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나는 심하게 외로웠고 별로 활기도 없었다. 나는미술을 할 때, 나중에는 시를 짓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생기를 되찾았고, 그 속에서 자유를 발견했다. 왜냐하면 내 육체가 비물질화되고, 내 정체성이 떨구어지고, 내가 다른 삶을 사는것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모든 글이 이 자유를 인증했다. 존 키츠에 따르면 시인은 "정체성이 없다 - 시인은끊임없이 어떤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그 사람의 역할을 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은 모든 주체가 피해 가는 그 중립자,
그 합성물, 그 모호성이며, 글을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비롯하여 모든 정체성이 실종되는 덫이다". - P67

그러나 시집을 내고 시인으로 데뷔하자, 내가 무슨 글을 쓰든지 아시아 여성이라는 내 정체성을 결코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육체의 개입이 없더라도 저자로서의 내 정체성은 귀신처럼 독자에게 내 목소리가 도달되는 강도와 범위를 제약했다. 내가 독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신이 된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순진한가! 휘트먼 작품 속의 나가 다중을 담고 있다면, 내 작품속의 나는 이 나라 인구의 5.6퍼센트를 담고 있었다. 가슴으로 진정하게 느껴지는 내용이라면 뭐든지 써도 좋으나 기왕 아시아인이니 아시아인에 관한 주제를 꾸준히 다루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독자, 스승, 편집자 등이 여러 방식으로 내게 조언했다. 아시아인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예컨대 자연에 관해서 쓰면 자연에 관해서 쓰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할 테니 내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는가. - P68

시인 프라기타 샤마가 말한 대로, 미국인은 죽음을 애도하는 일도 기한을 정해놓고 하듯 인종에 관해서도 유효 기간을 설정한다. 미국인들은 일정 기한이 지나면 우리가 인종 문제를 극복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비록 나는 회의적이지만, 이 기회에 우리가 미국 문학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자동으로 규정하는 낡은인종 서사, 우리의 삶을 백인 청중의 구미에 맞추면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다양한 현실을 삭제해버리는 낡은 인종 서사를 갈아치우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어진 공식에 따라 우리 자신을설명하는 일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 P75

지난 20년 동안, 그리고 아주 최근까지도, 줌파라히리의 작품들은 아시아계 이민자는 순응적인 노력가라는 환상을 지탱하는 인종적 소설의 전형이었다. 내 생각에 이것은독자를 몰입시키는 이야기꾼인 라히리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이민자의 삶에 대한 "단일한 이야기"로 포지셔닝했던 출판업계의 잘못이다. 라히리는 문화적 차이를 찾는 백인독자의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딱 적당할 수준으로 편안한 인종적소품을 이용해 무덤덤하고 억제된 어조로 글을 썼으며, 작품속 인물들은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고 그저 행동한다. "나는..은행 계좌를 트고, 우체국 사서함을 빌리고, 울워스 마트에 가서플라스틱 그릇 하나와 수저 하나를 샀다." 라히리 작품에 나오는 인물은 언제나 절제되고 그 어떤 내면 지향성도 회피한다.
이것은 제인 후가 『뉴요커』 기고문에서 지적한 대로 독자에게 - P75

아시아성(사실 남아시아보다는 동아시아적 성격)을 암시하는상당히 전형적인 문학적 정서가 되어버렸다.
라히리의 단편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에서 주인공은 콜카타에서 보스턴으로 이민 와 집 주인인 백인 할머니와 함께사는데, 할머니는 그를 어린 소년처럼 취급한다. 주인공은 그런 구식 인종주의에도 개의치 않고 할머니를 좋아하게 되고 그들은 암묵적으로 문화적 이해에 도달한다. 나중에 주인공의 아내가 보스턴으로 와서 합류하고 그들은 놀랄 만큼 쉽게 동화하게되며 "우리는 이제 미국 시민이야" - 아들은 자라서 하버드대학에 입학한다.
라히리의 소설은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show, don‘t tell)라는 문예창작 과정의 교리를 대체로 잘 따르고 있다. 그렇게 하면 독자는 등장인물의 고통을 체험하면서도, 수전 손택이 말한 대로 자신의 특권을 등장인물의 고통과 "동일한 지도" 위에 위치 매김하지 않아도 된다. 등장인물의 내면적 생각이 제거되었으므로 독자는 빈번한 사견 개입에 방해받지 않고 등장인물의 의식이라는 조종석에 앉아 영화 보듯 등장인물의 시각을 체험할수 있다. - P76

물론 유색인종 작가는 인종적 트라우마를 이야기해야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백인이 상상하는 대로 구성되어왔다. 출판업계는 작가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사적인것으로 간주하기를 기대한다. 즉 등장인물이 특이한 가족 관계나 역사적 비극에 의해 시험에 들었다가 결국 자기 긍정이라는 계시에 도달하는 이야기를 기대한다.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들의 소설을 보면 작가가 트라우마의 배경을 머나먼 고국 땅이나 고립된 아시아계 가족 내부로 설정하여, 그들의 아픔이 미국의 제국주의 지정학이나 미국 내 인종주의에 대한 새삼스러운증거가 아님을 확실히 해두는 작품이 많다. 그들에게 고통을주는 외부적 요인은 -가부장적인 아시아인 아버지, 과거 시대의 백인들- 독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충분히 멀찌감치 설정한다. - P77

인종에 관한 글쓰기는 이제까지 우리를 지워버린 백인 자본주의 인프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점에서 격렬한 비판을 담지만, 우리의 내면이 모순들로 뒤엉켜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이기도 하다. 나는 손쉬운 극복의 서사에는 저항하지만 우리가 인종 불평등을 극복할 거라는 신념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민자가 고생하는 감상적인 이야기들은 짜증스럽지만 한국인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심하게 트라우마를 겪은 민족에 속한다. 내 안에 깃든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고정 관념을 넘어서려고 시도하다 보면 내가 어떻게(how)인식되는지가 내가 누구인지(who)에 내재한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인종에 관해 진실한 글을 쓰기 위해, 나는 거의 서사를 거슬러 글을 써야 한다. 인종화된 마음은 프란츠 파농이 말한 대로 "지옥 같은 악순환"(infernal circle)이기 때문이다. - P95

퀴어이론가 캐서린 본드 스톡턴은 퀴어 아동이 어떻게 옆으로(sideways) 자라는지" 적으면서, 퀴어의 삶이 흔히 결혼과 출산이라는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말한다. 스톡턴은 유색 인종 아동 역시 옆으로 자라는데 그들의 어린 시절도 퀴어 아동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백인 아동이라는 모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어린시절을 옆으로 보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지금도 그때를 돌아보면, 어린 소녀가 내 시선을 피해 숨으면서 나의 기억들을 깜박거리는 환상의 그림자놀이로 유도한다.
옆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것을 함축한다. "곁눈질"은 의심, 의혹, 심지어 경멸을 암시한다. 나는 사춘기 때 학교에서 온갖 성장 소설을 잔뜩 접했다. 교사가 비타민 풍부한 채소처럼강권하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과는 달리, 성장 소설은 우리도 이제 주인공과 공감할 수 있을 연령이니 좋아할 것으로 여겼다. - P101

번스틴에 따르면 인종적 순수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상태"로서 "음, 나는 인종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데"와 같은 언급속에 엉켜 있으며, 여기서 ‘나‘는 보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순수는 하나의 특권이자 인지 장애, 즉 잘 보호된 무지의 상태이며, 일단 이것이 성인기까지 오래 이어지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굳어진다. 순수는 성적인 것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굳이 특정해서 "표시되지 않으며"(unmarked) "자유롭게 본연의 너와 나가 될 수 있다"라는 신념에 기대 사회경제적 위계 속에 놓인 자신의 지위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런 순수가초래한 아이러니한 결과는 백인이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학자 찰스 밀스는 말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인종적 서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집요하게 상기당하고 그 위치 때문에 심지어 범죄자가 되면 순수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리처드 프라이어가 농담한 대로다. "나는 여덟 살때까지 아이였어요. 그 후 깜둥이가 되었지요." - P108

순수를 뒤집으면 수치심이 된다. 아담과 하와가 순수를 잃었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수치심을 느꼈다". 수치심이란 원숭이의 뻘건 엉덩이처럼 훤하게 노출되었다는 것을 매섭고 따갑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낸 신경증적인 상처다.
수치심을 일으킨 공격자가 내 삶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계속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내 그림자를 그자로 착각하여 몸을 움츠린다. 수치심은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같아서, 집밖으로 잠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수용체가 자극받아 나는 반응한다. 체면을 잃는 것과는 다르다. 수치심은 내 얼굴을 깔고 앉아버린다. - P109

사람들은 흔히 수치심을 아시아적인 속성과 유교적인 명예 체계,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가해한 수치심의 의례와 연결짓지만, 내가 말하는 수치심은 그 수치심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수치심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상호 관계에 영향을 주는 권력의 역학을 뼈아프게 인식하는것이며, 그 서열에서 내가 피해자 -또는 가해자로서 점하는위치를 깨닫고 몸이 오그라들도록 느끼는 치욕이다. 나는 개들이 목에 두르는 수치의 깔때기이다. 나는 남자 소변기에 부착하는 수치의 변기 탈취제다. 이 감정이 내 정체성을 갉아먹어 결국 몸은 껍데기만 남고 나는 하얗게 불타오르는 수치심 덩어리로화한다. - P109

수치심은 나 자신을 1인칭과 3인칭으로 분리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사르트르가 쓴 대로 "타자가 나를 보는 대로" 나를 인식하는 능력이다. 다 자란 지금에야 나는 어렸던 내가 의도치않게 저지른 불복종에서 유머를 발견한다. 양반다리를 하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이야기에 열중하는 여섯 살짜리들에게 교사가 책을 읽어주는데 얌전하고 어린 아시아 소녀가 난데없이 이야기 중간에 태연하게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간다. 이듬해, 그 얌전하고 어린 아시아 소녀는 포르노 티셔츠를 입고 등교한다.

인종주의의 한 가지 특징은 아동을 성인처럼취급하고 성인을 아동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을 유발한다. 우리 - P111

부모가 백인 성인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당하는 것을 수없이보았다. 그런 일이 너무 관행처럼 발생해서, 엄마가 어떤식으로든 백인 성인과 상대할 때면 나는 늘 바짝 경계하면서중간에 끼어들거나 엄마를 옆으로 잡아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할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없기때문이다.
이 나라에서 아시아인으로 사는 굴욕은 잘 알려져 있지않다. 우리는 아시아인은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에 주눅이들어 있다. 근면성을 발휘하면 존엄성으로 보상받으리라 믿고 묵묵하게 열심히 일하지만, 근면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만들 뿐이다. 우리가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 우리의 수치심은억압적인 아시아 문화와 우리가 떠나 온 나라가 초래한 것이되고 미국은 우리에게 오로지 기회를 주었을 뿐이라는 신화를 영구화하게 된다. 아시아인이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은 너무나 은근히 퍼져 있어서,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도 남들에 비하면 나쁜 처지가 아니었다는 의심에 시달린다. 그러나 인종적 트라우마는 누가 앞서고 뒤지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문제는 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이례적이 아니라 실은 오히려 전형적이었다는 데 있다. - P112

시인 바누 카필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극우파가 득세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려면 그냥 눈만 감으면 된다. 그리고 내 어린시절을 회상하면 된다." 친구들도 그 심정에 똑같이 공감했다.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촉발되었다고했다. 아이들은 잔인하다. 아이들은 집에서 부모에게 들은 인종차별적인 개소리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직설적인 방식으로 앵무새처럼 재생한다. 트럼프 행정부 밑에서 요즘 인종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아이들 사이에서 인종주의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기억의 촉발은 꼭 특정한인종차별 사건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을 되살린다.
한 오라기의 두려움과 수치심, 동물처럼 바짝 긴장한 경계심같은 것 말이다. 순수한 상태로 향수에 젖어 회귀하는 것이든 불안과 걱정을 갑작스럽게 떠올리는 것이든 간에, 어린 시절은 하나의 정신 상태다. 어린 날의 순수가 보호받고 위안받을때의 정신 상태라면, 어린 날의 불안은 그 사람이 최소한으로만 보호받고 위안받는다고 느낄 때의 정신 상태다. - P113

가족이 과테말라에서 왔건, 아프가니스탄에서왔건, 한국에서 왔건, 1965년 이후의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역사는 미국을 넘어서 각자의 출신국으로 확장된다. 그곳에서 우리의 동족들은 서구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미국이 세우거나 지원한 독재 정권에 의한 대량 살상을 겪었다. 미국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애쓰느라고 우리는 인생에서 제2의 기회를 선사받은양 황송해한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뿌리는 이 나라가 우리에게 부여한 기회가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의 자본주의적 확장이 우리의 조국의 피를 빨아 부를 챙긴 방식이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백인 순수의 유아론을 뒤집어, 우리의 국민 의식이 그 이란계 미국인 소년 같은 아이들의 정신과 더 비슷한 모습이 되도록 일조할 작정이다. 그 아이의 정신은 글도 깨치기 전에 벌써 이 나라가 어떤 폭력을 가할 수있는지를 인지하는 무방비 상태의 의식이며, 역사에 시달리는 아이의 의식이 언젠가 다수를 차지할 때 새하얀 이미지들을 퇴색시킬 것이 틀림없다. - P126

나는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지 않을 때면 걷잡을 수 없이 거만했다. 우리 셋 모두 그랬다. 우리는 백인 남성의 자신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감은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가면서 급속히 위축되었다.
그때 우리는 경력을 쌓는 모든 단계에서 매번 과소평가 당했기때문에 각자 능력을 되풀이해서 증명해야 했다. 그렇더라도 나는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고전했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우정으로 배양된 창의적 상상력에 꾸준히 충실할 수있었으며, 그 상상력은 우리의 불만족스러운 의식의 진실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엄밀성과 깊이에 의해 다듬어졌다. 다른사람은 아무도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예술가가 되라고 촉구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우리였다. - P203

1982년 11월 5일, 그러니까 그해 가을 들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추워진 날에 31세의 미술가 겸 시인 테레사 학경 차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직물 부서에서 사직했다. 그는 하얀앙고라 스웨터에 빨간 가죽 코트를 입고 적갈색 베레모를 썼다. 가죽 장갑도 끼고 양말도 두 겹으로 신었다. 그는 다운타운 행지하철을 타고 허드슨 거리에 있는 비영리 갤러리 아티스츠스페이스(Artists Space)에 가서, 큐레이터 발레리 스미스가 준비 중인 합동 전시회용 사진 작품을 큼직한 서류 봉투에 넣어 제출했다. 차의 사진은 갖가지 손짓을 하는 손을 소재로 했으며, 고대 중국 판화에서 근대 프랑스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처에서 얻은 이미지를 편집하고 재현했다. 스미스는 뉴욕주 대법원에서 증언할 때 차가 피로하고 긴장한 모습이었으며 15분동안 머물면서 전시회 홍보물에 서명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차가 아티스츠 스페이스에서 4시경에 떠났다고 했다. 갤러리에서 나가 북동쪽으로 걸어갔다고 했다. - P207

여기서부터 나는 16밀리 영화를 보듯 차를 상상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불어오는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고서, 판자로 창문을 막은 버려진 주철 건물과 도로 복공판 위를 터덜거리며 굴러가는 구식 쉐보레 카프리스 택시들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친다. 그가 입은 가죽 코트의 붉은색이 흐릿하고 뿌연 영화 조명 속에서 바래 보인다. 나는 그가 자신의 책 「딕테』를 교정하며 여러 시간을 보낸 화이트 거리의 태넘 출판사 사무실을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 다음 브로드웨이 거리에서 한때 배 돛에 쓰는 천을 짜는 공장이었던 하얀 주철 건물을 끼고 좌회전한다. 그로부터 25년 후 나는 남편과 그 건물에서 임대료 - P207

안정화 제도의 적용을 받는 재임대 아파트에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심사한 경연대회에 출품된 시들을 거대한 봉지 두 개에 담아 재활용 쓰레기로 거둬 가라고 그리로 끌어다 놓을 것이며, 그 봉지들은 밤사이 활짝 열릴 것이다. 그러면 내가 사는 블록은 색종이 가루 흩날리는 축하 퍼레이드처럼 시로 뒤덮일 것이다. 시가 자동차 앞 유리와 청바지 상점 진열장에 붙고, 자전거거치대 주변에 구깃구깃 널리고, 나무 위에 천막처럼 걸리고,
우리 건물 건너편 아파트 정면에서 태극권을 연습하는 중국인 할머니들의 발치에도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시가 없었다.
텅 빈 하역장에 쓰레기만 쌓여갈 뿐이었다.
차는 뉴욕에 지쳐 있어2년 전이 - P208

차는 뉴욕에 지쳐 있었다. 그는 개념미술계에 진입하려고2년 전인 1980년에 남편 리처드와 함께 뉴욕으로 이사 왔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 미술계는 줄리언 슈나벨, 프란체스코클레멘테, 데이비드 살리 같은 스타 미술가들의 번쩍거리는 전성시대에 평정당해 이미 활기를 잃었다. 오빠 존에게 보낸 1982년 6월 25일 자 서한에서 차는 성공하려면 "도덕의 찌꺼기, 돈, 기생충 같은 실존 상태"를 감수해야 하는데 "솔직히 구역질이난다"라고 적고 있다.
그날 밤 차는 절친한 친구 수전 울프, 샌디 플리터먼 -루이스와 만나 퍼블릭 극장에서 영화감독 듀오 장마리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의 영화 한 편을 감상할 계획이었다. 뉴욕이 불만스럽기는 해도 경력 면에서 슬슬 진전을 보이고있었다. 그는 12월에 열릴 합동 전시회에 참여할 예정이었고, 지난 몇 년 작업한 책 『딕테』도 막 출간된 참이었다. 존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 P208

느끼는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자유롭다고 느끼고, 또 벌거벗은 느낌도 들어. 원고는 작업할 시간이 없을 때조차 내 몸에서 물리적으로 떠난 적이 없어. 어디든 원고를 휴대했고 그야말로 잘 때도 끼고 잤는데, 이제 완성됐어... 근무 시간과 휴식 시간 사이에, 자는 동안에, 리처드와 말다툼하는 사이사이에, 이 직업, 실업, 가난이 초래한 그 모든 미친 절망감속에서도 일을 조금씩 차곡차곡 진행해서 뭔가 작업이 완성된 것을 보면 나는 언제나 깜짝 놀라."
그날 친구들과 영화 보러 가기 전에 라파예트 거리의 퍽(Puck) 빌딩에서 5시에 남편과 만나야 했다. 남편은 그 건물의 리모델링 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했다. 퍽 빌딩은 붉은벽돌로 지은 거대한 기념비적 건축물로 소호 지역의 한 블록을 통째로 차지한다. 9층 높이로 솟은 그 건물은 아치형 창문과 밝은청록색 창틀을 갖추었다. 건물 정면 출입구 위에는 장난꾸러기 아기 요정 퍽이 실크해트를 쓰고 열린 프록코트 사이로 통통한배를 드러낸 모습을 형상화한 금빛 소형 동상이 올려져 있다.
- P209

퍽이 만년필을 지팡이처럼 짚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유유히 응시한다. 일몰 직후에 차가 멀베리 거리 쪽으로 난 퍽 빌딩 뒷문으로 들어가는데 경비원 조지프 산자가 보였다.

내가 최초로 차의 『딕테」를 접한 것은 1996년 오벌린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시 과목을 수강했다. 객원교수로 온 시인 명미 킴이 가르치는 과목으로,
나는 그의 지성을 존경했고 그의 시를 흉내 내려고 노력했다. - P209

킴이 「딕테」를 읽기 과제로 냈는데 나는 딕테』의 내용보다도 그 형식에 더 호기심이 일었다. 분류는 자서전으로 되어 있으나「딕테」는 회고록, 시, 에세이, 도표, 사진을 혼합한 브리콜라주에 더 가까웠다.
지금은 사라진 태넘 출판사에서 1982년에 출간된 『딕테」는 어머니들과 순국자들, 혁명가들과 항쟁들에 관한 책이다. 그리스신화의 아홉 뮤즈의 이름을 따서 아홉 개의 장으로 나뉜 『딕테」는 저자의 어머니가 겪은 이야기,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대일 항쟁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고문받고 옥사한 17세의 순국열사 유관순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의 잔혹상을 기록한다. 또 다른 장에서는 잔 다르크를 호출하되 프랑스 수녀 성 테레즈드리지외 등 다른 여성들에 의해 재현된 인물로서 그려낸다. - P210

차는 전통적인 서사를 피하고 그 대신 내가 볼 때 일종의구조주의 영화 대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구조를 취한다. 장면은 무대 연출처럼 묘사된다. 시는 영화 중간에 들어가는독백처럼 배치된다. 환히 빛나는 하얀 화면처럼 보이도록 영화스틸컷 사이사이에 텅 빈 백지가 삽입된다. 차는 딕테」를 어떻게 풀이해야 할지 전혀 안내하지 않는다. 프랑스어를 번역하거나 이승만 대통령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의 맥락을 짚어주거나 칼 드레이어 감독의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에 나오는 프랑스 배우 르네 잔 팔코네티의 사진에 설명 붙이기를거부한다. 독자는 나름대로 단서를 연결해 퍼즐을 풀어가는 탐정이 된다.
당시 나는 이래저래 접한 일부 아시아계 미국인 소설과 시에 공감하지 못했다. 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해 하는 말이지만 - P210

작품이 마치 백인 배우에 의해 연기된 듯 진정성이 느껴지지않았다. 혹시 영어가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한테는그게 확실히 문젯거리였다. 영어는 단조여야 할 체험을 장조로 바꾸어놓았다. 영어로 써놓으면 한국어에 서린 친밀감과 우수가 사라졌다. 영어는 내가 어릴 때부터 세관 직원, 위협적인 교사,
홀마크 카드와 연관 짓던 언어였다. 영어를 배운 지 그렇게 여러 해가 흘렀어도 영어로 글을 쓰려면 아직도 빈칸 채우기를하거나 남의 원문을 재인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어는 자신의 언어가 아니고, 자신의 의식을 결코 진정으로 반영할 수 없고, 하나의 표현 형식인 만큼이나 자신의 의식에 지워진 부담이라는 것을 내비쳤다는 점에서 차가 구사한 언어는 나의 언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딕테』가 진실하게 다가왔다. - P211

차가 뉴욕에서 경비원에게 강간 살해당했다는 것을 킴의 수업에서 처음 들었다. 킴이 그 이야기를 어떤방식으로 전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때 들은 사실관계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딕테」를 다시 읽어보거나, 교재로 삼아 가르치거나, 강연회에서 소개하면서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차의 죽음은 내가 ‘딕테」를 읽고 이해하는데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책에 신들린 듯한 예언자적 아우라를 부여했다. 어쨌거나 『딕테』는 폭력적인 죽음을 맞은 젊은 여성들에 관한 책이 아니던가. 내가 강의나 강연에서는 그런 - P211

식의 해석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몇 년 전 차에 관해 논평하는 글을 쓰면서 나는 차가 강간살해당한 날짜를 확인하기로 했다. 차에 관한 문헌을 뒤지다가 그 범죄를 다룬 문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어쩌다 살해가 언급되는 경우에도 학자들은 간단히 한 문장 정도를 할애해 그것을 불쾌한 사실로 취급하고 넘어갔으며 서둘러「딕테」의 서사적 "불확정성"을 논하기에 바빴다. 더 황당한 것은 차가 강간도 당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너무나 집요하게 그 사실이 누락되어, 나는 차가 정말로 성폭행도 당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재판기록까지 들춰봐야했다. 그 사실을 몰랐나? 조심스러워서 그랬나? 살인은 범죄통계쯤으로 둔감하게 인식되지만, 그게 강간이라는 단어와 합쳐지면 여성의 육체를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한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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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를 읽기 전에 ˝마이너 필링스˝를 다시 읽기로한다.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다. 내용을 다 잊어서인가, 새롭게 읽히는 시야탓인가. 모르겠다... 끝까지 읽어보면 알게될까?

「마이너 필링스」는 나 자신의 인종 정체성을 내 나름대로솔직하게 성찰하고 따져본 결과물이다. 이 책은 개인적인 수필집이다. 이렇게 미국에서 보이지 않는 몸 안에 살면서 느끼는 나 자신의 상반된 감정을 가능하면 투명하게 풀어놓고자한다. 또한 이 책은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 겪는 세대 간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다룬다. 우리 부모님은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 무관심했으며 오로지 앞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고 무엇이 우리에게 상처나심지어 굴욕을 주었는지 밝혀내지 않으면 진전이 있을 수 없다.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들이 겪는 정신 질환 문제를 숨기지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인들은 정신 건강 문제를 수치로여겨서 그것이 개인적, 사회적 치유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 P14

마지막으로 이 책은 창의력과 예술 창작에 관해서 다룬다. 나는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항상 지지해주신 부모님을 고맙게생각한다. 부모님은 내가 가려는 길을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아시아계 미국인 작가로 성공해보려고 힘겹게 고투하는 내내 무척이나 필요했던 격려를 보내주셨다.
나는 남들에게 좀 더 이해받고 눈에 덜 안 보이는 존재가되고자 이 책을 썼다. 한국 독자들이 마이너 필링스』를 읽으면서 아시아인을 예속시켜온 백인 우월주의의 복잡하고도 견고한 근원을 더 잘 파악하게 됐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 책 속에서 독자들이 자신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21년 7월
캐시 박홍 - P15

한 공간에 아시아인이 너무 많으면 짜증이난다. 이 아시아인들을 다 누가 들여보낸 거야? 속으로 투덜거린다. 다른 아시아인들과 함께 있으면 결속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경계선이 흐려지고 한 무리로 뭉뚱그려져서 더 열등해지는기분이 든다.
자기를 혐오하는 아시아인은 내 세대를 끝으로 사라질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런 생각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가르친 세라 로런스 칼리지의 학생들은 맹렬하여 -자율적이고 정치적 참여도 열심히 하고 똑똑했다- 참 다행이다, 이 학생들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아시아인 2.0이다. 고함을 내지를 준비가 된 아시아 여성들이다, 라고 생각했다.
또 그러다가도 다른 대학교 강의실에 가보면 머리만 예쁘게 매만지고 아무 말 없이 생쥐처럼 얌전히 앉은 아시아 여학생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는 닦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 입 좀 열어라! 안 그러면 저들에게 완전히 짓밟힌다고! - P27

1917년 미국 정부는 이민 금지를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 적용했으며, 필리핀은 한때 미국의 식민지였는데도 필리핀 사람들의 이민마저 제한했다.
기본적으로 그런 이민 금지 조치는 전 세계적 규모의 인종 분리정책이었다. 1965년에 미국이 "하급 인종"을 다시 받아들이게된 것은 소련과 이념 경쟁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홍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가난한 비서구권 국가에서 일렁이는공산주의의 물결을 막아내려면 인종차별적인 짐 크로법의 이미지를 지우고 재부팅해 미국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해야했다. 해결책은 비백인의 미국 유입을 허락해 직접 실상을 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모범 소수자 신화가 대중화되어 공산주의자들 - 그리고 흑인- 을 견제하는 작업에이용되었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성공 신화를 퍼뜨려 자본주의를 선전하고 흑인 민권 운동을 깎아내렸다. 우리 아시아인은 뭘 요구하지도 않고, 근면하고, 절대로 정부에 손을 내밀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었다. 고분고분하게 일만 열심히 하면 차별은없다며, 저들은 우리를 안심시켰다. - P42

미국의 인종 구분에서 이 부분이 바로 우스운지점이다. 일본이 한때 한국과 중국의 일부를 식민지로 삼았고2차 세계대전에서 필리핀을 침략했어도 상관없다. 인도와파키스탄이 카슈미르 지방을 둘러싸고 오랜 세월 유혈 영토분쟁을 일으켰든, 라오스가 베트남전쟁 후 몽족을 체계적으로학살했든, 알 바 아니다. 너의 민족이 다른 아시아 민족과 어떤권력 다툼을 벌였든 -그 분쟁의 대부분은 서구 제국주의 및냉전의 영향으로 발생했다-  차이에 무지한 미국인들에 의해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직에 당선된 직후 아시아인을 겨냥한 증오 범죄가 급증했는데, 대개는 그리고 특별히 무슬림이나 무슬림 같아 보이는 아시아인이 표적이 되었다. 2017년 어느 백인 우월주의자가 인도인 힌두교도 기술자두 명을 이란 테러리스트로 착각해서 사살했다. 그다음 달에는 어느 인도인 시크교도가 시애틀 교외의 자택 차고 진입로 밖에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소리와 함께 총격을 당했다. - P43

작가 제프 창은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싶다"라고 적으면서,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도 그 불확실함에 동의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아시아계 미국인 의식이라는 관념은 도대체 존재하는가? 그것은 W. E. B. 뒤부아가 한 세기도 더 전에 확립한 이중의식 같은 걸까?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딱지에 칠해진 페인트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이 용어는 거추장스럽고, 버겁고, 나의 존재 위로 어색하게 올라앉아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 운동가들이 블랙팬서와 손잡고 저항운동을 벌였던 1960년대 말 이후로 우리만의 대중운동이라고 일컬을만한 것이 없었다. 쓰기가 조심스러운 "우리"라는 대명사는앞으로 하나의 공통된 집합체로 결속될 것인가? 아니면 갈라진 상태로 우리 중 일부는 여전히 "외국인"이나 "갈색인"(brown:인종 범주라기보다는 피부가 갈색인 중남미,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계 사람들을 아우르는 용어로 최근 영미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옮긴이)으로 남고, 다른 일부는 부를 늘리거나 인종 간 결혼으로 백인 세상에 "입장할" 것인가? - P50

나는 "다음은 아시아인이 백인이 될 차례"라는 소리를 들으면 "백인이 될"을 "사라질"로 교체한다. 다음은ㅈ아시아인이 사라질 차례다. 우리는 성취가 대단하고 법을 잘지킨다는 평판을 듣다가 기억상실의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권력자가 되지 못하고 그저 권력에 흡수될 것이고,
백인의 권력을 나눠 갖지 못하고 우리의 조상을 착취한 백인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인종 정체성은 쟁점에서 벗어나며, 괴롭힘을 당하거나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매번 발언을 방해받는 것도 인종 정체성과는 무관한 거라고 - P57

이 나라는 우긴다. 우리 인종은 심지어 이 나라와도 무관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론조사에서 흔히 "기타"로 분류되고 신고된 강간, 직장 내 차별, 가정폭력 사건의 인종별 집계에서도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사회적 신호를 박탈당해 나의 행동을 타인과의 관계에 비추어 가늠할 수단이 없으니 유령 취급을 당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행동하면 좋았을지, 무슨 말을하면 좋았을지 내 생각을 샅샅이 점검한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 자아는 자유 낙하하는데 초자아는 무한대로 커져서, 나라는 존재는 부족하다고, 결코 충분치 못하다고 다그친다. 그러므로 더 잘하고, 더 잘되려고 강박적으로 노력하며, 자기 이익이라는 이 나라의 복음성가를 맹목적으로 따라 부르고, 내 순가치를 늘려 내 개인적 가치를 입증해 보이는 짓을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한다. - P58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저서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농담을 경향성 없는 농담과 경향성 있는 농담의 두 범주로 분류한다. 경향성이 없는 농담은 아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들려주듯 무해하고 무독하다. 경향성을 갖는 농담은 공격적이거나 저속하거나 아니면 둘 다여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억눌린 부분을 캐낸다. 1940년대 미국 흑인 연예인들은 무대뒤에서 터무니없이 과장된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런 농담을 가리켜 ‘거짓말‘이라고 불렀다. 그 ‘거짓말‘은 경향성을 지녔으며, 고지식한 백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길모퉁이, 당구장, 이발소에서 구전되었다. 프라이어는 이야기를 왜곡하고, 시끄럽게 불평하고, 큰소리치고, 볼링핀이든 오르가슴에 이른촌놈이든 닥치는 대로 흉내 내며 -거짓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프라이어가 들려주는 거짓말은 내가 당시 읽고 있던 대부분의 시와 소설보다 인종에 관해서 솔직했다. - P62

우리 시인들은 청중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시인들도 위상에 집착할 수 있고 내가 알기로 남의 인정을 무척이나 받고 싶어 한다. 환심을 살 청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시인들이 왜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외부인들은 어리둥절할 수 있다. 사실 시인의 청중은 제도다. 우리는 학계, 심사위원단, 펠로십 제도라는 고등한 관할권에 의존하여 사회적 자본을 획득한다. 수상 제도를 거치는 것은 시인이 주류적 성공에 이르는 소중한 길이며, 수상 결과는심사위원단이 공들여 이뤄낸 타협에 의해 결정된다. 이 타협은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수상작에 아무 위험성이 없음을보장한다.
프라이어를 보며 나는 내가 아직도 그 제도를 상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리기 어려운 습관이었다. 나는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양육되고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이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더라도, 그것은 백인의 환심을 사고싶어 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피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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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며, 대다수는 그중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현재의 상태에서 성공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하리라는 것을깨닫는 사람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을 합리화하고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는 시점은 놀랍도록 일러서, 대체로 스무 살이 되기 전에도달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또한 서른에서 마흔 살 사이에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일부 사람들은 출생 환경이나 그 자신의야망, 그리고 재능에 힘입어 대략 쉰 전후에 비슷한 깨달음을 얻는데, 그 정도 나이에 이르면 이러한 소강도 그렇게 끔찍해 보이지 않는 법이다. - P387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아의 상승과 확장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말이다. 김성수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도내 네 개 군에 걸쳐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옥한 논밭을 상속받을 부잣집 장손 신분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어느 장관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으면서 바로 이 범주에 속한 남자가 되었다. 아들이 없었던 성수의 장인은 당시 관례대로 남자 친척을 양자로 삼는 대신 자신의 딸에게 모든 재산을 다물려주었다. 게다가 바로 그 이듬해, 역시 외아들이었던 성수의 사촌 형제가 예쁘고 젊은 정부와 관계를 갖던 중 의문의 복상사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삼촌이 아직 살아 있긴 했지만 성수는 그의 재산까지 물려받을 후계자가 되었고, 이렇게 한 가족 안에서 두 갈래로뻗어나갔던 부는 성수에게로 우아하게 다시 돌아와 결합하였다. - P388

성수는 자신의 비범한 행운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천박하거나 무지하지 않았다. 가끔 그는 인생이 불공평할 정도로 자신에게 관대하다고 느끼곤 했다. 쉰한 살, 중년의 활력이 정점에 이른 그는 여전히사무실에 출입하며 정기적으로 책을 출간했다. 많은 또래 동료들처럼 방황하거나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경기가 침체하고가산이 줄어들면서 성수의 지인 중 상당수는 적절한 직업을 찾지 못한 채 소속도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녔고, 일부는 삶의 의지조차 잃은 채였다. 그의 친구였던 극작가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한것도 벌써 3년 전이었다. 성수는 잠시 슬픔에 잠기긴 했지만, 사실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연민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은, 결국 그 모든 것을 용케 피한 - P388

자신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는 성수의 믿음을 더욱 단단히 만들 뿐이었다. 경성 시내의 모든 이가 성수를 알아보고 그를 존경했다. 지하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만큼은 예외였지만, 어차피 그들은곧 정부의 단속에 무릎을 꿇을 처지였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성수의 마음을 불안케 했다. 천문학적으로 보이는 그의 재산이 꽤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가는 듯 보인다는 점이었다. 성수 자신도 늘 돈 쓰는 재미를 알았고, 고급 식당이나 옷, 여자에 들이는 비용을 줄일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외동아들이자신을 본받아 가산을 탕진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을 쓰게 될지는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아들놈은 성수가 했던 그 모든 방탕한 짓거리를 훨씬 더 큰 규모로 벌였을 뿐 아니라, 도박과 아편이라는 새로운 폐해까지 더했다. 성수는 이미 부유한 마을 두어 곳과 그에 딸린 농지 가격에 맞먹을 만큼 막대한 아들의 빚을 갚아준 터였다. 이제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 P389

군중이 일순간에 조용해졌고 모든 시선은 갑자기 주변보다 더 밝아진 성당 중앙의 입구로 향했다.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음에도 신부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워, 촛불만 켜진 어두운 신도석사이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 자신이 지닌 빛을 환하게 내쏘는 듯했다. 모든 하객이 일순 가슴을 아리게 하는 아픔을 느꼈고, 몇몇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다. 한 여자의 아름다움이 그처럼 마음을 순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 누가 알았을까.
"환하게 뜬 달을 보는 것 같아…... 월향 언니 이름처럼 말이야."
옥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 순간 신부를 바라보지 않는 이는 딱 한 사람, 오직 정호뿐이었다. 그는 자신과 바싹 붙어 앉은 옥희의 이마가 그리는 곡선을 그리고 그의 검은 눈, 슬픔과 기쁨이 똑같은 깊이로 차올라 반짝이는 저두 개의 우물을 자신의 영원한 기억에 새겨 넣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옥희의 스웨터에 감싸인 채 나란히 솟은 한 쌍의 가느다란 어깨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저 옷 안에 감춰진 맨살까지 그려지는 듯했다. 만일 장의자 등받이를 따라 팔을 뻗어 옥희의 아름다운 등을 감싸 안는다면, 그의 심장은 이 자리에서 바로 멈추고 말리라. - P407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람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이는 결코 지능이나 열정의 차이로 결정되는 자질이 아니다. 이두 가지는 몽상가의 타고난 자질과 가장 자주 혼동되는 것들이다. - P415

옥희가 아는 가장 지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인 단이의 경우, 그의 시야는 그의 태도와 원칙만큼이나 또렷하고 날카로웠다. 이는 가능한 한 최대한의 우아함과 침착성을 발휘하여 세상의 불순을 바로잡는 것에만 집중할 뿐, 그 아래 묻혀 있을지도 모를 차마 형언할 수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것들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옥희는 달랐다. 무용과 연기를 그만두자마자 자신의 삶에서 모든 색채가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이제 몽상가가 아닌 사람들의 세상에 있었고, 그곳은 낯설고 매 순간 숨이 막히는 장소였다. 인생에서 이처럼 외로워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이는 옥희가 어서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라고 믿는 듯했다.
"불경기 때문이야." 어느 날 아침 단이가 돋보기안경을 끼고 신문을 훑어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영화관에 다니면서 쓸만한 돈이 없는 거지. 요즘 폐업하는 식당들도 많다면서. 네 탓으로 돌릴 것 없어." - P416

체포라는 충격적인 경험과 실연의 상처에도불구하고, 단이는 패배라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실패란 마치 올이 나간 스타킹과 같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일이지만, 그걸 남들에게 눈치채이는 건 당사자의 잘못이라는 식이었다. 실패를 감추고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 양 폐기하려는 노력은 단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원칙인 동시에 예의의 문제였다. 이는 일종의 멋지고 귀족적인 감성이었으나, 단이의 역할을 다정하고친밀한 친구보다는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한정 짓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껏 옥희는 자신의 제작사가 이미 파산했다는이야기도, 또 정확히 서른 살이 된 지금 자신의 저축액이 점점 축나고 있다는 이야기도 차마 그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서른 살. 그가 지닌 여성으로서의 가치가 논리적으로 소멸되기 시작하는 기준점이자, 따라서 계산대로라면 그동안 저금해 온 돈과 착실한 후원자를 통해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며 경제적으로 자립해 있어야할 나이였다. - P417

다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 듣는 "다음에 또 봐요"라는 그 말이 얼마나 더 애틋한가? 종말에 가까워질수록 얼마나 더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는가? 경성에 있을 때,
그의 분노는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해 좀처럼 꺼질 줄 모르는 잉걸불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 불씨는 모두 물에 씻겨 내려간 듯 깨끗이 사라져 버렸고, 남아 있는 것은 자유로움뿐이었다.
정호는 부두 옆에 늘어선 자동차들을 지나쳐 선창을 따라 걸으며 숙련된 하늘의 선원처럼 날갯짓하며 떠다니는 갈매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매일 이곳을 찾아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하늘의 빛깔, 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태평양의 파도 위에 부서지는 태양도, 하루하루 조금씩 달랐다. 세상이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은 뼈저리는 아름다움을 그에게 안겨주었고, 다만 그는 그것을 조금만 더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 P485

"아무도 믿지 말고, 불필요하게 고통받지도 마. 사람들이 하는 말뒤에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그게 널 위한 내 조언이야."
"왜 내가 살아남아야 하지?" 옥희가 물었다. "그래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은 무너져 내리면서 매일같이 더 사악하고 어두운 곳이 되어가고, 나한테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야." 옥희는가로등도, 음악도, 달빛도 없는 창밖의 후텁지근한 풍경을 눈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땅에 떨어져 말라 죽은 잎들이 바스락대는 소리만이따금씩 들려올 뿐 거리는 온통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넌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군." 이토가 대답했다.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서로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기에 아무런 설득도, 아니 설득의 가망성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 P512

옥희는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창살 안에 갇힌 호랑이를 독살하는 걸 즐기지 않듯이. 이는 원칙이라기보다 취향의 문제였다. 옥희는 당황해서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차에서 내렸다.
다음 날 옥희는 이토의 운전기사가 전해준 소포 꾸러미를 하나받았다. 상자 안의 흰 봉투 속에는 빳빳하고 깨끗한 새 지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천 원이라는 거액이었다. 그 옆에는 옥희의 손너비보다 살짝 클까 싶은 자그마한 청자 화병도 하나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채 춤추는 백학들이 섬세하게 상감된 그 화병의 바탕을 이루는 빛깔은 더없이 아름다운 옥색이었다. - P515

8월 6일, 인간의 힘으로 지구 표면에도 태양의 불을 붙일 수 있다는 발전을 통해 전 세계는 중대한 변화를 겪을 것이었다. 하지만 7월의 야마다겐조는 아직 이 사실을 몰랐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최후의 상황과 마주하기 위해 만주로 돌아와 있었다. 부대의 병사들은 역대 가장 열악한 환경에 처해, 군복이며 군화며 모두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매 끼니를 때울 만한 식량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배급받은 무기라곤 딱 하루의 교전이 가능한 정도의 탄약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름날의 잔디밭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면 병사들은 여전히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담배로 물물교환을 하고, 옷을 벗어 세탁하고, 차가운 호수에 뛰어들어 아이들처럼 첨벙대며 웃고 떠들었다. 적어도 이 평화로운 북방 숲속의 군인들은, 야마다가 - P516

과거 숱한 기동작전을 지휘하며 목격한 바 있는 그런 종류의 타락으로 이끌리지 않는 듯했다. 이 병사들이 딱히 다른 부대에 비해 선천적으로 순수한 성품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또 야마다가 과거에 이끌었던 병사들 역시 그런 광포한 야수성을 타고났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병사들도 만약 이곳에 있었더라면 지금 이 숲의 나무둥치 위에 각자 사랑하는 애인의 이름을 새겼을 것이며, 현재 이 천진난만한 병사들도 과거와 같은 상황 속에 있었더라면 자신에게 강간당하고 있는 여자의 목을 베는 끔찍한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난징에서야마디는 중위 하나가 바로 그런 짓을 하고, 그 뒤에도 여전히 체온이 남아 있는 시체를 계속해서 강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일을 끝내자 그는 돌아서서 약간 쑥스러운 어조로 야마다에게 이렇게말했다. "그냥 하는 것보다 더 좋거든요." 야마다는 중위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까 고려했으나, 그것은 반역죄가 되는 행위였다. 제국의 적들을 강간하고 살해하는 일은 전쟁의 자연스러운 일부였다. 명랑하고 쾌활한 지금의 부대원들을 둘러보며, 야마다는 이 전쟁의 끝이 임박했다는 걸 과연 그들이 모르고 있는 건지, 혹은 알아도 별로개의치 않는 건지 궁금해했다. - P517

그 태연자약한 풍경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은 것은 엄청난 사건, 그러니까 단 하나의 폭탄으로 한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죽은 일이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무전으로 메시지를 받았으나, 야마다는 여전히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이 연보랏빛 꽃들, 호수에서 나른하게 헤엄치는 거북이들, 상쾌한 이 여름 사이에최대한 많이 자라기 위해 힘을 쏟아 가지를 뻗는 나무들이 있는 세상에서 동시에 눈을 멀게 하는 무시무시한 백색광선, 검게 그을려 녹아내리는 살, 얼굴 전체가 날아간 사람들이 남은 잿더미 도시가 있을 수 있는가? 이들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은이제 완전히 무의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마치 그게 말이 되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장 큰 중죄였다. 그런데도 사령관 회의에서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듯 임박한 소련의 공격에 계속 대비하고 있으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 P518

아주 오래전, 여기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산속에서 바로 이렇게 눈 위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발견하지 않았던가. 시체나 다름없이 보이던 그 남자. 낡고 해져 너덜너덜한 옷을 걸치고 있던, 믿을 수 없이 수척하고 앙상한 몰골의 그 사람. 당시의 야마다는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바뀌리라는 걸짐작조차 못했지만, 그 이후 일어났던 모든 일을 조화롭게 맞물리게 하는 어떤 절대적인 필연성이 수정처럼 또렷한 의식의 물결 속에서 그를 압도했다. 논리적으로든 비논리적으로든 발생했던 불가역적인 사건들, 그 모든 일이 그를 정확한 최종 목적지인 이곳에 안착시켜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왜‘라는 물음조차, 이제 새하얀 저 하늘에서 깨끗하게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이제 알겠군." 그는 중얼거렸다. 아니, 어쩌면 속으로 생각하기만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언어가 목구멍을 떠나 음성이 되었는지, 혹은 그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의식의 단편으로만 남았는지도 더는분명하지 않았다. 그가 실제로 소리를 냈다 한들, 그걸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야마다는 마침내 평온을 찾았다. - P527

열여섯 살쯤 되었을 때였던가, 책 한 권에 푹 빠져 읽느라 지새우던 밤, 바로 이 시간에 자신이 한낮의 정오보다 더 생생하게 깨어 있으며 살아 있음을 실감했던 것이 기억났다. 어린 명보는 자신의 앞에 인생 전체가 펼쳐져 있음을 확신했고, 새벽 4시의 신선하면서도 그을린 듯한 냄새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으로 그를 가득 채웠다. 이제 그는 백발이 성성하고 불편한 다리를 절뚝이며 걷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 모든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노년이란, 인생의 모든 행복이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아닌 이미 지나간 날들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어쨌든 자신의 역할을 다했으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를 위해 살았다.
명보가 3층 감방에 갇힐 즈음 새로운 공화국의 태양이 떠올랐다. 창문이 그리 높지 않았기에 그는 귤색 빛을 받아 반짝이는 기와지붕들과 헐벗은 가지의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하늘을 활공하며 지저귀는 새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침의 영원한 이 고요가 그에게 참을수 없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시간의 흔적이 깊게 쓸고간 명보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삶을 위해 지불하기에 죽음은 아주 작은 대가였다. - P552

은은하고 희미하게 빛나는 완벽한 구체. 내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은, 새벽달처럼 옅은 분홍색과 회색으로빛나는 진주 한 알이었다.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던 나는, 정호가 아직도 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저세상에 가서도 말이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있을 거라는 것도 삶을 계속 놓아주고 또 붙잡고 버티면서, 오직 바다에서 온 나의 일부만이 남을 때까지.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때문에.
나는 진주를 옷 가방에 넣고 물가로 걸어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원한 청색 파도 사이를 둥실둥실 부유했다.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 P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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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날 전까지 한 주 내내 날씨가 흐리고 이슬비가 내려 옥회는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그날이 되자 구름 한 점 없는하늘에 태양이 쨍하게 솟았다. 두 아이는 옷을 입기 전에 정원에서 단이가 코스모스 꺾는 것을 도왔고, 해순의 손길도 빌렸다. 옥희의정수리 위로 화려하게 수놓은 족두리를 씌우기 전에, 해순은 긴댕기를 꼬아 올려 낮게 쪽을 진 뒤 옥희의 머리에 처음으로 은비녀를꽂았다. 새신부의 상징이었다. 올림머리는, 옥희가 신체적으로는 동정을 간직하고 있을지언정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상 더는 혼인 이전의 상태가 아님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인 기혼 여성들과도달랐다. 오른쪽으로 열리게끔 감아 입은 치마가 그의 직업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단장의 마지막 순서인 화장까지 마쳤을 때, 옥희는거울 속에 비친 아름답고도 낯선 이를 보았다. 하얀 분가루를 칠한 피부 위에 붉게 도드라진 입술을 한 그 자신의 모습이 단이와 매우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 P138

"그러니까, 약한 국가와 민족이 더 강한 국가와 민족에 흡수되고통합된다는 건 불가피할 뿐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라는 거야." 이토가 깔끔하게 다듬은 콧수염을 한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일본이 없다면 조선이 어떻게 현대화됐겠어? 철도, 도로, 전력과 발전을 가져다준 쪽이 누구냐고. 이렇게 제멋대로인 나라를 정리해 주는동안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관대한 호의를 베푸는 거야. 그런데도 이 개 같은 새끼들은 자기들한테 이로운 게 뭔지도 모른다니까."
"우리가 이곳에 발전을 가져온 건 틀림없지. 그리고 이 경우 국가사이에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자네 말도 옳아. 하지만 쌀 문제에 관해서는 좀 의문이 들어." 야마다가 대꾸했다. "왜 굳이 피를 볼 때까지 그들을 다그치는 거지? 그들을 더 적대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꼴이잖아.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 P147

삶이 꾸준한 전진의 과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는 젊음 특유의 요건이다. 옥희 역시 인생의 한 단계를 지나고 나면 바로 그다음 단계가 오리라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가두 행렬에서 자신이 성년으로 한 발짝 들어서는 확실한 순간을 경험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날이후 일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놀라움과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여전히 그들이 사는 곳에서 어느 방향으로든 최대 다섯 집 이상의 거리를 넘어가지 않도록 엄격히 금지했다. 옥희도 언제나처럼 그 명령을 순순히 따르긴 했지만, 단이의 집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처음 그곳에 도착하여 벅차게 느끼던 찬탄과 애착에 서서히 먼지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 P153

그로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정호에게 이 모든 것을 세세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젊은이가 나름대로 영민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한 무리의 늑대처럼,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들을 이끌고 상상할 수도 없는 험난한 일들을 겪으며 거리에서 살아남지 않았는가. 명보는 늘 첫인상이 그 사람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믿었고,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평범한 정호의 얼굴에서 매우 희귀한 것을 보았다고 느꼈다. 이는 그가 모든 사람에게서 가장간절히 찾고자 하는 자질, 다름 아닌 정직함이었다. - P288

거의 예외 없이, 다들 너무 당연하다는 듯 제 스스로를 정직한 인물로 여긴다는 점은 오랫동안 명보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행동을 합리화할 필요가 있을 때면 깜짝 놀랄 만큼 영리하고 교활해졌으며, 너무도 약삭빠르게 머리를 굴리느라 심지어 자기 자신을속이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정호는 뭔가 달랐다.
이 야수 같은 젊은이가 숨 한번 돌릴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데 능숙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그의 내면에는 견제와 균형,
이해득실에 따라 작동하는 구조 자체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정호가 이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과 달라 보이는 주된 이유였다. 그처럼 단도직입적인 성격에 그가 지닌 거칠고 강렬한 기운이더해져, 많은 부하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게 할 뿐 아니라 제 목숨까지도 내놓을 만큼 그를 존경하고 신뢰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고 명보는 생각했다. - P289

명보의 마지막 말을 듣는 정호의 눈앞에 다시 옥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명보가 얘기하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그처럼 이치에 잘 맞는지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 러시아, 일본 혹은 한국, 정호 자신과는 무관한 관념이나 세계지도가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찾는 방법에 대해 한 이야기 말이다. 그저 사랑하는누군가와 함께 소박한 삶을 나누고 싶다는 바람, 바로 그것이 그가아무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속 소망이었다. 자신이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명보라면 이러한 소망을 인정하고, 그에 더해 존중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이처럼 이해 받은적이 없었는데, 방금 만난 이 낯선 사람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그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명보만큼 진실하고 똑똑하고힘을 가진 사람마저 정호가 자신의 작은 소망을 이룰 수 있게끔 이끌어주지 못한다면,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이 공산주의자라는 게 되려면, 뭐부터 해야 합니까?" 정호가 물었다. - P291

옥희는 가슴에서 시작되어 몸 전체로 뻗어나가는, 마치 무엇인가에 취한 듯한 신비로운 떨림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사랑은 한 번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단계적으로 번져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첫눈에 한철을 사랑하게 된 옥희는 한 여자가 자신의 연인이 어떤 영혼을 가졌는지 깨닫는 바로 그 계시적인 순간을 경험하고있었다. 그는 그 남자가 아주 특별하고 부드러운 영혼을 지녔다고느꼈다. 그리고 남들에겐 들키지 않게 잘 감춰진 그 여린 모습을 오직 옥희에게만 드러낼 수 있으며, 옥희 자신이 한철의 내면에서 그걸 끌어낸 장본인이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바삐 인력거를 끌며 달려가는 한철의 넓은 어깨와 길고 마른 골격, 탄탄한 등, 잘록한 허리와엉덩이를 바라보면서, 옥희는 이 젊은 남자의 처지를 애처롭게 여겼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훌륭한 능력을 갖췄음에도, 한철은 자신의 가족과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전날 밤에 대화할 때도 그랬듯이, 옥희는 이 남자가 지고 있는 때 이른 책임감을 조금 덜어줌으로써 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지고 밝아지는 걸 보고 싶었다.  - P331

연화의 이사는 단이의 집에 묘한 우울감을 드리웠다. 그의 부재가가장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건 아침 식사 자리에서였는데, 그때만큼은 언제나 모두 함께 모이곤 했기 때문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단이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열정적인 도취와 그런 감상에 빠져들기를 자제하려는 의지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전자는 그의 본성이었고 후자는 그의 원칙이었다. 단이는 결코 슬픔과 공허한 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법이 없었으니, 가장 예리한 관찰자만이 그의 확고한 침착성에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음을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단이의 속내를 속속들이 파악하는 월향은 이모가 떠난 연화를 몹시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월향 자신도 비슷한 상실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낙심하지는 않았다. 동생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그는 자신의 자매를 진심으로사랑하게 된 터였다. 하지만 그런 심경 변화와 동시에 그들 각자의 - P338

자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형성되었으니, 두 사람은 해가 지날수록서로를 덜 필요로 하게 되었다. 월향은 그저 연화가 저만의 재능을꽃피우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게 되어 기쁠 뿐이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와 음악, 동생의 행복에 필요한 건 이 두 가지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이 행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월향은알 수가 없었다.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월향은 그런 문제에 대해 한시도 생각을 멈춰본 적이 없었는데, 그에겐 행복이라는 관념 자체가 뭔가 낯설고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당신은 달에 가서 살고 싶나요?"라는 질문을 받는 것만큼이나 엉뚱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월향에게 가장 행복에 가까운 감정이란, 한밤중에 그의 딸이 자신의 이불속으로 웅크리고 들어오며 팔베개를 해달라고 졸라댈 때 드는 기분이었다. "네 베개는 어쩌고?" 월향이 이렇게 물으며 마른 국화 잎과녹두로 가득 찬 해숙의 부드러운 원통형 비단 베개를 가리키면, 해숙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이렇게 대꾸했다. "싫어, 싫어. 엄마 팔베고 잘 거야." 그러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과장된 한숨을 푹 쉬어 보이는 월향을 향해 낄낄거리며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 P339

어쩌면 그게 바로 월향의 행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행복이라고 운운, 만끽하는 것은 자신을 이기적이고 자격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그는 특별히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저 자신과 딸의 장래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돈을 모으기만을 고대할 뿐이었다. 그는 해숙을 평범하고 현대적인 여자아이로 키워내고 싶었다. 그게 바로 월향이 기생 일을 하면서도 어떤 연애사에도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했던 이유였다. 그래야 해숙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바람직한 남자와 결혼할 자유를 누리게 될 테니까. 상류층 가정의 여자아이들은 종종 일본이나 심지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곤 했으니,
월향은 해숙 또한 돈으로 가능한 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회에 참석하거나 광고 모델을 하며 벌어들인 돈을 거의 다 저축했다. 물론 옥희나 연화가 받는 것보다는 적었지만, 그래도 제법 상당한 액수였다. 월향이 그 돈을 모두 해숙에게 투자했기 때문에, 해숙은 명문 학교에 다니고 예쁜 옷가지들로 치장하며 남부럽지 않게 자라났다. 해숙이 대부분의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모범생이라는 사실은 월향의 자랑이자 유일한 낙이었다. - P340

"그분은 ‘기생‘이라고 알려진 사람이에요. 내가 듣기론 아주 성공한 경우라더군요. 그분의 딸은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이죠." 교장은
또박또박 설명한 뒤, 더는 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다는 듯 깍지 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커티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문득 그 남자의 마음속에, 만일 그 낯선 사람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것을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의 계시란 말인가? 그것까지는 아직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가벼운 바람이 엷은 먼지구름을 훅 일으켜 푸른 하늘로 날려 보냈다. 창밖을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닌지, 혹시라도 자신의 부주의한 태도에 교장의 기분이 상하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들 즈음, 연보랏빛치마를 입은 여자가 창틀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저리 날리는 분홍빛 모래 속에서, 그는 마치 어느 사막을 건너는 고독한 여행자같아 보였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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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혜JUHEA KIM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이자 친환경 생활과 생태문학을 다루는 온라인 잡지 <피스 덤플링>의 편집장.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주했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2016년 영국 문학잡지 (그린)에 단편소설 「보디랭귀지Body Langer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인디펜던트>를 비롯한 여러 제에 소설과 수필, 비평 등을 기고했다. 그중 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 「바이오돔은TV 시리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어린 나이에 한국을 떠났지만 모국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가정에서 늘 한국어를 사용해 온 이중언어 사용자로서 고 최인호 소설가의 단편소설「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이라는 작은 땅의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펼쳐낸 장편소설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은 6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이다. 독립운동을 도왔던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듣고 자라면서 한국의 역사를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인식했고 이러한 가족 내력을 간직한 채 한국의 역사를 전 세계 독자에게 알리는 동시에 자연 파괴, 전쟁, 기아를 맞이

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지 제시하는 소설을 썼다. 2021년 마침내 ‘작은 땅의 야수들은 "톨스토이 스타일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출간 즉시 아마존 ‘이달의 책‘에 올랐고, <하퍼스 바자> <리얼 심플> <미스 매거진》 《포틀랜드 먼슬리>에서 ‘2021년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더 타임스》 《뉴욕타임스》 등 영미 40여 개 매체에서 추천 도서로 소개되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1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2022년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2024년 러시아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톨스토이문학상(야스나야 폴랴나상)‘ 해외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City of Night Birds』는2024년 12월 영미권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고 한국에서는 2025년 출간 예정이다. 한편 작가는 현재 비영리단체인 한국범보전기금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한반도야생의 호랑이와 표범을 복원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다.
juheakim.com

동트기 전 어둠의 산책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는
책이 되길...

김주혜

하늘은 하얗고 땅은 검었다.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기 전 태초의 시간 같았다. 구름은 그들이 속해 있던 영역을 떠나 나지막이 내려와,
마치 땅에 맞닿은 듯 보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창공을 둘러싸고어렴풋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런 흔들림도 소리도 없었다.
이 아득한 세계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눈길에 난 작은 얼룩처럼 사람 하나가 홀로 걷고 있었다. 사냥꾼이다. 아직 부드러움과 온기가 남아 있는 짐승의 발자국 위로 몸을 구부린 채, 남자는 자신이 노리는 사냥감이 있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눈의날카로운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고,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약간의 눈이 내려 쌓이면 그 짐승을 더욱 쉽게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 크기로 미루어 몸집이 제법 큰 표범 같았다. - P17

남자는 나무들 사이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동물들은 여기 그들의 영토에서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산은 그의 것이기도 했다. 혹은 바꾸어 말해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산에 속해 있었다. 험준하게 펼쳐진 산들이 특별히 관대하다거나 위안을 주어서가 아니라, 이 깊은 숲의 어느 곳이든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똑같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산을 타고 있을 때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았다. 어떻게 숨을 쉬고, 걷고, 생각하고, 죽여야 하는지. 마치 표범이 표범으로 사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 P18

그 삶에서, 남자는 대한제국군에 복무하던 병사였다. 활 쏘는 기술로는 나라에서 제일이라는 명사수들만 특별히 차출하여 만든 부대였다. 화승총이나 활로는 누구도 남자를 능가할 수 없었다. 각 지역의 특성을 빗댄 옛말을 따라, 사람들은 남자를 ‘평안도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물론 그 사나운 야수들은 평안도뿐 아니라 이 작은 땅의 모든 산과 숲마다 넘쳐났기에 고대 중국은 이곳을 ‘호랑이의 나라‘라 부르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확실히 그 별명은 남쪽에서 왔다는 농부들보다 그 남자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험준하고 경작하기 힘든 땅을 개척해 낸 북부인들은 사냥꾼의 피를 타고난 자들이었다. - P20

사냥꾼의 오래된 기억은 지금 주위에 폭신하게 쌓여가는 눈처럼 그의 머릿속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남자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절벽 끝 선반처럼 튀어나온 바위를 응시했다. 차디찬 눈보라가 그의두 눈과 콧속으로 거칠게 파고들고 맨손을 장갑처럼 하얗게 둘러싸사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남자의 예상보다 더 짙은 눈발이었다. 그리고 동쪽에서 밀려오는 눈구름까지 확연히 보이는 이 정도높이에서는, 한동안 눈이 그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첫 눈송이의 냄새를 맡았던 순간 곧바로 산에서 내려갔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흙 위에 촉촉하게 찍힌 그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던 바로 그때 말이다.
남자는 재잘거릴 기력도 없는 아이들이 누추한 오두막에서 고요한 침묵 속에 굶주리고 있는 꼴을 보는 게 싫었다. 머지않아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하고 길을 나섰다. 사슴이나 토끼라 - P23

도 잡았다면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그 작고 행복한 얼굴들이 불을 켠 등처럼 환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발견한 건 표범의 발자국뿐이었고, 어쩌면 한 해 수확량의 반절이 넘는 값어치를 하는 그 짐승의 가죽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홀려버렸다.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려나?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남자는 극심하게 피로해졌고, 지금껏 그를 떠받쳐 온 모든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그는 쌓인 눈의 모습이 마치 갓 지어 뜨거운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흰 쌀밥 한 그릇 같다고 상상했다. 그렇게 뜨끈한 쌀밥을 먹어본 건 평생을 살면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남자는 분노하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여윈 몸을 무심하게 관통하며 불어가는 바람 같은 웃음이었다. 죽기 전에 그는먹고 싶었던 음식 몇 가지를 더 떠올려 보고 싶었다. 간장과 파를 끼없어 푹 고아낸 갈비찜이나, 걸쭉하게 녹은 골수가 입천장에 쩍쩍들러붙을 정도로 진한 꼬리곰탕 같은 것들. 딱 한 번, 어느 명절 잔치에서 먹어본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환상도 지금 그를 향해 다시금 떠밀려 오는 또 다른 기억보다는 강렬하거나 유혹적이지는 못했다. - P24

표범이 절벽 끝에 튀어나온 바위로 훌쩍 올라왔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윤곽으로만 어른거리는 그 짐승의 존재를 그는 눈으로 보기보다 온몸의 감각으로 느꼈다. 마침내 짐승이 몇 자도 되지 않는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남자는 숨이 턱 막혀 활을 아래로 내렸다.
그것은 표범이 아니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호랑이였다.
콧등에서 꼬리 끝까지, 남자가 양팔을 한껏 펼친 길이만 했다. 다자란 표범 정도의 크기. 새끼 호랑이라기엔 너무 크지만, 아직은 어려서 혼자서 사냥하지는 못하는 놈이다. 하얀 털로 폭신하게 뒤덮인둥근 귀를 움찔거리며, 어린 호랑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냥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분한 노란색 홍채는 겁을 먹지도 화가나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람이라는 존재를 본적이 없는 게 분명했고, 그래서 이 이상한 형상의 등장에 약간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사냥꾼은 활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사정거리 안에 있는 호랑이와 마주친 건 지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7

잿빛 어스름이 폭설에 몸을 떠는 나무들 위로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남자는 산신령을 향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영물을 놓아주었으니 저도 무사히 내려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눈보라는 저물녘에나 겨우 잦아들었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남자의 다리가 꺾였다.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네발로 선 채 잠시 버텼지만, 곧 팔꿈치마저 힘이 완전히 빠져버리자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고운 눈가루 속으로 파묻히듯 쓰러졌다. 그는 생각했다. 이왕죽을 거라면 하늘을 바라보며 죽어야지. 남자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등을 대고 누웠다. 달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자연 속에서 가장 자비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 P29

가옥의 무수한 미닫이문 중 하나가 열리고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이쪽으로 돌아서기도 전에, 이미 그 단아한 등의 모양과 뒤쪽 목덜미에서 어깨까지 길고 우아하게 떨어지는 선만으로도, 옥희는 그 여자가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가 얼굴을 돌리고 그들을 향해 짐짓 엷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순간, 옥희는 알 수 없는 설렘과 갈망이 가슴을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여자들 사이에서 곧잘 질투의 원인이 되곤 하는 흔한 외적 매력 대신에, 이 낯선 사람의 아름다움은 훨씬 드물고 희귀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뭔가 희망의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고, 그러한 기분을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염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온화한 표정 속에,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위엄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상대의 희망을 한껏 부풀려 띄워놓았다가도 곧 내동댕이쳐 그들이 겁을 먹고 움츠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을 여유롭게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 P53

그러나 삶은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은실은 실제로 안타까운 희생처럼 느껴지는 무언가를 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것이었다. 장군과 월향, 그리고 연화. 만일 그 세 사람이 불타는 집에 갇혀 있다면, 그는 즉시찬물 한 동이를 뒤집어쓰곤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 모두를 꺼내올 것이었다. 자신에게는 그게 바로 사랑의 의미라고 은실은 머릿속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쓸쓸한 손은, 다음 날 아침 성문을 통과한 천 씨가 사냥꾼의 집에 은반지를 전달하는 순간까지도 줄곧 텅빈 애석함을 느끼고 있었다. - P77

가장 놀라운 사건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이 작은 바늘 하나가 툭떨어지듯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연쇄한다. 길 잃은 개 한 마리의 출현만큼이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저 세월 속에 묻혀 흘러가는 여느일탈로 말이다. 어느 아침, 옥희는 잠에서 깨어나 그날 예정되어 있던 모든 수업이 취소되었음을 알았다. 바깥세상의 온기를 느끼고 이제 막 고치에서 빠져나온 어린 꿀벌처럼 그는 밖으로 뛰어나가 숨을한껏 들이쉬었다. 이른 6월의 생동감으로 가득한 날이었다. 나무들은 각자의 녹색 음향을 노래했으니, 그 신선함이 눈으로도 들을 수있는 음악처럼 펼쳐졌다. 여자아이들은 고삐 풀린 송아지 떼처럼 정원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책벌레인 옥희마저도 이날만큼은 잠시 글에서 눈을 떼고 휴식을 만끽하는 것이 전혀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 P78

가장 소중한 친구가 자신에게 없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옥희 자신이 외모도 더 예쁘장하고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까지 겸비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위축된 패배감을 맛보는 대신, 옥희는 그들이 서로 딱 맞는 완벽한 한 쌍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다는 사실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총명하고, 지적이고, 성실하다. 연화는 활달하고, 기백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열고, 자신감이 넘친다. 그들은 서로 성격이 비슷한 두 친구가 종종 그러하듯이 한 사람의마음을 두고 동시에 경쟁하거나 같은 종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결코 없을 것이었다. 옥희는 그들이 각자 반쪽의 인생, 하나씩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서로 나란히 서 있을 때 진정으로 완전해질 수 있다고. - P99

 "500년도 더 전에 도읍 성벽과 함께 세워졌지. 내가 경성에 처음 왔을 땐 그 성벽도 아직 남아 있었어. 그때만 해도 웅장한 모습이 참 근사했는데, 오래전에 일본인들이 성벽을 허물어버렸지. 저 꼴 보기 싫은 전봇대들도 그때는 없었는데."
인력거꾼이 달리기 시작하자, 역전의 혼란스러운 소음도 점차 줄어들었다.
"우리, 저 대문을 지나가는 거예요?" 옥희가 물었다. 집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단이가 말했다. "주변에 벽이 없다고 해서 대문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건 아니란다. 저게 없으면 다들 경성에 도착했다는 걸 어떻게 알겠니? 게다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나오는 것보다 신나는 것도 없거든, 슬플 땐 그걸 기억하렴." 단이가 쾌활하게 말했다. 묘하게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능력또한 그의 특별한 재능 중 하나였다. "이제 들어간다.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너희들도 알게 될 거야!"
인력거가 아치 밑으로 들어갔다가 다른 쪽으로 빠져나오는 순간, 옥희는 형언할 수 없는 눈부신 고양감에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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