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점에 살 때, 부령할매에게서 수의를 해간 여자가 붉은 팥 한 말과 노란 좁쌀 한 말을 싸들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자신의 죽은 어머니가 원삼을 입혀드리자 기적처럼 성불(成佛)하셨다고, 그녀는 자신이 가져온 붉은 팥과 노란 좁쌀을 앞에 펼쳐놓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연둣빛 길에 자줏빛 깃을 달고, 일곱 빛깔 무지개 색동으로 소매를 단 원삼을 입혀드리자 새색시처럼 수줍게 웃으면서 성불하셨어요..... 일색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는 걸 일평생 위안 삼아 사셨을 만큼 박색인 어머니가 천하일색 양귀비나 황진이 뺨치게 어여뻐 보이더라니까요."
중얼거리는 내내 여자는 붉은 팥알을 손으로 집었다 놓았다 했다.

금택은 장의사의 한지꽃을 접는 여자가 떠오를 때마다 그녀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내내 한지꽃을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들이불어나 무덤처럼 자신을 덮도록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 무덤 속에서도 여자가 한지꽃을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들이읍내 거리를 덮도록 접을 것 같았다. 읍내 전체가 한지꽃으로 뒤덮인 거대한 상여가 될 때까지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 P192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또다시 금택을 찾아왔다. 그 소리는 금택이 가는 곳마다 따라왔다.
금택은 서쪽 방 들창 밑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 어느 날처럼 부령할매가 바늘땀을 뜨는 소리는 그곳까지 따라와 떠돌았다. 뒷산으로 난 들창은 한 뼘 정도 들려 있었다.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에 어머니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박자를 맞추지 못하고 겉돌았다.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다가 어느 순간 화음을 만들어냈다.
광목 조각 같은 참새들이 탱자나무 가시들 속으로 날아들었다.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어머니의 바늘땀 뜨는 소리를 불러온 것 같아 금택은 기분이 이상했다. 죽은 사람의 옷을 짓는 소리가 산 사람의 옷을 짓는 소리를 불러온 것 같아서. 죽음이 목숨을 불러온 것 같아서. - P204

누비옷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도 옥 사모님은 오랜 단골들과 달랐다. 어머니가 자리라도 비우면 어머니에 대해 이런저런 별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는 다른 단골과도 달랐다. 옥 사모님은 햇수로 치자면 어머니와 인연이 가장 짧았지만, 어머니와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다른 단골과 다르게 어머니를 재촉하지 않았다. 자신이 주문한 누비옷이 완성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삼회장 누비저고리와 치마를 지어 입기 위해 1년 넘게 기다린 적도 있었다.
닷새 전에도 옥 사모님은 우물집에 다녀갔다. 어머니가 두 달 내내매달려 완성한 누비치마를 두르면서 그녀는 말했다.
"땅을 두르는 것 같아." - P219

옷감이 다양하지 않다는 단골들의 불만을 금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우물집 마당과 뒷산에서 얻은 씨앗이나 잎, 열매, 나무껍질, 뿌리 등을 재료로 내는 색들은 그 어디에도 없는 색들이었다.
그 어디에도 없는 색을 입은 옷감들 역시 그 어디에도 없는, 서쪽 방에만 있는 옷감들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대구에서 끊어오는 옷감들은 어머니의 손을 거쳐 차원이 다른 옷감들로 재탄생했다. 무명이면서, 무명과 다른 차원의 옷감이 되었다. 염색을 통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색깔을 입고, 푸새와 다듬이질을 거쳐 이 세상 어디에도없는 질감과 광택을 띤.
나흘 전 어머니가 양파 껍질을 재료로 무명에 들인 노란색은 엄밀히 말해 노란색이 아니었다. 노란색을 넘어서는 그 어떤 색이었다. - P223

버스가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난 뒤에는 삼베휴먼지가 날리듯 일했다. 부슬비가 온종일 촉촉하게 내린 이튿날에는 명주휴먼지가 차분하고 우아하게 일었다. 얌전하고 새침한 여학생의 까만 운동화 뒤회에서는 자미사흙먼지가 자미사는 얇고 부드러워 초가을 옷감
으로 쓰였다. 그것으로 치마를 해 입으면 걸을 때 사각사각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신작로를 따라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필즈음이면 노방흙먼지와 한라흙먼지가 한복 치마의 안감과 겉감처럼 겹쳐 일었다. 소의 혀같은 구름이 낮게 하늘을 뒤덮어 바람이 거의 일지 않는 날에는 양단홈먼지가 낮고 묵직하게 깔려 일었다. 바람이 잔잔하고 햇빛이 화창한 날에는 숙고사흙먼지가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듯 일었다. 초봄에는 결이 촘촘하고 빳빳한 옥사흙먼지가 쌀쌀하게 손사래 치듯 일었다. 초복부터 중복까지 한여름에는 주로 툭툭한 광목흙먼지가, 건조하고 맑은 가을날에는 까끌까끌하고 쌍그런 모시흙먼지가 일었다.
모시흙먼지와 삼베흙먼지는 비슷한 듯 천지 차이였다. 모시흙먼지는 곱고 빛깔이 매화꽃처럼 고왔지만, 삼베흙먼지는 투박하고 거칠었으며 황달이 든 듯 누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 P239

건어물 행상 여자가 다녀갔는지 마루에 멸치가 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넉 달 전쯤 찾아왔을 때 그녀의 배는 불러 있었다. 어머니는 밥을 새로 짓고 들깨토란탕을 끓여 그녀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밥을만 들깨토란탕을 연신 숟가락을 떠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녀는 말했다. 배가 불러 행상을 다니는 자신이 불쌍하고 안쓰러운지 문전박대하는 집 없이 냉수라도 한 대접 먹여 보내더라고, 목이 타입이 간장좋지 같을 때는 냉수가 꿀물이라고… 금택은 그녀가 아들을 낳았을지 딸을 낳았을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녀가 또 딸을 낳았을 것 같아서였다.
걸쭉한 들깨 국물에 희멀건 토란이 둥둥 떠다니는 들깨토란탕은 운문 양단이었다. - P243

그럼에도 예술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누비옷들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는 바늘과 실로 꽃이나 나비를 그리지 않았다. 흠질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바느질로, 가장 작은 바늘땀을 반복해서떴다. 점에 불과한 바늘땀들이 모여 하나의 선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떴다.
누비 바느질은 점을 통해 선에 도달했지만, 자수는 선을 통해 면에도달했다.
금택에게는 황금색 실로 입체감 있게 수놓은 나비나 꽃보다 0.2. 0.3센티에 불과한 바늘땀들이 그리는 선이 훨씬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예술이라면 금택은 어머니가하는 누비 바느질 역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술이라는 말을입속에서 중얼거리는 순간 갈비뼈들이 갈라지고 벌어지는 것 같은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심장이 격하게 떨렸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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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랑몰랑한 백설기를 뜯어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오전일한시경 부스에 든 뒤로 화장실에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사이 햇살요양원 마당을 거닐던 노인들은 사라지고 없다. 늦은 오후의 산책을 끝마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증발해버린 것 같다.
그녀는 의자 밑에 놓아둔 가방에서 은색 파우치를 꺼낸다.
화장품 가게에서 사은품으로 얻은 파우치다. 파우치 지퍼를열고 립스틱을 꺼내든다. 립스틱을 바르자 입이 얼굴과 겉돌면서 붉게 떠오른다. 그녀는 립스틱을 덧바른 뒤 도로에 두눈을 고정시킨다.
석양이 깔려와 부레처럼 부풀어 보이는 도로 위로 차가 한대 나타난다. 차는 음산요금소를 향해 느리지도, 빠르지도않은 어중간한 속도로 달려온다. 차 종류와 색깔이 잘 분별이 안 된다. 그녀는 방금 립스틱을 발랐다는 것을 망각하고는 립스틱을 덧바르며, 검은색 그랜저가 아니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란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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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생각했다. ‘릴리트‘라는 제목만 아니었어도 최의사진이 그토록 끔찍하진 않았으리라.
릴리트는 유대 민담에 등장하는 인물로, 최초의 여자이자아담의 첫 아내였다. 민담에 따르면, 하느님은 릴리트를 아담의 갈비뼈가 아니라 아담과 똑같이 흙으로 빚은 뒤 코에생기를 불어넣어 만들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남자 아담과 최초의 여자 릴리트는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첫날밤, 아담이 동침하려 했지만 릴리트는 그의 밑에 깔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을 주인이자 남편으로 섬기기를 거부한 릴리트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사탄이 되었다. 얼마 뒤 하느님은 흙이 아니라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최초의여자이자 아담의 아내는 릴리트가 아닌 하와가 되었다. - P21

철식이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어머니는 반사적으로어깨를 움츠렸다. 한순간 어머니의 눈동자가 카메라 렌즈를향했고, 철식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흑백사진 속 정면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보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에 가까운 탄식을 내질렀다.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이 자신이 생각했던것보다 훨씬슬픈 얼굴이어서, 슬픔이 깊어지면 감탄을 자아낸다는 걸,
어머니의 얼굴이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어머니의 사진을 앞에 놓고 그녀는 철식에게 물었다.
"악랄한 포주처럼 자신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건 어떤 걸까? 그런 여자들은 자신의 아이가 원망스럽고 저주스럽지 않을까? 더구나 아이가 아버지의 눈빛을 하고 있으면 그아이가 끔찍하지 않을까?"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 - P44

깻잎 밑에서 뛰고 있는 것은 아가미가 아니라 심장이었다.
어머니의 오그라든 심장이, 깻잎 밑에서 자맥질하듯 뛰고있었다.


한때 그녀는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폭력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 같은 망상에 시달렸다. 세상모든 폭력의 근원이 아버지 같았다. 심지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탄 테러도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만 같았다. - P46

"당신, 무엇을 위해 시를 쓰지?"
"무슨 말이야?"
"시 말이야. 무엇을 위해 쓰지? 응?"
그녀가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하자 감정이 격해진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 아니었어?"
"영혼...…? 나는 당신과 이혼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날 버리겠다는 거 아니야?"
버리다니? 누가 누구를?"
"네가 나를!"
"나는 지금 당신을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당신과 이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 P58

불멸할 것 같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 그녀는 생각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신은 아버지에게 가장 존귀한사람을 보내주었다고. 그런데 아버지가 그 사람을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고. - P62

지난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게 아니야‘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난을 들은 뒤로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그러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았다.
그가 한 말이 여전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오래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걸.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자신을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자신이, 자신의 영혼조차 어쩌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일 뿐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이혼이 나는 통과의례 같아. 나도, 당신도 피할 수 없는통과의례, 시속 백이십 킬로로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 만난 터널처럼....."
"그래...... "
"나는 이혼이라는 통과의례가 내게 불행이 아니기를 바라......"
"그래야겠지......" - P64

울산요금소를 통과하는 기분이 어떤지 그녀는 문득 궁금하다. 육 년 전 폐쇄된 요금소를 통과해 흘러든 뒤로 도시를벗어났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플라스틱 상자 속에 화투장처럼 쌓인 ‘고속도로 통행권‘들이 미처 지불하지못한 고지서 같다. 한 생애를 사는 동안 순간순간 청구된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요금이 적힌 고지서들이 그녀 자신 앞에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쌓여 있는 것 같다. 뒤적뒤적 통행권들을 살피던 그녀는 한 장을 집어들고, 그것에 인쇄된 문장을소리내 읽는다. "통행료 미납, 기타 부정한 통행료 면탈의 경우 당행 통행료 외에 열 배의 부가 통행료를 부과합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하이패스 구간을 통과해 도시를 빠져나간다. 1.5톤 트럭 적재함에 실린 세간들이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의 것 같다. 그녀가 음산요금소 부스를 지키는 동안, 그녀의 원룸 세간들이 꾸려져 다른 도시로 보내지는 것같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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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니는 바늘하고 인연이 있는가 봐예. 스물네 살에 잡은 바늘로 먹고살고 있으니예. 남들은 시집 가서 아를 낳아도 둘은 거뜬히낳았을 나이에 바늘을 다 잡았네예?"
여자가 물었지만 어머니는 다문 입을 벌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예, 역마살이 끼어서 바늘하고 인연이 안 된 것같아예, 의성서 만난 관상쟁이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예, 역마살이 끼었다고 하대예. 도화살까지 끼었으면 폐가망신할 팔자였다고하대예. 엉덩이가 벌레 묵은 복숭아츠럼 짓무르도록예, 진득하니 앉아서 해야 하는 게 바느질인데예, 그놈의 역마살이 끼었으니 말이지예. ……더듬어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예. 할머니하고 천쪼가리들 이어 조각보 지을 때가에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할머니 그림자하고 내 그림자가 작아졌다 커졌다 했지예.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았어예." - P121

일곱 살에 바늘을 든 여자는 건어물 행상을 업으로, 스물네 살에바늘을 든 여자는 바느질을 업으로 살아가는 두 여자의 엇갈린 운명은 금택에게 불가해한 일처럼 신기하고 두렵게 다가왔다. 그것은 복래한복 주인 여자와 월성댁이라는 두 여자의 엇갈린 운명과는 또 달랐다. 복래한복 주인 여자와 월성댁의 운명은 엇갈렸지만, 그녀들은어쨌든 둘 다 바느질하는 여자로 살고 있었다. 바느질하는 여자라는운명으로 묶여 있었다. 어쨌든 복래한복 주인 여자도 바느질하는 여자였고, 월성댁도 바느질하는 여자였던 것이다.
금택은 자신과 화순의 운명이 어떻게 엇갈려 전개될지 궁금했다.
건어물 행상 여자와 어머니의 엇갈린 운명과도 복래한복 주인 여자와 월성댁의 엇갈린 운명과도 다르게 전개되리라는 짐작만 막연히들었다. - P124

어머니는 감나무 그림자가 길어지면 씨를 받기 위해 부추를 더는베어 먹지 않고 꽃이 피도록 내버려두었다. 꽃이 피었다 져야만 씨를 받을 수 있다는 걸 금택은 부추를 통해 깨달았다. 처서가 지나면감나무 가지들은 시합하듯 지붕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그림자를길게 드리웠다.
우물집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바람바늘이었고, 햇살은 햇살실이었다.
햇살실에는 명주햇살실과 무명햇살실과 초를 먹여 빳빳해진 명주햇살실이 있었다.
바람바늘의 귀는 누비 바늘의 귀보다 작았다. 동틀 즈음에야 바람바늘의 귀에 명주햇살실이 꿰어졌다. 바람바늘이 부드럽게 감치고지나간 자리마다 바늘땀이 떠졌다. 파리가 똥 싸듯 바늘땀이 떠졌다. 아침 먹은 설거지를 할 즈음이면 바람바늘의 귀에는 초를 먹인명주햇살실이 꿰어졌다. 정오 즈음에는 무명햇살실로 바뀌어 꿰어졌다. - P127

자연과 밀접한 낱말을 먼저 자신들에게 가르쳤다. 계절을 가르치고,
낮과 밤과 새벽 같은 시간대를 가르쳤던 것이다.
새벽이라는 낱말을 먼저 써 보이기 전에 어머니는 말했다.
"새벽은 세상 모든 눈동자가 익은 밤송이처럼 열리는 시간이야."
자매가 갱지에 ‘새벽‘을 반복해서 쓰는 동안, 어머니는 누비대 위양단 조끼에 바늘땀을 떠 넣었다.
겨울이 깊어지자 어머니는 거울과 빗 같은 사물 이름을 가르쳤다.
금택과 화순은 비슷한 속도로 낱말을 익혀 나갔지만, 저마다 더 빨리 익히는 낱말이 있었다. 금택은 자연과 계절이나 시간과 밀접한낱말을 더 빨리, 화순은 사물 이름을 더 빨리 익혔다. 금택이 단번에외운 새벽이라는 낱말을 화순은 백 번 넘게 반복해서 쓰고 나서야 겨우 익혔다.
가을과 겨우내 어머니가 가르쳐준 서른 개 남짓한 낱말들 중 금택이 가장 흥미 있어 하는 낱말은 ‘땅‘이었고, 화순은 ‘거울‘이었다.
‘땅‘이라고 갱지에 쓸 때마다 금택은 그 낱말이 나무뿌리를, 뱀을,
죽은 새를, 죽은 사람을, 씨앗을 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33

"씨실과 날실이 가로, 세로로 반복 교차해 얽히고설켜 짜인 게 천이란다. 가로 방향으로 놓인 씨실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무늬가 결이지 천을 다루려면 결을 읽을 줄 알아야 해. 결을 못 읽으면 천을망치기 십상이야..... 결이 읽히니?"
어머니는 바늘 끝으로 씨실과 날실을 짚어 보이면서 설명했다.
"읽혀요……."
"결대로 바늘땀을 떠야 하는데 너는 결을 거스르면서 바늘땀을 떴구나......"
어머니가 씨실 끝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새치를 뽑듯 잡아당겼다.
"올을 튕기는 거란다."
씨실이 당겨지면서 잡아당긴 자국이 명주 조각에 칼로 그은 자국처럼 나타났다. 어머니는 명주 조각을 사방으로 잡아당겨 씨실을 도로 제자리에 넣어주었다.
"선이 보이지?"
· 보여요."
"이 선을 따라 바늘땀을 떠보렴."
어머니가 건네는 명주 조각을 받아드는 금택의 손이 떨렸다. 어머니가 눈앞에서 올을 튕겨 보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금택은 누비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 P139

어머니와 자신, 둘의 관계에서 금택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화순이 백일도 안 되어 버려졌다는 것을 금택은 화순에게 들어서 알았다. 젖먹이 딸을 버릴 만큼 무서운 데가 있는 어머니가 자신을 거둔 게 금택은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화순을 데려오기전까지 금택은 복래한복에 딸린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부령할매의 수의점을 떠나 복래한복에서 자리를 잡은 어머니는두 달쯤 지난 어느 날 화순을 데리고 왔다.
어머니가 거두기 전까지 금택은 부령할매와 살았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금택은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서 ‘부령할매‘
하고 중얼거렸고, 그때마다 둥글납작하게 뭉친 청국장 덩어리 같은부령할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함경북도 부령이 고향이라 그녀를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부령이 어디에 있는지 금택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부령이 얼마나 먼 곳인지 금택이 물을 때마다부령할매는 바늘이나 놋숟가락, 무쇠 가위, 무명이나 명주 실타래가들린 손을 들어 천장을 찌르듯 가리켰다. 폐병쟁이의 늑골처럼 서까래가 흉측하게 드러난 천장 저 너머에 부령이라는 곳이 있다는 듯. - P159

금택은 부령할매가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을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이 입을 옷을 짓는 그녀가 영원히 죽지않을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이 입을 옷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 같았다. 돼지의 간 같은 고무 대야에 달리아를 키우고, 괘종시계의 건전지를갈아주고, 윤달이 돌아오면 그녀의 환영 같은 늙은 여자들을 불러다수의를 지으면서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죽지 않을 때까지, 그래서 수의를 지을 일이 없을 때까지 언제까지나금택은 종종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간절했다. 봉제 공장수십 대의 미싱이 한꺼번에 돌아가면서 내지르는 굉음을 타이르고어르는 듯한 그 소리가 어머니의 친딸이 자신이 아니라 화순이라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을 때 특히나 그랬다. 그럴 때면 금택은 서쪽 방 쪽마루로 가 기둥 뒤에 숨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누비대 위에서 떠도는 바늘땀 뜨는 소리에 집중했다. 창틀을 타고 넘어오는 그소리는 그러나 부령할매의 바늘땀을 뜨는 소리를 외려 더 간절하게했다. - P174

봉제 공장 안을 들여다보던 금택은 갑자기 의문스러웠다. 여럿이서 바늘땀을 뜨는 소리는 박자와 강약이 제각각인데도 묘한 조화를만들어내지만, 수십 대의 미싱이 일제히 돌아가는 소리는 박자와 강약이 거의 같은 같은데도 전혀 조화롭게 들리지 않았다. 수십 대의미싱이 돌아가는 소리는 악다구니를 치면서 더 빨리 돌라고, 계속돌고 돌라고 서로를 닦달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창에서 돌아서서 철제 계단을 내려오던 금택은 그만 발을 헛디뎌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번데기들이 철제 계단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번데기들을 주우려고 고개를 숙이던 금택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철제 계단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서 있는 금택의 발아래로 기와지붕과 판자지붕과 슬레이트지붕들이 펼쳐졌다.
엉성하게 이어 붙인 천 조각들처럼. 전깃줄들은 듬성듬성 뜬 바늘땀같았다. - P179

문지방을 타고 넘어온 바람에 누비대위 저고리가 숨을 들이마시듯 들썩일 때 누빌 선을 따라 떠 넣은 바늘땀들이 한꺼번에 숨구멍처럼 오소소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뒤로, 금택은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들이 가방이나 신발 같은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 어떤 것으로인식되었다. 목숨이 붙어 있는 그 어떤 것으로, 토끼나 염소나 고양이처럼 심장도 있고, 귀도 있고, 눈도 달린 그 어떤 것으로.
금택은 여전히 기회가 되면 서쪽 방에 들어 새의 찢긴 날개 같은천 조각을 주웠고, 그 천 조각들에 바늘땀을 떴다. 집안일을 돕고,
숙제를 끝내고, 일기를 쓴 뒤 잠들기 전까지 바늘땀을 떴다. 기러기의 찢긴 날개 같은 흰 옥양목에, 산비둘기의 찢긴 날개 같은 회색 명주에, 공작의 깃털 같은 연보라색 양단에.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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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이면서 하나인 신발이나 젓가락처럼 자신들이 늘 함께여야한다는 강박은 어쩌면 금택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의 존재를 더 의식하는 쪽은 상대에게 더 의존하는 쪽은 화순이아니라 금백이었다. 자매로서 화순이 금택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것은 그때그때 다르면서도 단순했지만, 금택의 경우는 한결같으면서도 복잡했다. 화순은 금택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마다거침없이 요구했지만, 금택은 화순에게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었화순의 요구는 자신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요구는 화순이 결코 들어줄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금액의 요구는, 화순의 요구를 넘어섰다.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 등을 할 때 놀이 상대가 되어줄 것을 바라는 화순의 요구와는 다른 차원의 요구였다. 그것은 요구보다는 욕망의 차원에 가까웠다. - P34

바느질을 하는 여자라서인지 어린 금택의 눈에 어머니는 마을 여자들과 달랐다. 어머니는 늘 머리를 쪽 찌고, 쌀뜨물을 옷감 삼아 지은 것 같은 무명 저고리 차림이었다. 고름 대신 똑딱단추를 단 저고리는 새 옷처럼 깨끗했지만 실은 오래된 것이었다. 날이 아무리 더워도 어머니의 머리와 옷매무새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분을 바르지않는데도 어머니의 얼굴은 설거지를 하고 마른 행주로 물기를 훔친사기그릇처럼 깨끗했다. 촛불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은 형형한 눈빛은 저고리의 쌀뜨물 빛깔과 어우러져 고유하고 독보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멈칫 움츠러들게 하는 서늘하고 처연한분위기가 귀기라는 걸, 금택은 지난봄 우물집을 찾은 여자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알았다. 어머니에게서 누비옷을지어 입으려고 찾아온 여자들이었다. 여자들은 우물집 앞마당돌담아래에 핀 꽃들을 구경하면서 어머니에 대해 쑥덕거렸다. 마당 돌담아래는 어머니가 뒷산에서 캐다 심은 한련화, 하늘매밥톱, 고들빼기같은 봄꽃들로 꽃밭을 이루었다. 꽃들은 그 이름만큼 모양과 색깔이천차만별인데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 P39

어린 금택의 눈에는 그녀의 하루하루도 월성댁 못지않게 고달고 팍팍해 보였다. 그녀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한가롭게 가게나지키는 것 같지만, 도박에 취미를 들인 남편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이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삼대독자로 자라 자신밖에 모르는 데다 도박에 빠져 사는 남편 때문에 속이 상할 때면 그녀는 바느질을 하다가도 허공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죽은 시어머니를 원망했다. 여섯이나되는 딸들을 제쳐두고 며느리인 자신에게 바느질 솜씨를 물려준 시어머니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모습을 금택은 심심찮게 보았다. 저주는 어느 순간 애원하는 소리로 바뀌었고, 금택은 그녀가 남편이 아니라 죽은 시어머니를 붙들고 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곤 했다.  - P47

이미 많은 것을 주었다는 어머니의 말은 금택에게 깊은 인상을남겼다. 월성댁이 어머니에게 도대체 무엇을 주었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어머니에게 뭔가를 챙겨주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을 금택은 들은 적이 없었다. 복래한복 주인 여자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노랑나비를 보면 금택은 어머니가 월성댁의 목에 둘러준 누비목도리가 떠올랐다. 염소 발목처럼 앙상하던 그녀의 목에 둘러준 누비목도리가 수십 마리의 노랑나비로 흩어져 날아오르는 광경이 머릿속에 선연히 그려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노랑나비들 중 한 마리가날아와 월성댁의 소식을 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노랑나비가눈앞에서 날아다닐 때면 동동구루무 냄새가 났다. 그것은 월성댁의 얼굴에서 나던 냄새였다. - P51

금택과 화순, 둘 중 누구의 두려움이 더 큰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어머니라는 동일한 대상으로 인해 발생한 두려움이었지만,
둘의 두려움은 근본으로 달랐다. 화순의 두려움이 금택의 두려움보다 근원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더 고질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둘은 각자의 두려움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났다. 화순은 두려움을 외면했지만, 금택은 직시했다. 화순은 두려움을 방치함으로써, 금택은 아물게 두지 않고 후벼 팜으로써 상태를 악화시켰다. 두려움을 외부로 드러내는 방식 또한 달랐는데 금택에게서는 순종으로, 화순에게서는 원망과 반항으로 나타났다.
금택과 화순은 서로에게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온종일 붙어서 지냈지만, 어머니에게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만은 서로 교묘하게 숨겼다.  - P60

금택은 바늘 역시 두려웠다. 어머니만큼 두려웠다. 어머니보다 더두려웠다. 바늘은 어머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건이었다. 바늘과어머니를 떨어뜨려 생각하기란 어려웠다. 때때로 금택은 어머니가바늘을 잡고 있는 게 아니라 바늘이 어머니를 잡고 있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었다. 어머니가 바늘 끝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은 바늘은금택에게 자신이 어머니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일깨워준 물건이기도 했다.
화순은 바늘이 두렵기보다 싫었다. 바늘이 자신으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아갔다는 피해 의식마저 있었다. 어머니가 젖도 안 뗀 자신을 버린 것이 바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아버지가 죽은 것도 바늘 때문이라고, 큰외숙모가 일러주지 않았다면,
큰외삼촌 집 마당에 서 있는 여자가 자신을 낳은 여자라는 사실을 영원히 몰랐을 것이라고 화순은 생각했다. 어머니는 화순이 상상하던모습이 아니었다. 화순은 수백 번도 더 어머니를 상상했다.  - P63

어머니에게 무명 한 필은, 무명 한 필이 아니었다.
무명 한 필로 어머니는 세 종류의 다른 천을 만들었다. 무명이면서, 무명이 아닌 천들을푸새와 다듬이질로 어머니는 그렇게 했다. 푸새와 다듬이질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는 멥쌀 넉 되와 다듬잇돌과 홍두께, 숯다리미가전부였다.
푸새는 풀을 먹이는 것으로, 어머니는 주로 멥쌀로 풀을 쑤었다.
무명 한 필에 풀을 먹이기 위해 어머니는 멥쌀 두 되로 풀을 쑤었다.
멥쌀 두 되는 적은 양이 아니었다. 멥쌀 한 되는 여섯 끼를 해 먹을수 있는 양이었다. 밥을 지을 때 어머니는 멥쌀만으로 짓지 않았다.
보리, 감자, 고구마, 무채, 시래기, 콩나물, 우엉, 연근…… 어머니는 그중에 두서너 가지를 섞어서 지었다. 멥쌀보다 보리가 더 많았고, 보리보다 감자나 고구마가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여름에는 감자나 콩나물을, 겨울에는 무채나 고구마를, 이른 봄에는 시래기를 주로 넣었다. 밥을 지을 때는 멥쌀 한 톨도 아끼는 어머니였지만 풀을쑬 때는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는 멥쌀 이외에 아무것도, 보리쌀 한알도 섞지 않고 풀을 쑤었다. - P102

들기름을 바르기 전 가마솥이 거친 광목 느낌이라면, 들기름을 바른 가마솥은 명주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들기름 바르는 일을 딸들에게 시키고는 했다. 들기름을바르는 동안 가마솥은 뭉근하고 검은 열기에 휩싸였다. 언제까지나,
태양이 식은 뒤에도 식지 않을 것 같은 검은 열기는 금택에게 묘한위안을 주었다.
들기름을 바르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짚과 물을 가마솥에 넣고 팔팔 끓였다. 한껏 달아오른 가마솥은 들기름이 속으로스며들어 툭툭한 옥양목 느낌이 났다.
가마솥을 태우고 기름칠을 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풀을 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꼬박 나흘이었다. - P106

비단에는 명주와 양단이 있다. 둘 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실로짠 본견이었지만, 어머니가 누비옷을 짓는 데 쓰는 명주는 단색인데다. 아무 문양도 없어 올이 잘 읽혔다. 푸새와 다듬이질과 염색을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감촉과 광택을 띠었기 때문에, 옷감으로 쓰기 전까지 품이 많이 들었다.
양단은 곁으로 두껍게 짠 비단으로, 명주보다 촉감이부드럽고 광택이 돌았다. 대개 은실이나 금실이나 색실로 수가 놓아져 있었다.
하다못해 하루살이처럼 작은 문양이라도, 양단으로 누비옷을 지을경우 어머니는 올을 튕기는 대신에 초크로 죽죽 선을 그어 누빌 선을표시했다. 두꺼운 데다, 문양들 때문에 올을 읽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양단으로 누비옷을 지을 경우 될 수 있으면 작고 단순한 문양의 양단을 옷감으로 썼다. 문양들이 크거나 다양하면 누비질로 애써 떠 넣은 땀들이 묻히기 때문이었다. - P110

옷감용 천들은 재료가 같아도, 그것을 짜는 과정에서 다른 느낌의천이 되었다. 한 명주여도 풀을 얼마나 먹이고, 다듬이질을 얼마나하느냐에 따라 윤기와 질감과 짜임의 촘촘한 정도가 달라지듯. 감나무 잎과 대나무 잎이 다른 것처럼 생판 다르기도 했고, 소나무 잎과 전나무 잎이 다른 것처럼 미미하게 다르기도 했다. 곰취와 참취가 같은 취이면서도 향이 다른 것처럼 달랐던 것이다. 야산에서 나는 돌미나리와 물가에서 나는 미나리가 다른 것처럼. 첫 순 부추와두번째, 세번째로 올라오는 부추가 다른 것처럼(어머니는 봄부터 여름내 우물 뒤쪽 둔덕진 땅에 부추를 길러 먹었다. 비죽비죽 올라온 순을베 먹으면 금세 또 순이 나왔다. 첫 순 부추는 질감은 연했지만 향은 무척 짙었다). 미역이 난 곳이 진도냐, 기장이냐, 완도냐, 영덕이냐에따라 다른 것처럼.
"기장 먹은 원창 보도라워서 잘 퍼지고 끓일수록 뽀하이 국물이우러나오고예, 진도 먹은 보도라운 게 기장 보다야 떨어지지만 깔끔하지예. 완도 먹은 배신 게 잘 퍼지지 않아 소괴기하고 푹 끓이면좋지예, 보기에는 비슷비슷해도예, 끓이면 대반 차이가 나지예."
멸치나 미역, 김을 보따리로 지어 이고 팔러 다니는 건어물 행상여자의 설명처럼.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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