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아렌트는
이미 무자비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마흔 살을 넘긴 뒤에야 비로소 유명해졌다. 그녀를대중적인 인물로 끌어올린 것은 전체주의 정치에 대한 정치이론을담은 거의 500쪽 분량의 논문이었다. 위대한 사상을 담은 글이 대개그렇듯이, 문장도 그리 쉽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가 꿈 많은 젊은여성으로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녀는수많은 시를 썼으며, 현란한 문장으로 자신을 묘사했다. "현실에 대한두려움, 눈 먼 시선으로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버리는, 무의미하고근거 없고 공허한 두려움, 광기이자 무미함이자 고뇌이자 절멸인두려움에 압도당했습니다."  - P117

이것은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스승이자 철학자인 마르틴하이데거에게 보낸 편지에 실제로 나오는 문장이다. 1925년 봄에대학을 떠나 집에 돌아와 있을 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잠자리를 하는 사이였으며, 대단히 강렬했던 두 사람의 연애는 두사람 모두에게 역사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녀가 "자신을 보호하기위한 3인칭으로 이 자전적인 글을 쓴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채1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렌트는 이 글에 ‘Die Schatten‘, 즉그림자」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우울증을 노골적으로 암시하는제목이었다. 20대 초반이던 한나 아렌트는 평생 아무것도 이룩하지못할까 봐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 P117

하이데거에 관한 소문은 그 점을 아주 단순하게 표현했다.
생각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 죽은 줄 알았던 과거의 문화적보물들이 다시 목소리를 얻었고,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고 낡은평범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던 그 보물들이 완전히 다른제안을 내놓고 있음이 그 과정에서 밝혀졌다는 것. 가르쳐줄사람이 있으니,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모르겠다.  - P120

그녀가 여러 달 동안 이렇게 생각하는 법을 배운 뒤인 1925년 2월의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다가와 무슨 책을 읽고있느냐고 물었다. 이때 아렌트의 대답이 무척 귀엽고 매력적이었는지,
하이데거는 즉시 애정 어린 반응을 보였다. "난 영원히 널 내사람이라 부를 수 없겠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내 삶에 속할것이며 내 삶은 너와 함께 성장할 것이다."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는 자신들의 관계를 보통 추상적으로표현했다. 평생 생각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다웠다. 서로에 대한사랑을 주제로 삼은 글에서 두 사람은 몹시 극적인 분위기뿐만아니라, 아주 고상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교류 같은분위기까지 자아냈다. 웨스트와 웰스가 주고받은 연애편지와 달리,
이 두 사람의 편지에는 아기 같은 말투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애칭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하이데거는(현재 그가 쓴편지만 남아 있다)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곤 했다.


악마가 나를 공격했다. 네 사랑스러운 손과 빛나는 이마가 소리없이 드리는 기도가 여자다운 모습으로 변해서 그것을 감쌌다.
내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 P121

이런 짧은 만남은 확실히 불만족스러웠는데도, 이 연애는 두사람의 삶에서 모두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렌트의 사상이정립되는 데에 하이데거가 영향을 미쳤으니, 확실히 엄청난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렌트가 그에게서 받아간 것은직접적인 지시가 아니라 영감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이를 통해그녀는 연구의 주제와 범위 면에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갔다.
하이데거는 철학자로 남았지만, 아렌트는 정치이론 쪽으로 넘어갔다.
하이데거는 독일에 남았지만, 아렌트는 떠났다. 2차 세계대전이끝나고 두 사람이 마침내 다시 만났을 때, 아렌트는 막 유명한사상가로 인정받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명성을 안겨준연구, 특히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행동에 관한 연구는 하이데거의논평이나 통제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 P122

아렌트가판하겐에게 가장 흥미를 느낀 부분은, 판하겐이남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일종의 축복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다는점이었다. 아렌트는 특히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이 부분과 연결되어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판하겐의 남편은 유대인이라는 신분을넘어서고 싶어서 사회적으로 점점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판하겐에게는 이 방법이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유대인이라는사실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약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독일사회에서 동떨어진 존재가되었다 해도 그녀는 개성적인 시각을 얻었을 것이라고 아렌트는 10결론지었다. 그리고 그 개성적인 시각은 궁극적으로 자기만의 가치를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단순히 시각의 문제가 아니었다. 때로는 세상을 더 또렷하게 보고있다는 뜻이었다. - P127

아렌트는 판하겐이 이렇게 해서 일종의 ‘주변인‘(Pariah)이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주변인이 아니었다. 아렌트가 나중에 다른 글에서 이 단어에형용사를 붙여 "의식 있는 주변인"이라는 말을 쓴 것이 그 뜻을 더욱분명히 밝혀주었다. 의식 있는 주변인이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사실에서결코 도망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리라는 점 또한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의식 있는 주변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 자신에게무엇을 안겨주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본능적인 공감능력, 직접고통을 겪은 덕분에 타인의 고통 또한 예민하게 감지하는 능력 등이그것이었다. - P127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이런저런 주장을 꾸며내는 것은 지식인의 정수에 속하는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아렌트는세상을 떠나기 2년쯤 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지금 보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에 발목이 붙들려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된 것이다." 하이데거같은 지식인들이 나치에 합류한 것은 적극적인 전략적 선택이아니었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은 당의주장과 자신을 일치시키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자신이 열렬히신봉하지 않는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그들에게 저주와도 같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합리화하다 보니 그들 자신도 나치가 되어버렸다.
- P133

1933년에 파리에 도착한 아렌트는 조국뿐만 아니라 철학자라는직업에도 이별을 고했다. 프랑스에서 지내는 8년 동안 그녀는 글을거의 한 자도 발표하지 않은 채 판하겐 원고만 마무리했다. 그것도순전히 친구들이 옆에서 다그쳤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글을 쓰는대신 다른 일을 하기로 하고, 파리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는 유대인이주민들을 돕는 여러 자선단체에서 행정 일을 맡았다. 펜대를굴리며 비교적 관료적인 절차를 따르는 이 일은 편안했을 뿐만 아니라그녀가 해낼 수 있는 일이었으며, 예전에 "정신적인 삶을 추구할때처럼 실망감을 느낄 염려도 없었다.
아렌트는 파리에서 군터 슈테른과 잠시 다시 만났지만, 그는엄청나게 복잡한 소설(그는 끝내 이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다)을 쓰는일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곧 결혼생활이 무너져내렸다. 1936년에 아렌트는 하인리히 블뤼허라는 남자를 만났다.  - P133

파리에서 여러 작가 및 사상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아렌트에게는 좋은 영향을 미쳤다. 여러 사람과 함께 생각하는 편이더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처럼 독일에서도망쳐 온 발터 베냐민과 친구가 되었다. 베냐민은 당시 비평가로서별 볼 일이 없는 편이었기 때문에 글을 발표할 지면을 구하지 못해애를 먹고 있었다. 그는 편집자들과 싸움을 벌이다가 마지못해간신히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곤 했다. 부유한 가문 출신인베냐민은 고전적인 낭만주의자였으며, 직업적인 포부를 눈에 띄게드러내는 것을 상당히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지원을 대체로끊어버렸는데도, 그는 결국 궁핍한 생활로 이어질 길을 고집스럽게추구했다. 아렌트는 작가가 되겠다는 베냐민의 결정을 되돌아보며다음과 같이 말했다. - P135

그런 삶은 독일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며, 베냐민이 단순히먹고살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거기서 파생시킨 직업 또한거의 그만큼이나 낯설었다. 자기 이름으로 된 두툼한 책을정해진 기준만큼 여러 권 펴낸 역사 저술가 겸 학자라는 직업이아니라, 비평가 겸 수필가의 삶이라니. 돈을 받고 글을 쓰는 시처지가 아니라면, 에세이라는 형식조차 지나치게 천박할 정도로광범위하다며 그보다는 금언을 더 선호할 사람이면서. - P136

한편 발터 베냐민도 불길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1940년 가을에미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먼저 리스본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리스본에 가기 위해서는 스페인을 통과해야 했으나, 마르세유에살고 있던 다른 피난민 몇 명과 함께 스페인 국경에 도착했을때 바로 그 날 그들처럼 "국적이 없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을 수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은 그들이 수용소에 갇히게 될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 베냐민은 모르핀을 대량으로섭취하고, 의식을 잃기 전에 일행에게 유서를 전했다. 이 길밖에는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거기에 적혀 있었다.
아렌트는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을 비교적 일찍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슬픔이 담긴 긴 글에서 그의 ‘불운‘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루만 빨랐다면 베냐민은 아무 문제 없이 국경을 통과했을 것이다. 하루만 늦었다면 마르세유 사람들이 당분간은 - P137

스페인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을 것이다. 그런 재앙이 가능했던 것은 딱 그날뿐이었다. 


이것은 베냐민의 운명을 지적으로 한탄한 글이었다. 그 비극을이성적으로 분석하며, 감정적으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이는글. 그러나 아렌트는 베냐민이 겪은 일에 대해 그렇게 초연하지않았다. 프랑스를 벗어나는 길에 아렌트는 친구의 무덤을 찾아보기위해 일부러 도중에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가 찾아낸 것은공동묘지뿐이었다. 그녀는 숄렘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지중해를 직접 굽어보는 작은 만에 면해 있습니다. 계단 모양의 언덕에 바위를 깎아 만든 묘지인데, 관을 암벽 안으로 밀어넣는 형태입니다. 그렇게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곳은 처음보았습니다.  - P138

당시 아렌트가 쓴 글들은 학술논문과 현대적인 신문 사설의중간쯤 된다. 대부분 문체가 뻣뻣하고, 같은 테마가 지겨울 정도로반복되었다. 이 글들을 순서대로 읽다 보면, 감동을 느끼기보다는장광설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중에도 눈에띄는 글이 하나 있다. 1943년에 『메노라 저널(Menorah Journal)에기고한 우리 피난민들 (We Refugees)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처음부터 영어로 발표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문체가 단순했던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아렌트는 영어를 배운 지 겨우 2년째였다.
그러나 영어가 서투른 탓에 어쩔 수 없이 장식을 모두 - P139

제거해버린 문체는 애잔하면서도 논쟁적인 글을 쓰려는 그녀의목적에 잘 맞았다. "애당초 우리는 ‘피난민‘이라고 불리는 것이싫다."33 아렌트는 그들이 유럽에서 겪은 일들 때문에 너무나 기가죽어서 이런 생각을 억누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의 분위기로인해 피난민들은 멍한 상태로 돌아다니며, 자신의 고민거리에 대해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들이 겪은 ‘지옥‘에 대해 듣고 싶어 하는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 역사가 새로운 종류의 인간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새로운 인간들은 적의손에 강제수용소에 갇히고, 친구의 손에 수용소에 억류된다.
- P140

불편한 주제를 과감히 다루는 것을 두려워하는 법이 없는 아렌트는피난민 사이의 높은 자살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으나, 자살을선택한 사람들에게는 그리 비판적으로 굴지 않았다. "그들은 유용조용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사라졌다.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을해결하는 방법으로 폭력적인 수단을 택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주사과하는 것 같다."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나치가불러온 정치적 재앙은 물론 심지어 미국의 반유대주의도 그들에게자살의 논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는 8시 이후에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우리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러나로스앤젤레스에서는 우리가 ‘적대적인 외국인‘이기 때문에 행동에제약을 받는다."
아렌트가 서른일곱 살 때 쓴 이 글은 그녀가 솔직한 논쟁에재능이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대중을 위한 글이 유용하다는생각을 받아들이는 데에 이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 P140

라헬 판하겐이 생각나는 말이다. 아렌트는 나중에쓴 다른 에세이에서도 하이네, 숄렘 알라이헴, 베르나르 라자르,
프란츠 카프카, "또는 심지어 찰리 채플린" 등 여러 사례를 들었다.
그들의 상황을 부정해서 자살로 이끄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심지어 ‘꼴사나움‘을 무릅쓰고라도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피난민은 사람들에게환영받지 못하는 대신에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이점을 하나얻는다. 그들에게 이제 역사는 끝난 일이 아니고, 정치는 이제비(非)유대인들의 특권이 아니라는 것. - P141

이데올로기는 아렌트가 통찰력을 발휘한 또 하나의 개념이다.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의 단순한 약속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다고그녀는 썼다. 단순한 법칙들로 과거와 미래를 설명할 수 있다는,정체 모를 느낌을 안정시켜주는 이데올로기의 능력에 기대고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그토록 강력해질 수 있는 것은 사실상이데올로기의 단순한 약속(심지어 결코 지킬 수 없는 약속까지도)덕분이었다. 아렌트의 분석에 따르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이데올로기의 약속 때문에 전체주의 정치는 지속적인 위협이 될터였다.


전체주의 해법은 전체주의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정치, 사회,
경제적 고통을 인간에게 걸맞은 방법으로 완화하기가 불가능해보일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강렬한 유혹의 형태로 살아남을 수있다.  - P145

"그녀는 언제나 무분별한 정도로
자신을 솔직하게 열어 보였다.
여러 면에서
‘활짝 펼쳐진 책‘ 같은 사람이었다."

메리 매카시는 아렌트에게 보낸 편지의 말투와 똑같이 재잘거리며대화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그녀는 이야기와 파티에 재능이 있다는점에서 파커와 비슷했다. 매카시를 추억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항상 여왕처럼 사람들을 거느린 매카시를 멀리서 지켜보는 시각으로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시인 에일린 심슨은 한나 아렌트와 비슷한시기에 매카시를 처음 만났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녀가 서 있던 자세가 그녀 특유의 것임을 나는 나중에야알았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하이힐로 균형을 잡고 선 자세.
한 손에는 담배, 다른 손에는 마티니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항상 그렇게 당당했던 것은 아니다. 아렌트와의 우정도 실수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당시 대화의 주제는 전쟁이었다. - P155

매카시는 정신의학, 특히 정신분석의 통찰력에 대해 회의적인태도를 내보이는 것을 좋아했다. 첫 번째 저서인 『그녀의 친구들(TheCompany She Keeps)에서 주인공은 정신분석학자의 소파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다. "바꿔친 아이, 고아, 의붓자식의비애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인생사를 뒤떨어진소설처럼 취급하며 타박하는 말로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는 것도알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매카시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미래 가능성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것이고 그녀 자신도 그 점을알고 있었다. "아일랜드인 변호사와 결혼해서 골프나 브리지 게임을즐기며, 가끔 피정을 가고, 가톨릭 북클럽에 가입하는 내 모습을그려볼 수 있다. 그런 생활을 했다면 난 조금 살이 쪘을 것 같다."
매카시가 그런 미래를 잃은 대신 손에 넣은 것은 그녀가 쓴 글의특징으로 유명해진, 초연한 호기심이었다. 회고록에서 그녀는 블랙코미디 같은 가벼운 태도를 고수했다. 테이프로 입이 봉해졌다는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신파적인 삶을 경험한 그녀는자신의 감정을 모조리 드러내는 일을 다소 꺼리게 되었다. 모두 정말터무니없는 일이었다는 식으로 생각해버리는 편이 아마 더 편안했을것이다. 『그녀의 친구들』의 등장인물은 "젠체하는 아내처럼 자신의한심한 과거사를 계속 문 밖으로 쫓아내는 예술적 예의"를 아는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낀다고 말한다. - P158

이 과정에서 매카시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계산해서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재주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깨달았다. 어른이 된 뒤 매카시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남들을얼마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톨릭 소녀시절의 추억(Memories of a Catholic Girlhood)에서 그녀는 어린자신이 어떤 일을 준비하면서 "정치가와 청소년이 공통적으로 갖고있는, 차갑고 공허한 도박꾼의 모습"으로 수녀원을 살피고 다녔다고말했다. 12 그녀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알아차렸으며, 규칙을 이해한 뒤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용하는방법을 알아내는 데 진심으로 노력을 쏟았다.
이런 재능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그녀에게 이롭게작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을 무서울 정도로 잘파악하는 능력은 상대를 가혹하게 평가하는 것으로 보일 때가많았다.  - P160

도덕적인 면에서 메리에게는 신학생 같은 데가 있었다. 내가보기에 그것은 그녀가 지닌 독창성의 일부인 동시에, 당황스러운매력 중 하나였다. 즉흥적인 일은 거의 없었다. 습관, 편견,아주 짧은 순간들까지 모두 설명하고 살펴보고 장부에 잘기록해두어야 했다. 


이렇게 평가하고 계산하는 습관이 비평가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열정과 평가 결과를 훌륭한 연극처럼 제시하는비평가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확실히 모두가 그것을 좋아한 것은아니었다. 사람들을 평가하는 매카시의 모습이 오만하게 비칠 때가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누구보다 책임감이강한 사람 행세를 했지만, 사실은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 P160

자신을 완벽한 여성으로 보는 남자들을 무시하고 깔보는마음이 그녀의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만약 그녀가사우샘프턴에서 수영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면, 남자들의심사기준을 통과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비록 그녀는그런 잔인한 시험에 자신을 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런 시험에서 느끼는 위협은 그녀의 머릿속에 살아 있었다.
미용실에서 들춰본 잡지 『보그나 그녀의 수준으로 감당할 수없는 식당에서 먹는 점심식사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위험을느낄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사랑했던 여러 남자들을위험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그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무능한인간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각자는 어떤 식으로든 미국식 생활을 하는 데에 장애가있는 사람이라서 모두 사랑에 겸손했다. 그럼 그녀 역시 자격이모자랐을까? 이런 무능한 인간들의 대열이 그녀가 속한 곳일까?
그녀는 평생 자청해서 망명생활을 하던 건전하고 정상적인 여성,트롤 무리 속의 공주님이 아니었을까?  - P181

"기질적으로 배배꼬인" 매카시와 의식 있는 천민아렌트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 셈이다.
알고보니 지적인 면에서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다. 두 사람은 아렌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내내 우정을 유지했다. 비슷한 기질을지닌 두 여성이 오랫동안 우정을 쌓은 일이 그 자체로서 놀랍지는않다. 그러나 매카시와 아렌트의 결합은 확실히 끈기를 자랑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 있었던 적이 드물기 때문에, 우정을이어주는 역할은 대부분 편지가 맡았다. 가벼운 잡담을 나누는편지였지만, 그 잡담에 항상 두 사람이 다루고 있던 지적인 문제들,
친구들이 펴낸 책이나 상대방이 펴낸 책에 대한 견해 등이 뒤섞였다.
이상은 좋지만, 그들도 현실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이상의 소유자인 사람들과의 관계에 매여 있었다. - P191

1950년대 중반까지 거의 20년 동안 도러시 파커는 주로 시나리오작업에 몰두하느라 다른 글은 아주 간간이 발표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때부터 다시 진지하게 글을 쓰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언제나 같았다. 돈이 다 떨어졌다는 것.
하지만 이때는 웬일인지 글을 발표할 지면을 얻기가 더 힘들었다.
정치가 문제였다. 파커의 이름이 자꾸만 공산주의와 함께언급되었다. 파커가 공산당원이었는지 여부는 지금도 논란의대상이다. 그러나 그녀는 공산당 기관지에 글을 썼고, 공산당 행사에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미국의 분위기가 막 반공주의로 흐르던1950년대에 그녀의 이름이 자꾸만 정부 수사망에 잡혔다. 1951년에FBI가 처음으로 그녀를 찾아왔을 때에는 그녀의 개가 요원들을 향해계속 뛰어올랐다. "이보세요, 이렇게 내 개 하나 얌전히 다스리지못하는 사람이 정부를 전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도러시 파커는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P199

지금 예술에 대해 글을 쓰려니 깊은 당혹감이 느껴진다.
오래전에는 "오늘 저 여자가 또 까다롭게 구는 날인가봅니다.
고함을 지르고 침을 뱉고 그 밖에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온갖짓을 하면서요"라는 말로 표현되는 행동 속에 그 당혹감을 계속숨겨두었는데.


파커는 그 뒤로 3년 동안 더 고생하다가 1967년 6월에 뉴욕의 어느호텔 방에서 숨을 거뒀다. 어느 모로 보나 그녀의 경력은 화려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지금도 어떤 산문이나 시에서 그녀의목소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파커는 어떤 경우에도 정확히자신다운 목소리를 내는 작가였다. 유언장에서 그녀는 자신의문학적 자산을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흑인 인권단체 - 옮긴이)에 기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흔히 그녀의유산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바로 그 "깊은 당혹감"이었다. - P205

에세이 중 한 편이 『뉴요커』를 통해 발표된 뒤, 19 정치의 본질에대해 그와 논쟁하기 위해서였다(그녀는 그의 "사랑의 복음"에
"겁을 먹었다"고 썼지만, 또한 "진심으로 감탄하는 마음으로" 그편지를 썼다는 말도 했다) 20. 적어도 흑인 학자 한 명은 아렌트의호기심조차 "온정주의적"이었다고 지금도 주장한다. 아렌트에게흑인 친구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시민권 투쟁에 특히 깊이 빠졌던것 같지도 않다. 당시 지식인으로서 그녀는 워낙 높은 자리에 올라가있었기 때문에, 의견을 발표할 때마다 올림픽 출전선수 수준의권위를 발휘했다. 이런 권위는 아렌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유지되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선언하는 듯한 태도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로 그녀의 갑옷에 틈새가 났고, 그 틈새는 곧 더 커졌다. - P213

아렌트는 그를 찾아가 이 재판에 대한기사를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야스퍼스에게 편지로 말할 때보다는훨씬 간단한 대화였다. 아렌트는 재판을 몹시 보러 가고 싶다면서혹시 기사를 한두 편 써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피고가
"괴상하고 공허한 모습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미리 품고 재판을보러 간 것 같다. 그리고 재판을 방청할 때도, 나중에 자신이 놓친재판의 속기록을 읽을 때도, 아렌트의 이런 의견은 더욱 굳어지기만했다. 아이히만의 텅 빈 모습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주장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동시에 논란의 여지가 많은 논제, 즉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그녀를 이끈 것도 바로 이 공허한모습이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먼저아렌트가 바라본 아이히만의 모습, 그의 몸짓과 행동에 대한 해석을받아들이는 것인 듯하다.  - P219

이 해석은 나중에 논란을 낳았으나,
아렌트에게 아이히만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거만함과무지가 결합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은 인물. 아렌트는 독일 신문에실린 아이히만의 회고록 발췌문에 사로잡혔다. 여기서 아이히만은자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 같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태도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 인용해보자.
"나 자신은 유대인을 전혀 싫어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엄격한 기독교 교육으로 나를 기르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유대인친척들 때문에 SS 내부의 흐름과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
이런 어조를 보고 아렌트는 당혹감과 흥미를 동시에 느꼈다. 그녀는아이히만의 글이 웃기고 터무니없다 못해 경악스러울 정도라고투덜거렸다. "이것은 잘못된 신념과 자기기만이 기가 막힌 어리석음과결합한 교과서적인 사례인가?"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아니면영원히 회개할 줄 모르는 범죄자일 뿐인가.… 자신의 범죄가 - P221

현실의 핵심이 되었기 때문에 차마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자인가?"5이런 당혹감 속에서도 아렌트는 1962년에 뉴요커」에 실린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과 그 뒤에나온 같은 제목의 책에서 모두 자신은 아이히만을 틀림없는 괴물로본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아이히만식의 자기기만이 나치독일에 전체적으로 퍼져 있었으며, 전체주의 체제를 그토록 강력하게만들어준 집단망상의 한 요소라는 주장도 펼쳤다. 그녀에게 충격을안겨준 것은 거대한 악과 자그마한 개인의 대비였다.


이런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드시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아야했지만, 말할 수 없이 끔찍한 행동과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의부정할 수 없는 멍청함이라는 딜레마에서 벗어날 가장 쉬운 길을발견해서 그를 영리하고 계산적인 거짓말쟁이로 단언하지 않는한 그렇게 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는 확실히 그런 거짓말쟁이가아니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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