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일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잠재된
성차별주의를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플린 케일은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돌파구를 만났다. 뉴욕 리뷰 오브북스」의 편집자 로버트 실버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민 1963년 8월의일이었다. 우리 신문을 위해 소설 서평을 써주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순간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이 원고청탁으로 그녀가 서평을 쓰게 된소설은 메리 매카시의 그룹이었다.
매카시보다 겨우 일곱 살 아래인 케일은 오래전부터 그녀의팬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이 나왔을 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스물세살, 그 책의 성적인 솔직함을 제대로 받아들이기에 딱 맞는 나이였다.
또한 그룹이 엄청난 성공을 거둘 무렵의 케일은 매카시처럼 보눈이 날카로운 영화비평가로 오랫동안 일했으나 이렇다 할 성공을거두거나 인정을 받지는 못한 처지였다. 나이도 이미 마흔넷이라서,
동해안의 지식인 사회에서 과연 기회가 생기기나 할지 확실히의심스러워지던 참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녀에게 쉽게 이루어지는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 P281

그러나 인생의 전반기에는 그런 바람이 실현되지 않았다. 케일의뛰어난 머리는 아주 친한 친구들만 빼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녀를소외시키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아렌트의 경우와 비슷했다. 그녀는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별로 소질이 없었으며, 작가로서발판을 마련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오랜 노력 끝에마침내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지면을 채우는 뉴욕 지식인들의관심을 끄는 데에는 그녀보다 젊은 손택의 도움이 필요했다. 손택과케일은 그룹이 발표되기 몇 달 전에 만났다. 만난 곳이 어딘지는알 수 없다. 젊은 손택은 케일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그룹의서평을 써줄 사람을 찾고 있던 하드윅과 실버스에게 케일의 이름을알려주었다. 케일은 처음 전화가 왔을 때는 무척 고맙게 여겼음이분명하다. 메리 매카시의 책을 비평하는 글이라니. 그 글이받아들여진다면, 그녀 스스로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던 자리에마침내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길 터였다. - P283

케일의 재능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녀는공부를 잘했으며,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토론 팀에서도 활약했다. 그리고 손택처럼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손택과 달리 금방 캘리포니아를 떠나지는않았다. 그녀는 캘리포니아를 사랑했다. 영화 「허드(Hud)를 평한글에서 케일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고 평등하게어울리던 어린 시절 고향의 분위기에 대해 열광적으로 묘사했다.
"농장에서 일하는 멕시코인과 인디언 인부들이 언제나 우리가족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같이 한 것은 우리가 공연한 죄책감에선심을 베풀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서부 사람들이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는 그녀의 예술적인성향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국제적인 도시였다. 영화관도아주 많고, 예술가도 아주 많고, 재즈클럽도 아주 많았다. 대학을마친 뒤 케일은 이 도시의 보헤미안들과 어울리며, 친구인 시인로버트 호런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호런은 게이였고,
케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P284

케일은 이런 관객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작품들, 예를들어 수전손택이 극찬한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같은 영화를 공격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케일의 공격 대상은 주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쓴 대본이었다.
여성 주인공의 감정에 대해 같은 내용이 지나치게 반복된다는것이었다.


처음에는 더 고결한 수준의 영적이고 성적인 교섭에 대한진정한 고백처럼 보였다. 그러다 나는 이 영화가 우리에게주는 위대한 교훈은 곧 입 닥치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여성(에마뉘엘 리바는 이 인물을 아름답게 해석해냈다)은 - P291

지적인 현대 여성의 가장 커다란 결점 하나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모두 말로 털어놓는다는 것. 마치 침대가감수성을 증명하는 자리인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는 것, 즉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곳에 자리한 진실과 비밀, 누군가가 공감하는 시선으로 우리를바라볼 때 우리가 꺼내놓는 진정한 자신은 안타깝게도 남의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헛소리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우리가대체로 그런 자신을 잊고 사는 것은 그만한 머리가 있기때문이다.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가 숨기는진정한 자신은 싸구려 엉터리에 불과하다. 누가 그런 것을원하겠는가?  - P292

케일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의미가 깊은 주장이다. 예술에서 감정의노출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논란의 대상이다. 케일이 여기에서 10지적했듯이, 이 문제가 성별의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 작가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전쟁이 벌어지는 광경이 to친숙하다. 모든 결점과 감정을 완전히 고백하는 것만이 정직한 글쓰기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케일처럼 이런 방법은 출여성에 대한 끔찍한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지적인 인간으로서 여성이지닌 최악의 특징들만 겉으로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앞선 인용문의 마지막 줄에 드러난 잔인함, 즉 내면의 자아가싸구려 엉터리이며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결코 예술이나 「히로시마 내 사랑」이나마르그리트 뒤라스만을 겨냥한 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틀림없이본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의 말이었다. - P292

이제 케일은 영화비평가로서 특유의 문체를 완전히 갈고 다듬은뒤였다. 그녀는 다른 비평가들의 글, 그들의 논리적 결함과 신앙같은 주장을 다루는 한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에도 시선을주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이 영화 자체만큼 중요하다고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경험의 ‘재미‘에도 역시 관심을보였다. 재미는 주관적인 요소일 수 있지만, 케일은 아무리 고상한비평가(예를 들어 손택)라 해도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기도하다고 확신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평생 아둔하다, 배려가 없다,
생각이 단순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래도 그녀는 스스로 인정한
‘절충주의적‘ 문체를 통해, 재미를 언제나 중요하게 다뤘다. 아예재미를 신조로 삼을 정도였다. - P307

폴린 케일: 열의는 있으나 예의가 없다; 예의바른 남자들을짓밟는 여자


이 헤드라인을 과장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윌리엄 숀은확실히 ‘예의 바른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니고있었으며, 영화 예술 또는 영화비평의 현 상태에 대한 평범한 글을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우아한 잡지에 그런 글이 실리는 것을막기 위해 케일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다. 케일 역시 좀 더 평범한비평가의 모습으로 변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1960년대에 그녀는 장편의 비평을 딱 한 편만 더 썼는데, 「졸작, 예술,
그리고 영화(Trash, Art, and the Movies)라는 제목의 이 글은1969년 2월에 『하퍼스』에 실렸다.
손택의 캠프에 대한 단상이 간혹 캠프 전체를 옹호하는 글로잘못 인식되듯이, 「졸작, 예술, 그리고 영화도 간혹 졸작을 예술로옹호하는 글로 잘못 인식되곤 한다. 케일은 졸작과 예술 사이에는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녀는 어느 단계에서는 왜 기법이 중요하지 않은지 설명하고 싶어했다. - P309

"디디언은 직설적인 싸움보다
우아한 공격을 선호했다."

디디언과 케일은 손택과 함께 언급될 때가 많았다. 모두 캘리포니아출신이기 때문이다. 뉴욕의 지식인들은 이것을 놀라운 우연의일치로 보았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확실히 디디언과 케일은 서로 죽이 잘맞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존 그레고리 던은 케일이디디언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그녀가디디언의 소설을 싫어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영화 역시 싫어한다는 사실뿐이었다고 썼다. 케일은 이 영화를 가리켜
"공주 판타지" " 라고 평했다. "많은 사람들에 비해 내가 이런 것을 잘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이것을 꼭 참아주어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 존 디디언의 소설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세가가득하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이없는 마음에 계속 키득거렸다."
그래도 던은 두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본인들은 몰랐지만, 그에게는두 사람의 공통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상대의 작품에 대한 상냥한경멸과 몽구스의 본능을 지닌 두 거친 여자들이 착한 여자 행세를하고 있다." - P323

디디언이 그 뒤 몇 세대에 걸쳐 젊은 여성들에게 어떤 존재가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이 말은 정말이지 극적이고 아이러니하다.
후대의 젊은 여성들은 디디언이 글에서 자신들 내면의 가장 깊숙한생각을 표현해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때 디디언은 그런 식으로 유명해질 생각이 없었다. 사실 샐린저는그녀에게 끌어내려야 할 덩치 큰 남자였을 뿐이다. 그녀는 프래니와주이가 "결국 겉만 그럴싸하다"고 말했다. 샐린저가 독자들에게남들보다 더 멋지게 사는 법을 알고 있는 엘리트라는 의식을 심어주고아첨한다는 것이 디디언의 생각이었다. 사실 샐린저는 사소한 것에만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그는 사소한 일, 피상적인 일에 집착하는 주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해줌으로써 그들에게 기껏해야 일종의자기계발서 같은 것만 제공해주었다. - P329

매카시는 이 책에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한 칼날을 들이댔다.
그리고 디디언과 마찬가지로 샐린저가 잔으로 술을 마시는 일, 담배에불을 붙이는 일 등 사소한 부분에서 글을 너무 길게 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카시가 특히 싫어한 것은 샐린저식 세계관이었다. 자신이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진짜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인식. 매카시는 『프래니와 주이에서 내내 출몰하는 시무어 글래스의자살 사건이 지닌 모호성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왜자살했는지, 불행한 결혼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행복했기때문인지 알아야겠다면서, 다음과 같이 잊을 수 없는 문장으로 글을맺었다.


아니면 그가 줄곧 거짓말을 했기 때문일까? 그를 만들어낸
저자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끔찍하고, 그가 가짜였기 때문에? - P330

오래전 어떤 파티에서 디디언은 노라 에프런이라는 젊은 작가를 만나친구가 되었다. 에프런은 나중에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보도해서사실상 닉슨을 탄핵시킨 두 기자 중 한 명인 칼 번스틴과 결혼했다. 두사람의 연애 과정은 마냥 행복하지 않았지만, 결혼생활은 처음에는아주 탄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번스틴은 디디언이 극도로 싫어하던, 백악관의 방침에 아부하는고분고분한 기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1980년대 말에 번스틴이 공산주의자였던 부모에 대한 회고록을쓰면서 가장 먼저 원고를 보여준 사람 중에 디디언도 포함되어 있을정도였다.
그러나 에프런과 번스틴의 관계는 결국 그리 좋지 않게 끝나고말았다. - P358

"에프런은
농담과 코미디를 좋아했다.
이 두 가지가
생존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라 에프런이 발표한 유일한 소설은 칼 번스틴이 그녀의 삶을 파멸로몰고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었다. 두 사람은 1970년대의 활기찬뉴욕에서 처음 만났다. 둘 다 호전적인 성격이라서 아마 금방 죽이맞았던 것 같다. 번스틴은 아직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월계관을쓰고 있었고, 에프런은 베스트셀러 저서를 낸 페미니스트 작가이자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인기 출연자로 이미 대중적인 명성을 확보하고있었다. 타블로이드 신문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렇게 뛰어난 사람둘이 서로 죽이 맞아 잘 어울리는 것은 운명이었다. 두 사람은 금방당대의 커플이 되었고, 1976년에 결혼했다. 그렇게 세계의 정상에서있었으나, 번스틴이 부정을 저지르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되었다. - P363

가슴앓이』는 에프런이 자신의 사명을 묘사할 때 항상 사용하던말인 "모든 것은 표현하기 나름이다"를 전형적으로 보여준작품이었다. 에프런은 끔찍한 경험을 가져다가 모두가 사랑하는것으로 바꿔놓았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매체도 몇 군데 있었지만,
‘가슴앓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덕분에 일시적으로 부자가 된에프런은 번스틴에게서 벗어났다. 따라서 애당초 에프런이 이 책을 쓴많은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험이 항상 에프런을규정하게 되었다는 점은 그 목적에 포함되지 않았다. 노라 에프런은어느 모로 보나 불편한 일을 질질 끄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자기 인생의 희생자가 아니라 주인공이 되세요." 세월이 흐른 뒤웰즐리 대학 졸업식에서 에프런은 청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에프런은 희생자가 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룬 모든 인물 중에서 에프런은 도러시 파커와 직접적인관련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 P365

에프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일종의 페르소나를 구축해야 했다.
그녀의 부모는 "모든 것은 표현하기 나름이다"라는 말을 극단적으로신봉했다. 에프런이 아기였을 때, 부모는 브롱크스에서 피비의 부모와함께 살던 때의 일을 『셋은 한 가족』(Three Is a Family)이라는희곡으로 썼다.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코미디를 의도한작품이었으나 반응이 나빴다. 이 희곡이 영화화되었을 때, 폴린케일이 몹시 미워했던 뉴욕 타임스」의 전제적인 영화 비평가 보즐리크로우더는 "완전히 유아적"이라고 평했다. 나중에 에프런이웰즐리에 다니던 시절에 집으로 보낸 편지에서 부모는 영감을 얻어 또다른 작품을 썼다. 그들의 마지막 히트작인 『그녀를 데려가, 그녀는내 거야』(Take Her, She‘s Mine)였다. 두 사람은 재치 있는 딸이자랑스러웠는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희곡에서 딸의 말을 직접인용해버렸다.


추신, 동급생들 중에 치열 교정기를 낀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이런 걸로 개성을 나타내고 싶지는 않네요. 이게 꼭 필요한지쉬크 박사님한테 물어봐주세요. 만약 꼭 필요하다고 하신다면,
난 아마 치열교정기를 잃어버릴 것 같아요.  - P3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