼽아볼 것이고, 힘들게 얻어낸 친밀한 관계들에관해, 두려움을 상대로 한 작은 승리들에 관해, 친구들과 개와숲과 일에 관해 말할 테지만, 그래도 완전한 확신을 갖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완전히 확신하는 답, 최종적인 휴식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든 욕구를 이해하고충족하는 일,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달하는 일이란 가능하지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흡족함의 순간들, 별안간 몸과 마음과정신이 나란히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고,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더없이 소박하게 포장되어 도착한다. 내 개가 보내는 사랑의 시선으로, 친구와 나누는 농담으로, 여기서 느끼는 애정의 불씨, 저기서 느끼는 이해로 그 순간들은 내가 막 노를 젓기 시작할 때 수면을 비추는 아침 햇빛 속에서, 완벽한 한 끼 식사, 완벽한 한 문 - P370

장, 어떤 손길, 어떤 눈빛 속에서 온다. 마침내 이 삶에서 얻는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를 순간들이 있다. 섬광처럼 스치는 만족감, 얼핏얼핏 희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과 맛, 파이처럼깊이 음미하며 완전히 누려야 할, 아주 잠깐의 순간들이. - P371

진통은 다섯 차례 왔고 그때마다 언니는 열심히 힘을 주었으며 산과 의사의 격려가-그거예요, 잘하고 있어요ㅡ쏟아졌고 그러자 경이롭게도 작은 사람이, 추상에서 갑자기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된 특별한 존재가 나타났다. 나는언니의 왼쪽 무릎 옆에 서서 언니가 내 손바닥을 밀며 힘을줄 수 있도록 언니의 왼발을 잡고 있었다. 마지막 진통과 밀어내기를 하는 동안 나는 아래를 보고 있었는데 그때, 그 몇 초사이에 작고 둥근 아기 머리통의 곡선이 나타났고, 그런 다음갑자기 어깨가 나타났고, 그런 다음 아주 작은 몸 전체가 아직도 태아 자세로 말린 채 작디작은 주먹을 작디작은 가슴에 꼭 - P375

붙인 채 나타났다. 한 명의 인간이, 겨우 몇 초 더 탯줄로 엄마와 붙어 있다가 이내 탯줄이 잘리며 분리되고 스스로 숨을 쉬게 되자 입을 열어 최초의 숨 가쁜 흐느낌을 뱉어냈다.
나중에 나는 친구들에게 이 경험을 두고 숨 막히게 감격적인 기적과 드라마 <엑스파일>의 한 에피소드를 섞어놓은 것같았다고 묘사했다. 글자 그대로 그렇게 밀어내는 일과 그렇게 피를 보는 일, 그리고 분홍빛이 돌기 전까지는 섬뜩한 회색빛을 띠던 아기의 피부에는 거의 원초적으로 영화적인 뭔가가있었다. 자연 세계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사는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일은 대부분 공포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고, 실제 분만이 진행되는 동안 잠시 나는 마치 영화를볼 때처럼 내가 그 장면에 속해 있지 않은 듯한 어떤 분리의감각을 느꼈고, 온몸을 때리는 충격과 함께 일순 도저히 믿을수 없다는 생각도 스쳤다.  - P376

그러나 바로 다음 몇 초야말로 내가 정말로 기억하고 싶은순간이다. 탄생이란 정말로 자연의 가장 특별한 위업이기 때문이고, 내가 여성의 몸에 대해 그때만큼 깊은 존경심이나 경외감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몸을 창조하는 몸. 생명을 창조하고, 그런 다음 그 생명을 자신의 생명줄과 수액으로 - P376

된 망으로 품고 보호하고 영양을 공급하고, 이어서 세상으로내보내 인간의 삶 자체를 생성하는 데 필요한 정교한 지식과기가 막힌 능력을 갖추고 있는 여자의 몸. 나의 언니가 대단한집중력과 우아함으로 이 존재를 세상에 내어놓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 그리고 자궁을 벗어난 최초의 순간의 아기 - 작지만완벽한 모양을 갖춘 귀와 손톱과 발가락, 그 완벽하게 복제된존재를 지켜보는 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 새로운 생명의약동하는 힘과 잠재력을 느끼고, 인류 자체의 잠재력을, 세상에 나가 암 치료법을 개발하거나 100미터 달리기 신기록을 세우거나 아니면 한 인간으로서 기쁨과 슬픔과 내밀한 고군분투의 삶을 살아갈 잠재력을 느끼는 일. 우리 각자가 수많은 타인들의 삶에 닿아 그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형성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 그리고 이 기적이 모두 한 여자의 몸 안에서 시작되어 한 여자의 몸에서 솟아나는일이라는, 숨 막히게 감동적인 사실. - P377

여성의 몸은 페미니즘이 가장 덜 건드린 미개척지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후의 미개척지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여자의 욕구, 그리고 자유와 권리 의식과 기쁨을 품고 자기 욕구를 마음껏 채울 수 있는 여자의 능력은 진보의 표지인 동시에 진보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얼마나 허기져 있는가? 얼마나채워져 있는가? 얼마나 갈등하고 있는가? 집으로 향하는 동안나는 이런 생각도 했다. 자신의 몸으로 방금 새로운 생명을 낳았고 이제 그 생명을 먹이고 어를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의 쌍둥이 언니에 관해, 모든 여자들과 그들의 몸에 관해, 우리 중얼마나 많은 이들이 몸을 축복이나 선물이 아니라 적이자 수치의 장소로 여기고 있는지에 관해, 우리 중 너무나 많은 이들이 문득 자신의 엉덩이와 허벅지와 가슴을 느끼고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절망과 질색하는 마음에 관해, 그 몸들이 과소평가되고 망각되고 무시되고 가장 잔인한 멸시의 원천이 되고마는 경악스러운 가능성의 강도에 관해.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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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라인 냅Caroline Knapp, 1959~2002

우리 시대 여성의 내면을 치열하고도 아름답게 묘사한 에세이스트이자 저널리스트, 
1959년 저명한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화가이자 주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브라운대학을 졸업한 뒤 <보스턴 비즈니스 저널> <보스턴 피닉스> <살롱> 등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흔들었던 욕구, 의존, 강박 등을 정직하게 드러낸 글쓰기로 많은 독자들과 평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2002년 4월, 마흔둘이라는 이른나이에 폐암을 진단받은 뒤 오랜 연인이었던 사진작가 마크 모렐리와 결혼했으며 그해 6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20년 가까이 시달린 알코올의존증을 고백한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반려견에 대한 깊은 애착에 대해 성찰한 《남자보다 개가 더 좋아》, 생전 칼럼을 묶은 유고 에세이《명랑한 은둔자》 등의 책을 남겼다. 《욕구들》은 저자가 거식증으로 고통받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식욕, 성욕, 애착,
인정욕, 만족감 등 여성의 다양한 욕구와 사회 문화적 압박에 대해 유려하게 써나간 생애 마지막 책으로, 암 진단을 받기 2개월 전에 탈고했으며 그가 죽은 다음 해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그가 써온 글 가운데서도 특별히 밀도 높은성찰의 시선이 담겨 있어, 독자들에게 더없이 깊은 인상을남겼다.


캐럴라인 냅Caroline Knapp지적이고 유려한 회고록 성격의 에세이를 쓴 작가.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1981년 브라운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20년 가까이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살면서 몇몇 끔찍한 중독에 빠진 경험이 있는데, 삶의 압박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땐 술로, 그런 자기 자신을 호되게 통제하고 싶을 땐 음식을 거부했다. 이런 자신의 깊은 내면 이야기를 솔직하게, 우아하게, 또렷하게 고백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Drinking》은 알코올 중독의 삶을, 《욕구들Appetites》은다이어트 강박증과 섭식장애에 관한 기록이다. 《개와 나Pack of Two》는 개를 향한 지나친 애착을 다룬다. 자신을 직시하며 그 감정과 생각의 결을 낱낱이 드러내는 글쓰기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2002년 마흔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캐럴라인 냅은 이 책 《명랑한 은둔자》에서 혼자 살고 혼자 일했고,
가족과 친구와 개와 소중한 관계를 맺으며 자기 앞의 고독을 외면하지 않았던 삶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강함과 약함을 있는 그대로받아들이면서 결국 삶의 명랑을 깨달은 저자로부터, 우리는 만난적 없지만 오래 이어온 듯한 우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재능이다.

흔히 말하듯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왔지만, 그럼에도 아주 결정적인 면에서 나는 페미니즘의 배를 완전히 놓쳤고, 내 생각에 페미니즘의 여정에서 진정으로 변화를 일으킨 국민들로 여겨지는 거대한 변화들을 놓쳤다. 이런 생각은 2세대 페미니즘 전성기에대한 낭만적 가정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항상 내가 1978년이아니라 1968년에 대학생이 되었다면 상당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며, 나 자신과 다른 여자들에 대해 더 급진적인 관점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나의 개인적 의식과 정치적 의식이더욱 정교하게 엮였을 것이라는, 어쩌면 순진할 수도 있는 믿음을 항상 품고 있었다. 어쨌든 2세대 페미니즘은 여러 측면에서 욕구에 관한 자유, 취할 자유ㅡ성적 자유, 법적 자유, 경제적 자유, 남자들만큼 저돌적으로 야심을 펼치고 권리를 주장할 자유, 온갖 다양한 형태의 허기를 가질 자유와 그 허기를 충족할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었으니 말이다.  - P242

나는 시대정신에 잘 휩쓸리는 부류인데, 아마 그런 특징이 이 낭만적인 생각의 바탕이 된 것 같다. 만약 내가 사랑의 여름에 스물한 살이었다면, 나는 우드스톡에 가고 헤이트애시베리로 이사하고 행진하고 시위하면서 나 자신, 내 몸, 내 욕구에 대해 더건강한 관점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나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실재하는 외부의 적들, ‘기득권층‘, 가부장제, 베트남전쟁에 맞 - P242

서 싸우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은 답할 수 없는 질문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저 질문들은 페미니즘이 어디까지도달했는지, 여성의 허기와 관련해 페미니즘 운동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유를 향한 투쟁이 우리 세대 여자들에게 욕구의 경험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고 바꾸지 못했는지에 관한질문이다. 내가 페미니즘의 전형적인 상속인이라는 것, 2세대페미니즘 행동주의가 수많은 방식의 가능성들에 대한 나의 의식을 형성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모든 종류의 허기들을 충족할 수 있는 지적 수단과 실질적 수단 모두를 제공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페미니즘이 지닌 변화의 잠재력은 어째선지 내게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페미니즘의 집단적이고 급진적힘은 끝내 내게 몸에 밴 감각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프로비던스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동안 나는 특히 여성 문제에끌렸다. 차별과 낙태, 여성이 당하는 폭력에 관한 글을 썼다.
여성의 건강, 언론에 나타나는 성차별, 문화적 이미지에 관해 - P243

서도 썼다. 심지어 나는 식사장애가 있는 (다른) 여자들에 관한 글도 썼다. 그런데 사적인 영역에서는 조용히 굶으며 나를
‘반쯤 죽음으로 몰고 갔다. 바로 이런 것이다. 지적인 신념은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서적 뿌리는 없다는 것. 페미니즘의힘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몸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 - P244

나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핵심을 놓쳤다는 이런 느낌을 주로 다른 이들과의 차이에서 알아차렸다. 친구들 중 나보다10~15세 연상인 여자들, 특히 대학 시절과 초기 성인기를 보스턴이나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 대규모 활동가 공동체가 있는 도시에서 보낸 이들은 거의 몸의 세포까지 페미니즘의 신념들을 흡수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바로 이렇게 극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내적인 변화가 혁명적 변화의정수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내게는 너무나 부럽게 느껴지는 육체적 느낌이 배어 있다.  - P244

문화가 우리 삶에 그토록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유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그와 같은 정보 공백 속으로, 섹스가무엇인지 혹은 어떤 것일 수 있는지에 관한 솔직한 논의의 부재가 남겨놓은 구멍 속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새어나온 메시지들이 스며들면서 우리에게 점점 더 명료하게 보이고들리게 되었다. 바로 그때 문화는 어조와 초점을 대대적으로바꿀 태세를 하고 있었고, 유난히 시각적이고 강렬한 종류의소비주의가 부상하고 있었으며, 쏜살같은 시각적 해일이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으니, 우리는 바로 그런 것들을 붙잡고 매달 - P249

린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이해해보겠다고 황급히 광고와 영화와 텔레비전에 나온 이미지들을 흡수했는데, 이 이미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육체적 아름다움과 성적 무력함에 대한 시각적 선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성숙한 육체와 초연한 눈빛을 지닌 젊은 여자들, 가장 상품화된 방식과 가장 유체 이탈적인 방식으로, 극도로 성적인 존재로만 그려진 여자들, 우리는 남자아이들에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고, 그러면 남자아이들은 우리의 신체 부위들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미모와 가슴 크기를 은밀히 측정하고, 우리의 순위를 매겼다.  - P250

내가 고등학생이 될 즈음 만개한 성혁명이 나를 포함해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제공한 도구 상자는 속이 절반쯤 비어 있었던 것 같다. 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그에 부합하는 ‘성적인 존재‘라는 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의식은 별로 없는 상태. 방문은 열렸지만 방안의 조명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 이는 ‘함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식의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던 성혁명과, 운동의 방향이 생식의 자유와 성적 건강이라는 더욱 구체적인 영역으로 기울어 있던 여성운동 사이의 (실제로 상당한) 차이에서 온 부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 P256

우리가 선택되는 대신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음식이나 옷에 대한 욕구를 이야기할 때처럼 우리의 성적욕구들에 대해서도 솔직히 말할 수 있도록 양육되었다면, 신체 부위나 가슴의 모양이나 허벅지 사이즈 같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성적인 몸 자체를, 그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만져질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검토하고 이해하도록 격려받았다면 우리의 느낌은 어땠을까? 이런 종류의 사고 틀은 당시 우리 의식 안에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 중 다수에게 30대나 40대 ㅡ 한 여자의 인생에서 행위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오랜 세월의 분투 끝에 마침내 뼛속에 자리잡게 되는 시기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계속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 P257

그 시절에 페미니즘 성정치 이론을 내가 접할 수 있었더라면, 나는 집단의식 속에서 남자들의 몸이 여자들의 몸을 가려왔던 길고도 깊은 역사가 있었음을, 수십 년 동안 성적 ‘정상 상태‘에 관한 문화적 정의와의학적 정의 모두 전적으로 남성의 성기능, 남성의 욕구, 남성의 체질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음을 판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P258

나의 몸에 대해 처음부터 두려움과 단절감을 느꼈던 나는거식증이 지닌 이런 측면을 매우 환영했고, 거식증이 주는 차가운 금속 같은 무성성의 감각을 필요로 하며 부추겼던 것 같다. 거식증을 앓던 몇 년 동안 나는 달리기를 했다. 3~5킬로미터씩 달리는 일에는 마치 강제 행진처럼 의무적이고 징벌적인 느낌이 있었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운동화 끈을 묶고서동부 프로비던스 거리들을 달리기 시작해 나를 밀고 나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의지의 시험이었고, 온몸은 긴장한 채 달리기에 저항했으며, 성냥 같은 두 다리는 너무나도 멈추고 싶어했다. 내가 달리던 동네는 사랑스러운 곳이었지만 고요했고 - P267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많았으며 우아한 빅토리아풍 건물들이줄지어 서 있었다-나는 그런 점을 잘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풍경에서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두 발과 빼빼 마른 허벅지에 주의를 집중하고 펌프질하듯 다리를 옮기고 옮기고 또옮기며 칼로리만을 생각했다. 1.5킬로미터면 100칼로리를 태웠으니 요거트 반 통 분량이야, 3킬로미터니 200, 점심 식사에맞먹는 칼로리군. 내 몸은 기계였다. 아니 적어도 나는 내 몸이 기계이길 원했다. 꼼꼼하게 검토하고 손볼 수 있으며, 인풋과 아웃풋을 측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 몸이 느끼는 고통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쾌락을 느낄 몸의 능력은 내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리비도는 살과 함께 사라졌고, 관능성은 머나먼 옛 기억이자 다른 사람들이나 경험하는 것이 되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서, 오직 머릿속에서만 살았다. - P268

조정이 아주 천천히 그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했다. 돌이켜볼 때 조정이 그토록 급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 자신의 몸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는 관계를 맺은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조정이 나를 바꿨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팔은 강하고 유능한 팔로 발달해갔다. 앞팔은 굳건해지고 근육질이 되어갔고, 위팔은 탄탄해지더니 정교한 근육의 골들이 만들어졌고, 어깨가 둥글고 강해졌다. 조정은 사실 다리의 스포츠라 여겨지지만-노를 젓는 힘은 대부분 허벅지와 엉덩이의 큰 근육들에서 나온다-  - P268

소비주의의 요란한 소음이 한창 울리는 가운데, 페미니즘은 메아리 비슷한 무엇, 저 멀리 다른 세대의 시계에서 들리는째깍 소리 같은 것이 되었다. 내가 보스턴으로 이사한 무렵에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자체가 혁명의 광채를 잃었고, 그 대신 극단주의, 유머감각 결여, 사납고 드센 남자 증오 등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속성들만을 연상시키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고, 몇몇 영역에서는 아직까지도 계속 그런 시선을 받고 있다. - P280

그 시절 나는 분명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지만 그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다소 반사적인 반응이었고, 이제는중요성이 사라진 것 같다는, 다 지난 옛날 일 같다는 스멀스멀한 느낌이 꽤 뚜렷이 기억난다. 이는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무관심과 환멸에 밀려난 정치적 행동주의 전반에 다 해당하는 일이었지만, 페미니즘 전선에 특히 더 들어맞는 말이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뿐 아니라 페미니즘의 성공 자체도 운동의 절박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우리 세대 여자들은 더이상 전투를 위해 무장하지 않았고, 전방에 나서야 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스포츠를 하러 운동장에 들어가거나 대학에 들어가거나 취업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서 힘겹게 밀고 나갈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혼자 힘으로 임대료와 공과금을 지불했고, 필요할 때는 낙태를 했으며, 우리가 궁극의자유라고 느끼던 자유, 다시 말해 역사에 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우리의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자유, 그 권리가 얼마나 힘겹게 얻어낸 것이며 얼마나 - P281

최근에야 얻어낸 것인지 잊어도 되는 자유, 1960년대 방식의페미니즘은 다소 따분하고 너무 극적이라는 듯 하품을 하고어깨를 으쓱하며 돌아보는 자유를 누렸다. 의식화 단체? 질경파티? 참나.
나는 이것이 매우 강력한 조합이자 또한 매우 강력한 상실이었다고 생각한다. 외현화하는 소비주의 사고방식-구매하라, 쇼핑하라, 지출하라-의 폭발적 확산과 페미니즘의 가시성과 추동력 감소가 어쩌다 발을 맞추어 진행된 것이다. 그로인해 거짓 약속이 공기를 한층 더 무겁게 했고, 욕망의 정의들이 가장 바로잡기 어려운 방식들로 왜곡되었다. 또한 시각까지 왜곡되었다. 페미니즘에 낀 짙은 망각의 안개에 가려, 권리와 전인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결코 끝난 게 아니라는 씁쓸한 사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시기를 회상하면굶기가 만들어주던 구조와 통제감을 포기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안정감을 뿌리 깊이 뒤흔들었는지 떠오른다. 내 몸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일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졌다.  - P282

2세대 페미니즘은 아주 짧은 기간이나마 그 패러다임을 폭파했다. 2세대 페미니즘은 여자들에게 욕망의 온전한 어휘들을, 욕망이라는 주제에 대한 여자들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언어-편협한 견해 대신 폭넓은 견해를 물질적 비전 대신 사회적 비전을, ‘립스틱‘이나 ‘바닥 광택제‘ 대신 ‘권리‘와 ‘권한‘ 같은 단어를 제공했으며, 그 생각을 널리 알릴 확성기를 제공했다. 1980년대에 자취를 감춘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그언어가 지닌 힘, 그 언어를 형성한 여성의 분노와 초점이 지닌결합력, 그리고 그 힘이 만들어낸 두터운 공동체 의식과 자매애 말이다. - P284

가짜 신들에게 매달리던 희망을 바른 길로 이끌고, 초점을다시 자신의 마음으로 돌리고, 자신의 개인적 고통을 더 큰 맥락에서 보는 법을 배우고, 몸과 정신을 연결하게 되는 것. 말할 것도 없이 이런 것이 혁명적 작업의 본질이며, 그 일에는언제나 프레임을 다시 짤 수 있는 언어의 잠재력이, 통찰을 촉진하고 사실들을 재배열하며 낡은 패러다임을 무너뜨릴 언어의 능력이 필요하다.  - P307

그 일을 위해서는 소비주의에, 여전히 남성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엄격하게 구축된 기업문화와 정치 문화에,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깊이 새겨진가정들에 정면으로 충돌해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 비전은 좀처럼 포착되지 않아 잘 논의되지 않을 수도 있고, <글래머>나 <레드북>에는 존재하지 않는 비전일 수있으며, 외현화하는 문화의 요란한 소음 때문에 분별해내기가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비전은 분명히 만들어진다.
비록 그 비전이 넓은 사회적 의미에서는 정치적이지 않을 수있지만, 무엇이 효과 있고 무엇이 적합하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의하는 일에서, 즉 개인적 정치에서는 분명 변화를 일으킨다. 어느 교회 지하실에 모여 허기와 포만이라는 개념을 재정의하던 한 무리의 여자들, 굶기를 재정의한 패션모델, 상담 - P310

실에 앉아 감각성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닦아가는 심리 치료사와 내담자, 홀로 강물 위에서 스컬을 하며 강함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한 사람. 공적인 전쟁터들이 오늘날에는 사적인 전쟁터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두 전투에 적용되는 역학은 대체로 동일하다. 무엇이든 당신을 몸과, 자신과, 다른 여자들과 연결하는 것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수 있다. 무엇이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빈 곳을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 P311

그러나 음식이 있기 전에 먼저 눈물이 있다. 체중의 수치가 그힘을 잃으려면 우리는 먼저 그만큼 강력하고 오래된 무언가를느껴야 한다.
나는 거식증을 놓아보내고 애도하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아주 뚜렷이 기억한다. 그것은 거식증이 주던 예측 가능하지만헛된 안전함의 상실 때문에 우는 것이며, 이는 사실 자기 자신, 바로 그런 안전함을 필요로 하며 굶는 것 외에는 안전함을확보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끼는 불쌍하고 겁먹은 자신 때문에 우는 것이다. 내게 그 일은 상담치료중에 일어났던 것같은데, 구체적인 기억은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 애도에 대한 감각기억은 남아 있다. 굶기를 그만두고 초창기에 - P315

느끼던 광란이 서서히 조용하고 집요한 슬픔으로,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허함으로, 마치 어떤 무거움이 만물의 모서리로 기어들어와 꿈쩍 않고 버티고 있는 것처럼 쇼핑으로도술로도 어떤 집착으로도 몰아낼 수 없는 허함으로 바뀌어가던몇 년에 대한 감각기억이. - P316

울었다. 그날 오후에는 울지 않았다. 시간은 늪처럼 흘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일분일 분을 힘겹게헤치고나가, 평소와 똑같은 무감각한 집중력으로 사과와 치즈조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바로 이 기억이 그 서글프고 금욕적인 존재에 대한 애달픈 비통함으로, 그리고 너무도 어리둥절한 상실감으로 나를 가득 채웠다. 그 강철 같은 방어벽을, 무슨 일이 있어도 끈기로 버텨내는 능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분명 무서웠지만, 그와 함께 기이한 슬픔도 느꼈다. 마치 굶기를뒤로하고 떠난다는 것이 어떤 씁쓸하지만 필수적인 위안에,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깊디깊게 신뢰할 수 있었던 자기 보호의한 방법에 작별 인사를 고하는 일인 것처럼.
치료사가 물었다. 거식증이 당신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했던건가요?
그것으로부터죠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건 바로 그 허함, 바로 그 절망과 실망의 강도, 바로 그 눈물, 항상 가까스로 흘리지 않고 버텨냈고 부인했고 굶음으로써 쫓아버렸던 그 눈물,
한마디로 슬픔이었다. - P318

슬픔은 통찰에 완강히 저항한다. 나는 불안과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조각들을 끼워 맞춰 퍼즐을 완성할 수 있고, 어디까지가 문화이며 어디까지가 몸과 자아로부터의 소외인지 깔끔한 선을 그어 구분할 수 있으며, 내 거식증의 역사를 이루는각각의 조각들에 대한 근원을 이런 순간과 저런 순간으로, 이런 교훈과 저런 메시지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할 수도 있다. 이모든 것의 저변에 슬픔이 흐르고 있다. 슬픔은 대지처럼 깊이자리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롭게 떠도는 듯하고, 욕구의 문제를끌어당겨 거기에 강렬하고 독특한 빛을 비추는 아주 신비로운힘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모든 개별적 갈망은 그 이글거리는 빛을 받으면 흐릿해져 구별할 수도 없게 된다. 거식증은나를 이런 슬픔의 감정에서 보호해주지 못했고, 거식증에서회복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 P319

"욕망은 절대 파괴되지 않는 영구성을 지니고 있다. 욕망은소멸하지 않는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그는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일에는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추구와 갈망의 조건인 허기의 경험과, 일시적 만족을 줄 수는 있지만 언제나 새로운 추구와 새로운 갈망에 밀려나고 마는 채워짐의 경험 사이에 감도는 긴장을 처음부터 지닌 채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 P320

프로이트는 인간의 ‘죽음의 본능‘에 관해 썼다. 이 말은 실제로 삶을 끝내고 싶다는 바람보다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들어 있음 직한 그 초기의 마취 상태와도 같은 지극한 행복의상태를, 원함과 존재함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완전한 평온함과 안도감의 상태를 되찾고 싶어하는 갈망과 더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그 상태로돌아가기도 하지만-음악이나 리듬이나 일이나 섹스에 완전히 몰입할 때, 마약을 하거나 술을 마실 때, 기도에 완전히 몰입할 때, 혹은 둥글게 만 몸을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딱 붙이고 반쯤은 잠들고 반쯤은 깨어 있는 상태로 누워 있을 때 우리는 그 상태에 들어간다-더 영구적인 상태로서는 이미 상실된 상태이며, 단지 그 상태에 대한 기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뒤섞이고 바래고 희석된 채로 우리의 영혼 속에 접혀 들어가 있을 뿐이고, 그마저 언젠가는 그저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것으로, 속삭임처럼 희미한 아픔으로, 무엇인가가 실로 빠져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만 남게 된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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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다른 대안적 존재 방식을 나는 배우지 못했고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 넣지 못했다. 자라는 동안 나는 어머니가 저녁상 차리기를 거부하거나, 빨래를 해놓지 않거나, 귀찮다고 장을 봐오지 않거나, 나머지 우리는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이 그러기를 원한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것은 책임감과 이타성의 그림이자 만족이 영원히 연기되는 그림이고, 내게는 이 그림이 거의비극적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이 그림은 자신만의 크고 정력적인 욕구를 지닌 여자는 어떠어떠한모습일 것이라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열정과 독립적인 욕망을 지닌 여자, ‘먹이다‘라는 말의모든 의미에서 자신의 가족에게 먹이는 것만큼 자신에게도 충실하고 한결같이 먹이는 여자는 거기 없다. 어린 시절 나는 확실히 그런 여자를 한 명도 알지 못했고, 상상해보려고 했다 해도 아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P136

리사는 크게 생각하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한다. "한 두단계 더 끌어올리는 것. 혹은 다섯 단계나 열 단계 더 끌어올리는 것. 매우 성공한 프로듀서로서, 작은 성공 이상의 것을이루는 것.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내 생각엔 내가 대대적인 규모의 기여를 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말을 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
리사는 이 질문을 붙들고 한동안 고심했다. 젠더와 제약에관한 다수의 전형적 주제들을 모두 아우른 고민이었을 것이다. 리사는 평생 흡수해온 여성성에 관한 메시지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살아오면서 언제부턴가 나는 튀면 안 된다는 생각,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쪽이 더 낫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 왜, 이타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 꿈을 이루도록 도와준다는 식의 이야기 있잖아요." 리사는 가족의 기대에관해, 자신이 한 선택들이 이미 무너뜨려버린 몇 가지 규칙들(리사네 집안에서는 여자들에게는 외모가 가장 중요한 것이고, 섹스는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며, 여성의 야망은 교직 같은 ‘고귀한‘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겼다)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 P138

이 이야기는 꽤 전형적인 젠더 이야기로, 여성성에 대한 명령들이 여성의 욕망을 어떻게 마비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사례 연구로 읽을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한 리사의 묘사가 특히큰 공감의 반향을 일으키는데, 그 이야기는 어린 시절 리사의부녀 관계에 너무나 자주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특유의 거리감과 그 거리감이 가져온 결과들을 통렬하게 증언한다. 리사의아버지는 딸의 호기심 많은 성격을 칭찬했고 리사가 똑똑하고사랑스럽다고 여겼지만, 리사의 표현에 따르면,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겨준 느낌은 항상 "여자들은 어째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존재들"이라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는 리사와 대화를 나누었다기보다 리사에게 일방적으로 말했고, 아버지에 대한 리사 자신의 동일시는 언제나 좌절당하는 것 같고 뭔가 좀 불완전한 느낌, 마치 리사가 아버지에게서 보고 자신도 몹시 갖고싶어했던 자질들을 자신은 좀처럼 흡수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P139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데, 한편으로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욕구들도 그렇게 고분고분 물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여성성에 대한 전통적 명령들 중 너무나 많은 것들이도전받고 논쟁의 장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언제나그 명령들을 시험할 수 있고, 실제로 시험하고 있다. 성인이되었고, 교육을 받았으며, 변화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그 명령들을 집어 들어 밝은 빛에 비춰보고, 성차별적이며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라 비판하고, 저 옆으로 던져버린다. 리사도 그런 이들 중 하나로, 여자들도 남자들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확고히 믿고 있다. 그리고 다른 많은여자들처럼 리사 역시 그 믿음에 도달하기까지 힘겨운 길을분노에 찬 길을 거쳐왔다. 외모로 평가당할 때 혹은 남자가 생각해주는 척하며 얕잡아볼 때, 똑같은 일을 하고도 더 적은 보수를 받을 때, 감히 자기 의견을 말했다는 이유로 ‘성질 나쁜여자‘ 취급을 받을 때 여자들이 느끼는 분노를 느꼈고,  - P140

바로 이것이 욕구가 힘겨워도 해내야 하는 일들이자, 완강한 제약들과 변치 않는 금기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성차별의 변종들에 맞서 매일 치르는 전투이며, 그 일들은 말할 것도없이 버겁고 힘들다. 여자가 자신의 힘과 유능함을 편안하게느낄 때까지, 더이상 자신의 성취에 대해 사과하지 않게 될때까지, 성취를 우연한 일이었다고, 행운이나 타이밍이나 상황의산물이었다고 해명해 넘기려는 본능에 저항하기까지, 자신의성취가 사기 같다는 느낌을 떨쳐낼 때까지, 자신의 성취를 진심으로 내면화할 때까지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또 자신의성적 욕구에 대해 주인 의식과 행위 주체성을 느낄 때까지, 자신에게는 욕망의 대상이 될 권리뿐 아니라 욕망할 권리도 있다고, 성적 쾌락에 내포된 모든 이기성과 통제의 어려움에 대한 위협까지 포함하여 성적 쾌락을 온전히 누릴 권리가 있다고 느낄 때까지도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 - P141

그런데 해결하는 데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것, 더욱 미묘하고 어리둥절한 방식으로 내내 우리를 들볶고갉아먹는 것은 더욱 깊이 느껴지는 뒤숭숭한 마음, 때로는 유기처럼, 때로는 배신처럼 느껴지는 모호한 마음의 소요다. 내생각에 이 마음은 어머니의 영토, 그러니까 어머니에 대한 앎이 자신에 대한 앎과 뒤얽히는 융합과 애착의 장에서 솟아난다. 우리가 그토록 되기를 갈망하는 ‘다른 존재‘ - - P141

그 감각은, 내가 정확히 이해한 거라면, 죄책감이며 죄책감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종류의 죄책감이다. 규정된 경로에서멀어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엄마에게서 멀어지는 한 걸음이며,
모든 성공 하나하나가 따끔한 모욕일 수 있고 모든 욕구에는 배신의 가능성이 배어 있다. 그것은 미묘하고 절박한 느낌으로, 여자가 식욕에 대한 비교적 실질적인 규칙을 어길 때 (다이어트를그만두거나, 마지막 남은 폭찹 한 조각까지 먹을 때 경험하는 평범한 종류의 죄책감보다 더 깊고, 상당히 더 비통하다. - P143

여자들에게 어렸을 때 성별에 관해 어떤 것을 배웠는지,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의식을 형성하는 데 어머니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물어볼때 듣게 되는 대답은 어머니의 억제된 욕망에 관한 단면적인 이야기나, 부드럽고 자기희생적인 엄마와 자주적이고 강한 아빠로 대비되는 성격 특성 구분만은 아니다. 그밖에도 훨씬 더 구체적이고 세세하게)가치의 구분들에 관한 이야기, 좌절된 욕망에 관한 이야기 힘과 가치에 관한 최초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마음의 갈등에 시달리던 어머니들,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들, 욕실의 규모 때문에 영원히 고통받던 어머니들, 유능함의 감각이 주방이나 블루밍데일스 백화점이나 화장대 앞에서만 나타나던 어머니들, 자신의 허기나 야망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나 기회가 한 번도 없었던 어머니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고통스러운 이야기들도 듣게 된다.  - P144

이것들이 뼛속으로 스며드는 이미지들이며, 여성의 가치와힘 혹은 그것들의 결여에 관해 서서히 축적되는 데이터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어머니는 가장 자애로운 우주의 중심이며,
무한한 힘을 지닌 존재처럼 보인다. 깊이 마음을 연결할 아버지상이 없는 상태에서, 허기와 추구의 모델로 삼을 수 있는 존재이며, 또한 여자아이가 필연적으로 유사시에 의지할 수 있는 존재, 아이 자신의 자아의 핵심을 형성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만약 여자아이가 사실은 이 인물이 집안에서 (아버지, 손위 형제자매, 더 큰 범위의 가족들에게 잔소리꾼 혹은 허울만 좋은 하녀 혹은 무력한 하인 정도로 인식되고 있음을 차츰 깨닫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P145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는 강하고 존경받으며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예외에 해당하며, 저밖나머지 세상에서는 여자들이 자기 어머니만큼 강한 존재들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폭력과 억압과 가난이 전 세계에서 살고 있는 여자들의 변함없는 부분으로 남아 있으며, 진정한 성 평등은 여전히 고질적으로 머나먼 꿈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벌어질까? - P145

모든 세대는 바로 앞 세대를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한다. 허기에 대한 모든 딸의 경험은 어느 정도는 허기에 대한 어머니의 경험에 의해 형태가 잡힌다. 어머니가 가졌거나 갖지 못한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 P147

했는지, 그에 비해 딸 자신은 어느 만큼을 원하는지 혹은 원하는 걸 스스로 허용할 수 있는지. 자신과 타인간의 이런 비교, 이런 이미지들이 모인 데이터 저장소,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거나 가치가 폄하되었거나 피로에 지친 어머니들에 대한 이런 기억들, 여자들은 권한도 힘도 야망도 섹시함도 덜하고 더넓은 세상에서 지원도 인정도 덜 받는 존재들로 표현되는 이현실. 바로 이런 것들이 여자들의 욕구 문제를 그토록 복잡한것으로 만들고, 배배 꼬여 풀리지 않는 단단한 매듭으로 만든다. 페미니스트인 어머니든 페미니스트가 아닌 어머니든, 가치가 폄하된 어머니든 번아웃된 어머니든, 어머니의 선택과 좌절, 온갖 한계와 제약은 딸에게 허기의 전형인 동시에 차이와저항의 잠재적 근원이 되며, 이는 가장 깊은 수준에서 상황을더욱 혼탁하게 만들 수 있고, 여자아이가 어머니에 대해 느끼는 동일시와 동질성의 감정들을 위험하게 느껴지게 하고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또한 그것은 허기를 분노와 짝지어버릴 수도 있다.  - P148

자신이 어머니와 반대쪽에 있음을 깨닫는 것은 은밀하고도필연적인 고통이 될 수 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눠본 몇 명의여자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달리는 이미지 혹은 지도 없이 항해하는 이미지를 환기시켰고, 독립적인 행로를 기록해간다는홍분감이 피할 수 없는 탈동일시의 감각으로 훼손되는 느낌을전해주었다. 당신은 계속 나아가고, 당신의 어머니는 뒤에 남겨진 채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혹은 어떻게 거기 도달할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당신은 변화에 대한 무서움과 죄책감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어머니가 방향도 알려주지 않은 채 당신이 떠나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아니 애초에떠나게 허용한 것 자체에 대해 격한 분노를 느낀다.
- P150

킴 처닌은 『허기진 자아』에서 여자는 딸로서 자신의 인생이반드시 자기 어머니의 인생을 반영하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지적한다. 어머니가 꿈을 이루지 못했거나, 무력했거나, - P150

어머니나 아내 역할 외의 모든 정체성을 박탈당했거나, 스트레스나 좌절감으로 피폐해졌다면, 딸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내릴 선택들을 고려할 때 견딜 수 없는 갈등에 직면한다.
어머니에 대한 의리와 "새로운 여성 존재가 되고자 하는 전념의 양극단 사이에서 괴로운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처닌은 이렇게 썼다. "성년이 되고 세상으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딸은 [어머니의] 부러움과 질시를 불러일으킬 위험에 처하는데.
그보다 더 나쁘고 더 고통스럽고 생각하기도 심란한 점은 이제 딸이 자기 어머니에게 어머니 자신의 실패와 결핍을 상기시키는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닌은 이 딜레마가 식사장애에서 핵심적이며, 여자가 자신의 몸에 가하는 그공격은 "어머니에 맞선 쓰디쓴 전쟁"을 은폐한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이자 표현할 수 없는 감춰진 분노다." - P151

죄책감은 동기를 불어넣는 강력한 요인이자 음흉한 요인이다. 죄책감은 불안처럼 끊임없이 날카롭게 윙윙 울려대진 않는다. 대신에 압박하고 무겁게 내리누르고 속삭이며, 기이하고우회적인 방식으로 불쑥 솟아나고, 거의 항상 배상을 요구한다. 나는 이 죄책감이 그날 주방에서도 기괴하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거라고, 나의 몸은 배신이라 여겨진것에 대한 대가로, 뼈에 새긴 속죄로 제시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를떠날 거예요. 하지만 난 굶주릴 거고, 아플 거예요, 그리 멀리 가지는못할 거예요. - P152

욕구를 마음껏 충족하는 걸 어려워하게 된 것은 어머니를 달래려는 행동을 그만두면서부터였다. 일에서 더 많은 존경과 인정을 받을수록, 집에서는 자신에게서 호사를 박탈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야망에 대해다른 영역에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일에서 갖게 된 힘을 개인 생활에서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맞교환한 것이다. 직업적 정체성과 목표가 분명해질수록 돈에 대한 두려움은 더커졌다. 자신의 재정 문제를 책임지는 것, 그럼으로써 그와 연관되는 성인으로서 자기 삶을 책임지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일처럼 말이다. 리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어머니의 간섭에서 더욱더 자유로워질수록 보상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더많이 느꼈던 것 같다.  - P154

정신의학자 루이즈 캐플런은 이런 종류의 흥정을 "원천징수방안"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여자들이 품을 수 있는 감각, 갈망과 추구는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는 일이며 그것을 마음껏추구하고 누리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속삭임처럼 어렴풋하고 거의 무의식적인 그런 감각에 대한 한 가지 반응이다.
캐플런은 이렇게 썼다. "여자는 항상 시달리고 있다. 사업에서많은 돈을 벌든, 의사로서 성공하든, 전시회를 열 수백 점의그림을 준비하는, 미생물학을 강의하든 아무튼 시달린다. 이런강력하고 주체적인 활동들을 하면서 신들을 달래기 위한 일을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여자는 엄청난 의식적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 이 노예가 자신의 영혼을 주인에게 바침으로써대가를 치른다면, 다음 청구서가 나올 때까지는 자신의 금지된 직업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노예에게 금지된 직업 중 하나는 섹슈얼리티이며, 또 하나는 지적 야망이다."  - P157

딸이 어머니에게서 멀어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아무리 신중하게 내디뎌도 혹은 아무리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도 모두가 달콤씁쓸하며, 거의 감지되지 않는 방식으로 고통스러울 수있다. 그리고 처한 상황은 다양해도 이는 아주 많은 여자들에게 해당하는 일일 것이라 생각한다. 가족과 직업 사이에서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여자들, 아이들보다 경력을 더 중요한 것으로 선택한 여자들, 자신의 갈망과 가족의 갈망, 친구들의 갈망과 동료들의 갈망까지 서로 경쟁하는 여러 갈망들 사이에서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여자들, 어쩌면 열 명 혹은 열다섯 명의 갈망이 포함되어 있을 필요의 뭉치에서 자신의 갈망을 조심조심 분리해내려고 애쓰고 있는 여자들.  - P159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뒤의 우리는 그것이 메리 혼자만의 일은 아닐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욕구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개인적 회계 - 얼마나 취할 것인지, 갈망과 제약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만족에 대해 글자 그대로든 비유적인 의미로든 대가를 얼마나 치를 것인지에 관한 내면의 수식-는 또한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산법, 배우자든 자녀는 동료든 어머니든, 제2의 당사자에 견주어 측정하고 저울질하는 방정식이 될수도 있다. 메리 올리비에는 그 딜레마를 완벽하게 포착했다.
"당신이 자신의 허기를 채울 수 있다면 당신은 다른 누군가를굶길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 P163

이 시대에 번성하는 젊음 숭배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고, 경험도 없고 주름살도 없는 순진한 이들에게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모욕적이며 실소를 자아내는 일인지도 알고 있으며, 이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두 개의 숫자, 5와 0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50이란 늙었다는 걸 의미했고,
정체성과 아름다움의 연결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그것은 활기와 성적 매력의 영역에서, 자신이 그 옛 남자 친구와함께 존재했던 그 장소에서 퇴출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축 늘어짐과 고장과 상실이라는 뭔가 다른 영역으로 던져지는 것을의미했다. - P172

나아가 섹슈얼리티에 전혀 섹시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을 엮어버리는 이미지들의 늪에 깊이 잠겨 있다면, 그리고 자기 주변에서 접하는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에 관한 수많은외적 정의들이 자신의 신체적 경험과 완전히는 아니라도 거의무관하다면, 어떻게 성감을 느끼는 자신의 몸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느끼는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 P181

완전한 취약성은 무서운것이지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며, 이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뼛속 깊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반대가 참이라고 주장하는 진술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면, 그 공포를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것으로 인지하기가 어려워지고, 그 공포를 포용하기는 더 어려워지며, 그 공포에 관해 말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또한 그 모순은 섹시해 보이는 것과 성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 사이의 이미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선들을 정리하는 일도 더 어렵게 만든다. 현대적 의미에서 섹시해 보이는 노출되고, 순종적이며, 공격에 취약하고, 심지어 폭행당하는것은 무력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며, 이것은 대체로욕구를 자극하기보다 잠재운다. - P182

정말 기가 막힌 것은 이 관념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 그 메시지가 쉴 새 없이 타격을 가해온다는 점이며, 그래서 그 메시지를 내면화하기는 너무 쉽고 내면화하지 않기는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미모나 패션 분야에 대해서는 꽤 느긋한 사람이고, 별로 압박을 느끼지 않으면서 그 미적인 쾌감과 멋 부리는 즐거움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기 수용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일상에서 나자신의 몸과 맺고 있는 관계-내가 육체적 유지 및 관리를 위해 매일 반사적으로 수행하는 일들, 드럭스토어 진열대를 재빨리 훑는 내 눈의 움직임 - 깊이 생각해볼 때면, 때때로거기서 작동하고 있는 경계의 명령을,  - P185

오늘날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여성의 몸을 다룬 글들을 읽다보면, 여자의 자기상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기입이라는 개념이 자주 거론되는 걸 보게 된다. 기업의 관점에 따르면 문화는 몸에 기록되고 부호화된다. 뚱뚱하고 날씬하고 깎여나가고 장식되고 굶고 포식하는 여자의 몸은 일종의 텍스트이며,
이 텍스트를 제대로 분석하기만 하면 문화가 여자들을 어떻게보는지, 여자들이 무엇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지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P197

나는 이 이미지가 어느 정도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거식증을 앓는 이는 욕구의 억제에 관한 걸어 다니는 선언문이며, 폭식증을 앓는 이는 한 여자의 허기가, 또 그 허기를부인하려는 강박이 얼마나 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다. 성형수술에 관한 통계는 그보다 더욱 명백한 진술이다! 1999년에 북미의 여성 14만 명이 유방확대수술을 받았는데, 이는 1992년에 비해 413퍼센트 증가한 수치다.  - P197

그런 독해도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다만 내게는 기입이라는 은유가 다소 고정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여자들은 모두 똑같은 백지들이고, 그들과는 별개인 제3의 존재, 그러니까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외적인 그것이 종이 위에 뭔가를 쓴다는 말 같다.  - P198

내게는 이것이 자기상의 핵심에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즉자부심 또는 수치심, 사랑 또는 미움으로 인해 자기상이 형성되고 왜곡되며 부호화되는 방식을 더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여자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느끼는 불만을 순전히 사회와 매디슨 애비뉴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너무 쉽다. 또 사실 그렇게돌려버리고 싶은 유혹도 크다.  - P197

나는 다른 사람들의 가정에서 사소한 차이점들을 발견했고,
그들은 몸과 더 느긋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신호들을 포착했다. 한 친구의 어머니는 매일 아침 친구의 등을 문질러 잠을 깨웠는데, 그건 내게 너무나 놀랍고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다정하게 촉각적인 일이었다.  - P202

한 친구의 부모님이 거실에서 1940년대 스윙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뱅글뱅글 돌리더니 가까이 당겨 안았고, 어머니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큰 소리로 웃었다.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그것도 외국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몸을 중심으로 한 유희의 감각을 느껴본 적도 없었고, 몸이 (건드리고 달래고 안심시키고 흥분시킬 수 있는) 특별한 힘을지니고 있다는 것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감지한 것들은그와는 정반대되는 감각들이었다. 요컨대 육체적 문제들에 관한 한 ‘묻지마‘ ‘말하지 마‘ ‘건드리지 마‘라고 말하는 듯한 당혹스러움, 내 부모님의 불행에는 섹스와 관련된 요소가 있는것 같다는 여러 해 동안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 의심, 그리고 그와 관련해 육체는 기쁨이 아니라 말썽을 유발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희미하지만 무시하기 어려웠던 생각이었다. - P203

자부심은 육체 혐오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미끌미끌해서 붙잡기 어려운 감정이다. 자부심이 존재의고갱이에 예리하게 새겨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부심을 항상 유지하기란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이다. 또한 자부심은그렇게 늘 유지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무게중심을 잡으려 허둥대는 것 같은 불확실함의 느낌을남긴다.  - P205

그런 모든 상황 속에서 내게는 본능적인 수준에서 느껴지는 행위 주체성과 온전성의 감각이, 만약 영혼 속에 존재한다면 몸으로도 마땅히 표현될 그 감각이 결여되어 있었다. 몸, 그것도 나의 몸은 내가신뢰하고 알고 소중히 여기는 무엇이 아니었고, 바로 그런 신뢰와 앎과 소중함의 감각들이 내 존재의 핵심에서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기만 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감각이 나에게 온전히 기입되어 있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 P209

레슬리는 그러한 선택의 문제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 그 주인을 처음부터 다시 창조하고 그 주인이 생각하는 정체성의개념을 바꾸었으며, 나는 마른 몸이 되고 싶어라는 말을 훨씬 더광범위하고 훨씬 덜 예속적인 말로, 그러니까 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어, 저울과 칼로리 계산 너머의 삶을 갖고 싶어, 나는 내 존엄과가치와 힘의 감각이 내 체중과 무관하게 존재하기를 원해라는 말로바꾸었다.
그렇다고 레슬리가 꼭 부러워할 만한 상황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레슬리의 확신이 얼마나 깊이 자리한 것인지, 그 확신이어느 정도나 흔들릴 수 있는지를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육체와 심리의 의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더욱 자신이 없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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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먹는다. 이 말 자체는 승리의 진술이지만 음식과의 더 평화로운 관계이는 당연히 내 몸과 나 자신, 나를 괴롭히는 것들과의 더 평화로운 관계를 의미한다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빙빙 둘러가는 기나긴 길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좋있겠지만) 동행자들로 가득한 길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를 굶기로 내몰았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두려움과 감정,
압박에 시달려보지 않은 여자가 있을까. 르누아르가 표현한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기쁜 마음으로 인간 갈망의 전 범위를 경험한 여자가 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기 어렵다. 많은 여자에게 갈망을 충족하고 대상을 취하고 육체적 쾌락을만끽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나와 음식의 괴로운 관계는긴 연속체 상에서 한 극단일 뿐이고, 수많은 장소 중 한 곳일뿐이다.
음식, 섹스, 쇼핑, 당신의 독이 무엇인지 불러보라. 욕구, 특히 여자들이 경험하는 욕구는 으스스할 정도로 변신에 능하고외적인 것들에 요령 좋게 찰싹 달라붙는다. 한 전투가 다음 전투로 이어지고, 어떤 약속이 거짓임이 드러나면 또 다른 약속이 빛을 발하며 지평선 위로 솟아올라 별처럼 신호를 보낸다.
- P31

내 경우엔 굶기가 음주로 이어졌는데, 그러자 (내가 통제력이대단히 강하고 꽤 우월한 사람이라는 느낌과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었던 식욕 거부가 점차 더욱 전면적인 자기 존재에 대한 거부로 넘어갔고, 술이 음식을 밀어내고 내가 특별히 선택한 물질의 자리를 차지했다. 다른 여자들이 각자 선택한 물질이 무엇인지는 내 경우처럼 구체적으로 지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개는 그에 못지않게 강한 악력으로 그들을 움켜쥐고있고 욕구라는 더 폭넓은 주제와도 똑같이 연결되어 있다. 남자들과의 강박적인 관계, 통제되지 않는 쇼핑과 빛, 삶 전체를좌지우지할 정도의 외모에 대한 집착, 온갖 종류의 ‘이름‘들.
이 모든 것이 허함과 관련되어 있고 내면의 공백을 잘못된 방향에서 메우려는 노력과 관계있으며 모두 똑같은 어두운 감정에서 비롯된다. 많은 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그 감정은, 갈망은 그 자체로 어쩐지 부당하거나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릴 권리는 대가를 지불하거나 스스로 노력해 얻어내야만 한다는 생각,  - P32

모두 ‘하지 마‘의 세계에서 나온 얘기들이다. 이런 메시지들은훨씬 더 간접적으로 전달될 수도 있고 헷갈리거나 모순적일수도 있지만, 당신이 20세기 후반에 성년이 된 여자라면 어떤형태로든 분명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너무 많이 먹지 마. 너무 커지지 마. 너무 멀리 가지 마.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마. 너무많이 원하지 마. 하지마, 하지마, 하지 마.
이런 명령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지만,
문제는 그것들이 누적되면서 여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대개 파편화된 렌즈를 통해서만, 한 번에 한 가지 병폐만 따로떼어 검토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P34

굵기의 미끼는 그 불가해하면서도 유혹적인 낚싯바늘은 위안이었다. 나를 인간의 갈망이라는 평범하면서도 온갖 위험이가득한 세계에서 끄집어내어 그보다 더 높은 곳에, 고요함의내밀한 왕국에 데려다놓는 듯한, 그 안전함과 억제가 주는 온화한 위안.
이런 초월적 위안의 감각이 즉각 생겨났던 것은 아니며, 그런 위안의 상태에는 그 어떤 행복한 느낌도, 심지어 오래 지속되는 느낌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굶기는 고통스럽고 인정사정없는 경험이자 욱신거릴 정도로 따분한 경험이며, 삶 전체가 단 하나의 감각(육체적 허기)과 단 하나의 집착(음식)으로 졸아드는 일이다.  - P55

여자들은 수학에 자신감이 없고시공간 지각 능력이 변변찮으며 아무튼 숫자를 다루는 데 남자들만큼 뛰어나지 않다는 설 말이다. 이 이론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널리 도전받아왔고, 여자들이 대수나 미적분을 처리하는 데 신경학적으로 부적합하다고 말할 근거는 매우 빈약하다. 그러나 나는 그와는 다른 근거에서 이 신화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여자들은 실제로 수학에 아주 뛰어나다. 단지 그수학이 그들만의 특수한 종류의 수학, 즉 욕망들을 서로 낱낱이 떼어내 분리하고 저울질하고 균형을 맞추고 흥정하고 평가하는 복잡 미묘하고 사적인 수학인 것뿐이다. 이 욕망의 수학은 욕구는 잘 봐줘도 위험한 것이고 최악의 경우 용납할 수없는 것이며 마음껏 만끽하려면 사거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바탕에깐, 자제와 감시의 체계다. 그리하여다음과 같은 규칙과 경고가 생겨난다. 점심 메뉴판을 살펴보거나 치즈 버거를 주문하거나 크림 케이크를 그대로 먹기 전에 먼저, 마음의 계산기를 꺼내서 예산을 잘 살펴보라는 것.
- P61

이는 곧 섹슈얼리티와 사랑과 자존감에대한 자격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고, 먹고 싶은 마음과 날씬해지고 싶은 마음이 서로 부딪치며, 마음껏 누리고 싶은 욕망과 절제해야 한다는 명령이 대립한다. 음식이 여자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방정식에서 식욕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불안을경험하는 것이고 그건 일종의 부담이며 위험이다. 허기에 굴복하는 일은 특정 조건하에서 허용될 수는 있지만, 대부분 그허용은 대가를 치르고 얻어내야 carn 하며, 그러려면 감시하고monitor 통제해야control 한다. 그리하여 e=mc. - P63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그나마 속삭임으로 들리던 이 명령의 소리가 이제는 훨씬 더 커져서 으르렁거림이, 울부짖음이, 포효가 되었다. 매일 쏟아지는 광고의 폭격을 받는 미국인은 평균적으로 평생 약 3년의 시간을 텔레비전 광고를 보는 데 쓰고 있으니, 그 이미지의 홍수가 여성의 신체와 그들의 허기에 관해 어떤 말을 하는지는 특별히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날씬함을 위한 선결 조건인 통제된 식욕은 아름다움, 욕망의 대상이 될 자격, 가치 있음을 함축한다.
통제되지 않은 식욕-뚱뚱한 여성 - 이 함축하는 바는 그 반대여서, 뚱뚱한 여자는 추하고 역겨우며 근본적으로 무가치하게 취급된다. 이런 인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는 뚱뚱함에 대한 문화적 태도를 보도한 <뉴욕 타임스> 기사를 보면 잘 알 수있다. 성인 중 태아가 자라서 치료할 수 없을 정도의 비만이될 것임을 미리 알게 된다면 낙태를 선택하겠다고 한 사람이16퍼센트였다는 기사다 - P71

선택지들이 폭발적으로 열어젖혀진 세계에 이처럼 복잡하게 뒤엉킨 유산이 전해졌으니 모든 예스는 과거의 노와 충돌할소지가 다분했고 여기엔 당연히 엄청난 혼란이 따른다. 욕구의 밑바닥에 깔린 질문들도 어마어마하다. 무엇이면 만족하겠는가? 당신이 필요로 하는 건 도대체 어느 만큼이고, 무엇인가?
진정한 열정은, 아름다움 혹은 날씬함이라는 외적 목표 뒤에감춰진 진짜 허기는 무엇인가? 비교적 최근까지도 여자들은 이런 질문을 탐색해보라는 권고를 받은 적이 없었거나, 적어도깊이 있고 일치되는 견해에 따라 사회가 지지하는 방식으로권고받은 적은 없었다. 우리는 한 세대에 걸쳐 열어젖혀진 문들과 기존 사회구조의 몰락이 자극하고 장려한, 이른바 포스트 페미니즘적 욕구를 품게 되었지만, 이런 욕구를 갖는 일에대해 항상 명백하고 확고한 지지나 허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으로 욕구에 늘 따라붙던 경각심과 경고가 완전히 제거된 것도 아니며, 욕구를 지지해줄 심층적 권리 의식도 아직 갖지 못했다.
자유는 권력과 같지 않다. 이걸 짚고 넘어가는 게 중요하다. - P77

권리와 자격이 본능적이고 영속적이며 실질적인 수준에서느껴지려면 그것은 자아를 넘어선 영역에 존재해야 하고, 더폭넓은 차원에서 알려지고 인정되어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여자들은 여전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있다. 지난 40년 동안이뤄낸 그 모든 개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저 바깥세상을 거의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의회는 여전히 남자들이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미국 최상위 기업 경영진의 98퍼센트가 남자다.19 오늘날 벤처 창업 투자금의 95퍼센트가 남자들의은행 계좌로 흘러들어간다.20 미국에서 가장 많은 급여를 받는 최고경영자 200명은 전부 남자다.  - P79

나는 이 격차, 즉 한쪽에 있는 개인적 자유와 다른 쪽에 있는 정치적 힘 사이의 이 끈질긴 불균형이 욕망 뒤에 자리한불안이라는 요인을 증폭시킨다고 생각한다. 이 격차는 여자들에게 뭔가 계산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남기고, 선택들이 편파적이며 단서들을 잔뜩 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오늘날 여자는 신경외과 의사도 될 수 있고 천체물리학자도될 수 있다. 자기 의지에 따라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으며, 배우자와 헤어지고 짐을 꾸려 대륙의 반대쪽 끝으로 이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택들에서 한 걸음 더, 아니두 걸음 더, 아니 열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을까? 단순히 천체물리학자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음식과 섹스와 쾌락과찬사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완전한 권리가 있다고 느끼 - P80

는 강력하고 활기 넘치는 거물급 천체물리학자일 수 있을까?
나라의 반대쪽 끝으로 갈 수는 있지만, 그와 함께 여자란 원래 어떻게 보여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떤 존재여야하는지에 관한 뿌리 깊은 모든 감정을 떨쳐내고 떠날 수 있을까? 외적인 자유들은 케케묵은 내면의 수많은 금기들과 여전히 충돌할 수 있고, 여자는 아직도 가장 권한이 미약한 인구집단이라는 희미할지는 몰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인식과 충돌할 수 있다. 이런 충돌은 오늘날 욕구가 유독 큰 문제로 대두되는 이유를 어느정도 설명해준다. 욕구들은 가능성과 제약,
힘과 무력함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밀고 당겨지는대단히 모호한 맥락 속에,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맥락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P81

세상은 남성의 욕구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나의성장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남성 욕망에 대한우리 문화의 상투적 이미지는 그것이 현대의 소년들과 성인남자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바를 담고 있는 그렇지 않든 간에(그러나 상투적 이미지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 속에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 편리하게 도와주고 지지해주는 것과 관련된다. 어머니들은 먹이고(먹어! 먹어!) 아버지들은 독단적 자기주장과 노골적 경쟁심의 모범을 보이며 교사들은 거침없는 허세를 북돋운다.  - P81

여자들의 삶에도 기회가 엄청나게 늘어났다고는 하나 여성의 욕구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노력이 존재하지 않으며, 저런 이미지들에 비할 수 있는 봉사와 제공의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고, 다수의 타인들이 우리의 필요를 충족하거나 우리의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심성의를 다해줄 거라는 기본적인 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남자들의 자기중심적 추구에 익숙하고, 그들의 사정을 너그럽게 헤아려주며, 그들의 위반과 부적절함은 이해해주고 용서해준다. 뭐, 당신도 그 사람이 요리를 하거나 아이들을 돌볼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잖아요. 그가 체중이 좀 는다고 누가 신경 쓸 것이며, 그가 남들을 통제하려 하거나 나르시시스트라고 한들 어떻겠어요. 그는 바쁜 사람이고, 업무들을 처리하고, 상황을 이끌어가고, 회사를 운영하고, 국가를운영하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줄줄 이어지는 이해의 말들이 여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 P82

즉 한쪽의 광범위한 선택의 폭과 또 다른 쪽의 깊은 불확실함의 감각 사이에서 막 생겨나기 시작한 일련의 복잡한 갈등에 관한무언가를, 그리고 이 자유는 불완전한 동시에 꽤 많은 단서들을 달고 있으며 위험들로 가득할 것 같다는 느낌을 잘 포착했던 것 같다. 아직 제대로 자아를 확립하지 못한 20대 초반의나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마치 어떤 조리 도구도 숟가락도 없이, 그것들을 맛보거나 실험하거나 마음껏 즐기거나 나 자신의 메뉴를 개발해도될권리가 정말 나에게 있다는 실질적인확신도 없이, 가능성들만 가득 쌓인 거대한 식탁 앞에 서 있는것 같았다. - P85

이름 붙이지 못한 허기는 무시무시한 허기가 되고 자기 불신의 근원이 된다. 이는 욕구가 지닌 또 하나의 황금률이다.
우리는 논의하거나 탐색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워하게 되고, 금지된 것에는 끌리는 동시에 겁을 먹게 된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이해에 대해 은밀함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정교한 순화의 형식을 택하는 것으로도 반응했던 것 같다. 욕구를 지하로 몰아가 더 안전한 곳들로, 덜 두려운 경로로 빼돌린 것이다.  - P91

"소녀들은 존재하기를 멈추고 보기를 멈춘다."
나는 이 생각에 진실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문화는 이미 억눌린 채 뜨겁게 이글대고 있던, 나 자신의 믿음, 판단, 바람을 불신하는 마음의 불씨에 부채질을 해서 불을더 키운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만 챙기며 공격적인 욕구들은 많은 소녀들에게 무서운 것으로 느껴지고, 특히 그런 특성들이 여자답지 않고 부적절하다는 믿음을갖도록 길러진 소녀들에게는 더욱더 무섭다. 또한 수수께끼같은 장막에 싸인 채 위험한 기미를 띠고 있는 욕구들, 당신을식탁에 앉은 한 명의 외계인처럼, 오래 머물기에는 너무 무섭고 너무 외로운 행성의 궤도를 돌고 있는 외계인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욕구들은 한층 더 무섭다. - P93

그와는 정반대로 나는 식욕으로 먹고 자고 숨 쉬었다. 항상 음식 생각을 했고, 포르노 더미를 앞에 둔 10대 소년처럼 음식관련 잡지들과 레스토랑 리뷰를 열심히 읽었고, 색인 카드에빵과 케이크, 초콜릿 디저트, 더할 나위없이 풍성하게 속을채워 넣은 파이들, 내가 갈망하지만 절대 나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는 음식들의 조리법을 옮겨 적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대형 트럭 사이즈의-음식과 인간적 연결과 육체적 쾌락을 향해 돌진하고 끊임없이 열망하는 욕구들을 갖고 있었으나, 바로 그 욕구의 힘이 내가 상대해서 겨루기에는 너무 위협적이고 무시무시하게 여겨졌기에 세계를 더없이 엄격하게 흑과 백, 예스와 노의 장소로 나누었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거나 모든 것을 먹고자 했고, 식욕을 제압하거나 식욕에 완전히 굴복하고자 했다.
- P102

다시 말해서, 음식과 쇼핑과 외모 같은 것에 엄청나게 골몰하는 것은 허기에 진심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허기를 한껏 채워주고, 허기를 이해하고, 허기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기보다는 허기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어마어마한 노력이다.
더 날씬해지고, 더 예뻐지고, 옷을 더 잘 입고자 하는, 그러니까 다른 존재가 되려는 이 충동은 무엇일까? 이 다른 존재는,
그가 입고 있는 재킷 혹은 그가 먹지 않는 음식을 제쳐둔다면,
정확히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보이는 사람인가? 우리가 육체의 이미지에 관해 다시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게 될까? 이런 질문들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스물세 살 때의 나 자신을, 뼈만 남은 몸으로 작은 접시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작디작은 사각형으로 자른 사과와 치즈를 조금씩 오물오물 먹고 있던 그때의 나를 떠올릴 때 나를 괴롭히는 질문들이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있었을까? 무엇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토록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던 걸까? - P109

페미니즘이 만들어낸 술렁임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그런 규칙들을 확고히 지지했다. 어머니는 제도로서의 모성이 성인의 수준까지 끌어올려진 시기에, 여성의 야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정생활을 일구고 유지하는 일을 통해 표출되어야한다고 기대되던 시기에 결혼했다. 이런 이상들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었지만- 여성의 욕망은 수 세대에 걸쳐, 어떤 사회들에서는 수 세기에 걸쳐, 앞치마 끈에 묶이고 가정성이라는망토에 가려 있었다-내 어머니의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해당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년 동안 더욱 강력해지고 특유의 외양과 느낌을 부여받았으니, 어머니가 그런 것들에서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중산층이교외로 빠져나간 일이 엄청난 수의 젊은 여자들을 말뚝 울타리 뒤에 감추고 그 과정에서 고립을 조장하며 그러한 흐름에무대를 마련했다.  - P124

동시에 어머니는 내가 알았던 모든 여자 중 가장 지적이고정보에 밝은 사람 중 한 명이자 열렬한 독서가였고, <선데이 뉴욕 타임스>의 십자말풀이를 연필이 아닌 잉크로 20분도 안 돼서 쉽게 풀어내고, 렌치를 뜨개바늘만큼 능숙하게 휘두르고,
강한 정치적 견해를 지녔으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강력하게 몰두하는 여자였다. 서로 모순되는 특성들이 기이하고 상반되는 병치 가운데 드러났다. 우선 어머니 작업실의 이미지, 캔버스와 프레임과 유화물감이 복잡하게 들어차 있는곳, 탈수기 딸린 세탁기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던 주방 바로 옆 작은 방이 어머니의 작업실이었다. 그리고 <우먼스 데이>와 <뉴욕 리뷰 오브 북스>가 함께 흩어져 있던 어머니 침대의 모습.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서면 유화에서 나는 톡 쏘는 테레빈유 냄새와 스파게티소스 냄새가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게는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어머니의 특성보다 모성적이고 남들을 챙기던 어머니의 특성에 대한 인상이 더많이 남아 있는데, 이는 무심하게 치부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아버지에게는 직업이, 어머니에게는 취미가 있다고 생각하며자랐다. - P128

프리단과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은 그 감정을 매우 명료하게묘사했다. 그러나 그 세대가 소리 죽인 욕망과 벌인 힘겨운 분투가 그 자식들에게, 특히 딸들에게 어떤 식으로 전해졌는지(그리고 어쩌면 여전히 전달되고 있는지)는 그만큼 명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자신의 필요들은 뒤로 미뤄두도록, 자신의 욕망과 추구는 남들을 돌보고 먹이는 일로 승화시키도록, 자신의실망은 삼켜 삭이도록 교육받고 자란 여자는 자신에게 없는그 권위와 권한의 감각을 딸에게 어떻게 전해줄까?
아마도 여자는 딸에게 그런 감각을 전해주지 않을 것이다.
한 학파는 젠더 정체성이나 젠더 사회화에 관한 교과서에서이들에 관해 읽을 수 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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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추가로 두 잔이나 넉잔이나 여섯 잔눕자마자 잘 수 있도록 잠자리에 들기 전에 두어 잔, 새벽 4시에 깨었는데 다시 잠이 오지 않을 때 몇 잔 더. 한편 맨정신을 유지하는어려운 일은 그냥 살아가는 일이라고 해도 괜찮지 싶다-술대신 행동을 적정하여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 핵심이다. 두려움과 불안과 불면의 밤을 관리하기 위해서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게 아니라무엇을 할까 하는 것, 삶이 무탈하고 안전하고 유의미하다는 느낌을 북돋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하는 것,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어떤 육체적 자양분이나 정신적 자양분을 흡수할까하는 것. 여기에는 또 다른 시행착오가 필요한데, 이 시행착오는그냥 마시면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해야 겪을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상당히 더 까다롭다. - P196

나는 자유로운 저녁과 주말을 어떻게 쓰기를 좋아할까? 내게 혼자 있는 시간과 함께 있는 시간의 적절한 혼합 비율은 얼마일까? 나는 타인이 나를 얼마나 접촉하고 사랑하고의지하면 좋겠는가? 내가 정말로 허기를 느끼는 대상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재미를 느끼고, 무엇에서 위안을 얻고, 무엇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일까? - P197

술을 끊는 일은기차 사고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좀 비슷하다. 당신은 멍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일어나서,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다 머리가 맑아지고 트라우마가 잦아들면, 자신도 모르게 망연히 잔해를보며 서 있게 된다. 저기차에서 내린 나는 이제 누구지? 이제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거기까지 어떻게 가지? 이것은 겁나는 시기이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는사실을 자주 상기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기인 건 맞지만,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이기도 하다고. - P199

저는 아빠에게서, 아빠를 보면서 술 마시는법을 배웠으니까요. 아빠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늘 마티니를 한 피처 가뜩 만들었죠. 그걸 한잔 마시면, 아빠에게서 긴장감이 스르르 빠져나갔어요. 아빠가 마음속에만 꽁꽁 담아둔 어떤 뾰족한 감정들이 술 앞에서는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무뎌진다는 걸, 저는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아빠에게는 늘 슬픔의 기운이 있었죠. 이유는 제가 영영 알 수 없었지만, 아빠의 눈을 보면 그랬어요. 아빠가 가끔 동작을 멈추고 우리를 모두지나쳐서 방 건너편을 응시하는 모습을 보면. 그럴 때 아빠는 미간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고, 표정이 조용히 깊어졌고, 뭔가를 원하고찾는 듯한 분위기였어요. 슬퍼 보였고, 생각이 딴 데 있는 듯했고,
멀게 느껴졌어요. 그걸 보면 전 제가 느끼는 감정이 저런 것이겠구나 싶었어요. 저는 그 표정을 알아요. 아빠가 술을 마시면 한결 편안해졌다는 것, 아빠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나중에 제가 규칙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 때 그것과 똑같은현상을 경험했다는 걸 알아요. 그건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이 10도쯤 어긋나서 초점이 맞지 않는다는 기분, 그런데술이 그걸 바로잡아줘서 우리가 내면의 균형을 되찾게 되는 듯한기분이죠.
- P202

제가 제일 좋아했던 건 아빠와 마시는 술이었다고 말씀드려도놀라지 않으시겠죠. 아빠는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어요. 아빠가 던지는 캐묻듯 분석적인 질문들, 태도에서 드러나는 슬픔의 기색 저는 아빠의 지성과 통찰력에 주눅 들었고, 아빠 앞에서 종종말문이 막혔고, 제가 뭐라고 말하든 부적합하거나 지루한 말일 거라고 확신했어요. 술은 그 상황을 누그러뜨려서, 더 정상적인 평면이라고 느껴지는 차원으로 우리 둘을 내려보냈어요.  - P203

어떤 하나의 사건 때문에 건강했던 사람이 아파지는 게 아니고, 어떤 하나의 비정상 세포가 분열하거나 돌연변이를 거쳐서 사람의 미래를 바꾸는게 아니니까요. 그저 느리고 불분명한 과정이 있을 뿐이죠. 우리는자신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죠. 알지만 알지않으려 하죠. 자신이 충분히 끊을 수 있다고, 관리할 수 있다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불안해서 홀짝홀짝, 부정하려고 벌컥벌컥.
- P205

한편 술을 끊은 요즘 내가 쓰는 수단은 예의 그 충동들을 더 건전하게 다룰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더 안전하게 스스로를 위로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는 대신그것을 대면함으로써 나아질 수 있는 전략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일은 쉽지 않다. 이 일을 해내려면, 가끔은 불안이 들이닥칠 때 사소하되 낯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든지, 목욕을 한다든지, 가만히 앉아서 차를 마신다든지. 또 가끔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 지난 4월은 내 아버지의 3주기이자 어머니의 2주기가 되는 달이었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다. 어머니의 기일 무렵 어느 날, 저녁에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채로 집에 혼자 있게 되었다. 나는 가끔 내가 감정에 대해서 공포증을 겪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날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니, 감정이 마치 오래되고 익숙한 적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 P221

사라지는 것이 또 있다. 두려움도 약간 사라진다. 마취제 없는삶은 격렬한 운동과도 좀 비슷하다. 각자 선택했던 중독의 대상이없는 채로 고통스러운 순간을 반복하여겪다 보면, 결국에는 감정의 근육이 길러진다. 우리가 술을 마셔서 혹은 굶어서, 먹어서, 도박을 해서, 살을 찌워서-감정을 몰아낼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셈이다. 자신의 두려움과 자기 의심과 분노를 이해해볼 기회를, 마음속에 묻혀 있는 감정의 지뢰들과제대로 한번 싸워볼 기회를. 중독은 우리를 보호해줄지 몰라도 성장을 저지한다. 사람을 한층 더 성숙시키는 인생의 여러 두려운 경험들을 우리가 온전히 겪지 못하도록 막는다. 중독을 포기하면, 그래서 그런 힘든 순간들을 온전히 겪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근육들을 구부리게 된다. 자라게 된다. - P224

중독은 즐거움과 기쁨과 놀라움을 마비시킨다. 우리가 진정한 친밀감, 진짜 웃음, 진실된 통찰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붙잡는다. 마취제를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의 인간성에서 가장 의미 있는 측면들을되찾을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삶을 살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그걸 상상해보라. - P225

여성 해병대가 없다면, 우리는 무력하다. 희망이 없다. 내가 베리처럼 솔직하지 못하고, 걱정이 지나치고, 자존심이 결여된 반응이내 입에서 나오는 걸 듣고 앉았던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일일이 셀 수 없을 지경이다.
어느 편집자가 내게 다른 곳에서 받을 수 있는 돈의 4분의 1에불과한 돈으로 글을 써달라고 하면, 나는 말했다. "아, 그러죠, 그정도면 괜찮습니다."
예전 상사가 내게 불합리한 호통을 백만 번째 치더라도, 나는묵묵히 삼켰다. 일에서만이 아니다. 사귀는 남자가 내게 내 본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치장하는 게 좋겠다고 암시하면, 나는 순순히 따랐다. 그를 만족시킬 일을 하고, 그를 만족시킬 말을하고, 무엇이 되었든 그가 기대하는 바를 행했다.
내가 아는 남자들은 대체로 그러지 않는다. 지금 언뜻 생각해보아도, 개에게 뼈다귀 던지듯 알량한 연봉 인상을 제안받으면 책상에서 고개를 들고 상대에게 이렇게 대꾸할 남자가 다섯 명은 떠오른다. "농담이겠죠." 어쩌면 그들도 그렇게 대응하는 것이 괴롭고 초조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여자들은?
- P243

이것이 바로 여성의 분노다. 속에 묻힌 분노 금기가 된 분노우리는 그것을 느낄 줄조차 모를 때도 많다.
그동안 발전해온 페미니즘이 도움이 되기는 했다. 이제 여자들은 사적인 관계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데 좀 더 능숙해졌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생각은 이제 사실상반박의 여지가 없는 생각이다. 여자가 하는 노동의 가치가 남자가하는 노동의 가치와 동등하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신념을 철저히 내면화하기까지는 아직 갈길이 멀다. 우리가 그런 신념을 뼛속까지 새겨서 적절한 말을-가령 "싫습니다" "아쉽지만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같은 말을ㅡ술술 내뱉게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은 너무 많은 여자들이 착해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 P244

그러니, 여성 해병대를 만들자. 새벽같이 일어나서, 자긍심으로 고개를 높이 쳐들고 이층 침대를 박차고 나가자. 무력감을 떨치고, 분노를 경험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억지로라도 익히고, 자신의감정과 요구를 남들에게 정확하게 말하는 기쁨을 배우자.
만약 그것으로도 안 된다면, 남성 해병대가 갖고 있는 다른 도구라도 빌리자. 무기 말이다. - P245

내 경우에, 그 교수는 내가 엄청나게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조언을 듣고 싶었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내 글을 칭찬했고, 내게 기자가 되라고 격려했다. 나는? 나는 막 학업을마친 상황이었고, 숫기가 없었고, 자신감이 별로 없었고, 이제 세상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압도되었고, 겁먹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우상으로 여기던 마음을 버리고 그가 잘못된 혹은 도를 넘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또 내가순진했던 게 아닌지, 남자와 함께 마티니를 마시면서 거기에 야릇한 의미가 없다고 가정했던 것이 잘못이 아닌지 걱정되었다. 내가그런 일을 가능케 할 만한 행동을 했던 게 아닌지, 사귀고 싶다는신호라도 내보냈던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내보낸 것은 다른 신호들이었을 것이다.
불안정의 신호,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의 신호,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의 신호, 이것은 강력한 감정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어떤 남자들은 이런 감정을 포착하는 능력이 남다른 것 같다. 그들은 인정 욕구를 정확히 가려내고대상에게 접근한다.
- P249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상황이지만 특별할 것은 전혀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일은 노상 벌어진다. 돌아보면, 그때 내가 가장 괴로워했던 문제는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우리 문화는 육체적인 측면이 아닌 측면에서도 자신에게 만족하는 여자아이, 자신을 한 온전한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귀한 존재라고 느끼는 여자아이를 길러내는 데 능하지 못하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겁먹고 불안정했던 스물한 살의 나는 그런 시기의 표본과도 같았다.  - P250

그러다 어느 시점에, 너무 수치스럽고 역겨워서 그도 나도 견딜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없는 용기를 끌어모아서 그의 연구실로 그를 만나러 갔다. 너무 불편하고 이상해서 이 상황을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더듬더듬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그가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던 것도 기억난다. "글쎄,
연인이 되지 않을 거라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우리는 다시는 말을 섞지 않았다.
권력 남용은 어떤상황에서도 잔인한 짓이다. 하지만 성적인측면에서의 권력 남용은 특히 더 잔인하다. 몇 해전에 그 교수가심장마비로 돌연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딱히 슬프지는 않았다. - P251

어느 시점에 나는 예전에 거식증과 길고 끈질긴 싸움을 벌일때 입었던 청바지들이 보관된 서랍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작다 못해 해골에게나 맞을 듯한 사이즈의 청바지들은 나쁜 기억이 묻은물건들이었다. 더 건강하게 살려고 애쓰기 시작한 사람의 인생에는 존재할 자리가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오랫동안 그청바지들을 붙들고 있었고, 그럼으로써 언젠가 다시 그 담배 굵기만 한 청바지들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언젠가 다시 그 청바지들이 맞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따라서 지금 거식증으로부터 ‘회복‘했다고 느끼는 상태가 잘해봐야 일시적이고 최악의경우에는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붙들고 있었다.
- P257

내가 생각하는 요령은, 두려움과 감정을 관리하는 법을 익히는것처럼 물건을 관리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물건 무더기들에 논리를 좀 적용해보는 것이다.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중요한 전화번호를 몇 개 버린다고 해서 세상이 정말로 무너질까? 기억이 담긴 물건들을 버린다고 해서 내 과거도 정말로 함께버려질까? 저 리본들이 다 없다고 해서 내가 죽을까? 손톱만큼이라도 문제가 생길까?
아니, 아닐 것이다. 그래도 저 은행 명세서들은 계속 갖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혹시 모르잖아.
- P259

부모님의 집은 혼돈 그 자체였다. 우리는 38년동안 쌓인 물건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내버리고, 상자에 담아야 했다. 어느 구석을 보나, 어느 표면을 보나 거기에는 수십 년 치의 감정이 숨어 있었다. 그러니 내가 내 집에서 발휘하는 정리벽은 그에대한 아주 강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가 내면의 무질서와격변처럼 느낀 상황에 대한 방어 행동이었다. 그것은 두려움에 압도된 나머지 통제력을 갈구하는 행동인데, 나는 과거에 거식증을겪을 때도 그랬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혼돈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통제하려고 든다. 무엇이든 좋으니 무언가를, 이를테면 자신이 섭취하는 칼로리를, 자신의 몸무게를, 자신의 환경을 공황에 빠진 사람은 이상한 짓도 하게 된다. - P267

난데없이 끔찍한 방식으로 세상에서 지워져버린 수천 명의 사람들과는 달리, 이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의식적으로 또한 준비하면서 다가갈 기회가 있다. 할 말을 할 기회가, 모두를 소집하는 자극으로 작용하는 재난이 없어도 서로를 도울 기회가 있다. 물론 이 또한 지치는 일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일인 데다가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멍한 감정과 수동적인 태도를 가르는 구분선이 아주 희미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헌혈을 할 수 있다. 구호 단체에 후원금을 보낼 수 있다. 편지를 쓰거나 청원서에 서명할 수 있다. 또한 나는 내 작은 세상 안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각자의 작은 세상들은 지금처럼 모두가 뒤엉킨 감정으로 멍한 시기에도 우리가 반드시 알아봐야 할 선물이다. - P281

하지만 순환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계절의 순환도, 감정의 순환도, 여름의 불안은 왔다가도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올여름에 내 몫의 좋은 날을 누릴 것이다.
기분 좋고 낙천적이고 마음 가벼운 날, 내 내면의 풍경이 바깥 풍경과 일치하거나 적어도 좀 더 비슷해지는 날, 내가 맨발에 밟히는 모래와 살결에 와닿는 더운 공기를 즐길 수 있는 날, 그런 것들이 모두 괜찮게 느껴지는 날. 그리고 나는 나쁜 날도 겪을 것이다.
밝고 가벼운 것들이 모두 미워지는 날, 어두운 고치를 그리워하는날,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을 보면서 그 향기 나는 작은 머리통들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날.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요령껏 대처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처방책이 있기 마련이다. 따뜻한 날씨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쓸 전략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확신하는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신이 영화관을 발명하신 것이다. - P295

나는 내 집에 있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11년이 걸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11년하고 일주일하고 사흘이 걸렸다. 나는 1984년 8월 8일여기 보스턴으로 이사 왔다. 그때는 여기서 영원히 살겠다는 생각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1년, 길어야 2년쯤 머물 거라고 생각했다.
보스턴은 기착지라고,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나 런던처럼 더 크고더 색다른 장소로 옮길 때까지 잠시 짐을 내려놓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잠깐 머무르는 거라고, 장소에 대한 나의 애정은 유동적이라고, 내가 애착을 느끼는 대상은 장소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문득 깨달았다. 세상에 내 삶은 여기에 있어,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 내 집에 있어. - P296

그래서 나는 쇼핑하러 갈 것이다. 내 능력껏 문제를 풀 것이다. 어쨌든 이번 고비는 넘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옷장이 언젠가 다시 기능부전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내가 여자라서 그런 것도 있겠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만큼 견고한 내면의 평안을 찾아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이혼을 앞둔 내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은 지난17년 동안 기혼자처럼 옷을 입어왔는데 이제 다가오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서는 어떤 모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하다며, 새 옷과 화장품을 사는 데 한밑천을 쓰고 있다고했다. 이것은 내면과 외면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라고, 두 가지가 발맞추어 가도록 하려는 시도라고, 친구는 말했다. 이것은 평생에 걸치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블루밍데일이 있는 게 그 때문이다. - P307

이제는 나도 자신을 제법 잘 알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한 답도안다. 그날 아침에 나는 싱숭생숭했고, 초조했고, 약간 외롭고 우울했다. 이전 며칠 동안 너무 많이 먹었고, 일을 미뤘고, 친구들에게연락한다거나 푹 잔다거나 하여 기운을 되찾아야 했지만 그러지않았다. 이럴 때 운동이 실제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좀 더 활기찬모드로 전환하는 방법, 무기력함과 그렇게 무기력한 자신이 나태하다는 기분에서 벗어나는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 아침처럼 운동이 과거의 운동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운동이 나 자신을 벌주는 방법, 말그대로 나자신을 때려눕히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날 물결이 거칠 테고 노 젓기가 불쾌하고 힘들고 외로우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나갔다. 그런 것은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혐오 활동이다. 그리고 내가 지겨운 것은 바로 이런형태의 운동이다. - P312

그 산책들은 육체의 움직임과 사교의 즐거움을 둘 다 균형 있게 갖춘 활동이었다. 우리는 걷고, 말하고, 이따금앉아서 쉬면서 물도 마시고 야외에 나오게 되어 지칠 줄 모르고 신난 개들을 지켜본다. 그렇게 걷고 돌아오면, 육체적으로 활기를 되찾은 느낌뿐 아니라 다른 측면으로도 재충전된 느낌이 들었다. 세상과 이어져 있는 기분, 만족스러운 기분, 내 개와 좋은 대화와 숲의 고요함 등등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과 더 가까이 있는기분 사실 나는 걷기를 운동으로 ‘쳐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파야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생각이 든다. 아마 처음 떠올리는 생각인 듯한데, 우리의 마음 또한 여러 면에서 하나의 근육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체육관에서 운동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체육관 밖에서도 돌봐야 하는 근육이라는것이다.
- P313

화를 터뜨리는 편이 언제나 효과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화를내면 반드시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상처가 낫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나쁜상황이 열을 내면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싸움을 잘 고르는 것 못지않게 대상을 잘 고르는 것도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정신적으로 치고받을 의향과 능력이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화내는 것이효과가 있으려면 어느 쪽에게든 생산적이거나 유익하려면 관련된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서로 신뢰해야 한다. 두 사람 모두 괴로운 시기를 견뎌보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노라는 동전의 뒷면은 친밀함일 때가 많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겁나면서도 때로 가치 있는 일인 것은 그 때문이리라.
그러니, 비록 싫은 감정이기는 해도 나는 분노에 찬성표를 던지겠다. 열띤 언쟁과 눈물과 분해서 이를 가는 상황에 찬성표를 던지겠다. 내가 그 일에 영젬병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이 갈고닦을 가치가 있는 기술이라고 믿는다.
자, 다 들었으면 그만 좀 꺼져. - P325

신체적 결점이 실제로 있는 것이든 우리 생각일 뿐이든,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가짜라거나 쓰라리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자기 코가 코끼리 코만 하다고믿는 열두 살짜리 아이로 살아가는 것은 절대 재미난 일이 못 된다. 나는 또 이런 과장이 고통의 더 깊은 근원을 알려줄 수 있다고생각한다. 내가 머리카락이나 피부나 몸무게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날, 나는 그 불편함이 사실은 좀 더 복잡한 현상이라는 것, 그것은 외적인 면이 아니라 내적인 면에서 스스로 매력적이지 않다고(초라하다고, 흠 있다고, 나쁘다고) 느끼는 감정과 관련된다는 것, 내가 문제를 밖에서부터 바로잡고자 소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자들이 특히 자주 품는 그 소망의 논리는 이렇다. 내 머리카락이나피부가 완벽해진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내 나머지 부분들도 다 그럴 텐데.
과장은 이 점에서도 도움이 된다. 우리는 결점을 말도 안 되게부풀려 말함으로써 그것이 주는 압박을 좀 덜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비웃을 수 있고, 우리를 너무나 지치게 만드는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 숭배도 비웃을 수 있다. - P330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지점은, 문화적으로 지지받는 판타지와 실제 판타지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새하얀 웨딩드레스의 판타지에도 실제로는 어둡고 복잡한 실들이 엮여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꿈이든 특이한 꿈이든, 여자아이들이 실제로 품는 꿈은 신부가 되고 싶은 꿈보다 훨씬 더 풍성하다. 또한 여성이현실에서 겪는 체험과 훨씬 더 비슷하다. 그런 꿈은 우리가 자신에게 바라는 바를 반영하고(강해지고 싶다, 똑똑해지고 싶다, 아름다워지고 싶다), 우리의 실제 모습을 반영한다.(가족에 대한 혼란한 감정, 분노와 섹슈얼리티, 세상을 안전하지 않은 장소로 느끼는 기분.) 그런 꿈은우리의 은밀한 야망, 연결감에 대한 갈망, 우울의 씨앗을 보여준다.
그런 꿈은 여성으로 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 P336

오늘 아침 일찍 나는 강에 배를 띄우고, 청명한 8월 말 하늘 아래강을 거슬러 오르며, 배의 리듬에 수면에부딪혀 반짝이는 햇빛에 노가 물을 가르는 느낌에 넋을 잃고 몰입했다. 나는 스스로 강하고 유능하다고 느꼈고, 내 몸이 내가 가르친 대로 움직인다고 느꼈다. 그리고 계속 노를 저으면서 나는 내팔을 생각했고, 힘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생각했고, 내가 여성의 몸매와 체형을 규정하는 표준 방정식을 거스르는 데 이 스포츠가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를 생각했다. 평소 내 팔은 스웨터나 긴팔 옷에 싸여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가려져 있다. 나는 팔을 내보이지 않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내가 내 팔에서 느끼는 만족은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고, 이 점이 그 만족감을 특히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몸매에 관한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나 자신의 열정과 어떤 일을 할 줄 아는 능력들에서 비롯한 미적 기쁨, 안에서 나와 밖으로 드러난 아름다움, 날개가 된 나의 팔, 이것이 바로 해방의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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