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거미줄


핏속에 거미들이 산다

핏속에서 일하고
핏속에서 잠들고
핏속에서 사랑하고
핏속에서 먹고
핏속에서 죽고
핏속에서 부활하는 거미들에게

피는 무궁무진한 슬픔의 창고

물과 피를 거미줄로 바꾸는
직조의 달인들은
어떤 혈관에든 숨어들어 실을 뽑고 천을 짠다

그러나 너무 밝은 피나
너무 어두운 피는 좋은 재료가 되지 못한다

거미들이 실을 뽑아내기 직전
아주 작고 단단하게 몸을 긴장시킬 때
나는 거미들을 느낀다
내 몸에서 피가 조금 빠져나갔다는 걸 알아차린다 - P14

내 피로 뽑아낸 붉은 거미줄은
누군가에게 ..
거처가 되기도 하고 덫이 되기도 했으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거미들은 희미한 진동을 따라 움직인다피의 만다라에 마악 도착한 어떤 날개를 향해날개가 파닥거리는 동안빈혈의 시간은 잠시 수런거리다 고요해진다

입술들은 말한다


입술들은 말한다

자신의 이름과 고향과 사랑하는 이에 대해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에 대해
오늘 저녁 먹은 음식과
산책길에 만난 노을빛에 대해
기후 위기와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대해
생일과 장례, 술과 음악, 책과 영화,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마을을 휩쓸고 간 장맛비에 대해 파도 소리에 대해

얼굴도 없이 몸뚱이도 없이
격자무늬 벽에 처박힌 채 입술들은 말한다

입술들은 대체 어디서 모여든 것일까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리듬으로

목소리들은 서로 삼키고 뱉고 다시 삼키고 뱉고 삼키고

들리지 않는 노래를 너무 많이 들었나봐
귀가 먹먹해 - P16

먼 들판에 풀벌레 소리 자욱해
못이 박힌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나봐

귀는 매일 투명한 피를 흘리고 닦아내고 다시 흘리고

격자무늬 벽 속에서 입술들은 말한다

오늘도 잠 못 드는 이유에 대해
왜 자신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복용해온 약에 대해
또는 피 흘리는 말, 다른 입술들에 대해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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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 년에 몇 번은 경주에 다녀온다. 대개 강연이 있어 오는데, 묵어갈 때면 즐겨 봉황대를 찾아 가까이 있는 단골집에서 갈치조림찌개로 저녁을 먹고 노동동·노서동에서 산보를 즐기다 숙소로 돌아가곤 한다.
어느 때 간들 마다하냐마는 늦가을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봉분위의 잔디가 누렇게 물들 때면 처연한 분위기가 절로 일어나는데 해질녘이 되어 노을이 짙게 물들 때면 노년의 황혼에 깃드는 스산한 서정의 울림이 있다. 특히나 해가 긴 여름날 경주에 답사 올 때면 시내에서 맛있는 토속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땅거미가질 때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고분과 고분 사이를 거니는 것은 내 답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추억들이다. - P194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지 않겠는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깎아주리.


태종무열왕은 그 뜻을 이해하고 원효를 요석공주와 연결시켜주려고 신하에게 그를 찾아 요석궁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신하는 문천 다리를 지나는 원효를 발견하고서 다리 아래로 밀어 물에 빠뜨리고는 젖은 옷을 말려준다는 구실로 요석궁으로 데려갔다(혹은 원효가 일부러 직접 뛰어내렸다고도 한다).
옷을 말리러 요석궁으로 들어간 원효는 결국 사흘간 머물면서 요석공주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때 원효는 나이 마흔 전후이고 요석공주는 20대의 청상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설총(薛聰)이고 그렇게 파계한 원효는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가 민중 속에서 불교를 설파하며 무애(無碍)의 경지로 나아갔다. - P255

가야는 1세기 전후부터 6세기 중엽까지 우리나라 고대국가형성기에 낙동강 유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던 미완의왕국이다. 가야는 문헌에 따라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가락(駕洛), 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나오는데 변한의 12개소국 중 김해의 가락국(駕洛國)이 맹주로 등장하면서 느슨한 연맹체제로 개편되기 시작하여 300년 무렵에는 김해 금관(金官)가야, 함안 아라(阿羅)가야, 고령 대(大)가야, 고성 소(小)가야, 상주 고령(古寧)가야, 성주 성산(星山)가야 등 6가야로 퍼져 있었다. 우리가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는 사실상 삼국에 가야까지 더한 사국시대였다. - P261

우리는 비화가야의 옛 터를 찾아 창녕을 답사하지만 창녕의 명소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 습지인 우포늪(천연기념물 제524호)이다. 우포늪은 둘레 7.5킬로미터, 전체 면적은 340만 제곱미터로 3개 면에 걸쳐 있다. 이곳에 습지가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약 1억 4,000만 년 전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 백악기다. 당시에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낙동강 유역의 지반이 내려앉아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물이 고이게 되면서 곳곳에 습지와 자연 호수가 생겨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포늪에는 공룡 발자국화석도 남아 있다.
우포늪은 장마철에는 수심이 5미터에 이르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1~2미터를 유지한다. 늪의 바닥이 두꺼워서 ‘생태계의 고문서‘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습지로, 2008년에는 환경 올 - P266

림픽 격인 람사르 총회가 여기서 열렸고 2018년에 처음으로 람사르 습지도시를 선정할 때 습지도시로 인정받았다.
현재 우포늪 일대에는 8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며, 건강한수생 생태계를 갖추고 있어 어류는 붕어, 잉어,가물치, 피라미 등28종이 서식하고 있고, 조류는 논병아리 등 텃새와 천연기념물인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를 비롯하여 청둥오리, 쇠오리, 기러기등 약 200종이 있다. 1970년대 이후 국내에서 멸종된 따오기를 중국에서 4마리 데려와 복원사업을 진행하여 현재 359마리를자연 복귀 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우포늪은 실로 ‘살아 있는 자연사박물관‘ 이라고 할 만하다. - P267

창녕의 가야시대 이전 선사시대 유적지로는 비봉리 패총이 유명하다. 이 패총은 2003년 태풍 매미로 붕괴된 배수시설을 복구하는 과정에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여기에서는 패총과 함께 빗살무늬토기, 무문토기 등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고, 저장공에서 도토리, 가래, 솔방울 등 식물과 잉어, 멧돼지 등 동물 뼈가 나와 2007년 국가사적 제486호로 지정되었다.
비봉리 패총은 무엇보다도 내륙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개더미일 뿐 아니라, 신석기시대 모든 기간의 유물이 층위별로 나타나각 층에서 출토된 토기를 중심으로 유적의 연대를 설정하기 좋은귀중한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특히 여기서는 소나무를 유(U)자형으로 파내어 만든 통배(丸木舟)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배다. 이것과 함께 출토된 망태기는 두 가닥의 날줄로 씨줄을 꼬는 ‘꼬아뜨기 기법‘으로 만들어져 있어 신석기시대의 편물(物)기술을 알려준다. 여기서 출토된 도토리, 목재, 조개껍데기 등에서 채취한 시료를 가속질량분석기(AMS)로 측정한 결과 시기가 7,700년 전부터 3,500년 전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 P268

성을 쌓은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전설로는 비화가야 시절로 올라가고 기록으로는 조선 태종 10년(1410) 경상도.
전라도에 중요한 산성을 수축했다는 실록의 기록에 화왕산성이나온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왕산 석성은 둘레가 1,217보()이고 그 안에 샘이 아홉, 못이 셋 있으며 또 군창(軍倉)도 있었다.
전란에 대비해 쌓은 산성은 50년, 100년이 가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화왕산 고성은 석축 산성으로 둘레가 5,983척(尺)이나지금은 폐성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강화 교섭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였고, 일본군이 동래·울산·거제 등 해안에 장기 주둔하다가 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쳐들어온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 경상좌도방어사로 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는 밀양·영산·창녕 현풍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을 수축하고 왜군을 기다렸다가 대파했다.
그 뒤로 화왕산성은 다시 산성으로 사용된 일이 없고, 지금은9개의 샘도 사라지고 무너진 석성의 잔편만 남았지만 역사의 유적이 되어 답사객과 등산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 P293

지난번 창녕 답사 때 나는 이도 저도 아니고 장마면의 유리 고인돌로 향했다. 유리 고인돌은 내 경험상 우리나라 남방식 고인돌 중에서 가장 믿음직하게 생겼다. 여기에는 본래 7기가 있었다지만 다 없어지고 오직 한 기만 언덕바지에 빈 하늘을 배경으로버티듯 서 있어 좀 외로워 보이긴 해도 오히려 홀로 우뚝한 데서장중한 기품이 느껴진다.
높이는 사람 키보다 훨씬 큰 2.5미터고 폭이 5미터가 넘으니수치만으로도 장대함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생김새가 꼭 메줏덩이 같아서 아주 듬직하고 순박한 인상을 준다. 그냥 자연석을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바둑판 발처럼 낮은 받침을 고였다. 그 받침돌로 인하여 설치 조형물로서 고인돌의 의미가 진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 P311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자 유족과 장의위원회에서 내게 고인의 비석과 안장 시설을 맡아달라고 의뢰해왔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 유리 고인돌이었다. 저 메줏덩이 같은 고인돌 하나 얹어놓고 ‘대통령 노무현‘ 6자만 새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자연석을 구하기 쉽지 않아 설계를 맡은 건축가 승효상은 메줏덩이처럼 생긴 고인돌 대신 둥글넓적 맷방석만 한 너럭바위로 대신했다.
그런데 다시 보아도 유리 고인돌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 - P311

지와 잘 맞는다. 메줏덩이 같던 순박한 심성과 언덕바지에 외로이 우뚝 선 그 당당한 모습이 절로 고인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그분이 아니라 해도 저 유리 고인돌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라면 뭇 사람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분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유리 고인돌에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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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고대 국가는 다 쇠망의 역사를 갖고 있다. 삼천궁녀의 투신이라는 ‘가짜 뉴스‘에 귀를 버리지 말고 부소산 백마강변의 이 평온한 정취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불어오는 강바람에 잠시 번잡한 일상을 흘려 보내고 국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일이다. - P71

실제로 낙화암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가는 백마강 물줄기와강 건너 키 큰 미루나무가 줄지어 달리는 규암 들판의 평온한 풍광은 있는 그대로가 완벽한 구도를 보여주는 한 폭의 산수화다. 그래서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운보 김기창, 남농 허건, 고암이응노, 취봉 이종원, 소송 김정현, 검돌 이호신 등 많은 수묵화의대가들이 그린 이곳의 실경산수화가 거의 똑같은 구도를 취하고있으며, 유화로도 좋은 소재여서 이종구의 「낙화암」 같은 풍경화가 나왔다.
유람선을 타고 지나가다 절벽에 보이는 ‘낙화암(落花巖)‘이라는붉은색 암각 글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고 한다.
부여에는 우암의 커다란 암각 글씨가 또 하나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강 건너 규암면의 대재각에 있다. 대재각은 낙화암에 버금가는 백마강의 명소로, 부여 답사 때 여러 번 낙화암 대신 대재각을 답사 코스로 잡았다. - P72

악수논정(握手論情)이란 손잡고 정을 나누자는 뜻이다. 백제의역사는 그렇게 끝났고 백제의 후손들은 지금도 해마다 유왕산에서 ‘악수논정‘하고 있다.
유왕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참으로 유장하다. 상류 쪽을 바라보니 들판이 아득하게 펼쳐지고 하구 쪽을 바라보니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그 물길 따라 끌려간 의자왕과 백성들을 생각하자니 절로 비장감이 감도는데 유왕산을 내려오는 돌계단 양쪽에는 새빨간 무릇꽃이 그리움에 지친 듯 피어 있어 사람의 심사를 애잔한 서정으로 젖어들게 한다. - P105

그렇다고 해서 경주 시내에 신라 고분이 155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봉분이 남아 있는 고분에 붙인 것만 그렇다는 것이고 이 일대에는 무수히 많은 고분들이 더 있었다. 이를테면 미추왕릉지구라 불리던 곳을 오늘날의 대릉원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계림로, 월성로 일대를 발굴 정비할 때는 대학박물관 발굴단들을 총동원하여 수백 기의 고분을 발굴했다. 모두 합하면 대략 1천 기에 달했다.
이처럼 경주 시내 신라 고분은 구역이 여럿으로 나뉘어 있지만 문화재청은 2011년, 이를 하나로 통합하여 ‘경주 대릉원 일원‘(사적 제512호)으로 재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P119

"나는 신라 고분 답사라고 해서 옛날에 대릉원에 가서 천마총속을 구경한 것만 생각하고 무엇 때문에 한나절을 여기서 다 보내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 고분이 이렇게 많고이렇게 거대하고 이렇게 시내 깊숙이 있는 줄 처음 알았네. 이게마립간 시기 무덤들이라고? 왜 그런 사실을 이제 알고 무턱대고신라왕릉이라고 기억하고 있었지?
그리고 금관총 전시관에서 적석목곽분을 조성할 때 비계를 쌓은 걸 보면서 저렇게 했기 때문에 1천 5백 년을 버텨온 것이라는감동을 받았네. 자네가 신라 고분 답사는 봉황대로 가서 금관총부터 보아야 한다고 한 이유를 이제 충분히 알았네. 고마우이."

그러나 이는 신라 고분 답사라는 심포니의 제1악장 안단테에 불과하다. 나의 신라 고분 이야기는 제2악장 아다지오(금령총과서봉총), 제3악장 프레스토(천마총과 황남대총), 그리고 제4악장 라르고(계림과 월정교)로 이어질 것이다. - P152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굴된 것은 ‘황금의 나라, 신라‘로 나아가는 우렁찬 팡파르였다. 1,500년 전 신라에 이런 순금 관(冠)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고, 1만여점의 유물이 3만 점의 구슬과 함께 쏟아져 나온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첫걸음에 불과했다. 이어 3년 뒤 1924년에 금령총에서 아름다운 금방울과 함께 금관이 발견되었고, 1926년엔 서봉총에서 또 금관이 나왔다. 5년 사이에 신라 금관 셋이 출토된것이었다.
당시는 이 금관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신라 왕관으로 생각했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일제가 신라 고분에 관심을 갖고 적 - P155

극 발굴에 나선 것은 일본이 옛날부터 한반도를 지배해온 역사가있다는 식민사관의 근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발굴하면 할수록 신라는 일본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상상 이상으로 찬란하고 위대했음을 이 유물들이 웅변했다. 아무리 역사를 조작해 왜곡하려해도 유물이 말해주는 것을 속일 수 없다. 그들로서는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문화재 분야에서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관의 맨 앞장에 선사람은 세키노 다다시였다. 그는 평양에서 낙랑 고분 발굴을 주도했 - P156

고, 저 방대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전15권의 책임편집자였다. 금관총 발굴 유물도 결국 총독부에서 그를 파견하여 뒷수습시킨 것이었다. 그는 1929년에 조선의 건축과 미술』, 1932년엔 「조선미술사』를 펴낸 학자였다. 이 『조선미술사』는 독일인 신부 안드레아스 에카르트(Andreas Eckardt)가 1929년에 독일어와영어로 동시에 펴낸 『조선미술사』에 이은 두 번째 한국미술사통사다.
우리의 입장과는 관계없이 일본인들에게 세키노 다다시는 이른바 대정(大正, 다이쇼) 연간의 문예부흥기,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뛰어난 학자 중 하나로 꼽힌다. 일본인들은 존경하는분의 이름을 부를 때는 훈독이 아니라 음독하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당시엔 그를 세키노 ‘다다시‘라고 하지 않고 세키노 ‘데이‘
라고 불렀다(이런 ‘유식자 읽기(有)‘는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도있다). - P157

확실히 세키노 다다시에게는 아름다움의 특질을 바로 잡아낼수 있는 미적 안목이 있었다. 그는 경주의 신라 고분을 조사하러다니던 중 태종무열왕릉의 돌거북이 받침돌과 용머리 지붕돌을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자신이 중국에서 보아온 것을 포함하여 가장 훌륭한 비석받침 조각이라고도 했다. 그의 정직한 눈으로 보건대 신라문화는 위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일제가 만들어가던 식민사관과 크게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내적 모순을 해결해야 했다. 그래 - P157

서 주장한 것이 대륙(중국)의 영향을 계속 받은 반도적성격론과 조선 역사에서 문화가 점점 쇠퇴해간다는 ‘정체성(停滯性)‘이론이다. 그 요지는 「조선미술사』 총론에 명확히 밝혀져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조선 미술의 융성기다. 고려 시대는 그 전성기라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신라 예술의 연장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송나라와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의 것에 비하면 섬세하고 치밀한 면을 잃어버렸지만 우수한 것을 만들어냈다. 조선 시대는 미술의 쇠퇴기로 고려 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며, 다소 명나라의 영향도 받았다. 초기에는 상당히 볼만한 것이 만들어졌지만, - P158

후기에 들어 국가의 기운이 쇠퇴함에 따라 서서히 쇠락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세키노 다사시는 학자적 소신과 양심으로 조선시대 미술 중에는 ‘고유의 특질을 발휘한 것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식민사관을 앞장서서 전개한 학자들은 조선시대에 들어 한반도 문화가 사대주의에 빠져 독자성을 잃고 당파싸움을 일삼으면서 문화는 피폐해지고 마침내 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 ‘다행히도‘ 이제 일본 황국의 도움을 받아 폐습을 청산하고 새로 문명을일으키게 되었다는 논지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문화 행사와 발간물, 이를테면 조선미술전람회, 문화재 도록, 고미술 전시회 등에 등장하는 조선총독, 경무총감, 학무총감 등 고관들의 축사에 녹음기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논리라면 식민사관에 젖어 있다 하더라도 신라 금관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예찬해도 되는 것이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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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2023년 초겨울
유홍준

답사 당일 아침 10시까지 신청자들이 개별적으로 정림사지 주차장에 집결하면 나의 인솔과 해설을 받으며 부여의 유적지들을 두루 답사한 뒤 오후 5시에 다시 정림사지 주차장으로 돌아와 끝나는 당일 답사다. 초창기엔 버스 2대80명이었으나, 요즘은 인솔하기 버거워서 버스 1대 4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답사 코스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국립부여박물관만이 기본이고 매번 다르다. 서쪽으로는 만수산 무량사, 반교마을 돌담길, 홍산 관아, 남쪽으로는 임천의 대조사와 장하리 석탑, 동쪽으로는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지와 능산리 백제왕릉 등이 주요 답사처다. 때로는 부여군을 벗어나 보령의 성주사지, 논산의 관촉사,
공주의 무령왕릉과 공산성, 서천 비인의 오층석탑, 익산 나바위성당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 P13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우아한 자태로 우리를 맞이한다. 책에서 사진으로 볼 때는 왜소한 인상을 주지만실물은 키가 훤칠하고 5층의 체감율이 단아한 비례감을 자아내어 백제 미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성의 존재를 증언해주는 가장 확실한 유물이자 백제의 아름다움을 실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다시 말해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있기에 부여가 고도로서 존재감을 갖고 백제의 미학이 살아나는 것이다. - P16

이 향로의 발견으로 우리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顧 華而不侈)‘의 미학을 지녔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이 향로는 높이 61.8센티미터, 무게는 11.85킬로그램이나 되는대작으로 다른 향로들과 비교할 때 부피가 2배 가까이 된다. 향로의 구조는 받침, 몸체, 뚜껑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뚜껑이 닫힌 상태에서 보면 용의 입에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분출하는 듯한데, 맨 위에 봉황이 올라앉아 있는 3단 구조다. 이 향로는 기본적으로 한나라 때부터 유행한 박산향로(博山香爐)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중국의 박산향로는 대개 바다를 상징하는 승반(承盤) 위에 박산을 상징하는 중첩된 산봉우리가 얹혀 있는 모습이다. 박산은 중국의 동쪽바다 한가운데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았다는 이상향으로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 등 삼신산을 말한다. - P46

백제금동대향로는 이런 도교적인 상징성을 갖는 박산향로에불교적 이미지인 연꽃을 결합시키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형식을 구현한 것이다. 받침대의 용은 힘껏 용틀임하면서 치솟아오르는 강한 동세를 보여주며, 뚜껑 꼭지의 봉황은 부리와 목사이에 구슬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 날갯짓을 하기 위해 꼬리를 한껏 치켜 올린 모습이다.
이에 반해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진 꽃봉오리는 풍만하면서도 팽팽한 입체감이 넘친다. 이처럼 받침대와 몸체는 동(動)과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뚜껑에는 신선의 세계를 나타내 - P46

는 무수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나오는 도상은 백제인의관념 속에 있는 신선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영원불멸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는 것이다.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라는 명제를 이 백제금동대향로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추사(秋史)김정희는 명작 감상을 할 때는 ‘금강역사의 부릅뜬 눈으로,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처럼 치밀하게‘ 보아야 그 진수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다고, 홈런 타자가 공을 끝까지 보듯이 작품의 구석구석을 끝까지 보라고 하면서, 내가 말하는 대로 백제금동대향로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살펴보라고 했다. 보면 다 보일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조용히 낱낱 도상을 읽으며 답사객들의 눈을 이끌었다. - P48

위덕왕 재위기는 진실로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다. 지금 나성에서 떠올리는 유적과 유물 외에 ‘백제의 미소‘로 칭송받는 ‘서산마애삼존불‘, ‘미스 백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규암 출토 금동보살입상‘, 비록 국적과 시대가 명확지 않지만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이 6세기 후반 백제 미술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위덕왕 때 유물이다.
그럼에도 백제의 이미지를 말할 때면 멸망할 때의 의자왕을 - P58

먼저 기억하고 위덕왕 시대의 백제문화 전성기에 대해서는 말이없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역사를 연대기로 나열하면서 전란과정변을 중심으로 한 정치·전쟁사, 비유컨대 ‘사건 및 사고의 역사‘에만 치중하고 문화사로 익히지 않았던 병폐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여로 내려가 지금까지 50회에 걸쳐 봄가을로 백제문화답사를 이끌어온 것은 백제문화의 꽃과 영광을 온 국민에게 전도하고자 함이었다. 실로 이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남겨준 위덕왕치세의 백제인들에게 보내는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그지없다.
나의 느린 걸음을 앞질러 나성을 내려간 답사객들은 김인권국장의 인솔 아래 능사 터 옆으로 길게 난 긴 도랑의 다리 옆에모여 나의 다음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 옛날 나무다리가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유구와 목재가 발견되었다. 이를 토대로 이 도랑과 다리를 복원한 것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것이 있음으로써 능사 터는 더욱 진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항시 시간을 체크하며 늦을까봐 마음 졸이는 이미영 팀장이12시가 다 되어간다고 했다. 우리는 서둘러 부여 왕릉원 주차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위하여 관북리 유적지와 부소산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향우정 식당을 향해 떠났다. - P59

명작은 명작을 낳는다고 백제금동대향로를 주제로 무수한 사진 작품과 도록이 발간되었고, 이를 소재로 한 단독 저서(서정록『백제금동대향로』, 학고재 2001)도 나왔으며, 방송국의 역사 프로그램의 단골 주제로 이 향로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중 내게 가장 감동적인 프로그램은 대전방송(TJB)에서 향로의 악사 5명이 들고있는 악기를 재현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국악 연구자들은 봉황의 바로 밑에 위치한 악사부터 짧은 피리는 ‘배소‘, 긴 피리는 ‘종적(縱)‘, 기타비슷한 악기는 ‘완함‘, 그 왼쪽은 북, 다시 그 왼쪽은 거문고로 고증했다. 그리고 이 악기들을 인간문화재가 직접 만들었고,
국립국악원의 연주자가 백제 「산유화가」에 맞추어 연주했다. 지금은 유튜브로 모든 게 다 검색되어 이 글을 쓰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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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강물은 조금도 사납거나 험한데가 없다. 세상에 이처럼 유순한 흐름과 명징한 물빛을 가진 강이 또 있을까 싶다. 예로부터 압록강을 ‘처녀의 강‘이라고 불렀다는이유도 알 만했다.
압록강은 한반도에서 제일 긴 강이다. 전체 길이는 925.5킬로미터다. 직선거리로는 400킬로미터 정도이나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임강(린장), 우리나라 중강진에 이르는 상류 쪽이 심한 곡류를 이루므로 실제 강 길이는 직선거리의 두 배에 가깝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압록수(鴨綠水)로 나오는데, "물빛이 오리머리색과 같다"며 압록수로 바뀌었다. - P218

이에 반해 대동여지도에는 대총강(大摠江)으로 나와 있어 중국문헌에 나오는 명칭과 고구려 이래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압록鴨綠)‘이란 이름은 ‘크다‘는 의미를 지닌 아리(阿利)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압록이라 했고 중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야뤼(鴨綠)‘로 불려 영어로는
‘얄루(Yalu)‘라고 표기되고 있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그날도 압록강은 짙푸른 빛을 띠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강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니 민둥산 산비탈에 옥수수들이 힘겹게 자라고 있었다. 느린 동작으로 옥수수를 따고 있던 북한 주민들이 - P218

하던 일손을 멈추고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산장성은 단동에서 북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호산(虎山)에 있다. 호산은 표고 146미터 정도 되는 낮은 산인데 산의 생김새가 마치 누워 있는 호랑이 모습과 같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산은 낮아도 여기에 오르면 압록강 북쪽으로 펼쳐지는만주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쌓은고구려 박작성이 지금은 호산장성으로 불리고 있다. - P219

(백두산 천지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저 산줄기를 넘으면 우리가 답사를 시작한 심양에 이르게 된다. 그 주변에 산 하나 없는 너른 평원이 바로 요하평원이다. (...) 요하를 건너면 다시 요서 산지와 그북쪽으로 대흥안령산맥이 펼쳐지니, 이곳의 초원을 터전으로 삼아살아온 사람들이 동호족(東)이다. 흉노족의 동쪽에 거주하였기때문에 ‘동쪽의 오랑캐‘란 이름이 붙여졌으니, 시대에 따라 선비. 오환 • 거란 • 실위 • 몽골족으로 불렸다. 역사상에 유명한 요나라와 원나라, 그리고 남북조시대의 북조 국가들인 북위(北)·북주(北周)·후연(後燕)과 같은 나라들을 세운 주인공들이다. 그중 북위(386~534)를 세워 중국의 반을 150년간 지배했던 선비족의 탁발씨들은 스스로 한화(化)되어 역사 속에 사라졌다. - P227

이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역시 산줄기 저 너머에 목단강과 송화강 하류에 형성된 분지들이 등장한다. 거기에 뿌리를 박고 살아왔던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숙신족(肅愼族)이라 부른다. 이들도 시대에 따라 읍루. 물길 · 말갈. 여진· 만주족으로 불리면서, 발해건국에 참여하였고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다. 지금 만족(滿族)이 - P228

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 후예이다.
이 두 집단을 사이에 두고 만주 한가운데에 살림을 차린 사람들이 예맥족(濊貊族)이다. 송화강 중류에 자리 잡았던 부여, 압록강 중류에서 일어난 고구려, 그 후예가 말갈과 연합하여 세운 발해가바로 이들이 건설한 나라이다.
한반도의 6배가 넘는 광활한 대지에 역사를 꾸려갔던 주인공은 이처럼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뉜다. 우리의 핏줄이 된 예맥족은 동부의 숙신족, 서부의 동호족을 좌우의 날개로 삼으며, 지금의 길림성과 요동지방을 무대로 오르내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발해의 멸망과 함께 그들의 발자취는 한반도로 움츠러들어버렸고, 그 대신에 중원의 한족(漢族)들이 그 자리를 메워버렸다. - P229

"앞으로 우리는 본격적으로 고구려 유적을 보게 될 것인데, 고구려적인 신비감이나 스케일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두 곳 있습니다. 어디일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질문에 일행들은 저마다 고구려의 시각적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 같았다.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릉인 장군총, 수렵도로 유명한 고구려 고분벽화...... 그러나 송 교수의 답은 달랐다.

"하나는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이고, 또 하나는 집안에 있는 적석총입니다. 집안 통구에 가서 수천 기의 고구려 적석총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장대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경주의 신라왕릉과는 또 다른 역사적 신비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우리가 오르게 될 환인의 오녀산성에서는 주변을 압도하는 풍광에 절로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웅혼한 기상을 느끼며 고구려 시조 주몽이 왜 이곳을 첫 도움으로 택했는지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 P231

산 정상 못미처에는 천지(天池)라는 큰 못(높이 12미터, 너비 5미터, 깊이 2미터)이 있었다. 산성의 필수가 우물인데 여기는 아예 사철 마르지 않는 천지가 있으니 산성으로 이보다 더 좋은 입지는없을 성싶다.
정상에 다다르니 거짓말처럼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높이1천 미터, 폭 3백 미터에 달하니 잠실운동장 서너 개를 옮겨놓은 넓이다. 여기에 왕궁터, 병사 주둔지, 장대 등 많은 성곽시설 건물들이 있던 자리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정말로 놀라웠다.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삼국시대 산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엄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봉황산성(오골성), 호산장성(박작성), 환도산성, 안시성, 요동성 등 고구려의 수좋은 산성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었다. - P235

귀국 후 일행들이 돌아가며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면 한결같이 ‘집안에서 추석을 하루 앞둔 보름달빛 아래 보았던 압록강 건너 만포 땅 미루나무 늘어진 강마을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격한감격들을 말했다. 여기가 국경의 마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가볍게 불어오는 온화한 가을바람을 맞으면서 절로
‘집안은 과연 만주의 강남으로 4백년 도읍지가 될 만했구나‘라는생각이 들었다. 집안 압록강변의 풍경은 그렇게 평생 잊히지 않는 한 폭의 풍경화로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 P254

환도산성의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가니 바로 앞에 화강암으로멋지게 쌓은 점장대(將臺)가 나왔다. 점장대에서 산기슭으로 더올라가니 넓은 궁전 터가 나왔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밭이 되어있었다. 좀 더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자 산자락 아래로 수천기의적석총이 무리지어 있었다. 집안 산성하 고분군이었다. 그 장대함은 송기호 교수가 환인의 오녀산성과 함께 고구려의 웅혼한 기 - P266

상을 보여주는 두 가지 중 하나로 지목한 것이다. 경주 신라 대릉원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집체미, 백제의 공주 송산리 고분과 부여 능산리 고분의 우아한 능선과 달리 고구려의 강인함과 장대함이 절로 다가온다.
나는 통구 들판에 무리 지어 있는 적석총이 장대한 파노라마로 전개되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환도산성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곳에는 사과 과수원이 있었다. 아직 수확하지 않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나무 밭을 무작정 오르고 있는데 저 아래에서 한 할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사과 떨어트린다고 얼른내려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염려 말라는 손짓을 보이고 끝 - P267

까지 올라가 이 천하의 장관을 카메라와 가슴속에 깊이 담아두었다. 세계 어디에 이처럼 비장감 감도는 죽음의 유적이 있을까.
우리는 환도산성을 내려가 적석총을 가까이 보러 갔다. 고구려 적석총은 3세기 이전까지는 무기단식 적석총이었으나 기단식으로 발전하고 또 계단식으로 발전하여 세 가지 형식이 공존하고 있다. 이것을 시대적 추이라기보다 계급적 차이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의 매장부를 지하가 아니라 돌무지 위의 석실로 만들어 고인을 정중하게 모셨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고구려 적석총은 훗날 거의 다 도굴되는 피해를 입었다.
경주 시내에 있는 신라 마립간 시기의 대형 고분들이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으로 만들어져 매장주체부가 무덤 깊이 감추어져 있어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당대에는 거룩하게 모신다는 마음만 있었지 훗날 손을 타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무리 지어 있는 적석총 사이는 전체가 다 옥수수밭이어서 더욱 싱그럽고 아름답고 강인해 보였다(200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정비하면서 지금은 잔디밭이 되었다고 한다). - P270

고구려의 죽음의 문화가 남겨놓은 이 유산은 삶의 자취, 이를테면 국내성 터나 어느 절터보다도 강렬한 데가 있었다. 집안에서는 무려 1만 1천 3백 기에 달하는 고구려 고분을 확인했는데, 대체로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통구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고분군에 - P270

1천 5백 기, 칠성산과 통구하 사이의 만보정 고분군에 1천 5백기, 국내성에서 압록강 상류로 올라가 우산(山) 아래에 있는 우산하 고분군에 3천 9백 기, 국내성에서 압록강 하류로 내려가 처음 만나는 칠성산 고분군에 1천 7백 기, 그리고 더 하류로 내려가마선향(鄕) 마을에 있는 마선구 고분군에 2천 5백 기 등이다.
그중에 천추묘(千秋), 서대묘(西大墓), 태왕릉(太王陵), 장군총(將軍) 등 10여 기의 대형 고분은 고구려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는 고구려 적석총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천추묘가 있는 마선구 고분군부터 답사하기로 했다. - P271

집안 기차역을 조금 지나니 육중한 우산 아래로 고구려 고분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중 오회분 다섯 기의 무덤은 마치 5개의 투구가 놓여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지금은 ‘집안 다섯무덤‘이라 부르고 있다. 그중 4호와 5호 무덤은 거의 같은 구조에 같은 벽화 내용을 담고 있는데, 1칸 구조의 돌방무덤으로 네 벽에 사신도를 주제로 한 그림이 있고 귀퉁이와 고임돌에 온갖 상상의 신선들을 그려 넣어 신비로운 천상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오회분 1~3호분에서는 벽화가 발견되지 않았다. - P287

5호분의 벽화는 책에서 도판으로 볼 때보다 
훨씬 색채가 선명하고 도상이 또렷했다.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서 곡식 이삭을 쥐고 앞으로 나아가는 농사신, 횃불을 들고 날아가는 불의신, 벌겋게 달구어진 쇳덩이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리는 대장장이신, 바퀴를 매만지는 수레바퀴신, 용을 탄 신선, 장구치는 신선, 춤추는 신선 등 상상의 신과 신선을 실감나게 그렸다. 색채도 아름답게 구사되어 낱낱 장면이 한 폭의 신선도라고해도 좋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복희와 여와를 형상화한 해신과 달신의 만남이었다. 동그라미 속에 삼족오(三足烏)를 그린 해를 머리에인 해신과 역시 동그라미 속에 두꺼비를 그린 달을 머리에 인 - P287

달신이 마치 천상에서 다이빙하듯 내려왔다가 다시 몸을 솟구쳐가슴을 마주 대하며 치솟아오르는 듯한 장면이 극적이기 그지없다. 고구려의 강한 기상과 서정을 남김없이 보여주면서, 이제 고구려 고분벽화가 상상의 날개를 펴 어디론가 더 비약하고 있다는느낌을 준다.
5호분 답사를 마친 뒤 우리는 비록 무덤 내부로는 들어가지 못할지언정 다른 벽화고분들을 둘러보았다. 사냥 그림으로 유명한 춤무덤과 씨름무덤은 쌍둥이처럼 붙어 있었다. 저쪽으로 돌아 나가니 사신도의 현무 그림이 현란하게 그려진 것으로 유명한 통구사신무덤이 있고 그 옆에 산연화(散蓮花)무덤이 있었다. - P288

이 산연화무덤 벽에는 사면 흩날리는 연꽃잎 그림만 장식되었는데, 1907년 프랑스의 대표적인 동양학자인 에두아르 샤반(Edouard Chavannes)이 중국에 문화재 조사를 나왔다가 이를 우연히 발견하여 이듬해 논문으로 발표함으로써 고구려 고분벽화가 있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 고구려 벽화고분을 왕릉이 아니라 귀족무덤으로 단정 지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때 명칭을 ‘고구려 귀족무덤‘이라고 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생각할 때마다 드는 의문과 아쉬움은 어느날 급작스럽게 벽화고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서온다. 미술사에서 모든 양식은 초기의 생성기, 중기의 발전기, 후 - P289

기의 난숙기, 그리고 말기의 쇠퇴기라는 리듬을 갖는다. 이것은하나의 법칙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말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즉, 고구려는 문화가 정점에 도달한 순간 막을 내린 것이다. 김원용 선생은 고구려 문화사가 마치 ‘사고사(事故死)‘를 당한 것처럼 허무하게 끝났다고 했는데 고분벽화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 P290

태왕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크기다. 바닥 길이가장군총의 약 두 배씩이며 각 면에 3개씩 기대놓은 자연석 호분석(護石)이 이 무덤의 위용을 말해준다. 무덤의 내부에는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돌방이 구축되어 있는데, 1990년 중국에서 조사했을 당시 돌방에서 맞배지붕을 가진 형태의 석곽(돌덧널)이 발견되었고 관을 올려놓는 관대(臺)가 2개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합장묘였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태왕릉에서 북동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어 이 능은 광개토대왕릉으로 생각된다. 무덤의 방향과 광개토대왕릉비의 방향이 정반대라는 점에서 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지만 태왕릉이라고 새긴 전돌이 나왔기 때문에 아직은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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