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있었다

그는 날이 제법 차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외롭다고도

오늘은 불을 피워야지
그는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피웠다

불아 피어나라 불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다

삼키는 불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이런 곳에도 집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면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손금이 뒤섞이는 줄도 모르고

해와 달이 애틋하게 서로를 배웅하고
울타리 너머 잡풀이 자라고
떠돌이 개가 제 영혼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내 안에서 죽은 나를 도닥이다 잠드는

불은 꺼진 지 오래이건만
끝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불은 조금도 꺼지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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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따뜻한 허밍

안희연은 누군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귀를 먼저 내미는 사람이다. 그는 잘 듣는 사람, 열린 사람, 그리하여 ‘다르게‘보는 사람이다. 그게 시에 관한 거라면,
이것인지 저것인지 헷갈린다면, 산뜻한 대답이 필요하다면, 나는 항상 안희연을 찾는다(그도 잘 알것이다). 그의 눈과 귀, 입과 ‘쓰는 손‘을 믿기 때문이다. 이 책엔 ˝단어 생활자˝ 안희연의 일상과 길음,
자신과 사유, 다정한 태도가 담겨 있다. 이야기는 단어에서 시작해 생활의 복판에서 끝난다. 문장은 쉽고 따뜻하며 빛난다. 언어를 오래 살피는 사람이 종국에 어디에 도착하는지, 그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잘 살고 싶다는 의욕이 솟아난다. 읽는 내내귀가 활짝 펼쳐져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가 내는 소리라면 허밍이라도, 단 한 박자도 놓치고 싶지 않다.
- 박연준(시인 《쓰는 기분》 저자)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과 산문집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를 썼다.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촛불을 들고 단어의 집으로 향한다.

저는 이 놀이터를 떠나고 싶지가 않아요. 저에게세상은 양초로 쓰인 글자 같습니다. 이 세상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촛불을 들고 단어의 집으로 들어서면 감춰져 있던 장면이 서서히나타나기도 해요. 그곳엔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무언가가 있어요. 파닥임과 반짝임이 있어요.
그 마주침의 순간이 좋아서 저는 계속 글을 씁니다.
우리가 가진 촛불은 만능이어서 이따금 돋보기나핀셋으로 변신하기도 해요. 이 세계를 다른 각도로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나, 많고 많은 것 중 ‘내 것‘ 을 골라내는 데에도 꽤 큰 도움이 된답니다.
단어의 집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단어의 집은 문턱도 없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여기 이곳 놀이터에서 저와 함께 단어를 골라보시겠어요?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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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민스크를 떠났어. 사람들은 적의 총격 때문에 큰길 대신 숲길을택해 걸었어. 어디선가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들렸지. ‘엄마, 전쟁이래요.‘ 우리 부대는 퇴각하는 중이었어. 호밀이 여물어가는 드넓은 들판을 따라 이동했지. 길가에 나지막한 농가 오두막이 나타났어. 이미 스몰렌스크 지역에 접어든 거야....… 길가에 어떤 여자가 서 있었어. 그 여자가 그 여자네 작은 집보다 더 커 보이더군. 여자는 러시아 전통 문양이 수놓인 리넨 옷으로 몸을 감싼 채 양팔을 가슴위에서 십자 모양으로 모으고는 고개 숙여 절을 했어. 병사들은 계속 행군했고, 여자는 병사들에게 깊이 고개 숙이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주시길‘이라고 했지. 병사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고개 숙이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어. 그러자 모든 병사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 - P397

침대 시트를 갈아야 했어…… 그래서 침대를 깨끗한 시트로 갈고 남편 다리에도 새 붕대를 감아줬지. 그리고 남편을 베개 위까지 끌어올리려는데 남자라 무겁더라고. 그래서 거의 남편에게 닿을 듯 몸을 기울여 끌어당기는데 느껴지는 거야, 이미 끝이라는 게 일이 분 후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게…… 저녁이었어. 9시 15분…… 몇 분이었는지도 기억나 ..… 나도 죽고 싶었지.…… 하지만 그때 뱃속에 우리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가 내가 살아야 할 이유였지. 아이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견딜 수 있었어. 1월 1일에 남편을 묻었어. 그리고 38일 후에 우리 아들이 태어났지. 1944년에 태어나 이제는 어엿한 아빠가 되었어, 남편 이름은 바실리였어. 아들 이름도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우리손자도 바샤야∙∙∙∙∙∙ 바실료크……"

류보피 포미니치나 페도센코, 사병, 간호병 - P409

"날마다…… 눈앞에서 보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젊고잘생긴 남자가 죽어간다는 현실을 ..... 죽어가는 이에게 ...... 입맞춤을 해주고 싶었지. 죽어가는 이를 위해 의사로서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면 여자로서라도 뭔가 해주고 싶었어. 웃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어......
전쟁이 끝나고 숱한 해가 지났을 땐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당신의 환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고백하더군. 나야 당연히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았지. 수많은 부상병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내 미소가 자기를 이른바 저세상에서 이 세상의 삶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여인의 미소가…….."

베라 블라디미로브나 셰발디셰바, 대위, 외과의 - P409

 특무상사는 우리를 위해 시까지 썼어. 아가씨들이 5월의장미처럼 감동적이며, 전쟁 때문에 우리 아가씨들의 싱그러운 정신이 불구가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지.
우리가 전선으로 출발할 때 맹세한 게 하나 있어. 전장에서는 어떤 연애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만약 살아남는다면, 전쟁 후에 하겠다고 전쟁 전에 우리는 키스도 한 번 해본 적이 없었어. 우리는 요새 젊은이들보다 그런 일에 더 보수적이었거든. 우리에게 한 번키스는 평생의 사랑을 의미했지. 전선에서의 사랑은 일종의 금기였어.
만약 누가 연애를 하다가 지휘부에 들키잖아? 그러면 대개 둘 중 한 명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야 했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간단한 방법이었지. 우리는 연인들을 보호하고 지켜줬어. 우리가 했던 유치한 맹세를 어긴 거야…... 그래, 우리는 사랑을 했어....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선에서 못 버텼을 거야. 사랑이 구한 거지. 사랑이 나를 구원했어……"

소피야 크리겔, 상사, 저격수 - P410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고마워. 그 사람 덕분에 사랑이 뭔지 알았고 그 사랑을 누렸으니까. 평생 그 사람을 사랑했어. 숱한 해가 지나도록 그 사랑을 간직했지. 이제 와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하겠어. 이렇게 늙어버린걸. 그래,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았어! 하지만 후회하지않아.
딸아이가 ‘엄마, 엄마는 대체 그런 남자 어디가 좋다고 그래요?‘라며그 사람이 세상을나를 비난했어. 그래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떴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어. 많이 울었지. 그 일로 우리 딸과 다퉜어. ‘왜 울어요? 그 사람은 엄마한테 진즉에 죽은 사람이라고요.‘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해. 내 기억 속에서 전쟁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야. 그곳에서 행복했으니까…..
다만 부탁인데, 내 성은 밝히지 말아줘. 내 딸을 위해서……"

소피야 K-비치, 위생사관 - P413

또하나의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는 그 누구도 지도에 중립지대가 어디를 통과하며 전선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따위를 표시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얼마나 많은 무장세력들이 목숨 걸고 싸웠는지 헤아리지도 않았다. 이들은 고사포, 기관총, 사냥총으로 싸웠고, 또 낡은 베르당총으로 싸웠다. 잠깐 숨 고를 여유도 대대적인 총공세도 없이 대부분 많은 이들이홀로 싸웠다. 그리고 홀로 죽어갔다. 사단이니 대대니 중대니 하는 군대가 아니라 민중이 직접 빨치산이 되고 지하공작원이 되어 적과 맞섰다. 남자들, 노인들,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까지. 톨스토이는 이처럼 다양한 인간 군상의 결사항전을 두고 ‘민중전의 곤봉‘이니 ‘애국심의 감 - P435

춰진 온기‘라 칭했고, 히틀러는(나폴레옹에 이어서) 자기 부하들에게 ‘러시아가 규칙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 전쟁에서는 죽음이 가장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정말 두려운 건따로 있었다..... 전쟁의 한복판, 전선에서 자기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병사를 상상해보라. 아이들과 아내와 늙은 부모, 언제든 사랑하는 가족을 희생시킬 각오가 돼 있어야 했다. 가족을 죽음의 길로 내보낼 각오가. 그래서 이 전쟁에서는 용맹무쌍함도 비열한 반역 행위도 증언해줄 목격자 없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시골마을들에서는 전승기념일에 기뻐하는 대신 눈물을 흘린다. 아니 통곡을 한다. 가슴을 친다.  "정말 끔찍했어….... 피붙이들을 모두 땅에 묻었지. 전쟁터에 내 영혼도 묻고 왔어." (B. G. 안드로츠크, 지하공작원) - P436

지휘관은 항복해야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나 번민에 휩싸였지. 우리는 지휘관을 잠시도 혼자 두지 않았어. 계속 옆에 붙어 있었지. 자살이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모스크바와 연락을 취했어. 상황을 보고했지. 지시가 내려왔고 ...... 지시를 받은 바로 그날 부대에서 회의가 소집됐어. 결국 ‘독일군의 도발행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지. 지휘관은 공산주의자로서 당의 규율에 복종했어…… 이틀 후 우리 정찰병이 마을로 내려갔어. 그들이 가지고 온 소식은 끔찍했어. 지휘관의 가족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었으니까. 첫 전투에서 지휘관은 전사하고 말았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어.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 내 생각에 일부러 죽음을 택한 게 아닌가 싶어.……
나는 그저 눈물만 흘려 말은 못하고 ...... 나 스스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확신이 안 서는 걸 어떡해? 믿게 할 자신이 없는 걸.…… 사람들은 그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지. 고통스러운 이야기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아...…." (V. 코로타예바, 빨치산 병사)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 일을 멈출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 P437

밤에 누워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엄마는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아니, 나 때문이 아니야…… 만약 내가 가족 때문에 겁을 먹고 적과 싸우지 않았다면, 만약 다른 누군가도 나와 같은 이유로 똑같이 그랬다면,
또다른 누군가도, 그리고 또다른 누군가도 그랬다면 지금의 승리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 일을 다 잊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 엄마가 저만큼 걸어오는데..... 발포 명령이 떨어지는 거야…… 그러면 나는 엄마가 나타나는 쪽에 총구를 겨눠야 했지..… 엄마의 하얀 머릿수건…… 이런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당신은 몰라. 알 리가 없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힘들어. 밤에 문득 창밖에서 아이 웃음소리나 목소리가 들리면 온몸에 경련이 일지. 꼭 그때 그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아서, 비명소리 같아서. 하루는 문득 잠이 깼는데 숨을 못 쉬겠는 거야.  당신은 사람 타는 냄새에 숨이 막혀서..…탈 때 나는 냄새가 어떤지 모를 거야. 특히 여름에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면서도 달짝지근한, 그런 냄새지. 지금 나는 구역집행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어. 어디든 화재가 발생하면 그곳으로 가서 서류를 작성하는 게 내 일이야. 하지만 농장 같은 데서 불이 나 동물들이 타 죽었다고 하면그곳은 절대 안 가. 갈 수가 없어..…그때가 떠올라서...... 그 냄새 …… 사람들이 불에 타던 냄새 ..... 밤에 잠이 깨면 정신없이 향수를가지러 가. 하지만 향수에서도 그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사방에서 그 냄새가 나…… - P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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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같은 것을 말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에 대처하는 그네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 죽음은 늘 그네들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새 삶만큼이나 가깝고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네들이 어떻게 이 한없는 죽음의 실험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해보려 한다.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매번 목숨을 내놓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었는지.
과연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감정이 허락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말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질문은 자꾸만 많아지는데, 대답은 자꾸만 적어진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P 373, 374



전쟁터의 수많은 사람들 ...... 그리고 전쟁터의 수많은 일거리들……
죽음의 언저리만이 아니라 삶의 언저리에도 일은 많다. 전쟁터라고해서 총을 쏘거나 맹사격을 퍼붓고, 지뢰를 놓거나 제거하고, 폭격을 가하거나 폭파하고, 백병전에 뛰어드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쟁터에서도 빨래를 하고, 죽을 끓이고, 빵을 굽고, 부엌 식기들을 씻고, 말을 돌보고 자동차를 수리하고, 관을 짜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군화에 밑창을대고, 담배를 들여온다. 어쩌면 오히려 전쟁터에 더 많은 일상의 삶이있는지도 모른다. 하찮고 사소한 일들 역시.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 거예요. 그렇죠? 전쟁터야말로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다면말이에요." 위생병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미슈티나는 이렇게 회상한다. 군대가 앞서가면 ‘제2전선‘이 그 뒤를 쫓아갔다. 세탁부, 요리사, 기 - P299

계수리공, 우체부.…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는 영웅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대 뒤에 가려졌지요." 그곳, 무대 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진창길을 따라 행군중이었지. 말들은 그 진창에 빠지거나 정신없이 넘어졌어. 화물트럭들도 진흙 속에 박혀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했지…… 병사들은 대포를 자기 몸에 감아서 끌었어. 어디 그뿐이야.
곡식수레며 속옷수레며 이불수레도 끌어야지, 담배상자도 끌어야지. 담배상자 하나가 미끄러져 진흙탕에 빠졌어. 그랬더니 세상에, 욕을 욕을하는데 ...... 병사들에겐 담배도 포탄이나 탄약만큼 중요했거든......
남편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한테 그러는거야. ‘두눈똑바로 뜨고 봐! 이건 서사야! 서사라고!"

타티야나 아르카지예브나 스멜랸스카야 종군기자 - P300

-전선에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부상병들을 돌봤어. 물을 먹여주고 밥을 먹이고 변기를 가져다줬지 이 모든 게 우리 일이었어. 나보다 나이 많은 어떤 언니랑 짝이었는데 그 언니가 처음에 나를 많이 도와줬어. ‘환자가 소변기를 찾으면 나를 불러.‘ 부상자들은 전부 팔 없는 사람, 다리 없는 사람 같은 중환자들이었어. 첫날은 언니가 도와줬지만 그다음부터는 나 혼자 해야 했지. 그언니가 하루종일, 밤새도록 나랑 같이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부상자가나를 불렀어. ‘간호사, 소변기‘
그 환자에게 변기를 내밀었어. 그런데 받지를 않네. 보니까 팔이 없는거야.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는 막연하게나마 알겠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말 모르겠는 거야. 몇 분을 가만히 서 있었어. 나를 이해하겠어? 그 환자를 도와야 하는데...... 나는그게 뭔지 몰랐어. 한 번도 본 적도 없었고, 학교에서도 그런 건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스베틀라나 니콜라예브나 류비치, 위생부대원 - P303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 그래서 꾸며서 말할 줄은 몰라…… 우리는 병사들 옷을 담당했어. 병사들의 옷이란 옷은 죄 가져다빨고 다림질도 했지. 그러니 거기 무슨 영웅담이 있겠어. 기차를 타고가는 일은 별로 없었고 주로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말들이 너무 지쳐서 베를린까지 거의 우리 발로 걸어갔다고 보면 돼. 글쎄, 또 무슨 일을 했더라. 우리가 한 일이라…… 그래, 부상자들을 끌어 나르는 것도 도왔어. 드네프르에서는 탄약이며 포탄도 우리가 직접 다 들어서 나르고, 차로는 운반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 몇 킬로그램씩을 팔로 안고 날랐지.
그리고 방공호도 파고 다리도 놓고…….
한번은 적에게 포위를 당했어. 그래서 나도 다른 병사들처럼 뛰어다니고 총도 쐈지. 내 총에 사람이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나도 잘 몰라. 나는 그저 다른 병사들처럼 뛰고 총 쏘고 한 것뿐이니까.
그런데 어쩜 이렇게 생각이 안 나지. 그 많은 일을 겪어놓고도! 차차기억이 나겠지....… 우리집에 한번 더 와……

안나 자하로브나 고를라치, 사병, 세탁병 - P306

"나는 군대에서 기록병사였어..... 그 일을 맡기기 위해 나를 사령부로 보내려고 설득들을 하는데 ..... 내가 전쟁 전에 사진사로 일한 사실을 안다면서 자기네 사령부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는데, 나는 죽음을 카메라에 담는 게 싫었어. 전사한 사람들을 찍고 싶지는 않더라고 주로 병사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지. 담배를 피운다거나 포상을 받고 활짝 웃는다거나 할 때, 그때 나한테 컬러필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흑백필름밖에 없었거든. 아, 연대 깃발하강식 ..... 정말 멋지게 찍을 수 있었는데……
요즘.…. 기자들이 찾아와 물어. ‘전사자들 사진도 찍었나요? 전장은....‘ 그런 사진이 있나 뒤져봤지…… 별로 없더라고. 죽음에 대한 사진은 잘 안 찍었거든…… 부대에서 누군가 전사하면 병사들이 나를찾아와 사진을 부탁했어. ‘혹시 그 친구 살아 있을 때 사진 있나요? 그러면 같이 사진을 찾는 거야…… 환하게 웃고 찍은 사진을……"

엘레나 빌렌스카야, 중사, 기록병 - P307

"우리는 건설 일을 했어…… 철도 건설하고 배다리도 놓고 엄폐호도 만들었지. 전선 바로 옆에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밤에만 땅을 팠어.
벌목도 했어. 우리 분대원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어. 게다가 다들 어렸고, 남자들도 몇 명 있긴 있었지만 벌목을 할 만한 건강이 아니었지. 그러면 그 나무를 어떻게 날랐냐고? 여러 명이 다 같이 달려들어 날랐어, 어떤 나무는 분대원 전체가 힘을 합쳐서 겨우 끌어내오기도 했지. 손바닥이 파이고 까져서 피투성이가 되곤 했어. 어깨도……"

조야 루키야노브나 베르즈비츠카야, 건설대대 분대장 - P308

"나는 전쟁이 치러지는 4년 내내 돌아다녔어.... 도로 표지판을 안내 삼아 각지를 다녔지. ‘슈킨 농장‘ ‘코즈로 농장‘ .… 내가 맡은 임무는 보급기지에서 물품을 받아다 최전방 병사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이었어. 주로, 병사들에게 꼭 필요한 담배, 궐련, 부싯돌 같은 것들을 가져다줬지. 어디는 차량을 타고 가서 전달하고, 또 어디는 짐마차로 가기도했지만 대개는 병사 한두 명을 데리고 걸어서 갔어. 그 많은 걸 다 우리가 직접 들고서. 참호 같은 곳은 특히나 마차로 갈 수가 없었거든. 독일군이 마차 소리를 들으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전부 우리가 이고지고 해서 가져갔지. 우리가 직접 다……"

엘레나 니키포로브나 옙스카야, 사병, 물품보급병 - P309

나는 고리키 시 통신학교의 우편근로자 양성 과정에 들어갔어. 과정을 마치고 전방부대인 제60보병 사단으로 발령받았지. 연대 우체국에서 장교로 복무했어. 그래서 최전선 병사들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지. 얼마나 좋은지 눈물을 뚝뚝 흘리고, 편지에 입을 쪽쪽 맞추더라고. 하지만 전쟁통에 가족을 잃거나 가족이 독일군 치하에 사는 병사들도 많았거든. 그런 병사들은 편지를 받을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익명으로 편지를 썼지. ‘안녕하세요, 군인아저씨! 이름 모를 소녀가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적군과 싸우세요? 언제 적을 물리치고 돌아오시나요?‘ 밤마다 앉아서 편지를 썼어…… 전쟁 내내 그런 편지를 수백 통도 넘게 쓴 거야.……"

마리야 알렉세예브나 렘네바, 소위, 우편병 - P310

몇 년 사이에 수백 가지 이야기들이 모였다…… 종류별로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돈된 수백 개의 녹음테이프와 수천 장의 이야기 원고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찬찬히 페이지를 넘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예기치 못한 모습을 드러내는 전쟁의 세계, 예전에 나는, 이를테면 이런 건 묻지 않았다. ‘어떻게 몇 년씩 참호안에서 쭈그려 자고, 맨바닥에 모닥불 피워놓고 잘 수 있나? 어떻게몇 년씩 똑같은 군화에 똑같은 군용외투만 입을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몇 년씩 웃지도 않고 춤도 안 추고 살 수가 있나? 여름에 여름옷도안 입고 어떻게? 높은 구두와 꽃도 다 잊어버리고 어떻게……‘ 그네들 모두 열여덟,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 아니었던가! 나는 으레 전쟁터에 무슨 여자의 삶을 위한 자리가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전쟁터에서 여자로 사는 건 불가능하며 전쟁터는 여자에게 금기의 장소라고 말이다.  - P337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나는 이미 첫 만남에서부터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정말이다!).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 아이가 죽어서 관속에 누웠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 거야..... 꼭 어여쁜 신부 같더라니까……"(A. 스트로체바, 보병) "메달을 받게 됐어. 그런데 내 군복이 너무 낡은 거야. 그래서 가제로 군복 칼라를 만들어 달았지. 어쨌든 하얀색이니까…… 칼라 하나 만들어 달았을 뿐인데, 그 순간 내가 최고로 아름다운 아가씨가 된 것 같더라니까. 거울이 없어서 볼 수는 없었지만. 아휴, 그땐 거울이 다 뭐야, 폭격에 죄 날아가고 남아난 게 없었는데……"(N. 예르마코바, 통신병) 그네들은 그때 어린 아가씨답게 어수룩했던 자신들의 작은 속임수부터 자잘한 비밀들, 남몰래 자기들끼리만통하던 신호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모두 즐겁게 털어놓았다.  - P338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일상 속에서,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임무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들려주었다. 스스로의 본성을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그들은 놀랍게도(4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쟁의 일상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소소한 사건들과 그때의 느낌, 색채, 소리 들까지. 그네들의 세계에서는 일상과 존재가 하나였고, 따라서 존재의 흐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전쟁도 평범한 삶의 한때일 뿐이었다.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을 압도하는 순간을 여러 번 목도했다. 역사마저 간단히 제압해버리는 그 순간을. "내가 전쟁터에서만 예뻤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곳에서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지나가버렸어.  - P338

다 타버렸지. 그러고는 순식간에 늙어버렸어……" (안나 갈라이, 자동소총병)
수많은 시간의 결을 지나오면서 어떤 일들은 갑자기 커졌고 어떤 일들은 작아졌다. 인간적이고 내밀한 일들은 커졌다. 그리고 그게 나에게는 재미있게도 그네들 자신에게도 더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왔다. 인간적인 것이 비인간적인 것을 이겼다. 단지 인간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울더라도 걱정하지 마. 불쌍해하지도 말고 내가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 내버려둬. 하지만 당신이 고마워.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해줘서……" (K. C. 치호노비치, 중사, 고사포 병사)
그건 나도 몰랐던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339

"내가 정말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총을 쏘았는지는이야기할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울었는지는 말 못하겠어. 그건 아마못다 한 이야기로 남을 것 같아.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사람은 전쟁터에서는 무시무시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그런 사람을어떻게 이해하지?
당신은 작가잖아. 직접 한번 생각해봐. 뭔가 아름다운 말, 들끓는 이도 더러운 진흙탕도 없고 구토물도 없는…… 보드카 냄새도 피냄새도없는 그런 말을…… 우리 삶처럼 끔찍한 그런 거 말고……"

아나스타시야 이바노브나 메드베드키나, 사병, 기관총 사수차 - P366

"문득 음악 소리가 들리면…... 아니면 노랫소리…... 여자 목소리도…… 그러면 그때 그 느낌이 되살아나. 그때랑 비슷한 뭔가가 느껴져……
전쟁영화를 봐도 사실이 아니고 책을 읽어도 사실이 아닌 거야. 그러니까, 그게 달라 ∙∙∙∙∙∙ 뭔가가 달라. 그렇다고 전쟁을 직접 겪은 내가 이야기하면 정확하냐. 그것도 아니거든. 전쟁은 그렇게 끔찍하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어. 때론 전쟁터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전투가 있는 날 아침이면…… 주위를 보며 생각했지. ‘어쩌면 아침을 맞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공기도…… 햇살도……"

올가 니키티치나 자벨리나, 군의관 외과의 - P367

"우리는 가시철조망이 쳐진 게토에 살았어…… 화요일에 그 일이 일어났지. 모르겠어, 왜 화요일이었다는 것만 기억에 또렷한지. 화요일 ..… 며칠이었는지, 몇 월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분명 화요일이었어. 우연히 창밖을 봤어. 세상에, 우리집 맞은편 벤치에 소년과 소녀가 앉아서 키스를 하고 있더라고. 끔찍한 살육과 총살이 난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그 아이들이 키스를 하고 있더라니까. 나는 그평화로운 광경에 충격을 받았어…… - P367

짧았던 우리 거리 한쪽 끝에서 독일군 순찰병이 나타났어. 그들도 당연히 아이들을 봤지. 앞이 훤히 트여 있었으니까. ‘저걸 어째‘ 하며 놀라고 말고 할 틈이 없었어. 정말 그럴 새가 없었어…... 비명소리. 그리고 온 거리를 울리는 굉음, 총소리……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당장 공포심이 밀려오더군. 소년과 소녀가 잠깐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이내 고꾸라지는 모습만 볼 수 있었어. 둘은 함께 쓰러졌어.
그렇게 그 일이 있고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 다시 하루가 지나는데....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거야. 알아야만했어. 그 아이들은 왜 집이 아닌 거리에서 입을 맞췄을까? 왜? 그런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걸까..... 아이들은 언젠간 게토에서 죽을 운명이란걸 알았던 거야. 그래서 다른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거고. 그건 사랑이었어.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어..... 사랑밖엔.
당신에게 이야기하다보니 ..... 그 일이 아름답게 들리기도 하네. 하지만 실제로는? 실제로는 너무 끔찍한 경험이었지…. 그래…… 아니면 뭐? 지금 생각해보면 ..… 그 아이들은 맞서 싸웠던 거야…… 아름답게 죽고 싶었던 거지. 나는 그게 그 아이들의 선택이었다고 확신해......"

류보피 에두아르도브나 크레소바, 지하공작원 - P368

나는 늘 같은 것을 말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에 대처하는 그네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 죽음은 늘 그네들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새 삶만큼이나 가깝고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네들이 어떻게 이 한없는 죽음의 실험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해보려 한다.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매번 목숨을 내놓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었는지.
과연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감정이 허락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말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질문은 자꾸만 많아지는데, 대답은 자꾸만 적어진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 P373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그네들 중 한 명을 벨라루스 국립대학교강당에서 만났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즐겁게 떠들며 노트를 챙기고있었다. "그때 우리가 어땠냐고?" 그녀가 내 질문에 역시 질문으로 답했다. "지금 여기 학생들하고 똑같았어. 글쎄, 다른 게 있다면, 옷 입는 거나 액세서리 정도? 그땐 더 검소하게 하고 다녔어. 구리 반지, 유리 목걸이 그리고 고무 슬리퍼 청바지나 녹음기는 없었고."
나는 바쁘게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P374

이제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랑은 전쟁터에서 사람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개인적인 사건이다.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공동의 사건들일 뿐 죽음까지도.
그네들을 만나면서 의외라고 느낀 점이 있었다면? 그건 그들이 죽음을 말할 때보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 덜 솔직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마치 자기방어라도 하듯 줄곧 뭔가를 감추고 털어놓지 않았다. 언제나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았다. 아주 철저하게 선을지켰다. 그네들 사이에 ‘더이상은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장막이 쳐졌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건지 이해가 된다. 전쟁 후에 자신들을 향해 쏟아진 곱지 않은 시선과 악의에 찬 오해이리라. 그네들은 이미 고통을 당할 만큼 당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쟁이끝나고도 그들은 또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 P395

이미 치르고 돌아온 전쟁에 견줘 결코 가볍지도 쉽지도 않은 또다른 전쟁. 만약 누군가 밑바닥까지 솔직하기로 작정하고 무모하리만큼 대담한 고백을 하고 나면 대화를 마무리할 즈음 반드시 이렇게 부탁해왔다. "내 성을 다른 성으로 바꿔서 내줘." "우리 때는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 내는 게 아니었어....…
상스러운 행동이었지...." 하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들 중엔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사연들이 더 많았다.
당연히 이 이야기들이 그네들 삶의 전부도 아니고 모든 진실도 아니다. 하지만 그네들의 진실이다. "전쟁이여 저주 받을지어다. 우리의 가장 아픈 시간이여!"라고 통탄한 전쟁 세대 어느 작가의 솔직한 고백처럼. 이 이야기들은 그네들의 삶에 대한 암호이자 에피그라프다.
아무튼 그곳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죽음이 맴도는 그곳에서의 사랑은.....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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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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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의 전쟁‘이 담긴 네 개의 녹음테이프(이틀간의 대화)를 가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충격과 공포, 의혹과 경탄. 호기심과 당혹, 연민, 친구들에게 그녀의 이야기 중 몇 가지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뜻밖에도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들. ‘어휴, 너무끔찍하다. 어떻게 그걸 다 겪었대? 그러고도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대?‘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하고는 많이 다르네. 우리가 아는 전쟁은 경계가 확실하잖아. 적과 우리 편, 선과 악, 그런데 이 전쟁은?‘ 하지만 모두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들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들이리라. 이미 수천 번도 넘는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음에도(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봤는데, 지구상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을 합치면 3천 번도 넘는다고 한다),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수 있을 테니까. 할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 ㅡ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대화하는 중에도 아픔과 공포의 그늘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기에. 순간 스치는 고통의 표정 앞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사람은 고통이 있기에 아름다운 건 아닐까‘라는 불순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란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P 267, 268

주소가 참 다양도 하다. 모스크바, 키예프,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압셰론스크, 비텝스크, 볼고그라드, 얄루토롭스크, 수즈달, 갈리치, 스몰렌스크…… 이 많은 곳을 언제 다 돌아볼 것인가? 이 넓고도 큰 나라에서.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은 지원군이 나타났다. 기대하지 않은 도움의손길, 우편함을 열어보니 초대장이 하나와 있다. 바토프 장군 휘하 제65군 참전용사들이 보내온 초대장이다. "5월 16일과 17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모임이 있습니다. 전통의식과 의전행사도 있을 예정입니다. 상황이 허락되는 사람들은 다 오기로 했지요. 무르만스크카라간다.
알마티, 옴스크에서 도착할 겁니다. 전국 곳곳에서 모이는 거지요 우리의 광활한 조국 구석구석에서.……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모스크바‘ 호텔 5월은 전승기념의 달이다. 곳곳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고, 사진을 찍는다. 다들 가슴에 꽃을 달았든 훈장이나 메달을 달았든 아랑곳없다. 나는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들어간다. 몸이 둥실 떠오르고 흘러가고 떠밀리다보니 어느새 낯선 세계에 와 있다. - P233

낯선 섬나라에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분명한 사실하나를 깨닫는다. 내가 이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 이들은 대개 우리사이에서 잊힌 존재이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제이 세상을 떠날 나이가 되었고 그 수도 점점 줄어들지만 우리는 점점더 많아지니까. 이들은 1년에 한 번씩 다 함께 만남의 자리를 갖는다.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들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시간이란 바로 그들 자신의 기억이다.
7층 52호에 5257병원 사람들이 모였다.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군의관이자 대위인 알렉산드라 이바노브나 자이체바. 내가 나타나자 무척기뻐하면서 방에 모인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시킨다. 마치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 같다. 사실 이 방문을 두드린 건 순전히 우연이다. 완벽한우연. - P234

방에 모인 이들의 이름을 적는다. 외과의 갈리나 이바노브나 사조노바, 의사 옐리자베타 미하일로브나 아이젠시테인, 외과 간호사발렌티나 바실리예브나 루키나, 수술 담당 수간호사, 안나 이그나티예브나 고렐리크, 그리고 간호병들이었던 나데즈다 표도로브나 포투즈나야, 클라브디야 프로호로바 보로둘리나, 엘레나 파블로브나 야코블레바, 안겔리나 니콜라예브나 티모페예바, 소피야 카말디노브나 모트렌코, 타마라드미트리예브나 모로조바, 소피아 필리모노브나 세묘뉴크, 라리사 티호노브나 데이쿤. - P234

‘죽고 싶지 않아!‘ 아니면 ‘씨발‘ 같은 욕을 하거나……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 몰다비아 노래...... 사람들은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아. 믿질 않지. 하지만 머리카락 밑에 샛노란 색이 나타나고 얼굴을 따라 움직이던 그림자가 나중에 옷 밑으로 뚝 떨어지는 걸 보게 돼 ......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표정은 마치 산 사람 같지 깜짝 놀란 얼굴로 ‘내가 어떻게 죽을 수있지? 정말 내가 죽은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
부상병이 아직 들을 수 있는 동안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당신이 죽는다니 말도 안 돼요‘라고 말해줬어. 입을 맞추고 안아주며 ‘걱정 마요, 괜찮아요‘라고 위로도 했지. 이미 숨을 거둬서 눈이 허공을 보는데도 나는 계속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어...… 뭔가 안심시키는 말을…… 그 이름들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얼굴들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어...…." - P242

"독일군은 여자병사들은 포로로 잡지 않았어..… 바로 총살해버렸지. 아니면 자기 병사들 앞에 끌고 나와 ‘자, 여기 이것들은 여자가 아니다. 추악한 괴물이다‘라고 하거나.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총알을 따로 가지고 다녔어. 불발될 경우를 대비해 두 발씩.
우리 간호병 하나가 독일군에게 붙잡혔어…… 하루가 지나 우리가그 마을을 공격해 들어갔는데 사방에 죽은 말이며 오토바이며 장갑수송차 등이 나뒹굴고 있더라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은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우리는 그 아이 배낭에서 가족이 보낸 편지들과 고무로 된 작은 파랑새를 발견했어. 애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 고무새를……" - P243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어...... 어느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곳 숲 주변에 빨치산 병사들이 줄줄이 죽어 있는 거야. 그때 독일놈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세상에,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말이 안 나와 다들 갈기갈기 찢겨서는...... 내장은 내장대로 돼지 내장처럼 다 쏟아져나와 있고...... 그렇게들 누워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있는 게 보였어. 안장까지 그대로 얹혀 있는 걸로 봐서 빨치산 병사들말인 것 같았어. 독일군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온 건지, 아니면독일군이 미처 못 잡아간 건지 알 수가 없더군. 녀석들은 멀리도 안 가고 근처에 머물렀어. 풀이 많았거든. ‘어떻게 사람이 돼가지고 말들이보는 데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싶었지. 동물이 있는 데서. 말들이 다 보았을 텐데……." - P248

"들도 숲도 불길에 휩싸였어…… 초원에 연기가 자욱했지. 암소와 개들이 불타 죽어 있고..... 냄새가 특이하더라고. 처음 맡는 냄새였어. 그리고 또…… 토마토절임, 양파절임을 담가놓은 동그란 통들까지 불에 타 뒹굴었어. 새들도 불타고, 말들도 불타고…… 많은 게…… 정말 온갖 것들이 다 불타서 길거리에 나뒹굴었어. 우리는 그 냄새에도 익숙해져야 했지…… 그때 알았지. 불은 모든 걸 태운다는 걸...... 심지어 피까지도 태워없앤다는 걸......" - P248

"그걸 어떻게 얘기하나...... 글쎄, 어떻게…… 왜 있잖아…… 늦가을이면 철새들이 이동하는 거…… 길게 길게 무리 지어서. 우리 대포, 독일군 대포가 한꺼번에 불을 뿜는데 새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날아가는 거야. 새들이 어떻게 비명을 지르겠어? 어떻게 새들에게 ‘이리로 오면 안 돼! 여기 오면 죽어!‘라고 알려줘? 어떻게? 끝내 새들은 계속 땅으로 떨어졌어......" - P249

전쟁전에 우리 마을에 꾀꼬리들이 참 많았거든.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2년 동안 아무도 꾀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지. 온 마을 땅이 뒤집혀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땅이란 땅은 전부 고릿적 똥거름 주던 시절처럼 싹 갈아엎었거든. 3년 후에야 꾀꼬리가 나타났어. 어디에 있다온 걸까? 아무도 모르지. 아무튼 녀석들은 3년이 지나서 자기들 살던고향땅으로 돌아왔어.
사람들이 다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자 꾀꼬리도 다시 날아든 거야......"


‘난 들꽃을 보면 전쟁이 떠올라 전쟁 때 우리는 꽃을 꺾지 않았어. 꽃을 꺾는다면 그건 누군가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서였지…… 작별을고하려고....."


"아이고, 아이고, 얼마나 추악한지.....… 그놈의 전쟁이란 게...… 먼저 간 우리 동무들이나 추모하자고......" - P252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
나직하면서도 자주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대면할 때, 그리고 과거에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앞에섰을 때 놀라고 당황한다. 과거는 사라졌다. 과거는 뜨거운 소용돌이를일으키며 눈을 멀게 하고는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사람은 남았다. 평범한 보통의 삶 한가운데 사람만 남은 것이다. 자신의 기억 외에는 주위의모든 것이 평범하다. 나 역시 목격자가 되어간다.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는지, 어떻게 기억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또 무엇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기억의 저 깊은 구석으로 밀쳐버리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장막을 쳐버리고 싶어하는지를 보고 듣는 목격자, 적절한 말을찾지 못해 절망하면서도,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온전한 표현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과거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본 - P255

다. 그때는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얼마나 보고 싶어하고 이해하고 싶어하는지를.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신과 새롭게 만난다. 이들은 이미 두 사람이다. 저 사람이면서 이 사람이다. 젊은이면서 늙은이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이면서 전쟁 후의 사람이다. 오래전에 전쟁이 끝난 사람, 나는 늘 내가 동시에 두 목소리를 듣는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전승기념일에 모스크바에서 우연히 올가 야코블레브나 오멜첸코를만났다. 다른 여자들은 모두 고운 봄옷에 화사한 머릿수건을 하고 있는데 그녀만 군복에 군인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키가 크고 다부져 보이는그녀. 그녀는 대화를 나누지도 울지도 않았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특별한 침묵이었다. 바로 그 침묵 안에 말로 내뱉은 어떤 이야기보다 더 깊은 사연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은필요치 않은 것처럼. - P256

한번은 내가 피투성이가 됐는데...... 늙은 병사 한 명이 다가와 나를 안고는 이렇게 말하는 거야. ‘전쟁이 끝나고 이 소녀병사가 살아남는다해도 더이상 사람 꼴로는 살지 못할 텐데, 어쩌나. 이 아이 인생도 이제 끝이구나.‘ 그래, 나는 그런 지옥 같은 상황의 한복판에서 견뎌야 했지. 그것도 그렇게 어린 나이에 ! 나는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었고, 사람들이 나를 부축해서 막사로 데려갔어.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어...... 전기가 훑고 지나간 것처럼 온몸이 떨리고 ...... 글쎄, 어떻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지..…
다시 전투가 벌어졌어...... 셉스크 근처에서 독일군이 하루에만 벌써 예닐곱 번이나 우리를 공격했어. 바로 그날 나는 전장으로 뛰어들어 부상병들을 끌고 나왔어. 당연히 무기도 함께 챙겨서 나왔지. 그리고 마지막 부상병에게 기어갔는데, 팔이 거의 떨어져나갔더라고, 갈가리 찢겨서 건들거리는데…… 힘줄만 남고...... 피범벅이었어…… 상처를 싸매려면 당장 팔을 잘라내야 할 판이었어. 다른 방법이 없었지.  - P263

나는 전쟁터에서 모든 걸 잊었어. 지난 삶은 다. 전부 다………… 사랑도잊었지....…
수색중대 지휘관이 나를 좋아하게 됐어. 자기 부하들을 통해 쪽지를 보내왔더라고. 한 번 그를 만났지 만나서 그랬어. ‘난 아니에요. 이미 오래전에 저세상으로 간 사람을 사랑하고 있거든요.‘ 그러자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가버리더군. 쏟아지는 총탄 속을 그대로 걸어서 고개 숙이지 않고…..… 나중에 우크라이나에서 우리가 큰 마을 하나를 탈환했어. 마을이나 한번 둘러보자 싶어 어귀로 들어섰지. 해가 밝게 비치는 날이었어. 농가들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났지. 그런데 마을 뒤편 새로 다진 땅에 무덤들이 죽 늘어서 있는 거야....… 이 마을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의 무덤이었어. 나도 모르겠어. 왜 그곳으로 발길이 끌렸는지. 가서 보니 작은 목판에 병사들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더군. 무덤 하나하나마다.……  - P265

그러다 갑자기...... 아는 얼굴이 보이는데 ......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수색중대 지휘관, 바로 그 사람 얼굴이었어. 이름도 맞고 ...... 순간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 갑자기 무서워지고...... 꼭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고,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 바로 그 순간 그 사람 부하들이 그러니까 중대원들이 무덤 쪽으로 오는 게 보였어. 모두 나를 알고 있었지. 예전에 나한테 쪽지를 전해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더군. 내 쪽으론 시선 한번 안주고 그들에게 나는 투명인간이었어. 나중에 그들과 다시 한번 마주쳤는데 마치…… 그들이..… 내가 죽기를 바랐던 것처럼 생각됐지. 나 보기가 힘든 것 같았어∙∙∙∙ 살아 있는 나를 보는 게…… 꼭 그렇게 느껴지더라니까…… 내가 그들 앞에 죄인이 된 것 같았지…… 그 사람한테도…… - P265

전쟁에서 돌아와 심하게 아팠어.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지. 어떤 노교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분 덕분에 나았어.…약보다는 말로 더 많이 치료해주셨지. 내 병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도 해주시고, 그 교수님 말씀이, 만약 내가 열여덟, 열아홉에 전선에 나갔다면 그런대로 몸이 튼튼해졌을 거래. 그런데 나는 열여섯에 갔잖아. 열여섯은 너무 어린 나이라 몸이 많이 손상을 입었다는 거지. 교수님이 설명해주셨어. 물론, 약을 복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해요. 어느 정도는 치료될수도 있어요. 하지만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고 싶다면, 또 살고 싶다면 내 말대로 해요. 결혼해서 될 수 있는 한 아이를 많이 낳아요. 그 방법만이 당신을 살릴 수 있어요. 아이를 낳을 때마다 당신 몸도 그만큼 회복될거요‘
-그때가 몇 살 때였나요?
- 전쟁이 막 끝났을 때니까, 스무 살이었어. 물론, 그때 나는 결혼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어. - P266

-왜죠?
ㅡ너무 지쳐서. 내가 동갑내기들보다 훨씬 나이든 것 같았고, 어떨 땐 늙은이가 된 것 같고 그랬지. 친구들은 춤추러 다니고 즐겁게 사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 인생을 나이든 사람의 눈으로 바라봤으니까.
다른 세상의 시선으로…… 노파의 시선으로! 젊은 남자들이 구애를 해왔어. 아직 어린애들이었어. 그들은 내 영혼을 보지 못했어.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지. 아까 내가 어떤 하루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 셉스크 전투에 대해서…… 기껏해야 하루였는데··· 그날 밤 내 양쪽 귀에서 피가 흘렀어. 아침에 일어났는데 꼭 중병을 앓고 난 사람 같더라고. 베개는 온통 피로 물들고..... - P266

병원에서는 어땠냐고? 병원 수술실에 가리개로 칸막이를 친 곳이 있었어. 그곳에 절단한 팔과 다리를 담은 커다란 통을 놓아두었거든…… 최전선에서 대위 하나가 부상당한 자기 동료를 데리고 병원에 왔어. 어떻게 수술실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는데, 대위가 그 통을 본 거야…… 보고는 그대로 기절해버렸지.
기억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끝도 없이 ..... 그런데 가장 중요한게 뭔지 알아?
나는 전쟁의 소리를 기억해. 사방에서 으르렁, 쾅쾅, 쨍쨍 불을 뿜어대던 그 소리들...... 전쟁터에서는 사람의 영혼마저 늙어버리지, 전쟁이 끝나고 나는 다시는 젊음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 그게 제일 중요한 점이지. 내 생각엔 그래……
-결혼은 하셨나요? - P267

ㅡ했지. 아들 다섯을 낳아 길렀어. 아들만 다섯. 딸은 하늘이 주시지않더라고, 나 스스로도 가장 놀라운 일은 그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겪고도 예쁜 아이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 게다가 좋은 엄마에 좋은할머니까지 되었다는 사실이지.
이제 와서 모든 걸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내가 아니었던 것 같아. 어느 다른 소녀였지……"


‘또하나의 전쟁‘이 담긴 네 개의 녹음테이프(이틀간의 대화)를 가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충격과 공포, 의혹과 경탄. 호기심과 당혹, 연민, 친구들에게 그녀의 이야기 중 몇 가지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뜻밖에도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들. ‘어휴, 너무끔찍하다. 어떻게 그걸 다 겪었대? 그러고도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 - P267

대?‘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하고는 많이 다르네. 우리가 아는 전쟁은 경계가 확실하잖아. 적과 우리 편, 선과 악, 그런데 이 전쟁은?‘ 하지만 모두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들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들이리라. 이미 수천 번도 넘는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음에도(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봤는데, 지구상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을 합치면 3천 번도 넘는다고 한다),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 P268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수 있을 테니까. 할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 ㅡ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대화하는 중에도 아픔과 공포의 그늘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기에. 순간 스치는 고통의 표정 앞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사람은 고통이 있기에 아름다운 건 아닐까‘라는 불순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란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 P268

탐색은 계속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민스크에서 내가 살고 있는 거리의 이름은 소련의 전쟁 영웅, 바실리자하로비치 코르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코르시는 내전과 스페인전쟁에 참전했고 대조국전쟁에서는 빨치산여단의 여단장을 맡기도 했다. 벨라루스 사람이면 누구나, 적어도 학교에서라도, 그에 대한 책을 읽었을 것이다. 아니면 영화를 보았거나, 벨라루스의 전설. 그의 이름은수백 번도 넘게 각종 봉투며 우편 용지에 새겨졌고,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실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으니까. 신화가 그의 분신이니까. 매일 걷던 낯익은 거리를 지금 나는색다른 감흥에 젖어 걷는다. 트롤리버스를 타고 도시 반대쪽 끝까지 삼 - P271

십 분을 가면 신화의 두 딸들ㅡ두 딸 모두 참전했다ㅡ을 만나게 될 터이다. 그의 아내도. 전설이 생명을 입고 살아나 땅에 발을 딛는 장면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크고 위대한 것이 작고 평범해지는 그 순간을.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만큼. - P272

우리가 마을들을 탈환하고 보면 정말 다 타버리고 재만 한가득이었어요. 사람들에게 남은건 땅밖에 없었죠. 땅이 전부였어요.
언니도 나도 의사의 길을 포기했어요. 전쟁 전에는 의사를 꿈꿨는데 말이에요.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입학시험을 치지 않고 바로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우리한텐 참전용사로서의 특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봤기 때문에 더이상은 볼 수가 없었어요. 상상만 해도 싫었어요. 그래서 이미 30년이 흐른 뒤였는데도 딸아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의과대학을 단념시켰어요. 수십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여요…… 어느 봄날…… 우리는 이제 막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을따라 걸으며 부상병들을 찾아요. 온통 짓밟힌 들판. 저만큼 전사한 병사 두 명이 보여요. 젊은 우리 병사와 역시 젊은 독일군 병사가 어린 밀밭에 하늘을 보고 누워 있죠…… 하지만 전혀 죽은 사람들 같지 않아요. 그저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을 뿐…… 나는 지금도 그 눈길이 잊히질않아요..... - P295

-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말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바이올린 소리가…… 그리고 바로 그날이 나한테는 전쟁이 끝난 날이었어요…… 갑자기 음악 소리라, 그건 기적이었죠…… 또다른 소리가 들려왔어요……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군요…… 우리는 모두 전쟁만 끝나면, 그 숱한 눈물만 그치면 멋진 삶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 믿었어요. 아름다운 인생이. 승리만 하면··· 이날들만 견뎌내면...... 모든 사람이 한없이 선해지고 서로 사랑만 할 거라고 믿었죠. 모두 형제자매가 될 거라고, 우리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려왔는지……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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