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선택할 때는, 그 여자가 지금 현실이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워도 희망의 빛이 보이는 역을 했습니다. 보는 사람들을절망에 빠뜨리는 역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삶에 절망스러운 부분이 많은데 내가 맡은 역으로 그 절망을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절망적이어도 저 멀리 희망이 보여서 비집고 나올 수 있는 그런 역을 했습니다. 형편없는 몰골의 역이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 여자에게 희망이 기다리고 있나?‘
그것을 따졌습니다.
누구나 날개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날개는 누가 달아 주지않습니다. 내 살을 뚫고 나올 뿐입니다. 내 어깨에서 얼마나 아프게 나왔겠는가, 그 날개. 등가교환과 같은 것입니다. 날개깃이살을 뚫을 때 얼마나 아프겠는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공이되고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프고 고통스럽더라도 ‘뚫고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 P138

하지만 모든엄마는 나의 일부가 확대된 것입니다. 「겨울 안개」는 암에 걸려가족들 사랑 속에 죽는 엄마였고, 「사랑이 뭐길래」는 호랑이같은 남편 밑에서 쥐여사는 엄마였습니다. 장미와 콩나물은무식하지만 경우 바른 엄마였습니다. 그리고 마더」는 아들을보호하기 위해 모성이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차갑고 텅 빈 엄마였습니다.
「전원일기」 덕분에 나는 많이 성숙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원일기」가 내 인생에 나타나 준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잠깐의 배역을 맡았던 사람들이든 끝까지 함께한 연기자들이든, 최불암 배우나 고두심 배우, 김수미 배우든모두가 내 연기 인생을 관통한 만남이었고, 최고의 만남이었습니다. 나를 포함해 그들 모두가 지금도 양촌리에 가면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또 어떤 때는, 우리가 이 다음에 죽으면 어딘가에서 다 모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함께 다시 만나 이번 생에서 우리가 한 「전원일기」를 이야기하면서, 그때 참 행복했다고 웃으며 말할 것 같습니다. - P147

그래서 내가 대발이 엄마 역을 맡고, 점잖은 역은 윤여정 배우가 맡았습니다. 윤여정 배우는 뛰어난 연기자라서 그 역을훌륭하게 해 냈습니다. 나는 참으로 신에게 감사합니다. 얼마나나에게 이 역저역을 시키셨는지.
감정적으로는 김정수 작가의 작품이 더 순해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김정수의 작품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연기자로서는 단연 김수현 작가의 작품을 선호했습니다. 김정수 작가도 당연히 작가이니까 극단적인 면이 있지만, 그이는 그것을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프게 표현됩니다. 김수현 작가는 박박 긁고, 할퀴고, 몸서리쳐지게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스럽습니다. 두 여자가 막상막하입니다. 두사람 덕분에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생각하면 배우로서 나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여자입니다. - P212

나에게 연기는 직업이 아니라 삶이며 모든 것입니다. 배우는
"이만큼 하면 됐다.‘거나 ‘이 정도면 성공했다.‘라고 멈춰서는 안됩니다.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서 해야 합니다. - P213

나, 아들, 딸, 또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 그 사람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죽을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 다정했을 것이고, 한 가지라도 더 신경 써 주었을 것입니다. 걱정도 덜 끼치고, 떠날 때 내 염려 안 하도록 자립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앞에서 죽으리라는 생각을 어떻게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까요?
얼마나 바보 같은가요? ‘어, 정말 이 사람이 이제 세상에 없네.
하고 느끼게 할 줄 몰랐습니다. 언제나 내가 먼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떠났을 때 충격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구나, 하고.
그런데 남편 문상을 온 사람 중에 무좀 양말을 신고 온 이가있었습니다. 슬픈 와중에도 그 발가락 모양이 어찌나 우습던지울면서 얼굴을 가린 채 웃었습니다. 인생은 그만큼 부조리의연속입니다. - P220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가끔 사람들로부터 ‘저렇게까지 세상물정을 모를 수 있나?‘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들 임현식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습니다. 그런 일들로 내가 속상해하고 있을 때 아들이 뒤에 와서 나를 가만히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엄마가 얼마나 순진한지는 아빠랑 나만 아는데…. 아빠는저세상으로 떠나고, 우리 엄마 어떡하나.…."
정말 그랬습니다.
어떤 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뒤에서 희생한 다른 이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정자까지 좋은곳은 없습니다. 내가 남편에게도 잘했고, 아이들에게도 너무나좋은 엄마였고, 그리고 연기도 빼어나게 잘했다? 그런 건 있을수 없습니다. 나는 배우로서 살아온 것 말고는 모든 부분에서부족한 여자였습니다. - P221

내 아들 임현식에게도 온통 용서받을 일뿐입니다. 내가 낳은아들인데도 온전히 첫번째 순위로 놓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언제나 첫 번째였습니다. 내가 대본을 생각하면서 멍하니 앉아 있으면 아들은 "엄마 주위에 담이 쳐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갈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고. 그래서 아들은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옷을 붙잡고 떼쓰는 일을 나한테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대본만 들면 내 방에 들어가서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얼마나 쓸쓸하게 컸을까요? 아들이 커 가면서 어떤 고민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꿈을품고 있는가를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들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엄마이지만 그런 말을 할 상대가 아니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없이 미안합니다. - P222

나는 혼자 가만히 있는 시간이 그냥 멍하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본 속 여자가 머릿속에 가득이었습니다. 날마다 그러했기 때문에, 어린 딸이 배 아프다고 하면 "아가, 이리 와." 하고 안아 주었지만, 대본 속 역할을 생각하듯이 그만큼 온 마음을 다해 대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른이 된 딸은 나를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고맙고 미안합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아이들을 낳긴 낳았지만 내가 하는 배역을 더 많이생각하느라 아이들에게 전력투구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라고할 수도 없었습니다.
생에 감사합니다. 나는 그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천성적으로없는 사람입니다. 내 딸 임고은이 언젠가 내 대본 뒤에 써 놓은글이 있습니다.
‘나는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생각해. 나도 엄마 같은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어‘ - P223

사람들은 내가 현모양처인 줄로만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살림도 못하고, 대본만 받으면 그날부터 대본 속 인물이되어 버려서 식구들은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남편과 아이들은 내가 배우이니까 당연하다고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배우로서 잘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가족에게 남긴 자잘한 상처들이 흐지부지 묻히지 않도록 가족에게 상처를주면서 배우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배우로서 떳떳하지 못하면정말 면목이 없는 일입니다. 나를 배우로 인정해 주는 가족의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가족에게 미안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연기에 집중하면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 P224

어떤 이는 나에 대해 ‘김혜자는 자신을 비워 내고 캐릭터를받아들인다기보다 언제나,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게 비어 있다. 마치 일상이 없고 늘 배우로만 사는 사람처럼, 아니 이 작품에서 저 작품으로 사는 집을 옮겨갈 뿐 현실적 인물이 아닌것처럼 배우로 존재한다.‘라고 썼습니다(대중문화전문기자 홍종선), 나 스스로도 대본을 외고 연기를 하는 것 외에는 모든 면에 부족하고 의지박약인 자신이 싫은 적도 많았습니다. 배우가아니었으면 신이 보시기에도 아무 데도 쓸모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부족한 여자이기 때문에 신이 좋은 남편을 붙여 주었고, 착한 아들과 딸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많은 사람을 용서하고 품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나한테 용서를 빌 만큼 잘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못한 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인간에게든 신에게든 내가 다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 P225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연기하면서, 늙는다는 것은 슬프고서글픈 일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늙으니까 기억도 깜빡거리고, 자식들은 엄마를 약간 바보 취급합니다. 마음대로 빨리 죽어지지도 않고, 살아서 신나는 일도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1926~2022)이 96세를 일기로 세상 떠난 뉴스를 보면서, 나랏일로 바빴겠지만 그래도 살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식들이 이런저런 일들로 논란거리가되고, 며느리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불행하게 죽는 것까지 다봐야만 했으니까.
자식들은 왜 그렇게 부모에게 야단을 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야단치는 말투입니다. 이드라마에서도 막내아들 민호(이광수)가 나에게 소리를 버럭버 - P249

럭 지르는 것이 서글펐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도 아들동석이 엄마인 나에게 그렇게 하는데, 그럴 때면 이 사람들이실제로 배우인 내가 싫어서 그렇게 악을 쓰나 하는 바보 같은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나는 작가들을 옛날부터 존경했습니다. 물론 김정수, 김수현,
노희경 작가처럼 잘 쓰는 작가를 작가들은 어떻게 다 알까? 늙도록 살아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나이 먹은 사람의 심정을이렇게 잘 알까? 실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내가 맡은 역은 치매에 걸리는 슬픈 역이지만, 잘 쓰는 작가라서 믿고 했습니다. - P250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를 위한 선택이긴 하나 병든 사람들과 함께 그런 식으로 죽어 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회에서 회자는 요양원을 탈출합니다. 치매에 걸린 희자는 새벽에 정아에게 전화를 걸어 요양원으로 자신을 데리러 와 달라고부탁합니다.
"너는 죽더라도 길 위에서 죽는다고 했지. 정아야, 나도 그러고 싶어. 감옥 같은 좁은 방 말고."
어찌 보면 우리 모두 길 위에 선 삶입니다. 아니면 이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우린 다 인생이라는 기로에 서 있는 쓸쓸한 방랑자‘인지도 모릅니다. ‘죽더라도 길 위에서 멋지게 죽을거야‘라고 선언하며 희자와 정아는 호기롭게 차를 몰고 떠나지만, 요실금 때문에 차를 세워야만 합니다. - P254

「디어 마이 프렌즈」를 하면서 다른 배우들 연기 보는 재미도컸습니다. 정아 역은 ‘나문희 이상 할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매번 감탄하며 봤습니다. 윤여정 배우는 말할것도 없습니다. 극 중에서 그녀가 맡은 충남이 나이 어린 교수들에게 "니들이 지은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니들 스스로 니들가치를 모른 거라고 할 때, 그리고 고두심 배우가 아픈 엄마에게 "나 속 썩이려고 병원 안가시냐?"고 악다구니 쓸 때, 말 그대로 ‘연기의 신들‘이 느껴졌습니다. 박원숙 배우가 드라마 속에서 옛 연인과 재회하는 장면은 잠깐이지만 그간의 세월이 느껴 - P254

졌고, 주현 배우는 얼렁뚱땅하는 것 같지만 다 표현합니다. 신구 배우는 이 드라마에서 처음 같이했는데, ‘정말 잘하는구나.
내가 신구 배우를 이제야 처음 만난 걸 보면 아직 연기해야 할게 한참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은 원래 막장이야."라고 모두가 외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영정 사진을 재미 삼아 찍습니다. 엄마 친구들의 이런 다양한 삶을 알게 된 박완은 마지막에 말합니다.
다만 소원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좀 더 오래 가길,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게 조금 더 오래 가길" - P255

PD저널의 방연주 객원기자라는 분은 「디어 마이 프렌즈」를보고 리뷰에 노벨문학상을 탄 쉼브르스카의 시를 인용했습니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 중에서).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어떻게 사는가보다 어떻게 죽는가가 중요해지는 순간이 인생에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희경 작가가 한 말처럼,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젊은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치열함을 살고 있는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
과 함께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희망을 세상에 전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영향 미치는 아 - P256

름다운 작품을 하는 게 꿈인 내게 참으로 감사한 작품입니다.
인생이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결국 사랑임을 다시 느꼈습니다.
언제까지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나도 하면서 즐거운, 그런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디어마이 프렌즈」를 만난 것이 연기자로서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배우로서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tvN이 20대에서 40대를 타깃으로 한 케이블 방송임에도 「디어 마이프렌즈」는 케이블과 종편을 통틀어 8주 연속 동시간대 시청률 1위 자리를 지켰으며, 역대 tvN 프로그램 중 시청률 5위의 기록을 세우며 한국드라마의 소재와 다양성을 확대시킨 수작으로 남았다. 한국방송비평상드라마부문 대상,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작가상, YWCA가 뽑은 좋은TV프로그램상 대상,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드라마 작품상, 백상예술대상TV부문 극본상을 수상했다.) - P257

노희경은 그만큼 무서운 사람입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계획대로, 자기가 생각한 대로 씁니다. 그리고 대사가 매우 신랄합니다. 가슴을 콕콕 찌릅니다. 뾰족한 것으로 그냥 찌르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 "아팠지?" 하고 만져 줍니다.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는지 모르지만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사람입니다. 조금 쌀쌀맞은 작가인데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이유입니다. - P268

노희경 작가는 보는 이의 심장을 할퀴는 것 같은 대사를 씁니다. 그래서 그녀 자신이 날이 서 있어 보입니다. 똑똑하고, 냉정하고, 개성 뚜렷하고, 어느 면에서는 싸가지 없고, 배우가 연기를 못하면 배우의 목을 조르거나 손목을 물어 버린 적도 있다는 말까지 들릴 만큼 독특한 작가입니다. 신랄하게 대사를전개하다가도 마지막에는 가슴이 미어질 만큼 아프게 합니다.
어느 작가와도 다른 작가입니다. 혼자 저쪽에 서 있는 들풀 같은 사람, 그것이 그녀에 대해 내가 느낀 것입니다.
며칠 전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선생님, 다시는 힘들게 연기하지 마세요."
그래서 내가 답했습니다.
"누가 노희경 씨에게, ‘그리 빼빼 마른 중학생같이 되면서까지 글 쓰지 말아요‘ 한다고 그렇게 되겠어요? 언제나 그렇게 되면서까지 쓰겠지요." - P268

아는 사람이 나에게 동영상을 하나 보내 주었는데, 영상 속에서 수탉이 온 힘을 다해 울다가 지쳐서 기절해 쓰러집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납니다. 그 수탉이 너무나도 우리 두 사람,
노희경 작가와 나 같아서 그 영상을 그녀에게도 보내 주었습니다. 있는 것을 다 뽑아내고 소리를 지르다가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조금 있다가 다시 일어납니다. - P269

만지고 나서 나를 꼭 껴안고 아이처럼 한없이, 한없이 움니다. 그것은 지문에 없습니다. 이병헌 배우가 잘 하겠지 하고안 써 놓은 것 같습니다. 자세히 써 있는 장면들도 있지만 그장면에는 써 있지 않습니다. 배우는 오직 연기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에 그렇게 하라고, 그전 장면들에서는 이병헌 배우가더 못되게 굴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에이병헌 배우의 내레이션이 흐릅니다.
"사랑한단 말도, 미안하단 말도 없이 내 어머니 강옥동 씨가내가 좋아했던 된장찌개 한 사발을 끓여놓고 처음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셨다.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며 난 그제서야 알았다.
난 평생 어머니 이 사람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었다는 걸. 난 내 어머니를 이렇게 오래 안고 지금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는 걸."
이 내레이션이 더 가슴 아프게 시청자들에게 다가간 것은 이병헌 배우의 진심 어린 열연 때문이었습니다. - P2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앤딩 내레이션
[이남규, 김수진] p112, 113


자신이 70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혜자는 씩씩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하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엄마 옆에 앉아서 날마다 느끼는 자신의 변화를 고백합니다.
"그냥 궁금했어. 여기서 얼마나 더 나빠질까. 요즘 아침마다일어날 때 좀 놀라. 하루가 다르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 어젠 분명 저기까지 걸었는데 오늘은 숨이 가빠. 앞으로 얼마나 더 나빠지는 건가 궁금해서……. 화장실 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못 간다며, 늙으면 나도 좀 더 차례차례 늙었으면 받아들이는게 쉬웠을까 싶은 거지 그냥."
그러자 엄마가 말합니다.
"다시 애기 때로 돌아가라는 거라고 생각하면 단순해져.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인 살 수 없는 때로 돌아가는구나, 그런."
‘드라마가 마지막으로 향해 갈 때 혜자는 말합니다. - P103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젊은 내가늙은 꿈을 꾸는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나의 인생이 불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행복했던 기억부터 불행했던 기억까지, 그 모든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 기억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무섭습니다."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모든 꿈이 과거형이 되어 버린준하(남주혁)가 젊은 혜자(한지민)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던 때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동 국물 위에 뜬 기름띠를 보면서 무지개 떴다며 혜자는 호들갑을 떱니다.  - P104

여기까지 오는 데 참으로 오래 걸렸습니다.
연기라는 세상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바보라
가볍게 휙 떠나올 수 없었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거겠지요.
이 길에서 자꾸만 나의 지난 일들이 겹쳐집니다.
하늘이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80을 눈앞에 둔 내 인생의 길 끝에서
나는 내 꿈 앞에 서 있습니다.

광고에서 이 내레이션이 끝나고, 저쪽 하늘에서 이쪽 하늘까지 펼쳐진 오로라를 바라봅니다. ‘나를 믿고 걸어갑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내가 읽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곧 나자신의 말이기도 합니다.  - P108

나이가 들면 그렇습니다. 손이 바쁘고 주변이 어수선해집니다.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많아집니다.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하고 있지, 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날도 그렇게 부산스럽고 수선스러웠지만, 그 자리에 있던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때 - P111

론 불행하고 때론 행복하다는 것을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할지라도 그래도 살아서 좋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대본을 쓴 이남규, 김수진 작가에게 허락을 받아 이곳에도옮겨 놓습니다. 내레이션 녹음을 위해 수십 번 읽고,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위해서도 여러 번 반복해 읽었지만 다시 읽어도좋은 글입니다. - P112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 P112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 P113

셜리 발렌타인」 단순히 갇힌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여성이 이혼한 친구의 제의로 그리스 해변으로 떠나는 이야기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연극이 인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여자를 통해 인간의 의미 없는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셜리는 누구나 조금씩 닮은 보통 여자입니다. 나에게도 셜리의 모습이 조금은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마음속은 잘고도 깊은 상처로 금이 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여러 꿈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꿈과는 전혀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꿈을 잃은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 그것이 이 연극의 매력입니다. 특히 여자가 끝부분에서 자신만 불행한 게 아니라남편도 마찬가지란 사실을 깨닫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눈자체가 커진 것입니다. - P122

어"
상처투성이가 된 셜리는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됩니다. 날마다 자기 생각만 하던 여자가눈을 뜬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게 되는행복한 결말입니다.
안락한 현실로부터 탈출해서 자기를 찾는 게 진짜 인생을사는 것이 아닐까? 그냥 편안하게 안주해 버리면 삶의 모든 시간을 소모해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상처를 입더라도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던가는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것들을 셜리 발렌타인」은 일깨워 줍니다. 셜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불쌍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혼자가 되면서 자기를 찾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좀 더 단순하고 혼자가 되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꿈꾸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그것은 인생의 낭비이니까. - P123

나는 매니저도 없고, 소속사도 없습니다. 누가 나를 매니지먼트해 주는 사람도 없고, 의상을 챙겨 주는 코디도 없습니다. 나는 내가 다 책임져야 합니다. 또 그래야만 한다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나는 그냥 나 혼자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작품에 들어가면 내가 맡은 역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구현해 내야만 하는 인물이니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조언을 해 줄 때도 있지만,
누가 매번 내 옆에서 길잡이가 되어 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늘 ‘나만큼‘ 해서 카메라 앞에 나갔습니다. 그것이 나인 것 같습니다.  - P1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은 2021~2022년 배우 김혜자와 나눈 긴 시간에 걸친 대면 및전화 인터뷰, 구술, 누구에게도 고백한 적 없는 평생을 써 온 일기 형식의 글들, 신문 방송 등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 기사 등을 토대로 편집자가 초고를 만들고, 저자가 다시 기억과 사실을 수정하고 추가하는 방식으로 원고가 완성되었다. 조명 눈부신 드라마와 직사각형의스크린에서 걸어 나온 인간 김혜자와의 특별한 만남을 기대해 본다.

배우를 한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미쳤다며 모두 반대했지만 아버지(김혜자의 부친 김용택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대한민국 2호 경제학박사이며, 미군정 시절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는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명한 배우의 한마디는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 못지않게 영향력이 있다. 찰리 채플린을 봐라. 웃기는 짓을 하는 것 같지만그 사람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아니? 좋은 배우가 되거라.
좋은 배우가 되면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처럼 세상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라.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라."
내가 태어나기 직전, 아버지는 높은 연단에 서서 많은 군중 - P11

의 박수를 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지 옆에 놓인 어항속에
‘예쁜 빨간색 붕어‘가 헤엄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박수는 어항을 향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 혜자는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 박수를 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금붕어가 한 마리라 외롭겠다 하셨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은 그저 국어 시간이면 책 잘 읽는 정도의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부모의사랑이나 간섭을 모르고 살아서 어려서부터 웬만한 일들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해결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별히 예뻤다거나 뛰어난 재주꾼도 못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이나교사들이 내게 별로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 P12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화를 봤습니다. 수업 시간이 왜 그렇게 지루했던지, 학교가 끝나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감옥에서 풀려난기분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영화관에 가서도 보았고, 텔레비전의AFKN(1957년부터 1996년까지 송출된 주한미군방송)에서 틀어주는 흑백영화로도 보았습니다. 영어 대사를 이해할 수 없으면 영상만으로도 보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바 가드너, 라나 터너, 오드리 헵번, 진피터스, 마릴린 먼로, 앤박스터, 잉그리드 버그먼, 데보라카,
진 시몬스……. 이런 여배우들의 얼굴 표정에서부터 발끝 움직이는 것까지 내 머릿속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조그만가슴을 설레게 한 남자 배우는 로버트 테일러, 조셉 거튼, 제임스 메이슨, 게리 쿠퍼, 로런스 올리비에, 타이론 파워, 클라크 게이블이었습니다. - P13

내가 맡은 배역이 아무리 인생의 속박에서 고통받는 역이라해도 그 속에 바늘귀만 한 희망이 보이는가, 그것이 내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삶의 밑바닥을 헤매어도 그곳에 희망이 있나, 그 희망을 연기할 구석이 있나, 내일의이야기가, 혹은 그다음이 보이는가? 끝없는 절망 속에서 이 여자가 그냥 죽음을 선택해 버리나? 그렇지 않고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어디엔가 있나? 그것을 찾고 그것을 연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가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얼마 전 강수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속으로 "잘 가." 하고말했습니다. 강수연이 생전에 김혜자, 윤정희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늙어서 집으로」에 나오는 할머니 같은 역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를 빛낸 배우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녀에게 연기할 수있는 좋은 배역이 있었어야 했는데…… - P19

배우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배우에게는 유일한 빛이고 희망입니다. 또한 그것이 배우가 세상에 줄 수 있는 희망의빛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수연에게 모든 것이 너무 일찍 왔고일찍 가 버렸습니다. 갓 스무 살 넘은 나이에 세계적인 무대(베니스 국제영화제와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연기상을 타고, 너무어려서 월드스타가 되고 나니 아무것이나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작품이 있어야 배우로서 ‘이렇게 해 볼까, 저렇게 해 볼까?‘
고민하고, 설레고, 한 장면을 백 번 넘게 연습해 보고……. 그것이 배우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배우는 살아 있다고 느낌니다. 그것이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가슴 설레는것이 있을 때 삶이 은총으로 빛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로서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삶이되는 것입니다. 삶이 뒤엉키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더라도 배우는 자신이 연기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 P20

강수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전해 받고 또다시 죽음에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에대해 생각했습니다. 배우를 살게 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존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죽는다는 것은 슬픕니다. 어렸을 때 영화제에서 상타지 않고 평범한 주부 역할도 하고, 세계적인 배우는 아닐지라도 평범한 여성으로 살았으면 더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에 강수연에게 너무 큰 것이 왔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엾어서, 김혜자, 윤정희 같은 배우, 「집으로」의 할머니같은 역을 하고 싶다 했는데.......
그래도 멋있어, 강수연 배우답게 갔구나. 그곳에서 만나. - P21

내가 인생에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연기자로 살아오면서 몰입의 순간들을 많이 가진 것입니다.
어떤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반쯤은 몽유병자처럼흉내만 내면서 살아가는 나를 잘 아시는 신이 내가 몰입할 수있도록 계속해서 작품들을 내 앞에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면흐릿한 불씨처럼 존재하던 나는 뜨거운 불로 타오를 수 있었습니다. - P23

키키 키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렇게 몰입하는 순간 인생의 허무와 고통, 슬픔, 갈등, 부질없는 생각들을 다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나자신이 되고 어느 때보다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의 모든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토록 부족한 인간인데 나를 배우로 만들어 주셨으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기 생활을 정말로 그만둘 때가 되면 그것으로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을 대사처럼 외웁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인생은매 순간순간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 P25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글을 읽고 있으면 행주 냄새가 납니다. 그분이 내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2004년 오래된미래 간)에 추천사를 써 주신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혜자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나라도 저럴 수밖에 없다고생각한 나머지 그에게 내가, 아니 모든 여편네들이 쓴 것처럼오싹해질 때가 있다. 저런 연기의 깊이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혹시 드라마 밖에서의 그녀는 힘이 다 빠져 무기력하게 지내는 건 아닐까, 궁금해하곤 했다.‘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나를 보신 것입니다. 평소에 나 널브러져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아마 그분도 그런 거겠지. 소설한편 완성하고 나면 그러시겠지? 우린 같은 ‘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입니다. - P37

이제는 슬픈 이야기도 웃으면서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펑펑 울고, 심각한 장면은 내내 힘주며 했습니다. 그것이지난날의 연기였다면, 연기를 계속하면서 배운 것은 힘을 빼때 정말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힘을 빼는 게 더어렵습니다.
「눈이 부시게」에서 ‘등가교환‘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수(손호준)가 자고 있을 때 인터넷 방송 채팅방에 들어온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장면에서는 정색하고 말하면 안 됩니다. "니네들 그렇게 살다가 나처럼 된다." 이 말을장난처럼 툭 던져야 합니다. 무방비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졸고 있다가 잠결에 들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 P40

그 대사를 한 백 번쯤 연습했습니다.
거저 얻어지는 건 없습니다. 내 귀중한 것을 희생하지 않으면얻는 게 없습니다. 그것이 등가교환의 법칙입니다. 운이 좋았다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나는 이해력도 부족한 사람이라 열심히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꿈에서도맨날 대본이 나올까요.
어느 날 걸레질을 하면서, 오늘이 내가 전에 좋아했던 사람이 결혼을 하는 날이라고 혼자 상상했습니다. 이제 시작했겠네,
지금쯤 식장에 걸어 들어가겠지. 그러면서 걸레질하는데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그 와중에도 내가 지금 어떻게 눈물을 떨어뜨리고 무슨 표정을 짓는지 스스로 살피고 있었습니다.
기억하려고 굳이 안 해도 그런 것들이 저장됩니다. - P41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연기가 있습니다. 촛대 훔친 장 발장을회개하게 해 준 신부님 같은 역입니다. 너무나도 나쁜 사람을변화하게 해 주는 할머니역할을 해보고싶습니다. 어디로 가서 살 수도 없는 흉악범입니다. 도망다니다가 다 쓰러져 가는집, 살 만한 집이었는데 오래되어서 폐허가 되어 가는 집에서들리는 피아노 소리 때문에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낡은풍금이나 피아노로 감동적인 곡을 치는 할머니, 나 혼자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런 역을 하고 싶어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습니다. - P41

그래서 요즘에 99세 할머니가 피아노 독학으로 배우는 유튜브를 많이 봅니다. 이 할머니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는데도혼자 하시는데, 나는 피아노 선생님도 있고 다 갖춰 놓고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항상 열망은 가득합니다. 피아노를잘 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연기 외에는 실천이 부족합니다. 종종 후회합니다. 10년만 일찍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한 곡 정도는 멋있게 연주할 수 있을 텐데, 그때 잠깐 시도했다가 다시 놓은 것을 후회합니다.
나는 직업란에 ‘탤런트‘라고 쓰는 사람을 보면 무심결에 ‘아,
저이는 저걸 직업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하면서 놀랍니다. 아주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해 와서 그런지 나는 연기가 직업이라고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직업이라고 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합니다. 「마더」의 엄마가 아들 도준(원빈)한테 "너는 나야" 하듯이 연기는 나입니다. 숨 쉬는 것처럼. - P42

옛날에 내가 열심히 외우고 무대에서 했던 대사를 다시 읽으면 그때의 나로, 그때의 내 감정으로 휙 하고 건너갑니다.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할 때는 또 지금까지의 어떤 고정관념에 따른 연기가 아니라, 가령 ‘절망‘ 같은 것을 대사에 의해서가아니라 발목의 관절이 딱 꺾인다거나 뒤로 나자빠지는 동작 등으로 표현해야 해서 그것을 고심했습니다. 연극 작품들이 그렇게 내면 연기를 키워 주었습니다. 연기를 하면서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의 정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6년 만에 다시 임신을 해서 입덧으로 다른 음식은 못 먹고 매일 딸기만 먹으며 살았습니다. 연출 선생님이 무대 뒤에서 북을 쳐 줍니다. 막이 오르면 나는 신이 오릅니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 방황하는 여인이 되어 울고 웃고 하다 보면 - P53

그대로 나 자신의 일처럼 빠져들어 갑니다. 애인과 남편의 공모로 죽임을 당하는 나...….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막이 내립니다. 땀에 흠뻑 젖어 흡사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는 딸기를 몇 개 집어먹고 또다시 저녁 공연을 위해 열심히 화장을 합니다.
함께 KBS 탤런트 공채에 합격한 배우들이 브라운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텔레비전 연속극이 활발해지자 무대 연기도 하나둘 그쪽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4년 동안 연극에 몰두하며 살다가 다시 KBS TV에 나갔지만, 이미 정상의길을 걷고 있는 동기 탤런트들을 보면서 심한 좌절감이 들었습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커져 가는 그들을 의식하면 화제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내면적인 연기가 더 중요한 거야‘ 하면서 자꾸만 초라해져 가는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 P54

신은 절대로 내가 경험한 삶이 그냥 없어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주 우울한 생각을 했든, 너무 슬픈 생각을 했든, 치졸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했든, 그 모든 것이 내가 역을 맡을 때조금씩 도움을 주었습니다. 내가 겪은 모든 일과 감정들이 연기에 다 투영되었습니다.
내 마음속이 그토록 뒤범벅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모릅니다.
부잣집에 태어나 좋은 학교에 다니며 순탄한 삶을 산 것처럼보이지만, 내 마음속 회오리가 있기에, 복잡한 심리가 있기에연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배우에게는 어떤 경험도 나쁜경험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을 이겨 냈으면 말입니다. 아주 거지같이 살아도 그것도 좋은 것이고, 나쁜 남자를 만나 살아도그것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다 좋은 경험입니다. 배우로서는. - P57

슈베르트가 ‘내일 아침엔 깨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매일 잠자리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좋아지기까지 했습니다. 작품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이 끝나면 매번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지?‘
늘 삶의 한쪽에 죽음이 함께했습니다. 신이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허무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다음 작품에 온 힘을 다해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돈과명예가 아니라 그 천성적인 허무가 나에게는 연기생활에 더욱전념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나 자신은 죽음을 생각하지만사람들은 내 연기에서 위로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살아, 네 힘으로 살아 네 힘을 다해, 죽지 마라는 결심이 나를 살게 했습니다. - P59

또 하나의 대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청춘이지만 현실은백수였던 스물다섯 살의 혜자가 70대가 되어서야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고 나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잠방(인터넷 방송 진행자가 자는 모습을 보여 주는 수면 방송)을 하는 영수(손호준)와 그것을 보고 있는 영수TV 시청자들을 보고 혜자가말합니다
"늙는거 한순간이야. 너희들 이딴 잉여 인간 방송이나 보고있지? 어느 순간 나처럼 된다. 나도 몰랐어. 내가 이렇게 늙어버릴 줄"
극 중 대사만이 아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나도몰랐습니다.
내가 이렇게 늙어 버릴 줄 준비할 시간도 없이 누구나 갑자기 늙어 버린다는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생은 곧 시간이기 때문에, - P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클루트의 이 훌륭한 책들은 자주 읽히지도 않고 또끝까지 읽히지도 않는 것 같다. 이 책이 갖고 있는 매력이라면 이것이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느슨하게 묶어놓은거대한 상품더미로, 오래된 자루들이나, 낡은 항해 기구,
엄청난 크기의 양털 가마니, 그리고 루비와 에메랄드의 작은 주머니들이 흩어져 있는 잡동사니 방이자, 하나의 큰잡화상 같다는 사실이다. 이쪽에서 이 꾸러미를 끊임없이풀어보고, 저기 있는 더미에서 몇 개를 뽑아보고, 무언지거대한 세계 지도의 먼지를 털어내 닦고 그러고는 반쯤 어 - P51

둑한 곳에 주저앉아 비단과 가죽과 용연향의 낯선 냄새를맡노라면 밖에서는 엘리자베스 조의 지도에 실리지 않은바다의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뒤죽박죽의 씨앗들, 비단, 일각수의 뿔, 코끼리의 이빨.
양털, 흔해빠진 돌들, 터번식의 모자, 금괴 등의 값을 측정하기 힘든 물건들과 전혀 값이 나가지 않는 잡동사니들은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기에 이어졌던 알려지지 않은 땅으로의 수많은 여행과 교역, 그리고 발견의 결실이었다.
그 원정들은 서쪽 지방에서 온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선원으로 태우고 여왕이 직접 일부 재정 지원을 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프루드의 말에 의하면 그 배들은 현대의 요트보다 크지도 않았다고 한다. 왕궁에서 가까운 그리니치의 강가에 배들이 운집했다. ‘추밀원이 궁정의 창문으로 내다보고 …… 배들은 거기서 군수물자를 하여했으며들의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 닿아 되울리는 것 같았다.‘ - P52

 ‘나는 때로 내 안에 지옥을 느낀다. 내 가슴에는루시퍼가 안마당을 차지하고 있다. 일군의 악마들이 내 안에서 되살아난다.‘ 이런 고독함 속에는 안내자도 없고 동반자도 없다.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암흑속에 있고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 단지 나를 구름 속에 있는 것으로 바라볼 뿐이다.‘ 겉으로는 가장 건전한 인간이고 놀위치의 가장 뛰어난 의사로 존경받는 그이지만일을 할 때면 아주 기이한 생각과 상상이 그와 함께 유희를한다. 그는 죽음을 동경했다. 그는 모든 것을 회의했다. 만일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고 삶이라는이 발상은 단지 꿈이라면 어떨까?  - P64

영문학에는 아주 겁나는 지대들이 있다. 그런 밀림과숲, 그리고 황야 가운데에서도 엘리자베스 조 희곡이 으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여기서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셰익스피어 Shakespeare가 단연 두드러진다. 그가 살았던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조명을 받아온 셰익스피어, 그의 동시대인들의 눈높이에서 보았을 때 제일 높이 우뚝 서 있는 셰익스피어 말이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보다 조금 뒤떨어지는엘리자베스 시대 작가들, 예컨대 그린Greene이나 데커Dekker, 필Peele, 채프먼 Chapman, 보먼트 Beaumont, 그리고 플레처Fletcher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의 경우도 그 황야로 모험을하는 일은,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질문을 퍼붓고 의구심으로 번민하게 하며 기쁨과 고통으로 즐거웠다 괴로웠다를 - P68

왔다갔다하게 하는 일종의 고난이요 혼란스런 경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 과거 시대의 걸작들만을 읽는 경향이 있기에 그런 것인데) 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행사하는가를, 그것이 얼마나 수동적으로 읽히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리를 이끌고 우리 마음을 읽어내는가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은 우리의 선입견을비웃고 우리가 당연시해온 원칙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사실상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를 둘로 갈라 우리로 하여금 심지어 즐기고 있는 와중에도 입장을 포기하거나 고수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P69

그녀가 파국을 맞는다는사실 말고는 그녀가 어떻게 거기에 이르게 되는 건지는 알수가 없다. 아무도 그녀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열정의 최고조에 달해 있지, 그 열정의 초입에있는 법이 없다. 그녀를 안나 카레니나와 비교해보자. 그러시아 여인은 피와 살, 신경과 기질, 심장과 머리, 몸과정신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이 영국 처녀는카드에 그려져 있는 얼굴처럼 평면적이고 조악하다. 깊이도, 폭도 없고, 복잡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희곡의 의미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내버려두었던것이다. 축적된 감정을 무시한 것이다. 이는 그 감정이, 우리가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희곡을 산문과 비교해왔지만, 희곡은 - P77

사실 결국엔 시다.
희곡은 시이고, 소설은 산문이라 할 수 있겠다. 세세한사항들은 지워버리고, 그 둘을 나란히 놓고서 우리가 할수 있는 한 각각이 하나의 전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각각의 각과 모서리들을 느껴보기로 하자. 그러면 즉시 가장중요한 차이점들이 드러난다. 오랫동안 느긋하게 축적되어온 소설과, 이와 달리 약간 응축되어 있는 희곡. 소설에서는 감정이 모두 쪼개져 흩어졌다가 천천히 점차 함께 엮여 한 덩어리로 모인다면, 희곡에서 감정은 응축되고 일반화되며 고양된다. 희곡은 그 얼마나 강력한 순간들을, 그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구절들을 우리를 향해 쏘아대는가! - P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의 1960, 1970년대는 인권 운동이 큰 진전을 이룬 시기였다.
흑인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됐고,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Organization for Women가 창설됐다. 스톤월폭동을 기폭제로 성 소수자평등권 운동도 폭발적으로 발흥했다. 그 맥락의 전모를 입체적으로살피려면 냉전 체제의 여파 등에 대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당시 미국이 베트남전쟁과 반전 평화운동의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는 사실, 즉 먼 인도차이나반도로 쏠린 백인 국가권력과남성 권력의 공백과 지배질서의 혼란으로 오래 억눌렸던 이들의입지가 넓어졌다는 점도 주효했다.
하지만 법과 제도의 진전이 시민 의식과 관습 속에 스미는 데는상당한 시간과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상의 보이지 않는차별과 편견에 맞서 온전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법 제도와 별개로 천부의 권리를 시민들의 감각 속에 끊임없이 노출하는 게 중요하다. 인종 분리의 담장을 넘어 흑인이 진입하고, 동성애자 커플이 손을 맞잡고 거리와 광장을 활보하고, 남성이 전유한 노동과 유희의 - P123

경계를 허무는 일,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딪쳐 더디더라도 점차 자연스러운 풍경의 일부가 되는 일은 집단이 거대한 대오를 이뤄서 힘과함성으로 법 제도에 맞서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투쟁의 일부다.

델 윌리엄스Dell williams는 그 시기 바이브레이터와 딜도를 들고고루한 성 윤리와 차별적 젠더 억압에 도전했다. 그는 1970년대 초여성 최초로 뉴욕 중심부에 섹스토이숍을 열었다. 어두침침한 홍등가 귀퉁이에서 남자가 운영하고 남성 고객들이 전하던 그 공간을, 여성은 법이 아니라 관습과 인식과 시선의 장벽에 막혀 접근할수 없던 그 배타의 영역을, 뉴욕 카네기홀 인근의 버젓한 자리에 여성 전용공간으로 창업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했다. 그가 연 것은 작은 가게였지만 그곳은 여성의 성적 해방구였고, 그는 상품을팔면서 주체적 성 의식을 함께 전파했다. "(여성의) 오르가슴이 세계를 구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바이브레이터의 여전사‘ 델 윌리엄스가 2015년 3월 11일에 별세했다. 향년 93세.
- P124

자기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이건 죄가 아냐(I love myself, It‘s not a sin)"라고 반복하는 스피어스의 노래는 여전히 그러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과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사회 현실에 대한 역설적인 고발이었다. 스피어스의 저 노래가 구현하려던 세상이 그보다 30년 앞서 1974년 윌리엄스가 아파트 부엌,
또 ‘이브의 정원‘을 거점으로 구현하려던 세상이었다.
2015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워킹걸>이 담고 있는 이야기도 그것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광고회사 사원이자 워커홀릭인 기혼 여성(조여정 분)이 망하기 일보 직전의 섹스토이숍 주인(클라라 분)을 만나 동업을 하게 되면서 관능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섹스토이에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사업가로도 성공한다는 내용실제로 여성이 운영하는 섹스토이숍이 한국에 있는지, 어떤 사정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저 영화 속 이야기를 윌리엄스는 40여년전 미국 뉴욕에서 실현했다.(한국에서는 곽유라, 최정윤의 ‘플레저랩이 2015년 8월에 창업했다.) - P128

그의 임종을 지켜본 비서 엘리자베스 그린 코언은 "윌리엄스는자신이 이뤘거나 이루고자 했던 일에 대해 늘 ‘나는 단지 여성의 권리가 보다 신장되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라고 <뉴욕프레스>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와 수십 년 동안 함께 일한 이브의 정원 매니저 킴 이브리스빅은 "윌리엄스는 섹스의 정신적인 면을 중시했다" "만일 모든 여성이 오르가슴을 경험한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라 말하곤 했다"라고 전했다. 이브의 정원 홈페이지는 그의 부고를 전하며 "윌리엄스는 우리 시대 이브의 역할은 창피스러움에 주눅 든 여성들을 각자의 성적 능력과 감각 그리고 관능을 자각한 강하고 활력 있는 여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라고 썼다. 전미여성기구 뉴욕 지부장 재키 세발로스Jacqui Ceballos, 1925~는 "여성의 성적 무지에 대한 델 윌리엄스의 자각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소중한 자극제가 됐다" 하고 기렸다. - P129

2012년 4월 <USA투데이>는 미국 백악관의 대통령자유메달 수상자 열세 명의 명단을 전하며 인권법률가 존 마이클 도어John MichaelDoar의 이름 앞에 ‘다소 낯설지 모르는‘이라는 수식을 달았다. 그와나란히 놓인 이름들 미국의 첫 여성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가수 밥 딜런, 작가 토니 모리슨, 우주비행사 출신의 미 상원의원 존 글렌 등에 비해 그는 누가 봐도 무명 인사였다. 버락 오바마미 대통령은 "존은 미국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용감한 법률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미국 법무부 인권 담당 검사로 차관보를 지내고 1974년에 워터게이트사건의 의회특별검사로 활약했다.

미국의 1960년대는 200년 흑인 차별의 ‘전통‘에 대해 흑인과 소수의 백인이 조직적 저항에 나서던 때였다. 그 시기 도어의 자리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와 자유·평등·정의 같은 보편적 가치를 둘러싼거친 질문과 근원적 갈등들에 국가를 대표해서 답변하고 심판해야 - P131

하는 모두가 마다하던 자리였다. 그는 권력과 법이 맞설 때 법의 편에 의연히 섰고, 힘센 관습과 소수의 요구가 부딪칠 때 그 요구의 법적 타당성을 먼저 따졌다. 공적 사명을 부여받은 연방공무원으로서, 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으로서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그일이 그때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절박하고 첨예한 일이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그는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1929~1968이나 맬컴 엑스Malcolm X, 1925~1965 혹은 당대의 몇몇 저명한인권운동가에 버금가는 영예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세상이 많이 나아진 뒤로도 단 한 번 자신의 행적을 삶의 밑천으로삼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익명 대중의 피와 땀을 딛고 ‘역사에 남는맨 꼭대기의 시시한 자들‘이라는 놈 촘스키Noam Chomsky, 1928~ 식의냉소도 모면한, 드문 영웅이었다. - P132

1961년 5월 미시시피 주의 흑인 청년 제임스 메러디스 JamesMeredith, 1933~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미시시피대학교에 등록원서를 낸다. 그의 성적은 입학하고도 남을만큼 우수했지만 대학은 두 차례나 등록을 거부한 터였다. 그가 흑인이라는 게 이유였다.
당시의 민주당 주정부 역시 메러디스가 유권자법 위반으로 실형을산 이력을 빌미로 대학 측을 편들었다. 주정부와 대학은 인종주의적 편견 속에 있었지만, 설사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들 뒤에는 성난백인 유권자들이 있었다. 식당, 술집은 물론 버스 정류장에서도 흑인들은 백인과 공간을 공유할 엄두를 낼 수 없던 시절이었다. 미국남부의 거의 대다수 주가 그러했다.
메러디스는 미국 최대의 흑인 인권단체인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 - P132

협회NAACP‘ 회원이었다. 당시 그는 "내가 하려는 일이 어떤 어려움에 직면할지 잘 알고 있고, 또 감당할 준비가 돼 있다. (…) 누구도나를 억누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수차례의 청문회와 재판을 거쳐미국 연방대법원은 그의 입학이 정당한 권리임을 인정했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1925~1968도 수차례 전화를 걸어 주지사를 설득했다. 1962년 10월에 대학 측은 메러디스의등록을 승인했다. 하지만 백인 학생들이 격렬한 시위로 실력 저지에나섰고, 그 와중에 두 명의 흑인이 숨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메러디스 역시 생명의 위협 속에 놓였다. 9월첫등교일, 존 도어인권국 수석검사는 연방보안관과 함께 메러디스와 나란히 등교를감행했다. 근 한 달간 그의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를 지켰다.
당시 대학과 학교 인근에는 연방군인 500여명이 배치돼 소요 사태에 대비했다. 메러디스는 훗날 미국의 저명한 인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활약했고, 미시시피대학교 교정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 P133

존 도어는 전통적인 남부 공화당 집안 출신이었고 스스로를 ‘링컨 공화주의자‘라고 부르곤 했다. 워터게이트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다시 워싱턴으로 불려와 미 하원 특별검사로 활약했다.(당시 그의 팀원 중 한 명이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1974년 7월 리처드 닉슨RichardNixon, 1913~1994 탄핵안 초안에 존 도어는 이렇게 썼다. "사적으로 나는 닉슨 대통령에 대해 아무 편견이 없고, 그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않다. 하지만 나는 대통령의 권력 남용 문제에 결코 무심할 수 없다. 3주 뒤 닉슨은 사임했다. 워터게이트사건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숱한 인터뷰 요청에도 불구하고 도어는 단 한 번도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돋보이게 할 만한 수많은 사연 - P138

의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소개하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1960년대 법무부 시절 그와 함께 일했던 새크라멘토 법대의 도로시 랜즈버그 부학장은 <LA타임스> 인터뷰에서 "도어는 늘 겸손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낼 뿐이었다. 우리가 그를 사랑했고, 그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것도 그때문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고향 미니애폴리스로 돌아가 아들이운영하는 로펌에서 주로 인권 사건을 맡아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1985년 PBS가 만든 1950, 1960년대 시민권 운동 특집시리즈에인터뷰이로 등장한 도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우리는 혁명이나전쟁이 아니라 법적 절차를 통해 카스트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항상 느꼈던바, 당시 현장에는 언제나 강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법에 근거한 민주적이고헌법적인 절차들을 완성해냈다" - P139

2012년 메달 수여식 후 케이블방송 C-SPAN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1960년대 이후 인종 평등을 위해 전진해온 모든 노력의 놀라운 결실"이라고 말했다. "당시 셀 수 없이 많은 남부의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2등 시민이었고, 차별은 잔혹하고 끔찍했다. 이제 끝났다"
그는 2014년 11월 11일에 별세했다. 향년 92세. 오바마 대통령은백악관 공식 자료를 통해 "그의 용기와 인내가 없었다면 미셸과 내가 지금 여기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애도했다.
하지만 "이제 끝났다" 라는 그의 진단은 그의 희망이었다고 해야한다. 그는 미주리 주 퍼거슨사건 18세 흑인 청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에 대한 대배심의 불기소처분과 그 이후의 상황들을 보지 못했다. - P139

생존자에서 조력자로
폭력 피해 여성 구제를 위하여


영국의 여성인권운동가 데니즈 마셜Denise Marshall은 1961년 12월12일에 런던 북부 하이버리의 아일랜드계 어머니와 외판원 아버지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양부는 무능하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마셜은 집에서 부모에게 맞는 게 일이었고, 학급에서는 가장 가난한 학생으로 따돌림을당했다. 아홉 살 때 부모가 너무 싫어 찻잔에 표백제를 부은 적이있는데, 그걸 알아챈 부모가 그를 야단치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함께 살던 양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의강간이 시작된 것은 마셜이 일곱 살 되던 해부터였다. 어느 날 열네살의 자신을 또 덮치려는 할아버지에게 마셜은 다가오면 죽이겠다고 말했고, 비웃으며 덤벼든 그의 다리를 칼로 찔렀다. 강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일이 있기 두 해 전 열두 살 때 경찰서에 찾아가강간당해온 사실을 고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오히려 쫓겨났죠. 1970년대가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 ‘이브스 Eaves‘를 찾아오는 어린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볼 때마다 나 - P149

는 이 사회가 1970년대 이후 얼마나 진보했나, 진보하기는 했나 싶어 절망합니다." ‘

페미니즘 전사戰士가 실재한다면, 데니즈 마셜은 그 일원이라고불릴 만했다. 영국 젠더폭력 피해 여성 구제단체 ‘이브스‘ 대표로서그는 유·청년기의 저 결기로 불의와 부당함에 맞섰다. 사건 현장에그가 나타나면 경찰들의 태도가 달라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성폭력·가정폭력·강제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구호시설을 열고 정신적·육체적 회복과 자립을 위한 창의적이고도 실질적인 여러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에게 피해자는 동정하고 시혜를 베풀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의에 희생된 동지였다. 그들의 위축된 자아를 북돋워피해자가 아닌 생존자 survivor로 다시 서게 하고, 나아가 다른 피해여성을 부축하는 조력자 supporter로 힘을 보태게 한 것은, 그의 삶이그러했듯 바로 그들에게서 세상을 바꿀 힘을 찾고자 해서였다. 영미국 왕실은 2007년 그에게 대영제국훈장을 수여했다. 마셜은 4년 뒤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빅 소사이어티‘의 위선을 향해 그 훈장을집어 던졌다. 그런 데니즈 마셜이 2015년 8월 21일 별세했다. 향년53세. - P150

기고문에서 피해 여성과 전문가들의 도움을 이어주는 매개 프로그램으로써 아미나 프로젝트를 런던뿐 아니라 영국 전역과세계로 확산해야 한다고 썼다. "아미나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 여성뿐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의 삶도 보상받고 또 변화한다. 그들은 폭력에 대한 이해를 키우고 극복의 기술을 익히며 자기 삶의 새로운전망과 지평을 열게 된다. 한 참가자가 표현했듯이 ‘내 안에서 마치페미니스트의 그것과 같은 뭔가 포효하듯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되는 것이다."
‘피해자가 생존자로, 나아가 조력자로 변화하는 그 과정은 마셜의삶의 이력이기도 했다. 그는 내무부가 주최한 성폭력 컨퍼런스에서한 강간 피해자가 사례를 발표하는 동안 여성 전문가들이 분노는커넝넋 나간 얼굴로 동정하듯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다고 말했다. 2003년 이후 파피 프로젝트를 거쳐 간 여성은 약 3000명에달하고 그중 1000여 명이 영국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 P152

영국 최대 여성 · 아동 자선단체인 ‘위민스에이드Women‘s Aid‘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일반 폭력 범죄는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약 3분의 1로 꾸준히 감소한 반면 가정폭력은 전혀 줄지 않았다.
2013년의 경우 매주 약 두 명의 여성이 파트너나 전 파트너에 의해살해당했다. 전체 여성 피살자의 46퍼센트였다. 여성이 남성 파트너를 살해한 경우는 7퍼센트였다. 2012년 한 해, 가정폭력을 겪은 여 - P152

성은 전체의 약 7.1퍼센트였고, 16세 이후 가정폭력을 경험한 적이있는 여성은 30퍼센트에 달했다. 영국 경찰은 30초마다 한 통꼴의가정폭력 피해 신고 전화를 받고 있다. 이브스가 인용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 가정폭력 피해의 사회적 비용은 연간 160억 파운드에 달하고, 부상을 치료(정신과 진료 비용은 제외)하는 데만 약 17억파운드가 든다. 성폭력과 강제 매매춘 등을 뺀 가정폭력 피해만 그렇다‘
위민스에이드는 여성 한 명을 6개월간 구호시설에 수용하는 데드는 비용이 인건비와 시설운영비 등을 포함해 약 9600파운드라고밝혔다. 영국 정부는 2010년 약 1억 파운드의 예산으로 젠더폭력피해 여성 구제단체들을 지원했다. 그해 집권한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정권은 그 예산을 대폭 삭감하기 시작했다. 2015년 영국 정부의 젠더폭력 구제 예산은 2010년의 4분의1 수준인 2800만 파운드였다.  - P153

이른바 ‘빅 소사이어티‘ 정책, 즉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정부에만 의존하지 않고 가족과 이웃, 사회공동체가 합심하여 추진함으로써 서비스의 효율을 높이고 작은 정부를 실현한다"
하는 구상의 일환이었다. 2010년 187곳에 달하던 젠더폭력 구제 시설은 2014년 155곳으로 줄었고, 그나마 대부분 극심한 운영난을 겪게 됐다. 위민스에이드는 "지난해 하루 평균 약 112명의 여성과 84명의 아동이 각종 구호시설을 떠나야 했다"라고 밝혔다.

마셜의 이브스와 파피 프로젝트도 직격탄을 맞았다. 젠더폭력은사회 기부의 가장 변두리 분야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인신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지역사회의 시선은 위선적인 온정조차 기대하기 힘들 때가 많다. - P153

마셜은 범죄소설 마니아였고 영혼의 암살자 Soul Assassin』와 『긴그림자 The Long Shadow』라는 두 권의 범죄소설을 자비 출판한 작가였다. 어둡고, 새롭고, 조금은 자전적인 내용이라고 줄리 빈델은 그의 작품들을 평했다. 파트너리사가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2003년 무렵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마셜은 "나 같은 ‘생존자‘는 상담을 받으라는 말을 늘 듣곤 한다. 하지만 내겐 글쓰기와페미니즘이 최선의 치료법이었다" "픽션 안에서 당신은 당신의 세상을 통제할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세상을 구현할 수도 있다"라고말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픽션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해 위암과 소장암말기 판정을 받고 줄곧 투병했다. 빈델은 병석의 그가 "할 일이 아직 많다" "레즈비언들을 위한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고 싶고, 무엇보다 먼저 이 비정한 정부를 쫓아내고 싶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 P155

순간을 사는 존재
이단자라는 오명 속에서 존엄사 합법화에 나서다


기독교의 퇴행적 보수성과 몽매주의에 맞서 교회의 혁신과 종교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헌신했던 ‘이단자 Heretic 라루‘가 2014년 9월 17일 작고했다. 목사이자 종교학자였던 그는 성서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교회와 스스로도 믿지 않으면서 성서의 기록을 역사의 진실처럼 설교하는 목회자들을 비판했다. 또 노인학자로서 삶의 위엄 못지않게 죽음의 존엄을 중시했고,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에 생애를 바쳤다. 기성 교단과 다수의 보수 기독교인들로부터 비난받으면서도 그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외적인 것들의 허구성을 전투적으로 고발했다. 향년 98세. - P157

훗날 목사가 되고 종교기관의 성서연구자로 활동한 것을 보면당시의 저 별명은 그리 진지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존엄사 합법화 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그는 적어도 보수 교단의 입장에서는 진짜 ‘이단자 라루‘였다.
죽음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70년대부터 이어져온 듯하다. 1976년에 그는 한 심리학자가 임종을 앞둔 이들을 대상으로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직한 태도 등을 설명하는 강연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리고 4년 뒤 영국의 저널리스트 출신 데릭 험프리Derek Humphry,
1930~와 함께 미국의 선구적인 존엄사 옹호 단체 ‘헴록 소사이어티Hemlock Society‘를 설립, 8년 동안 의장을 맡는다. 험프리는 불치병 아내의 자살 결심과 실행 과정을 기록한 『진의 길 Jean‘s Way』과 『마지막출구Final Exit 등의 저자이자 존엄사 합법화 운동의 선구적인 활동가였다. - P162

목사 자격을 지닌 종교학자가 존엄사를 지지하는 상설 조직을만들어 리더가 되는 일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로서는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직을 사퇴하고 노인학과 겸임교수가 된다. 험프리는 "라루는 누구도 두려워 엄두를 내지 못하던 단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생의 막바지에 이른 이들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주장을 둘러싼 논란이 미국에서 막 시작되던 때였고, 당연히 뜨겁고도 예민한 주제였다. 그는 그 민감하고 논쟁적인 시기에 엄청난 조정력을 발휘하며헴록을 이끌었다"라고 회고했다.
헴록은 의학·법률 전문가 등과 함께 불치 환자 상담과 존엄사 합법화 운동 등을 주도했고, 1994년 오리건 주가 미국 최초로 존엄사 - P162

를 합법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힘록은 2007년에 관련 단체 등과 연합하여 공감과선택Compassion & Choices‘이라는 이름의 시민단체로 거듭났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4년 10월 16일 자 「죽을권리-힘을 얻다‘The right to die-Seizing some control」는 기사에서 뇌암에걸린 뒤 오리건 주로 이주해 의사의 존엄사 처방을 받은 캘리포니아의 스물아홉 살 여성 브리트니 메이너드가 그해 11월 1일에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했고, 남은 삶을 존엄사 옹호 운동에 바치고 있다는 사연과 함께 미국 사회의 죽음에 대한 전향적인 변화상을 소개했다. 미국의 경우 오리건 주를 이어 버몬트 몬태나, 워싱턴·뉴멕시코 주가 존엄사를 합법화했고, 존엄사 법안이 계류 중인 곳은더 많다. <이코노미스트>는 생사를 신의 선택으로 믿어온 강고한기독교 전통과 "목숨만은 신의 것"이라고 했던 사유재산권의 아버지존 로크의 정신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며, 교회에 규칙적으로다니는 미국의 신도 가운데 최소 20퍼센트가 존엄사를 옹호한다는공감과선택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기도 했다. 저 거대한 변화의 물꼬를 튼 이가 라루였다.  - P163

그리고 라루의 교재 이야기도 있다. 라루는 매 학기 첫강의 때면 학생들에게 실제 사람의 골분을 보여주곤 했다. 자신의 친구였던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심리학과 허먼 하비 교수가 라루에게 강의 교재로 쓰라며 유언한 그의 뼛가루였다. 라루는 죽음의 실체를이성적으로 가르쳤고 "하비는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라며 농담처럼말하곤 했다.
또 그는 <레지스터> 인터뷰에서 "당신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삶을 통해 추구하는 것들의 중요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성과 성서』 『안락사와 종교』 『신의 역할』등 다수의 논쟁적인 책을 썼다.
라루는 두 차례 결혼했고 이혼했다. 전 아내 에밀리 퍼킨스는 "라루는 우리가 하루하루 혹은 한 해 한 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항상순간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을 하곤 했다"라고 말했다. 죽음과 순간으로 닿아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이 더 열정적일 수 있었다는 거였다. 퍼킨스의 말처럼 라루는 자신이 믿고 가르친 바대로 살았다. 유족은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산소호흡기 연명치료를 거부,
그의 뜻을 존중했다. - P165

1960년대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불씨는 아무래도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가 암살된 1963년 베티 프리던의 책 여성의신비가 지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케네디 집권 초기 전미여성기구의 성차별 폭로, 고용평등 운동도 든든한 화약고였다. 다만 벅샌덜같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가 보기에 그들의 활동은 너무 개량적이고 온순했다.
초기 신좌파페미니즘운동가들은 성차별 문제를 자본주의의 역사와 노동 현실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열었고, 특히 1960년대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인권·저항 운동 조직 내 성차별에 가장뜨겁게 분노함으로써 독자적인 운동의 장을 여는 데 기여했다. 공산주의 이념을 모태신앙처럼 내장한 페미니스트 벅샌덜에게 반자본주의 투쟁과 결합하지 않는 여성해방운동은 넌센스였다.  - P172

유년 시절 이후 집에서 겪어온 경험에 비춰 좌파운동진영내의 성평등의식이라는 게 어떤 지경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1998년 출간된 ‘페미니스트 회고 기획The Feminist Memoir Project 에실은 불 지피기 Catching the Fire‘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그는 "페미니즘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사랑에 빠지듯 여성운동에 매료됐고,
페미니즘은 내 생애의 퍼즐을 풀어주었다. 나는 민권운동, 반전운동 등등을 해왔지만 내게 그것들은 의무감과 분노의 소산이었지 내자신의 싸움은 아니었다"라고 썼다. 유년의 아버지로 표상되는 것들에 대한 애증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인종과 계급과 젠더의 구조를 교차시켜보고자 했다. 사회변혁은 급진적인 제도 개혁을 통해 교정돼가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
하지만 그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여성학과 여성운동사에 미친 영 - P172

향에 비해 운동 진영 내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1971년 이후그는 뉴욕주립대학교 교수가 돼 여성노동운동사를 가르치며 여성운동 현장과 거리를 뒀다. 대신 급진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가치를추구하며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나갔다. 그는 1976년 린다 고든 수전 리버비 등과 함께 미국 노동 여성 America‘s Working Women』이라는전 6권의 방대한 자료집을 공동 출간했다. 370여 년간 여성들이 남긴 일기, 구술 기록, 편지, 노래, 시, 사료집, 대중잡지, 기사까지 수집해 여성들이 노동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고 어떤 조직을 만들어 어떻게 일했는지, 노예 여성들이 들판이나 집 안에서 했던 일과사보타주 사례까지 집대성한 저 책은 여성학과 노동학에 중요한 1차 자료로 꼽힌다. 당시 랜덤하우스의 젊은 편집자가 토니 모리슨이었다. - P174

벅샌덜 등은 1995년 인종적 · 민족적 배경과 지역 변수를 포함시킨 개정판을 냈고, 앞서 1987년에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ww의 조직가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Elizabeth Gurley Flynn, 1890~1964의 평전『워즈 온 파이어Words on Fire를 내기도 했다. 플린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주요 활동가로 조직 내 성차별과 중앙집중적 구조 등에 대해 선구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싸운 공산주의자였지만, 벅샌덜의평전이 나오기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여성이었다.
2011년 은퇴 후에는 뉴욕시립대학교에서 노동학을 강의했고, 베이뷰 여성 마약경범죄 교정시설에서 수감자들을 교육했다. 2011년말 한 인터뷰에서 그는 경범죄 교정시설이 수감자(대부분 18~34세스패니시와 아프리칸아메리칸이라고 했다)들의 교정·재활을 돕기보다그들을 사회의 낙오자로 만들고 있다고 성토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학생들은 지식에 목말라 있다" "정치적인 문제에 아주 성실하 - P174

다. 그들은 어서 나가서 ‘월가 점령‘ 시위에 참여하길 원하며, 뭔가이 사회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여성과 계급의 혁명적 건강성을 믿고 미래를 낙관한 힘찬 사회주의자였다. 올초 병원에서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자마자 곧장 퇴원, 친구들을 초대해 성대한 고별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가 2015년 10월 13일 별세했다. 향년 76세.

영국의 저명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자 왕립학회 회원인 실라로보덤Sheila Rowbotham, 1943~은 <가디언> 부고에서 "벅샌덜은 어디를 가든 선동하고 조직했다. 또 어디서든 환영받고, 사랑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를 이어주고 또 가르치고 돕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데 쏟았다"라고 썼다. 시카고의 비영리 좌파 정치시사 전문 출판사 ‘헤이마켓북스 HaymarketBooks‘ 는 추모의 관용구 R.I.PRest In Peace‘ 대신 "Rest In Power"라는 멋진 표현으로 로절린 벅샌덜의 삶과 죽음을 함께 기렸다. - P175

벤치의 익살꾼
즐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시합에서 진 감독이 "난 잘했는데 애들이 형편없어서"라고 말했다고 치자. 사실이라면 그는 좋은 감독이 아닐 것이다. 선수들의 사기를 죽이고 팀워크를 해치고 팬들의 냉소와 비아냥을 사기 딱 좋은 말 아닌가.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진 않더라도, 패전팀감독의 심중에 저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속내가 은연중에라도 드러날까 봐 더 조심할 것이다. - P177

1964년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 산호세 비스Bees 감독 로키 브리지스는 데뷔전 패배 뒤 인터뷰에서 저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쏟아진 건 팬들의 비난이 아니라 유쾌한 웃음과 응원이었고, 선수들 중 누구도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 잘나서가 아니라
‘못나서였다. 그는 그렇게 실패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하는 리더들의 오랜 관행을 기분잡치지않게 조롱했고, 저 상투어의 의미를완벽하게 뒤집었다.
그가 얻고 또 선사한 웃음은 메이저리그 선수로서나 코치와 감독으로서, 야구를 통해 추구했던 궁극적인 가치였다. <스포츠일러 - P177

스트레이티드>가 인정한 ‘미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익살꾼‘ 로키 브리지스가 2015년 1월 28일, 아이다호 주 코들레인의 한 호스피스병동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에버렛 라마 브리지스 Everette Lamar Bridges, 애칭 로키 Rocky 브리지스. 그는 1951년에 미국 메이저리그 브루클린 다저스에 입단해 1961년에 LA에인절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만 10년 동안 2272타석 2할 4푼 7리의 타율을 기록했고, 통산 열여섯 개의 홈런을 쳤다. 현역 시절 그는 1·2·3루 등의 다양한 포지션을 거쳤지만 그가 가장 오래머문 자리는 벤치후보였다. 10년 사이 그는 무려 일곱 개 팀을 전전했고, 전반기와 후반기를 다른 팀에서 뛴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 프로야구 역사의 저 숱한 스타들 명단 속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야구를 정말 사랑하는 이들 중에는 그를 메이저리그의 가장 ‘즐겁고 행복한 선수로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 P178

군대 민주화 운동
부당한 명령과 처우 개선, 반전운동에 힘써


만일 군대에 노조가 생긴다면? 임금과 근무시간, 복지 규정을 두고 매년 정부와 협상을 벌인다면? 부당한 명령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부대원이 지휘관을 선출하자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군대를 없애자는 말만큼이나 급진적인, 그래서 꿈 같은 저 주장이 실제로 제기된 적이 있다.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구정 대공세 직전인 1967년 12월 미국 뉴욕에서였다. 그해 베트남에는 미군 약 50만 명이 주둔해 있었고, 대통령 린든 존슨이의회를 상대로 추가 파병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리던때였다. ‘미국군인노조ASU‘라는 이름의 그 조직은 반전 및 군대 민주화를 기치로 병영 안팎에서 꽤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고, 1960, 1970년대 좌파 운동과 결합하면서 베트남전쟁 종전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군인노조를 설립하고 이끈 앤드루 딘 스태프 Andrew DeanStapp가 2014년 9월 3일에 별세했다. 향년 70세. - P187

훗날 밝혀진바, 베트남전쟁에 징집된 전투병의 80퍼센트가 블루칼라 출신이었다. 대학생은 전체의 20퍼센트로 당시 대학 진학률약50퍼센트에 턱없이 못 미쳤고, 그들은 대부분 장교로 활동했다. 1970년대하버드대학교 재학생 가운데 베트남에 파병된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파병이 시작되고 전쟁이 확산되면서 시민들은 그 전쟁의 계급적·계층적 편향성을 분위기로 체감하게 됐고, 1년 단위로 교대하던전선의 군인들과 제대병들의 증언을 통해 전쟁의 실상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 전쟁이 정부가 선전하듯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 베트남 주민들의 차가운 반응과 누가 적이고 누가 민간인인지 모른 채 총을 쏘아야 하는 현실, 전장의 병사들에게전황을 정직하게 전달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 - P188

프는 한 인터뷰에서 "정부는 언제나 미군이 베트남 국민을 돕기 위해 거기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1968년경에는 모든 게 거짓임이명백해졌다." 미군 대위 하워드 레비가 양민 학살자라며 그린베레병사들의 교육을 거부, 군사재판에 회부된 건 1967년이었다.(1964년에 미국 대법원의 흑인참정권 판결을 이끌어낸 앨라배마의 인권변호사찰스 모건 주니어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레비는 3년형을 선고받았다.) 앤드루 딘 스태프가 미 육군에 입대한 건 그해 봄이었다. - P189

도둑맞은 행복
수용소에서 1600킬로미터를 걸어 가족 품으로


매년 5월 26일은 호주 의회가 정한 ‘국가 사과의 날National SorryDay‘이다. 호주 정부가 과거 원주민에게 범한 야만적인 일들을 사과하고 잊지 않겠다는 취지로 비슷한 잘못을 다 함께 경계하자는 취지로 1998년에 지정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나 점령국에 가한 약탈과 학살 등의 악행은 보편적인 역사지만 호주의 과거는 좀특별하다. 당시 호주의 백인 정부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아이들을 부모와 혈족의 품에서 강탈해 집단시설에 수용한 뒤 결혼과 교육과 노동으로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탈색하고 백인화했다. - P197

그 만행은 합법적으로 장장 두 세대를 넘겨 1905~1970 자행됐고,
사실상의 ‘국가 유괴‘로 최소 10만 명의 아이들이 수용소로 끌려갔다. 자신의 언어와 종교와 관습과 핏줄을 도둑맞은 그들이 이른바호주의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다. 호주 정부의 첫 공식 사과는 2008년 2월 13일에 이루어졌다. 당시 수상이었던 케빈 러드 Kevin - P197

Rudd, 1957~는 의회 연설에서 "We are sorry (우리가 잘못했습니다)"를연발했다.
도둑맞은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상처를 극적으로 증언하고 호주의 국가적 양심과 인류 보편 윤리의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게 한 원주민 작가 도리스 필킹턴 가리마라Doris Pilkington Garimara가 2014년 4월 10일에 영면했다. 향년 76세. 그는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책 『토끼 울타리』의 저자이자 백인수용시설을 탈출해 장장1000마일약 1600킬로미터 걸어 가족 품으로 돌아온 토끼 울타리의실제 주인공 몰리 켈리의 장녀다. - P198

1931년 7월, 호주 북서부 깁슨 사막 인근 원주민 마을 지갈롱의열네 살 몰리는 동생 데이지, 사촌 동생 그레이시와 함께 백인 경찰에게 끌려갔다. 부모는 저항도 못한 채 통곡만 했고 할머니와 친척들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려는 부족 전래의 방식대로 제 머리를돌로 찧으며 함께 아파했다. 그들 형제는 원주민 어머니 모드가 토끼 울타리‘ 감독관이던 백인 아버지와 낳은, 마을 최초의 혼혈아다. 토끼 울타리는 동부 지역의 야생 토끼들이 서호주 목장의 목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호주 정부가 1907년에 세 갈래로 나누어 설치한 연장 2023마일 3256킬로미터의 철조망으로, 그 철조망의 한 기점이 몰리의 고향 지갈롱이었다. - P198

아이들은 부족 언어를 쓰면 혼이 났고, 영어로 성경을 읽고 주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하지만 몰리를 가장 분노하게 한 것은 수녀의 말 한마디였다. "우리에겐 엄마가 없다고 했다. 우리 말은말이 아니라고 했다."
며칠 뒤 아침, 수용소 아이들이 예배를 보러 교회로 이동한 사이몰리는 "엄마에게 가자"라며 두 동생을 이끌고 숲으로 도망쳤다. 어릴 적부터 고향에서 익힌 사냥 기술과 감각, 그리고 토끼 울타리만찾아 따라가면 아무리 멀어도 집에 닿는다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 그들은 헬기까지 동원한 추적을 피해가며,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난생처음 맞닥뜨리는 사막과 벌판과 숲을 헤쳐가며, 사냥과 구걸로 허기를 달래고 추위와 공포를 견뎌가며, 상처로 곪은 발의 통증을 참으며, 칭얼대는 동생들을 번갈아 입어주면서, 장장 9주 동안거의 맨발로 호주 대륙을 중단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수용소 탈출에 성공한 예는 몰리 일행이 처음이었다. 아이들을 추적하느라 큰돈을 쓰고 체면까지 깎인 원주민보호국은 몰리와 데이지를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 P199

하지만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백인 목장의 하녀로 살며 목부牧夫토비 켈리와 결혼, 도리스와 애너벨을 낳은 몰리는 1940년 11월에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은 직후 두 아이와 함께 다시 무어 강 원주민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9개월 뒤 네 살이었던 도리스는 남겨둔채 18개월 된 애너벨만 안고 다시 탈출, 지갈롱으로 돌아오지만 3년뒤 애너벨을 또 빼앗겼다. - P199

호주 정부가 사과하기까지 기나긴 줄다리기가 있었고, 땅과 함께정체성을 잃어버린 다수의 원주민들은 2등 시민으로, 술과 마약으로 황폐해져갔다. 호주 비원주민으로서 조국의 어두운 역사를 고발한 첫 지식인 세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인류학자 윌리엄 E. H. 스태너다. 그는 150여 년에 걸쳐 원주민 사회에 자행된 파괴와 약탈의 역사에 대한 정부의 외면을 ‘거대한 호주의 침묵Great AustralianSilence‘이라 불렀다. 진보 학계와 원주민단체의 요구에 1992년 폴 키팅Paul John Keating, 1944~ 정부는 약탈과 살인, 문화와 생활양식의 파괴를 제한적으로 인정했지만 사과는 거부했다. 1997년 의회 인권위원회 보고서가 나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당 존 하워드 JohnHoward, 1939~ 정부는 ‘사과sory‘가 아니라 역사적 흠집blemish에 대해
‘유감regre‘이라고 말했다. 당시 수상인 하워드는 선조들의 행위에대해 현 수상이 사죄할 수는 없다고 했고, 그들의 행위가 그릇된 것이긴 하나 선한 의도였던 만큼 사죄할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 - P204

2014년 2월 케빈 러드 전 수상은 ‘국가사죄기금National ApologyFund‘을 발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았다. 그는 "우리는 우리 역사의 원주민성을 감추려 하기보다 더 확장된 국가적 정체성의 하나로 끌어안아야 한다. 우리는 원주민과 비원주민 삶의 간극으로 하여 미래세대로부터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연설, ‘토끼 울타리‘로 깎아먹은 호주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만회했다.
도리스는 화해위원회의 창립 멤버이자 ‘국가 사과의 날‘ 제정의발의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시드니모닝헤럴드>는 도리스가 숨지기 3주 전 고향에 가 몰리가그를 낳았던 부족의 성목 윈타마라 나무 아래에 앉아 긴 영적인 시간을 보냈고, 퍼스로 돌아와 혈족들의 기도 속에서 엄마 곁으로 영원히 떠났다고 전했다. - P205

등불을 켜는 자
경찰 내부고발자로 산다는 것


로빈 무어Robin Moore, 1925~2008의 논픽션 프렌치커넥션이 출간된게 1969년이다. 프렌치커넥션은 중동 지역에서 재배된 아편이 프랑스에서 헤로인으로 가공돼 미국 동부로 반입되는, 1960년대 최대의 마약 밀매 루트와 시스템을 일컫는 말, 책은 뉴욕경찰청NYPD 마약단속국의 영웅적 형사들이 그 유통 조직을 추적 소탕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1971년 진 해크먼이 주연을 맡은 윌리엄 프리드킨의 동명 영화는 큰 인기를 끌며 아카데미작품상 등 5개 부문상을 탔다.
책 출간과 영화 개봉 사이, 1970년 4월 25일자 <뉴욕타임스>에는 로빈 무어의 책이 그렸던 경찰상과는 정반대인, 뉴욕경찰청의 만연한 부패·비리 실태를 폭로하는 기사가 1면에 실렸다. 브루클린과브롱크스 지역 순찰대 소속 이탈리아계 경찰관 프랭크 서피코FrankSerpico, 1936~의 제보에 근거한 기사였다. 정기 상납과 뇌물 단속 정보 누설….…. 그는 언론 제보 전에 그 사실들을 감찰 당국에 보고했지만 전혀 시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보도 직후 - P207

당시 뉴욕시장이던 존 린제이는 지방검사 휘트먼 냅Whitman Knapp,
1909~2004을 의장으로 한 경찰부패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냅위원회‘는 그해 6월부터 조사 활동을 시작해 1972년 8월 첫 보고서를발표했다.
서피코의 폭로는 맛보기일 뿐이었다. 영화의 감동에 취해 있던 이들의 예상과 달리 부패 경찰이 있다 해도 얼마 안 될 테고 비리라해도 자계自戒의 선은 있으리라 여기던 시민들의 기대와도 달리, 그들은 압수한 마약을 빼돌려 유통했고 수익금을 나눴으며 그것을단속 현장에 없던 요원들에게까지 일정 비율로 분배하고 있었다. 심지어 프렌치커넥션의 카르텔 조직원이나 다름없이 협조한 이도 있었다. - P208

그냥 경찰관도 아니라 자타공인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 자부하던뉴욕경찰청 마약특별조사팀SIU의 실상이 그러했다. 마약특별조사팀은 거리의 조무래기 소매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카르텔 유통 거점과 거물들을 추적·단속하는 임무를 전담한 팀이었다. 1972년 마약특별조사팀 전체 요원 70명 가운데 52명이 기소됐다. 판사는 그렇게 벌어들인 검은 돈으로 최고급 양복에 비싼 차를 몰고 다니며돈을 물 쓰듯 하면서도 경찰 신분증까지 지니고 있던 그들을 ‘도시의 왕자들‘이라고 불렀다.

냅위원회의 거의 모든 조사 성과는 30세 신참 마약특별조사팀요원 로버트 루시Robert Leuci의 목숨 건 활약 덕이었다. 냅위원회의설득으로 비밀요원 Undercover이 된 그는 16개월 조사 기간 동안 무선마이크를 숨긴 채 동료들과 생활했고, 도청기가 발각돼 두 차례나 살 - P208

해당할 위기까지 겪으며 비리 현장의 대화를 위원회에 생중계했다.
서피코도, 그보다 네 살 아래인 루시도, 브루클린 출신의 이탈리아계 이민 2세였다. 루시는 파이프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봉제공장 직공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1940년 2월28일에 태어났다. 그의아버지는 어린 루시에게 성을 이탈리아어식 발음레우치이 아닌 영어식투시으로 발음하게 했다. "아버지는 미국인이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끊임없이 주입하곤 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퀸스의 존애덤스고교를 졸업하고 캔자스베이커대학교에 입학한 열아홉 살에 그는
‘미국인이 되기 위해‘ 뉴욕경찰아카데미에 입교했고, 2년 뒤 자신과가족의 염원이던 뉴욕경찰청 배지와 휘장을 단다. 퀸스와 맨해튼,
브롱크스 등지의 순찰대원으로 일하던 그가 마약단속국 사복형사로 승진한 것은 스물네 살이던 1964년이었고, 또 몇 년 뒤 선망하던 마약특별조사팀에 발탁됐다.  - P209

그는 발군의 검거 실적을 쌓은 뛰어난경찰관이었다. 그리고 그도 이내 부패경찰이 됐다. 훗날 자서전 『올더 센추리언스All the Centurions에서 고백했듯, 당시의 그에겐 소속감이 절실했다. 부패는 가장 강력한 유대의 끈이었다.
냅위원회가 그를 선택한 배경은 확실하지 않다. 위원회 출범 초기, 검사였던 니콜라스 스코페타라는 이가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스코페타는 "루시는 나쁜 경찰이었지만 그에겐 좋은 편이 되려는의지가 있었고, 그 일에 목숨을 걸었다"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젊어(그 무렵 30세) 물이 덜 들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고, 1972년 <라이프> 보도처럼 "흑발에 구레나룻, 잘생긴 얼굴에 젊음의 기대감이 가득 담긴 온화한 갈색 눈동자의 그가 누구에게든 어떤 일에서든 확신을 줄 만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끄나풀‘이 되지 - P209

않으면 ‘미국인‘으로 남을 수 없을 만한 결정적인 약점을 잡혔을지도 모른다.
루시도 위원회의 제안에 선뜻 응한 건 아니었다. 오래 망설였고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는 조건을 달았다. 냅위원회가 경찰 비리에만초점을 맞춘다면 협조하지 않겠다, 뉴욕의 범죄 정의 시스템 전체가 부패했고 경찰은 50여 년 동안 굳어진 그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라는 거였다. 그가 요구한 ‘대의‘는 정의와 직업윤리 이전에 배반에 따를 인간적 고뇌를 견디기 위한 버팀목이기도 했을것이다.
스코페타가 그의 조건에 어떻게 답변했는지 역시 알려진 바 없다. 어쨌건 그는 협력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동기를 말하라면,
그건 (처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죄의식이었다"라고 말했다. 그 죄의식은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서피코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 P210

미국의 감시자
스페인내전 참전 병사가 본 세계 정치


선택과 판단은 늘 곤혹스럽지만 특히 어려운 선택도 있다. 입바른 말 한마디로 앞길이 어긋나기도 하고, 투자나 빚보증에 자식들의 팔자가 출렁일 수도 있다. 좀 거창하지만 시대나 역사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선택도 있다. 시대가 가파를수록, 예컨대 전쟁이나 혁명의 시대라면 그 선택은 더 어려워진다. 100년 전 대한제국의 적지않은 이들은 선택의 자리 위에 제 목숨까지 얹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 잘 만나고 나라 잘 만나는 것 못지않게 시대를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목숨 걸 일도 없고, 비겁함을 드러내지 않아도되고, 비교적 안전하게 용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내전이 터진 1936년, 지구에는 약 20억 명이 살았다. 그들가운데 3만여 명이 파시스트 반란군에 맞서 스페인공화국 합법 정부를 지키기 위해 조직된 ‘국제여단‘에 가담했다. 그들 대부분은 국가나 조직의 명령에 등 떠밀려 나선 게 아니었다. 조국과 민족,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돈이나 명예를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이름 없는 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위해 유럽과 아메 - P217

리카, 더 멀리 중국에서 목숨을 걸고 달려간, 말 그대로 의용군이었다.(스탈린 체제의 코민테른이 그 안에서 어떻게 무정부주의자와 대립하고 억압했는지는 나중 일이니 덮어두자.)올해는 스페인내전 발발 80주년이다. 국제여단의 가장 어린 세대였을 10대 후반, 20대 초반 청년들 중 용케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도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떴다. 델머 버그 Delmer Berg 는 국제여단 미국인 의용군 부대 ‘에이브러햄링컨여단‘의 평범한 병사였지만, 가장 오래 살아남아 특별한 병사가 됐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서가아니라 그냥 스페인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라고 말했던 그 마지막병사가 두 달 넘긴 100년을 살고 2016년2월28일 별세했다. - P2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