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가 참 다양도 하다. 모스크바, 키예프,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압셰론스크, 비텝스크, 볼고그라드, 얄루토롭스크, 수즈달, 갈리치, 스몰렌스크…… 이 많은 곳을 언제 다 돌아볼 것인가? 이 넓고도 큰 나라에서.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은 지원군이 나타났다. 기대하지 않은 도움의손길, 우편함을 열어보니 초대장이 하나와 있다. 바토프 장군 휘하 제65군 참전용사들이 보내온 초대장이다. "5월 16일과 17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모임이 있습니다. 전통의식과 의전행사도 있을 예정입니다. 상황이 허락되는 사람들은 다 오기로 했지요. 무르만스크카라간다. 알마티, 옴스크에서 도착할 겁니다. 전국 곳곳에서 모이는 거지요 우리의 광활한 조국 구석구석에서.……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모스크바‘ 호텔 5월은 전승기념의 달이다. 곳곳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고, 사진을 찍는다. 다들 가슴에 꽃을 달았든 훈장이나 메달을 달았든 아랑곳없다. 나는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들어간다. 몸이 둥실 떠오르고 흘러가고 떠밀리다보니 어느새 낯선 세계에 와 있다. - P233
낯선 섬나라에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분명한 사실하나를 깨닫는다. 내가 이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 이들은 대개 우리사이에서 잊힌 존재이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제이 세상을 떠날 나이가 되었고 그 수도 점점 줄어들지만 우리는 점점더 많아지니까. 이들은 1년에 한 번씩 다 함께 만남의 자리를 갖는다.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들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시간이란 바로 그들 자신의 기억이다. 7층 52호에 5257병원 사람들이 모였다.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군의관이자 대위인 알렉산드라 이바노브나 자이체바. 내가 나타나자 무척기뻐하면서 방에 모인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시킨다. 마치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 같다. 사실 이 방문을 두드린 건 순전히 우연이다. 완벽한우연. - P234
방에 모인 이들의 이름을 적는다. 외과의 갈리나 이바노브나 사조노바, 의사 옐리자베타 미하일로브나 아이젠시테인, 외과 간호사발렌티나 바실리예브나 루키나, 수술 담당 수간호사, 안나 이그나티예브나 고렐리크, 그리고 간호병들이었던 나데즈다 표도로브나 포투즈나야, 클라브디야 프로호로바 보로둘리나, 엘레나 파블로브나 야코블레바, 안겔리나 니콜라예브나 티모페예바, 소피야 카말디노브나 모트렌코, 타마라드미트리예브나 모로조바, 소피아 필리모노브나 세묘뉴크, 라리사 티호노브나 데이쿤. - P234
‘죽고 싶지 않아!‘ 아니면 ‘씨발‘ 같은 욕을 하거나……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 몰다비아 노래...... 사람들은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아. 믿질 않지. 하지만 머리카락 밑에 샛노란 색이 나타나고 얼굴을 따라 움직이던 그림자가 나중에 옷 밑으로 뚝 떨어지는 걸 보게 돼 ......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표정은 마치 산 사람 같지 깜짝 놀란 얼굴로 ‘내가 어떻게 죽을 수있지? 정말 내가 죽은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 부상병이 아직 들을 수 있는 동안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당신이 죽는다니 말도 안 돼요‘라고 말해줬어. 입을 맞추고 안아주며 ‘걱정 마요, 괜찮아요‘라고 위로도 했지. 이미 숨을 거둬서 눈이 허공을 보는데도 나는 계속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어...… 뭔가 안심시키는 말을…… 그 이름들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얼굴들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어...…." - P242
"독일군은 여자병사들은 포로로 잡지 않았어..… 바로 총살해버렸지. 아니면 자기 병사들 앞에 끌고 나와 ‘자, 여기 이것들은 여자가 아니다. 추악한 괴물이다‘라고 하거나.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총알을 따로 가지고 다녔어. 불발될 경우를 대비해 두 발씩. 우리 간호병 하나가 독일군에게 붙잡혔어…… 하루가 지나 우리가그 마을을 공격해 들어갔는데 사방에 죽은 말이며 오토바이며 장갑수송차 등이 나뒹굴고 있더라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은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우리는 그 아이 배낭에서 가족이 보낸 편지들과 고무로 된 작은 파랑새를 발견했어. 애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 고무새를……" - P243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어...... 어느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곳 숲 주변에 빨치산 병사들이 줄줄이 죽어 있는 거야. 그때 독일놈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세상에,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말이 안 나와 다들 갈기갈기 찢겨서는...... 내장은 내장대로 돼지 내장처럼 다 쏟아져나와 있고...... 그렇게들 누워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있는 게 보였어. 안장까지 그대로 얹혀 있는 걸로 봐서 빨치산 병사들말인 것 같았어. 독일군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온 건지, 아니면독일군이 미처 못 잡아간 건지 알 수가 없더군. 녀석들은 멀리도 안 가고 근처에 머물렀어. 풀이 많았거든. ‘어떻게 사람이 돼가지고 말들이보는 데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싶었지. 동물이 있는 데서. 말들이 다 보았을 텐데……." - P248
"들도 숲도 불길에 휩싸였어…… 초원에 연기가 자욱했지. 암소와 개들이 불타 죽어 있고..... 냄새가 특이하더라고. 처음 맡는 냄새였어. 그리고 또…… 토마토절임, 양파절임을 담가놓은 동그란 통들까지 불에 타 뒹굴었어. 새들도 불타고, 말들도 불타고…… 많은 게…… 정말 온갖 것들이 다 불타서 길거리에 나뒹굴었어. 우리는 그 냄새에도 익숙해져야 했지…… 그때 알았지. 불은 모든 걸 태운다는 걸...... 심지어 피까지도 태워없앤다는 걸......" - P248
"그걸 어떻게 얘기하나...... 글쎄, 어떻게…… 왜 있잖아…… 늦가을이면 철새들이 이동하는 거…… 길게 길게 무리 지어서. 우리 대포, 독일군 대포가 한꺼번에 불을 뿜는데 새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날아가는 거야. 새들이 어떻게 비명을 지르겠어? 어떻게 새들에게 ‘이리로 오면 안 돼! 여기 오면 죽어!‘라고 알려줘? 어떻게? 끝내 새들은 계속 땅으로 떨어졌어......" - P249
전쟁전에 우리 마을에 꾀꼬리들이 참 많았거든.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2년 동안 아무도 꾀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지. 온 마을 땅이 뒤집혀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땅이란 땅은 전부 고릿적 똥거름 주던 시절처럼 싹 갈아엎었거든. 3년 후에야 꾀꼬리가 나타났어. 어디에 있다온 걸까? 아무도 모르지. 아무튼 녀석들은 3년이 지나서 자기들 살던고향땅으로 돌아왔어. 사람들이 다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자 꾀꼬리도 다시 날아든 거야......"
‘난 들꽃을 보면 전쟁이 떠올라 전쟁 때 우리는 꽃을 꺾지 않았어. 꽃을 꺾는다면 그건 누군가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서였지…… 작별을고하려고....."
"아이고, 아이고, 얼마나 추악한지.....… 그놈의 전쟁이란 게...… 먼저 간 우리 동무들이나 추모하자고......" - P252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 나직하면서도 자주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대면할 때, 그리고 과거에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앞에섰을 때 놀라고 당황한다. 과거는 사라졌다. 과거는 뜨거운 소용돌이를일으키며 눈을 멀게 하고는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사람은 남았다. 평범한 보통의 삶 한가운데 사람만 남은 것이다. 자신의 기억 외에는 주위의모든 것이 평범하다. 나 역시 목격자가 되어간다.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는지, 어떻게 기억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또 무엇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기억의 저 깊은 구석으로 밀쳐버리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장막을 쳐버리고 싶어하는지를 보고 듣는 목격자, 적절한 말을찾지 못해 절망하면서도,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온전한 표현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과거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본 - P255
다. 그때는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얼마나 보고 싶어하고 이해하고 싶어하는지를.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신과 새롭게 만난다. 이들은 이미 두 사람이다. 저 사람이면서 이 사람이다. 젊은이면서 늙은이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이면서 전쟁 후의 사람이다. 오래전에 전쟁이 끝난 사람, 나는 늘 내가 동시에 두 목소리를 듣는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전승기념일에 모스크바에서 우연히 올가 야코블레브나 오멜첸코를만났다. 다른 여자들은 모두 고운 봄옷에 화사한 머릿수건을 하고 있는데 그녀만 군복에 군인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키가 크고 다부져 보이는그녀. 그녀는 대화를 나누지도 울지도 않았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특별한 침묵이었다. 바로 그 침묵 안에 말로 내뱉은 어떤 이야기보다 더 깊은 사연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은필요치 않은 것처럼. - P256
한번은 내가 피투성이가 됐는데...... 늙은 병사 한 명이 다가와 나를 안고는 이렇게 말하는 거야. ‘전쟁이 끝나고 이 소녀병사가 살아남는다해도 더이상 사람 꼴로는 살지 못할 텐데, 어쩌나. 이 아이 인생도 이제 끝이구나.‘ 그래, 나는 그런 지옥 같은 상황의 한복판에서 견뎌야 했지. 그것도 그렇게 어린 나이에 ! 나는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었고, 사람들이 나를 부축해서 막사로 데려갔어.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어...... 전기가 훑고 지나간 것처럼 온몸이 떨리고 ...... 글쎄, 어떻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지..… 다시 전투가 벌어졌어...... 셉스크 근처에서 독일군이 하루에만 벌써 예닐곱 번이나 우리를 공격했어. 바로 그날 나는 전장으로 뛰어들어 부상병들을 끌고 나왔어. 당연히 무기도 함께 챙겨서 나왔지. 그리고 마지막 부상병에게 기어갔는데, 팔이 거의 떨어져나갔더라고, 갈가리 찢겨서 건들거리는데…… 힘줄만 남고...... 피범벅이었어…… 상처를 싸매려면 당장 팔을 잘라내야 할 판이었어. 다른 방법이 없었지. - P263
나는 전쟁터에서 모든 걸 잊었어. 지난 삶은 다. 전부 다………… 사랑도잊었지....… 수색중대 지휘관이 나를 좋아하게 됐어. 자기 부하들을 통해 쪽지를 보내왔더라고. 한 번 그를 만났지 만나서 그랬어. ‘난 아니에요. 이미 오래전에 저세상으로 간 사람을 사랑하고 있거든요.‘ 그러자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가버리더군. 쏟아지는 총탄 속을 그대로 걸어서 고개 숙이지 않고…..… 나중에 우크라이나에서 우리가 큰 마을 하나를 탈환했어. 마을이나 한번 둘러보자 싶어 어귀로 들어섰지. 해가 밝게 비치는 날이었어. 농가들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났지. 그런데 마을 뒤편 새로 다진 땅에 무덤들이 죽 늘어서 있는 거야....… 이 마을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의 무덤이었어. 나도 모르겠어. 왜 그곳으로 발길이 끌렸는지. 가서 보니 작은 목판에 병사들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더군. 무덤 하나하나마다.…… - P265
그러다 갑자기...... 아는 얼굴이 보이는데 ......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수색중대 지휘관, 바로 그 사람 얼굴이었어. 이름도 맞고 ...... 순간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 갑자기 무서워지고...... 꼭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고,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 바로 그 순간 그 사람 부하들이 그러니까 중대원들이 무덤 쪽으로 오는 게 보였어. 모두 나를 알고 있었지. 예전에 나한테 쪽지를 전해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더군. 내 쪽으론 시선 한번 안주고 그들에게 나는 투명인간이었어. 나중에 그들과 다시 한번 마주쳤는데 마치…… 그들이..… 내가 죽기를 바랐던 것처럼 생각됐지. 나 보기가 힘든 것 같았어∙∙∙∙ 살아 있는 나를 보는 게…… 꼭 그렇게 느껴지더라니까…… 내가 그들 앞에 죄인이 된 것 같았지…… 그 사람한테도…… - P265
전쟁에서 돌아와 심하게 아팠어.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지. 어떤 노교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분 덕분에 나았어.…약보다는 말로 더 많이 치료해주셨지. 내 병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도 해주시고, 그 교수님 말씀이, 만약 내가 열여덟, 열아홉에 전선에 나갔다면 그런대로 몸이 튼튼해졌을 거래. 그런데 나는 열여섯에 갔잖아. 열여섯은 너무 어린 나이라 몸이 많이 손상을 입었다는 거지. 교수님이 설명해주셨어. 물론, 약을 복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해요. 어느 정도는 치료될수도 있어요. 하지만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고 싶다면, 또 살고 싶다면 내 말대로 해요. 결혼해서 될 수 있는 한 아이를 많이 낳아요. 그 방법만이 당신을 살릴 수 있어요. 아이를 낳을 때마다 당신 몸도 그만큼 회복될거요‘ -그때가 몇 살 때였나요? - 전쟁이 막 끝났을 때니까, 스무 살이었어. 물론, 그때 나는 결혼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어. - P266
-왜죠? ㅡ너무 지쳐서. 내가 동갑내기들보다 훨씬 나이든 것 같았고, 어떨 땐 늙은이가 된 것 같고 그랬지. 친구들은 춤추러 다니고 즐겁게 사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 인생을 나이든 사람의 눈으로 바라봤으니까. 다른 세상의 시선으로…… 노파의 시선으로! 젊은 남자들이 구애를 해왔어. 아직 어린애들이었어. 그들은 내 영혼을 보지 못했어.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지. 아까 내가 어떤 하루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 셉스크 전투에 대해서…… 기껏해야 하루였는데··· 그날 밤 내 양쪽 귀에서 피가 흘렀어. 아침에 일어났는데 꼭 중병을 앓고 난 사람 같더라고. 베개는 온통 피로 물들고..... - P266
병원에서는 어땠냐고? 병원 수술실에 가리개로 칸막이를 친 곳이 있었어. 그곳에 절단한 팔과 다리를 담은 커다란 통을 놓아두었거든…… 최전선에서 대위 하나가 부상당한 자기 동료를 데리고 병원에 왔어. 어떻게 수술실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는데, 대위가 그 통을 본 거야…… 보고는 그대로 기절해버렸지. 기억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끝도 없이 ..... 그런데 가장 중요한게 뭔지 알아? 나는 전쟁의 소리를 기억해. 사방에서 으르렁, 쾅쾅, 쨍쨍 불을 뿜어대던 그 소리들...... 전쟁터에서는 사람의 영혼마저 늙어버리지, 전쟁이 끝나고 나는 다시는 젊음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 그게 제일 중요한 점이지. 내 생각엔 그래…… -결혼은 하셨나요? - P267
ㅡ했지. 아들 다섯을 낳아 길렀어. 아들만 다섯. 딸은 하늘이 주시지않더라고, 나 스스로도 가장 놀라운 일은 그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겪고도 예쁜 아이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 게다가 좋은 엄마에 좋은할머니까지 되었다는 사실이지. 이제 와서 모든 걸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내가 아니었던 것 같아. 어느 다른 소녀였지……"
‘또하나의 전쟁‘이 담긴 네 개의 녹음테이프(이틀간의 대화)를 가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충격과 공포, 의혹과 경탄. 호기심과 당혹, 연민, 친구들에게 그녀의 이야기 중 몇 가지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뜻밖에도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들. ‘어휴, 너무끔찍하다. 어떻게 그걸 다 겪었대? 그러고도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 - P267
대?‘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하고는 많이 다르네. 우리가 아는 전쟁은 경계가 확실하잖아. 적과 우리 편, 선과 악, 그런데 이 전쟁은?‘ 하지만 모두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들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들이리라. 이미 수천 번도 넘는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음에도(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봤는데, 지구상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을 합치면 3천 번도 넘는다고 한다),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 P268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수 있을 테니까. 할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 ㅡ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대화하는 중에도 아픔과 공포의 그늘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기에. 순간 스치는 고통의 표정 앞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사람은 고통이 있기에 아름다운 건 아닐까‘라는 불순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란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 P268
탐색은 계속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민스크에서 내가 살고 있는 거리의 이름은 소련의 전쟁 영웅, 바실리자하로비치 코르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코르시는 내전과 스페인전쟁에 참전했고 대조국전쟁에서는 빨치산여단의 여단장을 맡기도 했다. 벨라루스 사람이면 누구나, 적어도 학교에서라도, 그에 대한 책을 읽었을 것이다. 아니면 영화를 보았거나, 벨라루스의 전설. 그의 이름은수백 번도 넘게 각종 봉투며 우편 용지에 새겨졌고,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실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으니까. 신화가 그의 분신이니까. 매일 걷던 낯익은 거리를 지금 나는색다른 감흥에 젖어 걷는다. 트롤리버스를 타고 도시 반대쪽 끝까지 삼 - P271
십 분을 가면 신화의 두 딸들ㅡ두 딸 모두 참전했다ㅡ을 만나게 될 터이다. 그의 아내도. 전설이 생명을 입고 살아나 땅에 발을 딛는 장면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크고 위대한 것이 작고 평범해지는 그 순간을.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만큼. - P272
우리가 마을들을 탈환하고 보면 정말 다 타버리고 재만 한가득이었어요. 사람들에게 남은건 땅밖에 없었죠. 땅이 전부였어요. 언니도 나도 의사의 길을 포기했어요. 전쟁 전에는 의사를 꿈꿨는데 말이에요.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입학시험을 치지 않고 바로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우리한텐 참전용사로서의 특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봤기 때문에 더이상은 볼 수가 없었어요. 상상만 해도 싫었어요. 그래서 이미 30년이 흐른 뒤였는데도 딸아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의과대학을 단념시켰어요. 수십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여요…… 어느 봄날…… 우리는 이제 막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을따라 걸으며 부상병들을 찾아요. 온통 짓밟힌 들판. 저만큼 전사한 병사 두 명이 보여요. 젊은 우리 병사와 역시 젊은 독일군 병사가 어린 밀밭에 하늘을 보고 누워 있죠…… 하지만 전혀 죽은 사람들 같지 않아요. 그저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을 뿐…… 나는 지금도 그 눈길이 잊히질않아요..... - P295
-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말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바이올린 소리가…… 그리고 바로 그날이 나한테는 전쟁이 끝난 날이었어요…… 갑자기 음악 소리라, 그건 기적이었죠…… 또다른 소리가 들려왔어요……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군요…… 우리는 모두 전쟁만 끝나면, 그 숱한 눈물만 그치면 멋진 삶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 믿었어요. 아름다운 인생이. 승리만 하면··· 이날들만 견뎌내면...... 모든 사람이 한없이 선해지고 서로 사랑만 할 거라고 믿었죠. 모두 형제자매가 될 거라고, 우리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려왔는지……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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