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가 돈을 받은 최초의 작품이자 출판된 두 번째 작품이다. 또한 확실히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쓴 서른 번째인가 마흔 번째 작품이다. 글을 모르던 다섯 살짜리 여동생이 주변에서 얼쩡대는 게 귀찮아진 테드 오빠가 내게 읽기를 가르쳐준 이후로 줄곧 나는 시와 소설을 썼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쓴 글들을 출판사에 보내기 시작했다. 몇몇 시는 출판이 되었지만 서른이 될 무렵까지 소설은 제대로 출판되지 못했다. 내가 보낸 소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늘 반송되어 돌아왔다.
<파리의 4월〉은 1942년 《어스타운딩》지에 ‘지구 생명체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썼다가 터무니없는 이유로 게재를 거절당한 뒤(나는 존 우드 캠벨과 잘 맞았던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판타지소설이나 SF로 인식할 수 있는 ‘장르‘로는 최초의작품이다. 열두 살 때는 게재를 거절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도 마냥 기뻐했고서른둘이 되어서는 수표를 받고 매우 기뻐했다. ‘전문가주의‘는 미덕이 아니다.
프로란 아마추어가 열정 때문에 하는 일을 돈을 받고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돈의 경제학에서 보면, 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한 작업을 여러 사람이 알게 되고 읽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작가와 독자의 의사소통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이는 예술가의 목적이기도 하다. 1962년에 이 작품을 사준 셀리골드스미스 랠리는 역사상 SF 잡지를 담당했던 그 어떤 편집자보다도 진취적이고 예리한 사람이다. 나는 셀리가 내게 이런 기회를 준 것에 늘 고맙게 생각하고있다.

배리 페니위더 교수는 춥고 어두운 다락방에 앉아 앞에 놓인 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탁자 위에는 책 한권과 딱딱한 빵 한조각이 놓여 있었다. 빵은 저녁식사였고, 책은 페니위더 교수 필생의 작업이었다. 둘 다 말라붙어 있었다. 페니위더 박사는 한숨을 쉬고 몸을 떨었다. 낡은 집의 아래층 셋방은 꽤 우아했다. 하지만 급기야 난방은 4월 1일 끊겼고 오늘은 4월 2일이었으며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창문을 통해 땅거미 속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어렴풋이솟아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각탑 두 개가 보였다. 페니위더박사가 사는 생루이 섬은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시테 섬 뒤쪽에 하류로 끌려가는 작은 나룻배처럼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니위더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추웠다. - P55

거대한 탑이 어둠에 잠겼다. 페니위더 박사는 우울했다. 박사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책을 바라보았다. 이 책 덕분에 1년을파리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학과장은 뭔가를 출판하거나 아니면 관두라고 말했고, 페니위더는 뭔가를 써내는 쪽을 택했으며,
그 보상으로 1년 동안 학교를 떠나 있을 수 있었지만 대신 월급은 없었다. 먼슨 대학은 강의를 하지 않는 교수에게 급여를 줄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페니위더 박사는 저축한 돈을 긁어모아 파리로 왔다. 학생 때처럼 다락방에 살면서 국립도서관에서 15세기 문헌들을 읽으며 길가 밤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보며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페니위더는마흔 살이었고, 다락방에서 혼자 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진눈깨비는 막 봉오리 지기 시작한 밤꽃들을 망쳐놓을 터였다. - P56

하지만 라이터는 쓸데없이 짤깍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페니위더는 다시 한숨을 쉬고일어나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프랑스제 라이터 연료 한 통을 꺼내 온 다음 자리에 앉아 담요를 다시 고치처럼 몸에 감싸고 라이터에 연료를 채운 뒤 한 번 더 짤깍거려보았다. 액체연료가 주변으로 많이 흘러넘쳐 있었다. 라이터에 불이 켜지는 순간 페니위더 박사의 손목 아래쪽부터 불이 붙었다. "이런 제길!" 손가락 마디에서 푸른 불꽃이 솟아오르자 페니위더는 비명을 지르고 팔을 거칠게 휘저으며 펄쩍 뛰었다. "제길!" 페니위더는 소리치면서 운명의 여신을 저주했다.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때는 1961년 4월 2일 오후 8시 12분이었다. - P57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 미국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미래에서 왔습니다. 서기 20세기에서 말입니다." 페니위더는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한 말이 바보 같아 보이기도 했고 사실 페니위더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방은 자기 방이면서도 새로운 방이었다. 500년이나 된 낡은 집이 아니었다. 청소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새집이었다. 그리고 페니위더의 무릎께에 있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책도 새것으로, 부드럽고 낭창거리는 소가죽 표지에 금박 문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르누아르는 무대 의상이 아닌 집에서 입는 검은 가운을 걸치고 서 있었다…….
"좀 앉으시지요, 선생님." 르누아르가 말했다. 그리고 세련되면서도 가난한 학자답게 약간 어색한 태도로 덧붙였다. "여행때문에 피곤하시지요? 제게 빵과 치즈가 있습니다. 저와 함께나누어 드신다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 P63

둘의 삶은 곧 안정되어갔다. 페니위더는 처음에는 붐비는 거리에서 좀 불안해하는 것 같았지만, 여분으로 있던 르누아르의검은 가운을 입으니 큰 키를 빼고는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페니위더는 15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었을 터였다. 생활 수준은 낮았고 사방에 이가 들끓었지만 원래부터 페니위더는 안락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페니위더가 유일하게 그리워했던 것은 아침식사와 함께하는 커피뿐이었다.  - P68

"진짜 마법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그렇다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죠?" 페니위더가 소리 질렀다. "도대체 왜 그 멍청하고 낡은 주문이 장에게, 우리에게 효력이 나타나는 거죠? 왜 그 마법이 다른 곳도 아닌 여기에서,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에게, 5천 아니, 8천 아니, 1만 5천년의 역사에 걸쳐 효력을 나타내는 거죠? 왜죠? 왜입니까? 그리고 자네, 대체 그 강아지는 어디서 온 거지?" - P75

르누아르가 좀이 슨 검은 가운을 입는 동안 키슬크는 자신의은색 튜닉을 실용적이면서 특징 없는 외투로 가렸다. 페니위더가 생각에 잠겨 목에 벌레 물린 곳을 긁는 동안 보타는 머리를 벗었다. 그리고 넷은 아침거리를 구하러 집을 나섰다. 연금술사와 성간 고고학자가 프랑스어로 말하며 앞서 가고, 갈리아에서 온 노예와 인디애나에서 온 교수가 라틴어로 말하며 손을잡고 뒤따랐다. 좁은 길은 붐볐고,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네 사람 위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각탑 두 개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옆으로는 센 강이 부드럽게 출렁였다. 바야흐로 파리는 4월이었고, 강둑에는 밤꽃이 피어 있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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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노동자들


마르가리따
강물이 단단해지면 저 강을 건너 돌아가자
먼바다에 겨울 폭풍우 내륙 깊숙이에는 서리 먹은 바람이
우리는 이름이 없는 자
이름 이전에 다만 살아 번식하며
아무런 계산에도 셈해지지 않는 자
그러나 나무들이 잎을 잃는 저녁이면
가슴이 울렁이고 구토가 났지
죽음 같은 잠을 자고 깨어나도 끝내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 있어
오늘은 불길한 바이러스가 한쪽 눈으로 창궐하니
슬픔과 무관하게 한 눈으로만 울 수밖에
날마다 눈먼 올빼미는 태어나고
목말라 목말라 가슴을 쪼아대며 날마다 죽어갔지
씨앗이 가득 맺힌 들풀들과 병든 고춧대
가시 많은 장미들을 꺾어 묻던 시절이었어마르가리따 어딘가 집에는 방이 있다 했지우리 격렬했으나 선의의 심장은 찾을 길 없던 그때
마르가리따 삐라처럼 나부끼던 시절이었어 - P9

공장의 출구
동백꽃을 가슴에 달고


어느 봄날이면 살아야지 꽃잎들 많이는 말고 어깨며 발등 위로 산산이 떨어질 때 전생에서 불어온 바람 들판에 종일 불고 핏방울 점점이 꽃 무더기 피면 먼 옛날 먼 곳에서 와 다리 아래 굶어 죽은 낙타들 울음소리며 배꽃 아래비단 끈으로 목을 맨 그 여자 눈물도 없는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면 밤새 모래바람 불어 더듬더듬 흙벽에 잊을 수 없는 얼굴을 새기던 서역의 한 사내이거나 제 부족을 전쟁으로 몰살시키고 홀로 우는 병약한 부족장의 울음이 생각나면 무너진 왕궁의 기둥에 걸터앉아 바람 속에 바람 속에흰 머리칼만 날리는 무녀처럼 그런 바람이면 살아야지 그런 봄날이면 살자 했는데,


봄바람 치는 들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구나 나 자신에게만 도취되어 살았는데 더이상 그럴 수 없다면 도취된 내가 그리워하는 너도 없을 거야, 처음에 삿된 이름을 조가비에 적던 사람들은 어디서도 조가비를 구할 수 없어 가슴에 이름을 새겼지 산홋빛 공단리본 진주가 박힌 머리빗그 여자의 심장에는 제 이름자가 박혀 있었나 저 바람은북쪽에서 불어와 이름을 갖지 못하고 물길뿐이던 안개와 - P18

물의 땅으로부터 와 어쩐지 자꾸 울음이 나는데 눈물 없는울음도 울음일 수 있다면 소리 없는 노래도 노래일 수 있다면 바람은 침묵의 탑에 매달리고 한밤을 배회하는 짐승의 털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나 자, 살자의 밤 - P19

가난하고 아름다운 사냥꾼 딸이 꿈을 헐어 전나무에 물을 주고 큰 배로 만들 때까지


진눈깨비 밤새 무섭게 온 아침

눈꽃 핀
눈꽃 나무 아래

폭신한 옷으로 겹겹이 무장한 누가
프롬나드한다

어디선가 앰뷸런스 싸이렌 소리
위급히 들리고

옛이야기처럼
착한 사람들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

모가지가 부러질까
서러운 나는

고양이 걸음으로
살얼음판을 걸어
고양이 밥을 구하러 간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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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고요하여라 The Mind is Still


마음은 고요하여라.
허언(言) 담긴 멋들어진 책들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니.
아이디어란 돼지 구유 위를 맴도는
어지러운 파리 떼.

말은 나의 일. 하나의 돌을 30년간 깎고도 아직
내가 볼 수 없는 것의 심상을 끝내지 못했으니,
이 일을 마쳐 에너지로 변하도록
풀어 놓을 수가 없네.

나는 깎고 더듬거리지만
여느 새처럼 진실을 노래하진 않네.
매일 나는 심판에 들어
똑같은 반 토막 말을 더듬거리지.

그래서 무슨 일인가?
나는 손에 든 돌이 무겁다는 걸 이해할 수 있네.
아이디어는 구정물 위 파리 떼처럼 스쳐 날고.
나는 다른 돼지들 사이에 뛰어들어 배를 채우네.
마음은 고요한 채로.

(1977)

나는 시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즐겁게 논픽션을 읽는 일이별로 없다. 잘 쓴 에세이에 감탄은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보다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더 좋고, 그 생각이 추상적일수록 이해를 못한다. 내 머릿속에서 철학은 우화로만 서식하고, 논리는 아예 들어오질 않는다. 그러나 또 문법 이해는 훌륭하다. 나에게는 문법이 언어의 논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사고방식의 이런한계는 최악이나 다름없는 산술 능력, 체스는커녕 체커도 두지 못하는 무능력, 어쩌면 음악 조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특성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 단어가 아니라 숫자와 그래프로표현된 개념, 아니면 ‘죄악‘이라든가 ‘창조‘ 같은 추상적인 말로 표현되는 생각들에 저항하는 방화벽이 있는 것 같다. - P9

나는 그저 그런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면, 지루하다.
그런 까닭에 내가 읽는 논픽션은 대개 서사가 있다. 전기,역사, 여행, 그리고 서사적인 면이 있는 과학, 그러니까 지질학, 우주론, 자연사, 인류학, 심리학 등등의 과학.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좋다. 그리고 서사성만이 아니라 글의 질이 나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옳든 그르든 간에 나는 따분하고 서툰 스타일은 곧 사고의빈한함이나 불완전함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다윈의 정확하고 폭넓고 탁월한 지력은 그의 명료하고 강하고 활력 있는 글로 표현된다고 본다. 그 글의 아름다움이 곧 지성이다.
이 말은, 내가 논픽션을 쓸 때 스스로에게 말도 안 되게 높은 기준을 세워 놓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서사가 아니면 쓰기가 힘든 데다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기도 어렵다. 나에게 소설이나 시를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P10

쓰기도 하고, 쓰고 싶어 하며, 무용수가 무용을 하거나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씀으로써 채워진다. 소설이나 시는 나에게서 바로 뽑아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의문의 여지 없이 스스로를 그 글의 정확도와 정직성과 품질을 판단하는 데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여긴다. 하지만 강연용 글이나 에세이를 쓰는 건 언제나 학업과 비슷하다. 그 글들은 스타일과 내용 모두 외부 평가를 받을 테고, 그게 당연하다. 내 소설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는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지만, 내 에세이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에 대해 나보다 훨씬 잘 아는 사람들의 판단을 받을수 있다. - P10

다행히도, 프랑스 문학과 다른 중세 로맨스 문학을 공부하면서 학문에도, 비평글을 쓰는 데에도 훌륭한 훈련을 받은 덕분에어느 정도는 자신감을 얻었다. 불행히도, 나는 감언이설에도 재능을 보였다. 통계의 눈보라로 꾸며 낸 실상을 묻는 류의 재능은 아니지만, 불완전한 생각을 너무나 우아하고 자신감 넘치게 표현하여자세히 살펴보기 전에는 그럴싸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라는 면에서감언이설이다. 거침없는 스타일이 꼭 표현하는 생각의 깊이에 기대어 나오는 건 아니다. 스타일을 이용해서 지식의 틈을 슬쩍 넘어가고 개념과 개념 사이의 허약한 이음매를 감출 수도 있다. 논픽션을쓸 때 나는 말이 제멋대로 흘러가서 부드럽고도 행복하게 나를 실상에서 먼 곳으로, 엄격한 개념 연결에서 먼 곳으로, 진실을 전혀다르게 표현하고 생각을 전혀 다르게 연결시키는 나의 조국, 즉소설과 시의 세계로 실어 가지 않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 P11

서평은 흥미롭고 부담스러운 글이다. 그리고 문학적으로나 다른 분야로나 더 넓은 문제들과 관련된 서평에서는많은 말을 할 수 있다.
싫은 책을 다룰 때만 아니면 서평 쓰기는 좋아한다. 서평을읽을 때는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글이 최고지만, 잘 쓰고잘 맞는 악평도 귀하게 여긴다. 형편없는 책에 대한 죽여주는 평을읽으면 죄책감 없이 즐겁다. 그러나 악평을 쓰는 즐거움은, 저자에대한 동료 의식이며 고통을 가하는 것을 즐긴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 등 온갖 죄책감 탓에 우울해진다……. 그렇다 해도 내가 저자가뭘 하려 했는지 이해하고, 내 비평이 절대적이란 환상에 시달리지도 않는 한, 조악한 작품을 대충 넘어가 줄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이 책에 실린 유일한 진짜 악평은 나에게 심각한 문제를 선사했다.
저자를 많이 존경했지만, 책은 놀라울 정도로 형편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걸 어떻게 평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친구인 소설가 몰리 글로스에게 호소했다. 어떻게 하지? 몰리는 그냥 플롯을이야기하면 어떠냐고 했다. 훌륭한 해결책이었다. 대마(大麻)를 충분히 공급하면 문제가 사라지리니. - P12

이 글들은 사실 모두 다양한 행사에서 다양한 청중들을 상대로 어쩌다 내놓은 조각글들이다.
주제는 책 속에 나오는 동물들, 만들어 낸언어, 잠, 내가 성장한 집, 아나키즘, 시를 읽는 방법, 그리고 어느 받침대에 대한 시까지 망라한다. 이 글들을 정리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연대순배열이었다. 상당수는 이 책에 싣기 위해 살짝 손을 보았다. 원래글이 궁금하다면, 처음 출간된 곳이나 내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있다.
공공연히 정치적인 글은 딱 두 편뿐이다. 하지만 로빈 모건‘ 같은 사람들에게 배웠다시피,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분리할 수 없다. 많은 글이 문학의 특정한 면을 옹호하는 내용이며,
때로는 상당히 호전적인 옹호를 담고 있다. 상상 소설, 장르, 여성의 글, 경험형 매체와는 다른 읽기 등에 대해서다.
지난 15년간은 상상 문학에 대한 비평적 관심과 이해가 꾸준히 증가했고, - P18

리얼리즘만이 문학이라는 이름을 쓸 자격이 있다는 융통성 없는 시각에서는 멀어졌다. 이렇게 쓰는 동안에도 내가장르에 대해 변호할 필요가 없어져 간다는 사실이 기쁘다.
그러나 문학의 성차 문제는 괴로운 상태로 남아 있다. 여성들이 쓴 책은 계속 차별당하거나 소외당하며, "중요한 문학상은더 적게 받고, 작가가 죽고 나면 부주의하게 다뤄지는 일이 더 많다.
"여성의 글"에 대해서는 들어도 "남성의 글에 대해 듣지 못하는 상황, 즉 남성의 글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한 균형은 맞지 않는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흔히 쓰면서 자연히 따라와야 마땅할 반대말인매스큘리니즘은 아예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동일한 특권과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둘 다 필요 없어질 날을 간절히 바란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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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맥과 강들이 물자와 사람의 이동을 어렵게 한 탓에 스페인은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가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이 때문에 각 지역의 정체성과 언어가 고스란히 보존될 수는 있었다. 스페인정부는 이러한 지리상의 장벽을 철도와 도로망으로 극복하려고 애써왔다. 1848년에 바르셀로나 항만 지역과 마타로를 잇는 길이 29킬로미터의 철도 구간이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이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노선이 속속 개통되면서 위와 비슷한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현대의 도로 시스템은 20세기 후반 들어서야 제대로 연결이 되었다. 1969년에는 다시 바르셀로나와 마타로를 연결하는 최초의 단거리 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그런데 중앙 정부가 <스페인적인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자 카탈루냐, 바스크, 갈리시아를 비롯한 지방 주민들은 자신들만의 유산을 지키겠노라 결심했다. 이번에도 지리가 그들을 분리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일례로 안달루시아와 메세타를 가르는 장장 485킬로미터의 시에라모레나 산맥을 관통하는 천연도로는 아찔하게 절벽이 펼쳐진 데스페페로스강의 협곡이 유일하다. - P384

1031년에 무너진 칼리프 왕국은 소규모 왕국들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스도교 수장들은 지금이야말로 한때 자신들의 것이었던 이곳을 이슬람의 통치로부터 해방시킬 기회라고 여겼다. 1060년대에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이 싸움에 가담하는 이들에게는 죄를 사해주겠노라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1085년, 그리스도교 군대는 메세타 중심부로 가는 요충지가 되는 톨레도를 탈환했다. 이는 군사적 결과로나 스페인과 유럽의 발전 측면에서나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었다.
1212년 그들의 군대는 데스페냐페로스강 고개도 뚫었다. 1250년무렵에는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이 그리스도교 세력 휘하로 들어갔다.
단 남쪽에 있는 그라나다 왕국만은 예외였다. 대세를 일찌감치 간파한 그라나다는 카스티야에 공물을 바치기로 결정하면서 이후 250년동안을 무사히 버텨냈다. 어쨌든 250년이라는 세월은 장엄한 알함브라를 비롯한 많은 궁전들을 건설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었다. - P387

사실 레콩키스타, 즉 재정 과정을 일종의 통일 프로젝트로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스페인의 지리 때문에라도 북부의 그리스도교왕국들은 각자 독자적으로 행동하곤 했다. 북동쪽에서는 아라곤이특정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고, 북서쪽에서는 갈리시아가 다시 힘을 모아서 차후의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재정 운동은 하나의 물결처럼 진행되었다기보다는 조각조각형태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현대 스페인이 처음부터 <조각난 상태〉로시작됐고 여전히 그 상태로 남아 있게 한 요인이 된다. - P388

이어지는 전투에서 스페인 함대는 심각한 손실을 입으면서 전열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그들은 재정비를 위해 북해 쪽으로 항해했다.
사실 그때 임무를 포기하고 귀향했어야 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사령관은 이렇게 말했다. "라 지오그라피아 만다La geographia manda." 즉
"지리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라고. 그런데 그 지리는 그들 편이 아니었다.
스페인 해군은 남쪽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이번에는 바람이 엉뚱한방향으로 불었다. 게다가 영국 해군은 스페인 군대와 그들이 돌아가야 할 항로 사이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스페인 해군은 하는 수 없이 더 북쪽을 향해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북스코틀랜드 끝단을 돌무렵 흔치 않게 북대서양에서 부는 폭풍우에 함대가 휩쓸려 버린 것이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많은 배들이 아일랜드 해안의 바위들에 부딪혀 좌초되고 말았다. 남은 배들까지 모두 귀환한 10월에 항구에 댄배는 고작 60여 척에 불과했다. 이로써 거의 1만 5천여 명의 수군들과 함께 세계 최강의 해군력이라던 스페인의 명성 또한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고 힘의 균형 또한 이동하고 있었다. - P394

프랑코에게도 친구들은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라는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패망하자 프랑코의 스페인만 파시즘이라는 늪에 빠져 홀로 허우적대는 신세가 되었다. 서구 열강은 동부전선에서 나치와 함께 협력하도록 병력 5만 명을 보낸 이 사내를 무시했다. 종전 후 스페인은 따돌림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유엔은 물론마셜플랜, 나토에게까지도.
프랑코는 때를 기다렸다. 그는 영국이 지브롤터의 소유권 때문에라도 이베리아 반도의 안정을 희망하고 있으며 폭력적으로 정권이 전복되는 것을 지지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냉전으로 인해 서구 열강에게 강요된 현실 정치가 스페인에게유리하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유럽이 새롭게 마주한 위협은 파시즘이 아니었다. 바로 소련의 공사주의였다. - P404

은 파시즘이특히 미국은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때 스탈린의 부대 일부가 남서쪽인 스페인까지 진격할 수 있음을 우려했다. 미국은 자국의 전략적 깊이의 측면에서 스페인을 바라보았다. 즉 소련의 붉은 군대를 라인강에서 저지하지 못했을 때 방어선을 구축하고 뒤로 물러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말이다. 1947년에 미국합동전쟁계획위원회가 수행한연구에서는 소련이 서유럽 공격을 개시한다면 3개월 이내에 피레네산맥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20일이 걸려 산맥을넘고 대서양 연안을 따라 리스본으로, 지중해 연안을 따라 바르셀로나로 진격할 수 있다. 거기서부터 소련은 40일 내에 지브롤터에 도달해서 지중해와 대서양의 접근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열린 잠정 협상에서 스페인은 미군에게 전략적 기지 사용권을 부여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 P404

그 협상이 조인될 때까지 수년이 걸렸지만 1951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스페인에 대한 정책이 바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미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랑코를 좋아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지만,
내 개인적인 감정이 당신들 군인들의 신념을 무시하게 하지는 않을것이다."
2년 뒤 마드리드 조약이 맺어졌다. 스페인은 향후 20년간 20억 달러의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받는 대신 미군에게 육군과 공군, 해군기지들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만에 하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군이 프랑스의 방위를 포기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시나리오에서 민주주의 유럽의 최후의보루는 파시스트의 나라 스페인이 되는 셈이었다. - P405

트루먼이 프랑코를 만날 일은 없었다. 이 명예 아닌 명예는 후임자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 주어졌다. 1959년, 그는 처음으로스페인을 방문한 현직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프랑코가 히틀러와 나란히 걸으면서 나치의장대에게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는 장면이 찍힌 지 채 20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이제 프랑코는 미국 대통령과 함께 스페인 군악대가 연주하는 텍사스의 노란 장미 The Yellow Rose ofTexas」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마드리드 거리를 행진했다. 민주적인스페인을 갈망하는 사회 각계각층에게는 쓰라린 일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생활은 조금 나아졌다. 미국과의 합의를 따르려면스페인은 무역 규제를 좀 더 느슨하게 풀고 외국인 투자도 허용해야했다. 자급 경제를 슬그머니 포기하자 인플레이션이 유발되긴 했지만 - P405

어쨌거나 1960년대의 스페인은 경기가 살아나서 국민들은 너도나도 세탁기와 텔레비전 같은 서유럽에서 표준이 된 상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이르자 스페인의 독재자는 자신의 사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흔여섯이 되던 1969년, 건강이 쇠락해진 상태에서 프랑코는 자신의 뒤를 이을 국가의 수장이자 국왕으로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지명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프랑코는 카를로스 왕자가 기존의 정치 구조를 따르리라 믿었다. 정권은 왕자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으며, 대중 또한 그가 자신들의 삶을 바꿀 의지나 능력이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잘못된 믿음이었다는 것을 그는 증명했다. - P406

스페인은 가만히 앉아서 카탈루냐를 잃을 생각이 없다. 이런 입장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국가의 위신과 경제 문제도 있지만 때로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바로 지리적 문제다. 스페인 역사를 돌이켜보면 북쪽의 침략자들은 대개 피레네 산맥 양측에 좁게 펼쳐진 나지막한 땅을 통해 이 나라로 진입했다. 그곳이 바로 북서부의 바스크 땅과북동부의 카탈루냐 땅이다. 북쪽에서 스페인이 펼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는 이 통로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카탈루냐나 바스크가 분리 독립해버린다면 스페인에게는끔찍한 저주가 될 것이다. 이 두 지역이 스페인 중앙 정부에 적대 세력이 된다면 악몽이나 다름없다. 현재는 피레네 산맥을 관통하는 터널이 뚫려 있지만 군사적으로 보면 이 터널도 쉽게 봉쇄될 수 있다.
이 통로는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스페인의 주요 지상 보급로로 연결되고, 카탈루냐와 바스크 두 지역은 바르셀로나와 빌바오를 포함한 스페인 주요 항구의 본거지가 되기도 한다. - P414

또 다른 주요 해군기지는 카나리아 제도에 있다. 이곳에는 육군과공군 시설도 있다. 기니만을 마주하고 있는 이곳은 스페인에게는 주요 교역로일 뿐 아니라 해저 통신선이 지나가는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곳이다.
교역로는 물론 화물선과 어선들의 방어를 위해 스페인 해군은 130여척의 함선과 2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유사시에는 11만 5천명의 해병대원도 동원할 수 있다. 이들은 스페인 육군과 공군은 물론미군과 나토의 지원도 받고 있다. 미군은 지브롤터에 인접한 로타 해군기지와 세비야 남쪽 50킬로미터에 위치한 모론 공군기지 등 기지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스페인은 또 EU가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벌이는 해적 퇴치 임무인 아탈란타 작전에도 참여하고 있다. 영국이EU에서 탈퇴하자 이 임무의 작전권이 스페인과 미국이 사용하고 있는 로타 해군기지로 이양됐기 때문이다.

이제껏 저지른 여러 실수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오늘날 스페인은 성공 스토리를 쓰고 있다. 이 나라는 2008-2009년의 경제 위기에 - P420

서도 살아남아 유럽의 경제 강국 중 하나라는 지위를 되찾았다. 또 훌륭한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으며 유럽에서도 최고의 기대수명을 가진사람들이 활동하는 활기찬 도시들을 보유하고 있다.
다른 경쟁국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또한 기후변화나 인구 이동,
각종 경제적 문제, 그리고 분열된 정치와도 힘겹게 씨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스페인은 이를 감당할 만한 위치에 있다. 석탄은 고갈됐고 석유나 천연가스도 풍족한 적이 없었던 나라지만, 현재필요한 에너지의 6분의 1을 수력 발전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태양광발전량도 풍부한 편이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특히 태양광과 풍력이라는 재생 에너지를 선도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이 나라는 계속해서 외부의 압력에 직면하겠지만 가장 큰 도전은뭐니 뭐니 해도 내부, 즉 지리에 근거한 것이다. 1500년대에 하나로합쳐졌던 이 왕국은 가까운 미래를 위해 여러 지방 정부가 모인 하나의 민족국가와 거기서 야기되는 긴장감을 균형 있게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코 시대에 흔히 들었던 "스페인은 유럽이 아니고 유럽이었던 적도 없다."라는 정서가 이 나라에서덜 타당하게 여겨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421

우주,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이나이라크가 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달에 식민지를 세운다면 당신은 식민주의자일까? 러시아와 중국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실 그 말도 일리가 있긴하다.
우리가 지구의 대기권을 뚫고 나가서 무한대 속으로 1밀리미터쯤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된 뒤로 우주 공간은 정치적 각축장이 되었다.
이 이슈의 중심에는 달이나 화성 같은 물리적 영토를 주장하는 것만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앞선 세기에서 보아왔듯 그곳으로 가는 데필요한 연료 보급소와 병목지점들 또한 주요 이슈다. 만약 그것들의사용에 관한 규칙과 우리가 도달할 영토를 관리할 법적인 틀을 합의하지 못한다면 지구 위에서 인류의 역사 내내 벌였던 꼭 그대로의 싸움으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한데 어찌하랴, 우리가 그들을 위해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별에 적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우주 레이스>는 한층 가열되고 있다. - P426

우주 경쟁에는 늘 군사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 개척자 중 한 사람인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우주 비행에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1930년대에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까지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조인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했지만 로켓에 대한언급은 일절 없었다. 나치는 폰 브라운의 연구를 지원했고 그 결과물인 V-2 로켓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에 투하됐다. 1944년에 최초로 우주 공간에 쏜 발사체가 된 V-2는 수직 이륙 후 고도 176킬로미터까지 날아올랐다. 종전 후 폰 브라운과 120명의 과학자들은 문제의 V-2와 함께 미국으로 옮겨가서 미국의 우주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그로부터 24년 뒤, 그는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최초의 달 착륙선인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러시아인들 또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이 경주에서 앞서가기도 했다.  - P428

우주 탐사라는 사업은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든다. 결국 미국은 달 착륙 장비를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몇 개의 깃발과 발자국, 96개 정도의 쓰레기 상자를 남겨둔 채 말이다. 이제 그들은 돈이 덜 드는 것으로 눈높이를 낮추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실험을 수행할 우주 정거장과 그 건설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궤도에 위성을 안착시키는 스페이스 셔틀(우주왕복선) 사업이다. 닉슨 대통령은 마지막 아폴로 계획 3개를 폐지했고 NASA는 목표를 수정했다. 그들은 아폴로 계획 시절의 남은 조각들을 그러모아 만든 2층짜리 실험실을 궤도에 쏘아 올렸다. 이 스카이랩(Skylab, NASA의 유인 우주 실험실)은 세인의 관심을 끄는 데는 실패했지만 각종 실험을 수행하고 인간이 우주 공간에서 오랜 기간 머무를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인간의 지식을 향상시키는데에 기여했다. - P431

머스크가 상업적인 우주 기업을 이끌고 있다면, 아마존의 창업자제프 베조스는 자신의 블루 오리진 컴퍼니를 통해 머스크의 뒤를쫓고 있다. 이 회사가 내세우는 비전은 수백만 명이 우주에서 살고 일할 수 있는 미래다. "우리의 손자들과 그 손자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고향인 지구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무한한 자원과 에너지를 찾아우주로 떠나야 합니다." 여기서 핵심 용어는 <무한>이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우리는 달에서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광물, 이를테면 티타늄을 비롯한 값진 광물들을 발견할 기대를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지구에서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 더 많은 우주 정거장과 달기지들도 원 없이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 P435

저궤도는 우주선이 달 너머로 갈 때 연료를 재급유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화성까지는 달보다 수백만 마일이 더 먼데 지구중력의 경계를 벗어나려면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저궤도에서 화성으로 가는 것보다 지구 표면에서 달로 가는 것이 훨씬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 그런데 어떤 강대국이 이 통로를 전면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일종의 문지기가 되는 것이며, 이 안에서 경쟁국들이 연료를 재충전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더 멀리 나가는 능력도 방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유용한 비유를 제공하는 지구 위의 상황들이 있다. 현재 한 흑해 국가의 군함이 지중해를 통해 대서양으로 진출하려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고 싶다면 터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만약긴장감이 고조된다면 그 허가는 반려될 것이다. 따라서 저궤도의 통제 또한 동일한 권력이 될 수 있다. 의미 있는 조약들, 그러니까 소위우주 정글에 대한 법칙이 없다면 말이다.
게다가 상업적인 고려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엄청나게 커다란 패널로 태양광을 모아 발전을 위해 지구로 보낼 수 있을 만한 기술이 개발된다면 이 기술을 저궤도에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공간은 장거리 여행을 위한 주유소이기도 한 만큼 혹시 채굴 목적으로 운석에접근하고자 하는 측은 문지기 국가에 소정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할수도 있다. - P442

그래서 미국이 만든 것이 이른바 우주군이다. 우주군의 창설을 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주에서 미국의 우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주군은 공격을 단념시키고 궁극의 고지대를 통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비교적 힘이 약한 국가들이라고 해서 우주를 보는 시각이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우주 탐사와 그에 수반된 군사적 차원 양쪽에서 최첨단에 있는 것은 역시 이 빅3 국가(미국, 중국, 러시아)다.
이제 이들 세 나라는 전 영역에서 우세>라는 군사 개념에 우주를포함시키고 있다. 저궤도부터 달까지,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까지 말이다. 1980년대에 미국은 전략방위구상을 통해 이러한 이득을 얻기위한 초기의 제한적인 시도를 했다. 다시 말해 핵공격으로부터 미국을 방어하기 위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 개발을 시도한 것이다. 미국이검토했던 옵션들 가운데 하나가 우주를 기반으로 한 무기의 범주를다양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스타워즈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우주군사화의 전조였다.
이제는 음속보다 20배 이상 빨리 날아가는 극초음속미사일 개발이이 분야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존의 대륙간탄도미사일과는 달리 극초음속 미사일은 포물선을 그리며 비행하지 않고 방향과 고도도 변환할 수 있다.  - P445

각국의 인공우리가 공상과학 소설을 계속해서 현실화시키는 한 상황은 점점 더복잡해질 것이다. 그 한 예가 2020년 7월에 발생한 사건이다. 러시아의 코스모스 2542 군사 위성이 미국 위성인 USA 245를 스토킹하던중 상당히 가까운 거리라 할 수 있는 150킬로미터 이내까지 접근했다. 그러고 나서 그 안에 있던 미니 위성인 코스모스 2543을 발사했다. 미군은 이것을 러시아 인형이라 부르곤 한다. 이 아기 코스모스는러시아의 세 번째 위성을 향해 이동하기 전에 미국의 위성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미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시속 7백 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고속 발사체를 발사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크렘린궁은 이에 대해 단지 위성의 상태를 점검한 것뿐이라고 밝혔지만 영국과 미국 국방부 모두 이것이 무기 실험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믿고 있다. - P446

이제 인공위성은 더 이상 전화나 TV 방송을 중계하는 데만 필요한것이 아니다. 위성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현대전에서도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위성을 떨어뜨리거나 방해하면 자동차의 GPS 시스템이 먹통이 되고 신용카드가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려고 텔레비전을 켜도 깜깜한 화면만 나온다. 며칠 지나면 슈퍼마켓의 배달시스템까지 혼란에 빠지게 된다. GPS가 없다면 선박과 비행기들이 제 길을 찾는 데 고생하는 것은 차치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는 전력망이 다운되는 것이다. 일기예보를 듣는 것 같은일은 아예 포기하는 게 좋다.
군사적인 차원에서 모든 선진국은 정보와 감시 활동을 위성에 의지하고 있다. 어떤 나라의 군사위성이 타격을 입는다면 그 나라의 최고사령부는 그 즉시 그것을 지상 공격의 전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핵공격 조기 경보 시스템도 망가질 수 있어서 차라리 먼저 공격을 감행하자는 결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 비록 기존 방식의 싸움이남아 있더라도 상대편은 적을 정밀 타격하고 눈에 띄지 않게 군사력을 이동시키는 데 유리할 것이다. 암호화된 통신을 보내는 상대 국가의 능력이 제약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 P447

우주는 무한하다. 더불어 그 가능성 또한 무한하다. 공상과학 소설이 그토록 재미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현재의 지식에 구속돼 있으면서도 그 지식으로 인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비록 현재까지의 역사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지만, 그리고 구속돼 있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으로는 광대한 우주 전체를 아우를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연법의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이동하거나(어쩌면 영영 어려울지도) 적어도 그와 - P452

비슷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은 태양계를 넘어서려고애쓸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너무 먼 곳에 있기때문이다. 프록시마 켄타우리가 발사한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는 4.25년이 걸린다. 다시 말해 40조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밤하늘에서 보는 안드로메다 별자리는 적어도250만 년 전의 모습이다. 이 어마어마한 거리 때문에 광속의 10분의 1 속도로 추진력을 얻는 데도 적어도 수십 년은 걸릴 것이기 때문에 우주 깊은 곳으로 여행하는 문제는 공상과학 소설가나 선구적인이론가들 그리고 미래 세대의 몫으로 남겨질 것이다. - P453

우주 탐사가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있다 보니 우리로서는 어느 방향으로 발을 딛고 싶은지 결정할 필요가 있다. 각 국가들은 상호 인정한영토에 주권을 행사하는 시스템의 실패한 역사를 지겹도록 보여준우주판 베스트팔렌 개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보편적 인간성과 우주 여행에 도사린 도전을 인정하고 지구라는 집을 벗어나 저멀리 모험을 감행하는 하나의 국민처럼 행동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조금은 더 친숙한 패턴을 따랐다. 땅과 바다의 위대한 발견들은 대부분 비슷한 결말을 맞았다. 경쟁, 힘겨루기, 승자가규칙을 정하고 선을 긋는 것 말이다. 이 장면을 우주로 옮긴다면, 이제껏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는 현재는 쫓겨날 소유주가 없고 위험을부담하면서 모험을 감행하고 투자하는 측은 이익을 낼 수 있어야 한다.  - P456

아직 발견되지 않은 소행성들이나 다른 목표물을 발견하고 추적하는 데 협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관심사다. 특히 1908년에 시베리아숲의 수백 평방킬로미터를 초토화시켰던 퉁구스카 운석처럼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소행성이나 다른 물체들을 발견하고 추적하는데 협력이 필요하다. 동일한 궤도에 그보다 훨씬 더 큰 물체들이 있을수 있다. 공룡들은 그것들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겠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대해 무언가를 해볼 수 있다.
우주에서의 협력이 꼭 지구상에서 국가들 간의 적대감을 종식시키는 것은 아니다. 미국 우주비행사들이 러시아 우주선에 있는 국제 우주 정거장을 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양국 사이의 긴장이 부활하고고조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십 년 전 양국 사이에 전쟁의 위협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을 때 기술 협력은 긴장 완화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1975년의 소유스 아폴로의 도킹을 이뤄냈다. - P458

양 진영의 우주비행사들이 함께 그랬던 것처럼, 우주 공간에서 <창백한 푸른 점(pale-blue dot, 우리 지구)>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태초부터 우리를 감염시켜 <우리>와 <그들>로 갈라놓게 한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길이다. 우주는 그 무한대 속으로 우리 인간의 정신이 뻗어나갈기회를 주고 있다. 인간은 늘 위를 바라보았고 깜깜한 밤하늘의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면서 꿈을 꾸어왔다. 실제로 우리는 높은 곳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높이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서로 힘을 합친다면 훨씬 빨리 도달할 수 있다. 우주에는 한계가 없으니까. - P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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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곳, 저녁과 아침과
열두 번의 바람이 지나간 하늘을 넘어
나를 만들기 위한 생명의 원형질이
이곳으로 날아오고, 여기에 내가 있네.

이제, 숨결이 한 번 스치는 동안 나 기다리니아직 산산이 흩어지지 않은 지금
내 손을 얼른 잡고 말해주오,
당신 마음에 품고 있는 것들을.

지금 말해주오, 내가 대답하리니.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말해주오.
내가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끝없는 길을 나서기 전에.

<슈롭셔의 젊은이>, A. E. 하우스먼


이 단편집은 화가들이 일명 ‘회고전‘이라 칭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책은 내가 서른두 살이라는 늦었지만 겁이 없던 때 데뷔한 이래 10년 동안 발표한 단편들을 한 예술가가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충이나마 글 쓴 연대순으로 엮은 것이다. 나는 연대의 전후 관계에 엄격한 사람은 아니다(연대의 전후 관계에 엄격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글은 쓰는 데 1년이 걸리기도 하고, 그 이후 2, 3년이 지나도록 발표되지 않을 수 있으며, 퇴고를 거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글을 완성한 날을 언제로 보아야 하겠는가). 하지만 순서 변동은 그리 크지 않다.
내가 쓴 단편들이 모두 이 책에 수록된 것은 결코 아니다. 초기에 발표한 작품 중 하나는 내가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 뺐다. - P9

그리고 판타지소설이나 SF과학소설의 범주 안에 속하지 않는 작품 또한 포함시키지 않았다. 또한 최근 몇 년 새 발표한 단편들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 작품들이 맨 처음 수록된 단편집이아직도 출판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 있는 마지막 두작품은 1973년과 1974년에 발표된 것으로, 이 단편집에 수록된열일곱 편의 이야기는 지난 10년 내지 12년을 아우르고 있다.
소설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의 관계는흥미롭다. <샘레이의 목걸이>는 그 자체로 완벽한 이야기지만장편소설의 토대가 되었다. 나는 이 작품을 끝마쳤을 때 샘레이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다 썼다. 하지만 단편에서 단순히 방관자역할로 중요하지 않게 등장했던 인물이 이야기가 끝났음에도불구하고 고분고분히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자꾸 나를 괴롭혔다. 그자는 "내 이야기를 써. 난 로캐넌이라고 해. 난 내 세계를 탐험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난 그 사람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런 종류의 사람과는 논쟁해봤자 소용없는법이다. - P10

<겨울의 왕> <해제의 주문> <이름의 법칙> 모두 장편소설의 토대가 된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장편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무대 배경을 제공해주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마지막 작품은 토대가 아니라 열매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 나온 다음에 고맙게 얻은 궁극의 선물이다.
사실, 이 책에 실린, 시간순 서술 방식을 따르는 단편소설 대부분은 내가 쓴 모든 SF가 따르는 다소 아귀가 안 맞는) ‘미래 - P10

사‘의 개요에 그럭저럭 들어맞는다는 점에서 내 장편소설들과관련이 있다. 이런 개요에 맞지 않는 작품들은 초기에 쓴 판타지소설과 내가 ‘심리신화‘라 부르는, 이후의 다소 초현실주의적인작품들이다. 심리신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역사나 시간대가 아닌 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며, 그곳에서 사는 생명체는 불사라는 개념에 호소하지 않아도 시공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판타지소설과 공통점이 있다.
수집가라면, 이 책에 실려 있는 작품의 제목을 내가 직접 골랐으며 예전에 발표했을 때의 제목과 달라진 점을 알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 P11

<샘레이의 목걸이>는 처음에 <앤기어의 결혼 지참금>이라는제목으로 발표(‘앤‘ 발음을 제대로 할 줄 모르던 편집자의 실수였다).
<물건들>은 <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
<시야The Field of Vision>는 <시야Field of Vision>로 발표.
단어 하나 또는 문장 하나 정도 고치거나 지면관계상 삭제된부분을 복원하거나 출판 당시에 있었던 오류를 수정하는 정도가 아닌, 새로 고쳐 쓴 글들은 다음과 같다:<겨울의 왕> (해당 단편 앞머리의 짧은 글 참고)<아홉 생명>(해당 단편 앞머리의 짧은 글 참고)<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첫 문단에서 한군데 삭제) - P11

1963년에 쓴 이 글은 1964년에 <앤기어의 결혼 지참금>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으며, 1966년에 발표한 내 첫 번째 장편소설 《로캐넌의 세계》 도입부이기도 하다. 비록 출판된 순서로는 여덟 번째이지만 나는 이 글로 책을 시작할까 한다. 이이야기에 내가 쓴 초기 SF와 판타지소설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고 또한 이작품이 가장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로부터 단편집의 마지막인 1972년에 쓴 단편까지, 내 글의 문체는 공공연한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이었다. 나는 여전히 낭만주의자이고그 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며 또한 내가 낭만주의자인 게 기쁘다. 하지만 <샘레이의 목걸이>의 솔직 담백함과 단순함은 점차 단단하고 강력하고 복잡한 것으로변하게 되었다. - P14

그토록 먼 세월이 떨어진 세상들에 대한 전설과 사실을 당신은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름도 없이 그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과거는 신화의 영역이 되고 여행에서돌아온 탐험가들은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이 벌였던 행동이 신의몸짓이 되어버린 사실을 깨닫게 되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행성들에서 우리의 광속 우주선이 다리를 놓은 시간의 틈은 광기어린 어둠이 잠식하고, 그 어둠 속에서 불확실과 불균형이 잡초처럼 자라난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그러한 이름 없고 반미지의 세계로 떠났던 어떤 남자, 한 평범한 연맹 과학자의 이야기를 하려니, 마치 수천 년의 폐허 한복판에서 얽히고설킨 잎과 꽃 가지와 덩굴사이에서 돌연 모습을 드러내는 바퀴 모양 기하 도형의 배열이 - P15

나 마모된 머릿돌 따위를 찾아다니던 고고학자가 어느 평범한장소의 양지바른 현관으로 발을 디뎠는데, 그 안의 어둠 속에서상상치 못했던 불꽃의 깜빡거림을, 보석의 반짝임을, 여인의 팔이 슬쩍 움직이는 모습을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든다.
당신은 어떻게 전설에서 사실을, 진실에서 진실을 구분해낼수 있는가?
푸른색으로 반짝이며 슬쩍 모습을 보였던 보석이 로캐넌의이야기를 통해서 돌아온다. 그 보석과 함께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 P16

남편의 재산이라곤은거울과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그마한 수정 천 개로 장식한신부 드레스가 전부였다. 이들보다 지체가 낮은 친척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금실은실을 섞어 짠 비단옷으로 가득한 옷장, 금박을 입힌 목재 가구, 은제 마구, 은으로 장식한 칼과 갑옷, 보석과장신구들을 가지고 있었고, 갓 결혼한 두르할의 신부는 부러운눈으로 그 물건들을 바라보았으며, 심지어 그런 장신구들을 걸친 사람들이 여인의 혈통 그리고 두르할과의 결혼으로 인해 생긴 신분에 경의를 표하며 길을 양보할 때도 여인은 고개를 돌려보석 왕관이나 황금 브로치를 힐금거리곤 했다. - P19

두로사는 엄마와 고모 사이에서 모피 깔개에 앉아 자신의 갈색 발가락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아기에게 고개를 숙였다. "샘레이는 바보란다."두로사는 아기에게 중얼거렸다. "유성처럼빛나는 샘레이, 남편이 사랑하는 건 세상의 황금이 아니라 아내의 금빛 머리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샘레이……두로사의 말에 샘레이는 입을 다물고 먼 바다로 향한 여름의 푸른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추운해가 지나고, 별의 지배자들이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 다시 세금을 걷으러 왔다갔다. 별의 지배자들은 이번에 통역으로 진흙인 난쟁이 한쌍을 썼는데, 이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앤기어인은 거의 반란 직전까지갔다.  - P23

"그래." 관장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저 여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금발의 샘레이, 황금빛 샘레이, 목걸이를 한 샘레이. 진흙인은 샘레이의 의지에 따라 자신들의 의지를 굽혔고, 심지어 진흙인이 샘레이를 데려갔던 끔찍한 곳, 밤의 끝에 사는 별의 지배자들조차 샘레이의 뜻에 따라주었다. 별의 지배자들은 샘레이에게 절을 했고, 자신들의 물건 가운데 샘레이의 보물을 기꺼이 돌려주었다.
하지만 샘레이는 동굴에서 느꼈던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바위가 머리 위를 내리누르는 곳, 누가 말하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곳,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고 회색 손이 뻗쳐오던 곳. 이제 충분했다. 샘레이는 목걸이 값을 치렀다. 아주후하게. 이제 목걸이는 샘레이 것이었다. 대가는 지불했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 P48

샘레이는 자기 목을 내리누르는 금사슬에 손을 댔다. "그이에게 제가 가져온 선물을 주겠어요."
"기다리거라, 샘레이! 두르할의 딸이자 네 딸을 보고 가렴. 아름다운 할드레를!"
샘레이가 처음에 말을 걸었던 여자아이, 두로사에게 자신이온 걸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바로 그 아이였다. 열아홉 살 정도로, 두르할의 짙푸른 눈동자를 그대로 닮은 아이였다. 할드레가두로사 옆에 서서 차분한 눈으로 자신의 어머니인 샘레이를, 자신과 동갑인 샘레이를 바라보았다. 둘은 나이가, 황금 머리털이, 아름다움이 같았다. 다만 샘레이가 키가 약간 더 컸고 가슴에 푸른 보석을 달고 있을 뿐이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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