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출간 소식은 언제나 설레임이다. 서울편 답사기 3, 4권이 나왔다. 책을 받아놓고 펴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서울편 1권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서울을 모른다. 서울에 살아본 적도 없고 머물러본 적도 없다. 스치듯 잠깐씩 찾아간 곳도 횟수도 기억할만큼 정도이다. 수도권에 사십 년 넘게 살면서도 그 지경이다. 하여 내게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서울을 달리 보게되었다. 서울이 궁금하고 찾아가고 싶어졌다. 보고 싶다. 특히 종묘.


  그래서 종묘 답사의 적기로는 단풍이 끝나가는 늦가을 끝자락과 눈덮인 겨울날을 꼽는다. 가을 답사는 오후 서너 시가 은은하고 겨울 답사는 오전 열 시쯤이 밝고 싱그럽게 다가온다. 현재 종묘는 평소에는 시간대별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자가 안내하는 단체 관람을 시행하고 화요일은 휴관이며 토요일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만 자유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늦가을의 토요일 오후, 눈 내린 겨울날의 토요일 오전이 제격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종묘를 보았다고 하면 안된다. 매년 5월 첫째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 춘추로 열리는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참관해야 종묘의 진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봄에 열리는 춘향대제(大祭)를 보지 않았다면 종묘의 겉만 보았지 속은 보았다고 할 수 없다. p54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돌고 돌아 바야흐로 서울로 들어왔다. 내가 어릴 때 단성사, 명보극장 같은 개봉관에 새 영화가 들어올 때면 ‘개봉박두(開頭)‘와 함께 ‘걸기대(乞期待)‘라는 말이 늘 붙어 다니곤 했는데혹시 나의 독자들이 ‘답사기의 한양 입성‘을 그런 기분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니까.
서울은 누구나 다 잘 아는 곳이다. 굳이 내 답사기가 아니라도 이미 많은 전문적·대중적 저서들이 넘칠 정도로 나와 있다. 그래도 내가 서울답사기를 쓰고 싶었던 것은 서울을 쓰지 않고는 우리나라 문화유산답사기를 썼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굴지의 고도(古都)중 하나다. 한성백제 500년은 별도로 친다 해도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도시이면서 근현대 100여 년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수도이다.
대한민국에서 서울의 위상이 너무 커서 ‘서울공화국‘이라는 말까지생겨났다. 한편 서울은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는 도시이고 그만큼 모 - P4

격차가 많은 도시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 동질감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은역시 문화유산이다. 서울 시내엔 조선왕조의 5대 궁궐이 있다. 이는 누구의 것도 아닌 서울 사람의 것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것이며 나아가서 외국인 관광객들 모두가 즐기는 세계유산이다.
또 서울은 다름 아닌 내 고향이다. 서울 사람으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늘 있어왔다. 특히 내가 느끼는 인사동, 북촌, 서촌, 자문밖, 성북동은 지금 젊은이들이 보고즐기는 것과 너무도 차이가 많아 그 구구한 내력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것은 훗날 현대 생활문화사의 한 증언일 수 있다는 약간의 의무감 같은것도 있었다. - P5

강진과 해남 땅끝에서 시작한지 햇수로 25년 만에 한양으로 입성하자니 감회가 없지 않다. 내가 답사기를 처음 쓸 때는 시리즈의 완간이라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한 권, 두 권, 권수가 쌓여가고, 10년,
20년, 해를 더해가면서 국내편 8권에 일본편 4권이 나오게 되자 나도 모르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최종 형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아직 가보지 않았다거나 자료가 부족하여 쓰지 못할 곳은하나도 없다. 다만 그간의 내 인생이 ‘답사기‘에만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니었던지라 주어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점점 글 쓰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답사기의 마감도 의식하기 시작했다. - P7

그리고 나의 고참 독자들께 각별히 감사드리고 싶다. 새 독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모든 저자가 갖고 있는 꿈이지만, 답사기가 나오기를기다리는 오랜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정년이라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답사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항시 옛 친구 같은 독자들과 함께 가고있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답사기를 섬세하게 잘 읽으면 문체 자체에 그런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의하는 안 하든 나는 그런 마음으로 답사기를 썼다. 그 점에서 독자 여러분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내가 삶의 충고로 받아들이는 격언의 하나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인의 진득한 마음자세이다. 어쩌면그렇게 독자들과 함께 가고자 했기 때문에 답사기가 장수하면서 이렇게멀리 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계속 그렇게 갈 것이다.

2017년 8월
유홍준 - P9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문화와 물질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1995)된 유형유산 중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 - P15

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이다. 일종의 신전이다. 세계 모든 민족은 제각기 어떤 형태로든 고유한 신전을 갖고 있고 그 신전들은 한결같이 성스러움의 건축적 표현이었다.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동양에서는 불교의 사찰, 서양에서는 기독교의교회당이 1천 년 이상 신전의 지위를 대신했지만 그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신전은 존재했다. 이집트의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장제전(葬祭殿), 그리스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로마의 판테온(Pantheon),
중국의 천단(天壇, 톈탄), 일본의 이세신궁(伊勢神宮, 이세진구) 등이 대표적이고, 거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조선왕조의 종묘이다.
종묘는 이처럼 문화유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전통성과 현대성, 민족성과 국제성 모두에서 조선왕조를 대표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지지만 정작 우리 국민은 그 가치에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종묘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식한지 얼마 안되기 때문이다. - P18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말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종묘 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평가를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기에 관심을 갖고 그 공신들의 공적을 밝히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 P43

세상의 모든 신전에는 본전의 권위를 위한 건축적 장치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회랑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가장자리에는 회랑 대신 담장이 정연히 둘러져 있다. 그런데 이 담은 특별한 치장도 없이 아주 낮게둘러 있어 조용히 정전을 거룩하게 만들고 있다. 정전에서 내다보면 담의 지붕이 거의 발아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신당과 칠사당 또한 월대 아래 담장에 바짝 붙여 낮게 배치되어 있다. 자기 표정을 갖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그 기능을 다할 뿐이다. 그러나 이 공신당과 칠사당이 있음으로 해서 정전 건물은 외롭지 않고 더욱 거룩해 보인다. - P47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정전 앞의 넓은 월대가 아우른다. 네모난 박석으로 조각보를 맞추듯 이어진 월대는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데 그 넓이보다 높이가 절묘한 건축적 효과를 자아낸다.
신문에 들어서면 월대는 같은 지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간격을 두고 우리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그 높이가 주는 경건함과 고요함이 정전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경건함과 고요함으로 이끌어준다. 자칫하면 위압적일 수 있을 법도 한데 종묘 정전의 월대는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지루한 평면일 수도 있는데 검은 전돌로 인도되는 신뢰가 정전 건물 돌계단까지 이어져 있어 공간에 깊이감을 주면서 우리 마음을 영혼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것이 종묘 정전 건축의 구조이다. - P48

종묘가 이처럼 위대한 문화유산임에도 혹자는 종묘 건립의 배경이『주례」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사대적(事大的)이라고 못마땅해하며이 건물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왜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고 중국의 제도를 따랐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이 따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다. 유럽의 중세 도시국가들이 교회당을 지은 것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지 유대 문화를따른 것이 아님과 같다.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총화를 이룰 이데올로기가 필요한데 중세사회에서 그것을 제공해준 것은 종교였다. 동서양의 모든 고대·중세 국가들은 고유의 종교가 있었음에도 샤먼의 전통에서 벗어나 발달된 종교를 적극 받아들였다. 결국 서양은 기독교, 동양은 불교를 국교로삼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일신라와 고려가 불교를 국가의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근 1천 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불교가 마침내 말폐현상을 드러냈다. 같은 시기에 서양에서 가톨릭교회가 부패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도 똑같은 현상이었다. - P49

조선왕조는 이와 같이 유교문화의 보편성을 취하면서 이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거기에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있다. 발달된 이데올로기는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그것을 가져다 쓰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맑스가 러시아 사람이 아닌데도 레닌이 맑스주의를 소련의 이데올로기로삼은 것이 그 예이다. 훌륭한 선택일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으며, 이입된 이데올로기로 나라를 망칠 수도 있고 발전시킬 수도 있다. 소련은 맑스주의를 레닌식, 스탈린식으로 변하더니 종국에는 70년 만에해체되고 붕괴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왕조는 유교문화를 조선적으로 변용하고 세련하여 500년을 이어갔다. 한 왕조가 500여 년간 종묘와 사직을 지킨 것은 여간 드문 일이 아니다. - P51

하버드대 에드윈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교수 등이 공저로 펴내영어권 동양학 연구의 첫번째 필독서로 꼽히는 『동양문화사』(김한규 외 공역, 을유문화사 1991)에서는 조선왕조를 ‘모범적 유교사회‘라 하고 그 문화는 ‘개량된 중국형‘이었다고 했다.
로마가 그리스 문명에 기초했고 네덜란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 결코 흠이 아니듯이, 또 이탈리아·독일·프랑스·스페인·영국이 제각기 독자적인 기독교 문화를 갖고 유럽문화의 일원이 되었듯이, 조선왕조는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잘 짜인 유교문화를 발전시켰고 동아시아 문화 전체에서 확고한 자기 지분을 가진 당당한 문화 주주 국가가 되었다.
이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종묘다. 중국의 종묘는 자금성 동쪽에 있는 태묘(太廟)로 현재 노동인민문화궁 안에 있는데, 그 형식과 내용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북경의 태묘에 대해 세계 어느 건축가가 찬미한 것을나는 보지 못했다. 전문가가 아니라 해도 차분한 교양을 갖춘 이라면 이태묘를 보고 감동할 리가 없다. - P52

내가 늘 종묘를 예찬하니까 우리 답사회의 한 40대 여성 디자이너는종묘를 한번 다녀오고는 내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 오는 아침이었다고 한다.

"맞아요. 고요한 침묵 속 웅장함, 비어 있지만 뭔가 꽉 찬 듯한 느낌,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소리도 풍경도 다 사라지고 종묘만 남더군요. 진공상태에서 내가 얼음이 된 느낌이었어요. 참으로 놀라운 종묘입니다."

그런 종묘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P52

답사기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친구들로부터 듣는 얘기는 대개 이렇다.
‘아, 거기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는지 몰랐네‘ ‘옛날에 가본 적이 있기는한데 지금은 아무 기억이 없네‘ ‘네 책을 읽으니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마음이 생기는데 거기를 언제 가면 좋은가?‘ 아마도 종묘 답사기를 읽은독자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할 것 같다.
종묘는 봄여름보다 가을 겨울이 더 좋다. 종묘의 단풍은 울긋불긋 요란스레 화려한 것이 아니라, 참나무 느티나무의 황갈색이 주조를 이룬가운데 노란 은행나무와 빨간 단풍나무가 점점이 어우러져 가을날의 차분한 정취가 은은히 젖어들게 한다. 그때 종묘에 가면 아마도 인생의 황혼 녘에 찾아오는 처연한 미학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렇게 늙을 수만 있 - P53

다면 잘 산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가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뒷산 너머에 있는 창덕궁 후원의 단풍이 ‘화이불치(華而不,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한다면 종묘의 단풍은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라 할 만하다.
겨울 어느 날, 눈이 내려 정전의 지붕이 하얗게 덮일 때 종묘는 거대한수묵 진경산수화와 같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건축으로 이런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했던, 그 정전의 지붕과 월대가 온통 눈에 덮여 흰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줄지어 늘어선검붉은 기둥들이 자아내는 침묵의 행렬에 자신도 모르게 깊은 사색의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 무거운 고요함에 무언가 복받쳐오르는감정이 일어나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사진작가 배병우가 그런 날을기다려 여러 점의 사진을 남겼는데 눈이 수북이 쌓여 있을 때 찍은 장면은 무게감이 있어 좋고, 얇게 덮여 있는 작품은 햇살에 빛나는 영롱한 빛이 환상적이다. - P54

그래서 종묘 답사의 적기로는 단풍이 끝나가는 늦가을 끝자락과 눈덮인 겨울날을 꼽는다. 가을 답사는 오후 서너 시가 은은하고 겨울 답사는 오전 열 시쯤이 밝고 싱그럽게 다가온다. 현재 종묘는 평소에는 시간대별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자가 안내하는 단체 관람을 시행하고 화요일은 휴관이며 토요일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만 자유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늦가을의 토요일 오후, 눈 내린 겨울날의토요일 오전이 제격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종묘를 보았다고 하면 안된다. 매년 5월 첫째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 춘추로 열리는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참관해야종묘의 진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봄에 열리는 춘향대제(大祭)를 보지 않았다면 종묘의 겉만 보았지 속은 보았다고 할 수 없다. - P54

종묘는 흔히 조선시대 역대왕과왕비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묘제례를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 또는 양반집 불천위 제사의 국가 버전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생각했다.
그러나 종묘제례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슬픔의 제례가 아니라 유교의 종교의식인 동시에 국가의 존립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국가 의식이다. 장사지내는 흉례(凶禮)가 아니라 오늘을 축복하는 길례(吉禮)인 것이다. 그래서 종묘제례에는 노래와 춤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다. - P55

1464년(세조 10년) 1월 14일, 세조는 마침내 종묘제례에 친히 제향하면서 새로 다듬은 「정대업」과 「보태평을 연주했다. 실록의 이 기사에는 종묘제례의 전 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날 종묘제례악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종묘제례악에서 악사는 두 팀으로 나누어 배치하는데 당상(堂上)의악사단을 등가(등歌), 당하(堂下)의 악사단을 헌가(軒架)라고 했다. 악기의 편성은 박·편종·편경·피리·장구·대금·해금·북·아쟁·태평소·축·어등 15가지이다. - P69

제례악에 맞추어 추는 춤은 정연하게 열을 지어 춘다고 해서 일무(舞)라고 한다. 일무는 가로세로 8명씩이면 64명이 추는 팔일무이고, 가로세로 6명씩이면 36명이 추는 육일무인데, 대한제국 이후에는 우리나라도 팔일무를 추었다. 성균관문묘제례에서도 팔일무를 추는데 그 춤은종묘제례와 비슷한듯 약간 다르다.
종묘제례에서 「보태평」의 춤은 문치를 기리는 문무(文舞)이고 정대업의 춤은 무공을 찬양하는 무무(武舞)다. 문무에서는 왼손에 약),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추며, 무무에서는 앞의 네 줄은 검(劍), 뒤의 네 줄은창(槍)을 들고 춘다. 문묘에서 팔일무를 출 때는 문무는 같지만 무무에서는 왼손에 방패(干), 오른손에 도끼(戚)를 들고 춘다. - P70

종묘의 길들은 걷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것이고, 곧게 뻗기 보다는 꺾이고 갈라지면서 호흡을 조절한다. 너무 빨라지면 걸음을 멈추도록 제어하며 멈추어 서면 다시 움직임을 유도하는 길들이계속된다. 엄숙한 건물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마치 길들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종묘의 길들은 그 자체가 건축적 질서이며 의례이고 움직임이며 행위가 된다.


신이 가고 제왕이 걷는 길이라면 폭이 넓고 곧게 뻗어 위풍당당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종묘의 신도는 폭도 좁고 바닥은 거칠며 중간에 꺾여 들어간다. 종묘의 신도는 정전의 건축과 일체를 이루는 디자인이며,
가무악으로 이루어진 제례의식의 경건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길례(吉禮)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 P91

서울은 ‘궁궐의 도시‘다. 세계 어느 나라든 한시대의 수도였던 왕도(王都)의 상징물은 궁궐이다. 그리고 조선 500년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등 자그마치 5개의 궁궐이 있다.
세계 어느 역사도시에도 한 도성 안에 궁궐이 5개나 있는 곳은 없다.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 덴마크 여왕, 스웨덴 국왕,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방한했다. 이들은 모두 창덕궁과 경복궁을 참관하면서 서울 시내에 이런고궁이 5개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그 내력에 대해 묻곤 했다.
서울의 궁궐 중 창덕궁은 종묘와 함께 199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진즉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때 서울의 5대 궁궐을 한꺼번에 등재했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후회가 일어난다. 사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규정에 ‘영역의 확대‘라는 것이 있다. 아니면 개별 추가 등재로 서울의 5대 궁궐을 모두 등재하도록 노력해볼 만하다. 개인적으론 그냥 ‘궁궐의 도시‘보다는 ‘5대궁궐의 도시‘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부터 서울의 5대 궁궐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하고 이를 마음으로 동의하며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 P97

그러나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고종은 상황으로 물러나고 뒤를 이은 순종은 1907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고종황제가 머무른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덕수궁까지 서울에 5대 궁궐이 자리잡게 된것이다.
5대 궁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느 하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없었다. 경복궁엔 조선총독부가 들어섰고, 창경궁은 식물원·동물원이되었으며, 경희궁엔 일본인 중학교인 경성중학교(훗날의 서울중·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훼철되었고, 덕수궁은 공원으로 개조되었다. - P100

그러나 조선왕조 5대 궁궐은 그 기본 골격이 워낙에 튼실하여 근래 들어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면서 궁궐의 멋과 품위를 어느 정도 회복해가고있다. 그러므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서울의 5대 궁궐 중 으뜸은 역시 국초와 왕조 말기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이라는 데 아무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하여 여기에 기거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더 - P101

많이 살았다. 임진왜란으로 두 궁궐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도 경복궁이아니라 창덕궁을 먼저 복원했다. 오늘날 외국인 관광객들도 경복궁보다창덕궁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이 권위적이라면 창덕궁은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다. 창덕궁 경복궁과이렇게 차별화된 건축 양식을 갖게 된 이유는 그 창건 과정에 잘 드러나있다. - P102

사실 이것이 우리나라 조원(園)의 중요한 특색이다. 자연 그대로의모습을 살려 나무들이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한 느낌을 주고 인공적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꾸미긴 꾸몄는데 꾸민 태를 내지 않는다. 있어도있는 태를 내지 않아 창덕궁을 답사하고서도 이 공간이 특별히 기억에남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런 편안한 공간을 여느 궁궐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창덕궁에서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금천 좌우의 여덟 그루 회화나무로 말할 것 같으면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된 고목들이다. 궁궐 안에 회화나무를 심는 것은 주례』에도 나와 있는 궁궐 조원의 법칙이다. 회화나무는 느티나무와 함께 한자로 괴목(槐木)이라 쓴다. 주나라 때 삼공(三公, 세 정승)이 괴목 아래에서나랏일을 논했다는 고사에서 회화나무 괴(愧) 자에 ‘삼공‘ 또는 ‘삼공의자리‘라는 뜻이 더해졌다. 이런 상징성 외에도 회화나무는 생기기도 늠름하게 잘생겼고, 낙엽의 색조가 갈색으로 차분하며 수명도 길어 궁궐의품위를 잘 지켜준다. - P113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왕이 기거하는 공간으로서 궁궐은 그 시대의문화능력을 대표한다. 정조대왕은 『궁궐지(宮闕志)』에서 궁궐이 장엄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P126

그러나 조선의 궁궐은 외국의 예에 비해 소박한 편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다. 백성들이 보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화려함이라고나 할까. 그 이유는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한양의 도시 설계와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을 수 있다.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P126

궁궐 건축에 대한 정도전의 이런 정신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우리궁궐의 미학이다. 일찍이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 - P126

(기원전 4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 P124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아름다움은 궁의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고,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우리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이 아름다움은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켜 일상에서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미학이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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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인 소원. 사건이 글쓰기가 되고 글쓰기가 사건이 되는 것. -미셸 레리스


기억이 사물들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만은 아닐지도. ㅡ쓰시마 유코







바르베스 역에 내렸다. 지난번처럼 지상에 있는 지하철역사 아래로 남자들이 무리 지어 기다렸다. 사람들은 저렴한타티 상점의 분홍색 쇼핑백을 들고 인도를 걸어 다녔다. 마젠타 대로로 접어들자, 밖에다 점퍼를 걸어 둔 빌리 의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한 여자가 나를 향해 걸어왔는데, 건장한 다리에 굵은 무늬로 짜인 검정스타킹을 신었다. 병원에 가까워질때까지 암브루아즈파레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궁륭형태로 장식한 엘리자관의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유리로 막힌 긴 복도를 따라가느라 처음에는 뜰에 자리한 야외 음악당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병원을 나설 때,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했다. 15번 문을 밀고 들어가서 3층으로 올라갔다. 검진 창구에 번호가 적힌 종이를 제출했다. 여자는 카드상자를 뒤져 서류가 들어 있는 크라프트지 봉투를 꺼냈다. 손을 내밀어 봤지만 봉투를 내게 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봉투를책상 위에 놓고, 잠시 앉아 있으면 호명하리라고 말했다.
- P9

과제물 검토가 끝났다. 흐릿하지만 똑같은 장면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7월의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 섹스하는 몸의 움직임과 사정. 여러 달 동안 잊고 있었던 이 장면 때문에 나는여기 있었다. 벗은 두 몸이 얼싸안고 움직이는 자세가 죽음의춤처럼 여겨졌다. 보채는 바람에 다시 만나기로 했던 그 남자는 오로지 내게 에이즈 바이러스를 주고자 이탈리아에서 온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를 하는 몸짓과 부드러운피부 그리고 정자, 이 모든 것을 내가 병원 대기실에 있다는사실과 결부시킬 수는 없었다. 무엇도 섹스와 연결시킬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 P11

의사가 내 번호를 불렀다. 진찰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징조이리라 생각했다.
진찰실 문을 닫으며, 그녀는 아주 빠르게 "음성이에요."라고말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다음부터 진찰실에서 의사가늘어놓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사는 유쾌하고 호의적인 인상이었다.
아주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고,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 번 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금발여자도 마찬가지일지 알고 싶어졌다. 바르베스 역에 밀집한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분홍색 무늬가 인쇄된 타티 상점의 쇼핑백을 들고 양방향 플랫폼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 P12

1963년, 라리부와지에르에서, 지금과 똑같은 공포와 불신 속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N. 의사의 판정을 기다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 삶은 오기노 방식‘과 1프랑짜리 자판기 콘돔 사이에 자리한다. 이것이 삶을 가늠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심지어 그 무엇보다 더 확실한 - P12

1963년 10월, 루앙에서 생리가 시작되기를 일주일 이상기다렸다. 쾌청하고 온화한 날들이었다. 너무 이르게 외투를꺼내 입었고, 몸은 무겁고 무기력했다. 개강을 기다리며 빈둥거리다가 스타킹이나 사러 다녔던 백화점 안에서는 특히 더그랬다. 에르부빌 거리에 있는 여학생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며, 팬티에 비친 피를 볼 수 있기를 내내 바랐다. 매일 저녁마다 수첩에 또박또박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쓰고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자다가 깨었던 밤에도 곧바로 ‘아무것도 없음‘
을 알아차렸다. 작년 이맘때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일이 아주 오래전 일처럼, 마치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 P13

진료대에서 내려온 바로 그 순간, 품이 넓은 녹색 스웨터가 허벅지 위로 내려왔고, 산부인과 의사는 임신한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위가 안 좋다고 생각했던 것은 입덧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생리를 할 수 있게끔 주사를 처방했지만, 효과가있을 거라 믿지 않는 눈치였다. 문 앞에서 그는 명랑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생아는 늘 예쁘더군요." 소름 끼치는 말이었다.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수첩에 이렇게 적혀 있다. ‘임신. 끔찍하다.‘ - P17

대학 생활 지원 센터의 간호사는 그날 저녁 아무 말 없이주사를 놔주었고, 그다음 날 아침에 또 한 대를 놓았다. 11월11일, ‘1차 세계 대전 휴전 기념일 휴일이 낀주말이었다. 부모님 댁으로 갔다. 그때 불그죽죽한 피가 빠르고 짧게 흘렀다.
눈에 확 띄게 얼룩이 묻은 팬티와 면바지를 빨랫감 위에 올려놓았다. (수첩: ‘피가 나오다 말았다. 엄마에게 대신 뭘 줘야 하나?‘)루앙에 돌아와서 N. 의사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는 내 상태를확인해 주었고, 임신 진단서는 보냈다고 말했다. 그다음 날 임신 진단서를 받았다. 마드무아젤, 아니 뒤세느 출산 예정일:1964년 7월 8일. 나는 여름과 태양을 떠올렸다. 임신 진단서를 찢어 버렸다. - P17

그 후 몇 달의 시간은 흐릿한 불빛에 잠겨 있다. 끊임없이거리를 배회하는 내가 보인다. 이 시기를 생각할 때면 매번,
‘출항‘이나 ‘선악의 저편‘ 혹은 ‘밤의 끝으로의 여행‘ 같은 문학 작품의 제목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제목들은 매번내가 그 당시 체험했던 느낌,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아름다운 무언가에 부합하는 듯했다. - P18

그런 생각을 떨칠 수도없으면서 저항했다. 그 생각에 빠져들면 끔찍했다. 한편으로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겠다는생각도 들었다.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면, 바로 그 일이었을 거다. 어느 밤, 나는 임신 중절 경험에 대해 쓴 책을 두손에 들고있지만, 서점 어디에서도 그 책을 찾을 수 없고, 도서목록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 꿈을 꾸었다. 책 표지 아래에 큰 글씨로
‘절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꿈이 책을 써야만 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런 경험을 글로 쓰는 일이 쓸데없는 짓이라는의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 P19

법. 이들은 금고형과 벌금형을 받았다. ① 몇 건의 임신 중절 시술을 집도한 자. ② 의사들, 산파 전문의들, 약사들 그리고 임신 중절 시술을 추천하고 용이하게 한 이들. ③ 스스로 임신 중절에 나선여성 혹은 그에 동의한 여성. ④ 임신 중절을 선동하고 피임을 선전한 자. 더불어 범법자들에게는 체류도 금지된다. 2번 조항에 속하는범법자들은 고려할 것도 없이 직업 활동을 일시적으로 금지하거나자격을 완전히 박탈한다.
『새로운 라루스 백과사전』, 1948년판,

시험을 준비하고 여름방학을 기다리며 수업과발표, 카페와 도서관으로 하루하루를 채워 왔다. 이제 시간은 이런 일들로 채워지는 의미 없는 나날의 연속이 아니었다. 시간은 내안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괴해야만했던,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문학과 사회학 수업을 들었고, 학생 식당에 갔고, 점심과저녁엔 학생들만 다니는 파뤼쉬 바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제그들과 같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들, 그리고 내가 있었다. - P21

막연하게 내가 태어난 사회 계층과 내게 일어난 일을 연관 지어 생각했다. 노동자와 소상공인 가정에서 고등 교육을받은 첫 번째 수혜자였기에 나는 공장이나 상점 계산대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칼로레아 합격도, 프랑스 문학 학사학위도, 알코올 중독과 같은 취급을 받는 임신한 여자아이가상징하는 가난이 물려주는 운명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섹스때문에 나는 다시 따라잡혔고, 그때 내 안에서 자라나던 무언가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이었다. - P22

순간적으로 그는 벌어진 두 다리 사이로 드러난 성기를본 듯 호기심과 음탕함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어제의모범생이 궁지에 처한 여자로 갑작스레 변한 상황을 보면서즐거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와, 그리고 언제 임신을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내 상황을 털어놓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 순간 그에게 아무런 해결책이 없을지라도,
그의 호기심이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그는 루앙 외곽에 있는 자기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나는 기숙사 방에 홀로 있고 싶지 않았다. - P24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자, 장 T.는 의자에 앉아 치아를 다드러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먹으니 좋네." 구역질이 났고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 일에 너무 얽매이고 싶지 않아 함을 알게 되었다. 그가 속한 단체에서 가족계획 명목으로정해 놓은 도덕적 범주에는 임신 중절을 원하는 여자아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일등석에 앉아 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계속 알고 싶은 것뿐이었다. 이를테면 돈 한 푼안 내고 전부 다 보고 싶어 하는 것. 계획된 임신을 지지하는협회의 일원이기에 그는 ‘윤리적인 문제로‘ 불법 임신 중절을하려는 내게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선수를 쳤다. (수첩에 ‘T.와강변에서 식사. 문제만 쌓여 감.‘ 이라고 쓰여 있다.) - P26

(Perm 484, nos 5 et 6, Norm. Mm 1065. 당시 사용하던 주소록간지에 이런 분류 기호가 적혀 있다. 낯설고 뭔가에 홀린 듯한 감정에젖어 파란색 볼펜으로 휘갈겨 쓴 흔적을 쳐다본다. 침투할 수도 파괴할수도 없는 물질적인 증거들은 기억과 글쓰기의 불안정한 속성 탓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떤 현실을 간직한 것만 같았다.) - P28

1960년대 대부분의 개인 병원들이 그렇듯이 보부와진 광장 부근, 이제(I‘Yser) 대로에 있는 일반 진찰실에는 양탄자가깔려 있고, 유리문이 달린 책장, 고전적인 책상이 놓인 부르주아 가정의 거실과 비슷했다. 왜 내가 우파 국회 의원 앙드레마리가 사는 부자 동네로 방향을 돌렸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힘들다. 밤이었고, 어쩌면 아무런 시도도 못 한 채 집에돌아가기 싫었던 것 같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가 나를맞았다. 의사에게 몸이 피곤하고,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했다. 고무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진찰한 후에, 그는 임신한 게확실하다고 단정 지었다. 그에게 중절 시술을 해 달라는 말을할 수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생리를 다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쳐다보지도 않고, 사내자식들은 자기 좋은 일만 하고 여자들을 내팽개친다며 으레 독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칼슘제와 에스트라디올 주사를 처방해 주었다. 내가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마침내 태도가 누그러졌다.  - P30

나 같은 여자들은 의사의 하루를 망쳤다. 돈도연줄도 없는-그렇다고 무턱대고 의사들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여자들은 자기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고, 영영의사 면허증을 앗아 갈 수도 있는 법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고 의사들은 감히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여자들을 죽게 방치하는 법을 위반하느니 차라리 당신들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솔직하게 나서지 않는 한, 임신할 정도로 멍청한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눈 때문에 자기가 이룬 모든 걸 잃고 싶지 않다고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같이 여자들의 임신 중절을 막더라도, 그녀들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낼 거라 생각했으리라. 부서질지도 모르는 자기들 이력에 비하면, 여자들이 질 속에 뜨개질바늘을 넣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 P31

(이야기가 나를 이끌고 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불행의 의미를 내게 강요하는 느낌이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앞으로는 나아가지 않고 단지 두터워지기만 하는 시간이 끝없이 지체되도록 온갖 방법으로 - 세부적인 요인들을 찾아 메모하고, 반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사건을 분석하는 일 - 노력해 가며, 나는 몇 날, 몇주를 훌쩍 뛰어넘고 싶은 욕망에 맞서야만 한다.) - P32

이제 ‘이념의 천국‘에는 다가갈 수 없어 보였고, 그 아래로 구토하며 진창에 빠진 내 육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 어떤때는 내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다시 그런 것들을 고민해 볼 수있길 바랐고, 또 어떤 때는 지식이란 습득해 봐야 결국엔 무너져 내릴 뿐인 허울 같은 구조물처럼 보였다. 어쨌든 논문을 쓰지 못하는 상황은 중절을 해야만 하는 필연성보다 더 끔찍했다. 논문을 쓸 수 없음은, 보이지 않는 내 타락의 명백한 징표였다. (수첩에 이렇게 적혀 있다. ‘아무것도 쓸 수 없다. 공부도 되지않는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 ‘지식인‘이 아니었다.  - P33

(내 출신이며 심한 정신적 피로‘를 두려워하는 육체노동자의 세계, 혹은 내 육체, 내 육체에 새겨진 그런 기억과 연결된 먼 과거의 무언가에 붙잡혀 있기라도 한 듯, 내가 사물들을 탐구하기 위해 더 깊숙이들어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여전히 종종 한다.) - P34

그해 9월에 찍은 사진 속 나는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데, 목의 팬 부분에는 머플러를 두르고,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짙은 구리빛 피부에, 미소를 지으며, 생기 있는 표정으로앉아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변화하지만 끊임없이 실재하는 유혹이라 부를 만한 청춘 시절의 마지막 사진이라 생각했다. - P35

그 전날 밤, 「나의 투쟁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숙사 친구들과 보러 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엄청나게 동요했고,
끊임없이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영화는 나에게 명백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 자신에게 가하게 될고통은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생각은 용기를 주고 결심을 하게 했다. - P37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 P38

(지난밤, 1963년 상황에 처해서 중절할 방법을 모색하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자, 그 당시 내가 느꼈던 압박감과 무력감을 그 꿈이 정확하게 되돌려 주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이 절망적인시도처럼 여겨졌다. ‘모든 게 다 있다.‘라고 여기는 아주 짧은 오르가슴을 느낄 때처럼, 꿈을 떠올리자, 내가 단어들로 찾아보려 하는 것이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 낸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의 기억은 내글쓰기의 시도를 무용하게 했다.
그런데 깨어나면서 꿈꿀 때 느낀 감정이 사라진 이 순간, 글쓰기는꿈이 정당화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필연성을 되찾는다.)고 2 - P38

지난 일요일, 루앙을 경유해서 노르망디 해변을 다녀왔다. 그로스오를로주 거리를 걸어서 성당까지 갔다. 새로 조성한 ‘레스파스 뒤 팔레‘ 쇼핑몰에 위치한 카페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집필하던 책 탓에끊임없이 1960년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벽을 닦아 내고 새로 색을칠한 루앙 시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도시의 색채를 벗겨내고, 거리 벽에 본연의 어둡고 음산한 색을 씌우고, 인도에도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모습을 만들어 가며, 공상이라는 힘겨운 노력을 통해서만 1960년대에 다가갈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책에 들어간 풍경 삽화 속에서 인물들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어쩌면 1963년 당시의 옛날 학생들 한두 명쯤은 있지 않을까. 글을 쓰면서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르지만, 지금은 만나 볼 수 없는 사람들.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는 거무스레한 얼굴에 갈색 머리를 지닌, 작지만 두툼한 입술의L.B.를 떠오르게 하는 예쁜 소녀가 있었다. 소녀가 그녀의 딸이리라 생각하고 싶었다.) - P45

그녀는 테이블을 앞에 두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내 다리 사이로 커튼이 내려진 창문과 길가 반대로 난 다른 창문들, P.-R. 부인의 흰머리가 보였다. 이런 곳에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 학교에서 몸을 숙이고 책을 보는 여학생들을, 콧노래를 부르며 다림질을하고 있을 엄마를, 보르도 거리를 거닐고 있을 P.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자기 주변에 두고 싶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래 봐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은이전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따름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계속 내게 ‘대체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거지?‘라고 묻게 할 뿐인데. - P54

(이 글을 쓰던 시기에, 코소보 난민들이 칼레를 거쳐 영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한다. 밀항업자들은 엄청난 돈을 요구하고, 때로는 밀항전에 잠적해 버린다. 그럼에도 코소보 난민을 비롯하여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밀항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구원받을 다른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밀항업자들을 쫓는다. 삼십 년 전에 임신 중절시술가에게 그랬듯이 밀항업자들의 존재를 몹시 못마땅해한다. 누구도 그 존재를 부추기는 법률이나 국제 사회의 명령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치 오래전 임신 중절 시술을 해 주었던 이들처럼, 이민자들의 밀항을 돕는 이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더 올바른 이들도 분명있으리라. - P59

루앙으로 돌아왔다. 춥지만 햇볕은 좋았던 2월이었다. 나는 똑같은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느낌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자동차들, 학생식당 테이블 위의 식판들.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의미가 넘쳐 나는 듯 보였다. 그런데 넘쳐 난다는 바로 그 이유로 단 하나의 의미를 포착할 수없었다. 한편에는 너무나 의미가 많은 존재와 사물이 있었고,
다른 편에는 아무 의미 없는 말들과 단어들이 있었다. 언어를넘어서는 순수한 의식이 흥분된 상태 속에 있었다. 밤도 어쩌지 못했다. 깨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얕은 잠을 잤다. 내 앞에서 작고 하얀색의 아기 인형이 떠다녔다. 쥘베른의 소설 속우주 비행사들을 계속해서 쫓아다니며 하늘에 떠다니는 개의시체 같았다. - P74

신성한 무엇처럼 1월 20일과 21일 밤의 비밀을 내 몸속에간직한 채 거리를 걸었다. 내가 공포의 끝에 있었는지, 아름다움의 끝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긍심을 느꼈다. 어쩌면 고독한 항해자들, 약물중독자들과 도둑들, 혹은 다른 이들은 결코가려고 하지 않는 곳까지 경험해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자긍심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감정의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이 이야기를 쓰게끔 이끌었다. - P75

이른바 정상이라고 부르는, 모호한 진술이지만 다들 그의미를 아는, 즉 반짝이는 세면대와 기차 안 여행객들의 머리를 보는 일이 더는 문제가 되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세계로 되돌아온 게 언제인지 모른다.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중절에 들어간 돈을 조금씩 갚기 위해 저녁에는 아이들을 돌봤고, 심장병 전문의의 전화를 받는 일도 했다. 오드리 헵번과 케리 그랜트가 주연한 「샤레이드」, 잔느 모로와 벨몽도가 나오는 바나나 껍질」과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영화들을 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잘랐고, 안경을 콘택트렌즈로 바꿨는데, 렌즈를 끼는일은 질 속에 페서리를 넣는 것만큼 어렵고 불확실했다. - P78


여러 해 동안, 1월 20일에서 21일 밤은 기념일이었다.

이제 아이들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이런 시련과 희생이 필요했음을 안다. 내 몸속에서 재생산이라는 폭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차례가 되어 세대들이 거쳐 가는 장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 P78

삶과 죽음, 시간, 도덕과 금기, 법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경험, 육체를 통해 극과 극을 오간 경험으로 여겼던 사건을 단 - P78

어들로 표현하는 일을 끝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 사건에 대해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유일한 죄책감을 지웠다. 재능을 받았지만 낭비해 버린 듯. 경험한 사건에서 찾을수 있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모든 이유를 넘어서서 무엇보다 가장 확실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하나 있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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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잠재된
성차별주의를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플린 케일은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돌파구를 만났다. 뉴욕 리뷰 오브북스」의 편집자 로버트 실버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민 1963년 8월의일이었다. 우리 신문을 위해 소설 서평을 써주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순간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이 원고청탁으로 그녀가 서평을 쓰게 된소설은 메리 매카시의 그룹이었다.
매카시보다 겨우 일곱 살 아래인 케일은 오래전부터 그녀의팬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이 나왔을 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스물세살, 그 책의 성적인 솔직함을 제대로 받아들이기에 딱 맞는 나이였다.
또한 그룹이 엄청난 성공을 거둘 무렵의 케일은 매카시처럼 보눈이 날카로운 영화비평가로 오랫동안 일했으나 이렇다 할 성공을거두거나 인정을 받지는 못한 처지였다. 나이도 이미 마흔넷이라서,
동해안의 지식인 사회에서 과연 기회가 생기기나 할지 확실히의심스러워지던 참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녀에게 쉽게 이루어지는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 P281

그러나 인생의 전반기에는 그런 바람이 실현되지 않았다. 케일의뛰어난 머리는 아주 친한 친구들만 빼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녀를소외시키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아렌트의 경우와 비슷했다. 그녀는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별로 소질이 없었으며, 작가로서발판을 마련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오랜 노력 끝에마침내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지면을 채우는 뉴욕 지식인들의관심을 끄는 데에는 그녀보다 젊은 손택의 도움이 필요했다. 손택과케일은 그룹이 발표되기 몇 달 전에 만났다. 만난 곳이 어딘지는알 수 없다. 젊은 손택은 케일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그룹의서평을 써줄 사람을 찾고 있던 하드윅과 실버스에게 케일의 이름을알려주었다. 케일은 처음 전화가 왔을 때는 무척 고맙게 여겼음이분명하다. 메리 매카시의 책을 비평하는 글이라니. 그 글이받아들여진다면, 그녀 스스로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던 자리에마침내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길 터였다. - P283

케일의 재능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녀는공부를 잘했으며,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토론 팀에서도 활약했다. 그리고 손택처럼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손택과 달리 금방 캘리포니아를 떠나지는않았다. 그녀는 캘리포니아를 사랑했다. 영화 「허드(Hud)를 평한글에서 케일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고 평등하게어울리던 어린 시절 고향의 분위기에 대해 열광적으로 묘사했다.
"농장에서 일하는 멕시코인과 인디언 인부들이 언제나 우리가족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같이 한 것은 우리가 공연한 죄책감에선심을 베풀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서부 사람들이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는 그녀의 예술적인성향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국제적인 도시였다. 영화관도아주 많고, 예술가도 아주 많고, 재즈클럽도 아주 많았다. 대학을마친 뒤 케일은 이 도시의 보헤미안들과 어울리며, 친구인 시인로버트 호런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호런은 게이였고,
케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P284

케일은 이런 관객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작품들, 예를들어 수전손택이 극찬한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같은 영화를 공격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케일의 공격 대상은 주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쓴 대본이었다.
여성 주인공의 감정에 대해 같은 내용이 지나치게 반복된다는것이었다.


처음에는 더 고결한 수준의 영적이고 성적인 교섭에 대한진정한 고백처럼 보였다. 그러다 나는 이 영화가 우리에게주는 위대한 교훈은 곧 입 닥치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여성(에마뉘엘 리바는 이 인물을 아름답게 해석해냈다)은 - P291

지적인 현대 여성의 가장 커다란 결점 하나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모두 말로 털어놓는다는 것. 마치 침대가감수성을 증명하는 자리인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는 것, 즉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곳에 자리한 진실과 비밀, 누군가가 공감하는 시선으로 우리를바라볼 때 우리가 꺼내놓는 진정한 자신은 안타깝게도 남의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헛소리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우리가대체로 그런 자신을 잊고 사는 것은 그만한 머리가 있기때문이다.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가 숨기는진정한 자신은 싸구려 엉터리에 불과하다. 누가 그런 것을원하겠는가?  - P292

케일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의미가 깊은 주장이다. 예술에서 감정의노출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논란의 대상이다. 케일이 여기에서 10지적했듯이, 이 문제가 성별의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 작가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전쟁이 벌어지는 광경이 to친숙하다. 모든 결점과 감정을 완전히 고백하는 것만이 정직한 글쓰기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케일처럼 이런 방법은 출여성에 대한 끔찍한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지적인 인간으로서 여성이지닌 최악의 특징들만 겉으로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앞선 인용문의 마지막 줄에 드러난 잔인함, 즉 내면의 자아가싸구려 엉터리이며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결코 예술이나 「히로시마 내 사랑」이나마르그리트 뒤라스만을 겨냥한 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틀림없이본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의 말이었다. - P292

이제 케일은 영화비평가로서 특유의 문체를 완전히 갈고 다듬은뒤였다. 그녀는 다른 비평가들의 글, 그들의 논리적 결함과 신앙같은 주장을 다루는 한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에도 시선을주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이 영화 자체만큼 중요하다고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경험의 ‘재미‘에도 역시 관심을보였다. 재미는 주관적인 요소일 수 있지만, 케일은 아무리 고상한비평가(예를 들어 손택)라 해도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기도하다고 확신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평생 아둔하다, 배려가 없다,
생각이 단순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래도 그녀는 스스로 인정한
‘절충주의적‘ 문체를 통해, 재미를 언제나 중요하게 다뤘다. 아예재미를 신조로 삼을 정도였다. - P307

폴린 케일: 열의는 있으나 예의가 없다; 예의바른 남자들을짓밟는 여자


이 헤드라인을 과장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윌리엄 숀은확실히 ‘예의 바른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니고있었으며, 영화 예술 또는 영화비평의 현 상태에 대한 평범한 글을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우아한 잡지에 그런 글이 실리는 것을막기 위해 케일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다. 케일 역시 좀 더 평범한비평가의 모습으로 변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1960년대에 그녀는 장편의 비평을 딱 한 편만 더 썼는데, 「졸작, 예술,
그리고 영화(Trash, Art, and the Movies)라는 제목의 이 글은1969년 2월에 『하퍼스』에 실렸다.
손택의 캠프에 대한 단상이 간혹 캠프 전체를 옹호하는 글로잘못 인식되듯이, 「졸작, 예술, 그리고 영화도 간혹 졸작을 예술로옹호하는 글로 잘못 인식되곤 한다. 케일은 졸작과 예술 사이에는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녀는 어느 단계에서는 왜 기법이 중요하지 않은지 설명하고 싶어했다. - P309

"디디언은 직설적인 싸움보다
우아한 공격을 선호했다."

디디언과 케일은 손택과 함께 언급될 때가 많았다. 모두 캘리포니아출신이기 때문이다. 뉴욕의 지식인들은 이것을 놀라운 우연의일치로 보았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확실히 디디언과 케일은 서로 죽이 잘맞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존 그레고리 던은 케일이디디언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그녀가디디언의 소설을 싫어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영화 역시 싫어한다는 사실뿐이었다고 썼다. 케일은 이 영화를 가리켜
"공주 판타지" " 라고 평했다. "많은 사람들에 비해 내가 이런 것을 잘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이것을 꼭 참아주어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 존 디디언의 소설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세가가득하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이없는 마음에 계속 키득거렸다."
그래도 던은 두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본인들은 몰랐지만, 그에게는두 사람의 공통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상대의 작품에 대한 상냥한경멸과 몽구스의 본능을 지닌 두 거친 여자들이 착한 여자 행세를하고 있다." - P323

디디언이 그 뒤 몇 세대에 걸쳐 젊은 여성들에게 어떤 존재가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이 말은 정말이지 극적이고 아이러니하다.
후대의 젊은 여성들은 디디언이 글에서 자신들 내면의 가장 깊숙한생각을 표현해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때 디디언은 그런 식으로 유명해질 생각이 없었다. 사실 샐린저는그녀에게 끌어내려야 할 덩치 큰 남자였을 뿐이다. 그녀는 프래니와주이가 "결국 겉만 그럴싸하다"고 말했다. 샐린저가 독자들에게남들보다 더 멋지게 사는 법을 알고 있는 엘리트라는 의식을 심어주고아첨한다는 것이 디디언의 생각이었다. 사실 샐린저는 사소한 것에만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그는 사소한 일, 피상적인 일에 집착하는 주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해줌으로써 그들에게 기껏해야 일종의자기계발서 같은 것만 제공해주었다. - P329

매카시는 이 책에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한 칼날을 들이댔다.
그리고 디디언과 마찬가지로 샐린저가 잔으로 술을 마시는 일, 담배에불을 붙이는 일 등 사소한 부분에서 글을 너무 길게 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카시가 특히 싫어한 것은 샐린저식 세계관이었다. 자신이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진짜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인식. 매카시는 『프래니와 주이에서 내내 출몰하는 시무어 글래스의자살 사건이 지닌 모호성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왜자살했는지, 불행한 결혼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행복했기때문인지 알아야겠다면서, 다음과 같이 잊을 수 없는 문장으로 글을맺었다.


아니면 그가 줄곧 거짓말을 했기 때문일까? 그를 만들어낸
저자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끔찍하고, 그가 가짜였기 때문에? - P330

오래전 어떤 파티에서 디디언은 노라 에프런이라는 젊은 작가를 만나친구가 되었다. 에프런은 나중에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보도해서사실상 닉슨을 탄핵시킨 두 기자 중 한 명인 칼 번스틴과 결혼했다. 두사람의 연애 과정은 마냥 행복하지 않았지만, 결혼생활은 처음에는아주 탄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번스틴은 디디언이 극도로 싫어하던, 백악관의 방침에 아부하는고분고분한 기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1980년대 말에 번스틴이 공산주의자였던 부모에 대한 회고록을쓰면서 가장 먼저 원고를 보여준 사람 중에 디디언도 포함되어 있을정도였다.
그러나 에프런과 번스틴의 관계는 결국 그리 좋지 않게 끝나고말았다. - P358

"에프런은
농담과 코미디를 좋아했다.
이 두 가지가
생존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라 에프런이 발표한 유일한 소설은 칼 번스틴이 그녀의 삶을 파멸로몰고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었다. 두 사람은 1970년대의 활기찬뉴욕에서 처음 만났다. 둘 다 호전적인 성격이라서 아마 금방 죽이맞았던 것 같다. 번스틴은 아직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월계관을쓰고 있었고, 에프런은 베스트셀러 저서를 낸 페미니스트 작가이자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인기 출연자로 이미 대중적인 명성을 확보하고있었다. 타블로이드 신문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렇게 뛰어난 사람둘이 서로 죽이 맞아 잘 어울리는 것은 운명이었다. 두 사람은 금방당대의 커플이 되었고, 1976년에 결혼했다. 그렇게 세계의 정상에서있었으나, 번스틴이 부정을 저지르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되었다. - P363

가슴앓이』는 에프런이 자신의 사명을 묘사할 때 항상 사용하던말인 "모든 것은 표현하기 나름이다"를 전형적으로 보여준작품이었다. 에프런은 끔찍한 경험을 가져다가 모두가 사랑하는것으로 바꿔놓았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매체도 몇 군데 있었지만,
‘가슴앓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덕분에 일시적으로 부자가 된에프런은 번스틴에게서 벗어났다. 따라서 애당초 에프런이 이 책을 쓴많은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험이 항상 에프런을규정하게 되었다는 점은 그 목적에 포함되지 않았다. 노라 에프런은어느 모로 보나 불편한 일을 질질 끄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자기 인생의 희생자가 아니라 주인공이 되세요." 세월이 흐른 뒤웰즐리 대학 졸업식에서 에프런은 청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에프런은 희생자가 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룬 모든 인물 중에서 에프런은 도러시 파커와 직접적인관련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 P365

에프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일종의 페르소나를 구축해야 했다.
그녀의 부모는 "모든 것은 표현하기 나름이다"라는 말을 극단적으로신봉했다. 에프런이 아기였을 때, 부모는 브롱크스에서 피비의 부모와함께 살던 때의 일을 『셋은 한 가족』(Three Is a Family)이라는희곡으로 썼다.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코미디를 의도한작품이었으나 반응이 나빴다. 이 희곡이 영화화되었을 때, 폴린케일이 몹시 미워했던 뉴욕 타임스」의 전제적인 영화 비평가 보즐리크로우더는 "완전히 유아적"이라고 평했다. 나중에 에프런이웰즐리에 다니던 시절에 집으로 보낸 편지에서 부모는 영감을 얻어 또다른 작품을 썼다. 그들의 마지막 히트작인 『그녀를 데려가, 그녀는내 거야』(Take Her, She‘s Mine)였다. 두 사람은 재치 있는 딸이자랑스러웠는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희곡에서 딸의 말을 직접인용해버렸다.


추신, 동급생들 중에 치열 교정기를 낀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이런 걸로 개성을 나타내고 싶지는 않네요. 이게 꼭 필요한지쉬크 박사님한테 물어봐주세요. 만약 꼭 필요하다고 하신다면,
난 아마 치열교정기를 잃어버릴 것 같아요.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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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여자,
현대문화를 발톱으로 찢어발기며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가고 있는 사람."

몹시 진지하고 젊은 수전 손택은 작가로서 누구보다도 특이한데뷔를 했다. 『뉴욕 타임스』 서평은 은인을 가리켜 "피카레스크식반(反)소설"이라고 불렀다. 칭찬의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판매에는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소설은 예순 살 남성 화자인 히폴리트가파리에서 보헤미안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죽 따라가며 묘사한다.
그의 이야기는 옆길로 새기 일쑤고, 자기도취적이다. 나중에 손택은
"삶에 대한 미학적 접근의 귀류법, 즉 유아론(唯我論)적인 의식을묘사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아론을 묘사하려다가 그저 자신의머릿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모든 독자가 이런 정신 속으로 길을 찾아 들어갈 수 있는 것은아니다. 『은인』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십중팔구 이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출판사가 아렌트에게 책을 보내 감상을들려달라고 했을 때, 아렌트는 크게 찬사하는 글을 썼다. - P239

미스 손택의 소설을 방금 다 읽었는데, 대단히 훌륭한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어쩌면 귀사가중요한 작가를 발굴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 손택은몹시 독창적이며, 프랑스 학교에서 그 독창성을 이용하는 법을배웠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나는 특히 그녀의 엄격한 일관성이감탄스럽습니다. 자신의 상상력이 마구 뻗어나가게 내버려두는 - P239

경우가 단 한 번도 없더군요. 꿈과 생각으로 진짜 이야기를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 정말 기쁩니다!
출판기념 파티에 기꺼이 가겠습니다. 

손택이 그때까지 아렌트의 글을 얼마나 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물론, 아렌트의 어떤저작도 손택이 공책에적어둔 읽을 책 목록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손택이 UCLA에기부한 문서와 책 중에는 『라헬 판하겐』(Rahel Varnhagen)이포함되어 있다. 여백에는 연필로 쓴 "하!"라는 감탄사도가득하다(아렌트가 산문에서 내보이는 페르소나를 재미있게 생각한사람은 역사상 손택이 유일할 것이다). 아렌트를 직접 만났을 무렵,
손택은 이미 아렌트에게 감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1967년에메리 매카시가 아렌트와 어떻게든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손택의모습과 관련해서 아렌트를 놀릴 정도였다. - P240

지난번 로웰의 집에서 손택을 지켜봤는데, 분명히 당신을 정복할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당신과 사랑에 빠졌을 수도있고요. 다 같은 얘깁니다만. 어쨌든, 정말 그런가요?


장난스러운 묘사였지만, 매카시와 손택은 서로 라이벌로 규정될운명이었다.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매카시가 손택을 가리켜
"내 모조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가장 극적으로각색한 버전에서는, 1960년대 초에 어느 파티에서 매카시가 손택에게다가가 "네가 새로 등장한 나라고 하던데"라고 말한다. 이런 일이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손택은 자신도 이런 이야기를들었다고 썼으나, 매카시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직접 한 기억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 P240

그녀는 다층구조를 통해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문장들을써서 이런 뜻을 전달하고자 했으며, ‘안티테제‘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같이 거창한 단어들을 시원시원하게 사용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름다워 보이게 만들었다. 개인적인 속내를 더기꺼이 드러내는 1인칭 화자의 친근함을 대체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방법이 이것이었다.
「캠프에 대한 단상」과 「해석에 반대한다」가 모두 큰 반향을일으킨 뒤, 은인』의 출판사인 파라, 스트로스 앤드 지루가 기회를포착하고 이 비판적인 글을 모아 1966년에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손택의 그 유명한 에세이 제목을 따서 책 제목 또한 해석에반대한다』가 되었다. 이 글은 손택의 소설보다 훨씬 더 많은 서평을받았으므로, 주류 언론이 손택에게 감탄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되어주었다. 『보그』에 실린 무기명 기사의 지적처럼, 손택의 글은
"역사를 새로 만드는 글이거나 아니면 대담한 사기극"이라는
"말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주류 언론에 서평을 쓴 대부분의사람들은 손택을 사기꾼으로 보았다. "예리한 여자, 현대문화를발톱으로 찢어발기며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가고 있는 학부생 메리매카시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 P256

손택에 관한 글 중 그녀의 외모와 관련된 글이 얼마나 많은지는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녀를 아주 진지하게 다룬에세이에도 그녀의 외모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산더미 같은 언급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는 보기드문 미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구경꾼들이 보여준 열광과사진작가들의 훌륭한 솜씨와 달리 손택과 미모의 관계는 더 복잡했던것 같다. 손택의 공책에는 목욕을 더 자주 해야 한다는 자책의 말이가득하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그녀가 후줄근해 보일 때가 많다고지적했다. 보통 그녀는 머리카락을 완전히 뒤로 넘기고 다녔지만, 그외에는 손질을 하지 않아서 모든 것이 제멋대로 날아다녔다. 심지어대중매체에 나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빗질도화장도 하지 않은 손택의 모습이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단정한단발과 철저한 대조를 이뤘다.  - P257

처음부터 손택은 홍보 전문가들이 대중에게 내보이려고 하는자신의 이미지를 걱정했다. 사진이 손택본인을 압도하기 시작한탓이었다. 영국의 한 출판사는 라우션버그의 사진을 실은 『해석에반대한다』 한정판을 내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손택은 거절했다.


이것은 초(超)시크한 계획인가. "라이프』와 『타임』에 기사가실리고 ‘현대적인‘ 여자, 새로운 매카시, 매클루핸 이론+캠프의여왕이라는 내 이미지를 확인하게 될 계획, 내가 지금 그것을무산시키려 하는 건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대적인 여성‘이라는 이미지에 대한손택의 저항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의 인터뷰 기사에는 그녀가
"미국 아방가르드의 내털리 우드"가 되었다는 누군가의 말이되풀이되었다. 손택은 두 번째 소설인 ‘데스 킷(Death Kit)을발표했지만, 에세이 작가로서 점점 커져가는 명성을 덮을 만큼의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은인과 마찬가지로 데스킷도 플롯이라고할 만한 것이 없다. - P259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손택은 『에스콰이어』의 한 필자에게프로필을 써도 좋다고 허락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설은 꼬리와같습니다. ... 무자비하게, 어색하게 쓸모없이 우리를 따라다니죠.
자아와 기본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겸손함에는 물론언제나 자신을 신파적으로 과장하는 느낌이 조금 들어 있지만,
자신의 손에 이미 전설이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전설을 쉽사리거부할 수 있다. 그래도 손택의 말이 옳았음을 우리는 금방 알 수있다. 1960년대 말 무렵 손택의 페르소나는 그녀의 작품과는 별로관계가 없었다. 아마도 그녀로서는 편안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것이다. - P261

손택은 이 모임의 패널이 아니라 청중이었다. 토론 중에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메일러에게 질문을 던졌다. "노먼, 아무리선의에서 하는 말이라 해도 당신 같은 말투는 여자들이 보기에 부위에서 내려다보며 선심을 베푸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녀는차분하면서도 분명한 권위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지적하자면, 당신이 ‘레이디‘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나는 ‘레이디 작가‘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노먼, 당신 귀에는매너가 있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우리 귀에는 틀린 말로 들립니다. - P268

여성 작가라는 말은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당신도 아실 겁니다. 우리는 글을 쓰는사람들이니까요."
나중에 손택은 『보그』에 실린 긴 인터뷰 기사에서 자신이 작가로살아오며 직접 차별을 느낀 적이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인터뷰를맡은 기자는 그 전까지 손택이 "메일러처럼 여성 지식인을 무시하는편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까? 내가 알고 지내는 지식인 중적어도 절반이 여성입니다. 나는 여성문제에 대해 더할나위 없이 공감하고 있고, 여성의 현실에 대해서도 더할나위 없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해묵은 분노라서일상생활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죠.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세상에서 가장 해묵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 P269

여기서 그녀는 자신이 쓴 글의 주제가 페미니즘이 아니라파시스트 미학을 지적하면서, 리치가 자신에게 거슬리는 부분만지적한 것은 여성운동에서 손택 본인이 지극히 혐오하는 둔감함을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중대한 도덕적 진리라고주장하는 모든 사상이 그렇듯이, 페미니즘도 좀 단순하다." 손택은이렇게 주장했다.
두 사람은 나중에 편지를 통해 화해하면서, 탐색해볼 가치가있는 공통점이 자신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데 동의했다. "오래전부터나는 당신의 생각에 관심을 품었습니다. 우리의 출발점이 아주 다를때가 많기는 하지만요." 리치는 손택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러나 손택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자신이 리치와 주고받은 말을변명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편지에서손택이 페미니즘에 반대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았던 것 같다. 그녀가젠더 정치학과 페미니즘에 대해 글을 썼는데도 이런 인식은 끈질기게남았다. 한 번은 손택이 인터뷰 도중 대놓고 쏘아붙인 적도 있었다.
"나도 페미니스트라고요. 그러니까 이걸 나와 ‘그들‘ 사이의 문제라고하시면 안 되죠. - P272

그러나 1975년 가을 손택이 유방암 진단을 받으면서 모든 일에제동이 걸렸다. 의사들은 그녀에게 가망이 없다고 데이비드 리프에게말했다. 종양이 이미 4기에 이른 탓이었다. 사람들은 손택에게 그사실을 직접적으로 알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위험한 상태임을알아차렸던 것 같다. 그래서 조직을 필요 이상으로 제거하면 혹시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과격한 형태의 유방절제술을선택했다.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녀를 근본적으로바꿔놓았다. 그녀는 치료를 받고 나서 마치 전쟁의 충격에 시달려지친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면서, 베트남 전쟁을 혼자 몸으로 전부 - P272

겪어낸 것 같았다고 썼다.


내 몸이 나를 침략해서 식민지로 삼고 있다. 그들이 내게화학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기운을 내자.


당시 그녀는 "납작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 자신에게불투명"해졌다고 말했다. 자신이 어머니에 대한 분노, 동성애 성향,
예술적인 절망감 등을 억압하고 억누른 것이 혹시 암의 원인인가하는 걱정도 들었다. 이런 생각이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은 그녀도 잘알고 있었지만, 병을 겪고 난 뒤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런 문제들을자신에게서 완전히 정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은유로서의 질병 (Illness as Metaphor)을 쓴 것이 바로그런 정화 과정이었다. 1975년에 책으로 출간된 이 장편 에세이는엄밀히 말해서 회고록은 아니다. 손택은 자신의 치료 과정이나 직접경험한 감상적인 순간이나 의사들의 잔인함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언급하지 않은 채, 인류가 결핵과 암을 어떻게 완전히 추상적인미학으로만 다뤘는지를 논했다. 그러나 누가 물어보면, 그녀는 자신이이 글을 진심 어린 호소로 생각한다는 점을 아주 분명히 밝히곤 했다. - P273

손택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즉시 그 남자를 돌로만들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런 멍청한소리를 할 수 있는가? 그녀는 그 에세이에 대해 논하는 것에전혀 관심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이야기를 꺼내다니. 그는 시대에 뒤처졌으며, 지적인 면에서죽은 사람이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은 읽어보지도 않았다는말인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단 말인가? 그녀가분노의 어두운 터널에 빠져드는 모습을(우리는 그 뒤 2주 동안그 터널과 몹시 친숙해졌다), 우리는 모두 경악해서 꼼짝도 하지못한 채 지켜보기만 했다. 


「캠프에 대한 단상」이 계속 이름 뒤에 붙어다니는 것에 그녀가좌절을 느낀 데에는, 젊었을 때의 작품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사람들이 그 글을해석하는 시각에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 P275

1990년대에 손택은 대중문화에 대한 지적인 관심이 훌쩍 늘어나는반면 고급 예술의 상황은 점차 힘들어지는 현상을 목격했다. 그리고이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꼈으나, 물론 모든 것이 그녀의책임인 것은 아니었다. 대중문화를 옹호한 그녀의 동료들은 더있었다. 그중에서도 적잖은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폴린 케일이라는영화 비평가였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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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아렌트는
이미 무자비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마흔 살을 넘긴 뒤에야 비로소 유명해졌다. 그녀를대중적인 인물로 끌어올린 것은 전체주의 정치에 대한 정치이론을담은 거의 500쪽 분량의 논문이었다. 위대한 사상을 담은 글이 대개그렇듯이, 문장도 그리 쉽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가 꿈 많은 젊은여성으로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녀는수많은 시를 썼으며, 현란한 문장으로 자신을 묘사했다. "현실에 대한두려움, 눈 먼 시선으로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버리는, 무의미하고근거 없고 공허한 두려움, 광기이자 무미함이자 고뇌이자 절멸인두려움에 압도당했습니다."  - P117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스승이자 철학자인 마르틴하이데거에게 보낸 편지에 실제로 나오는 문장이다. 1925년 봄에대학을 떠나 집에 돌아와 있을 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잠자리를 하는 사이였으며, 대단히 강렬했던 두 사람의 연애는 두사람 모두에게 역사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녀가 "자신을 보호하기위한 3인칭으로 이 자전적인 글을 쓴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채1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렌트는 이 글에 ‘Die Schatten‘, 즉그림자」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우울증을 노골적으로 암시하는제목이었다. 20대 초반이던 한나 아렌트는 평생 아무것도 이룩하지못할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 P117

하이데거에 관한 소문은 그 점을 아주 단순하게 표현했다.
생각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 죽은 줄 알았던 과거의 문화적보물들이 다시 목소리를 얻었고,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고 낡은평범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던 그 보물들이 완전히 다른제안을 내놓고 있음이 그 과정에서 밝혀졌다는 것. 가르쳐줄사람이 있으니,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모르겠다.  - P120

그녀가 여러 달 동안 이렇게 생각하는 법을 배운 뒤인 1925년 2월의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다가와 무슨 책을 읽고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아렌트의 대답이 무척 귀엽고 매력적이었는지,
하이데거는 즉시 애정 어린 반응을 보였다. "난 영원히 널 내사람이라 부를 수 없겠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내 삶에 속할것이며 내 삶은 너와 함께 성장할 것이다."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는 자신들의 관계를 보통 추상적으로표현했다. 평생 생각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다웠다. 서로에 대한사랑을 주제로 삼은 글에서 두 사람은 몹시 극적인 분위기뿐만아니라, 아주 고상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교류 같은분위기까지 자아냈다. 웨스트와 웰스가 주고받은 연애편지와 달리,
이 두 사람의 편지에는 아기 같은 말투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애칭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하이데거는(현재 그가 쓴편지만 남아 있다)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곤 했다.


악마가 나를 공격했다. 네 사랑스러운 손과 빛나는 이마가 소리없이 드리는 기도가 여자다운 모습으로 변해서 그것을 감쌌다.
내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 P121

이런 짧은 만남은 확실히 불만족스러웠는데도, 이 연애는 두사람의 삶에서 모두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렌트의 사상이정립되는 데에 하이데거가 영향을 미쳤으니, 확실히 엄청난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렌트가 그에게서 받아간 것은직접적인 지시가 아니라 영감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이를 통해그녀는 연구의 주제와 범위 면에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갔다.
하이데거는 철학자로 남았지만, 아렌트는 정치이론 쪽으로 넘어갔다.
하이데거는 독일에 남았지만, 아렌트는 떠났다. 2차 세계대전이끝나고 두 사람이 마침내 다시 만났을 때, 아렌트는 막 유명한사상가로 인정받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명성을 안겨준연구, 특히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행동에 관한 연구는 하이데거의논평이나 통제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 P122

아렌트가판하겐에게 가장 흥미를 느낀 부분은, 판하겐이남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일종의 축복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다는점이었다. 아렌트는 특히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이 부분과 연결되어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판하겐의 남편은 유대인이라는 신분을넘어서고 싶어서 사회적으로 점점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판하겐에게는 이 방법이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유대인이라는사실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약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독일사회에서 동떨어진 존재가되었다 해도 그녀는 개성적인 시각을 얻었을 것이라고 아렌트는 10결론지었다. 그리고 그 개성적인 시각은 궁극적으로 자기만의 가치를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단순히 시각의 문제가 아니었다. 때로는 세상을 더 또렷하게 보고있다는 뜻이었다. - P127

아렌트는 판하겐이 이렇게 해서 일종의 ‘주변인‘(Pariah)이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주변인이 아니었다. 아렌트가 나중에 다른 글에서 이 단어에형용사를 붙여 "의식 있는 주변인"이라는 말을 쓴 것이 그 뜻을 더욱분명히 밝혀주었다. 의식 있는 주변인이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사실에서결코 도망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리라는 점 또한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의식 있는 주변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 자신에게무엇을 안겨주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본능적인 공감능력, 직접고통을 겪은 덕분에 타인의 고통 또한 예민하게 감지하는 능력 등이그것이었다. - P127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이런저런 주장을 꾸며내는 것은 지식인의 정수에 속하는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아렌트는세상을 떠나기 2년쯤 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지금 보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에 발목이 붙들려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된 것이다." 하이데거같은 지식인들이 나치에 합류한 것은 적극적인 전략적 선택이아니었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은 당의주장과 자신을 일치시키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자신이 열렬히신봉하지 않는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그들에게 저주와도 같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합리화하다 보니 그들 자신도 나치가 되어버렸다.
- P133

1933년에 파리에 도착한 아렌트는 조국뿐만 아니라 철학자라는직업에도 이별을 고했다. 프랑스에서 지내는 8년 동안 그녀는 글을거의 한 자도 발표하지 않은 채 판하겐 원고만 마무리했다. 그것도순전히 친구들이 옆에서 다그쳤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글을 쓰는대신 다른 일을 하기로 하고, 파리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는 유대인이주민들을 돕는 여러 자선단체에서 행정 일을 맡았다. 펜대를굴리며 비교적 관료적인 절차를 따르는 이 일은 편안했을 뿐만 아니라그녀가 해낼 수 있는 일이었으며, 예전에 "정신적인 삶을 추구할때처럼 실망감을 느낄 염려도 없었다.
아렌트는 파리에서 군터 슈테른과 잠시 다시 만났지만, 그는엄청나게 복잡한 소설(그는 끝내 이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다)을 쓰는일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곧 결혼생활이 무너져내렸다. 1936년에 아렌트는 하인리히 블뤼허라는 남자를 만났다.  - P133

파리에서 여러 작가 및 사상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아렌트에게는 좋은 영향을 미쳤다. 여러 사람과 함께 생각하는 편이더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처럼 독일에서도망쳐 온 발터 베냐민과 친구가 되었다. 베냐민은 당시 비평가로서별 볼 일이 없는 편이었기 때문에 글을 발표할 지면을 구하지 못해애를 먹고 있었다. 그는 편집자들과 싸움을 벌이다가 마지못해간신히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곤 했다. 부유한 가문 출신인베냐민은 고전적인 낭만주의자였으며, 직업적인 포부를 눈에 띄게드러내는 것을 상당히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지원을 대체로끊어버렸는데도, 그는 결국 궁핍한 생활로 이어질 길을 고집스럽게추구했다. 아렌트는 작가가 되겠다는 베냐민의 결정을 되돌아보며다음과 같이 말했다. - P135

그런 삶은 독일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며, 베냐민이 단순히먹고살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거기서 파생시킨 직업 또한거의 그만큼이나 낯설었다. 자기 이름으로 된 두툼한 책을정해진 기준만큼 여러 권 펴낸 역사 저술가 겸 학자라는 직업이아니라, 비평가 겸 수필가의 삶이라니. 돈을 받고 글을 쓰는 시처지가 아니라면, 에세이라는 형식조차 지나치게 천박할 정도로광범위하다며 그보다는 금언을 더 선호할 사람이면서. - P136

한편 발터 베냐민도 불길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1940년 가을에미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먼저 리스본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리스본에 가기 위해서는 스페인을 통과해야 했으나, 마르세유에살고 있던 다른 피난민 몇 명과 함께 스페인 국경에 도착했을때 바로 그 날 그들처럼 "국적이 없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을 수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은 그들이 수용소에 갇히게 될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 베냐민은 모르핀을 대량으로섭취하고, 의식을 잃기 전에 일행에게 유서를 전했다. 이 길밖에는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아렌트는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을 비교적 일찍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슬픔이 담긴 긴 글에서 그의 ‘불운‘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루만 빨랐다면 베냐민은 아무 문제 없이 국경을 통과했을 것이다. 하루만 늦었다면 마르세유 사람들이 당분간은 - P137

스페인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을 것이다. 그런 재앙이 가능했던 것은 딱 그날뿐이었다. 


이것은 베냐민의 운명을 지적으로 한탄한 글이었다. 그 비극을이성적으로 분석하며, 감정적으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이는글. 그러나 아렌트는 베냐민이 겪은 일에 대해 그렇게 초연하지않았다. 프랑스를 벗어나는 길에 아렌트는 친구의 무덤을 찾아보기위해 일부러 도중에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가 찾아낸 것은공동묘지뿐이었다. 그녀는 숄렘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지중해를 직접 굽어보는 작은 만에 면해 있습니다. 계단 모양의 언덕에 바위를 깎아 만든 묘지인데, 관을 암벽 안으로 밀어넣는 형태입니다. 그렇게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곳은 처음보았습니다.  - P138

당시 아렌트가 쓴 글들은 학술논문과 현대적인 신문 사설의중간쯤 된다. 대부분 문체가 뻣뻣하고, 같은 테마가 지겨울 정도로반복되었다. 이 글들을 순서대로 읽다 보면, 감동을 느끼기보다는장광설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중에도 눈에띄는 글이 하나 있다. 1943년에 『메노라 저널(Menorah Journal)에기고한 우리 피난민들 (We Refugees)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처음부터 영어로 발표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문체가 단순했던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아렌트는 영어를 배운 지 겨우 2년째였다.
그러나 영어가 서투른 탓에 어쩔 수 없이 장식을 모두 - P139

제거해버린 문체는 애잔하면서도 논쟁적인 글을 쓰려는 그녀의목적에 잘 맞았다. "애당초 우리는 ‘피난민‘이라고 불리는 것이싫다."33 아렌트는 그들이 유럽에서 겪은 일들 때문에 너무나 기가죽어서 이런 생각을 억누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의 분위기로인해 피난민들은 멍한 상태로 돌아다니며, 자신의 고민거리에 대해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들이 겪은 ‘지옥‘에 대해 듣고 싶어 하는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 역사가 새로운 종류의 인간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새로운 인간들은 적의손에 강제수용소에 갇히고, 친구의 손에 수용소에 억류된다.
- P140

불편한 주제를 과감히 다루는 것을 두려워하는 법이 없는 아렌트는피난민 사이의 높은 자살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으나, 자살을선택한 사람들에게는 그리 비판적으로 굴지 않았다. "그들은 유용조용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사라졌다.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을해결하는 방법으로 폭력적인 수단을 택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주사과하는 것 같다."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나치가불러온 정치적 재앙은 물론 심지어 미국의 반유대주의도 그들에게자살의 논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는 8시 이후에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우리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러나로스앤젤레스에서는 우리가 ‘적대적인 외국인‘이기 때문에 행동에제약을 받는다."
아렌트가 서른일곱 살 때 쓴 이 글은 그녀가 솔직한 논쟁에재능이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대중을 위한 글이 유용하다는생각을 받아들이는 데에 이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 P140

라헬 판하겐이 생각나는 말이다. 아렌트는 나중에쓴 다른 에세이에서도 하이네, 숄렘 알라이헴, 베르나르 라자르,
프란츠 카프카, "또는 심지어 찰리 채플린" 등 여러 사례를 들었다.
그들의 상황을 부정해서 자살로 이끄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심지어 ‘꼴사나움‘을 무릅쓰고라도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피난민은 사람들에게환영받지 못하는 대신에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이점을 하나얻는다. 그들에게 이제 역사는 끝난 일이 아니고, 정치는 이제비(非)유대인들의 특권이 아니라는 것. - P141

이데올로기는 아렌트가 통찰력을 발휘한 또 하나의 개념이다.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의 단순한 약속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다고그녀는 썼다. 단순한 법칙들로 과거와 미래를 설명할 수 있다는,정체 모를 느낌을 안정시켜주는 이데올로기의 능력에 기대고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그토록 강력해질 수 있는 것은 사실상이데올로기의 단순한 약속(심지어 결코 지킬 수 없는 약속까지도)덕분이었다. 아렌트의 분석에 따르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이데올로기의 약속 때문에 전체주의 정치는 지속적인 위협이 될터였다.


전체주의 해법은 전체주의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정치, 사회,
경제적 고통을 인간에게 걸맞은 방법으로 완화하기가 불가능해보일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강렬한 유혹의 형태로 살아남을 수있다.  - P145

"그녀는 언제나 무분별한 정도로
자신을 솔직하게 열어 보였다.
여러 면에서
‘활짝 펼쳐진 책‘ 같은 사람이었다."

메리 매카시는 아렌트에게 보낸 편지의 말투와 똑같이 재잘거리며대화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그녀는 이야기와 파티에 재능이 있다는점에서 파커와 비슷했다. 매카시를 추억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항상 여왕처럼 사람들을 거느린 매카시를 멀리서 지켜보는 시각으로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시인 에일린 심슨은 한나 아렌트와 비슷한시기에 매카시를 처음 만났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녀가 서 있던 자세가 그녀 특유의 것임을 나는 나중에야알았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하이힐로 균형을 잡고 선 자세.
한 손에는 담배, 다른 손에는 마티니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항상 그렇게 당당했던 것은 아니다. 아렌트와의 우정도 실수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당시 대화의 주제는 전쟁이었다. - P155

매카시는 정신의학, 특히 정신분석의 통찰력에 대해 회의적인태도를 내보이는 것을 좋아했다. 첫 번째 저서인 『그녀의 친구들(TheCompany She Keeps)에서 주인공은 정신분석학자의 소파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다. "바꿔친 아이, 고아, 의붓자식의비애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인생사를 뒤떨어진소설처럼 취급하며 타박하는 말로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는 것도알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매카시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미래 가능성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것이고 그녀 자신도 그 점을알고 있었다. "아일랜드인 변호사와 결혼해서 골프나 브리지 게임을즐기며, 가끔 피정을 가고, 가톨릭 북클럽에 가입하는 내 모습을그려볼 수 있다. 그런 생활을 했다면 난 조금 살이 쪘을 것 같다."
매카시가 그런 미래를 잃은 대신 손에 넣은 것은 그녀가 쓴 글의특징으로 유명해진, 초연한 호기심이었다. 회고록에서 그녀는 블랙코미디 같은 가벼운 태도를 고수했다. 테이프로 입이 봉해졌다는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신파적인 삶을 경험한 그녀는자신의 감정을 모조리 드러내는 일을 다소 꺼리게 되었다. 모두 정말터무니없는 일이었다는 식으로 생각해버리는 편이 아마 더 편안했을것이다. 『그녀의 친구들』의 등장인물은 "젠체하는 아내처럼 자신의한심한 과거사를 계속 문 밖으로 쫓아내는 예술적 예의"를 아는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낀다고 말한다. - P158

이 과정에서 매카시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계산해서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재주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깨달았다. 어른이 된 뒤 매카시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남들을얼마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톨릭 소녀시절의 추억(Memories of a Catholic Girlhood)에서 그녀는 어린자신이 어떤 일을 준비하면서 "정치가와 청소년이 공통적으로 갖고있는, 차갑고 공허한 도박꾼의 모습"으로 수녀원을 살피고 다녔다고말했다. 12 그녀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알아차렸으며, 규칙을 이해한 뒤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용하는방법을 알아내는 데 진심으로 노력을 쏟았다.
이런 재능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그녀에게 이롭게작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을 무서울 정도로 잘파악하는 능력은 상대를 가혹하게 평가하는 것으로 보일 때가많았다.  - P160

도덕적인 면에서 메리에게는 신학생 같은 데가 있었다. 내가보기에 그것은 그녀가 지닌 독창성의 일부인 동시에, 당황스러운매력 중 하나였다. 즉흥적인 일은 거의 없었다. 습관, 편견,아주 짧은 순간들까지 모두 설명하고 살펴보고 장부에 잘기록해두어야 했다. 


이렇게 평가하고 계산하는 습관이 비평가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열정과 평가 결과를 훌륭한 연극처럼 제시하는비평가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확실히 모두가 그것을 좋아한 것은아니었다. 사람들을 평가하는 매카시의 모습이 오만하게 비칠 때가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누구보다 책임감이강한 사람 행세를 했지만, 사실은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 P160

자신을 완벽한 여성으로 보는 남자들을 무시하고 깔보는마음이 그녀의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만약 그녀가사우샘프턴에서 수영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면, 남자들의심사기준을 통과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비록 그녀는그런 잔인한 시험에 자신을 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런 시험에서 느끼는 위협은 그녀의 머릿속에 살아 있었다.
미용실에서 들춰본 잡지 『보그나 그녀의 수준으로 감당할 수없는 식당에서 먹는 점심식사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위험을느낄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사랑했던 여러 남자들을위험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그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무능한인간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각자는 어떤 식으로든 미국식 생활을 하는 데에 장애가있는 사람이라서 모두 사랑에 겸손했다. 그럼 그녀 역시 자격이모자랐을까? 이런 무능한 인간들의 대열이 그녀가 속한 곳일까?
그녀는 평생 자청해서 망명생활을 하던 건전하고 정상적인 여성,트롤 무리 속의 공주님이 아니었을까?  - P181

"기질적으로 배배꼬인" 매카시와 의식 있는 천민아렌트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알고보니 지적인 면에서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다. 두 사람은 아렌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내내 우정을 유지했다. 비슷한 기질을지닌 두 여성이 오랫동안 우정을 쌓은 일이 그 자체로서 놀랍지는않다. 그러나 매카시와 아렌트의 결합은 확실히 끈기를 자랑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 있었던 적이 드물기 때문에, 우정을이어주는 역할은 대부분 편지가 맡았다. 가벼운 잡담을 나누는편지였지만, 그 잡담에 항상 두 사람이 다루고 있던 지적인 문제들,
친구들이 펴낸 책이나 상대방이 펴낸 책에 대한 견해 등이 뒤섞였다.
이상은 좋지만, 그들도 현실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이상의 소유자인 사람들과의 관계에 매여 있었다. - P191

1950년대 중반까지 거의 20년 동안 도러시 파커는 주로 시나리오작업에 몰두하느라 다른 글은 아주 간간이 발표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때부터 다시 진지하게 글을 쓰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언제나 같았다. 돈이 다 떨어졌다는 것.
하지만 이때는 웬일인지 글을 발표할 지면을 얻기가 더 힘들었다.
정치가 문제였다. 파커의 이름이 자꾸만 공산주의와 함께언급되었다. 파커가 공산당원이었는지 여부는 지금도 논란의대상이다. 그러나 그녀는 공산당 기관지에 글을 썼고, 공산당 행사에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미국의 분위기가 막 반공주의로 흐르던1950년대에 그녀의 이름이 자꾸만 정부 수사망에 잡혔다. 1951년에FBI가 처음으로 그녀를 찾아왔을 때에는 그녀의 개가 요원들을 향해계속 뛰어올랐다. "이보세요, 이렇게 내 개 하나 얌전히 다스리지못하는 사람이 정부를 전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도러시 파커는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P199

지금 예술에 대해 글을 쓰려니 깊은 당혹감이 느껴진다.
오래전에는 "오늘 저 여자가 또 까다롭게 구는 날인가봅니다.
고함을 지르고 침을 뱉고 그 밖에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온갖짓을 하면서요"라는 말로 표현되는 행동 속에 그 당혹감을 계속숨겨두었는데.


파커는 그 뒤로 3년 동안 더 고생하다가 1967년 6월에 뉴욕의 어느호텔 방에서 숨을 거뒀다. 어느 모로 보나 그녀의 경력은 화려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지금도 어떤 산문이나 시에서 그녀의목소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파커는 어떤 경우에도 정확히자신다운 목소리를 내는 작가였다. 유언장에서 그녀는 자신의문학적 자산을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흑인 인권단체 - 옮긴이)에 기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흔히 그녀의유산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바로 그 "깊은 당혹감"이었다. - P205

에세이 중 한 편이 『뉴요커』를 통해 발표된 뒤, 19 정치의 본질에대해 그와 논쟁하기 위해서였다(그녀는 그의 "사랑의 복음"에
"겁을 먹었다"고 썼지만, 또한 "진심으로 감탄하는 마음으로" 그편지를 썼다는 말도 했다) 20. 적어도 흑인 학자 한 명은 아렌트의호기심조차 "온정주의적"이었다고 지금도 주장한다. 아렌트에게흑인 친구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시민권 투쟁에 특히 깊이 빠졌던것 같지도 않다. 당시 지식인으로서 그녀는 워낙 높은 자리에 올라가있었기 때문에, 의견을 발표할 때마다 올림픽 출전선수 수준의권위를 발휘했다. 이런 권위는 아렌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유지되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선언하는 듯한 태도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로 그녀의 갑옷에 틈새가 났고, 그 틈새는 곧 더 커졌다. - P213

아렌트는 그를 찾아가 이 재판에 대한기사를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야스퍼스에게 편지로 말할 때보다는훨씬 간단한 대화였다. 아렌트는 재판을 몹시 보러 가고 싶다면서혹시 기사를 한두 편 써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피고가
"괴상하고 공허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미리 품고 재판을보러 간 것 같다. 그리고 재판을 방청할 때도, 나중에 자신이 놓친재판의 속기록을 읽을 때도, 아렌트의 이런 의견은 더욱 굳어지기만했다. 아이히만의 텅 빈 모습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주장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동시에 논란의 여지가 많은 논제, 즉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그녀를 이끈 것도 바로 이 공허한모습이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먼저아렌트가 바라본 아이히만의 모습, 그의 몸짓과 행동에 대한 해석을받아들이는 것인 듯하다.  - P219

이 해석은 나중에 논란을 낳았으나,
아렌트에게 아이히만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거만함과무지가 결합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은 인물. 아렌트는 독일 신문에실린 아이히만의 회고록 발췌문에 사로잡혔다. 여기서 아이히만은자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 같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태도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 인용해보자.
"나 자신은 유대인을 전혀 싫어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엄격한 기독교 교육으로 나를 기르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유대인친척들 때문에 SS 내부의 흐름과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
이런 어조를 보고 아렌트는 당혹감과 흥미를 동시에 느꼈다. 그녀는아이히만의 글이 웃기고 터무니없다 못해 경악스러울 정도라고투덜거렸다. "이것은 잘못된 신념과 자기기만이 기가 막힌 어리석음과결합한 교과서적인 사례인가?"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아니면영원히 회개할 줄 모르는 범죄자일 뿐인가.… 자신의 범죄가 - P221

현실의 핵심이 되었기 때문에 차마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자인가?"5이런 당혹감 속에서도 아렌트는 1962년에 뉴요커」에 실린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과 그 뒤에나온 같은 제목의 책에서 모두 자신은 아이히만을 틀림없는 괴물로본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아이히만식의 자기기만이 나치독일에 전체적으로 퍼져 있었으며, 전체주의 체제를 그토록 강력하게만들어준 집단망상의 한 요소라는 주장도 펼쳤다. 그녀에게 충격을안겨준 것은 거대한 악과 자그마한 개인의 대비였다.


이런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드시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아야했지만, 말할 수 없이 끔찍한 행동과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의부정할 수 없는 멍청함이라는 딜레마에서 벗어날 가장 쉬운 길을발견해서 그를 영리하고 계산적인 거짓말쟁이로 단언하지 않는한 그렇게 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는 확실히 그런 거짓말쟁이가아니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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