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같은 것을 말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에 대처하는 그네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 죽음은 늘 그네들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새 삶만큼이나 가깝고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네들이 어떻게 이 한없는 죽음의 실험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해보려 한다.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매번 목숨을 내놓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었는지.
과연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감정이 허락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말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질문은 자꾸만 많아지는데, 대답은 자꾸만 적어진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P 373, 374



전쟁터의 수많은 사람들 ...... 그리고 전쟁터의 수많은 일거리들……
죽음의 언저리만이 아니라 삶의 언저리에도 일은 많다. 전쟁터라고해서 총을 쏘거나 맹사격을 퍼붓고, 지뢰를 놓거나 제거하고, 폭격을 가하거나 폭파하고, 백병전에 뛰어드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쟁터에서도 빨래를 하고, 죽을 끓이고, 빵을 굽고, 부엌 식기들을 씻고, 말을 돌보고 자동차를 수리하고, 관을 짜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군화에 밑창을대고, 담배를 들여온다. 어쩌면 오히려 전쟁터에 더 많은 일상의 삶이있는지도 모른다. 하찮고 사소한 일들 역시.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 거예요. 그렇죠? 전쟁터야말로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다면말이에요." 위생병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미슈티나는 이렇게 회상한다. 군대가 앞서가면 ‘제2전선‘이 그 뒤를 쫓아갔다. 세탁부, 요리사, 기 - P299

계수리공, 우체부.…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는 영웅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대 뒤에 가려졌지요." 그곳, 무대 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진창길을 따라 행군중이었지. 말들은 그 진창에 빠지거나 정신없이 넘어졌어. 화물트럭들도 진흙 속에 박혀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했지…… 병사들은 대포를 자기 몸에 감아서 끌었어. 어디 그뿐이야.
곡식수레며 속옷수레며 이불수레도 끌어야지, 담배상자도 끌어야지. 담배상자 하나가 미끄러져 진흙탕에 빠졌어. 그랬더니 세상에, 욕을 욕을하는데 ...... 병사들에겐 담배도 포탄이나 탄약만큼 중요했거든......
남편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한테 그러는거야. ‘두눈똑바로 뜨고 봐! 이건 서사야! 서사라고!"

타티야나 아르카지예브나 스멜랸스카야 종군기자 - P300

-전선에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부상병들을 돌봤어. 물을 먹여주고 밥을 먹이고 변기를 가져다줬지 이 모든 게 우리 일이었어. 나보다 나이 많은 어떤 언니랑 짝이었는데 그 언니가 처음에 나를 많이 도와줬어. ‘환자가 소변기를 찾으면 나를 불러.‘ 부상자들은 전부 팔 없는 사람, 다리 없는 사람 같은 중환자들이었어. 첫날은 언니가 도와줬지만 그다음부터는 나 혼자 해야 했지. 그언니가 하루종일, 밤새도록 나랑 같이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부상자가나를 불렀어. ‘간호사, 소변기‘
그 환자에게 변기를 내밀었어. 그런데 받지를 않네. 보니까 팔이 없는거야.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는 막연하게나마 알겠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말 모르겠는 거야. 몇 분을 가만히 서 있었어. 나를 이해하겠어? 그 환자를 도와야 하는데...... 나는그게 뭔지 몰랐어. 한 번도 본 적도 없었고, 학교에서도 그런 건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스베틀라나 니콜라예브나 류비치, 위생부대원 - P303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 그래서 꾸며서 말할 줄은 몰라…… 우리는 병사들 옷을 담당했어. 병사들의 옷이란 옷은 죄 가져다빨고 다림질도 했지. 그러니 거기 무슨 영웅담이 있겠어. 기차를 타고가는 일은 별로 없었고 주로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말들이 너무 지쳐서 베를린까지 거의 우리 발로 걸어갔다고 보면 돼. 글쎄, 또 무슨 일을 했더라. 우리가 한 일이라…… 그래, 부상자들을 끌어 나르는 것도 도왔어. 드네프르에서는 탄약이며 포탄도 우리가 직접 다 들어서 나르고, 차로는 운반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 몇 킬로그램씩을 팔로 안고 날랐지.
그리고 방공호도 파고 다리도 놓고…….
한번은 적에게 포위를 당했어. 그래서 나도 다른 병사들처럼 뛰어다니고 총도 쐈지. 내 총에 사람이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나도 잘 몰라. 나는 그저 다른 병사들처럼 뛰고 총 쏘고 한 것뿐이니까.
그런데 어쩜 이렇게 생각이 안 나지. 그 많은 일을 겪어놓고도! 차차기억이 나겠지....… 우리집에 한번 더 와……

안나 자하로브나 고를라치, 사병, 세탁병 - P306

"나는 군대에서 기록병사였어..... 그 일을 맡기기 위해 나를 사령부로 보내려고 설득들을 하는데 ..... 내가 전쟁 전에 사진사로 일한 사실을 안다면서 자기네 사령부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는데, 나는 죽음을 카메라에 담는 게 싫었어. 전사한 사람들을 찍고 싶지는 않더라고 주로 병사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지. 담배를 피운다거나 포상을 받고 활짝 웃는다거나 할 때, 그때 나한테 컬러필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흑백필름밖에 없었거든. 아, 연대 깃발하강식 ..... 정말 멋지게 찍을 수 있었는데……
요즘.…. 기자들이 찾아와 물어. ‘전사자들 사진도 찍었나요? 전장은....‘ 그런 사진이 있나 뒤져봤지…… 별로 없더라고. 죽음에 대한 사진은 잘 안 찍었거든…… 부대에서 누군가 전사하면 병사들이 나를찾아와 사진을 부탁했어. ‘혹시 그 친구 살아 있을 때 사진 있나요? 그러면 같이 사진을 찾는 거야…… 환하게 웃고 찍은 사진을……"

엘레나 빌렌스카야, 중사, 기록병 - P307

"우리는 건설 일을 했어…… 철도 건설하고 배다리도 놓고 엄폐호도 만들었지. 전선 바로 옆에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밤에만 땅을 팠어.
벌목도 했어. 우리 분대원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어. 게다가 다들 어렸고, 남자들도 몇 명 있긴 있었지만 벌목을 할 만한 건강이 아니었지. 그러면 그 나무를 어떻게 날랐냐고? 여러 명이 다 같이 달려들어 날랐어, 어떤 나무는 분대원 전체가 힘을 합쳐서 겨우 끌어내오기도 했지. 손바닥이 파이고 까져서 피투성이가 되곤 했어. 어깨도……"

조야 루키야노브나 베르즈비츠카야, 건설대대 분대장 - P308

"나는 전쟁이 치러지는 4년 내내 돌아다녔어.... 도로 표지판을 안내 삼아 각지를 다녔지. ‘슈킨 농장‘ ‘코즈로 농장‘ .… 내가 맡은 임무는 보급기지에서 물품을 받아다 최전방 병사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이었어. 주로, 병사들에게 꼭 필요한 담배, 궐련, 부싯돌 같은 것들을 가져다줬지. 어디는 차량을 타고 가서 전달하고, 또 어디는 짐마차로 가기도했지만 대개는 병사 한두 명을 데리고 걸어서 갔어. 그 많은 걸 다 우리가 직접 들고서. 참호 같은 곳은 특히나 마차로 갈 수가 없었거든. 독일군이 마차 소리를 들으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전부 우리가 이고지고 해서 가져갔지. 우리가 직접 다……"

엘레나 니키포로브나 옙스카야, 사병, 물품보급병 - P309

나는 고리키 시 통신학교의 우편근로자 양성 과정에 들어갔어. 과정을 마치고 전방부대인 제60보병 사단으로 발령받았지. 연대 우체국에서 장교로 복무했어. 그래서 최전선 병사들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지. 얼마나 좋은지 눈물을 뚝뚝 흘리고, 편지에 입을 쪽쪽 맞추더라고. 하지만 전쟁통에 가족을 잃거나 가족이 독일군 치하에 사는 병사들도 많았거든. 그런 병사들은 편지를 받을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익명으로 편지를 썼지. ‘안녕하세요, 군인아저씨! 이름 모를 소녀가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적군과 싸우세요? 언제 적을 물리치고 돌아오시나요?‘ 밤마다 앉아서 편지를 썼어…… 전쟁 내내 그런 편지를 수백 통도 넘게 쓴 거야.……"

마리야 알렉세예브나 렘네바, 소위, 우편병 - P310

몇 년 사이에 수백 가지 이야기들이 모였다…… 종류별로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돈된 수백 개의 녹음테이프와 수천 장의 이야기 원고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찬찬히 페이지를 넘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예기치 못한 모습을 드러내는 전쟁의 세계, 예전에 나는, 이를테면 이런 건 묻지 않았다. ‘어떻게 몇 년씩 참호안에서 쭈그려 자고, 맨바닥에 모닥불 피워놓고 잘 수 있나? 어떻게몇 년씩 똑같은 군화에 똑같은 군용외투만 입을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몇 년씩 웃지도 않고 춤도 안 추고 살 수가 있나? 여름에 여름옷도안 입고 어떻게? 높은 구두와 꽃도 다 잊어버리고 어떻게……‘ 그네들 모두 열여덟,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 아니었던가! 나는 으레 전쟁터에 무슨 여자의 삶을 위한 자리가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전쟁터에서 여자로 사는 건 불가능하며 전쟁터는 여자에게 금기의 장소라고 말이다.  - P337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나는 이미 첫 만남에서부터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정말이다!).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 아이가 죽어서 관속에 누웠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 거야..... 꼭 어여쁜 신부 같더라니까……"(A. 스트로체바, 보병) "메달을 받게 됐어. 그런데 내 군복이 너무 낡은 거야. 그래서 가제로 군복 칼라를 만들어 달았지. 어쨌든 하얀색이니까…… 칼라 하나 만들어 달았을 뿐인데, 그 순간 내가 최고로 아름다운 아가씨가 된 것 같더라니까. 거울이 없어서 볼 수는 없었지만. 아휴, 그땐 거울이 다 뭐야, 폭격에 죄 날아가고 남아난 게 없었는데……"(N. 예르마코바, 통신병) 그네들은 그때 어린 아가씨답게 어수룩했던 자신들의 작은 속임수부터 자잘한 비밀들, 남몰래 자기들끼리만통하던 신호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모두 즐겁게 털어놓았다.  - P338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일상 속에서,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임무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들려주었다. 스스로의 본성을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그들은 놀랍게도(4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쟁의 일상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소소한 사건들과 그때의 느낌, 색채, 소리 들까지. 그네들의 세계에서는 일상과 존재가 하나였고, 따라서 존재의 흐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전쟁도 평범한 삶의 한때일 뿐이었다.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을 압도하는 순간을 여러 번 목도했다. 역사마저 간단히 제압해버리는 그 순간을. "내가 전쟁터에서만 예뻤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곳에서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지나가버렸어.  - P338

다 타버렸지. 그러고는 순식간에 늙어버렸어……" (안나 갈라이, 자동소총병)
수많은 시간의 결을 지나오면서 어떤 일들은 갑자기 커졌고 어떤 일들은 작아졌다. 인간적이고 내밀한 일들은 커졌다. 그리고 그게 나에게는 재미있게도 그네들 자신에게도 더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왔다. 인간적인 것이 비인간적인 것을 이겼다. 단지 인간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울더라도 걱정하지 마. 불쌍해하지도 말고 내가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 내버려둬. 하지만 당신이 고마워.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해줘서……" (K. C. 치호노비치, 중사, 고사포 병사)
그건 나도 몰랐던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339

"내가 정말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총을 쏘았는지는이야기할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울었는지는 말 못하겠어. 그건 아마못다 한 이야기로 남을 것 같아.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사람은 전쟁터에서는 무시무시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그런 사람을어떻게 이해하지?
당신은 작가잖아. 직접 한번 생각해봐. 뭔가 아름다운 말, 들끓는 이도 더러운 진흙탕도 없고 구토물도 없는…… 보드카 냄새도 피냄새도없는 그런 말을…… 우리 삶처럼 끔찍한 그런 거 말고……"

아나스타시야 이바노브나 메드베드키나, 사병, 기관총 사수차 - P366

"문득 음악 소리가 들리면…... 아니면 노랫소리…... 여자 목소리도…… 그러면 그때 그 느낌이 되살아나. 그때랑 비슷한 뭔가가 느껴져……
전쟁영화를 봐도 사실이 아니고 책을 읽어도 사실이 아닌 거야. 그러니까, 그게 달라 ∙∙∙∙∙∙ 뭔가가 달라. 그렇다고 전쟁을 직접 겪은 내가 이야기하면 정확하냐. 그것도 아니거든. 전쟁은 그렇게 끔찍하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어. 때론 전쟁터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전투가 있는 날 아침이면…… 주위를 보며 생각했지. ‘어쩌면 아침을 맞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공기도…… 햇살도……"

올가 니키티치나 자벨리나, 군의관 외과의 - P367

"우리는 가시철조망이 쳐진 게토에 살았어…… 화요일에 그 일이 일어났지. 모르겠어, 왜 화요일이었다는 것만 기억에 또렷한지. 화요일 ..… 며칠이었는지, 몇 월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분명 화요일이었어. 우연히 창밖을 봤어. 세상에, 우리집 맞은편 벤치에 소년과 소녀가 앉아서 키스를 하고 있더라고. 끔찍한 살육과 총살이 난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그 아이들이 키스를 하고 있더라니까. 나는 그평화로운 광경에 충격을 받았어…… - P367

짧았던 우리 거리 한쪽 끝에서 독일군 순찰병이 나타났어. 그들도 당연히 아이들을 봤지. 앞이 훤히 트여 있었으니까. ‘저걸 어째‘ 하며 놀라고 말고 할 틈이 없었어. 정말 그럴 새가 없었어…... 비명소리. 그리고 온 거리를 울리는 굉음, 총소리……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당장 공포심이 밀려오더군. 소년과 소녀가 잠깐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이내 고꾸라지는 모습만 볼 수 있었어. 둘은 함께 쓰러졌어.
그렇게 그 일이 있고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 다시 하루가 지나는데....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거야. 알아야만했어. 그 아이들은 왜 집이 아닌 거리에서 입을 맞췄을까? 왜? 그런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걸까..... 아이들은 언젠간 게토에서 죽을 운명이란걸 알았던 거야. 그래서 다른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거고. 그건 사랑이었어.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어..... 사랑밖엔.
당신에게 이야기하다보니 ..... 그 일이 아름답게 들리기도 하네. 하지만 실제로는? 실제로는 너무 끔찍한 경험이었지…. 그래…… 아니면 뭐? 지금 생각해보면 ..… 그 아이들은 맞서 싸웠던 거야…… 아름답게 죽고 싶었던 거지. 나는 그게 그 아이들의 선택이었다고 확신해......"

류보피 에두아르도브나 크레소바, 지하공작원 - P368

나는 늘 같은 것을 말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에 대처하는 그네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 죽음은 늘 그네들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새 삶만큼이나 가깝고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네들이 어떻게 이 한없는 죽음의 실험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해보려 한다.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매번 목숨을 내놓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었는지.
과연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감정이 허락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말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질문은 자꾸만 많아지는데, 대답은 자꾸만 적어진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 P373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그네들 중 한 명을 벨라루스 국립대학교강당에서 만났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즐겁게 떠들며 노트를 챙기고있었다. "그때 우리가 어땠냐고?" 그녀가 내 질문에 역시 질문으로 답했다. "지금 여기 학생들하고 똑같았어. 글쎄, 다른 게 있다면, 옷 입는 거나 액세서리 정도? 그땐 더 검소하게 하고 다녔어. 구리 반지, 유리 목걸이 그리고 고무 슬리퍼 청바지나 녹음기는 없었고."
나는 바쁘게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P374

이제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랑은 전쟁터에서 사람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개인적인 사건이다.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공동의 사건들일 뿐 죽음까지도.
그네들을 만나면서 의외라고 느낀 점이 있었다면? 그건 그들이 죽음을 말할 때보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 덜 솔직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마치 자기방어라도 하듯 줄곧 뭔가를 감추고 털어놓지 않았다. 언제나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았다. 아주 철저하게 선을지켰다. 그네들 사이에 ‘더이상은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장막이 쳐졌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건지 이해가 된다. 전쟁 후에 자신들을 향해 쏟아진 곱지 않은 시선과 악의에 찬 오해이리라. 그네들은 이미 고통을 당할 만큼 당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쟁이끝나고도 그들은 또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 P395

이미 치르고 돌아온 전쟁에 견줘 결코 가볍지도 쉽지도 않은 또다른 전쟁. 만약 누군가 밑바닥까지 솔직하기로 작정하고 무모하리만큼 대담한 고백을 하고 나면 대화를 마무리할 즈음 반드시 이렇게 부탁해왔다. "내 성을 다른 성으로 바꿔서 내줘." "우리 때는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 내는 게 아니었어....…
상스러운 행동이었지...." 하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들 중엔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사연들이 더 많았다.
당연히 이 이야기들이 그네들 삶의 전부도 아니고 모든 진실도 아니다. 하지만 그네들의 진실이다. "전쟁이여 저주 받을지어다. 우리의 가장 아픈 시간이여!"라고 통탄한 전쟁 세대 어느 작가의 솔직한 고백처럼. 이 이야기들은 그네들의 삶에 대한 암호이자 에피그라프다.
아무튼 그곳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죽음이 맴도는 그곳에서의 사랑은.....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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