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날 전까지 한 주 내내 날씨가 흐리고 이슬비가 내려 옥회는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그날이 되자 구름 한 점 없는하늘에 태양이 쨍하게 솟았다. 두 아이는 옷을 입기 전에 정원에서 단이가 코스모스 꺾는 것을 도왔고, 해순의 손길도 빌렸다. 옥희의정수리 위로 화려하게 수놓은 족두리를 씌우기 전에, 해순은 긴댕기를 꼬아 올려 낮게 쪽을 진 뒤 옥희의 머리에 처음으로 은비녀를꽂았다. 새신부의 상징이었다. 올림머리는, 옥희가 신체적으로는 동정을 간직하고 있을지언정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상 더는 혼인 이전의 상태가 아님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인 기혼 여성들과도달랐다. 오른쪽으로 열리게끔 감아 입은 치마가 그의 직업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단장의 마지막 순서인 화장까지 마쳤을 때, 옥희는거울 속에 비친 아름답고도 낯선 이를 보았다. 하얀 분가루를 칠한 피부 위에 붉게 도드라진 입술을 한 그 자신의 모습이 단이와 매우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 P138

"그러니까, 약한 국가와 민족이 더 강한 국가와 민족에 흡수되고통합된다는 건 불가피할 뿐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라는 거야." 이토가 깔끔하게 다듬은 콧수염을 한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일본이 없다면 조선이 어떻게 현대화됐겠어? 철도, 도로, 전력과 발전을 가져다준 쪽이 누구냐고. 이렇게 제멋대로인 나라를 정리해 주는동안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관대한 호의를 베푸는 거야. 그런데도 이 개 같은 새끼들은 자기들한테 이로운 게 뭔지도 모른다니까."
"우리가 이곳에 발전을 가져온 건 틀림없지. 그리고 이 경우 국가사이에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자네 말도 옳아. 하지만 쌀 문제에 관해서는 좀 의문이 들어." 야마다가 대꾸했다. "왜 굳이 피를 볼 때까지 그들을 다그치는 거지? 그들을 더 적대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꼴이잖아.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 P147

삶이 꾸준한 전진의 과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는 젊음 특유의 요건이다. 옥희 역시 인생의 한 단계를 지나고 나면 바로 그다음 단계가 오리라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가두 행렬에서 자신이 성년으로 한 발짝 들어서는 확실한 순간을 경험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날이후 일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놀라움과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여전히 그들이 사는 곳에서 어느 방향으로든 최대 다섯 집 이상의 거리를 넘어가지 않도록 엄격히 금지했다. 옥희도 언제나처럼 그 명령을 순순히 따르긴 했지만, 단이의 집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처음 그곳에 도착하여 벅차게 느끼던 찬탄과 애착에 서서히 먼지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 P153

그로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정호에게 이 모든 것을 세세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젊은이가 나름대로 영민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한 무리의 늑대처럼,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들을 이끌고 상상할 수도 없는 험난한 일들을 겪으며 거리에서 살아남지 않았는가. 명보는 늘 첫인상이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믿었고,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평범한 정호의 얼굴에서 매우 희귀한 것을 보았다고 느꼈다. 이는 그가 모든 사람에게서 가장간절히 찾고자 하는 자질, 다름 아닌 정직함이었다. - P288

거의 예외 없이, 다들 너무 당연하다는 듯 제 스스로를 정직한 인물로 여긴다는 점은 오랫동안 명보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행동을 합리화할 필요가 있을 때면 깜짝 놀랄 만큼 영리하고 교활해졌으며, 너무도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느라 심지어 자기 자신을속이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정호는 뭔가 달랐다.
이 야수 같은 젊은이가 숨 한번 돌릴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데 능숙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의 내면에는 견제와 균형,
이해득실에 따라 작동하는 구조 자체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정호가 이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과 달라 보이는 주된 이유였다. 그처럼 단도직입적인 성격에 그가 지닌 거칠고 강렬한 기운이더해져, 많은 부하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할 뿐 아니라 제 목숨까지도 내놓을 만큼 그를 존경하고 신뢰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고 명보는 생각했다. - P289

명보의 마지막 말을 듣는 정호의 눈앞에 다시 옥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명보가 얘기하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그처럼 이치에 잘 맞는지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 러시아, 일본 혹은 한국, 정호 자신과는 무관한 관념이나 세계지도가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찾는 방법에 대해 한 이야기 말이다. 그저 사랑하는누군가와 함께 소박한 삶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 바로 그것이 그가아무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속 소망이었다. 자신이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명보라면 이러한 소망을 인정하고, 그에 더해 존중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이처럼 이해 받은적이 없었는데, 방금 만난 이 낯선 사람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그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명보만큼 진실하고 똑똑하고힘을 가진 사람마저 정호가 자신의 작은 소망을 이룰 수 있게끔 이끌어주지 못한다면,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이 공산주의자라는 게 되려면, 뭐부터 해야 합니까?" 정호가 물었다. - P291

옥희는 가슴에서 시작되어 몸 전체로 뻗어나가는, 마치 무엇인가에 취한 듯한 신비로운 떨림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사랑은 한 번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단계적으로 번져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첫눈에 한철을 사랑하게 된 옥희는 한 여자가 자신의 연인이 어떤 영혼을 가졌는지 깨닫는 바로 그 계시적인 순간을 경험하고있었다. 그는 그 남자가 아주 특별하고 부드러운 영혼을 지녔다고느꼈다. 그리고 남들에겐 들키지 않게 잘 감춰진 그 여린 모습을 오직 옥희에게만 드러낼 수 있으며, 옥희 자신이 한철의 내면에서 그걸 끌어낸 장본인이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바삐 인력거를 끌며 달려가는 한철의 넓은 어깨와 길고 마른 골격, 탄탄한 등, 잘록한 허리와엉덩이를 바라보면서, 옥희는 이 젊은 남자의 처지를 애처롭게 여겼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훌륭한 능력을 갖췄음에도, 한철은 자신의 가족과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전날 밤에 대화할 때도 그랬듯이, 옥희는 이 남자가 지고 있는 때 이른 책임감을 조금 덜어줌으로써 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지고 밝아지는 걸 보고 싶었다.  - P331

연화의 이사는 단이의 집에 묘한 우울감을 드리웠다. 그의 부재가가장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건 아침 식사 자리에서였는데, 그때만큼은 언제나 모두 함께 모이곤 했기 때문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단이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열정적인 도취와 그런 감상에 빠져들기를 자제하려는 의지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전자는 그의 본성이었고 후자는 그의 원칙이었다. 단이는 결코 슬픔과 공허한 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법이 없었으니, 가장 예리한 관찰자만이 그의 확고한 침착성에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음을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단이의 속내를 속속들이 파악하는 월향은 이모가 떠난 연화를 몹시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월향 자신도 비슷한 상실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낙심하지는 않았다. 동생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그는 자신의 자매를 진심으로사랑하게 된 터였다. 하지만 그런 심경 변화와 동시에 그들 각자의 - P338

자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형성되었으니, 두 사람은 해가 지날수록서로를 덜 필요로 하게 되었다. 월향은 그저 연화가 저만의 재능을꽃피우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게 되어 기쁠 뿐이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와 음악, 동생의 행복에 필요한 건 이 두 가지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이 행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월향은알 수가 없었다.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월향은 그런 문제에 대해 한시도 생각을 멈춰본 적이 없었는데, 그에겐 행복이라는 관념 자체가 뭔가 낯설고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당신은 달에 가서 살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받는 것만큼이나 엉뚱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월향에게 가장 행복에 가까운 감정이란, 한밤중에 그의 딸이 자신의 이불속으로 웅크리고 들어오며 팔베개를 해달라고 졸라댈 때 드는 기분이었다. "네 베개는 어쩌고?" 월향이 이렇게 물으며 마른 국화 잎과녹두로 가득 찬 해숙의 부드러운 원통형 비단 베개를 가리키면, 해숙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이렇게 대꾸했다. "싫어, 싫어. 엄마 팔베고 잘 거야." 그러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과장된 한숨을 푹 쉬어 보이는 월향을 향해 낄낄거리며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 P339

어쩌면 그게 바로 월향의 행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행복이라고 운운, 만끽하는 것은 자신을 이기적이고 자격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그는 특별히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저 자신과 딸의 장래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돈을 모으기만을 고대할 뿐이었다. 그는 해숙을 평범하고 현대적인 여자아이로 키워내고 싶었다. 그게 바로 월향이 기생 일을 하면서도 어떤 연애사에도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했던 이유였다. 그래야 해숙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바람직한 남자와 결혼할 자유를 누리게 될 테니까. 상류층 가정의 여자아이들은 종종 일본이나 심지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곤 했으니,
월향은 해숙 또한 돈으로 가능한 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회에 참석하거나 광고 모델을 하며 벌어들인 돈을 거의 다 저축했다. 물론 옥희나 연화가 받는 것보다는 적었지만, 그래도 제법 상당한 액수였다. 월향이 그 돈을 모두 해숙에게 투자했기 때문에, 해숙은 명문 학교에 다니고 예쁜 옷가지들로 치장하며 남부럽지 않게 자라났다. 해숙이 대부분의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모범생이라는 사실은 월향의 자랑이자 유일한 낙이었다. - P340

"그분은 ‘기생‘이라고 알려진 사람이에요. 내가 듣기론 아주 성공한 경우라더군요. 그분의 딸은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이죠." 교장은
또박또박 설명한 뒤, 더는 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다는 듯 깍지 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커티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문득 그 남자의 마음속에, 만일 그 낯선 사람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것을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의 계시란 말인가? 그것까지는 아직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가벼운 바람이 엷은 먼지구름을 훅 일으켜 푸른 하늘로 날려 보냈다. 창밖을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닌지, 혹시라도 자신의 부주의한 태도에 교장의 기분이 상하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들 즈음, 연보랏빛치마를 입은 여자가 창틀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저리 날리는 분홍빛 모래 속에서, 그는 마치 어느 사막을 건너는 고독한 여행자같아 보였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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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혜JUHEA KIM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이자 친환경 생활과 생태문학을 다루는 온라인 잡지 <피스 덤플링>의 편집장.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주했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2016년 영국 문학잡지 (그린)에 단편소설 「보디랭귀지Body Langer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인디펜던트>를 비롯한 여러 제에 소설과 수필, 비평 등을 기고했다. 그중 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 「바이오돔은TV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어린 나이에 한국을 떠났지만 모국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가정에서 늘 한국어를 사용해 온 이중언어 사용자로서 고 최인호 소설가의 단편소설「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이라는 작은 땅의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펼쳐낸 장편소설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은 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이다. 독립운동을 도왔던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듣고 자라면서 한국의 역사를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인식했고 이러한 가족 내력을 간직한 채 한국의 역사를 전 세계 독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자연 파괴, 전쟁, 기아를 맞이

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하는 소설을 썼다. 2021년 마침내 ‘작은 땅의 야수들은 "톨스토이 스타일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출간 즉시 아마존 ‘이달의 책‘에 올랐고, <하퍼스 바자> <리얼 심플> <미스 매거진》 《포틀랜드 먼슬리>에서 ‘2021년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더 타임스》 《뉴욕타임스》 등 영미 40여 개 매체에서 추천 도서로 소개되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2022년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2024년 러시아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톨스토이문학상(야스나야 폴랴나상)‘ 해외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City of Night Birds』는2024년 12월 영미권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고 한국에서는 2025년 출간 예정이다. 한편 작가는 현재 비영리단체인 한국범보전기금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한반도야생의 호랑이와 표범을 복원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다.
juheakim.com

동트기 전 어둠의 산책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는
책이 되길...

김주혜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태초의 시간 같았다. 구름은 그들이 속해 있던 영역을 떠나 나지막이 내려와,
마치 땅에 맞닿은 듯 보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창공을 둘러싸고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흔들림도 소리도 없었다.
이 아득한 세계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눈길에 난 작은 얼룩처럼 사람 하나가 홀로 걷고 있었다. 사냥꾼이다. 아직 부드러움과 온기가 남아 있는 짐승의 발자국 위로 몸을 구부린 채, 남자는 자신이 노리는 사냥감이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눈의날카로운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약간의 눈이 내려 쌓이면 그 짐승을 더욱 쉽게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 크기로 미루어 몸집이 제법 큰 표범 같았다. - P17

남자는 나무들 사이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동물들은 여기 그들의 영토에서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산은 그의 것이기도 했다. 혹은 바꾸어 말해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산에 속해 있었다. 험준하게 펼쳐진 산들이 특별히 관대하다거나 위안을 주어서가 아니라, 이 깊은 숲의 어느 곳이든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똑같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산을 타고 있을 때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았다. 어떻게 숨을 쉬고, 걷고, 생각하고, 죽여야 하는지. 마치 표범이 표범으로 사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 P18

그 삶에서, 남자는 대한제국군에 복무하던 병사였다. 활 쏘는 기술로는 나라에서 제일이라는 명사수들만 특별히 차출하여 만든 부대였다. 화승총이나 활로는 누구도 남자를 능가할 수 없었다. 각 지역의 특성을 빗댄 옛말을 따라, 사람들은 남자를 ‘평안도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물론 그 사나운 야수들은 평안도뿐 아니라 이 작은 땅의 모든 산과 숲마다 넘쳐났기에 고대 중국은 이곳을 ‘호랑이의 나라‘라 부르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확실히 그 별명은 남쪽에서 왔다는 농부들보다 그 남자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험준하고 경작하기 힘든 땅을 개척해 낸 북부인들은 사냥꾼의 피를 타고난 자들이었다. - P20

사냥꾼의 오래된 기억은 지금 주위에 폭신하게 쌓여가는 눈처럼 그의 머릿속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남자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절벽 끝 선반처럼 튀어나온 바위를 응시했다. 차디찬 눈보라가 그의두 눈과 콧속으로 거칠게 파고들고 맨손을 장갑처럼 하얗게 둘러싸사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남자의 예상보다 더 짙은 눈발이었다. 그리고 동쪽에서 밀려오는 눈구름까지 확연히 보이는 이 정도높이에서는, 한동안 눈이 그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첫 눈송이의 냄새를 맡았던 순간 곧바로 산에서 내려갔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흙 위에 촉촉하게 찍힌 그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던 바로 그때 말이다.
남자는 재잘거릴 기력도 없는 아이들이 누추한 오두막에서 고요한 침묵 속에 굶주리고 있는 꼴을 보는 게 싫었다. 머지않아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하고 길을 나섰다. 사슴이나 토끼라 - P23

도 잡았다면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그 작고 행복한 얼굴들이 불을 켠 등처럼 환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발견한 건 표범의 발자국뿐이었고, 어쩌면 한 해 수확량의 반절이 넘는 값어치를 하는 그 짐승의 가죽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홀려버렸다.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려나?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남자는 극심하게 피로해졌고, 지금껏 그를 떠받쳐 온 모든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그는 쌓인 눈의 모습이 마치 갓 지어 뜨거운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흰 쌀밥 한 그릇 같다고 상상했다. 그렇게 뜨끈한 쌀밥을 먹어본 건 평생을 살면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남자는 분노하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여윈 몸을 무심하게 관통하며 불어가는 바람 같은 웃음이었다. 죽기 전에 그는먹고 싶었던 음식 몇 가지를 더 떠올려 보고 싶었다. 간장과 파를 끼없어 푹 고아낸 갈비찜이나, 걸쭉하게 녹은 골수가 입천장에 쩍쩍들러붙을 정도로 진한 꼬리곰탕 같은 것들. 딱 한 번, 어느 명절 잔치에서 먹어본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환상도 지금 그를 향해 다시금 떠밀려 오는 또 다른 기억보다는 강렬하거나 유혹적이지는 못했다. - P24

표범이 절벽 끝에 튀어나온 바위로 훌쩍 올라왔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윤곽으로만 어른거리는 그 짐승의 존재를 그는 눈으로 보기보다 온몸의 감각으로 느꼈다. 마침내 짐승이 몇 자도 되지 않는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남자는 숨이 턱 막혀 활을 아래로 내렸다.
그것은 표범이 아니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호랑이였다.
콧등에서 꼬리 끝까지, 남자가 양팔을 한껏 펼친 길이만 했다. 다자란 표범 정도의 크기. 새끼 호랑이라기엔 너무 크지만, 아직은 어려서 혼자서 사냥하지는 못하는 놈이다. 하얀 털로 폭신하게 뒤덮인둥근 귀를 움찔거리며, 어린 호랑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냥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분한 노란색 홍채는 겁을 먹지도 화가나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람이라는 존재를 본적이 없는 게 분명했고, 그래서 이 이상한 형상의 등장에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사냥꾼은 활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사정거리 안에 있는 호랑이와 마주친 건 지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7

잿빛 어스름이 폭설에 몸을 떠는 나무들 위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남자는 산신령을 향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영물을 놓아주었으니 저도 무사히 내려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눈보라는 저물녘에나 겨우 잦아들었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남자의 다리가 꺾였다.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네발로 선 채 잠시 버텼지만, 곧 팔꿈치마저 힘이 완전히 빠져버리자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고운 눈가루 속으로 파묻히듯 쓰러졌다. 그는 생각했다. 이왕죽을 거라면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야지. 남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등을 대고 누웠다. 달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자연 속에서 가장 자비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 P29

가옥의 무수한 미닫이문 중 하나가 열리고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이쪽으로 돌아서기도 전에, 이미 그 단아한 등의 모양과 뒤쪽 목덜미에서 어깨까지 길고 우아하게 떨어지는 선만으로도, 옥희는 그 여자가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얼굴을 돌리고 그들을 향해 짐짓 엷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순간, 옥희는 알 수 없는 설렘과 갈망이 가슴을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여자들 사이에서 곧잘 질투의 원인이 되곤 하는 흔한 외적 매력 대신에, 이 낯선 사람의 아름다움은 훨씬 드물고 희귀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뭔가 희망의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고, 그러한 기분을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염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온화한 표정 속에,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위엄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상대의 희망을 한껏 부풀려 띄워놓았다가도 곧 내동댕이쳐 그들이 겁을 먹고 움츠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을 여유롭게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 P53

그러나 삶은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은실은 실제로 안타까운 희생처럼 느껴지는 무언가를 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것이었다. 장군과 월향, 그리고 연화. 만일 그 세 사람이 불타는 집에 갇혀 있다면, 그는 즉시찬물 한 동이를 뒤집어쓰곤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 모두를 꺼내올 것이었다. 자신에게는 그게 바로 사랑의 의미라고 은실은 머릿속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쓸쓸한 손은, 다음 날 아침 성문을 통과한 천 씨가 사냥꾼의 집에 은반지를 전달하는 순간까지도 줄곧 텅빈 애석함을 느끼고 있었다. - P77

가장 놀라운 사건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이 작은 바늘 하나가 툭떨어지듯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연쇄한다. 길 잃은 개 한 마리의 출현만큼이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저 세월 속에 묻혀 흘러가는 여느일탈로 말이다. 어느 아침, 옥희는 잠에서 깨어나 그날 예정되어 있던 모든 수업이 취소되었음을 알았다. 바깥세상의 온기를 느끼고 이제 막 고치에서 빠져나온 어린 꿀벌처럼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숨을한껏 들이쉬었다. 이른 6월의 생동감으로 가득한 날이었다. 나무들은 각자의 녹색 음향을 노래했으니, 그 신선함이 눈으로도 들을 수있는 음악처럼 펼쳐졌다. 여자아이들은 고삐 풀린 송아지 떼처럼 정원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책벌레인 옥희마저도 이날만큼은 잠시 글에서 눈을 떼고 휴식을 만끽하는 것이 전혀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 P78

가장 소중한 친구가 자신에게 없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옥희 자신이 외모도 더 예쁘장하고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까지 겸비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위축된 패배감을 맛보는 대신, 옥희는 그들이 서로 딱 맞는 완벽한 한 쌍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다는 사실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총명하고, 지적이고, 성실하다. 연화는 활달하고, 기백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열고, 자신감이 넘친다. 그들은 서로 성격이 비슷한 두 친구가 종종 그러하듯이 한 사람의마음을 두고 동시에 경쟁하거나 같은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결코 없을 것이었다. 옥희는 그들이 각자 반쪽의 인생, 하나씩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서로 나란히 서 있을 때 진정으로 완전해질 수 있다고. - P99

 "500년도 더 전에 도읍 성벽과 함께 세워졌지. 내가 경성에 처음 왔을 땐 그 성벽도 아직 남아 있었어. 그때만 해도 웅장한 모습이 참 근사했는데, 오래전에 일본인들이 성벽을 허물어버렸지. 저 꼴 보기 싫은 전봇대들도 그때는 없었는데."
인력거꾼이 달리기 시작하자, 역전의 혼란스러운 소음도 점차 줄어들었다.
"우리, 저 대문을 지나가는 거예요?" 옥희가 물었다. 집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단이가 말했다. "주변에 벽이 없다고 해서 대문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건 아니란다. 저게 없으면 다들 경성에 도착했다는 걸 어떻게 알겠니? 게다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나오는 것보다 신나는 것도 없거든, 슬플 땐 그걸 기억하렴." 단이가 쾌활하게 말했다. 묘하게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능력또한 그의 특별한 재능 중 하나였다. "이제 들어간다.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너희들도 알게 될 거야!"
인력거가 아치 밑으로 들어갔다가 다른 쪽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옥희는 형언할 수 없는 눈부신 고양감에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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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백제탑이다. 높이 8.5m의 제법 큰 규모로 육중한 볼륨감이 있는데 얇은 지붕돌의 경쾌한 느낌은 백제탑만의 멋이다. 다만 정림사탑에 비하여 약간 둔중해 보인다. 이때문에 이 탑의 제작 시기를 놓고 미술사가들은 제각기 7세기 백제설, 8세기 통일신라설, 10세기 고려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 탑의 연대 추정을 어렵게 만든 것은 여기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내용이복잡하기 때문이다. 1965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사리장치가 두 군데서 발견되었다. 하나는 원래 목탑의 사리공에서 신라 9세기 이후에 제작된 금동불상과 청동방울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고려 초에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여 세운 탑이라는 견해가 나온 것이다. 또 하나는 1층 지붕돌의 사리공에서 아주 아름다운 사리장치가 나왔다. 순금으로 만든 연꽃무늬 사리함과 파란 유리 사리병은 지금도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당시 학자들은 이 사리함을 통일신라 유물로보고 탑도 통일신라대로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왕흥사터와 미륵사 서탑에서 백제의 정교한 사리함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이제는 백제의 유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해져 통일신라설은 힘을 잃었다. - P156

이런 사실들을 모두 감안해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왕궁리 절터는 본래백제 무왕이 미륵사를 지으면서 금마로 천도할 계획을 갖고 있을 때 지은 별궁이있던 자리다. 그러나 천도 계획이 무산되면서 별궁은 폐궁이 되었고 그 자리에는절이 지어졌다. 주변에서 나온 ‘상부대관관서명과 ‘궁사‘라는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편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이 절을 처음 지을 때는 목탑이었는데 무슨 사정에서인지 나중에 오층석탑으로 바뀌었고 이때 이 아름다운 사리함을 장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나말여초를 거치면서 한 차례 수리할 때 이 불상이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실루엣이 환상적인 왕궁리 오층석탑이 백제품의 우아한 탑이라는 사실에는 아무 이론이 없다. - P156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의 아름다움은 
석가탑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비례 감각을 보여주는 데 있다. 돌의 두께가 둔중하지도 가볍지도 않게 알맞으면서 늘씬하고, 단정한 화사석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지붕돌 역시 부드러운 곡선으로 나타냈을 뿐인데 그 흔연한 어울림이란 마치 귀공녀를 보는 듯한 기품이 있다. 연꽃새김을 자세히 보면 겉꽃 속에서 새 꽃잎이 머리를 살짝 드러내고 있다. 화사석에는 창문틀이 가볍게 새겨졌다. 감정의 절제미가 들어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석등 앞에는 넓적한 배례석이 있어 석등의 존재와 의미를 높여주는데 옆면 모서리를 마치 상다리처럼 조각하여 안상眼象을 명확히 했다.
석등은 절 마당이 아무리 넓어도 하나만 세우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이는<현우경(經)의 빈녀난타품에서 부자의 화려한 등불보다 가난하나 진실된 자의 등불 하나가 더 부처의 마음에 다가간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그런데 요즘 절에서는 화려한 석등을 쌍으로 설치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경전에 맞지 않는 이런 현대식 쌍등을 볼 때면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이 조형적으로, 종교적으로얼마나 뛰어난 명작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 P158

우리나라 석조문화재 중 조각이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것을 꼽자면 단연코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탑(국보 제57호)과 탑비(보물 제170호)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철감선사 도윤道允(798~868)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쌍봉사에서 선종을 크게 전파하여 제자인 징효가 영월에 법흥사 사자산문을 열어 구산선문의 하나가 되었으니 하대신라에서 그의 위상을 능히 알만하다.
철감선사탑은 우리나라 승탑의 백미로 기단에서 지붕돌까지 단단한 화강석을 마치 밀가루 반죽을 다루어 만든 것처럼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아래기단엔 뭉게구름 위에 여덟 마리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이 탑을 수호하고, 겹꽃연꽃받침에 상다리 모양의 손잡이가 돌려진 위 기단에는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며탑을 찬양하는 극락조들이 새겨졌다. - P166

팔각당 몸돌 앞뒤로는 자물쇠가 잠긴 문짝과 사천왕 네 분 그리고 비천 한쌍이 조각되어 여기에 사리를 모셨고 이를 엄히 지키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데이 모든 조각들이 아주 높은 돋을새김이어서 마치 돌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사실성을 보여준다. 거기에 암수 골기와지붕의 겹처마 서까래와 연꽃무늬 수막새들 진짜 기와지붕처럼 정교하게 조각해 올려놓았다. 그 엄청난 세공이 놀랍기만하여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교한 작품이 있었던가 하는 감탄이 절로 일어난다.
곁에 있는 탑비는 비록 비석 자체는 잃었지만 돌거북받침과 용머리지붕돌 또한 당대의 명작이다.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돌거북의 네발을 보면 발톱으로 대지를 굳게 디디고 있는 모습인데 그중 오른쪽 앞발은 발바닥을 살짝 들어 올려 생동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런 훌륭한 조각은 석공 한 사람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9세기 후반 50년간엔 쌍봉사 이외에도 보림사 · 연곡사·태안사·실상사·고달사·선림원 봉암사 등에서 팔각당 사리탑의 명작들이 누가누가 잘하나 경쟁하듯 세워졌다. 하대신라 선종의 활기와 이를 지원한 지방 호족의 문화 능력이 강했기에 이아름다운 승탑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 P166

본래 승탑은 스님의 이름과 함께 고유명사가 된다. 연곡사 북부도는 ‘현각선사탑‘이고 연곡사 서부도는 ‘소요대사탑‘이라고 해야 맞다. 탑과 탑비에도 명백히 그렇게 적혀 있다. 다만 연곡사 동부도는 어느 스님인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연곡사 승탑‘이라고 하면 된다.
연곡사 승탑은 하대신라의 전형적인 팔각당 사리탑으로 형태미가 아주 날렵하다. 몸체의 위쪽이 약간 좁아져 경쾌한 상승감이 일어나고 살짝 들린 지붕돌 처마선의 맵시는 교태스러울 정도다. 혹자는 여기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미인을연상케 하기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각장식은 더없이 다양하고도 정교하다.
받침대에는 사자 여덟 마리, 몸체에는 사천왕 넷, 문짝 둘, 사리함 둘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졌고 몸체의 굄돌에는 신비로운 극락조가 날고 있다. 승탑 바로 곁에 있는 비석받침돌의 돌거북과 용머리지붕돌의 조각 솜씨 또한 생동감으로 넘친다.
그러나 비석이 사라져 어느 스님의 사리탑인지 모른다는 것은 한국 미술사와불교사의 큰 아쉬움이다. 곡성 태안사의 혜철스님 사리탑과 비슷한 면이 있어 그의 제자로 풍수에 밝았다는 도선국사의 사리탑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도선은 광양 옥룡사에서 입적하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이 주장을 내세우고 있지는못하고 있다. 누구일까? 이 아름다운 사리탑의 주인공은. - P168

명작의 조건 중 하나는 몇 번을 보아도 볼 때마다 깊은 감동이 있고, 일부러라도 그것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 명작 중 하나가 강릉 굴산사堀山寺터 당간지주이다. 드넓은 논 한가운데 버티듯 서 있는 5.4m의 육중한 돌기둥한 쌍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 없다. 이런 것이야말로 설치미술이다. 당간지주란 절집에서 당幢(깃발)을 걸기 위한 간竿(장대)을 지탱해주는 지주대로 쉽게 말하면 절기게양대 같은 것이다. 마주 보는 두 당간 허리에 구멍이 뚫려 있고 윗부분이 파인 것은 당을 고정시키기 위해 가로지르는 봉을 끼우기 위한 것이다.
통일신라의 당간지주들은 대부분 돌기둥을 곱게 다듬고 윤곽선을 단정하게새긴 것이지만 굴산사터 당간지주만은 우람한 자연석에 최소한의 인공을 가하면서정으로 쏜 자국을 그대로 남겨두어 자연스러운 형태미와 돌의 질감이 살아 있다. 현대조각에서나 볼 수 있는 텍스추어와 마티에르의 조형감각이 하대신라인 9세기에 구현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 P170

당간 자체는 사라졌지만 당간지주 높이가 5.4m라면 당간은 20m 이상 올려야 비례가 맞다. 계룡산 갑사 당간의 예에 비추어보면 아마도 지름 50cm, 높이Im 정도의 철통을 20여 개 이어 붙여 세웠을 것 같다. 꼭대기 깃발을 올리는 도르래 장치는 연꽃봉오리 또는 용머리 조각을 장식했을 것이다. 이 거대한 당간에아름다운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굴산사의 위용을 가히 짐작할 수있다.
굴산사는 하대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로 범일(810~889) 국사가 851년에개창한 절이다. 범일국사는 태어날 때부터 행적이 기이하고 도력이 높아 많은 전설을 낳았는데 세상을 떠난 뒤에는 대관령 서낭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는 대관령의 범일 국사 사당에 제사를지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당간지주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넓은 논 한가운데 있었다. 그때는 폐사지의 정취와 함께 역사적 상상력이 물씬일어났다. 그런데 요즘 길도 넓게 내고, 주변을 정비하고 나서는 오히려 그런 맛을잃었다. 유적지 보존에 환경적 고려가 절실히 요청되는 대목이다. - P170

첨성대의 형태는 신라 도기에서 기대라고 불리는 받침대 모습으로 하늘을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구조의 상징성을 보면 아래는 네모지고 위가 둥근 것은천원지방地方을 뜻하며 첨성대를 이루는 돌을 어디까지 세느냐에 다르지만총 360개에서 362개가 되니 이는 1년을 상징한다. 돌을 쌓은 27단과 기단부를합하면 28단으로 별자리의 28수와 통하고, 거기에 2단으로 된 정자석까지 합하면 30단이 되어 한 달 길이에 해당한다. 가운데 난 창문을 기준으로 아래위가각기 12단으로 나누어지니 이는 1년 12달과 24절기를 의미한다.
얼마나 절묘한 구조인가. 형태는 얼마나 아담하고 곡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첨성대는 맨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의 꼭 절반일 정도로 치밀히 설계된 것이다. 이런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첨성대를 바라보면 신라인의 과학과 수학과 예술에 절로 존경심이 일어난다. - P172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폐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정도전은 이어 <서경>의 말을 이끌어 부지런함의 미덕을 강조하고 그 역사적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그러고 나서 뼈 있는충언을 덧붙였다. "그러나 임금으로서 오직 부지런해야 하는 것만 알고 무엇에 부지런해야 하는지를 모르면 부지런하다는 것이 오히려 번거롭고 까다로움에 흘러보잘것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정도전은 옛 현인의 자세를 이끌어 이렇게 충고했다. "아침엔 정무를 보고, 낮에는 사람을 만나보고, 저녁에는 지시할 사항을 다듬고,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여야 하나니, 이것이 임금의 부지런함입니다." 쉴 땐 쉬는 것이 부지런함의 하나라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충고인가. 그리고도 무엇인가 못 미더웠던지 정도전은 한마디를 더했다. 부디 어진 이를 찾는 데 부지런하시고, 어진 이를 쓰는 데는 빨리 하십시오" 근정전에는 그런 깊은 뜻이 서려 있다. - P174

사실 그동안 봉정사 대웅전은 바로 곁에 있는 국보 제15호 극락전 건물이 워낙에 명품이어서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으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주심포 맞배지붕집의진수인 단아한 절제미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국보와 보물의 차이 때문에 더 그렇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봉정사 대웅전에서는 다포계 팔작지붕집의 웅장한 힘과 멋이 넘쳐난다. 전각내부도 화려한 가운데 경건하다. 불상 머리 위를 화려하게 치장한 보개와 그주위에 설치된 용과 봉황의 조각도 일품이다. 한마디로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은 추구하는 미학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유산을 보는 우리의 눈은 지정 등급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봉정사 요사채 뒤편에 있는 영산암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까닭은)을 찍은 곳으로 전통건축에서 마당이 지닌 미학을 환상적으로 구현한 곳이지만 겨우(?) 경상북도 민속자료(제126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대 건축가들은 봉정사 답사의 하이라이트를 국보, 보물보다도 오히려 지방문화재인 영산암으로 삼곤 한다. - P200

서양의 동양 미술사 전공자들이 한국 미술을 보는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떨어지는 마이너리그라고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미학을 갖고 있다는 견해다.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동양미술부 수석큐레이터로 30여 년간 근무했던 마이클 커닝햄은 한국 미술의 절대적 지지자 중 한 분이다. 그는 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박물관에 들어온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한다. 책이나 도록도 적었고 미국 박물관에 유물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한국 미술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79년부터 3년간 미국 주요 미술관을 순회 전시한 ‘한국 미술 5천년전‘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동양 미술 세계의 새로운 발견 같은충격이었다고 했다. - P250

20년 전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유물창고에서 <버드나무와 제비>라는 무낙관 그림을 꺼내와 보여주었는데 아주 멋있는 그림이었다. 종이와 먹을 보면 17세기로 판명되는데 국적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일본 그림은 분명 아니었다. 버드나무의 스스럼없는 필치는 조선식이고 떼 지어 나는 제비들에는 중국 냄새가 있었다. 한국 회화사가 전공인 나는 명나라 그림 같다고 했는데 동양미술사가 전공인 그는 조선 그림으로 보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이렇게 설명했다. 늙은 버드나무는 자기 머리 위에 돌출된 바위가 있는 줄 모르고 위로 자라다가 절벽에 받혀 다치기를 수없이 반복한 다음 결국 옆으로 방향을 바꾸어 이처럼 상처 입은 고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봄이 되자 싱싱한 가지를 맘껏 뻗으면서 흐드러진 아름다움을 자랑하는데 수십 마리의 제비가 나무의 생장과 봄을 축하하는 화려한 비행 축제를 벌이고 있는 그림이라면서 이런 여유로운 내용과 유머를 그는 중국 그림에선 본적이 없다면서 그 은근한 멋을 고려하면 조선 그림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 지었다.
나는 그에게 ‘졌다You win‘고 하고 내 주장을 거두어들였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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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밤이면 ‘제야의 종이 울린다. 서울의 보신각에서도 올리고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도 울린다. 제야의 종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것은 훌륭한 범중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종은 서양 종과 달리 육중한 나무 봉으로 몸체를두드려 울리게 하여 ‘땡그랑땡그랑‘ 하는 것이 아니라 ‘둥둥‘ 하고 울린다. 그중 유독 우리 좋은 맥놀이 현상의 긴 여운이 아름다워 음향학에서는 한국종Korean bell이라는 별도의 학명을 갖고 있다. 반세기 전에 주한미군 라디오방송AFKN은 전국사찰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범종소리를 녹음하여 임택근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테이프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에밀레종을 비롯하여 이미 깨져 칠 수 없는 오대산 상원사종 등 수십 개의 종소리가 들어 있는데 영어 해설 마지막엔 이런 말이나온다. ‘서양의 좋은 귀에 들리고 한국의 좋은 가슴 깊은 곳에 울린다.
종은 형태도 형태지만 역시 소리가 좋아야 한다. 우리 범종 중 최고의 명작은 통일신라 때(771년) 주조한 높이 3.7m, 무게 18.9%의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이다.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장중한 소리이면서도 옥처럼 맑은 소리를 울려내어 많은 공학자들이 그 음향 구조의 신비를 밝히는 여러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P106

이장무 박사는 종의 키와 폭의 비율이 √z=1.414의 값에 가깝고, 당좌撞座(봉이 닿는 자리)는 스위트 스팟 sweet spor이라고 해서 야구에서 홈런 칠 때 공이 방망이에 맞는 점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병호 박사는 종소리의 톤 스펙트럼을 분석한다음 음색과 음질을 채점해보니 다른 종들은 100점 만점에 50점대에 머무는데 에밀레종만은 86.6점이 나왔다고 했다.
무엇이 이런 신비로운 소리를 만들어냈을까? 에밀레종 몸체에 새겨진 1037자의 명문을 보면 "종소리란 진리의 원음인 부처님의 목소리"라고 했다. 그런 종교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몇 해 전부터 이 종을 더 이상치지 않고 있다. 종은 쳐야 녹슬지 않는다는데. 그래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릴 때면 에밀레종 소리가 더욱 그리워진다. - P106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다운 바둑판이라 할 자단목바둑판에는특이하게도화점 9개 이외에 8개가 더 찍혀 있다. 바둑해설가 박치문 씨는 17개화점은 우리나라 고유의 순장바둑에만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백제인들이 바둑을 좋아했다는 것은 개로왕이 바둑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다가 고구려에포로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바둑알은 상아로 만든 바둑돌에 붉은색과 검푸른색을 칠하고 그 위에 입에 꽃을 물고 나는 새를 선으로 새긴 다음 흰색으로 메운 것이다. 이런 기법은발루라고 하여 일본에서는 홍감아발루기자紅紺牙撥鏤碁라고 부른다. 꽃을 물고 나는 새를 새긴 기발한 발상의 디자인에는 백제 공예의 난숙함이 유감없이드러난다. 백제는 어떻게 이런 난숙한 공예문화를 갖고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장인에 대한 국가적 대접이 높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백제에선 경전을 깊이 이해하면 경학박사라고 했듯이 기와를 잘 만들면 와박사라고 했다. 무령왕비의 은팔찌에는 다리가 만들었다는 사인이 새겨져 있다. 문화는 공급자가 아니라 수요자가 만들어낸다. 공예는 사회적 수요와 대접만큼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 P108

현재까지 국보로 지정된 조선 백자는 모두 19점이다. 그중 국보 제222호 백자청화매죽무늬항아리(호림박물관 소장)는 국보 제219호 백자청화매죽무늬항아리(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와 함께 조선 초기 청화백자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거의 모든 도록에서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이 항아리는 경기도 광주 도마리, 우산리 등 조선초기 가마에서 구워진 것으로 청진동 피맛골 발굴 때 이와 똑같은 질의 백자 도편이 출토되기도 했다.
그릇의 형태를 보면 풍만한 어깨가 허리 아래로 곧게 내려뻗어 아주 당당한 느낌과 함께 안정감을 준다. 백자의 빛깔은 해맑은 상아빛으로 차분하며 청화 안료는 페르시아산 고급 회회청을 사용하여 밝은 푸른빛을 띠고 있다. 도자의 3요소인 기형, 유약, 문양 모두에서 완벽에 가깝다.
몸체에 가득 그려진 매화는 장식도안이라기보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뒷면은 매화가지 아래로 대나무가 빼곡히 그려져 있다. 당시 유행하고 있던 세한삼우도에서 매죽만으로 청순한 분위기를 그려낸 것인데 필치와 농담의 표현이 아주 능숙하다. 일반 도공의 솜씨가 아니라 전문화가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성현의 《용재총화>를 보면 도화서 화원들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백자가마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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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센소지는 ‘물방울관음‘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불화를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다. 1978년 야마토분카칸에서 처음으로 열린 특별전에는 고•려불화 52점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이 작품만은 출품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1981년에 아사히신문사에서 발간한 《고려불화> 호화도록에도 실리지 못했다. 2010년국립중앙박물관이 700년 만의 해후‘라는 기치 아래 ‘고려불화대전‘을 기획할 때도 출품을 거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이 단지 유물의 존재 여부만이라도 확인하게 해달라는 요청에 억지로 응했는데, 이 불화를 꺼내왔을 때 박물관장과 학예원이 작품에 큰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감복하여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리하여내 평생에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했던 이 전설적인 명작을 실견할 수 있었다.
‘물방울관음‘은 과연 천하의 명작이었다. 다른 수월관음도는 법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온 선재동자를 앉아서 맞이하는데, 이 ‘물방울관음‘은 자리에서일어나 오른손엔 버들가지, 왼손엔 정병을 들고 서 있는 구도다. 그 자세가 너무도고아한테 신비롭게도 관음보살의 전신이 물방울에 감싸여 있다. 혹자는 이것을 버들잎으로 보기도 하고 관음보살이 아니라 정취보살趣菩薩이라고도 하지만 본래의 도상이 무엇이든 현재의 시점에서는 ‘물방울관음‘이라는 것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본래 명작이란 사진 도판으로 익혀온 탓에 실제 작품을 보면 무덤덤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 물방울관음은 달랐다. 예리한 선묘와 품위 있는 채색은 도판에선전혀 느낄 수 없던 감동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아! 숭고하고도 아름다워라!" 라는 찬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싶어 다시 들어가 하염없이 바라보다 마지못해 박물관을 나왔다. - P12

수월관음은 아름다운 무늬를 금박으로 수놓은 붉은 법의法衣에 흰 사라(명주실로 거칠게 짠 비단)를 걸치고 반가부좌를 틀고서 용맹장부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곁에는 당신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정병에 버들가지를 꽂아 유리그릇에 받쳐 놓았고 등 뒤로는 시원스럽게 솟아오른 청죽 두 가닥, 발아래로는 흰 물결이 일렁인다. 불화 부분부분의 세세한 표현은 각 작품마다 약간씩 달라 일본 다이도쿠지 소장품에는 이채롭게도 동해용왕을 그려 넣었고 선재동자의 모습은 아주 귀엽게 폭마다 다르게 그렸다.
고려불화의 압권은 붉은 법의 위에 걸친 흰 사라의 표현에 있다. 그 기법이 얼마나 정교한지 속살까지 다 비친다. 곁에서 그림을 보던 한 중학생이 "야! 웨딩드레스를 입은 것 같다"라며 감탄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뒤이어 온 젊은 여성 관객은 ‘시스루 패션 see through fashion‘이라며 그 신기한 기법에 놀라움을 표한다. 수월관음의 우아한 자태와 화려한 복식 표현은 한국 미술사에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 P16

한국미술사 불후의 명작인 안견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이제까지 국내에서 세 번 전시되었다.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재개관할 때 보름간 전시된 것이 국내를 떠난 뒤 처음 공개된 것이고,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 전기 국보전‘ 때 두 달간 전시된 것이 두 번째이며, 2009년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9일간 전시된 것이 세 번째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남의 유물을 가져가 놓고 빌려주는데 뭐 그렇게 인색하냐고 원망할 수도있다. 그러나 소장처인 일본 뎬리대天理大도서관은 상설전시는 절대로 하지 않고대여해주는 일도 거의 없을 정도로 작품 보존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청을 받아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447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560년이 넘은 작품이다. 흔히 ‘견오백지천년百年‘이라고 해서, 비단은 오백년 가고 종이는 천 년 간다며 무생물도 수명이 있음을 말하곤 하는데<몽유도원도>는 신기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완벽해서 마치 어제 그린 그림 같다. 몽유도원도, 즉 ‘꿈속에 도원을 노닐다‘라는 이 그림의 내력은 안평대군이 발문에 밝힌 바대로 그의 꿈 이야기를 그대로 그린 것이다. - P22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는 남송의 대가인 마원풍의 산수화로 가히 명화라 할 만하다. 벼랑 위 멋들어진 소나무 아래로 난 길을 도포를 입은 한 선비가 동자와 더불어 거닐고 있다. 선비의 수염과 옷자락, 소나무가지와 가지에 매달린 넝쿨들이 같은 방향으로 바람에 나부끼고 있어 화면상에는 강한 동감이 일어나는데 소나무 너머 저 멀리 화면 맨 위쪽에는 둥근 달이 떠 있다. 여백을 살린 대각선 구도로 대단히 시정적詩情的인 작품이다.
비록 전칭으로 불리지만 조선 전기에 <송하보월도> 같은 명화가 전한다는 것은 한국 회화사의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이상좌 같은 전설적인 화가에 대해서는 마땅히 전기를 기술하는 것이 미술사가의 임무이고 도리이겠건만 그에 관한 자료가 이것뿐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 P30

《병진년화첩》에서 본격적으로 구현된 단원 산수화와 화조화의 특징은 어떤특수한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소재를 택하면서도 우리 산천의 아늑하고 편안한 모습을 한 폭의 서정적인 공간으로 잡아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단원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고 일컫는다.
<병진년화첩>을 보면 단원의 그림은 대단히 부드럽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산이나 나무줄기를 묘사한 것을 보면 필치가 아주 거칠다는 것이 눈에 띈다. 속도감마저 느껴지는 붓놀림이다. 이는 그의 필력이 능숙할 데로 능숙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처럼 스스럼없는 필치가 스스럼없이 구사될 때 단원은 가장 단원다웠다. - P45

국보·보물은 100년 이상 된 유물을 대상으로 하므로 20세기의 근대문화재는 국가지정 문화유산이 될 수 없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한 것이 등록문화재다. 등록문화재는 50년 이상 된 유물을 대상으로 한다. 18세기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19세기 추사 김정희 작품에 국보·보물이 있듯이 20세기 화가의 작품도 언젠가는 문화재가 될 것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이에 대비하여 근대미술사학계에 검토.의뢰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국민화가로 칭송되는 박수근(1914~1965)도 당연히 들어 있다. 미술사가들은 그의 대작에 속하는 60호(가로 97cm 세로 130cm) 크기의 <절구질하는 여인>과 <나무와 두 여인>을 등록문화재 대상으로 꼽았다.
그러나 박수근은 소품에 더 익숙했다. 생전에 대작을 할 기회가 적어 소품속에 자신을 완벽히 표현해왔다. 박완서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나목>이라는 소설은 한국전쟁 중 밥벌이로 
PX에서 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손수건에 초상화를 그려주던 박수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 P54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 수심엔 봄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박수근 서거 45주기 유작전‘에서 박완서 선생을 만나게 되어 소설 속 작품이 어느 것이냐고 물으니 <나무와 여인>(3호)이라고 가리켰다.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서민들의 모습은 하루를 넘긴다는 것 자체가 힘겨웠던 50년 전 우리네 삶의 표정인데 우리는 나목처럼 그것을 견디어냈고 그것을 그린그림은 어느덧 문화재가 될 정도로 세월이 훌쩍 가버렸다는 얘기다. - P54

박물관에 가면 ‘원삼국시대‘라는 표기가 있다. 한때 이것은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왜 우리나라 박물관에는 삼한시대라는 표기가 없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적 없는 ‘원삼국시대‘라는 말이 나와 학생과 일반인들을 혼동시키냐는 것이다. 당연한 문제 제기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고고학, 미술사학의 고민이다.
원삼국시대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철기시대가 전개된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까지를 일컫는다. 이 시기 한반도 북쪽에는 부여·동예 · 옥저가,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여에서 고구려가 갈라져 나왔고, 고구려의 한 갈래가 백제를 낳았고, 진한의 사로국은 신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낙동강 지역에서는 가야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남은 부족이 고대국가를 향하여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였다. 삼한시대도 아니고 삼국시대 초기만도 아니다. 결론이 삼국시대였을 뿐이다. 그래서 고 김원용 선생은 삼국정립의 기원起原.proto-type단계라는 의미로 ‘원삼국‘이라는 시대개념을 제시하였다. - P80

이 시기 문화의 체질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질그릇에 뚜렷이 나타났다. 야철술의 에너지 활용 기술을 토기 제작에 적용한 가마)는 1천 도까지 올릴수 있어 종래의 토기에서 와도기라는 회색 연질도기로 바뀌었다. 이것이 기원후 300년 무렵에 경질도기로 발전한 것이 가야 도기와 신라 도기이다.
원삼국 도기 중에는 ‘쇠뿔손잡이항아리‘라는 아주 특이한 질그릇이 있다. 어찌 보면 멕시코나 잉카의 그릇처럼 생겨 우리나라에도 저런 그릇이 있었던가 의아해하곤 한다. 이것을 한때는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라고 어렵게 부르기도 했는데 간단히 말해서 목이 긴 항아리에 한 쌍 또는 서너 개의 쇠뿔 모양 손잡이를 붙인 것이다.
쇠뿔손잡이는 기능보다도 쇠뿔 같은 힘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디자인적 변형이다. 기능만을 생각한다면 쇠뿔이 아래로 향해야 한다. 한마디로 질그릇에서도 이처럼 디자인적 과장이 일어났던 것이다. 원삼국시대는 고대국가로 가기 위해 지배층의 권위가 한껏 강조되던 시기였다. - P80

똑같은 연꽃무늬 수막새 와당인데 백제는 우아하고, 고구려는 굳세고 신라는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일본 기와는 디자인이 깔끔하고 중국 기와는 형태미가 강하다. 이것은 와당뿐만 아니라 삼국과 동아시아 미술 전반에 나타나는 미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을 연꽃무늬 와당이라는 단일 주제로 놓고 보니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유익했다.
삼국시대 건축에 언제부터 기와가 나타났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삼국사기》고구려 미천왕조를 보면, 그는 어려서 신분을 감추고 수실촌의 한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집주인이 아주 못되게 굴어 어떤 때는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워잠을 못 잔다며 어린 을불(미천왕)에게 밤새도록 연못에 ‘깨진 기왓장을 던지게 했다고 하니 그 이전부터 기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원삼국시대 와질도기가나타나는 1세기 무렵부터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삼국 중 백제 기와가 단연 돋보인다. - P84

백제는 장인을 사회적으로 우대하여 기와 잘 굽는 와공瓦工 와박사라고 했다. 많은 외박사가 아스카시대 일본에 파견되었고 신라 황룡사 건축에 초빙된 백제의 아버지는 와박사를 대동하고 갔으니 신라와 일본 와당에 백제의 영향이나타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백제와당의 백미는 8판 연꽃잎을 보드랍게 공굴리는 형태미에 있다. 유연한 볼륨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가볍게 테두리를 두르기도 했고 봉긋이 솟은 모습을 위하여 귀꽃을 살짝 뾰족이 세우기도 했다. 공굴림이나 귀꽃이 더 강했다면 그런 우아함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제 와박사들은 디자인의 절제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 P84

우리나라 미술이 지향했던 구체적인 미적 목표가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내가가장 먼저 제시하는 대답은 ‘검이불루화이불치여덟 글자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5년(기원전 4)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新作宮室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儉而不陋화려하지만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華而不侈"


위례성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 궁궐의 자태를 말한 이 여덟 글자의 평문은 백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감을 대표할 만한 명구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왕흥사 사리함, 불국사의 석가탑은 ‘검이불루‘ 하고 미륵사 서탑 사리호와 불국사 다보탑은 ‘화이불치‘ 하다는 평이 너무도 잘들어맞는다. - P97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특히 궁궐 건축의 상량문에 계속 등장한다. 고종이 경복궁 북쪽 끝에 건청궁을 짓고 그 곁에 당시로서는 현대풍을 가미한 화려한 서재로 집옥재를 지었다. <집옥재 상량문>을 보면 예의 여덟 글자를 약간 바꾸어 "검부지루화부지사儉不至陋 華不至奢"라고 했다.
조선 헌종은 21살(1847) 때 후궁 경빈김씨를 맞이하면서 새 생활공간으로 지금의 낙선재를 지으며 자신이 직접 쓴 <낙선재 상량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곱고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은 것은 과도한 규모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채색한 서까래를 놓지 않은 것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이라네."
그래서 낙선재는 궁궐의 전각이지만 단청을 입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도 낙선재가 누추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확실히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백제의 미학이자 우리 민족의 미학으로 삼을 만하다. - P97

금·은·동 사리함을 보면 한결같이 형태가 아름답다. 동사리함은 통형이고, 은사리함은 긴 목이 달린 항아리 모양이며, 금사리함은 구기자 열매 같은 예쁜 형태이다. 동사리함은 소박하고, 은사리함은 듬직하며, 금사리함은 고급 향수병으로 제격이라 생각될 정도로 고귀한 모습이다. 세 사리함의 형태는 그렇게 다르지만 뚜껑에는 모두 봉곳한 꼭지가 달려 있어 한 세트로서의 디자인적 통일성을 갖추었다.
아무리 보아도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이라는 느낌을 주면서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다‘는 백제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리함이 갖는 미술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 이는 땅속의 왕을 위한 금관의 시대에서 절대자의 분신(사리)을 모신 사리함의 시대로 전환했음을 말해준다. 백제의 공예가 고분미술에서 불교미술로 일대 전환한 것이다. - P98

오늘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백제의 아름다움에 경탄과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백제미의 실체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 것은 불과 지난 50년 동안 있었던다섯 차례의 기념비적 발굴 덕분이다. 1959년의 서산 마애불, 1971년의 무령왕릉, 1993년의 백제금동대향로, 2007년의 왕흥사 사리함 그리고 2009년 1월 익산미륵사에서 출토된 순금사리호이다.
6층까지 간신히 남아 있던 미륵사 서탑이 붕괴 위험에 놓여 해체수리하던중 1층 사리공에서 출토된 이 환상적인 사리호는 말할 수 없이 화려하면서도 고귀한 품위가 있어 왕흥사 사리함과는 정반대로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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