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이면서 하나인 신발이나 젓가락처럼 자신들이 늘 함께여야한다는 강박은 어쩌면 금택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의 존재를 더 의식하는 쪽은 상대에게 더 의존하는 쪽은 화순이아니라 금백이었다. 자매로서 화순이 금택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것은 그때그때 다르면서도 단순했지만, 금택의 경우는 한결같으면서도 복잡했다. 화순은 금택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마다거침없이 요구했지만, 금택은 화순에게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었화순의 요구는 자신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요구는 화순이 결코 들어줄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금액의 요구는, 화순의 요구를 넘어섰다.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 등을 할 때 놀이 상대가 되어줄 것을 바라는 화순의 요구와는 다른 차원의 요구였다. 그것은 요구보다는 욕망의 차원에 가까웠다. - P34

바느질을 하는 여자라서인지 어린 금택의 눈에 어머니는 마을 여자들과 달랐다. 어머니는 늘 머리를 쪽 찌고, 쌀뜨물을 옷감 삼아 지은 것 같은 무명 저고리 차림이었다. 고름 대신 똑딱단추를 단 저고리는 새 옷처럼 깨끗했지만 실은 오래된 것이었다. 날이 아무리 더워도 어머니의 머리와 옷매무새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분을 바르지않는데도 어머니의 얼굴은 설거지를 하고 마른 행주로 물기를 훔친사기그릇처럼 깨끗했다. 촛불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은 형형한 눈빛은 저고리의 쌀뜨물 빛깔과 어우러져 고유하고 독보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멈칫 움츠러들게 하는 서늘하고 처연한분위기가 귀기라는 걸, 금택은 지난봄 우물집을 찾은 여자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알았다. 어머니에게서 누비옷을지어 입으려고 찾아온 여자들이었다. 여자들은 우물집 앞마당돌담아래에 핀 꽃들을 구경하면서 어머니에 대해 쑥덕거렸다. 마당 돌담아래는 어머니가 뒷산에서 캐다 심은 한련화, 하늘매밥톱, 고들빼기같은 봄꽃들로 꽃밭을 이루었다. 꽃들은 그 이름만큼 모양과 색깔이천차만별인데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 P39

어린 금택의 눈에는 그녀의 하루하루도 월성댁 못지않게 고달고 팍팍해 보였다. 그녀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한가롭게 가게나지키는 것 같지만, 도박에 취미를 들인 남편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이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삼대독자로 자라 자신밖에 모르는 데다 도박에 빠져 사는 남편 때문에 속이 상할 때면 그녀는 바느질을 하다가도 허공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죽은 시어머니를 원망했다. 여섯이나되는 딸들을 제쳐두고 며느리인 자신에게 바느질 솜씨를 물려준 시어머니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모습을 금택은 심심찮게 보았다. 저주는 어느 순간 애원하는 소리로 바뀌었고, 금택은 그녀가 남편이 아니라 죽은 시어머니를 붙들고 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곤 했다.  - P47

이미 많은 것을 주었다는 어머니의 말은 금택에게 깊은 인상을남겼다. 월성댁이 어머니에게 도대체 무엇을 주었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어머니에게 뭔가를 챙겨주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을 금택은 들은 적이 없었다. 복래한복 주인 여자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노랑나비를 보면 금택은 어머니가 월성댁의 목에 둘러준 누비목도리가 떠올랐다. 염소 발목처럼 앙상하던 그녀의 목에 둘러준 누비목도리가 수십 마리의 노랑나비로 흩어져 날아오르는 광경이 머릿속에 선연히 그려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노랑나비들 중 한 마리가날아와 월성댁의 소식을 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노랑나비가눈앞에서 날아다닐 때면 동동구루무 냄새가 났다. 그것은 월성댁의 얼굴에서 나던 냄새였다. - P51

금택과 화순, 둘 중 누구의 두려움이 더 큰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어머니라는 동일한 대상으로 인해 발생한 두려움이었지만,
둘의 두려움은 근본으로 달랐다. 화순의 두려움이 금택의 두려움보다 근원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더 고질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둘은 각자의 두려움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났다. 화순은 두려움을 외면했지만, 금택은 직시했다. 화순은 두려움을 방치함으로써, 금택은 아물게 두지 않고 후벼 팜으로써 상태를 악화시켰다. 두려움을 외부로 드러내는 방식 또한 달랐는데 금택에게서는 순종으로, 화순에게서는 원망과 반항으로 나타났다.
금택과 화순은 서로에게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온종일 붙어서 지냈지만, 어머니에게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만은 서로 교묘하게 숨겼다.  - P60

금택은 바늘 역시 두려웠다. 어머니만큼 두려웠다. 어머니보다 더두려웠다. 바늘은 어머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물건이었다. 바늘과어머니를 떨어뜨려 생각하기란 어려웠다. 때때로 금택은 어머니가바늘을 잡고 있는 게 아니라 바늘이 어머니를 잡고 있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었다. 어머니가 바늘 끝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은 바늘은금택에게 자신이 어머니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일깨워준 물건이기도 했다.
화순은 바늘이 두렵기보다 싫었다. 바늘이 자신으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아갔다는 피해 의식마저 있었다. 어머니가 젖도 안 뗀 자신을 버린 것이 바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아버지가 죽은 것도 바늘 때문이라고, 큰외숙모가 일러주지 않았다면,
큰외삼촌 집 마당에 서 있는 여자가 자신을 낳은 여자라는 사실을 영원히 몰랐을 것이라고 화순은 생각했다. 어머니는 화순이 상상하던모습이 아니었다. 화순은 수백 번도 더 어머니를 상상했다.  - P63

어머니에게 무명 한 필은, 무명 한 필이 아니었다.
무명 한 필로 어머니는 세 종류의 다른 천을 만들었다. 무명이면서, 무명이 아닌 천들을푸새와 다듬이질로 어머니는 그렇게 했다. 푸새와 다듬이질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는 멥쌀 넉 되와 다듬잇돌과 홍두께, 숯다리미가전부였다.
푸새는 풀을 먹이는 것으로, 어머니는 주로 멥쌀로 풀을 쑤었다.
무명 한 필에 풀을 먹이기 위해 어머니는 멥쌀 두 되로 풀을 쑤었다.
멥쌀 두 되는 적은 양이 아니었다. 멥쌀 한 되는 여섯 끼를 해 먹을수 있는 양이었다. 밥을 지을 때 어머니는 멥쌀만으로 짓지 않았다.
보리, 감자, 고구마, 무채, 시래기, 콩나물, 우엉, 연근…… 어머니는 그중에 두서너 가지를 섞어서 지었다. 멥쌀보다 보리가 더 많았고, 보리보다 감자나 고구마가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여름에는 감자나 콩나물을, 겨울에는 무채나 고구마를, 이른 봄에는 시래기를 주로 넣었다. 밥을 지을 때는 멥쌀 한 톨도 아끼는 어머니였지만 풀을쑬 때는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는 멥쌀 이외에 아무것도, 보리쌀 한알도 섞지 않고 풀을 쑤었다. - P102

들기름을 바르기 전 가마솥이 거친 광목 느낌이라면, 들기름을 바른 가마솥은 명주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들기름 바르는 일을 딸들에게 시키고는 했다. 들기름을바르는 동안 가마솥은 뭉근하고 검은 열기에 휩싸였다. 언제까지나,
태양이 식은 뒤에도 식지 않을 것 같은 검은 열기는 금택에게 묘한위안을 주었다.
들기름을 바르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짚과 물을 가마솥에 넣고 팔팔 끓였다. 한껏 달아오른 가마솥은 들기름이 속으로스며들어 툭툭한 옥양목 느낌이 났다.
가마솥을 태우고 기름칠을 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풀을 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꼬박 나흘이었다. - P106

비단에는 명주와 양단이 있다. 둘 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실로짠 본견이었지만, 어머니가 누비옷을 짓는 데 쓰는 명주는 단색인데다. 아무 문양도 없어 올이 잘 읽혔다. 푸새와 다듬이질과 염색을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감촉과 광택을 띠었기 때문에, 옷감으로 쓰기 전까지 품이 많이 들었다.
양단은 곁으로 두껍게 짠 비단으로, 명주보다 촉감이부드럽고 광택이 돌았다. 대개 은실이나 금실이나 색실로 수가 놓아져 있었다.
하다못해 하루살이처럼 작은 문양이라도, 양단으로 누비옷을 지을경우 어머니는 올을 튕기는 대신에 초크로 죽죽 선을 그어 누빌 선을표시했다. 두꺼운 데다, 문양들 때문에 올을 읽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양단으로 누비옷을 지을 경우 될 수 있으면 작고 단순한 문양의 양단을 옷감으로 썼다. 문양들이 크거나 다양하면 누비질로 애써 떠 넣은 땀들이 묻히기 때문이었다. - P110

옷감용 천들은 재료가 같아도, 그것을 짜는 과정에서 다른 느낌의천이 되었다. 한 명주여도 풀을 얼마나 먹이고, 다듬이질을 얼마나하느냐에 따라 윤기와 질감과 짜임의 촘촘한 정도가 달라지듯. 감나무 잎과 대나무 잎이 다른 것처럼 생판 다르기도 했고, 소나무 잎과 전나무 잎이 다른 것처럼 미미하게 다르기도 했다. 곰취와 참취가 같은 취이면서도 향이 다른 것처럼 달랐던 것이다. 야산에서 나는 돌미나리와 물가에서 나는 미나리가 다른 것처럼. 첫 순 부추와두번째, 세번째로 올라오는 부추가 다른 것처럼(어머니는 봄부터 여름내 우물 뒤쪽 둔덕진 땅에 부추를 길러 먹었다. 비죽비죽 올라온 순을베 먹으면 금세 또 순이 나왔다. 첫 순 부추는 질감은 연했지만 향은 무척 짙었다). 미역이 난 곳이 진도냐, 기장이냐, 완도냐, 영덕이냐에따라 다른 것처럼.
"기장 먹은 원창 보도라워서 잘 퍼지고 끓일수록 뽀하이 국물이우러나오고예, 진도 먹은 보도라운 게 기장 보다야 떨어지지만 깔끔하지예. 완도 먹은 배신 게 잘 퍼지지 않아 소괴기하고 푹 끓이면좋지예, 보기에는 비슷비슷해도예, 끓이면 대반 차이가 나지예."
멸치나 미역, 김을 보따리로 지어 이고 팔러 다니는 건어물 행상여자의 설명처럼.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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