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은
살며 사랑하며 이야기의 힘을 믿고 오늘도 글을 쓰는 사람. 2012년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소설 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 사실은 이 말이듣고 싶었어」, 「여행이거나 사랑이거나 등 여러 책을 썼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윤정은의 책길을 걷다‘를 진행하고 있다.
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다시 봄이오는 마을이 있다. 축구공만한 지구본을 돌리고돌리다 보면먼지처럼 작은 마을 하나가 눈앞에 떠오른다. 이곳은 지구에 있지만 아무나 그 존재를 알 수는 없다. 신비로운 꽃과나무가 가득하고,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산다. 날개는 없지만 요정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곳은 언제나 꽃 같은 날들이 이어진다. 하늘은 시리게푸르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다. 먹을 것이 풍족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눈빛과 마음이 선한 이들이 모여 살기에, 그들은 ‘미움‘이나 ‘아픔‘ 혹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모른다. 날이 선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늘 평화롭다. - P9
이 마을에서는 세상에 빛이 되는 아름다운 능력을 가진이들이 사람들이 사는 곳마다 온기를 불어 넣으며 달이 뜨면 은은한 달빛 아래 춤을 추고, 해가 뜨면 따뜻하고 눈부신 웃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살을 에는 몸의 추위도, 어깨가 움츠러드는 마음의 추위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사는 한 남자의 마음에 뜨거운여름이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 P10
그동안 여자를 닮아 능력이 없는 줄 알았던 딸에게 뒤늦게 보이는 징후들이 걱정스러웠다. 사실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단순히 공감 능력이 좋거나 실천력이 강한 것일 거라 넘기곤 했다. 그런데 선한 마법을 쓸 줄 알도록 선택받았기에, 세상에 빛이 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꼭 넘어야만 하는 시련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고,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오래도록 찾아 헤매야 한다. 그렇지만 시련을 극복하면 능력을 완전하게 갖추고 빛이 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 삶은 존경받는아름다운 삶이지만 외롭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빛이 밝으면 어둠도 깊은 법이니까. 달의 이면처럼. 자신이 살던 도시에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아 도망치듯 뛰다 정신을 잃고 이 마을에 들어선 여자였다. - P14
감았던 눈을 떴지만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말 그대로 폐허다. 사랑하는 이들이 나 때문에 휩쓸려간 자리에 홀로 남겨져 있다.
후회되는 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나쁜 일을 미리 알고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허무하게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질 순 없다. 눈을 감았다 뜬 것 뿐인데, 빛나던 세상이 암흑으로 가득하다.
이건 꿈이다. 분명 꿈이야. - P19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자신도 모르는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것처럼, 소녀 역시 절박함과 깊은 슬픔에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본인의 능력을 발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순간의 힘을 빌려, 백만 번을 다시 태어나 세기를넘나들도록 스스로를 봉인했다.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 따윈 무시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지금보다 더 큰위험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선한 일에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경고도 무시한 채 온 세기에 걸쳐 가족을 찾아다녔다. 빨갛게 생기 가득한 양 볼에 늘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던 소녀는 수도 없이 다시 태어나고 세기와 세계를 넘나들며 웃음을 잃어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가족을 찾을 수만 있다. 면. 소녀는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 셀 수도없이 많은 일을하며 세상을 헤맸다. - P22
그러나 반복해서 다시 태어날수록 소녀의 검고 깊은 눈에는 슬픔만이 가득했고, 소녀는 울지도 웃지도 않는 무표정한 사람이 되어갔다. 지독하게 쓸쓸하고 공허한 눈빛으로 제대로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아 앙상하게 말라갔다. 헤어질 때의 외모를 그대로 간직해야 가족들이 자신을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얼굴이 변하지 않는 나이까지만 늙도록 했다. 어느 세기의 소녀는 이십 대였고, 어느 세기의소녀는 삼십 대였다. 몇 번은 사십 대로 산 적도 있었지만그 이상은 나이 들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아니 사실은 기억이 희미해져 자신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불안했다. 지치고 또 지치는 여정이었다. 야속한 시간이 마음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 P23
항상 슬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소녀가 좋아하는 행위도있었다. 소녀는 곁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소녀의 탁월한 공감 능력으로 감정이 전이돼 마음이 아팠고, 감정이 진정될 즈음 차를 내어주면 말하는 이가 천천히 미소를 짓곤했다. 그렇게 서로 편안해지는 순간의 공기가 좋았다. 슬프고우울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 소녀에겐 힘들지않았다. 사람들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기쁨의 순간들보다 힘든 순간들이 생에 널려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고, 그들이 털어놓는 속내가 소녀에게는 음악 소리와 같은 ‘말소리‘로 들렸다. - P25
바다를 등지고 선 소녀 앞으로 바람이분다. 그리고 해가 진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숨이 멎을 것 같다. 온 힘을 다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지고 있다. 타오를 듯한 해가 아주 천천히 바다로 들어가고 있다. 지는 해가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산 아래 꼭대기 마을의 두 면은 바다를 품고 두 면은 도시를 품고 있다. 눈을 감고 숨을 아주 크게 들이쉰다. 물 냄새가 난다. 도시와 바다와 마을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소녀는 쓸쓸해진다. 문득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뭐야, 해 지는 거 왜 이렇게 예뻐. 세상에 예쁜 게 아직남아 있네" 보는 이라도 있는 양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소녀는 해지는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바람이 분다. 꽃 냄새가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소녀의 눈동자에도 노을이 물든다. - P28
해가 지자마자 어둠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해는 천천히 빛을 내며 지고 있었고, 보이지 않아도 남은 빛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렇다. 빛과 어둠은 양면이 아닌 한 면으로이어져 있다. 소녀는 찬찬히 어둠이 드리우는 광경을 바라본다. 깊은 어둠이라 해도 빛이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 완전한 어둠 속에 있다고 생각돼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빛이 비춘다. 그리고 밤이 서서히 내려앉는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해가 지듯 천천히 어둠은 밝음으로 이어져 달과 해가 같은 하늘에 공존한다. 낮의 달을 보지 못하는 건 낮의 해를 보려고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소녀는 가만히 무릎을 안고 웅크려 앉아 밤을 꼬박 샌다. 새벽이 오고 아침이 온다. 어둠이영원할 것 같아도 아침은 다시 온다. 살아 있는 한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건, 이 아침을 맞이하는 날들 아닐까. - P29
소멸되기 직전, 소녀가 주먹을 꽉 움켜쥔다. 그 순간, 깨진컵 조각들이 하얀 꽃잎이 되어 창문 밖 하늘로 날아간다. 구름 틈에 자리 잡은 꽃잎들이 소녀의 창문에 해가 환하게 비치도록 구름을 지운다. 새파란 하늘에 쨍한 햇살이내리쬐고 소녀가 입고 있던 옷은 빨간 동백이 새겨진 검은새틴 드레스로 삽시간에 바뀐다. 소녀가 눈을 뜨자, 가지런히 묶여 있던 머리가 스르르 풀린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이온 것만같은, 고요하고 스산한 폭풍전야. - P31
지난 시절에 누군가의 슬픔을 듣고 위로를 건넨 날이면지은은 집으로 돌아와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빨래를했다. 조물조물, 세제를 넣고 빨래를 주무르고 하얀 거품을바라봤다. 빨래를 물에 헹궈낼수록 거품과 함께 옷에 묻은먼지와 때들도 물에 흘러 내려갔다. 빨래가 끝나면 그들의슬픔과 아픔도 깨끗이 지워지길 바라며 빨랫감을 탈탈 털어 널었다. 빨래를 걸어두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감정의 찌꺼기들도 같이 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지은이 간절한 마음으로 빨래를 한다음 날이면, 어두웠던 이들의 표정은 말끔하게 펴 있었다. 구름이 걷힌 말끔한 하늘처럼. - P41
고요한 밤이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생각했던 대로 실내는 조명의 노란 빛으로 따뜻함이 감돈다. 나무 냄새를 맡으며 숨을 쉬자 서서히 마음의 귀가 열린다. 어떤 이들의말소리가 가까이 있다. 마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하던 지은이 바 테이블의 주방 안쪽으로 움직인다. 한동안 만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정성껏 위로 차를 우려내야겠다. 이 차를 마시면 사람들의 마음속작은 주름이펴지고 잠시나마 편안해진다. 오늘처럼 깊은 밤에 누군가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늘은 나 자신에게 더 필요할지도. - P42
눈을 감고 있는 재하를 보며 지은은 소리 나지 않게 나와 옥상 계단을 향해 올라가 남은 하루의 시간을 짐작한다. 시계를 보지 않는 지은은 빛과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한다.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니까. "종일 밝게 웃는 사람들 보면 왠지 마음이 짠해 욱신거려. 종일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딨어. 웃음 뒤에 슬픔을 감추어야만 살 수 있으니까 웃는 거지. 마음에 얼룩으로 남은아픔을 지워야만 숨 쉴 수 있는 사람도 있어." 마냥 웃던 재하를 떠올리며 혼잣말을 하던 지은은 팔짱을 끼고 서서 재하처럼 두 눈을 감는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양팔을 벌려 날갯짓을 하듯 길게 뻗는다. 등에서 진짜날개가 돋아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처럼. 그런 지은의 뒷모습을 어둠 속에서 누군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 P57
"사랑의 얼룩을 지우고 싶어요." 지은이 나타나길 기다리던 연희가 떨리는 손으로 읽던책을 덮으며 지은을 보자마자 말한다. 백화점 1층 화장품코너에서 일하는 연희는 사람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 얼굴을 보자마자 느껴지는 인상으로 성격을 유추하고 관찰하는습관이 있다. 종일 사방이 막힌 답답한 공간에서 손님이 오길 기다리며 생긴 습관이다. 의심 많은 재하가 지은을 따라 올라간 뒤 마음 세탁소안의 공기는 점점 순해졌다. 공간의 공기를 채우는 건 물건이 아닌 사람의 기운이라고 생각하는 연희는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공기에 왠지 모르게 지은이 단단한 사람 같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처음엔 이상한 말로 현혹시켜 물건을 파는 다단계회사인가싶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팔 만한 물건은 없어 보인다. 어쩌면 마음의 얼룩을 지워준다는 게 진실일지도 모른다. 아니, 진실이 아닐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진실이라고 믿고싶다. - P73
가뜩이나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는 은별을 보며 지은은평소보다 더욱 친절하게 자신을 소개한다.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며 스스로를 열어 보이는 이들은꽤나 용감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이 곪아 있다. 곪아 있는지도, 아픈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가장 아픈 상처 한두 개쯤은 치유해주어야 살 만해진다는 것도 모르면서 살아간다. 지은이 억겁의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위로 차를 건네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마음을 어루만져준 것만으로도 그들은 한결 편안하게자신의 아픔을 데리고 살아갔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잔뜩떨고 있는 저 아이도 치유가 필요한 순간임이 느껴진다. - P110
"정말요? 와∙∙∙ 잘됐네요." 수줍게 웃으며 은별은 신호등을 힘차게 건넌다. 인생은초록불인 것 같아도 노란불도 들어오고 빨간불도 들어온다. 가끔 빨간불에만 정체되어 있는 듯해도 어김없이 초록불이 된다. 초록불 다음엔 다시 빨간불. 우리가 할 수 있는건, 그저 길을 걷고 신호등이 나오면 불빛에 따라 움직이는일이다. 지금 내게 맞는 신호가 없다면 기다리고, 언젠가신호가 올 때 또 다시 걷는 일이 아닐까. "그래서 말인데, 지금 프리랜서 MD들 정규직 채용 전환 공고가 다음 달에 날 거야. 팀장 추천제가 있어서, 우리팀은 은별 씨 추천하려고 하는데 어때?" "저야 너무 좋죠. 추천 감사합니다. 팀장님. 열심히 해볼게요" - P122
혼자 자란 해인에게 언어는 음악이다. 쳇 베이커, 듀크웰링턴, 빌 에반스, 폴 데스몬드를 좋아한다.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해인은 자유로워진다. 대학에서미술사를 전공한 뒤 독립전시기획자로 일하며 사진을 찍고, 음악을 듣고, 말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해인은 자신의 삶에대체로 만족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이 때론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하지만. - P127
살아 있길 잘했다. 태어났으니, 살아 있으니, 살아지고숨을 쉬었다. 죽지 못해 살았다. 하지만 이제 살아 있으니살고 싶어지고 살고 싶어지니 사는 게 행복하다. 행복한 삶을 만드는 건 타인이 아닌 나의 마음가짐이라는 걸 연자는오랜 시간을 지나 와서야 깨닫는다. 행복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려고 그토록 긴 불행의 터널을 지나왔는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한 모든 얼룩이 아름답다. 좋은 생각만 하기에도 인생이 짧음을 아는 오늘을 살고 있음이 좋다. 연자는문득 생각에서 빠져나와 주름진 옷을 정성스레 다리는 지은의 뒷모습을 보며 ‘정순 언니가 딸을 낳았으면 딱 저렇게예쁠 텐데…. 하고 생각한다. - P173
마음으로부터 불행이 지속되기도 한다. 마음은어쩌면 모든 끝과 시작의 열쇠인 것일까.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지은은 세탁소 문을 잠그고 택배박스를 들고 우리 분식으로 걷는다. 그러고 보니, 마음에대해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백만 번이나 태어나면서도 마음을 들여다보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살았다. 마음은 꽃과 비슷하다. 보살펴주고 햇빛을 쐬어주면지기도 하고 피기도 하고 짓무르기도 하고 냄새도 나고 벌레도 생기고, 그러다 잎도 다시 피어나고 다시 꽃도 피는존재. 아름답기도 슬프기도 한 양가적 이면이 마음인 걸까. 아름답기만 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아니, 과연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슬픔과 아픔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고 기쁨과 환희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은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슬픔과 아픔이 아름답고 기쁨과 환희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무너질까 봐, 숨기고 있는진실일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이리 오래 살아도 모르는 것투성이라니. - P178
행복은 내면의 빛이다. 손에 닿을 수 없는 높은 하늘이아니라 마음의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행복은 이미 우리 마음 안에 있다.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 이곳에 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살아갈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지금살고 있는 오늘에 집중해야 한다. 한 걸음만 오른쪽으로 걸어도 이미 과거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도 미래가 아닌 현재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느라 살아갈 미래에 눈이 멀어 미처 오늘을 보지 못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과거의 슬픔과 후회를 안고 살아가느라 그리 오랜 시간을 다시 태어나며 살아왔어도 정작 오늘 행복한 적이 없었다. 아니, 행복할 거 같으면 겁이 나서 도망쳤다. 행복하면 안될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원하는 게 정말 지은이과거에 얽매여 이토록 행복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었을까? - P225
어떤 어둠은 투명함보다 더 투명하다. 어떤 어둠은 밝음보다 맑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지은의 슬픔을 애도하기 위해 오늘은 달도 얼굴을 가리고, 쏟아질 듯 빛나는별도 잠시 빛나기를 멈춘다. 구름 한 점 없이 쨍하게 맑은밤이다. 어떤 밤의 이야기는 어떤 낮의 이야기보다 길다. 어떤이의 슬픔은 어떤 이의 배려로 어둠에 덮인다. 마음껏 슬퍼한 뒤 해가 뜨면 울음을 지운 웃음으로 살아가라고 밤이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해가 뜨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모르지만 일단 지금은 조용히 닫힌 밤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지나고 있다. 밤은 깊고, 서로를 염려하는 다정한 배려는더 깊다. - P228
평범한 삶의 행복을 느낄 때쯤이면 생을 끝냈다. 아직은행복할 수 없었다. 시공간을 넘나들어서라도 온 세상을 뒤져 사랑하는 이들을 찾으면 모든 괴로움을 끝내고 그들과함께 행복하고 싶었다. 그마음 하나로 살았다. 외로움이외로움인지도 모를만큼 익숙한 쓸쓸함으로 살아왔다. 아니, 익숙하다고 믿었다. 어쩌면 외로움이나 고독이 밀려와도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랑하는 이들을 찾지 못할 줄은 몰랐다. 산다는 일 자체가 농담 같다. 인생은 풀리지 않는 의문투성이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자신에 대한마법을 풀고 죽기로 결심한 뒤로, 전보다 자주 웃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밥을 먹었고, 바람의 숨결과 냄새를 느끼며 살았다. - P229
그렇다. 빨래도 햇살과 바람이 함께 불어야 바싹 마르는데, 마음에도 온기와 찬기가 그리고 기쁨과 슬픔이 함께 오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일어난 일은 받아들여야 한다. 돌릴 수 있다면 돌리고, 돌릴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오랜 시간 도망치듯 살았던 삶에 이제 발붙일 테다. 가끔은 빨랫줄에 널려 있는 저 빨래들처럼 흔들림에 몸을 맡겨볼 테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햇살이 맑으면 따뜻함을 즐길 테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흔들리는 나를 바라볼 테다. 부족하고 실수하고 방황하고흔들리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음의 얼룩을 제대로 흘려보내는 비법이 아닐까? - P243
어쩌면 꿈꾸는 일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은 굳이 마법을쓰지 않아도 우리 모두의 삶에서 가능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삶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는 힘은 실수하고 얼룩지더라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용기와 특권 같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 마법은 선택받은특별한 이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도 가질 수있는 능력이다. 모두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려고 지은이 세상에 온 것일까.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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