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一序詩



팔 하나 없는 김씨의 사연

찡그리면 바코드처럼 주름이 모아지는 노파

몸뚱이 잠깐 내주고

오만원 받은 애기엄마의 사연

전장(戰場)의 사연은 흘러

어디론가 사라져 흔적도 없지만

생의 어느 웅덩이

핏물로 고이는,

대쪽을 깎아 먹물 찍어 기록하는

시인의 수첩 - P9

호랑나비


정지용의 시 「호랑나비」를 읽고 나면 나는 문득 전생을 더듬다 온 듯한 멍ㅡ 함에 빠진다 멍 ㅡ! 그것은 어떤 아득한 묘리에 가 닿았을 때의 느낌이라는 말인데, 이 멍ㅡ 함을 나는 노자의 ‘소국과민‘의 닭 울음소리에서, 서정주의 시「新婦 나 박목월의 시「윤사월」 같은 데서 다시 느끼는 것이다.

고요한 방 타는 향불의 푸르스름한 연기가 곧추 허공에 솟아오르다 두세 번 동글게 맵을 그린 뒤 자취 없이 사라지는 그 아득함이 이 시에 있다는 말인데, 정념이 명주실같이 가늘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 닿을 수 없는 어느 극점에서 호랑나비는 쌍을 지어 날고 있는 것이다 - P75

모든 삶의 생기와 비참을 덮어버리는 달달한 이미지들의 홍수, 이미지들의 무서운 속도와 연쇄에 의해 무너져 무의미로 믹스되는 모든 가치들, 깨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이 매끄러운 사기질의 매트릭스, 그 표면에 박혀 있는 보이지도 않고 예민한 손가락 끝으로나 겨우 느낄 수 있는 화석화된 삶의 까스락지. 그 까스락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보일까?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었지만 억압되어 없는것이 되어버린 우리 삶의 생기와 비참이 전혀 낯선 것이 되어 다가오는기괴함일 것이다. 조재도의 시는 이 기괴함을 보여준다. 짠맛을 잃지않기 위해 오래 고독을 견딘 소금의 울음이 아니고는 보여줄 수 없는 이기괴함이 아니라면 시의 언어가 어떻게 저 사기질의 매끄러운 매트릭스에균열을 낼 수 있으랴!
김진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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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


노인 병원 수족관에 자라 한 마리 납작
엎드려 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이 생의 주름 잔뜩 
오므리고 누워 있듯 그렇게 누워 있다
거대한 층층의 현대판 고려장이다
모시기 마땅찮은 이들이 의논 끝에 이곳에 
넣어 두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하루 ㅡ반나절 ㅡ30분이 이렇게 더디 간다
환자복 하나 안간힘 다해 휠체어 바퀴 한 번 
밀어 3cm이동한다
다른 환자복 죽 한 그릇 삼키는데 삼천갑자 
동방삭이다
삶은 어쩌면 처음부터 저렇게 느리게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빈손에 하얗게 굳어 있는 발바닥 삶이
코에 튜브를 낀 채 뒤집어져 있는 삶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라가 공기방울 밀어 올리듯
아주 천천히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모른다
죽음 곁에 놓인 삶의 부스러기들
물티슈 크리넥스 화장지 오줌통 
깎아 놓아 누래진 사과쪽들이
완강히 생의 끈을 잡고 놓지 않는 동안
아, 아프지 않고 살기가 저렇게 힘이 들까
나서 죽는 일이 저렇게 힘이 들어?
메마른 눈물인 듯 링거액 아슬아슬히 
떨어지고
있는 힘 다해 살아 있는, 허나 죽어 가는 
사람들
형광등 불빛에 눈이 시린
수족관 칸칸마다 엎드려 있는
이따금 오래된 기억인 듯 손발 움직여 보는


p 26, 27

쑥꽃


아무래도 너를 무명씨라 해야겠다
길가 풀덤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허나, 눈여겨 보잖으면
밥풀떼기만 한 너를 쉬 보지 못할 터

그렇게들 살아가는 물결, 보이잖는 그 물결에도 뿌리가 있어 삼신할미 손자국 같은 시퍼런 잎닢의 뿌리가 있어
그렇게 질기게 끈질기게 자자손손 배추씨로 배추씨보다 더 작은 바로 그 무명씨로

칠십 평생 날 밝으면 지게 지고 나서던 이씨라고 할까
쇠도 늘어붙는 땡볕 차 밑에 기어들어 땅땅 망치질하는 김씨라고나 할까
쥐뿔이나 이름 있는 것들의 허망함이 얼마나 깊은지를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은 - P15

생의
통점通點에서
올라오는
매콤한 연기

맨발의 땅
이마에 맺힌
허연 소금기

죽은 자리 이듬해 햇쑥으로 다시 돋는
그 꽃이 암요, 영원합니다요 - P16

날마다 새로워지는 중


늙음도
달리 보면 새로워지는 것
저녁밥 먹고 난 후의 마루 끝
초저녁별도 새롭게 뜰 것이다
하늘 호숫가
파리하게 잠긴
낮달의 흔적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나날이 새로워지는 어느 한 사람하고
바람 살랑대는 햇빛 맑은 날이면
열무 밭에 나가 거름도 줄 것이다

이승을 다 돌아본 것 같은
그 즈음 하얀 나이에
달력의 글자가 꼭 선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리
파리와 수박씨를 애써 구분해야 하는 것도 아니리 - P20

항아리에 대고 하는 말처럼
이 빠진 말 후엉후엉 하여도
눈짓으로 알리

그래서 차츰 작아지고
희미해지고
먹먹한 귀
고요가 흘러가는 소리 유난히 크게 들리어도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중,

그런 어느 날
토란잎에 빗방울 둥그런 오후
등 돌려 걷고 있는 하얀 어깨를
감싸 안는 손 따뜻하고 환하리 - P21

내 아는 사람이 그러는디, 자기 엄니 아부지가 일흔 둘에 예순 아홉인디, 아부지가 직장암인가 대장암인가로 똥구멍을 뗘냈댜, 똥구멍을 뗘내고 옆구리에 똥주머니 같은 걸 차고 사는디, 보통 때 보면 뜨드미지근한 누런 똥이 비닐 팩 같은 똥주머니에 차는 것이 보인다댜, 그 똥주머니를 즤 엄니가 갈아주는디, 암만 남편이래두 그 주머니 비울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와 은단도 깨물고 담배 연기도 쐰다더먼, 또 그 아부지도 정신은 풀 멕인 광목처럼 짱짱헌디 구겨진 신세가 하두 ●무서운 말● 기가막혀 북어처럼 입만 딱 벌리고 한숨만 폭폭 내쉬는 게 일이랴, 헌데 어느 날 두 냥반이 마음을 아주 싹 고쳐먹었다느먼. 그러니께 그게 뭐냐면 티콘가 뭔가 허는 쬐그만 중고차 한 대 사가지고 집밖으로 나돌아댕기는디,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시청 문화원 백화점 시민단체 할 것 없이 할만한 디는 빠짐없이 전화해, 주부 대상 노인 대상 행사 프로그램을 빼곡히 적어놓고, 도시락 싸들고 쫓아댕기며 어느 땐 수건,
어느 땐 밥그릇, 경품이란 경품은 죄다 받아온다는겨. 그 - P22

래, 한 번은 무슨 무슨 마라톤 대회에까지 나가 두 노인네가 똥주머니 받쳐 들고 뛰다 걷다 하였는디, 그 바람에 운동화 두 켤레랑 츄리링 두 벌 돈으로 따져 십만 원 어치는 빠지잖게 받아와,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아들내미 딸내미헌티 전화 걸어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는다는디, 그러면서 그 이 하는 말, 사람 사는 일이 정말 맘먹기에 달렸지유? 나는 그 말을 듣고, 처음 듣는 말이 아닌데도 정말 그런 것 같아, 그 말이 문득 무섭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 P23

자라


노인 병원 수족관에 자라 한 마리 납작 엎드려 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이 생의 주름 잔뜩 오므리고 누워 있듯 그렇게 누워 있다
거대한 층층의 현대판 고려장이다
모시기 마땅찮은 이들이 의논 끝에 이곳에 넣어 두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하루 ㅡ반나절 ㅡ30분이 이렇게 더디 간다
환자복 하나 안간힘 다해 휠체어 바퀴 한 번 밀어 3cm이동한다
다른 환자복 죽 한 그릇 삼키는데 삼천갑자 동방삭이다
삶은 어쩌면 처음부터 저렇게 느리게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빈손에 하얗게 굳어 있는 발바닥 삶이
코에 튜브를 낀 채 뒤집어져 있는 삶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라가 공기방울 밀어 올리듯
아주 천천히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모른다 - P26

죽음 곁에 놓인 삶의 부스러기들
물티슈 크리넥스 화장지 오줌통 깎아 놓아 누래진 사과쪽들이
완강히 생의 끈을 잡고 놓지 않는 동안
아, 아프지 않고 살기가 저렇게 힘이 들까
나서 죽는 일이 저렇게 힘이 들어?
메마른 눈물인 듯 링거액 아슬아슬히 
떨어지고
있는 힘 다해 살아 있는, 허나 죽어 가는 
사람들
형광등 불빛에 눈이 시린
수족관 칸칸마다 엎드려 있는
이따금 오래된 기억인 듯 손발 움직여 보는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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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도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청양에서 자랐다. 서라벌고, 공주사대를 졸업한 후 대천고, 공주농고, 안면중학교에서 근무하였다. 『민중교육지 사건(1985), 전교조 결성(1989)으로 해직되었다가 1994년 복직되어 지금은 온양신정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시집 『백제시편」 「그 나라」 「사십 세」 「교사일기』 등이 있고, 산문집 「내 안의 작은 길』, 장편소설 「지난날의 미래』, 동화『넌 혼자가 아니야』, 교육에세이 『일등은 오래가지 못한다」 「삶· 사회 · 인간 · 교육』, 시 해설집 『선생님과 함께읽는 윤동주』 등을 펴냈다.

□ 시인의 말


일곱 번째 시집입니다.
전과는 다르게 시를 써 보려고 했습니다.
미완성으로 남겨두기, 생략하기, 직접 인용, 빈칸으로 두기, 공동창작, 그림 사진 만화 등으로 시어를 대신하기.... 시가 좀 재미있고, 풍부해지고, 따뜻한 피가 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그런 흔적들이 여기 조금 남았습니다.

그리고...

삶이 고단한 사람들은
‘좋은 날‘에도 많이 울더군요.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2007년 9월
조재도

흑백의 낡은 사진첩을 꺼내보듯 나이가 들면 자꾸 뒤돌아본다고한다. 지독히도 퍼부어대던 우기의 여름을 몸서리치며 보내고 맞이한 풀벌레 소리의 가을밤, 조재도의 시를 읽는 방안에 가만가만 가을비가 내린다.
쓸쓸한 것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또 쓸쓸함 속에 남는다. 가을이란 그런 것이다. 내일이나 모레 나는 푸른 햇살이 찰랑이는 섬진강가 은빛 모래밭 나무의자에 앉는다. 거기 이를 악물던 젊은 날을 보내고 느릿느릿 충청도처럼 조재도의 시가 걸어올 것이다.
박남준(시인)

매미 소리


처서 무렵 우는 매미 소리는
강철 빛깔이다
골무만 한 몸통에서
가슴팍 열어 젖혀 쟁명히 울어대는
매움 매움, 저 매미 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나 아니면 울 게 없다는
아니 아니 하늘과 땅 사이 울 것 투성이인데
아무도 울지 않아 내가 대신 운다는
매미가 쓰는 호곡론好哭論이다
그래 그건 그렇고
넌 언제 울어봤니
두 줄기 눈물 비줄배줄 흘리는 그런 울음 말고
막힌 칠정 한꺼번에 터져 나와 목젖이 다 갈라지는
크나큰 울음, 통곡을
넌 어느 때 울어 봤어
아파트 숲 단풍나무 가지에 앉아
꽁댕이 들었다 놨다 울어 퍼지르는
아흐, 저 빛살의 매미 소리
어떤 톱날로도 자를 수 없는 - P10

좋은 날에 우는 사람


슬픔의 안쪽을 걸어온 사람은
좋은 날에도 운다
환갑이나 진갑
아들 딸 장가들고 시집가는 날
동네 사람 불러
차일치고 니나노 잔치상을 벌일 때
뒤꼍 감나무 밑에서
장광 옆에서
씀벅씀벅 젖은 눈 깜작거리며 운다
오줌방울처럼 찔끔찔끔 운다
이 좋은 날 울긴 왜 울어
어여 눈물 닦고 나가 노래 한 마디 혀, 해도
못난 얼굴 싸구려 화장 지우며
운다, 울음도 변변찮은 울음
채송화처럼 납작한 울음
반은 웃고 반은 우는 듯한 울음
한평생 모질음에 부대끼며 살아온 - P12

삭히고 또 삭혀도 가슴 응어리로 남은 세월
누님이 그랬고
외숙모가 그랬고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러했을,
그러면서 오늘
훌쩍거리며소주에 국밥 한상 잘 차려내고
즐겁고 기꺼운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 P13

가만있자 그러니까 그게 거, 할 때의 그 가만있자에 대하여


어떤 말이 저렇게 깨달음의 등불을 오롯이 드러낼까
어떤 말이 저렇게 강물처럼 흘리 순간마다 빛날까
어떤 말이 늘 서서 걸으며 달려가는 우릴 멈추게 하겠는가
그 자리에 멈추어, 앉아, 되돌아보게 하겠는가
가만있자의 그 순간이 어디
사람에게만 있겠는가
소주 집에 앉아 싹둑거리는 사람에게만 있겠는가
날아오를 자리 가늠하며 대가리 까댁이는
미루나무 꼭대기의 저 까치에게도
주춤대며 개천 다리 건너오는
오늘 아침 샛강의 자욱한 안개에도
그러니까 그 자세 가만있자의
낮은 걸음 자세는 깃들어 있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한순간 불티처럼 튀어나온 그 깨달음에
극極으로 치닫던 마음이 돌아앉는다
제 몸 진저리치며 세우는 그 자리에 - P18

고양이
쥐의 일에
슬퍼도 하고
밭에서 돌아온 소가
부어오른 제 발등을 핥기도 한다

어느 말이 저렇게 어두운 골방에서
맹렬히 타오르는 담뱃불이겠는가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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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화朴梨花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남해를 거쳐 대구에서 성장,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댄스스포츠 트레이너, 심판으로 활동중이다.

□ 시인의 말



지지난 봄, 도둑고양이 몇 마리 내 집 담장을 슬금슬금 넘나들더니 지난 봄부턴 나 몰래 새끼까지 치고는 아예 제집인양 의기양양하게 살고 있다. 이렇듯 내 집 정원엔 제멋대로 들어와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이들 뿐이 아니다. 능소화도 그렇고 보랏빛등꽃이며 달개비꽃 등등...... 가만 생각해보니 내 무관심과 무신경이 이들을 만만하게 불러들였던 것같다. 타고난 내 게으름 덕분에 영악한 도둑고양이도 눈치빠른 잡초도 경계심 턱, 풀고 제 삶을 부렸을 터이다. 돌아보면도 내게 그렇게 왔다. 그렇게 쭈삣쭈삣 와선 이젠 아주기둥서방처럼 건들거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너것들 사람 잘못 봤다.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올 때는네 멋대로 왔는지 몰라도 갈 때는 어림없다. 왜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항시, 어디서건, 악랄하게 준비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 심드렁한 일상의 늪 속에 너것들은 이미 너무 깊이 너무도 오지게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격랑은 헤쳐 나갈 수도밀려 나올 수도 있지만 무심의 늪은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법. 이젠 아무도 내게서 살아 돌아가진 못하리. 사랑, 너도결국은 마찬가지!

2006년 고양이털 날리는 봄날에
박이화

박이화의 시에서 베어나오는 아릿한 꽃물은 우리 생애에 있어서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알리바이다. 마흔 그늘 아래 뿌리 내린 복숭아나무가 바람에 선분홍 꽃으로 화안히 울컥, 온 몸을 피운 제선연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렇게 ‘저 한 마리 들락이지 않는 날에마도 온종일 화사하게 들떠 있는 나무가 박이화의 시다. 그 화사빛깔 속, 삶의 핏물이 햇볕과 달빛에 바람과 비에 바랜 채 묻어 있는게 쉽게 느껴진다. 생애 전체가 꽃인 삶의 서러움일까? 대저 곳이란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기도 한 것 아님의 하늘에 열심히 가는가, 저 화염의 열린 꽃!

박이화의 시는 몸으로 피운 꽃이다. 몸 중의 몸, 그 중심에 닿아 있는 꽃이다.
뭔가 불편해서 외면하지만 자꾸만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곳, 그곳에서 올라오는 몸의 언어는 힘이 세다. 그녀는 좌사우고, 곁눈질하지 않는다. 직핍이다.
꽃분홍 복사꽃 향기 도처에 낭자하지만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은 시적 자아의탈은 맨얼굴이다. 그렇다. 몸으로 피운 꽃은 가식이 없다. ‘이건 속옷인걸‘ 하고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의 손아귀를 가차없이 비틀어버리는 손길은 분명 날것의 감각이다. 매울 ‘신‘의 날것이다.
장옥관(시인)

산벚꽃의 봄은 산벚꽃이 안다


봄이라고
모든 나무가 꽃피우는 건 아니다
나무의 나이테엔
그 나무의 전생
또 그 전생의 전생이 기록되어 있다 아니,
그 후생까지
아름다운 타원형 속에 비밀스레 내장되어 
있다
따라서 우연한 봄날
우연히 꽃 피우는 나무란 없다
거역할 수 없는 윤회의 법칙처럼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순환
그래서 저 벚꽃
일생 중
오로지 4월의 미풍에만 황홀하게 전율한다

내 몸 속
수천억 개의 세포는

내 전생의 잎, 잎들
그래서 당신, 그 봄날 같은 입김에
그토록 뜨겁게 반응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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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고 있는 곳의 山水를 닮는다. 그럴 것이다. 탄생의 배경이되며 거기서 나온 것을 먹고 자란 데다 사람은 가장 오래 바라보는 것을 닮으니까. 베두인족 눈에 사막의 지평선이 있듯 김수열 시인의 두 눈에는 제주의 푸른 수평선이 들어 있다. 그곳에서 쉬지 않고 출렁인다. 그의 큰 키 또한 한라산에서 왔다. 수직의 산세와 수평의 물결, 그 거대한 두 세계가 붙어먹어 새로운 DNA를 만들었으니 그게 이번 시집 「빙의」이다. 그가 높고 깊은 어떤 지경까지 갔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한창훈(소설가)

맹물 같은 시다. 오래된 소갈증이 사라진다. 시원하고 담박하다. 근데 이놈의 맹물 시가 다시 갈증을 불러온다. 속이 탄다. 좋은 시는 당연 조감이 있어야 한다. 시인은 키가 훤칠해서 당연 눈이 높다. 거시적 통찰이 기본적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키 큰 사람은 싱겁다. 이 말을 하루하루 실천하며 산다. 맹물로 가장 키가 큰 게 강물이다. 그는 강을 세워 논 것같다. 사막에 사는 포아풀도 맹물 한 모금 먹으려고 600미터나 발돋움한다. 그는 또 골목길 가로등과 닮았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늦은 귀가와 훌쩍임과 배웅이 있다. 모퉁이와 구석이 있다. 그 골목 끝자락에 집이 있고, 마루가 있고, 아랫목 이불 속에는 따뜻한 밥그릇이 있다. 나물이 있고, 비린것이 있고, 맹물 한 그릇이 있다. 한국 시 가운데 제주도 국어 선생이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시다. 설명할 게 없어서 멀뚱멀뚱 종 치기만 기다리는데, 눈시울은 젖고 가슴은 먹먹하다.
이정록(시인)

시인의 말


네 번째에서 다섯 번째 시집으로 넘어오는 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한 가지만 꼽으라면 아버지의 죽음이 그것이다.

하여, 이 시집에는 그분의 흔적이 드문드문 박혀있다.
살아생전 아들의 자잘한 글에 돋보기 들이대고 꼼꼼 읽으시곤 했는데…….

부끄러운 이 글에도 눈길 한번 주십사 하면 지나친 욕심일까?
나이가 들수록 내 글의 눈높이가 그분을 닮아간다.

2015년 1월
김수열

빨래


어제를
빨아

오늘
넌다

내일은
마를까 - P11

사랑을 배우다


성산포 광치기해안 모래밭
일출봉 배경으로
오리 한 마리
상처 받은 정물처럼 앉아 있다

인기척 있어도 미동하지 않는다
가만히 다가선다

아,
그 곁에
반쯤 해체된
오리 한 마리

죽은 사랑을 껴안은
아픈 사랑의 날갯죽지 위에
아침 햇살이
시리다 - P12

아내의 건망증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며칠 전 출근하는데 아무 생각 없더란다 문득 정신 차려보니 차는 삼양검문소 지나 함덕으로 가고 있어 갓길에 세우고 멍하니 있다가 차 돌려 부랴부랴 출근했다며 힘없이 숟가락 내려놓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한마디 거드는데 걱정 말라고 나이 들면 다 그런 거라고 나도 얼마 전 아무 생각 없이 봉개 지나 명도암 입구까지 갔다가 차 돌려 신엄으로 갔다고 심상하게 말해주었다

살다 보면 가끔씩 샛길로 빠질 때도 있다고 말할까 하다가 밥만 먹었다

나무의 시


바람붓으로
노랫말을 지으면
나무는 새순 틔워
한소절 한 소절 받아 적는다

바람 끝이 바뀔 때마다
행을 가르고
계절이 꺾일 때마다
연을 가른다

이른 아침
새가 노래한다는 건
잠에서 깬 나무가
별의 시를 쓴다는 것

지상의 모든 나무는
해마다 한 편의 시를 쓴다 - P20

파문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비는
잊지 않고
원만한 것들을 손수 가지고 오신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사는게 이런 거라고

지상의 못난 것들에게
비는
한 번도
모난 걸 보여준 적이 없으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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