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은 중요합니다. 아니, 글쓰기에서는 모든 문장이 중요해요. 제가 생각하는 잘 쓴 글은 뺄 문장이 하나도 없는 글이거든요. 그러니 첫 문장도 중요하죠. 특히 첫 문장에는 글의 방향이나 주제에 대한 힌트가 있어야 합니다. 그 글을 읽고 싶게만드는 막중한 임무를 지닌 문장이기 때문에 글을 쓰고 나서나중에 고치며 더 낫게 만들면 됩니다.
이렇게 말해볼까요. "첫 문장은 신의 선물인 게 아니라, 나의선택이다." 내가 쓴 첫 문장을 나중에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부담을 좀 덜 수 있죠. 실제로 저도 글을 다 쓴 뒤 어색하거나빈약하게 느껴지는 첫 문장을 바꿉니다. 그러니 빈 문서 앞에서겁먹지 마시고요. 인용하기, 상황을 묘사하기, 주제를 함축하기등 첫 문장 쓰는 방법을 하나씩 적용해보세요. 그렇게 어서 첫문장을 타고 글쓰기의 세계로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 P109

이번에는 시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글쓰기에서 화자의 시점을 일인칭과 삼인칭으로 설정할 경우 각각의 장단점을 말해보고자 하는데요. 쉽게 말해 일인칭은 ‘나는…….‘ 이라며 화자의시점에서 서술하는 방식이고, 삼인칭은 ‘그는...... ‘김여름 씨는……‘ 이렇게 나와 너, 우리가 아닌 제3자 타인의 시점에서문장을 쓰는 방식이죠. 저는 소설에서 삼인칭을 주로 쓰고 산문에서 일인칭을 주로 쓴다고 생각할 정도로 시점 설정에 무심했어요. 언젠가 "삼인칭 단편소설을 써봐야 정말 소설가가되는 거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도 나요. 글쓰기를 통해 나를벗어나서 타인이 되어보는 게 그만큼 고난도 작업이란 뜻으로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산문을 쓸 때는 주로 일인칭으로 쓰고, 르포를 쓸 때는 주로 삼인칭으로 썼죠. 비문학에서 일인칭은 자기 이야기니까 필자가 편안하게 쓰고, 독자도 편안하게 읽는다는 장점이 있어요. 독자가 필자에게 감정을 동일시하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입니다. 삼인칭의 장점은 필자가 거리를 두고 상황을 - P110

쓸 수 있다는 점이예요. 문장의 주어를 ‘나는‘이라고 쓰기보다
‘김은유는 이런 식으로 쓴다면 자신의 이야기라도 다른 인물의 일을 묘사하듯 조금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쓰게 되죠. 각 시점의 장점이 다른 시점의 단점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문학, 비문학 등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책을 읽다보니, 삼인칭이라고 꼭 객관적이고 일인칭이라고 반드시 주관적이지는 않더라고요. 다시 말해 글쓰기에선 몇 인칭으로 시점을 썼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개인이 아닌 보편의 이야기로 얼마나 힘 있게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풀어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로 시작하지만 혹은 ‘김순자‘로 시작하지만, 글을 다 읽은 독자의 머릿속에 특정 인물만이 아니라 메시지가 남아야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 P111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의 이야기로 읽히는 글을 어떻게 쓸까요? 방법은 주어를 반복적으로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제가 글쓰기의 최전선> 서문에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을 썼어요. 조지 오웰의 산문 제목에서 제목을 차용했고, 왜 글을 쓰게 됐는지를 짚은 산문이에요.

일과 사랑은 동시에 왔다. 결혼을 하고 노동조합 활동에서 지점 업무로 돌아갔다. 맞벌이가 시작되었다. 가사노동의 최종 책임자는자연스레 내가 되었다. ‘돕는 위치‘에 자리한 남편에게 편지를 써서 불만을 토로하고 출퇴근 길 차에서 여성주의 책을 읽어주면서 - P111

소통을 도모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행복했으나 뭔가 좌우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것 같았다. 나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은 시시때때 충돌했다. 아이를 집에 두고 내가 강의를 듣거나 영화를 보는게 못할 짓 같았으니 ‘나답게‘ 살기 위한 선택에는 묘한 죄의식이따랐다. 이 감정의 정체가 뭘까."


일인칭 시점으로 쓴 글인데요. "가사노동의 최종 책임자는자연스레 내가 되었다"라는 문장에만 ‘나‘라는 주어가 있어요.
글을 읽은 사람의 머릿속에는 사람만 남는 게 아니라 특정 상황이 그려져요. 그 장면에 독자는 자신을 대입하며 글을 읽습니다. ‘이거 내 이야기다‘ 하며 감응하게 되죠. - P112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단지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적 재난을 당한 벨라루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죠.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무려 10여 년에 걸쳐 100여 명을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일인칭으로 표현했어요. 작가가 개입하지않아요. 다 읽고 나면 굉장한 느낌에 압도됩니다. 이 책을 읽고일인칭, 삼인칭 시점에 관한 편견이 사라졌어요. ‘만약 이 책을삼인칭으로 썼으면 어땠을까?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만 인상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죠. 글에서 저자가 뒤로 사라지고 사건 당사 - P112

자의 목소리가 일인칭으로 나오니까 책에 나오는 인물과 독자인 저 사이에 정서적 밀착감이 컸습니다.
그래서 저도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쓸 때 그동안의르포 작업과 다르게 일인칭 시점으로 시도해봤어요. 처음엔확신이 없고 불안하니까 삼인칭 시점으로도 써보고요. 원고한 편을 일인칭, 삼인칭 두 가지 버전으로 써서 편집자랑 의논했죠. 뭐가 더 나을지 고민했고 인터뷰이의 목소리만 오롯하게 담아낼 때 메시지의 진실도가 더 높아진다는 판단이 들어서 일인칭으로 쓰자고 정했습니다. 책이 나온 뒤, 몰입해서 읽었다는 독자의 반응이 많았어요. 메시지 전달력이라는 측면에서 더 효과적이었다고 자체 평가하고 있습니다. - P113

그렇다고 일인칭이 진리라며 안주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 다른 르포를 쓸기회가 생기면 삼인칭으로 써보고 싶어요. 어떤 시점으로 쓰는게 적절한지는 글마다, 주제마다 다르니까요.
모든 법칙과 상식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그러니 일인칭과삼인칭 각각의 장단점에 얽매이기보다 각각 써보고 어떤 시점이 이번 글에 맞을지 판단해보세요. 우리는 무엇을 쓸 수 있고무엇을 쓸 수 없는지 모르니까요. 한 편씩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진리를 찾아내고 그렇게 발견한 진리를 또 과감히 버리는용기로 글쓰기에 임한다면, 혹여 남들이 보기엔 망했어도 최선을 다했기에 덜 부끄러운 글을 써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P113

김포의 꿈틀책방에 갔다가 책을 한 권 사왔어요.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이란 책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황현산 선생님은 문학평론가이며 불어불문학과 교수였고 많은 문인과 독자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저는 사유를 밀고 나가는 힘이 어휘의 적절성에 있다는 걸황현산 선생님의 글에서 배웠어요. 어휘가 화려하지 않은데쓰임이 적절하고, 문장이 담백하며 흐름이 유려해요. 한 줄 한줄 읽다보면 끝까지 읽게 됩니다. 비결이 뭘까 싶어서 글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연구해보기도 했는데요, 잘 모르겠지만글쓰기에서 테크닉이나 화려한 수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황현산 선생님의 글을 보여드릴게요. - P114

인터넷 문화를 진심으로 바로잡고 싶다면 질이 좋은 콘텐츠를 그것도 대량으로 제공하는 길밖에 다른 방책이 없다. 물론 비용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아리송한 저 거창한 토목공사에 비하면 사실 과자값에 불과하다. 높은 자리에 있는 한 사람 - P114

이 그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역시 어려운 일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특별한 어휘가 있진 않죠. 외려 "아리송한 "과자값" 같은단어들은 소박하죠. 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더 잘 스며요. 저였다면 어떻게 썼을까요.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저 쓸모없는 토목 공사‘ 정도로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쓸모없다‘는 글쓴이의 부정적인 판단이 드러나죠. 독자의 생각을 막는, 닫힌표현입니다. 한편 황현산 선생님이 쓴 "아리송한"이라는 표현이 독자 입장에서 부드럽게 느껴져요. 저는 "아리송한" 같은평이한 단어가 문체를 만든다고봐요. 독자는 그렇게 한 단어한 단어 스미듯이 글을 따라가다가 마지막 문장에 허를 찔리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라는 표현은 사유의 전복을 일으킵니다. - P115

책만 그런 게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 격인 상품을 우린 거의 모르고 사용한다. 농사짓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쌀을 얻어밥을 먹고, 옷 만드는 사람의 처지와 얼굴을 모르고 옷을 사서 입는다. 결과물만 쏙쏙 취하니까 슬쩍 버리기도 쉽다. 그렇게 편리를누릴수록 능력은 잃어간다. 물건을 귀히 여기는 능력, 타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능력,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는 능력. 


이 글에서 눈에 띄는 어휘는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 정도같아요. 이 표현은 마르크스의 글에서 얻어왔습니다. 마르크스가 상품을 ‘자본주의의 세포‘라고 하거든요. 옷 만드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라고 썼다가 무엇을 모른다고 하는지 뜻하는 바가 모호해 보여서 "처지와 얼굴을 모르고"라고 바꿨어요.
글쓰기에서 어휘를 다채롭게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사실과 현상을 정확하게 견인하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 P116

글을 쓰며 어휘력이나 문체의 빈약함이 문제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일상어로도 충분히 깊이 있는 글쓰기가 가능합니다. 어휘가 화려한데 남는 게 없는 외화내빈 글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글이 있어요. 이영광 시인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당신은 연인이라는 인연이었으나 당신은 인연이라는 연인이 되어……‘
- P118

새벽에 꿈에서 깨어 이런 문장을 떠올려봤다. 내가 내 머리로 생각한 문장이지만, 책임질 수는 없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에서주운 돈 가방을 파출소에 가져다줘야 하는 때처럼, 내려놔야 하는문장 같다. 그럴싸한 생각들이 다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주중에 샀다가 주말 저녁에 구겨버리는 로또 복권 같은 것들. 이 문장을 내인생이 소화시키지 못한다.


글 쓰는 사람은 어휘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영단어 1만개를 외우듯이 우리말 단어를 외운들, 적절한 쓰임을 찾아 쓰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겠지요. ‘아리송하다‘ ‘처지‘ ‘세포‘라는단어를 우리가 몰라서 못 쓰진 않아요. 글을 쓸 때 마침 떠올라서 단어를 배합하고 언어를 조탁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평소말할 때도 이 단어, 저 단어를 사용하는 데 익숙해지는 연습이필요합니다. 이미 아는 단어를 ‘나는 모른다‘는 생각으로 사전을 찾아보고 일상에서 써보기를 반복하다보면 글을 쓰다가 적절한 단어가 불현듯 떠오를 것입니다. - P119

할 때 불필요한 단어와 표현을 넣진 않았는지 의심하면서 골라내요. 그러다보면 가장 먼저 지우는 것이 습관적으로 쓴 형용사나 부사예요. ‘따뜻한 국밥‘의 "따뜻한"이나 ‘빠르게 내달렸다‘의 "빠르게"와 같이 동어반복이거나 불필요한 수식이요.


부사나 형용사를 적절히 빼야 글이 좋아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형용사는 명사를, 부사는 동사를 꾸미잖아요. ‘휘영청 밝은 달.‘ ‘빠르게 뛰었다.‘ 이런 식으로요. 자칫동어반복이거나상투적 표현이 되기 쉽죠. 전달해야 할 정보를 생략하기도 합니다. ‘나는 물을 많이 마신다‘보다 ‘나는 하루에 1.5리터를 마신다‘가 더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이죠. ‘많다‘의 기준은 저마다다릅니다. 형용사가 정보의 자리를 대신하면 상황의 고유성을드러내지 못한 예입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님도 부사의일종인 첩어를 과하게 쓰는 문제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 P121

글에 의성어와 의태어를 많이 쓰게 되면 글 쓴 사람의 사고가 너무 단순하거나 게으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수 있다. 이런 말들은 글에 현실감을 주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구체성을 없애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숲에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고 말할 때
‘살랑살랑‘은 바람의 세기와 성질을 어느 정도 전달하지만 그 바람을 개별화해주지는 않는다. ‘살랑살랑‘을 쓸 수 있는 바람은 많지만 글 쓴 사람이 표현하려고 하는 바람, 그 시간 그 숲에 불었던 바 - P121

람은 유일한 바람이다. 똑같은 바람이 두 번 다시 불지는 않는다."


저는 이 글을 읽었을 때 "똑같은 바람이 두 번 다시 불지는않는다"라는 문장이 몸에 감겨서 한 번 더 소리 내어 발음해보았네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도 떠오르고요. 자연과 만물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글 쓰는 일이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일인데,
제각기 고유한 것들을 수많은 ‘살랑살랑‘ 속에 묻지 않아야겠지요. - P122

특히 접속 부사, 즉 접속사는 어떨까요? 글에 논리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그래서‘ ‘그리고‘ ‘그런데‘ ‘그러므로‘와 같은 접속사를 쓰게 되는데요. 논리로만 글을 끌고 가기보다 리듬을만들어야 글맛이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접속사가 많은 글을읽다보면 독자의 생각이 글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못하고 접속사에서 탁탁 걸리고 끊어지거든요. 그렇다고처음부터 접속사 없이 쓰려면 의식되고 부담스러워서 아예 글을 쓰지 못하게 되니, 저는 일단 초고는 경계심 없이 쓰고 퇴고할 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면 접속사를 빼는 식으로 씁니다. 물론 과도한 사용을 자제할 뿐,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어색할 땐 접속사를 써야죠.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니 접속사를 비롯한 부사 그리고 형 - P122

용사를 여름철 모기를 대하듯 잡아 없애자고 말한 것 같은데요. 잘 쓴 부사와 접속사가 얼마나 글맛을 살려주는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글 잘 쓰는 작가들은 형용사와 부사를 능숙하게 부려요. 《시와 산책》을 쓴 한정원 작가도 그런 분이죠. 한구절을 보여드릴게요.
몸을 단번에 일으키고 커튼을 걷으면 아, 눈이 거기 있다. 창을 내내 올려 보다가 내 얼굴이 뜨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힘차게 흔드는 애인처럼.
눈을 그렇게 발견하는 날은, 사랑을 발견한 듯 벅차다.  - P123

"단번에" "환하게" "힘차게"와 같이 부사와 형용사가 거듭나오지만 거슬리기보다 말의 운율이 느껴지고 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환하게 그려지는 듯했어요. 글의 흐름을 타고 읽어내려갔습니다. 그러니 부사와 형용사를 빼더라도 무엇을 위해빼고 있는지, 간결한 게 아니라 앙상한 글을 만드는 건 아닌지한 번 더 살펴보세요. ‘글에서 부사와 형용사, 접속사 빼라‘라는 주장 뒤에 감춰진 속뜻은, 단순하고 모호하며 표준화된 글을 만들기도 하는 부사와 형용사, 글의 흐름을 이어주는 게 아니라 흐름을 끊어버리는 접속사를 남용하지 않게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 P123

글쓰기에 몰입하다보면 정작 메시지를 놓치고 다른 이야기를 쓰는 데 열중하는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 책의 원고도 쓰다가 막히면 서두로 돌아가서 질문이 뭐였는지 되짚어봤어요. 한 번씩 글의 메시지를 스스로 환기하는 거죠. 다시 말해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돌파구를 찾는 방법은 ‘글에서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떠올려보라‘는 것입니다. 글쓰기의 주제와 방향을 확인하고 나면 필요한 자료를 찾는다든가, 자기 의견과 생각의 근거를 들여다본다든가, 비슷한 주제로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어본다든가 하는 식으로 품을 들이는 겁니다. - P124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쓰다가 막힌 부분이 안 풀릴 때가있어요. 이럴 때 저는 글을 묵혀둡니다. ‘방치한다‘가 아니라
‘묵혀둔다‘입니다. 한글 파일은 닫아도 생각은 열어둬야죠. 제가 애용하는 방법이기도 해요. - P125

타인의 일을 쉽게 말하는 모습에서 일상 언어의 폭력성을착안했고,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붕어빵과 성착취 이슈를 연관 지어 글을 완성했습니다. 이렇게 막힌 글을 내려놓고삶을 살다보면, 삶이 글의 길을 터주기도 합니다.


앞선 두 방법을 다 시도해봤는데 그래도 글을 쓰다가 막힌 - P127

다면 ‘포기‘라는 방법을 써보세요. 네? 어떻게 쓴 글인데 포기하냐고요? 아까워도 써볼 만합니다. 저도 컴퓨터 폴더에 미완성 원고 파일이 많아요. 쓰다가 막힌다는 것, 글의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생각이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죠. 익지 않은 땡감은 따도 먹지 못해요. 떫은 글이 됩니다. 글이란 ‘내가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버리는 것도 실력입니다.
일단 뭐든 써보세요. 글을 쓰다 막히면 상기하거나 묵혀두거나 포기한다는 세 가지 방법을 시도해보세요. 쓴 사람만이덜 익은 글도, 만숙의 열매처럼 뚝 떨어지는 잘 익은 글도 거둘수 있을 테니까요. - P128

저는 글을 쓰고 나서 처음부터끝까지 읽으며 주제라고 생각하는 핵심 문장에 밑줄을 그어요. 글 한 편에 밑줄을 여러 개긋기도 해요. ‘아,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해.‘ 이럴 땐 글의 메시지가 한 가지가 아닌 거예요. 한 번에 다 말하려고 하면 한 가지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주제별로 글을 독립시켜주세요. "곁길로 새지 않고 한 가지 주제로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물음에 답변이 됐을까요? ‘하나의 글에는 하나의 주제만 쓰자‘ 즉 ‘한 편의 글에는 하나의 메시지만담자‘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잘 기억하시고요. - P131

저도 글을 쓰다보면 이야기가 곁길로 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인생사가 그렇듯이 글쓰기에서도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여행하다가 잘못 들어선 길에서 색다른 풍경을 보게 되듯이, 한 편의 글이 옆길로 새서 다른 지점에 도달한다는 건 그 글을 쓰지 않았으면 몰랐을 자신의 생각을 만난다는 의미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글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는 사실에 좌절도 하지만
‘아, 나한테 이런 생각도 있었구나‘ 하는 발견의 기쁨도 느낍니다. 원래 글 하나, 곁가지 글 하나. 이렇게 글감을 자꾸자꾸 만들어둡니다. 이러다보면 글 부자가 되겠지요.
작가에게 쓸거리가 많은 건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마시고요, 곁길로 새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오늘도 글 한 편 쓰시길 바랍니다. - P133

글쓰기는 시작도 어렵지만 마무리도 만만치 않게 어려워요.
무언가 한가득 써놓았는데 그 이야기가 점점 가지를 치고 양도 늘어나서 감당이 안 된 경험이 다들 있으실 거예요. ‘이 글을 왜 쓰려고 했지?‘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 글이 애초의의도에서 멀어지고 수습이 안 돼서 당황했던 적이 저도 많습니다. 이럴 때 끈기를 갖고 ‘생각을 생각하기‘라는 방법을 써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의 근원을 파헤치는 거죠.
글을 마무리하는 방법은 사실 글의 구조나 개요 짜기와 관련이 깊죠. 사람에 따라서는 글의 구조와 개요를 짜놓고 정해둔 결론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도 해요. 한편 저는 ‘이글이 어떻게 끝날지 알지 못한다‘라는 입장을 지닌 채 결론을열어놓고 쓰죠. 결론을 모른다는 점에서 막막하지만, 그렇기에 글을 쓰면서 나도 몰랐던 생각과 의외의 문장을 만나는 짜릿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에게 글쓰기의 기쁨이란 곧 발견의 기쁨입니다. - P134

가령, 《다가오는 말들》에 <울더라도 정확하게 말하기>라는글이 있습니다. 제가 강연장에 선 몇몇 경험을 토대로 쓴 글이에요. 한번은 서울에 있는 한 작은 마을공동체에 초대받아 강연을 하러 갔는데요. 강연 중 한 남성 청중이 제게 한 어떤 말에 모욕감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원래도 잘 울어요. 잘 우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 사회엔 안 좋은편견이 있죠. ‘감정적인 사람이다‘ ‘이성적이지 못하다‘와 같이요. 세상은 특히 공적인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단호한사람을 높이 쳐주죠. 저도 그런 잣대로 저를 판단했고, 우는 저자신을 미성숙하다며 부끄러워했었어요. 강연하다가 분에 못이겨 또 울고 마는 제 자신이 창피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상한 거예요. ‘눈물이 왜? 잘 우는 게 왜 안 좋지? 말이 되지 못해 흐르는 게 눈물인데, 눈물도 언어 아닌가?‘ - P135

잘 우는 사람은 눈물로 타인을 억압하진 않잖아요. 못 울고안 우는 사람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보면나쁜 일도 많이 저지르더라고요. 감정적인 게 나쁘고 이성적인 게 좋다고 이분법으로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거 같았어요. 이럴 때 생각의 희열을 느끼죠. 상식을 뒤집어보면 꼭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내 삶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거죠.
강연장에서 눈물을 흘리고 혼란스러워하면서 ‘눈물이란 무엇일까?‘라는 문제의식을 떠올렸을 때 마침 리베카 솔닛의 책《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를 읽었어요. 책에도 솔 - P135

닛이 여성이기 때문에 강연장에서 겪은 무례한 일이 사례로나와요. 읽고 굉장히 놀랐어요. ‘리베카 솔닛도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 ‘이건 젠더의 문제구나‘ ‘나만 겪는 일이 아니구나‘ 싶어서 그때의 이야기를 글에 빌려왔고 이런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내 나약함을 혐오하지 않기 위해 목표를 바꾼다. 울지 않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울더라도 정확하게 말하는 것." 이렇게 쓰고요. 마지막엔 솔닛의 문장으로 한 번 더 제 생각을 다지며 마무리했습니다.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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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은

살며 사랑하며 이야기의 힘을 믿고
오늘도 글을 쓰는 사람.
2012년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소설 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 사실은 이 말이듣고 싶었어」, 「여행이거나 사랑이거나 등 여러 책을 썼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윤정은의 책길을 걷다‘를 진행하고 있다.

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다시 봄이오는 마을이 있다. 축구공만한 지구본을 돌리고돌리다 보면먼지처럼 작은 마을 하나가 눈앞에 떠오른다. 이곳은 지구에 있지만 아무나 그 존재를 알 수는 없다. 신비로운 꽃과나무가 가득하고,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산다. 날개는 없지만 요정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곳은 언제나 꽃 같은 날들이 이어진다. 하늘은 시리게푸르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다. 먹을 것이 풍족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눈빛과 마음이 선한 이들이 모여 살기에, 그들은 ‘미움‘이나 ‘아픔‘ 혹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모른다. 날이 선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늘 평화롭다. - P9

이 마을에서는 세상에 빛이 되는 아름다운 능력을 가진이들이 사람들이 사는 곳마다 온기를 불어 넣으며 달이 뜨면 은은한 달빛 아래 춤을 추고, 해가 뜨면 따뜻하고 눈부신 웃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살을 에는 몸의 추위도, 어깨가 움츠러드는 마음의 추위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사는 한 남자의 마음에 뜨거운여름이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 P10

그동안 여자를 닮아 능력이 없는 줄 알았던 딸에게 뒤늦게 보이는 징후들이 걱정스러웠다. 사실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단순히 공감 능력이 좋거나 실천력이 강한 것일 거라 넘기곤 했다. 그런데 선한 마법을 쓸 줄 알도록 선택받았기에, 세상에 빛이 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꼭 넘어야만 하는 시련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고,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오래도록 찾아 헤매야 한다. 그렇지만 시련을 극복하면 능력을 완전하게 갖추고 빛이 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 삶은 존경받는아름다운 삶이지만 외롭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빛이 밝으면 어둠도 깊은 법이니까. 달의 이면처럼.
자신이 살던 도시에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아 도망치듯 뛰다 정신을 잃고 이 마을에 들어선 여자였다.  - P14

감았던 눈을 떴지만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말 그대로 폐허다. 사랑하는 이들이 나 때문에 휩쓸려간 자리에 홀로 남겨져 있다.


후회되는 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나쁜 일을 미리 알고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허무하게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질 순 없다. 눈을 감았다 뜬 것 뿐인데, 빛나던 세상이 암흑으로 가득하다.


이건 꿈이다.
분명 꿈이야. - P19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자신도 모르는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것처럼, 소녀 역시 절박함과 깊은 슬픔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본인의 능력을 발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순간의 힘을 빌려, 백만 번을 다시 태어나 세기를넘나들도록 스스로를 봉인했다.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 따윈 무시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지금보다 더 큰위험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선한 일에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경고도 무시한 채 온 세기에 걸쳐 가족을 찾아다녔다.
빨갛게 생기 가득한 양 볼에 늘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던 소녀는 수도 없이 다시 태어나고 세기와 세계를 넘나들며 웃음을 잃어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가족을 찾을 수만 있다.
면. 소녀는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 셀 수도없이 많은 일을하며 세상을 헤맸다. - P22

그러나 반복해서 다시 태어날수록 소녀의 검고 깊은 눈에는 슬픔만이 가득했고, 소녀는 울지도 웃지도 않는 무표정한 사람이 되어갔다. 지독하게 쓸쓸하고 공허한 눈빛으로 제대로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아 앙상하게 말라갔다.
헤어질 때의 외모를 그대로 간직해야 가족들이 자신을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얼굴이 변하지 않는 나이까지만 늙도록 했다. 어느 세기의 소녀는 이십 대였고, 어느 세기의소녀는 삼십 대였다. 몇 번은 사십 대로 산 적도 있었지만그 이상은 나이 들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아니 사실은 기억이 희미해져 자신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불안했다. 지치고 또 지치는 여정이었다. 야속한 시간이 마음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 P23

항상 슬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소녀가 좋아하는 행위도있었다. 소녀는 곁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소녀의 탁월한 공감 능력으로 감정이 전이돼 마음이 아팠고, 감정이 진정될 즈음 차를 내어주면 말하는 이가 천천히 미소를 짓곤했다.
그렇게 서로 편안해지는 순간의 공기가 좋았다. 슬프고우울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 소녀에겐 힘들지않았다. 사람들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기쁨의 순간들보다 힘든 순간들이 생에 널려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고, 그들이 털어놓는 속내가 소녀에게는 음악 소리와 같은
‘말소리‘로 들렸다. - P25

바다를 등지고 선 소녀 앞으로 바람이분다. 그리고 해가 진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숨이 멎을 것 같다. 온 힘을 다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지고 있다. 타오를 듯한 해가 아주 천천히 바다로 들어가고 있다. 지는 해가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산 아래 꼭대기 마을의 두 면은 바다를 품고 두 면은 도시를 품고 있다. 눈을 감고 숨을 아주 크게 들이쉰다. 물 냄새가 난다. 도시와 바다와 마을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소녀는 쓸쓸해진다. 문득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뭐야, 해 지는 거 왜 이렇게 예뻐. 세상에 예쁜 게 아직남아 있네"
보는 이라도 있는 양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소녀는 해지는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바람이 분다. 꽃 냄새가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소녀의 눈동자에도 노을이 물든다. - P28

해가 지자마자 어둠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해는 천천히 빛을 내며 지고 있었고, 보이지 않아도 남은 빛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렇다. 빛과 어둠은 양면이 아닌 한 면으로이어져 있다. 소녀는 찬찬히 어둠이 드리우는 광경을 바라본다. 깊은 어둠이라 해도 빛이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 완전한 어둠 속에 있다고 생각돼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빛이 비춘다.
그리고 밤이 서서히 내려앉는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해가 지듯 천천히 어둠은 밝음으로 이어져 달과 해가 같은 하늘에 공존한다. 낮의 달을 보지 못하는 건 낮의 해를 보려고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소녀는 가만히 무릎을 안고 웅크려 앉아 밤을 꼬박 샌다. 새벽이 오고 아침이 온다. 어둠이영원할 것 같아도 아침은 다시 온다. 살아 있는 한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건, 이 아침을 맞이하는 날들 아닐까. - P29

소멸되기 직전, 소녀가 주먹을 꽉 움켜쥔다. 그 순간, 깨진컵 조각들이 하얀 꽃잎이 되어 창문 밖 하늘로 날아간다. 구름 틈에 자리 잡은 꽃잎들이 소녀의 창문에 해가 환하게 비치도록 구름을 지운다. 새파란 하늘에 쨍한 햇살이내리쬐고 소녀가 입고 있던 옷은 빨간 동백이 새겨진 검은새틴 드레스로 삽시간에 바뀐다.
소녀가 눈을 뜨자, 가지런히 묶여 있던 머리가 스르르 풀린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이온 것만같은, 고요하고 스산한 폭풍전야. - P31

지난 시절에 누군가의 슬픔을 듣고 위로를 건넨 날이면지은은 집으로 돌아와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빨래를했다. 조물조물, 세제를 넣고 빨래를 주무르고 하얀 거품을바라봤다. 빨래를 물에 헹궈낼수록 거품과 함께 옷에 묻은먼지와 때들도 물에 흘러 내려갔다. 빨래가 끝나면 그들의슬픔과 아픔도 깨끗이 지워지길 바라며 빨랫감을 탈탈 털어 널었다. 빨래를 걸어두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감정의 찌꺼기들도 같이 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지은이 간절한 마음으로 빨래를 한다음 날이면, 어두웠던 이들의 표정은 말끔하게 펴 있었다.
구름이 걷힌 말끔한 하늘처럼. - P41

고요한 밤이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생각했던 대로 실내는 조명의 노란 빛으로 따뜻함이 감돈다. 나무 냄새를 맡으며 숨을 쉬자 서서히 마음의 귀가 열린다. 어떤 이들의말소리가 가까이 있다. 마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하던 지은이 바 테이블의 주방 안쪽으로 움직인다.
한동안 만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정성껏 위로 차를 우려내야겠다. 이 차를 마시면 사람들의 마음속작은 주름이펴지고 잠시나마 편안해진다. 오늘처럼 깊은 밤에 누군가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늘은 나 자신에게 더 필요할지도. - P42

눈을 감고 있는 재하를 보며 지은은 소리 나지 않게 나와 옥상 계단을 향해 올라가 남은 하루의 시간을 짐작한다.
시계를 보지 않는 지은은 빛과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한다.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니까.
"종일 밝게 웃는 사람들 보면 왠지 마음이 짠해 욱신거려. 종일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딨어. 웃음 뒤에 슬픔을 감추어야만 살 수 있으니까 웃는 거지. 마음에 얼룩으로 남은아픔을 지워야만 숨 쉴 수 있는 사람도 있어."
마냥 웃던 재하를 떠올리며 혼잣말을 하던 지은은 팔짱을 끼고 서서 재하처럼 두 눈을 감는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양팔을 벌려 날갯짓을 하듯 길게 뻗는다. 등에서 진짜날개가 돋아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처럼.
그런 지은의 뒷모습을 어둠 속에서 누군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 P57

"사랑의 얼룩을 지우고 싶어요."
지은이 나타나길 기다리던 연희가 떨리는 손으로 읽던책을 덮으며 지은을 보자마자 말한다. 백화점 1층 화장품코너에서 일하는 연희는 사람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 얼굴을 보자마자 느껴지는 인상으로 성격을 유추하고 관찰하는습관이 있다. 종일 사방이 막힌 답답한 공간에서 손님이 오길 기다리며 생긴 습관이다.
의심 많은 재하가 지은을 따라 올라간 뒤 마음 세탁소안의 공기는 점점 순해졌다. 공간의 공기를 채우는 건 물건이 아닌 사람의 기운이라고 생각하는 연희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공기에 왠지 모르게 지은이 단단한 사람 같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처음엔 이상한 말로 현혹시켜 물건을 파는 다단계회사인가싶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팔 만한 물건은 없어 보인다.
어쩌면 마음의 얼룩을 지워준다는 게 진실일지도 모른다.
아니, 진실이 아닐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진실이라고 믿고싶다. - P73

가뜩이나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는 은별을 보며 지은은평소보다 더욱 친절하게 자신을 소개한다.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며 스스로를 열어 보이는 이들은꽤나 용감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이 곪아 있다. 곪아 있는지도, 아픈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가장 아픈 상처 한두 개쯤은 치유해주어야 살 만해진다는 것도 모르면서 살아간다. 지은이 억겁의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위로 차를 건네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마음을 어루만져준 것만으로도 그들은 한결 편안하게자신의 아픔을 데리고 살아갔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잔뜩떨고 있는 저 아이도 치유가 필요한 순간임이 느껴진다. - P110

"정말요? 와∙∙∙ 잘됐네요."
수줍게 웃으며 은별은 신호등을 힘차게 건넌다. 인생은초록불인 것 같아도 노란불도 들어오고 빨간불도 들어온다. 가끔 빨간불에만 정체되어 있는 듯해도 어김없이 초록불이 된다. 초록불 다음엔 다시 빨간불. 우리가 할 수 있는건, 그저 길을 걷고 신호등이 나오면 불빛에 따라 움직이는일이다. 지금 내게 맞는 신호가 없다면 기다리고, 언젠가신호가 올 때 또 다시 걷는 일이 아닐까.
"그래서 말인데, 지금 프리랜서 MD들 정규직 채용 전환 공고가 다음 달에 날 거야. 팀장 추천제가 있어서, 우리팀은 은별 씨 추천하려고 하는데 어때?"
"저야 너무 좋죠. 추천 감사합니다. 팀장님. 열심히 해볼게요" - P122

혼자 자란 해인에게 언어는 음악이다. 쳇 베이커, 듀크웰링턴, 빌 에반스, 폴 데스몬드를 좋아한다.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해인은 자유로워진다. 대학에서미술사를 전공한 뒤 독립전시기획자로 일하며 사진을 찍고,
음악을 듣고, 말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해인은 자신의 삶에대체로 만족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이 때론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하지만. - P127

살아 있길 잘했다. 태어났으니, 살아 있으니, 살아지고숨을 쉬었다. 죽지 못해 살았다. 하지만 이제 살아 있으니살고 싶어지고 살고 싶어지니 사는 게 행복하다. 행복한 삶을 만드는 건 타인이 아닌 나의 마음가짐이라는 걸 연자는오랜 시간을 지나 와서야 깨닫는다.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려고 그토록 긴 불행의 터널을 지나왔는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한 모든 얼룩이 아름답다. 좋은 생각만 하기에도 인생이 짧음을 아는 오늘을 살고 있음이 좋다. 연자는문득 생각에서 빠져나와 주름진 옷을 정성스레 다리는 지은의 뒷모습을 보며 ‘정순 언니가 딸을 낳았으면 딱 저렇게예쁠 텐데…. 하고 생각한다. - P173

마음으로부터 불행이 지속되기도 한다. 마음은어쩌면 모든 끝과 시작의 열쇠인 것일까.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지은은 세탁소 문을 잠그고 택배박스를 들고 우리 분식으로 걷는다. 그러고 보니, 마음에대해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백만 번이나 태어나면서도 마음을 들여다보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살았다.
마음은 꽃과 비슷하다. 보살펴주고 햇빛을 쐬어주면지기도 하고 피기도 하고 짓무르기도 하고 냄새도 나고 벌레도 생기고, 그러다 잎도 다시 피어나고 다시 꽃도 피는존재.
아름답기도 슬프기도 한 양가적 이면이 마음인 걸까. 아름답기만 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아니, 과연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슬픔과 아픔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고 기쁨과 환희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은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슬픔과 아픔이 아름답고 기쁨과 환희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무너질까 봐, 숨기고 있는진실일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이리 오래 살아도 모르는 것투성이라니. - P178

행복은 내면의 빛이다. 손에 닿을 수 없는 높은 하늘이아니라 마음의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행복은 이미 우리 마음 안에 있다.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 이곳에 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살아갈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지금살고 있는 오늘에 집중해야 한다. 한 걸음만 오른쪽으로 걸어도 이미 과거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도 미래가 아닌 현재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느라 살아갈 미래에 눈이 멀어 미처 오늘을 보지 못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과거의 슬픔과 후회를 안고 살아가느라 그리 오랜 시간을 다시 태어나며 살아왔어도 정작 오늘 행복한 적이 없었다. 아니, 행복할 거 같으면 겁이 나서 도망쳤다. 행복하면 안될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원하는 게 정말 지은이과거에 얽매여 이토록 행복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었을까? - P225

어떤 어둠은 투명함보다 더 투명하다. 어떤 어둠은 밝음보다 맑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지은의 슬픔을 애도하기 위해 오늘은 달도 얼굴을 가리고, 쏟아질 듯 빛나는별도 잠시 빛나기를 멈춘다. 구름 한 점 없이 쨍하게 맑은밤이다.
어떤 밤의 이야기는 어떤 낮의 이야기보다 길다. 어떤이의 슬픔은 어떤 이의 배려로 어둠에 덮인다. 마음껏 슬퍼한 뒤 해가 뜨면 울음을 지운 웃음으로 살아가라고 밤이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해가 뜨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모르지만 일단 지금은 조용히 닫힌 밤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지나고 있다. 밤은 깊고, 서로를 염려하는 다정한 배려는더 깊다. - P228

평범한 삶의 행복을 느낄 때쯤이면 생을 끝냈다. 아직은행복할 수 없었다. 시공간을 넘나들어서라도 온 세상을 뒤져 사랑하는 이들을 찾으면 모든 괴로움을 끝내고 그들과함께 행복하고 싶었다. 그마음 하나로 살았다. 외로움이외로움인지도 모를만큼 익숙한 쓸쓸함으로 살아왔다. 아니, 익숙하다고 믿었다. 어쩌면 외로움이나 고독이 밀려와도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랑하는 이들을 찾지 못할 줄은 몰랐다. 산다는 일 자체가 농담 같다. 인생은 풀리지 않는 의문투성이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자신에 대한마법을 풀고 죽기로 결심한 뒤로, 전보다 자주 웃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밥을 먹었고, 바람의 숨결과 냄새를 느끼며 살았다. - P229

그렇다. 빨래도 햇살과 바람이 함께 불어야 바싹 마르는데, 마음에도 온기와 찬기가 그리고 기쁨과 슬픔이 함께 오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일어난 일은 받아들여야 한다. 돌릴 수 있다면 돌리고, 돌릴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오랜 시간 도망치듯 살았던 삶에 이제 발붙일 테다. 가끔은 빨랫줄에 널려 있는 저 빨래들처럼 흔들림에 몸을 맡겨볼 테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햇살이 맑으면 따뜻함을 즐길 테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흔들리는 나를 바라볼 테다. 부족하고 실수하고 방황하고흔들리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음의 얼룩을 제대로 흘려보내는 비법이 아닐까? - P243

어쩌면 꿈꾸는 일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은 굳이 마법을쓰지 않아도 우리 모두의 삶에서 가능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삶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는 힘은 실수하고 얼룩지더라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용기와 특권 같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 마법은 선택받은특별한 이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도 가질 수있는 능력이다. 모두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려고 지은이 세상에 온 것일까.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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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저만 그런 건 아니었나봅니다. 《회색 인간》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김동식 작가를 한 강연장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요. 책을 내기 전 김동식 작가는 낮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지냈고 밤에 글을 썼다고 해요. 한 인터넷 게시판에 연재한글이 인기를 끌어 책을 냈다고 합니다. 자신의 게시글에 달리는 여러 댓글에 기운을 얻어서, 피곤한데도 밤마다 글을 쓸 수있었다고 말했어요. 그때 받은 칭찬이 너무 좋았다고 해요. 이이야기를 듣고 또 한 번 느꼈죠. 우선은 내가 글을 써야 독자가생기겠지만, 읽어주는 사람, 즉 독자가 있으면 글을 쓰게 된다는 사실을요. 이렇게 남은 나를 쓰게 합니다.


마감도 나를 쓰게 하는 강력한 요인이죠.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저는 이 말의 반만 맞는 것 같아요.
아무리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어도 주제를 잘 모르거나 꼭 써야 한다는 절실함이 없으면 단 한 줄의 글조차 나오지 않으니까요. 다른 무엇보다 절실함이 글을 쓰게 하는 가장강력한 동기가 되는 것 같아요. - P34

절실함은 생존 본능에서 나옵니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절실함은 두 가지에서 비롯하죠.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힘, 배고픔에서 벗어나려는 힘. 고통스럽고 배고픈 거 너무 싫잖아요.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죠. 이것들로부터 제 글쓰기도 시작됐고요. 마음이 너무 괴롭고 생각이 엉켰을 때 글로 정리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해서 매일 썼습니다. 자유기고가로 일할땐 기한 안에 글을 납품하지 않으면 원고료를 못 받으니까, 원고료가 없으면 쌀독에 쌀을 채울 수 없으니까 글을 썼어요. 글쓰기의 기한, 즉 마감이라는 사회적 약속 그리고 그것을 지켰을 때 주어지는 원고료라는 보상이 글을 쓰게 했습니다. - P35

그런데 직업적 글쓰기가 아니면 마감도 없고 원고료도 없잖아요. 그래서 글쓰기 강의나 모임에 참석하는 등 강제 장치를 만들어두는 것도 계속 글을 쓰는 한 방법입니다. 저는 의지가 약해서 제 결심이나 다짐을 믿지 못해요. ‘매일 매일 꼬박꼬박 글을 쓸 거야‘ 하고 아무리 다짐해도 안 쓰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책임감은 강해서 관계의 장 속에 저를 두었을때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었고요. 자기 성향을 파악해서 계속글쓰기를 할 방법을 정하시면 됩니다. 글쓰기 모임의 동료들끼리 각자 자기 돈 10만 원을 내놓고 글을 안 쓰면 못 받고 쓰면 되찾아가는 페이백 방식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마감을 만들고 원고료 같은 보상과 격려를 받는 방식을 권해드립니다. - P35

지금까지는 제 경험에 근거해서 무엇이 저를 쓰게 하는지말씀드렸어요. 여러분도 ‘어떤 상황에서 글 쓰는 내가 가장 활성화되는가?‘ 하고 스스로 돌이켜보세요. 자신의 성향에 맞는글쓰기 환경을 설계하고 계속 쓸 동력을 만들어보시고요. ‘나를 쓰게 하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글 한 편 써보시는 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 P36

1. 늘 하던 익숙한 글쓰기를 그만둔다.
2. 쉬면서 쓸데없는 일을 하거나 나를 가만히 둔다.
3. 익숙하지 않은 분야의 글쓰기를 시도해본다.


영화 보고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늘 영화 리뷰를 쓰는 사람이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영화 리뷰도 쓰다보면 어느 순간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수 있죠. 그럼 자기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쓰거나 글쓰기 모임에 참석하는 등 일상의변화를 시도해보는 겁니다. 내 경험과 관계가 바뀌어야 삶의자리가 바뀌고 보이는 것이 달라지겠죠. 관점을 바꿀 수 있는조건과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보세요 - P40

그리고 몇 년을 써도 글이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을 때는 실력을 가늠하는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 점검해보세요. 글 실력이 왜 안 늘지?‘ 싶다면 ‘내 채점표는 무엇일까?‘ 하고 고민해보라는 뜻입니다. 글을 보는 자기 기준, 잣대가 무엇인지 스스로 말해보세요. 저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관점과 해석에 둡니다. 사물과 현상을 통찰하는 힘이 있는 글인지를 중시해요.
글이 나아지고 있는지 돌아보는 주기도 고려해야겠죠. 저는 넉넉하게 잡아서 10년이에요. 한 주나 한 달 혹은 1년 간격으로 글이 좋아졌다, 안 좋아졌다 할 수 있겠지만요. 어떻게 해도 시간은 가죠. 글을 쓴 10년과 안 쓴 10년은 분명 다를 거라 - P40

고 생각합니다. ‘잘 쓰고 있나?‘ ‘왜 안 늘지?‘ ‘이게 맞나?‘ 이런고민, 주저함, 망설임, 회의감이 글을 글답게, 삶을 삶답게 해줄 겁니다. 이런 뒤척임 없이 10년을 보낸 모습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말투와 다른 표정을 갖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재밌슬럼프, 봄바람처럼 그것이 삶에 찾아오거들랑 잠식당하지마시고 글쓰기 인생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서 슬렁슬렁 잘타고 넘으시길 바랍니다. - P41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잡풀처럼 돋아나는 자기 의심과싸워야 하는 일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쓰기 전에는 ‘과연 쓸수 있을까?‘, 쓰는 동안에는 ‘이렇게 써도 되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닌가?‘, 쓰고 나서는 ‘이 글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내용일까?‘ 등등……. 생각의 잔물결이 밀려오고 밀려가죠. 이런 일을 반복하다가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합니다. ‘나한테 과연 글쓰기 재능이 있는 걸까? 재능이 없으면 글쓰기를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닌가? 이 물음은 어떤 면에선 ‘의미도 없는데 살아서뭐 하느냐‘는 물음과 같은 무게로 제게 다가오거든요. 답하기에 아주 조심스럽죠. 그래서 이렇다 저렇다 하며 일반론을 말하기보다 제 경우를 참조해 답해보려 합니다. - P42

개인 경험에 근거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대단한 재능이 없어도 글쓰기를 시작할 수는 있지 않을까.‘ 글쓰기에 대한 회의감은 ‘재미‘나 ‘의미‘라는 가치 중심적인 단어보다 ‘재능‘이라는 자기 개발의 뜻을 지닌 단어를 글쓰기에 붙일 때 드는 것 같아요.
만약 제가 글쓰기를 그만둔다면 재능 없음을 비관해서가아니라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없음을 비관해서일 거예요. 더나은 세상에 대한 상상력, 인간에 대한 호기심, 살아가는 일에대한 애틋함 같은 게 없어진다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글을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능이 없으면 글쓰기를 그만두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고 싶어요.

왜 글을 쓰려고 하는가?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재능인가? - P43

우리 사회 가장자리에 있는 삶을 날카롭고 따뜻하게 그려내는 분이죠. 김중미 작가가 쓴 에세이 《존재, 감》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김중미 작가가 강연에서 청소년을 만날 때마다 늘 "어떻게 작가가 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데 그때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저는 어떻게 작가가 되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사람의 삶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정말 공감했습니다. 사람의 삶을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중미 작가의 말을 저는 이렇게이해했어요. 사람의 삶을 잘 이해하려는 노력이 글을 쓰게 한다, 즉 그 노력이 우리를 작가로 만들고 작가로 살게 한다고요. - P44

서.
글쓰기의 출발은 소박하죠. 기억 작업이고 자기 구원입니다. 저도 저 살자고 썼던 게 크고요. ‘아, 사는 게 참 힘들구나.
사람은 고통스러우면 안 되는 존재인데 이렇게 고통을 받으며사는구나.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는 법, 고통이 조금씩 견딜 만해지는 과정을 기록하면 이걸 읽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지.‘ 이 정도의 생각으로 글쓰기를 시작해본 겁니다.
글 쓰는 일은 지겹고 괴로운 반복 노동입니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기보다 찬란한 계절에 내가 꽃놀이나 단풍놀이를 안 가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 책상 앞에 앉아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와 씨름할 수 있는지, 그 고통을 감내할 만한 동력이있는지, 나는 왜 쓰고자 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쓰기의 말들》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쓰는 고통이 크면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 글 쓸 때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자기 의심은 오직 쓰는 행위에 몰입할 때만 자취를 감춥니다. - P45

사실 저도 ‘나 같은 사람이 해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있어요. 매달 칼럼을 쓰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 말고 다른사람이 쓰면 세상에 더 필요하고 재미있고 질 좋은 글을 쓸 텐데 내가 괜히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쓸 자신이 없어지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져요. 주로 글을 쓰기 싫을 때, 못 쓸까 봐 불안할 때 이런 생각이고개를 듭니다. 단행본 쓸 때도 그래요. 《알지 못하는 아이의죽음》이나 《있지만 없는 아이들》 같은 르포집을 쓰면서는 한숨으로 책상이 내려앉을 판이었습니다. 깜냥도 안 되는 내가왜 한다고 했을까, 노동 문제 · 청소년 문제·이주민 문제에 더해박한 사람, 더 오래 활동한 사람이 써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요. 원고 집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고, 책이 안 나올 것 같은두려움도 증폭됐어요. 이런 초조함과 불안감은 글을 써야 사라집니다. - P49

저도 온갖 상념이엄습할 때마다 나에게 책을 써볼 기회가 생겼다면 두려워도도망치지 말고 해보는 게 지금의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일단 막 쓰자, 대충 쓰자‘라며 스스로 달래고 긴장을 풀어주면서 썼어요. 완벽한 사람이 쓰는 게 아니라 쓰는 사람이완벽해지려는 노력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봅니다. - P50

그럴 때 말씀드려요. 글쓰기 수업은 ‘포트락 파티‘라고요.
각자 음식 한 가지씩 챙겨서 모이듯이 우리는 자기 글을 갖고모이는 겁니다. 그런 자리에서 나만 음식을 안 가져오고 남들이 가져온 음식만 먹으면 미안하죠. 글쓰기 과제를 내지 않는건, 나는 빈손이지만 남의 글만 읽겠다는 태도나 다름없습니다. 바쁘고 아프고 힘들고 등등의 사정이 있다면 전에 장 봐놓은 가지 하나, 귤 한 봉지라도 들고 온다는 마음으로 미완의 토막글이라도 내보자고요. 특히 제가 꾸리는 글쓰기 수업은 강사가 일방적으로 팁을 제공하는 강의가 아니라 함께 참여하고활동하는 워크숍 형식의 수업이기에, 서로의 삶과 삶에서 우려낸 글을 내주어야만 그 자리에서 배움이 일어납니다. - P55

이런 모습을 보면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 같아요. 다른사람이 과제를 안 하면 나도 안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과제를 하면 자기도 하게 돼요. 주변에 영향을 받는 것만이아니라 나도 영향을 끼치죠. 내 주변까지 나인 거예요.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면 소인배, ‘내 한 몸만 내가 아니다‘라고생각하면 대인배입니다.
또 한 가지, 글쓰기는 해방입니다. 나를 풀어줘야 합니다.
스무 명이 배우는 글쓰기 수업에 와서 눈치 보고, 자기 검열하고, 자기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불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을 어떻게 낼 수 있을까요? 내가 - P55

나를 풀어주고 자아를 해체해야 또 다른 내가 됩니다. 수업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학인들이 과제랑 후기를 전보다 더많이들 써내고 서로 게시물에 댓글도 달면서 분위기가 훈훈해졌어요. 저는 잔소리 회의론자인데 때로는 잔소리가 효과가있구나 싶기도 해요.


한편, 셀프 글쓰기 수업도 있습니다. 저는 대면 수업이 아닌글쓰기 책으로 하는 비대면 수업을 무척 많이 받았어요. 글쓰기 관련 책을 많이 읽었거든요. 잘 쓰고 있는지 헷갈릴 때마다,
더 나은 글을 쓰고 싶어서 조급해질 때마다, 유명 작가들의 글쓰기 에세이를 찾아봤어요. 글쓰기 책이라는 수업에는 장점이많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수들에게 배울 수 있다는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는 점, 나만의 속도로 책장 앞뒤를 오가며 반복하고 건너뛰면서 배움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 등등...………. - P56

글쓰기도 그래요. ‘책 리뷰를 쓰겠다‘ ‘매체에 기고를 하겠다‘ 등 글을 한 편씩 완성하는 과정에서 글쓰기책을 읽어본다면 글 쓰다가 막히는 부분에 대한 해법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 소설가 앨리스 매티슨이 쓴 《연과 실》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내가 아는 모든 작가들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을 수업이나 비공식적인 모임, 서평, 책 등에서 배웠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을 할지, 또는 생각 자체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다.


"다른 사람"이 글쓰기 수업의 동료일 수도 있고, 책의 저자일 수도 있고, ‘글쓰기 상담소의 저일 수도 있겠죠. 쓰겠다고마음먹으면 온 세상이 다 교실이고 만인이 다 스승입니다. - P57

저도 글쓰기가 경쟁이 아니고 나눔이라서 여럿이 함께 10년이상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가 경쟁이었으면 저는 진즉에 병들었을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요. 글쓰기 수업 초반에 위축되고 조급해하는 분에게 읽어주는 문장이 있어요.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한 말입니다.


나이 든 작가는 젊은 작가에게 어떤 충고를 해야 할까? 그는 자기가 몇 년 전 들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만한 것들만 이야기해줄 수 있을 뿐이다. 기죽지 마라! 곁눈질을 하거나 당신을 다른 동 - P61

료들과 비교하지 마라! 글쓰기는 경주가 아니다. 아무도 진짜로 이기지 못한다. 만족은 노력에서 나오고, 그 결과 보상이 따른다 해도 그런 보상은 아주 드물게 오는 법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정말 좋지 않나요? 이 아름다운 충고를 제 언어로 정리하면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네요.


잘 쓴 글을 보고 기죽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니 기죽는다는 사실엔 기죽지 말고,
내가 기죽었다는 사실을 글로 써보자.
그게 글 쓰는 사람의 임무다.


오늘도 글감을 여러분 곁에 살며시 놓고 갑니다. - P62

공적 글쓰기에 반대편에는 사적 글쓰기가 있고 대표적으로일기가 있죠. 일기에도 자기 생각과 감정을 쓸 테니까 언어의표현 능력을 기른다는 측면에서는 글쓰기에 도움이 되겠지만결국 일기는 나만 보고 나만 이해하는 글이잖아요. 언어적 소통 능력을 향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적 글쓰기를 권해드려요. 나 아닌 타인이 본다는 점에서 SNS나 블로그, 브런치, 온라인 카페 게시판, 지면 같은 데 쓰는 게 다공적 글쓰기죠. 그리고 오프라인 글쓰기 수업, 글쓰기 모임 등에 참여해 쓸 수도 있고요. - P63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어떤 평가라도 받아들여야하지만 동시에 경계해야 할 것도 있거든요. 학교의 창작 수업이나 등단 준비반, 언론사 취업 준비반 같은 곳에서 자기 글을내보였다가 너무 호된 평가를 받아서 글쓰기가 두렵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들 하세요. 들었던 강렬한 일화가 떠오릅니다. 한교수가 책상 위에 있는 볼펜을 탁 쳐서 떨어뜨린 다음에 "이게니 글이야. 가치도 없어"라고 했대요. 또 교수에게서 "네 글은똥이야"라는 말을 들었다는 분의 이야기도 접했습니다. 끔찍합니다. 글에 대한 의견을 왜 꼭 상대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모욕이 정말로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지, 저는 회의적입니다. 만약에 제가 저런 말을 들으면 자극받아서 더 잘 써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기보다는 반발심만 생길 것 같거든요.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책이든 기사든,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그저 말로 하는 것보다 언어를 조심스럽게 고르고 표현 - P66

을 다듬는 일인데, 거칠고 뒤틀린 언사로 글쓰기를 배운다면모순이 아닐까 싶어요. 엄연히 언어폭력이기도 하고요. 김수영 시인의 시에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 라는 구절이 있는데요. 글쓰기를 배우는 과정도 사려 깊어야죠.
물론 글쓰기 합평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덕담을 나누는 자리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어떤 모욕을 당해도 결과적으로 합격만 하면 된다거나 책만 내면 다 되는, 성공의 지름길을찾아가는 자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합평을 통해서 남이 써낸 글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방법 그리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 자기 의견을 전달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이런 방법을 배우고 잘 해내는 것은 글을 잘 쓰는 방법과 다르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관계라도 가까워지면 그만큼 서로를 다치게도 합니다. 흠을 내지 않는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요.
말들이 오가는 합평에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시고요. 사람이 쉽게 안 바뀌듯이 글도 쉽게안 바뀌거든요. 쉽게 바뀐 건 금방 원 상태로 돌아오고요. 그러니까 기분 전환하시고 힘을 비축해서 다시 글을 쓰시길 바랍니다. 아까 합평 후에 눈물을 흘렸다는 학인이 쓴 후기의 한 구절을 공유해볼게요. - P67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가 리베카 솔닛도 걷기를 좋아했습니다. 사회적 참사와 재난 현장을 돌면서 글을 쓰는 환경운동가이자 르포 작가인 그는 인문 에세이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썼을 정도로 걷기 예찬자죠.
글을 엉덩이로 쓴다지만 엉덩이로만 쓸 수 없는 게 글입니다. 앉아 있다고 해서 글이 나오진 않지만, 앉아 있는 시간을 배신하진 않는 것 또한 글이고요. 그러니 옷을 성심껏 골라서 갖다놓고, 발품을 팔고, 매일 문을 열어놓는 마음으로 여러분도끈기 있게 앉아서 솟아나는 생각을 곱씹고 언어화해보세요. 손 - P71

님 한명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 문을 여는 옷 가게 주인처럼 글이 안 써져도 또 책상 앞에 앉는 거죠. 특히 개점 초기 1년은 매일 문을 열 듯이, 글쓰기를 시작했다면 적어도 1년은 산책하며 사유하고 앉아서 쓰는 습관을 들이길 권해드리고싶습니다.
오늘의 질문, "글은 엉덩이로 쓰는 거라는데, 맞나요?"에 대해 저는 니체의 명언으로 답변해보겠습니다.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 - P72

정확히 보는 것, 저도 글을 쓰며 중시하는 점입니다. 제 사생활이 많이 담긴 책 《올드걸의 시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의 독자들한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작가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솔직하게 글을 쓰나요?"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글을 쓸 때 솔직하게 쓰겠다고 마음먹진 않았거든요. 다만 정확하게 쓰려고는 노력했어요.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 말이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는지 자문자답하면서 본 것, 들은 것, 한 것을 최대한 빠짐없이 재현해보려고 노력하며 글을 썼죠. 그렇게 쓴 글을 독자는솔직하다고 느꼈고요.
솔직하고 정직하게 글을 쓰자는 말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있을 것 같아요. ‘정확하게 쓰자. 정확하지 않으면 나만의 고유함을 지닌 글이 되기 어렵고, 고유성이 없는 글은 어디선가 - P75

솔직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솔직함 그 자체가 남는 게 아니라 솔직함을 통과한 메시지가 남습니다. 무엇을 위한 솔직함이고 정직함인지 글을 쓰는 동안 놓치지 말아야겠죠. 친족성폭력 피해자가 자기 경험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쓴 글은 다른 피해자에게 용기를 줍니다. 피해자가 자기 잘못이 아니란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처한 현실을 바로 보게 하고 고통에서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한 번도 이야기되지 않은 집안일, 즉 봉인된 가족사의 말하기는 왜 중요할까요? 여성이나약자의 희생과 피해로 굴러가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안전한 관계다‘ ‘믿을 것은 가족뿐이다‘
라는 관습적인 말과 믿음으로 유지되는 가족 신화를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쓴 글은 삶의 진실을 견인합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하고 정직한 글이 좋은 글인가요?"라는 물음에 이런 표현으로 되묻고 싶어요. - P76

자기 경험을 쓴다는 것은 아프기만 한 것 같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하는 일인데, 자기가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쓰지 못하고어떤 시늉과 가식으로 문장을 채워서 가공한다면, 우리가 힘겹게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나에게 힘을 준 글이 남에게도 힘을 준다는 것, 용기도 전염된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저하던 ‘그것‘을 꼭 한번 써보시길 바랍니다. - P77

=인 행예전에 성폭력 피해자를 인터뷰했을 때 들은 말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피해 사실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느냐는 제 물음에 그는 성폭력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자기는 무관한 사람인것처럼 입 다물고 있기 싫었다고 말했죠. 자기 잘못도 아닌데위축되고 당황하고 그 기억에 끌려다니는 게 괴롭다는 거였어요. 고통을 글로 쓰고 공적인 장에 내놓으면 조금은 담담해질수 있을 테고, 그런 점에서 글쓰기가 글쓴이에게도 치유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일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서사의 편집권을 가짐으로써 그 일을 다스릴 수있게 되죠.
고통을 글로 쓰면 고통스럽던 경험이 사회의 자산이 되기도 합니다. 내 고통이 이 사회에서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위안이 되는 것 같습니다. - P81

《여섯 개의 폭력》 서문을 쓰며 류은숙 인권활동가의 말을인용했습니다. "고통을 말하는 이유는 고통의 전시장을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얘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고통 없이 살 수 없다면 글쓰기 없이도 살 수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글쓰기의 최전선》에도 썼지만 제게 글쓰기란 ‘고통의글쓰기예요. 글쓰기로 고통을 씻겨내고 극복하는 게 아니라,
내 고통을 글로 공유함으로써 타인의 고통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성장과 치유가 됩니다. 고통을 글로 풀어내는 일이 간단치않지만 시간을 낭비할 용기를 갖고 책상 앞에 앉아보시길 바랍니다. - P82

지만 굴하지 않고 썼습니다. 남한텐 시시해도 저한텐 절박한문제였으니까요. 그랬더니 저처럼 밥하는 일로 힘들고 고통받는 분들이 우르르 나타나서 공감했다며 같이 눈물 흘려주는독자가 되었습니다.
일찍이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도 말씀했습니다. "자기 내부의 불씨를 살라야지요. (...) 제 눈에 보여야 하고 마음속에 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라고요. 마음속에는 누구나 글감을 품고 있으며 고상한 글감, 시시한 글감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뭐라도 좋아요. 글감에 위계를 두지 않고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쓰면 그것이 좋은 글감입니다. 내가 내 삶을 풀어가는데 도움을 준 글이라면 다른 사람의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요.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 P94

제 글쓰기의 첫 공정은 자료 조사입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세상에 꺼내놓는 일이 글쓰기잖아요. 생각이든, 정보든, 느낌이든, 지혜든, 무엇이든지요. 가진 것이 없으면 내줄 것도 없겠지요. 반대로 자기가 많이 알고, 오래 붙들던 주제라면 그것에 관해 주제 장악력이 있겠고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도있듯이 알아야 씁니다. 그리고 글로 써봐야 내가 얼마나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도 드러나고요.
저한테 "축구에 대해서 글 써라." 하면 못 쓰지요. 축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누군가 제게 "블랙핑크에 대해서써라." 하면 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멤버들의 얼굴과 이름을 알고, 다큐멘터리를 봤고, 음악을 좋아하고, 호감이 있으니까요. 의욕적으로 인터뷰 기사도 찾아 읽고 팬카페도 들어가보는 식으로 쓸 준비를 하겠지요. 그다음에 "책 읽기에 대해서 써라."하면 이전 주제보단 더 수월하게 쓸 수 있습니다. 매일 보는 게 책이니까요. 잘 아는 주제로 글을 쓰면 자신감이 차오르진 않더라도 막막함은 덜해요. 자료 찾기는 자 - P99

신감을 ‘셀프‘로 충전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기고가로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만드는 간행물에 실리는 글을 쓸 때, 먼저 간행물의 기획자가 정한 주제를 받았습니다. "가야금 명인을 인터뷰해주세요." "연말정산에 대해 써보면 좋겠어요." "올해가 흰 소의 해니까 흰 소에 대해 써주세요." "요새 핫한 비건 식당이 많다는데, 망원동의 비건 식당 탐방기를 써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글 청탁을 받으면 글을 써서 납품했어요. 5년 정도 이런 일을 하다보니 잘 모르는 주제를 두고도 기한 내 글을 써내는 순발력이 생겼습니다. 습자지처럼 넓고 얇은 지식만 있어도 꾀부리지 않고 자료를 열심히찾으면 웬만한 글을 쓸 수 있겠다, 글이란 것은 어떤 사실을 토대로 필자가 재구성하는 일이다, 감각적인 글발을 발휘하는게 아니라 탄탄한 자료로 내실 있게 글을 써야 한다는 감을 잡았죠. - P100

등록 이주노동자, 즉 비자 기한이 만료되어 국내 체류자격을상실한 이주노동자의 자식을 말해요. 어머니, 아버지가 미등록 상태라서 아이도 미등록 이주아동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미등록 이주아동이 유엔인권아동권리협약에 의해서 고등학생 때까지는 국내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현실은외국인등록증이 없어서 학교 홈페이지 가입, 핸드폰 구입, 의료보험 가입, 다 불가능합니다. 교육받을 권리는 있고 살아갈권리는 없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불법체류 단속에 걸리면강제로 출국해야 합니다.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왔거나,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말을 쓰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아이들이랑 놀면서 한국 학교를 다녔는데 있지만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아이들. 성장기 내내 투명 인간으로 불안한 생활을 하고, 성인이 되면 한국 밖으로 추방당하니까 삶이 불안정해요. 미래를 설계할 수도 없습니다. - P101

이 모든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는 이 아이들의 존재가 드러나야 한다. 책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써내자‘라는 마음으로 집필을 결정했습니다. 계약서를 쓰고 집필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책 구매죠. 관련된 책을 검색해보고 열 권가량 구매했습니다. 그리고는 읽어야죠. 관련 단체에서 발간한 자료집도 전달받아서읽고요. 해당 이슈를 다룬 신문 기사도 스크랩해두고요.  - P101

자료 찾기 작업은 참 번거롭습니다. 체력과 시간을 많이 투여하니까요. 책 한 권을 읽기만 해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다읽은 책 내용을 일일이 정리하려면 손가락도 아픕니다. 그래도 이 과정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 글쓰기의 필수 공정이라고생각하면서 중단 없이 해냅니다. 김밥을 만들 때 장을 보고 시금치에 묻은 흙을 털어 씻고, 당근을 깎아서 채치는 등의 손질을 안 할 수 없잖아요. 마찬가지예요.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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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이미 나


제11회 서울레코드페어에서 음반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산울림 3집 리마스터링 앨범을 보았다. 연두색 바탕에 거친 붓질로그린 사람의 얼굴이 있고 "내 마음 / 그대는 이미 나"라고 써 있었다. <그대는 이미 나>는 장장 18분 38초에 달하는 대곡으로1978년에 나왔다. 아는 노래였지만 그날따라 엘피판에 새겨진글자가 낯선 시구처럼 다가왔다.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화두가 아닌가. ‘내 마음‘을 알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찾아서 인간은 평생을 헤맨다. ‘그대는 이미 나‘라고 할 만한 존재만 있어도 삶이 이토록고되고 외롭지 않으리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 P7

음반을 뒤집어보니 뒷면에 있는 "아무 말 안 해도 그대는 이미 나"
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타인과의 합일에 도달한 긍지의 말.
어쩐지 순정 가득한 가사가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 언어의찬미자인 나는 잡은 순간 내려놓지 못한 그 음반을, 턴테이블도 없으면서 고이 집으로 모셔왔다.
언어는 무의식을 일깨운다. 그대는 이미 나. 이것의 결핍 혹은 추구가 나를 쓰게 한 동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버지니아울프의 말대로 산다는 것은 힘든 사업이다. 고통과 상실은 우리를 피해가지 않고 혼자 남은 밤은 길다. 내 슬픔을 그대가 알 - P7

아주기를 바라다가 제풀에 지치고, 그걸 말 안 하면 모르나 하고 서러워하다가, 말해도 모르는데 말 안 하면 더 모른다는 깨우침을 얻고서,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내 마음 나부터 알아주자는 데 이른 어른스러운 해결책이 내겐 글쓰기다. 나는진격의 독학자처럼 책을 쌓아놓고 줄기차게 읽고 썼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 형태는 없고 압력만 있는 슬픔을 나의 언어로 번역하여 실체화하는 작업이 없었다면 크고작은 생의 파고를 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언어를 고르고 쓰는 동안 나는 이미 충분한 나의 그대가 되어주었으니까. - P8

이미 두 권이나 썼는데 글쓰기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을 터놓았을때 나의 친구는 ‘노 프라블럼‘을 외치며 다정을 다해 이렇게말했다.
"<글쓰기의 최전선》은 《수학의 정석》같이 기본 원리를 일러주는 책이고, 《쓰기의 말들》은 사전처럼 옆에 두고 필요할때마다 찾아보는 책이고,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는 자습서같은 책이에요. 그사이 은유도 달라졌죠. 다른 은유가 쓴 다른책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 P11

낙타의 언어에서 사자의 언어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정신의 성장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 세 단계로 구분했다. 낙타는 의심없이 주어진 짐을 지고 가는 수동의 정신을 사자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명령을 거부하고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선언하는 부정의 정신을, 어린아이는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기쁨, 긍정의 정신을 상징한다.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충격에 빠져 혼잣말을 했다. "낙타, 나네……" 모성 이데올로기를내면화한 채 온갖 역할의 짐을 떠안고 일상의 사막을 거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이때의 각성으로 글쓰기가 봇물 터졌다. 낙타에서 사자로 어서 변신하고픈 몸부림이 글을 낳았으니, 엄마가 된 사람도 자신을 위해 행동할 권리가 있는 자주적인 존재라는 외침이 나의 첫 산문집에 고스란히 담겼다. - P12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은 다른 측면이 보인다. 낙타같은 모성이 저도 모르게 해낸 것들이 있었다. 엄마로 사는 일은 나의 욕구를 접고 타인의 욕구를 우선에 두는 일이다. 아침에 눈뜨기 싫어도 아이를 밥 먹여서 등교시키려면 일어나야하는 식이다. 그건 나보다 남을 위하는 차원이라기보다 나와남이 분리되지 않는 기이한 상태에 가까웠다. ‘그것‘에 계속 매여 있다는 점에서 육아와 글쓰기는 비슷했다. 오랜 시간에 걸 - P12

쳐 체화된 이 자아의 이중 감각이 작가의 삶에 유효했다. 기본적으로 글쓰기는 협업이고 약속이다. 나에게 몰입하는 만큼나를 내려놓아야 독자가 있는 글이 된다. 또 내 입장과 동료의처지를 동시에 헤아려야 일이 돌아가고, 이번 글에서 다음 글로 넘어갈 수 있다. 오늘의 살림을 마무리해야 내일의 생활이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밥‘이라는 마감을 매일 해온 사람에겐 원고 마감을 지키는 일이 괴로워도 어렵지는 않았다. 퇴로없는 삶에 복종해온 탓이다. 인생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고, 엄마로 살면서 길러진 낙타의 근면함과 수동성이 나를 쓰는 자리에 데려다놓았고 나는 ‘그래도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 P13

글이 쓴 사람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을 보아왔다.
앞서 글쓰기 책을 쓸 때와는 달라진 나의 모습이 이 책에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가령, 예전엔 어떤 문장만 좋으면 무조건 열광하고 인용했다면 지금은 글쓴이의 사회적 좌표를 살펴본다.
백인인가, 남성인가, 비장애인인가, 이성애자인가, 서울 사람인가, 중년인가, 대졸자인가 등등. 철학서나 사회과학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손이 가는 대로 읽다보면 거의 백인 · 중년·이성애자. 남성 저자의 책이었고 그러한 사회문화적인 길들임에 별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내인생의 오빠들로 니체와 조지 오웰을꼽기도 했다. 그들의 말과 사고를 여전히 따르지만 이젠 그들의 - P13

저작에서 여성혐오적 맥락을 골라낼 수 있게 됐다.
내 인생에 만만찮게 멋진 언니들도 생겼다. 버지니아 울프와 리베카 솔닛과 오드리 로드와 박완서와 젊은 여성 작가들의 저작이 책꽂이의 명당을 차지하고 있다. 장애학과 동물권과 이주민에 관한 책을 꾸준히 들인다. 중심이 아닌 변방의 언어, 생명을 살게 하는 존엄의 언어, 이분법을 넘어선 사이의 언어가 내 삶에 들어오고 섞이면서 더욱 진중하게 말을 고르게되었으므로, 그렇지 못한 과거에 대한 반성문을 쓸 일도 늘어났다. 그래서 이번 책을 쓰면서는 혐오나 차별적 표현이 있지않은지, 인용구 원작자의 나이나 성별 등 균형을 고려했는지,
성급하고 편협하게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등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도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편견은 깨지기전까지 그것이 편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간 무비판적으로 써왔던 관습적 언어와 권력의 언어에 사자처럼 부정의 ‘아니오‘를 말할 힘과 나의 무지를 뉘우칠 용기가 조금은 생긴 것 같다. 페미니즘 연구자 베티 리어든이 표현한 대로 "가부장제가 여성에게서 빼앗을 수 없었던 하나의 힘, 즉 생명을 낳는 힘‘을 밑천 삼아 나는 낙타의 언어부터 출발해 사자의 언어 그리고 어린아이의 언어를 차근히 배워가는 중이다. - P14

타인의 구체적 삶과 닿아 있는 문장. 너무 날것이라서 아픈 문장. 아픔이 길이 되는 문장. 그가 글을 쓰면서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씩 떠올리고 묘사할 단어들을 찾느라 고심했을 시간을 상상해보았다. 글쓰기는 이런 일을 한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을 오래 들여다보도록 북돋운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을 만든다.
안 보이던 사람이 보이는 일은 일상의 작은 혁명이다. 배달노동자를 인터뷰한 책을 읽고 나면 건물 승강기에서 만난 배달 노동자를 이전과는 다른 눈길로 보게 된다. 어떤 대상을 표면적인 존재가 아닌 입체적인 인격으로 보는 감각이 시민의식이다. 너도 나도 쓰고 말하고 듣고 생의 경험을 교환하다보면 사적인 고민은 공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일상에 먼지처럼숨어 있는 억압의 기제와 해방의 잠재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혹자의 지적대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할 능력은 없지만 비난할 능력은 있는 사람만을 양산하는 척박한 현실에서, 책과글쓰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 이해의 심층에 도달할 수 있을까. - P16

연결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럴수만 있다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그걸 또 성실하게 세상에 전달하는 사람, 더 많은 고통과 기쁨에 연루된사람으로 살고 싶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싶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사랑받는 사람의 얼굴을 갖고 싶다(나만사랑하면 쓸쓸하므로 쌍방향을 원한다). 서로 바라보고 경청하는 일은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흐트러짐 없는 사랑의 행위지만 글을 쓸 때는 그런 포즈를 흉내라도 내게 된다. 사람을, 고통을,
말들을 오래 생각해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사랑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 듣는 사람, 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즉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 P17

"글을 못 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 쓴 글이 잘 쓴 글입니다."

나 또한 글쓰기 책을 섭렵하듯 읽었지만 글은 아는 대로 써지지 않았다. 여기서 얻은 교훈은 유용한 팁이 아니라 서두르지않고 제 몸으로 써나갈 때 자기만의 언어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잘 쓸 수도 없다. 목적에 갇히지 않아야 이것저것 시도하는 놀이가 되고 재밌어야 계속 쓴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집어 든 독자들이 ‘글쓰기의 유년기‘를 편안하고 충분하게 누렸으면 좋겠다. 유년기도 없이너무 일찍부터 수험생 모드로 진입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목표가 없으면 심심하니까 이런 정도를 권해드린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가족(없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되기 같은 것들. 인권활동가 미류의 표현대로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너무 큰 용기를 요구하지 않는 세상이어서 오길 바라며 세 번째 글쓰기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2023년 새해
은유 - P19

다만 혼자 글을 쓸 때 문제점도 있죠. 강제성이 없다보니 쓰다만 미완성 글이 쌓인다는 것과 독자의 검증이 없어서 자기만 이해하는 자족적인 글을 쓸 수도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같아요. 저는 혼자 쓰고 혼자 보는 글이라도 블로그에는 꼭 완성했다고 할 만한 글을 올렸어요. 그렇게 했을 때, 복잡한 생각을활자로 가지런히 정돈한 글을 보는 쾌감이 컸어요.


여러분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독자를 위해 쓴다는 마음으로 글을 완성해보세요. 여기서 ‘완성‘이란 나를 전혀 모르 - P29

는 다른 사람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남뿐만아니라 미래의 내가 봐도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 수 있도록 표현하려는 바를 촘촘하게 객관화해서 쓰는 겁니다. 그렇게 한 편씩 쓰다보면 마음이 흡족해지고자신감이 생겨서 또 쓰고 싶어져요.


그렇습니다. 혼자 글을 쓴다는 것은 독자 없이 쓰는 것이며 독자의 반응을 초월해서 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캐나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책 《글쓰기에 대하여》에 독자와 작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독자는 거대한 미지의 존재라고 말하면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소개하죠. - P30

나는 무명인이에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도 무명인인가요?
그러면 우리는 잘 어울리는군요!
말하지 마요! 그들이 떠들고 다닐 거예요, 알잖아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되는 건!
얼마나 눈에 띌까요, 개구리처럼
6월 내내, 흠모하는 늪지를 향해
자기 이름을 불러대는 것은! - P30

시구를 언급한 뒤 이렇게 부연합니다.


그러다 책이 성공하면 작가는 "유명인이 되고, 독자 집단은 그를흠모하는 "늪지"가 됩니다. 하지만 무명인에서 유명인으로 바뀌는데는 트라우마가 동반돼요. 무명인 작가가 투명성이란 망토를 벗어던지고 가시성이라는 망토를 걸치는 과정에서요. 매릴린 먼로가말했지요. "다른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무명인은 유명인이 될 수없다."


혼자 글쓰기를 다르게 말하면 세속적인 성공의 뒤안길에서쓴다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그 시간을 소외의 시간이 아니라내면을 다지는 풍요의 시기로 생각할 수 있어야 오래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빠른 성공이 아니라 건강한 성장이니까요. 혼자 쓰는 시간 동안 자기 탐색의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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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 잘못들을 치유하려면, 이는 매우 벅찬 과업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계급 지배‘만‘이 아니라 젠더와 성, 인종적·민족적·제국주의적 억압, 정치적 지배의 전반적인 불균형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창안해야 한다. 또한 경제·금융 위기‘만‘이 아니라 생태·사회-재생산·정치 위기를 낳는 경향들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위기 경향들의 제도적 기반을 해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1세기를 위한사회주의는 사전에 ‘정치‘ 영역이라고 정의된 범위 안에서 의사결정을 민주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관할범위를 광대하게 확장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 - P277

는 바로 그 정의定義와 구획, 바로 그 틀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규정할 경우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의 재검토는 매우 거대한 작업이 된다. 만약 그 작업을 완수한다면(엄청난 가정법이지만), 이는 사회적 투쟁을 통해 획득한 통찰이 강령적사고와 정치조직과 만나 시너지를 일으키는 식으로, 운동가와이론가를 아우르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결합한 결과일 것이다. 이 과정에 기여하길 바라며 나는 짤막한 성찰의 세 가지 보따리를 풀어놓고 싶다. 그 목적은 앞의 논의들이 어떻게 사회주의 사상의 몇 가지 고전적인 기본 주제에 새로운 빛을 비추는지보여주려는 데 있다. - P278

첫 번째는 제도적 경계선들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본 대로, 이 경계선들은 자본주의의 제도적 분리, 즉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 착취와 수탈의 분리,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인간 사회와 비인간 자연의 분리에서 발생한다. 이 분리들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위기의 장소가 되고, 투쟁의 판돈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따라서 사회주의자에게는 사회 각 영역들이 내적으로 어떻게 조직돼 있는가라는 물음 못지않게, 이 영역들이 과연 서로 분리되면서 동시에 연결돼 있는가, 그렇다면 그 방식은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중요하다. 사회주의자는 경제라는 우물 안조직에만 일면적으로 집중하기보다는(자연, 가족, 국가에 대해서도 - P278

마찬가지다), 경제를 존립할 수 있게 하는 배경조건들(사회적 재생산, 비인간 자연, 자본화되지 않은 형태의 부, 공적 권력과 경제가 맺는관계를 사고할 필요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제도화된 형태의 불의, 비합리성, 부자유를 극복하려 한다면, 생산과 재생산, 사회와 자연,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다시 상상해야만 한다.
요점은 사회주의자가 이 분할들을 단번에 청산하길 목표로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것‘의 구분을 폐지하려 한 소비에트의 재앙적인 시도야말로, 청산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경고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제도적 경계선들을 다시상상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최소한 우리의 목표는 이 경계선들을 다시 그음으로써, 자본주의가 ‘경제적‘인 것과 관련지은 긴급한 사안들을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 P279

마지막으로,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는 제도 설계 과정을 민주화해야 한다. 이는 사회적 영역들의 설계와 범위를 결정하는일을 정치적 문제로 만든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가우리를 위해 우리 등 뒤에서 결정해온 것을 이제는 우리가 집단적인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결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법률 이론가들이 ‘영역 재설정redomaining‘이라 부르는 것, 즉 사회의 무대들을 구획하고 각 무대 안에 무엇을 포함시킬지 결정하는 경계선의 재설정에 우리 스스로 참여해야 한다. 이 과정은 ‘메타정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정치 공간(일차적 정치)을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영역 재설정‘의 정치적 과정(이차적 정치)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어떤 사안을 정치적인 문제로 다룰 - P280

것인지, 어떤 정치적 무대에서 다룰 것인지를 스스로 정치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민주적이려면, 사회주의의 영역 재설정은정의로워야 한다. 이것의 의미 중 몇 가지는 이미 분명하다. 첫째, 의사결정은 적절히 포괄적이어야 하다. 즉 숙고하는 모든사안에 대해, 그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지배를 받는 모든 이들이의사결정에 참여할 자격을 지녀야 한다. 더하여, 참여의 조건이 평등해야 한다. 즉 비록 민주주의 안에서 개인 간에 어떤 구조적 우열이 계속 존재하더라도 참여의 권리와 기회는 동등해야 한다. - P281

그러나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지침이 되어야 할, 익숙하지 않은 생각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이것을 내는 만큼 받는pay as yougo‘ 원칙이라 칭하겠다. 온갖 형태의 무임승차와 이른바 원시 축적을 피하면서, 21세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참으로 냉혹하게 망쳐버린 저 모든 생산의 전제조건들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사회주의 사회는 생산과 재생산 과정에서 소모하는 모든 부를 보충하거나 수선 혹은 대체하는 과업을떠맡아야 한다.
첫째로, 사회주의 사회는 상품을 생산하는 활동뿐 아니라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사람들을 유지시켜주는 돌봄 활동 등)도 보충해야 한다. 더하여, ‘바깥에서‘ 즉 비인간 자연뿐 아니라 주변 - P281

부 민중과 사회로부터 취하는 모든 부를 대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다른 필요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기댈 언덕이 되는 정치적 역량과 공공재를 보충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유인책을 주며장려하는 동시에 책임을 회피하는 자본주의식 무임승차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단서 조항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병인 세대 간 불의를 극복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를 준수함으로써만 21세기를 위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다양한 위기 경향과 비합리성을 해체할 수 있다. - P282

잉여는 시간으로도 사고될 수 있다. 즉, 잉여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하고 우리가 소모한 것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활동 이후에도 남는 시간, 그러니까 자유시간이 될 수도 있었던 시간이라볼 수 있다. 자유시간을 향한 기대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적 자유의 모든 고전적 내용에서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미래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에서 자유시간이 엄습할 가능성은 그리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서 물려받을 엄청난 부도어음에 있다. 자본주의가 생산성을 자랑하며으스대기는 하지만, 그리고 마르크스도 이를 잉여를 생산하는실질적인 엔진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나는 이런 주장을 의심한다. - P283

즉, 기층에도 최상층에도 시장은 없다. 그러나 그 중간은 그럼어떨까? 사회주의자는 중간층을 다양한 가능성의 혼합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상상해야 한다. 시장이 협동조합, 커먼즈, 자주적결사체, 자주관리 프로젝트와 공존하며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말이다. 시장에 대한 많은 전통적 사회주의의 반대는 내가 여기에서 구상하는 맥락에서는 해소되거나 완화될 것이다. 시장의 작동이 사회적 잉여에 대한 사적 전유와 자본 축적의 역학에 의해 왜곡되지도, 이런 역학에 흡수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최상층과 기층이 사회화·탈상품화된다면, 중간층에서 시장이 맡는 기능과 역할도 변형될 것이다.  - P286

그 장점 중 하나는 통상적 사회주의관의 경제주의를 극복할가능성이다. 또 다른 장점은 전통적 노동운동의 중심 주제를 넘어선 광범위한 당면 쟁점들, 즉 사회적 재생산, 구조적 인종주의, 제국주의, 탈민주주의화, 지구온난화 같은 쟁점에 대해 사회주의가 시의성을 지님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세번째 장점은 제도적 경계선들, 사회적 잉여, 시장의 역할 같은 사회주의 사상의 몇 가지 고전적 기본 주제들에 새로운 빛을 비출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더없이 중요한 사실을드러냈길 바란다. 그것은, 21세기에도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추구할 값어치가 있다는 것, ‘사회주의‘는 단순한 현학적 전문용어 - P287

나 역사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 지구를 파괴하면서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사람답게 살 기회를 좌절시키는 시스템에 대한 진정한 대안의 이름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 P288

대식세포 Macrophage, 명사.
현재는 주로 면역학에서 사용된다. 그리스어의 pakpós (makrós, ‘거대한‘)와 paysiv(phagein, ‘먹다‘)에서 유래했으며, 글자 그대로는 ‘대식가‘라는 뜻.


이 책의 대부분은 코비드-19가 발생하기 전에 쓰였다. 확장된 자본주의관을 발전시키고 있던 팬데믹 전 몇 년 동안, 나는공식 경제에서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감춰진 장소‘들을 최종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그 결과 여러분이 이 책에서 마주하는 것처럼, 자본이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책임은 지지않는 필수조건들, 즉 인종화된 수탈, 사회적 재생산, 지구 생태계, 정치적 권력 중 하나에 각각 초점을 맞추는 여러 장들이 집필됐다.
각 장마다 나는, 자신을 존립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토대 - P291

를 놓고 구조적으로 기꺼이 제살 깎아먹는 짓을 벌이려 하는 사회 질서가 지닌, 모순적이고 위기 친화적인 성격을 드러내려고노력했다. 즉 이 사회 질서는 돌봄을 폭식하고, 자연을 탐식하며,
공적 권력의 내장을 적출하고, 인종화된 인구집단의 부를 먹어치운다. 또한 각 장마다 나는 먹이 떼를 향해 달려드는 이들 포식자 무리 중 어느 것도 다른 것들과 떨어져 단독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빠져든, 온 세상을태워버리는 위기 속에서 모두는 한데 뒤엉킨다. - P292

코비드-19의 발생은 이 얽힘을 증명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사례를 제공한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22년 4월 현재, 팬데믹은 식인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이 수렴하는 지점이 되고 있다.
즉 자연, 돌봄 활동, 정치적 역량, 주변부 민중을 둘러싼 제살깎아먹기가 죽음을 부르는 난장판으로 융합한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기능 장애의 광란의 파티인 코비드-19는 이 사회 시스템을폐지해야 한다는 요청에서 단번에 모든 의심을 벗겨버린다.
이유를 알고 싶다면, 자연을 생각해보자. 인간이 Sars-CoV-2[사스-코로나바이러스-2]"에 노출된 것은 자본이, 자신을(그리고우리를!) 존립할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기둥을 놓고 제 살을 깎아먹은 것에 다름 아니다. 코비드-19의 원인이 되는 코로나바이 - P292

러스는 오랫동안 외딴 동굴의 박쥐들에게 머물고 있다가, 2019년에 어쩌면 천산갑일 수도 있지만 아직도 완전히 확인되지는않은 매개종을 거쳐 야생동물에서 인간으로 전파됐다. 그러나박쥐가 이 매개종과 접촉하게 하고 그 매개종이 인간과 접촉하게 만든 원인은 이미 분명하다. 그것은 지구 온난화와 열대 삼림파괴가 결합한 결과다. 그리고 이것만큼 분명한 것은, 이 두 과정이 자본의 소산이며 이를 추동한 힘 역시 이윤을 향한 자본의채울 길 없는 갈증이라는 점이다. 두 과정이 한데 합쳐져 무수히많은 종의 서식지를 파헤쳤고, 대규모 이동을 유발했으며, 과거에는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곤란한 처지에 놓인유기체들이 처음으로 근접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들 사이에서병원체의 전에 없던 이동을 촉진했다. 이 역학은 이미 여러 바이러스성 전염병들을 촉발했으며, 이는 모두 박쥐로부터 ‘증폭 숙주‘를 거쳐 인간으로 전파됐다. 후천성 면역결핍증HIV 침팬지를 통해, 니파ipah‘는 돼지를 통해, 사스SARS는 사향고양이를통해, 메르스MERS는 낙타를 통해, 그리고 이제 코비드-19는 아마도 천산갑을 통해 인간에게 옮겨갔다. - P293

이런 질병은 앞으로도 발생할 것이다. 이런 전염병은 자본을위해 자연을 희생양으로 삼는 사회 질서에서는 결코 우발적인부산물이 아니다. 이윤을 긁어모으는 데 전념하는 자본은 생물물리학적 부를 가능한 한 신속하고 저렴하게 전유하도록 유인책을 제시하면서도 수선이나 보충의 책임은 전혀지지 않기에,
열대 우림을 파괴하고 대기에 온실가스를 퍼붓는다. 자본은 어떤 시기든 축적에 광분하지만, 이제는 신자유주의화로 엄청나게 강력해진 탓에 치명적 역병이 해일처럼 쇄도하게 만들고 말았다. - P294

인간에 대한 코비드의 충격은 어떤 조건에서든 끔찍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충격은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구조적 모순에뿌리를 두고 신자유주의 시기에 절정에 이른 현 위기의 또 다른지류에 의해 측량할길 없이 악화됐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자본은 자연만이 아니라 공적 권력을 놓고도 제 살을 깎아먹었다.
공적 권력 역시 자본의 식단에서 빠질 수 없는 성분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발전의 모든 국면에서 자본은 이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우지만, 지난 40년 동안은 특히 광분하며 먹어댔다. 바로 여기에 난점이 있다. 금융화된 자본이 걸신들린 듯삼킨 정치적 역량은 바로 팬데믹을 완화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행운은 허용되지 않았다.
코비드가 발생하기 훨씬 전에 대다수 국가는 ‘시장‘의 요구에 - P294

굴복하여, 공중보건 인프라와 기초과학 연구를 포함한 사회적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쿠바 같은 주목할 만한 몇몇 예외가 있지대다수 국가는 구조 장비 (개인 보호장구, 인공호흡기, 주사기, 의약품, 검사키트) 비축분을 줄였고, 진단 역량(검사, 추적, 수학적 모델링,
유전자 염기순서 분석)을 빈껍데기로 만들었으며, 협력과 치료 역량(공공병원, 중환자실, 백신 제조·저장·유통설비)을 위축시켰다. - P295

게다가 공공 인프라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뒤 우리의 지배자들은 필수 보건 기능을 (이윤 동기를 따르는 공급자, 보험회사, 제약회사, 의약품 생산업체에 내맡겨버렸다. 공공성에 구속받지도않고 관심도 없는 이 기업들이 이제 전 세계의 보건 관련 노동력, 원자재, 기계, 생산 설비, 공급망, 지적재산권, 연구기관, 연구원의 알짜를 통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개인적 차원으로나 집단적 차원으로나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들이다. 이기업들은 자기네 수익 흐름을 지키는 데만 전념하며, 인류를 위한 공동의 공적 조치를 가로막는 사적 불가항력을 구축한다. 그결과는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놀랍지는 않다. 죽느냐 사느냐의문제를 ‘가치 법칙‘에 종속시키는 사회 시스템은 애초부터 구조적으로, 이루 셀 수 없는 사람들을 코비드-19에 희생시키길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미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공적시스템의 붕괴는 사회적 재생산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구조적 - P295

모순과 수렴한다. 항상 자본의 소비 목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돌봄 활동은 최근 몇 년 동안 게걸스러운 폭식의 대상이됐다. 공적 돌봄 인프라를 처분해버린 바로 그 체제는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임금을 삭감함으로써 각 가정당 유급 노동시간을늘리도록 강요했는데, 1차 보호자 primary caregiver 의 경우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는 돌봄 활동을 가족과 공동체에 떠넘기면서도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빨아먹음으로써, 사회적 재생산을 불안정에 빠뜨리는 자본주의의 내적 경향을 극심한 돌봄 붕괴로까지 비화시켰다. - P296

코비드의 출현은 위기의 이러한 지류 역시 강화했으며, 새로운 돌봄 노고를 가족과 공동체에 특히 여전히 무급 돌봄 활동의핵심을 맡는 여성에게 떠넘겼다. 록다운 상황에서 아동 돌봄과학교 교육이 가정으로 장소를 옮기는 바람에 부모가 부담을 떠안게 됐고, 설상가상으로 이런 일을 해야 할 공간은 이런 목적에는 맞지 않는 제한된 집 안이었다. 많은 피고용 여성들이 아이들과 여타 친척을 돌보기 위해 결국 일을 그만두어야 했고, 또 다른 많은 여성들이 고용주에 의해 해고됐다. 두 집단 모두 노동현장에 복귀할 경우 전보다 더 낮은 지위와 급여에 직면한다. 제 - P296

3의 집단은 집 안에 꽁꽁 갇힌 아이들과 가족을 위해 돌봄 활동을 수행하면서도 재택 원격 근무를 하며 일자리를 유지하는 특전을 누렸지만, 전보다 훨씬 더 정신없이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만 했다. 그리고 특정 젠더로 엄격하게 한정되지 않는 제4의 집단은 ‘필수노동자‘라는 영예를 떠안았지만, 박봉을 받고 일회용품 취급을 당했으며, 다른 이들이 자가격리할 수 있도록 물품을생산하고 유통하기 위해 감염 위험과 가족한테 전염시킬 수 있다는 공포를 매일 감내해야 했다. 이 모든 경우에, 이제 팬데믹으로 더욱 증폭된 사회적 재생산 활동은 (자본주의 역사의 모든 국면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주로 여성의 몫으로 남았다. 그러나 어떤 여성이 결국 위 네 집단 중 어디에 속하게 될지는 계급과 피부색에달려 있다. - P297

무엇보다도 구조적 인종주의는 자본주의 시스템 발전의 모든 국면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좌익의 정통 교리와는 달리, 자본 축적은 이중으로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의 착취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과 법적으로 유효한 권리를 빼앗긴 종속적 인구집단의 수탈을 통해서도전개된다. 착취와 수탈의 이러한 구분은 전 지구적인 피부색의경계선과 일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내장된 특징인 인종적-제국주의적 약탈은 현 위기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는 대규모 생태 파괴의 지리학에 피부색을 - P297

덧칠하는데, 자본은 주로 인종화된 인구집단에게서 토지, 에너지, 광물자원을 가샘으로써 값싼 자연‘을 향한 갈증을 해소한다. 자기방어 수단을 빼앗긴 채 정복, 노예화, 인종 학살, 자산 박탈에 휘둘리는 이들 인구집단은 전 지구적 환경부담에서 터무니없이 많은 몫을 짊어진다. 그들은 자본주의 중심부에 비해 과도하게 독성 폐기물 투기와 ‘자연재해‘, 지구 온난화의 다양한 치명적 충격에 노출된 상태이며, 이제는 코비드 예방접종과 치료를 기다리는 줄에서도 맨 뒤에 서야 하는 신세다. - P298

게다가 피부색은 계급과 깊숙이 얽혀 있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현 국면에서는 특히나 심하다. ‘필수노동자‘ 범주가 보여주듯이, 실제로 둘은 분리가 불가능하다. 의료 전문가들을 논외로 한다면, 이 명칭은 떠돌이 농장 노동자, 이주민도축· 정육 노동자, 아마존사 창고 관리 노동자, UPS 차량 운전사, 노인요양원 조무사,병원청소부,
슈퍼마켓 진열대·계산대 담당자, 식료품과 포장 음식을 배달하는 긱-노동자를 아우른다. 코비드 시기에 특히 위험천만한 이 일자리들은 대개 저임금에다 노동조합도 없고 불안정하며 수당과노동보호 규정이 전무하다. 이 일자리들은 기분 나쁜 감독과 통제를 받으며, 승진과 숙련 획득의 전망이나 자율성 따위는 눈곱만큼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압도적으로 여성과 유색인으로채워져 있다. - P299

은 더 이상 백인 남성 광부, 공장 직공, 건설 노동자로 전형화될수 없으며, 이제 그 전형은 돌봄 노동자, 긱- 노동자,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다. (어쨌든 급여를 받을 경우에는 재생산 비용보다 더 적은 급여를 받는 이 현대 노동계급은 착취를 당하면서 동시에 수탈도 당한다. 코비드는 이 추악한 비밀까지 폭로했다. 팬데믹은이들 노동계급 업무의 ‘필수적‘ 성격과 이에 대한 자본의 체계적인 저평가를 대비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커다란결점을 입증했다. 노동력 시장이 일의 진짜 값어치를 정확히 계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 P300

즉, 전반적으로 코비드는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비합리성과불의‘의 광란의 파티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내적 결함을 그한계점까지 돌이킬 수 없이 증대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의 모든 ‘감춰진 장소‘들에 날카로운 빛줄기를 드리운다. 이 감춰진 장소들을 그림자에서 끌어내 햇빛에 노출시킴으로써 팬데믹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들을 만인의 눈앞에 펼쳐보인다. 그 모순들이란, 자연을 놓고 제살 깎아먹기를 벌여 지구를 불지옥일보 직전까지 내모는 자본의 충동,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진정으로 필수적인 활동에서 역량을 빼가는 자본의 충동, 자본주의 시스템이 발생시키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지경까지 공적 권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리는 자본의 충동, 인종화된 대중의건강과 점점 줄어들기만 하는 부를 먹어 치우는 자본의 충동, 노 - P300

동계급을 착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탈까지 하는 자본의 충동이다.
여기까지가 사회이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의 최대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어려운 문제와 마주해야 한다. 이 교훈을사회적 실천 속에서 실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어떻게 이 야수를 굶주리게 만들지, 어떻게 식인 자본주의를 최종종식시킬지를 놓고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 P301

국제적으로 낸시 프레이저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첫번째 계기는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신자유주의가 확고한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은 1990년대에 착수한 ‘정의‘론 작업이었다. 프레이저는 정의에 ‘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공존한다는 이차원적 정의관을 제기했고,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입장을 끈질기게 발전시켰다. 프레이저는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는 존 롤스식 정의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1970년대 이후 급속히 발전한 여성운동, 흑인운동, 성소수자운동 등이 제기하는 또 다른 정의관, 즉 문화적 정체성의 인정을 중심에 둔 정의관을 적극 수용했다. 하지만 오로지 인정에만 바탕을 두고 분배 중심 정의관을 폐기하려는 시도에도 한계가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분배와 인정 모두를 정의의 두 축으로 포섭하고 둘의 공존과 상호작용을 중심에 두는 정의관을 제시했다.  - P303

정의관은 분배, 인정에 더해 ‘대표‘의 차원을 정의의 또 다른 축으로 삼는 삼차원적 정의관으로 재구성됐다. 분배와 인정의 측면에서 불의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적 대표의 측면에서 만인의 동등한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프레이저는 이러한 정치의 무대가 과거와 달리 국민국가에 한정되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지구화 시대에 정치가 제 역할을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공론장이마련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대한 새로운 상상》(김원식 옮김, 그린비, 2010)이 이러한 정의론 갱신 작업을 결산한 저작이다. - P304

경제 위기, 극우 포퓰리즘의 창궐, 기후 급변 등으로 어지러웠던 2010년대에 프레이저는 이제까지 벌인 이론 작업의 탄탄한 토대 위에서 다른 어떤 사회이론가보다 더 맹렬히 현실에 개입했고,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삼차원적 정의관으로 무장한 프레이저는 신자유주의전성기에 정체성 정치만 강조하며 분배 요구를 등한시한(이를테면 ‘인정‘ 편향 사회운동들을 비판했고, 신자유주의가 쇠퇴한 뒤에 좌파가 아니라 극우 포퓰리즘이 상당수 대중에게 대안으로선택받는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음을 통렬히 지적했다. 프레이저는 특히 페미니즘의 대중적 확산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식의 낡은 틀에 갇혀 있는 여성운동을 향해 자기 성찰과 노선 전환을 촉구했다. - P304

여성운동만이 아니었다. 프레이저는 "낡은 것은 무너지는데도 새것은 나타나지 않는"(안토니오 그람시) 궐위기가 하루빨리종식되려면 무엇보다도 사회운동과 좌파정치 전반이 환골탈태해야 함을 역설했다. 2020년 미국 대선 직전에 펴낸 팸플릿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김성준 옮김, 책세상, 2021)에서 프레이저는 민주당 주류의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도널드 트럼프의 극우포퓰리즘이 발호하도록 만든 원흉이기에 트럼프주의를 극복할대안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트럼프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계급과 상당수 중간계급의 동맹에 바탕을 둔 ‘진보적 포퓰리즘‘뿐이다. - P305

바로 이 책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에서 드디어 프레이저의 새로운 자본주의관은 전모를 드러낸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며, 자본임금노동 관계만도 아니다. 비-경제 영역이라 치부되는 사회적 재생산, 인간과 비인간 자연 간 관계, 인종화된 집단에 대한 수탈, 공적 권력의 작동 등이 없이는 착취도, 축적도, 성장도 이뤄질 수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이러한 배경조건들까지 포함한 특정한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관이 이렇게바뀌면, 당연히 시스템의 모순과 위기 역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변형해왔고 앞으로 이를 극복할 가능성을 지닌 동력에 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계급투쟁뿐만 아니라 프레이저가 ‘경계투쟁‘이라 부른 투쟁들, - P306

들, 즉 사회적 재생산, 인간과 비인간 자연의 관계, 착취와 결합된 수탈, 정치 등의 영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 역시 중요해진다. 이 투쟁들이 한데 이어지지 않고서는 복합적 사회 질서인자본주의를 변형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은 이 책의 핵심 주장에 관한 지극히 빈약한 요약이지만,
굳이 여기에서 본문 내용을 다시 장황하게 정리하지는 않겠다.
이 책 곳곳에서 프레이저가 워낙 상세하게 반복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서문"을 읽으면 낯선 개념이나 비유, 용어들 탓에 어렵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후의 장들을 읽어가다보면 어느새 저자의 논의가 익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만큼 이 책에서 노학자는 열정을 남김없이 쏟아부으며 자신의 학문과 실천 역정을 총결산한다. - P307

그렇기에 여기에서는, 어쭙잖은 해설을 덧붙이기보다 프레이저의 자본주의관이 사상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지만 간략히 짚겠다. 돌이켜보면, 고전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에도 자본- 임금노동 관계가 그 바깥에서 작동하는 전혀 다른 사회관계와 함께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음을 명확히 지적한 예외적인인물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로자 룩셈부르크다. 룩셈부르크는<자본의 축적>(황선길 옮김, 지만지, 2013)에서, 유럽 세계 바깥의식민지 인민에 대한 수탈 없이는 유럽 안에서 착취를 통해 자본축적이 계속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발상은 <좌파의 길: 식인 - P307

자본주의에 반대한다》에서 프레이저가 발전시키는 수탈론의원형이다.
그러나 룩셈부르크에서 프레이저에 이르는 거의 한 세기에걸친 세월 동안 룩셈부르크의 명제는 자본주의 중심부의 좌파사이에서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발상이 확대될 경우 임금 노동자에 대한 착취만으로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설명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주장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도 분명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자본임금노동 관계에 포섭되지 않는 사회관계가 오히려 자본-임금노동 관계의 전제조건이 되며 자본주의 전체의 필수적이고구성적인 요소라는 발상은, 프레이저가 지적하는 것처럼, 흑인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인종 연구나 제국주의 및 그 후속 세계체제에 대한 연구 등에서만 계승·발전되었다. - P308

이러한 상황에서 돋보인 또 다른 예외적 사상가가 있었다. 프레이저가 이 책에서 직접 거명하는 미국의 생태사회주의자 제임스 오코너(1930-2017)다. 오코너는 생태주의의 문제의식이 아직 사람들에게 낯설었던 1970년대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생태적전환을 고민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저널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Capitalism, Nature, Socialism》를 창간해 생태사회주의 사상개척의 국제 실험실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오코너는 역사유물론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주장을 내놓았다. 생산력과 생산관 - P308

계의 모순만으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설명할 수 없으며, 또 다른 기본 모순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코너는 그것이 생산력/생산관계와 생산조건의 모순이라 주장했다. 생산을 무한히 확장하며 축적을 지속하려는 자본과 그 생산의 조건이 되는유한한 비인간 자연이 서로 모순을 빚으며 자본주의의 위기를낳는다는 것이었다.
역사유물론 자체를 다시 쓰려는 오코너의 시도는 이후 존 벨러미 포스터 같은 후속세대 생태사회주의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자본임금노동 관계의 외부에서 생태문제의 원인을찾으려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착취와 생태문제 사이의 유기적연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게 비판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오코너의 기본 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생태 문제가 자본주의 ‘경제‘와 그 외부(그러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적 일부인)의 경계선에서 발생한다는 이 책의 핵심 주장을 통해 오코너의 구상을 발전시킨다. - P309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에서 무어와 파텔은 이윤의 기반이되는 상품가격 이면에는 자본주의가 ‘저렴한 것‘으로 취급하며착취/수탈하는 일곱 가지 요소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노동뿐만 아니라 자연, 돈(화폐), 돌봄, 식량, 에너지, 생명이다. 프레이저가 정리한 자본주의 경제 외부의 네 가지 주요 영역과 깔끔하게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 함의만은 비슷하다. 무어·파텔과 프레이저 모두,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자본이 거두는 막대한 이윤의원천은 자본임금노동관계만이 아니며 돌봄 활동, 비인간 자연,
남반구 등에 대한 수탈이 그만큼 필수불가결하고 구성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런 인식의 전환은 현재 인류 문명을 격동시키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모순을 좀 더 복합적이고 역동적으로바라보게 할 뿐 아니라, 중심부의 자본-임금노동 관계만을 특권화했던 좌파의 전통적 시각 또한 뒤집는다. - P310

프레이저의 새로운 자본주의관이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의 교착 상태를 돌파할 대항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하려는 필사적인 집단적 노력에 아주 중대한 기여를 한다는 점만은 일단 인정해야 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려는 이들은 여전히 현실의 노동운동을 자본주의를 극복할 계급투쟁과 동일시하며 특권화하고, 오직 이를 보조하는 요소로서 다른 사회운동들을 바라본다. 반면에 이런 정통적 사고를 뛰어넘으려 한 선구적 이론가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는 현실에 다양한 사회운동이 존재함을 단순히 전제하고는,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다분히 우발적인 담론적실천을 통해 이들 사회운동들을 대항헤게모니 블록으로 모을수 있다는 전망을 내세운다. 그러나 왜 현실에 하필이면 특정한복수의 사회운동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해당 정세속에서 왜 어떤 담론적 실천이 다른 시도에 비해 더 커다란 효과를 내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관 자체를 교정하기보다는 이를 우회한 채 ‘자본주의 경제‘와 구분되는 ‘민주주의 정치‘라는 층위를 설정하고 이 층위안에서 사회운동들의 관계를 설명하려 한 탓일 것이다. - P311

또한 프레이저는 대항헤게모니 블록의 기반이 될 ‘새로운 상식‘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에 관해서도 우리의 눈을 열어준다.
그것은 생산 현장의 계급투쟁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그 ‘외부‘에서 지식인이 생산해 주입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에 따라 경계투쟁들이 활발해지면, 사회적 재생산, 인간과 비인간 자연의 관계, 수탈 대상이 되는 인구집단, 공적 권력 등의 영역을 각기 지배하는 다양한 가치와 규범이 새로운 상식의 재료(새 상식 자체는 아니지만)로 변형된다. 대항헤게모니 전략을 제안하는 최근의 여러 저작들, 가령 무폐의<녹색 민주주의 혁명을 향하여 좌파 포퓰리즘과 정동의 힘》(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 2022)이나 파올로 제르바우도의 《거대한 반격: 포퓰리즘과 팬데믹 이후의 정치》 (남상백 옮김, 다른백년, 2022)가 제안하는 전략 방향은 이러한 프레이저의 자본주의 분석과결합할 때 더욱 명쾌해지고 실천적인 힘을 얻게 될 것이다. - P312

옮긴이가 덧붙이는 군말은 이쯤에서 그치겠다. 이 책의 본문에 담긴 저자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만, 옮긴이의 부족한 능력 탓에 이러한 본문 내용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 특히 이 책에서 프레이저가 새로고안해 사용하는 개념이나 비유를 과연 우리말로 적절하게 옮겼는지 고민이 남는다. 그래서 중요한 번역마다 옮긴이 주를각주 형태로 달아,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나 혼동을 줄이려 했다. 그럼에도 독자 여러분의 많은 질정과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부디 이 책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세상을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과 격려의 원천이 되길바란다. - P313

나를 포함, 흐느끼며 일상을 견디는 이들에게 희망의 목소리가 당도했다. 한계 없는 자본주의의 위장이 터지기 직전인 당대, 이 책은 기존의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포괄적 접근을 시도한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원한다면 이 책을 권한다. 인간이라는 시한폭탄을 품고 붕괴가 임박한 지구를 알고 싶다면, 인문학 용어가 정확히 번역된 책을 찾는다면 이 책을 권한다. 적실한 자본주의입문서를 구한다면 이 책을 권한다.
- 정희진 여성학 박사,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낸시 프레이저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스트 전통에 입각한전설적인 급진 철학자이지만 흑인, 생태, 이민자, 성적 자유 운동에대한 그의 진정한 포용과 심오한 이해는 그녀를 당대 지식계에서 독보적인 인물로 만든다! 이 책은 암울한 우리 시대에 고전의 반열에오를 단 하나의 보배다.
ㅡ코넬 웨스트Cornel West, Race Matters) 저자

21세기에 걸맞은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론에 대한 자신의 수많은선구적인 공헌을 훌륭하게 종합한 아름다운 글!
-볼프강 슈트렉Wolfgang Streeck, (How Will Capitalism End?> 저자

이 책은 자신이 번성하는 바로 그 땅, 노동력, 자연세계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괴물을 소환한다. 저자는 특유의 명확하고 독창적인산문을 통해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변천, 서로 얽힌 역학을 풀어냄으로써 겉보기에 이질적인 위기와 사회적 폭력 사이의 상호관계를 드러낸다. 그를 통해 우리는 반인종주의적, 생태사회적 재생산 비평의강력한 잠재력을 보게 된다. 그리고 왜 지구와 인류의 미래가 작업장과 거리, 숲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반자본주의 투쟁을 구축하는 사회주의 좌파에 달려 있는지를 알게 된다.
ㅡ슈퍼거슨Sue Ferguson, Women and Work》 저자

저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우아한 자본주의 이론을 내놓았고, 이제 우리는 그 체제를 심판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협소한 경제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완전한 잡식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주변 모두를 집어삼키는 짓을 멈출 수 없는 체제이자 사람과 자연의생명을 파괴하는 체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위기의 시대를 구할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다.
ㅡ안드레아스 말씀Andreas Malm, 《How to Blow Up a Pipeline》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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