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돌고 돌아 바야흐로 서울로 들어왔다. 내가 어릴 때 단성사, 명보극장 같은 개봉관에 새 영화가 들어올 때면 ‘개봉박두(開頭)‘와 함께 ‘걸기대(乞期待)‘라는 말이 늘 붙어 다니곤 했는데혹시 나의 독자들이 ‘답사기의 한양 입성‘을 그런 기분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니까. 서울은 누구나 다 잘 아는 곳이다. 굳이 내 답사기가 아니라도 이미 많은 전문적·대중적 저서들이 넘칠 정도로 나와 있다. 그래도 내가 서울답사기를 쓰고 싶었던 것은 서울을 쓰지 않고는 우리나라 문화유산답사기를 썼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굴지의 고도(古都)중 하나다. 한성백제 500년은 별도로 친다 해도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도시이면서 근현대 100여 년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수도이다. 대한민국에서 서울의 위상이 너무 커서 ‘서울공화국‘이라는 말까지생겨났다. 한편 서울은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는 도시이고 그만큼 모 - P4
격차가 많은 도시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 동질감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은역시 문화유산이다. 서울 시내엔 조선왕조의 5대 궁궐이 있다. 이는 누구의 것도 아닌 서울 사람의 것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것이며 나아가서 외국인 관광객들 모두가 즐기는 세계유산이다. 또 서울은 다름 아닌 내 고향이다. 서울 사람으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늘 있어왔다. 특히 내가 느끼는 인사동, 북촌, 서촌, 자문밖, 성북동은 지금 젊은이들이 보고즐기는 것과 너무도 차이가 많아 그 구구한 내력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것은 훗날 현대 생활문화사의 한 증언일 수 있다는 약간의 의무감 같은것도 있었다. - P5
강진과 해남 땅끝에서 시작한지 햇수로 25년 만에 한양으로 입성하자니 감회가 없지 않다. 내가 답사기를 처음 쓸 때는 시리즈의 완간이라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한 권, 두 권, 권수가 쌓여가고, 10년, 20년, 해를 더해가면서 국내편 8권에 일본편 4권이 나오게 되자 나도 모르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최종 형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아직 가보지 않았다거나 자료가 부족하여 쓰지 못할 곳은하나도 없다. 다만 그간의 내 인생이 ‘답사기‘에만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니었던지라 주어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점점 글 쓰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답사기의 마감도 의식하기 시작했다. - P7
그리고 나의 고참 독자들께 각별히 감사드리고 싶다. 새 독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모든 저자가 갖고 있는 꿈이지만, 답사기가 나오기를기다리는 오랜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정년이라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답사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항시 옛 친구 같은 독자들과 함께 가고있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답사기를 섬세하게 잘 읽으면 문체 자체에 그런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의하는 안 하든 나는 그런 마음으로 답사기를 썼다. 그 점에서 독자 여러분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내가 삶의 충고로 받아들이는 격언의 하나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인의 진득한 마음자세이다. 어쩌면그렇게 독자들과 함께 가고자 했기 때문에 답사기가 장수하면서 이렇게멀리 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계속 그렇게 갈 것이다.
2017년 8월 유홍준 - P9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문화와 물질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1995)된 유형유산 중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 - P15
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이다. 일종의 신전이다. 세계 모든 민족은 제각기 어떤 형태로든 고유한 신전을 갖고 있고 그 신전들은 한결같이 성스러움의 건축적 표현이었다.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동양에서는 불교의 사찰, 서양에서는 기독교의교회당이 1천 년 이상 신전의 지위를 대신했지만 그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신전은 존재했다. 이집트의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장제전(葬祭殿), 그리스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로마의 판테온(Pantheon), 중국의 천단(天壇, 톈탄), 일본의 이세신궁(伊勢神宮, 이세진구) 등이 대표적이고, 거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조선왕조의 종묘이다. 종묘는 이처럼 문화유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전통성과 현대성, 민족성과 국제성 모두에서 조선왕조를 대표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지지만 정작 우리 국민은 그 가치에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종묘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식한지 얼마 안되기 때문이다. - P18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말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종묘 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평가를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기에 관심을 갖고 그 공신들의 공적을 밝히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 P43
세상의 모든 신전에는 본전의 권위를 위한 건축적 장치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회랑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가장자리에는 회랑 대신 담장이 정연히 둘러져 있다. 그런데 이 담은 특별한 치장도 없이 아주 낮게둘러 있어 조용히 정전을 거룩하게 만들고 있다. 정전에서 내다보면 담의 지붕이 거의 발아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신당과 칠사당 또한 월대 아래 담장에 바짝 붙여 낮게 배치되어 있다. 자기 표정을 갖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그 기능을 다할 뿐이다. 그러나 이 공신당과 칠사당이 있음으로 해서 정전 건물은 외롭지 않고 더욱 거룩해 보인다. - P47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정전 앞의 넓은 월대가 아우른다. 네모난 박석으로 조각보를 맞추듯 이어진 월대는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데 그 넓이보다 높이가 절묘한 건축적 효과를 자아낸다. 신문에 들어서면 월대는 같은 지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간격을 두고 우리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그 높이가 주는 경건함과 고요함이 정전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경건함과 고요함으로 이끌어준다. 자칫하면 위압적일 수 있을 법도 한데 종묘 정전의 월대는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지루한 평면일 수도 있는데 검은 전돌로 인도되는 신뢰가 정전 건물 돌계단까지 이어져 있어 공간에 깊이감을 주면서 우리 마음을 영혼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것이 종묘 정전 건축의 구조이다. - P48
종묘가 이처럼 위대한 문화유산임에도 혹자는 종묘 건립의 배경이『주례」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사대적(事大的)이라고 못마땅해하며이 건물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왜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고 중국의 제도를 따랐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이 따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다. 유럽의 중세 도시국가들이 교회당을 지은 것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지 유대 문화를따른 것이 아님과 같다.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총화를 이룰 이데올로기가 필요한데 중세사회에서 그것을 제공해준 것은 종교였다. 동서양의 모든 고대·중세 국가들은 고유의 종교가 있었음에도 샤먼의 전통에서 벗어나 발달된 종교를 적극 받아들였다. 결국 서양은 기독교, 동양은 불교를 국교로삼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일신라와 고려가 불교를 국가의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근 1천 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불교가 마침내 말폐현상을 드러냈다. 같은 시기에 서양에서 가톨릭교회가 부패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도 똑같은 현상이었다. - P49
조선왕조는 이와 같이 유교문화의 보편성을 취하면서 이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거기에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있다. 발달된 이데올로기는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그것을 가져다 쓰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맑스가 러시아 사람이 아닌데도 레닌이 맑스주의를 소련의 이데올로기로삼은 것이 그 예이다. 훌륭한 선택일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으며, 이입된 이데올로기로 나라를 망칠 수도 있고 발전시킬 수도 있다. 소련은 맑스주의를 레닌식, 스탈린식으로 변하더니 종국에는 70년 만에해체되고 붕괴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왕조는 유교문화를 조선적으로 변용하고 세련하여 500년을 이어갔다. 한 왕조가 500여 년간 종묘와 사직을 지킨 것은 여간 드문 일이 아니다. - P51
하버드대 에드윈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교수 등이 공저로 펴내영어권 동양학 연구의 첫번째 필독서로 꼽히는 『동양문화사』(김한규 외 공역, 을유문화사 1991)에서는 조선왕조를 ‘모범적 유교사회‘라 하고 그 문화는 ‘개량된 중국형‘이었다고 했다. 로마가 그리스 문명에 기초했고 네덜란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 결코 흠이 아니듯이, 또 이탈리아·독일·프랑스·스페인·영국이 제각기 독자적인 기독교 문화를 갖고 유럽문화의 일원이 되었듯이, 조선왕조는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잘 짜인 유교문화를 발전시켰고 동아시아 문화 전체에서 확고한 자기 지분을 가진 당당한 문화 주주 국가가 되었다. 이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종묘다. 중국의 종묘는 자금성 동쪽에 있는 태묘(太廟)로 현재 노동인민문화궁 안에 있는데, 그 형식과 내용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북경의 태묘에 대해 세계 어느 건축가가 찬미한 것을나는 보지 못했다. 전문가가 아니라 해도 차분한 교양을 갖춘 이라면 이태묘를 보고 감동할 리가 없다. - P52
내가 늘 종묘를 예찬하니까 우리 답사회의 한 40대 여성 디자이너는종묘를 한번 다녀오고는 내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 오는 아침이었다고 한다.
"맞아요. 고요한 침묵 속 웅장함, 비어 있지만 뭔가 꽉 찬 듯한 느낌,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소리도 풍경도 다 사라지고 종묘만 남더군요. 진공상태에서 내가 얼음이 된 느낌이었어요. 참으로 놀라운 종묘입니다."
그런 종묘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P52
답사기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친구들로부터 듣는 얘기는 대개 이렇다. ‘아, 거기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는지 몰랐네‘ ‘옛날에 가본 적이 있기는한데 지금은 아무 기억이 없네‘ ‘네 책을 읽으니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마음이 생기는데 거기를 언제 가면 좋은가?‘ 아마도 종묘 답사기를 읽은독자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할 것 같다. 종묘는 봄여름보다 가을 겨울이 더 좋다. 종묘의 단풍은 울긋불긋 요란스레 화려한 것이 아니라, 참나무 느티나무의 황갈색이 주조를 이룬가운데 노란 은행나무와 빨간 단풍나무가 점점이 어우러져 가을날의 차분한 정취가 은은히 젖어들게 한다. 그때 종묘에 가면 아마도 인생의 황혼 녘에 찾아오는 처연한 미학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렇게 늙을 수만 있 - P53
다면 잘 산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가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뒷산 너머에 있는 창덕궁 후원의 단풍이 ‘화이불치(華而不,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한다면 종묘의 단풍은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라 할 만하다. 겨울 어느 날, 눈이 내려 정전의 지붕이 하얗게 덮일 때 종묘는 거대한수묵 진경산수화와 같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건축으로 이런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했던, 그 정전의 지붕과 월대가 온통 눈에 덮여 흰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줄지어 늘어선검붉은 기둥들이 자아내는 침묵의 행렬에 자신도 모르게 깊은 사색의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 무거운 고요함에 무언가 복받쳐오르는감정이 일어나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사진작가 배병우가 그런 날을기다려 여러 점의 사진을 남겼는데 눈이 수북이 쌓여 있을 때 찍은 장면은 무게감이 있어 좋고, 얇게 덮여 있는 작품은 햇살에 빛나는 영롱한 빛이 환상적이다. - P54
그래서 종묘 답사의 적기로는 단풍이 끝나가는 늦가을 끝자락과 눈덮인 겨울날을 꼽는다. 가을 답사는 오후 서너 시가 은은하고 겨울 답사는 오전 열 시쯤이 밝고 싱그럽게 다가온다. 현재 종묘는 평소에는 시간대별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자가 안내하는 단체 관람을 시행하고 화요일은 휴관이며 토요일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만 자유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늦가을의 토요일 오후, 눈 내린 겨울날의토요일 오전이 제격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종묘를 보았다고 하면 안된다. 매년 5월 첫째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 춘추로 열리는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참관해야종묘의 진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봄에 열리는 춘향대제(大祭)를 보지 않았다면 종묘의 겉만 보았지 속은 보았다고 할 수 없다. - P54
종묘는 흔히 조선시대 역대왕과왕비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묘제례를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 또는 양반집 불천위 제사의 국가 버전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생각했다. 그러나 종묘제례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슬픔의 제례가 아니라 유교의 종교의식인 동시에 국가의 존립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국가 의식이다. 장사지내는 흉례(凶禮)가 아니라 오늘을 축복하는 길례(吉禮)인 것이다. 그래서 종묘제례에는 노래와 춤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다. - P55
1464년(세조 10년) 1월 14일, 세조는 마침내 종묘제례에 친히 제향하면서 새로 다듬은 「정대업」과 「보태평을 연주했다. 실록의 이 기사에는 종묘제례의 전 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날 종묘제례악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종묘제례악에서 악사는 두 팀으로 나누어 배치하는데 당상(堂上)의악사단을 등가(등歌), 당하(堂下)의 악사단을 헌가(軒架)라고 했다. 악기의 편성은 박·편종·편경·피리·장구·대금·해금·북·아쟁·태평소·축·어등 15가지이다. - P69
제례악에 맞추어 추는 춤은 정연하게 열을 지어 춘다고 해서 일무(舞)라고 한다. 일무는 가로세로 8명씩이면 64명이 추는 팔일무이고, 가로세로 6명씩이면 36명이 추는 육일무인데, 대한제국 이후에는 우리나라도 팔일무를 추었다. 성균관문묘제례에서도 팔일무를 추는데 그 춤은종묘제례와 비슷한듯 약간 다르다. 종묘제례에서 「보태평」의 춤은 문치를 기리는 문무(文舞)이고 정대업의 춤은 무공을 찬양하는 무무(武舞)다. 문무에서는 왼손에 약),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추며, 무무에서는 앞의 네 줄은 검(劍), 뒤의 네 줄은창(槍)을 들고 춘다. 문묘에서 팔일무를 출 때는 문무는 같지만 무무에서는 왼손에 방패(干), 오른손에 도끼(戚)를 들고 춘다. - P70
종묘의 길들은 걷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것이고, 곧게 뻗기 보다는 꺾이고 갈라지면서 호흡을 조절한다. 너무 빨라지면 걸음을 멈추도록 제어하며 멈추어 서면 다시 움직임을 유도하는 길들이계속된다. 엄숙한 건물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마치 길들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종묘의 길들은 그 자체가 건축적 질서이며 의례이고 움직임이며 행위가 된다.
신이 가고 제왕이 걷는 길이라면 폭이 넓고 곧게 뻗어 위풍당당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종묘의 신도는 폭도 좁고 바닥은 거칠며 중간에 꺾여 들어간다. 종묘의 신도는 정전의 건축과 일체를 이루는 디자인이며, 가무악으로 이루어진 제례의식의 경건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길례(吉禮)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 P91
서울은 ‘궁궐의 도시‘다. 세계 어느 나라든 한시대의 수도였던 왕도(王都)의 상징물은 궁궐이다. 그리고 조선 500년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등 자그마치 5개의 궁궐이 있다. 세계 어느 역사도시에도 한 도성 안에 궁궐이 5개나 있는 곳은 없다.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 덴마크 여왕, 스웨덴 국왕,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방한했다. 이들은 모두 창덕궁과 경복궁을 참관하면서 서울 시내에 이런고궁이 5개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그 내력에 대해 묻곤 했다. 서울의 궁궐 중 창덕궁은 종묘와 함께 199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진즉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때 서울의 5대 궁궐을 한꺼번에 등재했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후회가 일어난다. 사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규정에 ‘영역의 확대‘라는 것이 있다. 아니면 개별 추가 등재로 서울의 5대 궁궐을 모두 등재하도록 노력해볼 만하다. 개인적으론 그냥 ‘궁궐의 도시‘보다는 ‘5대궁궐의 도시‘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부터 서울의 5대 궁궐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하고 이를 마음으로 동의하며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 P97
그러나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고종은 상황으로 물러나고 뒤를 이은 순종은 1907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고종황제가 머무른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덕수궁까지 서울에 5대 궁궐이 자리잡게 된것이다. 5대 궁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느 하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없었다. 경복궁엔 조선총독부가 들어섰고, 창경궁은 식물원·동물원이되었으며, 경희궁엔 일본인 중학교인 경성중학교(훗날의 서울중·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훼철되었고, 덕수궁은 공원으로 개조되었다. - P100
그러나 조선왕조 5대 궁궐은 그 기본 골격이 워낙에 튼실하여 근래 들어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면서 궁궐의 멋과 품위를 어느 정도 회복해가고있다. 그러므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서울의 5대 궁궐 중 으뜸은 역시 국초와 왕조 말기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이라는 데 아무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하여 여기에 기거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더 - P101
많이 살았다. 임진왜란으로 두 궁궐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도 경복궁이아니라 창덕궁을 먼저 복원했다. 오늘날 외국인 관광객들도 경복궁보다창덕궁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이 권위적이라면 창덕궁은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다. 창덕궁 경복궁과이렇게 차별화된 건축 양식을 갖게 된 이유는 그 창건 과정에 잘 드러나있다. - P102
사실 이것이 우리나라 조원(園)의 중요한 특색이다. 자연 그대로의모습을 살려 나무들이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한 느낌을 주고 인공적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꾸미긴 꾸몄는데 꾸민 태를 내지 않는다. 있어도있는 태를 내지 않아 창덕궁을 답사하고서도 이 공간이 특별히 기억에남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런 편안한 공간을 여느 궁궐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창덕궁에서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금천 좌우의 여덟 그루 회화나무로 말할 것 같으면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된 고목들이다. 궁궐 안에 회화나무를 심는 것은 주례』에도 나와 있는 궁궐 조원의 법칙이다. 회화나무는 느티나무와 함께 한자로 괴목(槐木)이라 쓴다. 주나라 때 삼공(三公, 세 정승)이 괴목 아래에서나랏일을 논했다는 고사에서 회화나무 괴(愧) 자에 ‘삼공‘ 또는 ‘삼공의자리‘라는 뜻이 더해졌다. 이런 상징성 외에도 회화나무는 생기기도 늠름하게 잘생겼고, 낙엽의 색조가 갈색으로 차분하며 수명도 길어 궁궐의품위를 잘 지켜준다. - P113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왕이 기거하는 공간으로서 궁궐은 그 시대의문화능력을 대표한다. 정조대왕은 『궁궐지(宮闕志)』에서 궁궐이 장엄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P126
그러나 조선의 궁궐은 외국의 예에 비해 소박한 편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다. 백성들이 보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화려함이라고나 할까. 그 이유는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한양의 도시 설계와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을 수 있다.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P126
궁궐 건축에 대한 정도전의 이런 정신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우리궁궐의 미학이다. 일찍이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 - P126
(기원전 4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 P124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아름다움은 궁의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고,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우리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이 아름다움은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켜 일상에서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미학이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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