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이산하


누군가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봤다고 말할 때마다
누군가 인생의 바닥의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고 말할 때마다
오래전 두 번이나 투신자살에 실패했다가
수중 인명구조원으로 변신한 어느 목수의 얘기가 떠오른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이 강에 투신자살하면거의 ‘99대 1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시신의 99%는 강물 속으로 가라앉다가 그대로 흘러가버리고
1%는 투신한 자리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흘러간 시신은 강의 바닥까지 가라앉지 못한 시신이고
떠오른 시신은 강의 바닥까지 완전히 가라앉은 시신이란다.
물론 잠시 머문 뒤 떠내려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시신들은 한결같이
반쯤 눈 감은 채 미소를 머금어 마치 불상처럼 보인다고 했다.
어떤 생이든 막다른 벼랑에서 떨어져 바닥에 이르면
그곳이 정말 더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의 바닥이라면
관짝을 부수고 나온 부처의 맨발처럼 오히려 고요해질지도모른다.

고요해지면 더이상 두렵거나 더이상 취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난 바닥을 쳤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숨이 멎는다.
물론 욕망과 탐욕의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이르기도 전에흘러간들
바닥을 치고 다시 떠올라 잠시 세상을 애도하고 흘러간들
시신을 염하고 운구하는 강물의 숨결은 한결같을 것이다.
언젠가 내 몸도 바닥에 이르지 못한 채 흘러가겠지만
언제나 가벼운 생일수록 바닥을 쳤다고 더욱 강조하겠지만
이제는 강물의 색깔만 봐도 수심을 안다는 목수의 말만큼은
바닥의 바닥을 치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을 믿는다.


시집[악의 평범성]중에서


[새의 시선]을 마치고 가을 광교산에 올라갔다. 책이 주는 먹먹함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던 거다. 여름내 멀리했던 산이 무거워진 다리를 밀어낸다. 땀을 쏟으며 다리를 뻗어나가며 방금 빠져나온 소설을 생각한다. 이 땅의 현대사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소환되고, 세월호, 용산, 어린이집 수련회 화재로 아이를 잃는 피해자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만 생각할 수가 없다.
이 이야기들이 그럴듯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좋겠다.
그렇게 눈 감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소설은
이 시대의 작가는 이런 글을 써내야한다.
지겹도록, 써내야 할 책무들이 있다.

이산하시인의 시들이 맴돈다.
‘바닥의 바닥을 치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영혼들을 생각한다.

세상은 아름다운 가을이다.
이 아름다움이 거저 온 것이 아니라는...
그 흔한 새 한마리 만나지 못하고,
새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산을 내려온다.
무력하다.
부끄럽다.

‘그는 권력과 폭력을 비판하거나 혐오하기보다, 사유한다.‘
정희진은 옳았다

˝배우 자신도 그랬다지만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만 가지 슬픔‘ (이라는 책이 있다)이 쏟아졌다. 인류는 폭력 피해자 가족의 이런 ‘희망과 안도‘를 개념화한 적이 있는가? 나의 무식 탓이기를 바란다. 이런 심정은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책이나 로만 폴란스키(RomanPolanski)의 영화 <죽음과 소녀 (Death and the Maiden)> 같은 ‘전형적인‘ 고문의 서사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한국 소설 중 나만의 3부작‘이 있다. <슬픔의 노래> <얼음의 집> <새>.
모두 한 작가의 작품이다. 우연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생은 생잔(生殘, 살아남기‘), 권력은 폭력, 슬픔은 실패를 의미한다. 이런 현실에서 폭력과 권력 탐구를 짊어지는 작가는 흔치 않다. 어쨌든 정찬같은 ‘캐릭터‘의 지식인이 많아야 한다고 절실히 주장한다. 내가 만일 대통령 후보라면 이런 공약을 하겠다. ˝치열하게 생각하는 인간이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정치신학자‘ 정찬의 주제는, 권력과 폭력 앞에 선 인간의 선택이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들의 모습은 작가를 통해 예술과 신학의 이유가 된다. 그는 권력과 폭력을 비판하거나 혐오하기보다, 사유한다. 그의 작품은 ‘남영동‘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윤리학이다.˝ [정희진처럼 읽기]중에서 p149, 150


새들의 길


운동화 한 켤레가 방파제 위에 놓여있다. 봄햇살을 받아눈처럼 희게 빛난다. 그녀의 눈에는 한 마리 새처럼 보인다.
운동화 옆에 비닐에 싸인 옷이 있고, 그 위에는 부모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접착테이프로 붙여져 있다.
- 사랑하는 내 아들, 넌 지금 어디 있니? 어찌 그리 못 오고 있어. 새 신발을 신어보고, 옷도 입어봐야지. 너의 여행이너무 길어. 어서 빨리 돌아와. 오늘은 약속하는 거지?
그녀의 눈자위가 금방 붉어진다. 저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우리 종우와는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걸까? 어젯밤 꿈이 떠오른다. 종우가 바다 밑 뻘을 헤치고 무언가를찾고 있었다. 얼굴 표정과 몸짓이 간절했다.  - P111

 종우야, 깊은 바다 밑에서 무얼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니? 함께 찾고 싶었지만 종우에게로 갈 수 없었다. 몸이 무언가에 묶여 있는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종우의 발이 보였다.
맨발이었다. 몸은 진흙투성인데 발은 하였다. 하얀 발에 눈이시렸다. 아!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종우가 찾는 것이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운동화였다. - P112

"그럼 신고 가. 외삼촌이 너에게 주는 거니까."
"가슴 깊은 곳에서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묻어둔 슬픔이었다.
"외삼촌이 주시는 거라면 받아야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종우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이 운동화 내 거네."
"그래, 외삼촌 운동화는 이제 우리 종우 거야."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 얼굴이 쭈글쭈글해졌는데, 오빠의 얼굴은 여전히 스물다섯 살 청년이었다. 스물다섯 살 청년을 그리워하며 보낸 세월이 아득했다. 사무친 아득함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P118

진도 바닷가에서 지낸 한 달여 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없다. 간신히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렸다. 끔찍하게 변해버린종우가 꿈에 자주 나타났다. 손톱이 다 빠진 손으로 무언가를긁고 있었다. 눈동자가 없어 휑하니 뚫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입안에 피를 가득 머금은 채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너무 끔찍해 잠드는 것이 무서웠다.
배가 침몰하던 4월 16일 아침 그녀는 잠 속에 빠져 있었다.
마트 일이 끝난 것은 새벽 1시 40분이었다. 매출 금액과 받은 - P118

돈이 차이가 나 식은땀을 흘렸다.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그녀 돈으로 메웠다. 팀장을 면담하고 사유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집에 오니 2시 반이었다. 3시 넘어 이불을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성태의 전화 때문이었다. 잠결에전화를 받았다. 9시 40분경이었다. - P119

오후 2시에 구조된 승객이 368명이라고 발표한 정부는 4시30분에는 164명으로 수정 발표했다. 믿기지 않았다. 종우가구조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타들어갔다.
오후 5시 10분에 시작된 행정안전부 브리핑에서 대통령은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데, 그렇게 찾기 어려운가요?"라고 물었다고 했다. 학생들 대다수가 배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뉴스로 알려진 지 한참 지난 뒤였다. 억장이 무너졌다. 옆에 앉은 이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하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 P122

"고래의 눈을 어떻게 보니?"
"컴퓨터 스크린에서는 볼 수 있어요."
"아, 그렇겠네."
"저도 봤는데, 눈동자가 너무 깊어요."
"눈동자가 어떻게 깊어?"
"제가 보일 만큼요."
종우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슬픈 얼굴 같기도 하고, 화난얼굴 같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도 명호 어머니처럼 종우에게정말 중요한 것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종우가 고래를 좋아하게 된 건 고래 눈동자가 깊기 때문이라는 거야?"
"맞아요. 종우는 고래 눈동자 속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했어요. 여기와는 다른 세상 말이에요." - P131

"귀신고래가 1년 동안 여행하는 거리가 얼만지 아세요?"
"몰라."
"2만 킬로미터예요. 귀신고래의 수명은 40년 남짓이에요.
40년 동안 귀신고래가 여행하는 거리는 지구에서 달까지의거리예요. 귀신고래에게 북극 여행은 아주 가벼운 여행인 거지요."
"하지만 종우는 고래가 아니잖니?"
"종우는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고래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어요."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종우가 부르는 소리를듣지 못하고・・・・・・ 너는 들었는데, 난 듣지 못하고・・・・・・ 그동안그녀는 종우와 통화했을 경우의 상황을 수없이 그렸다. 종우에게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말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면견디기 힘들었다.
132배 안에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요."
"왜 그런 생각을 해?"
"많은 사람이 배를 탄 친구들을 생각하고………… 또・・・・・・ 보고 - P132

싶어 하잖아요."
"그건.......
목에 무엇이 턱 걸려 있는 것 같아 말을 할 수 없다.
"종우와 함께 북극에 가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 생각만 하면 힘이 절로 났어요. 이제 제 꿈은 산산조각이 났어요. 전 종우와 함께 배를 탔어야 했어요. 정말 탔어야 했어요."
성태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다. - P133

지나자 경찰서를 찾았다. 치안 공무원들은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담당이 아니라고 서로 미루었다. 민원실로, 수사과로,
보안과로, 정보과로 돌아다니다 수색원 서류 하나만 달랑 제출하고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그 후 경찰서에서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빠 주변 사람들은 물론 오빠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이면 수소문해서 만났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그들의 얼굴은 어두워져갔다. 어머니는 땅을 파헤쳐서라도 오빠를 찾고야 말겠다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곤 했다. - P136

그녀를 바라보는 오빠의 눈은 슬펐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오빠는 간혹 그녀에게 말을 건네곤 했는데,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새가 되고 싶었다. 새라면 공중으로 흩어지는 오빠의 말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오빠의 말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들의 길을 따라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의 서른번째 생일을 맞은 그해 늦봄, 법무사인 지인의권유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법원을 찾았다. 법원행정처 공무원은 아드님이 행불돼버렸으니 보상금 받으면 부자 되겠소,
하고 말했다. 그날 이후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한 달도 채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던 아버지는 이듬해 겨울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아버지 시신은 공장 숙직실에서 발견되었다. 소주병들이 뒹구는 방 안에서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 P137

오랜 세월 동안 오빠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희망은 오빠를 대신하는 생명체였다. 그녀가 세상의 끔찍함을견딘 것은 희망이라는 생명체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의 운동화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생명체의 표징이었다.
그것은 버릴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빠를 보내야 했다. 언젠가부터 오빠를 가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에게 갇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은 종우가 커갈수록 짙어졌다. 그녀가 오빠운동화를 새로 산 것은 종우를 통해 오빠를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빠의 오래된 운동화는 너무 낡아 신을 수 없었다.
종우 운동화 치수가 오빠 운동화 치수와 같아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작별을 연습했다. 그전처럼 두렵지 않았다.
오빠가 떠난 가슴속 빈방을 종우가 채워주리라 믿었다. 수학여행 가는 날 아침, 종우가 오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설 때기쁘면서도 슬펐다. - P139

종우야 가거라.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엄마도 잊어라. 엄마를 잊지 않으면 죄 많은 땅도 잊지 못할 테니.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마라. 시신으로 돌아온 아이는 시신을 통해,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않는 아이는 시신의 없음을 통해 죄 많은 땅을 비출 테니까. 네가 머나먼 여행을 하는 동안 엄마는죄 많은 땅을, 너를 사라지게 한 죄의 진창 속을 무릎으로 기어가면서 너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움의 힘으로 너의 없음을 땅과 하늘 사이에서 쉼 없이 외칠 것이다.
그녀는 등대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P140

등불


그가 여객선 사고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문경새재에서였다. 부산항에서 안산 시화공단으로 화물을 싣고 가던 도중이었다. 휴게소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가까운 식탁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이 들려왔다. 5백 명에 가까운 승객들이 탄 여객선이 침몰되었는데 구조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승객 가운데 수학여행 가던 학생이 3백 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는 빠르게 잊었다. 그에게 세상일은 어디론가끊임없이 흘러가는 흐린 영상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 P143

뜻밖에도 식당 문이 잠겨 있었다. 창 안을 들여다보니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식당 전화번호를 눌렀으나 받지 않았다. 그녀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두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옆집 세탁소 노인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노인이어떻게 생각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세탁소 노인은 그녀를 모슬포댁이라고 불렀다. 그녀 고향이 제주 모슬포였다. 언젠가모슬포댁이 보기 드물게 착한 여자라고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못 들은 척했다. 노인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으나 알 수 없었다. - P145

식당 문은 그전처럼 잠겨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식당을 일주일씩이나 비워둘 리 없다는 생각이들었다. 머릿속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낯설지가 않았다. 가슴이 조이는 듯한 불안이 일면서 발밑이 허전해졌다. 두 발을 딛고 있는 데가 땅이 아닌 듯 몸이 흐느적거렸다. 무릎 아래가 사라진 것같은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발밑을 살피면서 식당 앞 계단에 겨우 앉았다. 그런 증상이 처음 나타난것은 시커멓게 불에 탄 채 반쯤 무너진 건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어린이 캠프에 참가한 딸의 숙소였다.
그는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
겨우 여섯 살이었다. 여섯 살 아이가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소풍을 간다고 했다. 하룻밤만 자고온다고 했다.  - P147

"그런데 왜 그 사람 이름이 없다고 해요?"
그의 물음에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회사 직원 말로는 유료 승객이 아닌 승선자의 신원은 확인이 안 될 수 있다는 거야. 어떻게 무료로 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승무원이나 선사 관계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더러그렇게 탄다고 하더군. 선박 회사 사람들이 모슬포댁 식당에종종 오곤 했어. 더 알아볼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진도로가보라고 해. 거기에 가면 그들이 모르는 정보를 들을 수 있올지 모른다면서…….."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 P151

아내는 숨을 쉴 수 없다면서 가슴을 자주 쥐어뜯었다. 자신에게서 역겨운 냄새가 난다고 했다. 기분이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죄스럽다고 했다. 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귓전을 늘 맴돌던 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딸이뜨거운 석탄 위에 서 있는 꿈을 자주 꾼다고 울며 말했다. 어느 날은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말했다. 처음에는 믿기가 힘들었다. 멀쩡한 눈이 안 보일까닭이 없었다. 의사는 전환장애라고 했다. 마음의 깊은 상처가 신체 이상으로 나타나는 병으로, 사람에 따라 증세가 다양하다고 했다. - P152

한 모습이었다. 아내는 유서에서 그를 혼자 두고 떠난 자신을부디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떠나는 것을 허락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다른 말은 없었다.
아내를 화장한 후 딸의 곁에 두었다. 이제 딸이 외롭지 않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딸과 아내를 제대로 기억해줄 사람은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웠다. 그가 짊어져야 할죽음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155

그녀는 그에게 죽은 자가 아니었다. 사라졌을 뿐이었다. 산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삶과 죽음 사이를, 그 자욱한안개 속을 떠도는 존재였다. 그의 의식도 그녀를 따라 삶과죽음 사이를 떠돌았다. 그에게는 낯선 떠돌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떠돌았다. 트럭 안이 관처럼 느껴져도 조금도이상하지 않았다. 가속 페달을 밟고 있을 때는 백합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곤 했다. - P165

 세탁소 노인을 만난 이후 잠자리에 들면 똑바로 누워
‘눈을 감고 양팔을 가슴에 얹은 자세를 자주 취했다. 죽은 사람의 자세였다. 외로움을 견디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녀가 제주도에서 돌아오면 칼을 맡기려 했다. 죽음을 그녀에게 맡기고 싶었다.
달빛이 한층 밝아졌다. 달 주위에 얇게 끼어 있던 구름이걷히고 있었다. 트럭에 올랐다. 시계를 보았다.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진도에 도착하면 아침이 될 것이다. 그 시각에 꽃을 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백합 다발을 가득 안고항구로 가고 싶었다. 시동을 걸었다. 길이 떠올랐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길에서였다. 처음 가는 길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가슴이 설렜다. 길 너머에서 누군가가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은 빛처럼 희었다. - P169

카일라스를 찾아서 


정신이 혼미했다. 머릿속에 축축한 안개가 가득 차 있는 것같았다. 땅의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중에 뜬 상태로 걷는 듯했다. 귓속에서는 종류가 다른 소리들이 뒤섞인 채 쉼없이 윙윙거렸다. 바람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고산병 증세가 나타난 것은 티베트 고원지대로 들어서면서였다. 해발 4천 미터가 넘는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물속에 있는 것처럼 숨이 찼고, 머리가 아팠다. 조금만 걸어도 몸이 축축 처졌다. 라사에서 카일라스 가는 길은 멀고험했다.  - P173

밤에는 꿈을 많이 꾸었다. 아내가 자주 나타났다. 아내는혼자 나타나지 않았다. 현수와 함께 왔다. 현수의 얼굴은 윤곽이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현수가 탄 승용차가 새벽 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뒤 전복했다. 운전자의 부상은 가벼웠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던 현수는 병원 응급실에실려 온 지 얼마 안 돼 숨졌다.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머릿속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것은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바위투성이 언덕에는 수많은 룽다와 타르초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티베트인에게 경전의 언어는 진리의표상이다. 그 표상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삶의 공간에 배치해놓았다. 룽다가경전의 언어가 새겨진 천을 깃대에 꽂은 한 폭의 깃발이라면,
타르초는 경전의 언어가 새겨진 오색 천들을 기다란 끈에 연결해놓은 천 다발이다. - P174

골짜기가 황량함에도 풍경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풍경 속에는 이마를 차갑게 하면서 정신을 두드리는 무언가가있었다. 길이 꺾이는 곳에 돌탑이 보였다. 순례자들이 쌓은탑이었다. 돌 하나를 놓으며 무언가를 빌거나 누군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현수의 죽음 이후 살아 있는 이들은 그립지 않았다. 눈에보이는 것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삶이 슬프고 무서웠다. 슬프고 무서운 삶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삶은 버리고 싶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삶을 버리려면 먼저 삶이 내 몸에 새긴 기억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다. 현수와 함께한 기억들이, 아내와의 추억들이 버려진다고생각하면 죽음보다 더 슬프고 무서웠다. - P189

"언젠가부터 저는 히말라야의 풍경에서 시선을 느꼈습니다. 저만이 풍경을 보는 게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풍경도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의 시선과 풍경의 시선이 마주치는순간 신성한 존재의 숨결을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신성이었습니다. 풍경의 내면에서 흘러나온 어머니의 신성한 숨결이제 몸속으로 흘러들어 와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라는존재의 생물학적 몸에 갇혀 있던 저의 자아가 해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를 감싼 희열은 자유가 불러일으킨 희열이었습니다. 그 희열 속에서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르나트의 무너진 탑 앞에서 오체투지하고 있었던 여인이 저의어머니였음을." - P201

"사랑을 한다는 것은 고통과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훈은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 고통과 마주했습니다. 기훈에게는 혹독한 고통입니다. 그 고통을 저는 옆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티베트 속담에 부정한 카르마를 쓸어내는 빗자루가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을 정화하는 고통의힘을 표현하는 말이지요. 기훈은 아드님에게서 영혼을 정화하는 마르지 않는 우물을 얻은 것입니다. 우물의 원천은 아드님의 희생입니다. 사고 당시 상황이 불러일으킨 어떤 물리학적 법칙의 결과로 기훈이는 살았고, 아드님은 숨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연 혹은 운으로 치부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현상의 거죽일 뿐입니다. 영혼의 생명 활동은 거죽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저는 기훈의 고통을 통해 아드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아드님은......"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무치게 아름답고 거룩한 존재입니다.그존재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뿐입니다. 저는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하고." - P2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희진의 최애 소설가, 정찬을 드디어 만난다.


양의 냄새 


그를 만난 것은 라스베이거스의 한 카지노에 머문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2008년 1월 20일 저녁이었다. 룰렛테이블을 지나가다 우연히 그를 보았다. 테가 굵고 검은 안경을 쓴 그는 룰렛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이를 헤아리기가 쉽지않았다. 청년처럼 보이기도 했고,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얼굴 표정 때문이었다.
도박은 사람의 본성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자극하는 정교한놀이로,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쾌락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각을 해체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쾌락이 보이지 않았다. 쾌락 대신 슬픔이 얼굴에 비쳤다. - P9

사람은 동물 가운데 표정을 가장 풍부하게 짓는 존재다. 한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만 개가 넘는다. 하지만 문명의발전으로 표정에 제한이 가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위축되어가다가 어느 시점부터 사람의 얼굴이 가면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면의 얼굴은 마음을 숨길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마 - P11

음의 상태와 다른 표정을 짓는다. 그런 가면이 하나만 있는게 아니다. 가면 뒤에 다른 가면이 있으며, 그 가면 뒤에 또다른 가면이 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더 많은 가면을요구한다.
카지노는 가면을 벗기는 공간이다. 일상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지노는 놀이의 세계이다. 놀이 세계에서 가면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일 뿐이다. 사람의 민얼굴을 볼 수 있는 희귀한 공간이 카지노인 것이다. 카지노가 얼굴 연구자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공간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카지노는 ‘얼굴연구학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게 객실과 함께 CCTV실 출입증을 제공했다. - P12

히스 레저가 뉴욕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은 그날로부터 이틀 후인 1월 22일 오후 3시 30분경이었다. 뉴스로 그 사실을 알았다. 뉴욕 경찰청은 히스레저의 집에서 여섯 가지약물을 발견했다면서, 마약 같은 불법적인 약은 아니었다고발표했다. 2월 초순에는 뉴욕 병원이 검시 결과 약물 과량으로 인한 사고사라고 발표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너무나 이른 나이였다. 하지만 나의 눈에 비친 그는 스물여덟살 청년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생의 곁에 싸여 백년을 넘게 산 늙은이처럼 보였다. 죽음이 어쩌면 그에게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 P36

새의 시선 


박민우가 손목 관절 통증으로 병원을 찾은 것은 2010년12월 중순이었다. 손목이 부어 있었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당시 그는 서른일곱 살의 건강한 남자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졌고 언제부턴가 목과 다리에도 통증이 일어난다고 호소하더니 급기야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정도로 근육 마비 증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 한 달 후에는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정형외과 과장이 나를 찾은 것은 박민우의 상태가 병리학적으로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장은심리적 충격과 고통, 욕구 등이 신체의 이상 증세로 발현하는전환장애가 아닌가 의심된다고 자신의 견해를 조심스레 밝혔다. - P39

그는 나의 생각을 정확히 짚었다. 카메라를 쥐는 행위,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손의 동작이다. 사진 예술의 기본 행위가손의 동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손목 관절 통증은 기본 행위를 못 하게 함으로써 그를 카메라에서 해방시킨다. 하지만완전한 해방이 아니다. 손목 관절 통증 속에서도 카메라를 쥘수 있고, 셔터를 누를 수 있다. 그러나 근육 마비는 다르다.
찍는 행위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와의 첫 대화에서 사진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카메라의 무거움은은유적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다. 전환장애의 요인들이 너무나 다양한 데다, 사진에대한 나의 편애가 생각을 그쪽으로 몰고 간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 P43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기억이 영화의 주인공이니까요."
"선생님에게 기억이란 무엇이죠?"
"어떤 정신분석가가 말하길,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것은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실을 덮어버리는 일에 뛰어난 전문가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진실을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바꾸어도 되지요. 저 영화가 관객에게 괴로움을 불러일으켰다면 인간의 그런 속성을 거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도 괴로움을 느꼈습니까?" - P48

잠시 후 그가 스르르 일어나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가만히 섰다. 불안정한 자세이긴 했지만근육 마비 환자가 섰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내가모르는 어떤 존재를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나무처럼 꼼짝 않고 서 있는데도 그의 몸이 수많은 움직임으로 들끓고 있는 듯했다. 몸 안에서 들끓고 있는움직임이 금방이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가 말을 시작한 것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슬픔으로 변하면서였다. 괴로움에 싸인, 가슴을 저리게 하는 슬픔이었다. - P51

인터뷰어의 거듭되는 질문에도 그는 끝까지 침묵했다. 그의 얼굴을 응시하던 카메라는 침묵을 견딜 수 없었는지 시선을 그의 뒷모습, 열린 대문과 그 너머의 풍경으로 이동했다. 불길에 사라진 자식을 기억해야 하는 그에게 침묵은 기억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을 것이다. 김세진은5월 3일, 이재호는 5월 26일 숨을 거두었다. 그들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 P56

공허해 보이던 그의 눈이 고흐를 말할 때 잠시 빛났다.
"고흐가 동료 화가인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이 최근에 그린 풍경화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고흐는 그 풍경화를 언덕 위에서 새의 시선으로 내려다본 풍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흐가 단순히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새의 시선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 P59

새의 감각을 갖는다는것은 새의 영혼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고흐의 그 풍경화를 들여다보면서 새의 감각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감각은어머니 몸속에서 형성됩니다. 양수의 아늑한 촉감 속에서, 어머니의 움직임이 빚는 율동에 싸여 먼 우주 공간에서 들려오는 듯한 어머니 몸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 순수한 감각을 깊이꿈꾸면 새의 감각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 P60

내렸다. 살을 에는 추위였다. 박민우는 완전한 움직임이 주는 기쁨에 취해 추위를 잊고 있었을까. 아니면 누런 피부 밑에 숨겼던 두려움에 싸여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까. 불현듯 나자신이 낯설어졌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나라는존재가 세상과 우주 공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를 낯설게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낯선 대상이 되어버린 그전의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강렬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검은 물처럼일렁이는 의문 속에서 나는 내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새의 시선이었다. - P78

사라지는 것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나는 지리산을 종주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5시 30분 장터목대피소를 나와 천왕봉을 향해 걸었다. 종주 마지막 날이었다.
3월 하순 모 문학관에서 전화가 왔다. 4월 18일 작고 문인추모 행사에 소설가 박영도를 선정했다면서, 그와의 추억을이야기해달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선배이면서 문학 선배이기도 한 그와는 여섯 살 차이지만 안산 예술인아파트에서 이웃으로 6년 가까이 살면서 추억이 많았다.
문학관 관계자와 통화하면서 박 선배가 세상을 떠난 지어느덧 8년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내 나이가 그의 마지막 나이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P81

세월호 침몰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천왕봉을 내려와 치밭목 대피소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10시 조금 못 되어서였다.
라디오를 듣고 있던 어떤 등산객이 알려주었다. 제주도 수학여행 가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그 여객선에 타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예술인아파트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학교였다. 단원은 조선 시대의 뛰어난 화가 김홍도의 호인데, 안산과 연고가 있는 그를 기려 안산시 단원미술관을 만들었고, 단원미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 P82

형조는 몽롱한 눈빛으로 갯벌을 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때가 1986년 가을이었으니 내가 살아온 생의 반 가까이흘러간 것이었다. 그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중의 하나가사리포구의 사라짐이었다.
사리포구가 사라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수가 사라진 것은 본 적이 있다. 예술인아파트 뒤쪽 들판에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그곳을 자주 찾은 것은 황량한 들판 가운데 있는 물의풍경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낯섦이었다.  - P86

"고흐는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고 했어. 일상의 시선으로는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했던 거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돼? 보이는 것을 뚫어야 하겠지. 보려고 하는것을 막고 있으니까. 사물과 풍경, 인간과 역사를 뚫는다는것이 나에겐 아득해."
그의 눈빛도 아득해지고 있었다.
"고흐가 자살한 것은 필연이었을까?"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막대기와 이젤과 캔버스와그 밖의 다른 그림 도구들을 잔뜩 짊어진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이 자신이라고 했어. 그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의 사내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가고 있었지. 그러다가 불현듯 깨닫곤 했어. 목적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걸음을 멈추어야겠지. 하지만 사내는 멈출 수 없었어.
머물 곳이 없었으니......" - P90

형조가 새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숨을 거두기 35일 전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기파괴적으로 술을 마셨다. 식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차명아가 못 마시게 하면 나가서 마셨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차명아의 말로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런 그가 돌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술도 멀리했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불길한 예감도들었다.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아닌가 하는 당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P106

나는 그녀가 잘 견디고 있느냐고 물었다.
딸이 살아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면서 김윤희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득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떤 깊이의 허 - P106

공이 가로놓여 있는지, 알고 싶었다. 차명아가 앞으로 겪어야할 고통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 P107

식사를 마치고 별실에서 나왔을 때 식당 홀 벽에 걸린 텔레비전 화면에 "여객선 침몰 특보, 세월호 선체 완전 침수"라는자막이 보였다.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일행을 따라 식당을 나왔다. 박 선배 부인은 아들 차로 귀가한다고 했다. 그들과 헤어져 어두운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형조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줍은 듯 해맑은 미소가 입가에 어려 있었다. 그가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흐린 것인지, 내 눈이 흐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리포구 언덕에서 형조와 함께 보았던 별들이 아른거리면서 형조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는 나무처럼 서서 별자리를 찾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의 곁에서 그와 함께 날개를 활짝 펼쳐 별을 향해 날아가고있는 한 마리 새를 찾고 싶었다.  - 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거 뭐지 ~!
뭔가 미진한... 마침표.
막 음악에 빠져들고 있는데,
아직 덜 들었는데,
갑자기 광고가 튀어나오는 라디오인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자꾸 뒤 페이지를 찾게된다.
이렇게 마친건가.
다음 권을 위한 장치라 해도 얍삽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몇군데서 인쇄 상태가 진하다 흐리다를 만났어도 정희진이기에 문제 되지 않았는데 마무리는 아쉽다.

오늘 별스럽게 고된 하루였는데 아주 잠깐씩의 책 펼침도 이렇게 아쉽게 되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다.







문명은 융합의 산물이며 이미 세상은 융합되어 있다. 독자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문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현실을알 수 없는 이유다. 코언 형제의 영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독일의 프리츠인가 워너인가 - P145

하는 학자의 이론에 따르면,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테스트하려면 관찰을 해야 하는데 관찰을 하면 관찰을 하는 행위 자체가 현상을 변화시킨다는 거죠. 그래서 현상의 실체를 알기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현실은 잡히는 대상이 아니다. 매 순간 변화하고 이동한다는의미에서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새롭다. 그러므로 융합 그 자체는 중요하지도 않고 무조건 추구할 가치도 아니다. 문제는 어떤 가치를 위한 융합인가이다. 진짜 융합은 인간의 필요에 따른 대단히 목적의식적인 작업이다. 안보 신화를 종식할 수 있는논리, 무의미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논리, 한국 현대사에서
‘검사 집단‘을 파악할 수 있는 논리・・・・・・ 이런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융합이다.
주류 언어가 나의 삶을 삼켜버릴 때, 현실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공동체가 고통받을 때 새로운 말을 찾는 과정이 융합이다.
융합은 창의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 P146

지금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융합‘은 융합의 반대말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융합 개념은 ‘절합(折合, articulation)‘에 가깝다. 모든 질서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이 단어는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지만, 현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 단어는 관절(joint)이란뜻의 라틴어 ‘articulus‘에서 온 말이다. 하나하나 구분되는 마디를 뜻한다.  - P147

하나로 화(化)하여 합친다는 ‘융합‘으로 차이를 분명히 하자는 ‘절합‘을 설명하려니, 다시금 아버지의 연장-언어의 식민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가장 실천과 거리가 먼 단어는 ‘연대‘와 ‘성찰‘이 아닐까? 연대는 융합에 대한 최악의 이해다. 통용되는 연대 개념은
"우리가 99퍼센트(?)이니, ‘나쁜‘ 1퍼센트(?)를 제거하자"는 논리다. 문제는 99퍼센트 안에 광범위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치는 갈등의 교차 영역에서 발생한다. 오로지 한 가지 억압이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리는 것이 아니다.
노학 연대, 청년 빈민연대, 성소수자 연대, 사회적 약자와의연대…………. 그런데 연대 과정에서 각 집단은 등가 사슬(chain ofequivalences), 즉 하나의 ‘마디 (article)‘가 되지 못하고 약자는연대에 동원된다. 인구수가 많은데도 여성이나 장애인 이슈는대동단결, 일치단결의 ‘대의‘에 종속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대의를 약자와 대립시킨다. 예를 들면 "민족 문제냐, 여성 문제냐"가 있다(이 말 자체가 여성을 민족에서 배제한다). 장애인 문제는 시혜적이고, 성소수자 문제는 ‘나중에‘다.  - P148

만물 중에 같은 것은 없다. 우주는 차이들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 많은 차이들 중에서 우리가 아는 차이는 얼마나 될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건 의외로 쉽다. 사회가 선택한 차이만차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다. 차이는 분업이나 차별이 필요할 때 발명된다. 그래서 어떤 차이는 다양성으로 인식되지만, 어떤 차이는 차별의 ‘이유‘가 된다.
인간이 만든 차이를 두고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언설이다. 이 언설은 사회적 구성물인 차이를 본질적인 속성으로 전제한다. 이때 차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공정함이 아니라 배려와 관용이다. 차이는 해소하거나 인정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융합은 차이의 발생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사유, 즉 권력과 지식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자연스러운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 P151

더구나 인류는 공통어가 없다. 외국어는 물론이고 수어, 방언도 존재하는데 이는 축복이다. 만일 한 가지 언어(지금은 영어)만 있다면 끔찍할 것이다(완벽한 지배는 완벽한 소통 상태일 때만가능하다). 또한 소통 불가능한 구조의 핵심은 말하는 사람마다젠더, 계급, 인종 등 사회적 위치가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가 매일 겪는 일이다. 저마다 자기 입장이 있다. 지배자의 입장을 내면화하는 통념과 상식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든, 모든 개인은 입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상황에서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무섭다. 이것은 생각하지 않는 상태, 폭력이다.소통은 가능하지도 않고, 어떤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 P153

우리의 삶은 수많은 차이의 교차로에 놓여있다. 융합은 차이들을 재배치하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사유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기존 인식과 갈등 상황에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다른 목소리가 유리하다. 이것이 뉴 노멀이다. 뉴 노멀은 특정 시기에만 요구되는 기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생명의 본성이다. 인생무상이다. 삶에는정상(正常), 노멀(normal)한 상태가 없는 법이다. - P156

당연히 하나의 기준(uni/versal)이나 다양한 기준(poly/versal)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와 ‘여러 개‘를극복하는 융합으로서 횡단의 정치(trans/versal), 연대의 정치(coalition), 유목적 사유(과정적 사유)가 등장했다. 이것이 융합이다. 니라 유발 데이비스, 퍼트리샤힐 콜린스, 로지 브라이도티가 대표적인 학자들인데 모두 페미니스트이다(이들의 책은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 있다).
"통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여럿이 되는것이다"(둘은 적대적 공존이라는 통치 세력 간의 ‘하나된 상태를 말한다)는 한국 현대사에 기록될 명언이다. 1984년에 창립된 여성운동단체 ‘또 하나의 문화‘가 외쳤던이 주장을 생각하면 지금의 여성주의 언어는 후퇴했다. ‘또 하나의 문화‘의 영어 표기(Alternative Culture)에서 보듯, ‘또 하나‘는 다양성 중의 하나가아니라 대안이라는 의미다. - P162

모든 지식이 저절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노력이 없 - P162

으면 보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그래서 나는 보수의 반대말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진보‘도 공부하지 않으면 보수적, 방어적이 된다. - P163

하지만 세상은 복잡한 법. 인간사는 합리적이지 않고 법칙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한 가지 시각으로는 문제를 파악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없다. 아니, ‘해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해결인가? 피해의 기억은 투쟁을 통해 재해석할 수있지만,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나마 자기 갱신만이해결에 가까울 뿐이다. - P167

 ‘독도‘와 ‘위안부‘는 다른 이슈다. ‘우리‘는 논쟁하지 않았다. 군 위안부 운동 논란의 쟁점인 ‘돈, 피해자, 조직, 역사 쓰가. 전반에 걸쳐 비위(非違) 제보가 넘쳤는데도 명백한 사실조차 발설이 금기시되었다. 금기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아무도! 그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다.
중산층 가족의 계급 재생산, 남성 세력간의 갈등으로 변질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전한 일본관. 세 사건은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 P170

실업, 기후 위기에 시달리고 미세 플라스틱이 몸에 축적되는시대에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나 엄청난 부자를 제외하곤 나이 불문하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더워서 미칠 지경이다. 그러니 누가 더 억울한가를 두고 경쟁하지 말자. ‘적‘은 따로 있다. 나는 조금은 비굴한 태도로 젊은이들에게 부탁한다.
당신들은 시간이 있지 않은가.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애정어린 조언을 잊지 말라. 나이 들었다고 모두 ‘설명충‘은 아니다.
당신들이 적대해야 할 이들은 청년층의 ‘취업‘을 ‘시간당 최저임금‘ 논의로 변질시킨 정치인과 자본가들이다. 사회 변화를 원하진 않으면서 당신들에게 아부하는 이들을 믿지 말라.
우리는 각자 나이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가난하고 나이든 이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간주되는 이들을존중하자. 이것이 공정이다. - P177

문명은 여성의 타자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성을 인간의 대표로 만들기 위해 다른 인간은 배제되어야 했다. 겉보기에 남성과 다른 존재, 타자(the others)가 필요했고 ‘바로 옆에 있는‘ 대상인 여성이 가장 적합했다. 백인과 유색인종,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가 대칭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도 대칭적이지 않다. 단지 가부장제가 인간을 남녀로 구분했기 때문에 여성이 인구의 반이라는 현실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타자 중에서가장 큰 집단이기에 대칭적으로 보이기 쉽다. - P182

짧은 머리 여성과 김건희 씨를 향한 비난을 여성 혐오라고 보는 것은 환원주의지만, 세 남성의 결혼의 성격이 같다는 주장은 환원주의에도 미달한다. 성차별주의 같은 ‘쉬운 지배 이데올로기‘도 실천할 줄 모르는 분별력이 없는 경우다. 말로 인해 화(禍)를 부르거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일을 면하는 방법은 침묵뿐이지만, 침묵 여부를 결정하는 일도 판단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 P185

요약하면 융합은 원래 존재했고(혼종성, hybridity), 대화가 필요하며(learning), 기존의 지식을 넘어서야 한다(trans~). 물론세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경제학의 예를 들어보자. - P191

기본 소득은 지구 전체의 긍정적인 상호 작용을 위한 생명 자체의 권리이다. 기본 소득은 자본 중심이 아니라 자연 중심 글로벌주의의 일례다.
대개 기본 소득을 부의 재분배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사회적 관계속 존재 자체에 대한 대가다. 물론 그 액수는 사회마다,
구성원마다 다를 수 있다. 인간의 경제활동을 ‘노동‘보다 ‘기여분‘으로 논의하자는 것이다. 기본 소득을 받게 되면 노동을 많이 하는 사람은 손해본다고 생각하는데, 실상 임금 노동자의
‘억울함‘은 사회 전체의 부를 나눔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자본가의 횡포, 금융 자본의 ‘장난‘으로 인한 것이다. - P195

그런 의미에서 한글(Hangeul)도 전 세계 수많은 언어 문자중 하나의 지칭이지, 한글 자체가 우리글/말(이하 우리말)은 아니다. 아마도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기 위해서겠지만 최근 몇몇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대신 ‘한국어문학과‘라고 표기하는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말과 한국어는 다른 단어다. 우리말은 ‘나(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현지어‘다. 한국어는 우리말의 일부일 뿐이다. 한국인이 외국인에게 자주 하는 말, "한국어를 잘하시네요"와 "우리말을 잘하시네요"는 한국어와 우리말의 차이를 보여준다.
"한국어를 잘하시네요"가 맞다. ‘우리말‘에서 누가 우리인가?
‘우리‘는 이미 상대방을 배제한 말이다. 또한 칭찬일지라도 타인의 언어 능력을 평가하는 표현도 실례에 속한다. - P204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인종, 계급, 젠더를 둘러싼 고정 관념이 있다. 물론 흑인, 여성,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편견이 강하고 대개 ‘생물학‘이 근거로 동원된다. 고정 관념에는두 가지로 대응이 가능하다. 하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차이는 개인차일뿐, 집단 전체를 특징지을 수 있는 동일성은 없다. 또 하나는 ‘현실‘임을 인정하고 이를 재해석하는것이다. 여성은 주차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는 그만큼주변을 살피는 안전한 운전자라는 의미다. - P210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자신의 입장을 경유한 부분적인 것이다. 진실을 전제하면 부분성, 상황성, 맥락성은 드러날 수 없다. 두 ‘백서‘의 사례 중에는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건도있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일, 무관심한 사건도 있다. 이것은 회색인의 관점이 아니라 나의 이해(利害)와 관련한 사안별접근이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사안마다 설득력이 다르고, 내가 아는 ‘팩트‘와 달랐다. 흑백으로 나누지 말고, 사안별 횡단이필요하다.
흰색과 검은색은 본디 명도 차이가 커서 조화가 잘된다. 색상 차이가 클수록 조화롭다. 그래서 도로의 위험 경고 표지는검은색과 조화롭지 않은 노란색을 사용한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나온다. - P223

융합이 왜 융합일까. 융합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 자본은 융합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핵심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그대로인데 학생을 유치한다고 다양한 학과 이름을 만든다. 나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이를 위해 어떤실천이 필요한지를 아는 데 융합이 중요한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융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다. 가치관, 당파성이 문제를 인식하는 범위와 초점을 정한다.
문재인 정부 내내 우리 사회는 검사 한 명이 의제를 장악하고전 국민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공동체 구성원의 안목이 부족하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 P2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육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에 아직도 동의하는 이들이 있을까. 교육이나 환경 문제는 중대한 일이어서 당장 필요에 따르기보다는 멀리 보고 큰 틀에서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들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구 멸망이 눈앞에 있는데 언제 백년 후를 생각한단 말인가. 마르크스는 1883년에 사망했다. 마르크스의 사후 백 주년인 1993년이 PC통신 시대였던 걸 생각하면 지금 ‘발전‘ 속도는 얼마나빠른가. 백 년 전 지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장매일 집계되는 코로나19 확진자 숫자가 코앞의 뉴스다. 2021년에는 북미 대륙 서부 기온이 49.5도까지 치솟으면서 수백 명이사망했다. 교육이 아니라 하루의 생존이 큰일, 대계(大計)다. - P129

학교의 역할은 공부를 가르치는 데만 있지 않다. 학교는 ‘가정처럼‘ 미래 세대를 위한 돌봄 기관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가족도 학교도 아이들도 행복하지 않다. 정말 때가 왔다. 학교를없앨 수 없다면, 다른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 P133

융합은 초월적 위치에서 여러 가지 지식을 합하는 관념이 아니다. 현실에서 출발해 (rooting) 필요한 실천으로 옮겨 가는(shifting) 이동의 사고이자 해결책을 찾는 전술적 사고(실사구시)다. 현실 인식이 너무 늦으면 우리의 자리(뿌리)는 썩는다. 이글은 "타인의 편집된 삶과 나의 전체 삶을 비교하는 불행"이라는 문장을 읽은 후의 감상이다. 나는 근래 이보다 정확한 현실인식과 통찰을 읽은 적이 없다. 앞에서 말한 김영우 작가의 책에서 인용한 것인데 그의 중학교 3학년 자녀가 쓴 글이다. - P133

방송인이나 정치인의 학위 논문 표절은 일상의 뉴스다. 청문회에서 표절이 문제 되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있었던가. 우리사회는 표절을 관례(ritual)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통과 의례(ritual, ‘儀式)도 있다니! 의례가 아니라면 이 관대함을 설명할길이 없다.
대개 표절을 윤리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표절로받은 학위를 근거로 삼아 방송에 나와 큰돈을 벌거나 평생 고용의 수혜를 입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거래행위가 아니므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 학계의 표절은 대중적으로 잘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 횡행한다. 관련 전공자들은 알고 있지만 동료를 고발해서 좋을 일이 없다. - P134

인생 공부를 포함해 공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상, 읽기, 여행, 경험과 그 해석, 인간관계, 쓰기………. 그중에서도 나는 ‘쓰기‘가 공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 공부를 할 때도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중 쓰기가 가장 어렵다.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쓰기와 실험외에 모르는 것을 아는 방법은 많지 않다. 생각과읽기가 공부의 주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수학 공부의이치와 비슷하다. 남이 풀어놓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읽기)과자기가 직접 푸는 능력(쓰기)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수학 점수가 안 오르는 지름길이다. - P138

이럴때는 글쓰기를 정지하고 모든 것을 재점검해야 한다. 쓰다가길을 잃은 느낌이 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최초의 문제의식과 다른 내용을 쓰고 있거나, 자기 생각을 뒷받침할 사유 틀(‘이론‘)을 찾지 못해 ‘이론을 창시하는 고통‘을 겪고 있거나, 사례가 적절하지 않거나, 애초에 문제의식 자체가 틀렸다거나….
이 과정에서 내가 모르는 것, 부족한 것을 깨닫고 쓰기를 반복해야 한다. 겪어야만 깨달을 수 있고, 이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된다. 과학자는 실험을 반복하고, 글쓴이는 쓰기를 반복한다. - P139

프로 운동선수나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은 연습을 거듭한다. 연습을 훈련(訓練)이라고 하는 이유다. ‘훈(訓)‘은 해석,
풀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몸에 도장을 ‘새길 만큼‘ 익힌다는 뜻이다. 우리는 위대한 운동선수나 예술가들의 영광을 보지만 사실 그들의 영광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습한 몸의 결과다. 연습이 예술(art, 기술)이다. 공부는 쓰기가 연습이다. 글쓰기의 좌절에 익숙한 나는 ‘완벽한 글은 없어도 완벽한인생은 있지 않을까‘하는 망상에 자주 빠진다. - P139

새로운 글, 익숙하지 않지만 뭔가를 시도하는 글, 논쟁적인 글을 쓰려는 이들에게 표절 문화는 우주로 떠나고 싶을 만큼의 절망이다. 한국 지식 사회의 절도 문화는 왜 이리 당당할까.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중세가 안착했다. - P140

"아버지(master)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 없다."
이 말의 주인공인 미국의 시인 오드리 로드는 페미니스트, 흑인, 동성애자, 유방암 환자로 살았다. 로드는 자기만의 언어로현실을 인식하고 변화를 추구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그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언어는 ‘중층‘의 억압 속에 살았던 로드뿐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다. - P143

언어의 역할이 분명히 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는 매일 마주치는 삶의 장벽이다. 나는 소통의 불가능성에 희망을 걸겠다. 소통이 가능하다는 환상은 절망과 분노로 바뀌기 쉽다. 세상에서통용되는 말들은 대개 나와 무관한 이들이 만든 말, 소위 이데올로기이다. 물론 그런 말조차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인생이대다수다. "속 시원히 한번 말해봤으면" 같은 소망을 품어보지만, 그 말을 누가 들어줄 것인가도 문제다. 이 시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몸부림이 아닐까. 코로나 시국에 이른바 유명인들이 모여 와인을 마시든 파티를 하든 누가 알겠는가. 그들 자신의 업로드로알려진다. 욕을 먹어도 좋으니 자기를 봐 달라는 이들의 표정은행복하다. - P144

말이 안 통하는 세상이니 ‘아버지의 도구‘조차 제대로 그 기능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니, 그래서 ‘아버지의 연장‘일까.
정확한 인식을 방해하는 단어가 산더미다. ‘노동 시장 유연성‘
‘성희롱‘ 같은 노동과 젠더에 관한 번역어들은 현실을 완전히왜곡한다. 기존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검열과 사회적 검열까지 겹치면 침묵이 답이다(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내게 침묵은 완벽한 좌절 혹은 들끓었던 몸이 소진된 상태다. - P1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지자

마취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 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번호가
45 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좌석번호가
11b 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리는 순리를 기억할 것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 P16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 P17

사람의 금

많은 청귤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고 몇 바늘을 꿰맸다
나는 평생 살을 꿰매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극단적으로 금이 갔다

한동안 붕대를 감고 사느라 시원하게 씻지를 못하고
손가락 형편이 나아져 목욕탕에 갔는데
죄다 보이는 건 사람 몸에 난 흉터다

꿰맨 자리
어긋난 부위
몸 한쪽이 움푹 패여 젓ㄴ룩일 수밖에 없는 걸음걸이
그나마 무사한 사람은 그동안의 나였나 싶다

그러다 하반신에 의료용 테이프를 붙이고
목욕하러 들어서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목욕의자에 앉아 떼어내는 테이프 길이만도족히 사 미터가 되는 길 걷눈질해서 보았다

태풍에 담이 허물어지면 남의 집 담만 보이고술에 되게 당한 어느 날 이후에는
술에 취해 집에 앉아 정신 놓은 사람만 보인다
자석 앞의 쇳가루처럼 당겨진다 - P46

퀘맨 손가락이 낫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매달리며 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봉합으로 살을 이으려는 것이
쩍 하고 금이 가 벌어진 사람과 사람의 처지를
이어보려는 안간힘하고 뭐가 다르겠나 싶은 것이다

붙지 않는 것들을 참 착실하게도 가려놓고 살고 있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