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민스크를 떠났어. 사람들은 적의 총격 때문에 큰길 대신 숲길을택해 걸었어. 어디선가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들렸지. ‘엄마, 전쟁이래요.‘ 우리 부대는 퇴각하는 중이었어. 호밀이 여물어가는 드넓은 들판을 따라 이동했지. 길가에 나지막한 농가 오두막이 나타났어. 이미 스몰렌스크 지역에 접어든 거야....… 길가에 어떤 여자가 서 있었어. 그 여자가 그 여자네 작은 집보다 더 커 보이더군. 여자는 러시아 전통 문양이 수놓인 리넨 옷으로 몸을 감싼 채 양팔을 가슴위에서 십자 모양으로 모으고는 고개 숙여 절을 했어. 병사들은 계속 행군했고, 여자는 병사들에게 깊이 고개 숙이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주시길‘이라고 했지. 병사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고개 숙이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어. 그러자 모든 병사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 - P397

침대 시트를 갈아야 했어…… 그래서 침대를 깨끗한 시트로 갈고 남편 다리에도 새 붕대를 감아줬지. 그리고 남편을 베개 위까지 끌어올리려는데 남자라 무겁더라고. 그래서 거의 남편에게 닿을 듯 몸을 기울여 끌어당기는데 느껴지는 거야, 이미 끝이라는 게 일이 분 후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게…… 저녁이었어. 9시 15분…… 몇 분이었는지도 기억나 ..… 나도 죽고 싶었지.…… 하지만 그때 뱃속에 우리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가 내가 살아야 할 이유였지. 아이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견딜 수 있었어. 1월 1일에 남편을 묻었어. 그리고 38일 후에 우리 아들이 태어났지. 1944년에 태어나 이제는 어엿한 아빠가 되었어, 남편 이름은 바실리였어. 아들 이름도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우리손자도 바샤야∙∙∙∙∙∙ 바실료크……"

류보피 포미니치나 페도센코, 사병, 간호병 - P409

"날마다…… 눈앞에서 보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젊고잘생긴 남자가 죽어간다는 현실을 ..... 죽어가는 이에게 ...... 입맞춤을 해주고 싶었지. 죽어가는 이를 위해 의사로서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면 여자로서라도 뭔가 해주고 싶었어. 웃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어......
전쟁이 끝나고 숱한 해가 지났을 땐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당신의 환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고백하더군. 나야 당연히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았지. 수많은 부상병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내 미소가 자기를 이른바 저세상에서 이 세상의 삶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여인의 미소가…….."

베라 블라디미로브나 셰발디셰바, 대위, 외과의 - P409

 특무상사는 우리를 위해 시까지 썼어. 아가씨들이 5월의장미처럼 감동적이며, 전쟁 때문에 우리 아가씨들의 싱그러운 정신이 불구가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지.
우리가 전선으로 출발할 때 맹세한 게 하나 있어. 전장에서는 어떤 연애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만약 살아남는다면, 전쟁 후에 하겠다고 전쟁 전에 우리는 키스도 한 번 해본 적이 없었어. 우리는 요새 젊은이들보다 그런 일에 더 보수적이었거든. 우리에게 한 번키스는 평생의 사랑을 의미했지. 전선에서의 사랑은 일종의 금기였어.
만약 누가 연애를 하다가 지휘부에 들키잖아? 그러면 대개 둘 중 한 명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야 했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간단한 방법이었지. 우리는 연인들을 보호하고 지켜줬어. 우리가 했던 유치한 맹세를 어긴 거야…... 그래, 우리는 사랑을 했어....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선에서 못 버텼을 거야. 사랑이 구한 거지. 사랑이 나를 구원했어……"

소피야 크리겔, 상사, 저격수 - P410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고마워. 그 사람 덕분에 사랑이 뭔지 알았고 그 사랑을 누렸으니까. 평생 그 사람을 사랑했어. 숱한 해가 지나도록 그 사랑을 간직했지. 이제 와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하겠어. 이렇게 늙어버린걸. 그래,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았어! 하지만 후회하지않아.
딸아이가 ‘엄마, 엄마는 대체 그런 남자 어디가 좋다고 그래요?‘라며그 사람이 세상을나를 비난했어. 그래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떴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어. 많이 울었지. 그 일로 우리 딸과 다퉜어. ‘왜 울어요? 그 사람은 엄마한테 진즉에 죽은 사람이라고요.‘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해. 내 기억 속에서 전쟁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야. 그곳에서 행복했으니까…..
다만 부탁인데, 내 성은 밝히지 말아줘. 내 딸을 위해서……"

소피야 K-비치, 위생사관 - P413

또하나의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는 그 누구도 지도에 중립지대가 어디를 통과하며 전선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따위를 표시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얼마나 많은 무장세력들이 목숨 걸고 싸웠는지 헤아리지도 않았다. 이들은 고사포, 기관총, 사냥총으로 싸웠고, 또 낡은 베르당총으로 싸웠다. 잠깐 숨 고를 여유도 대대적인 총공세도 없이 대부분 많은 이들이홀로 싸웠다. 그리고 홀로 죽어갔다. 사단이니 대대니 중대니 하는 군대가 아니라 민중이 직접 빨치산이 되고 지하공작원이 되어 적과 맞섰다. 남자들, 노인들,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까지. 톨스토이는 이처럼 다양한 인간 군상의 결사항전을 두고 ‘민중전의 곤봉‘이니 ‘애국심의 감 - P435

춰진 온기‘라 칭했고, 히틀러는(나폴레옹에 이어서) 자기 부하들에게 ‘러시아가 규칙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 전쟁에서는 죽음이 가장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정말 두려운 건따로 있었다..... 전쟁의 한복판, 전선에서 자기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병사를 상상해보라. 아이들과 아내와 늙은 부모, 언제든 사랑하는 가족을 희생시킬 각오가 돼 있어야 했다. 가족을 죽음의 길로 내보낼 각오가. 그래서 이 전쟁에서는 용맹무쌍함도 비열한 반역 행위도 증언해줄 목격자 없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시골마을들에서는 전승기념일에 기뻐하는 대신 눈물을 흘린다. 아니 통곡을 한다. 가슴을 친다.  "정말 끔찍했어….... 피붙이들을 모두 땅에 묻었지. 전쟁터에 내 영혼도 묻고 왔어." (B. G. 안드로츠크, 지하공작원) - P436

지휘관은 항복해야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나 번민에 휩싸였지. 우리는 지휘관을 잠시도 혼자 두지 않았어. 계속 옆에 붙어 있었지. 자살이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모스크바와 연락을 취했어. 상황을 보고했지. 지시가 내려왔고 ...... 지시를 받은 바로 그날 부대에서 회의가 소집됐어. 결국 ‘독일군의 도발행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지. 지휘관은 공산주의자로서 당의 규율에 복종했어…… 이틀 후 우리 정찰병이 마을로 내려갔어. 그들이 가지고 온 소식은 끔찍했어. 지휘관의 가족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었으니까. 첫 전투에서 지휘관은 전사하고 말았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어.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 내 생각에 일부러 죽음을 택한 게 아닌가 싶어.……
나는 그저 눈물만 흘려 말은 못하고 ...... 나 스스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확신이 안 서는 걸 어떡해? 믿게 할 자신이 없는 걸.…… 사람들은 그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지. 고통스러운 이야기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아...…." (V. 코로타예바, 빨치산 병사)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 일을 멈출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 P437

밤에 누워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엄마는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아니, 나 때문이 아니야…… 만약 내가 가족 때문에 겁을 먹고 적과 싸우지 않았다면, 만약 다른 누군가도 나와 같은 이유로 똑같이 그랬다면,
또다른 누군가도, 그리고 또다른 누군가도 그랬다면 지금의 승리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 일을 다 잊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 엄마가 저만큼 걸어오는데..... 발포 명령이 떨어지는 거야…… 그러면 나는 엄마가 나타나는 쪽에 총구를 겨눠야 했지..… 엄마의 하얀 머릿수건…… 이런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당신은 몰라. 알 리가 없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힘들어. 밤에 문득 창밖에서 아이 웃음소리나 목소리가 들리면 온몸에 경련이 일지. 꼭 그때 그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아서, 비명소리 같아서. 하루는 문득 잠이 깼는데 숨을 못 쉬겠는 거야.  당신은 사람 타는 냄새에 숨이 막혀서..…탈 때 나는 냄새가 어떤지 모를 거야. 특히 여름에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면서도 달짝지근한, 그런 냄새지. 지금 나는 구역집행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어. 어디든 화재가 발생하면 그곳으로 가서 서류를 작성하는 게 내 일이야. 하지만 농장 같은 데서 불이 나 동물들이 타 죽었다고 하면그곳은 절대 안 가. 갈 수가 없어..…그때가 떠올라서...... 그 냄새 …… 사람들이 불에 타던 냄새 ..... 밤에 잠이 깨면 정신없이 향수를가지러 가. 하지만 향수에서도 그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사방에서 그 냄새가 나…… - P4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