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9~10권으로 서울편을 두 권 펴낸 뒤 여타서울 답사기를 어떻게 쓸 것인가 많은 고민이 있었다. 사실 이미 펴낸서울편은 창덕궁을 비롯한 5대 궁궐과 한양도성, 성균관, 동관왕묘 등조선왕조의 왕실 유적들만을 답사한 것이다. 그러니 이를 진정한 서울답사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양 정도(定都) 600년의 역사가 남긴 문화유산 이야기는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서울의 문화유산은 개화기와 근대를 거치면서 많이 사라지고변질되어 의연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현재의 삶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말하자면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현재진행형인 것이니 이제까지의 답사 유적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버릴 생각도 했다.
그러다 5년 전, 서울편 출간 기념으로 서울시에서 ‘유홍준과 함께하는 서울 답사‘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몇 차례에 걸쳐 사대문 안 곳곳을시민들과 함께 다니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 P4

나는 서울 서촌에서 태어나 거기에 살면서 초·중·고·대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는 인왕산 밑에 있었고, 중학교는 북악산 밑에 있었다. 인사동은 미술계에 입문한 후 이날 이때까지 나의 사회생활이 이루어지는내 인생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이때 북촌, 서촌, 인사동 등을 답사하면서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이야기를 곁들여주면 답사객들은 문화재에 대한 해설보다도 나의 지난날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듣는 것이었다.
특히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온 한 중학생이 내게 바짝 붙어 다니면서 마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듯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인왕산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쉬어 갈 때도 내 곁에 붙어 앉아서는 무슨 얘기라도 해주려나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도멋쩍었던지 손에 든 귤을 까서 권하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근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선생님 어렸을 때 얘기가요."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선생님과 띠동갑이에요." - P5

이리하여 나의 체험적 서울 답사기로 서촌·북촌· 인사동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데 막상 글을 써내려가자니 이제까지 답사기 형식과는 전혀다르게 되어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나의 이런 개인적 증언이 독자들에게, 또는 답사기로서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주저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애초 마음먹은 대로 나의 체험적 이야기로 서울 사대문 안 답사기를 써내려간 데에는 두 가지가 힘이 되었다.
하나는 『천변풍경』의 박태원이 소설 기법으로 받아들였다는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이다. 고현학은 과거의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考古學, archae-ology)의 방법론을 현대 생활사에 적용하는 민속학적 방법론으로 일본의 곤 와지로(今和次郞)가 관동대지진(1923) 이후 도쿄의 주거생활을 연구하면서 내건 개념이다. 이런 고현학의 입장에서 본다면울 묵은 동네에 대한 나의 기억과 서술은 그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6

북악산(山명승 제67호)은 높이 342미터의 화강암골산으로 서울의주산(主山)이다.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불리며 전체 면적은 약 360만제곱미터(약 110만평)이다. 산줄기의 흐름을 보면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중간지점에 있는 금강산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광주산맥)이 북한산을 거쳐 북악산에서 문득 멈추고 양팔을 벌린 형상이다.
북악산 서쪽으로는 인왕산(仁王山, 338미터), 동쪽으로는 낙산(山125미터)이 있고 남쪽으로는 남산(南山 262미터) 너머로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있다. 이들이 서울의 내사산(四山)으로 아늑한 분지를 이룬다. 북악산의 형국을 자세히 보면 마치 벌이 엎드려 숨을 쉬는 듯한 모습이어서 어느 풍수가는 여기서 나오는 기가 서울을 600년 넘게 한반도의 수 - P11

장 밖 북악산 지역은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수도 한양의 방위체제상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과 북소문인 창의문은 평소에는 닫아두고 필요할 때, 이를테면 창의문은 군사 이동이 있을 때, 숙정문은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낼 때만 열어두었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기 때문에 공간 운영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간혹 고려시대 남경의 터가 경복궁 후원(현 청와대) 자리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최종현이 『오래된 서울』(동하 2013)에서 고증한 바대로 경복궁 안 서북쪽 모서리(향원정과 태원전 사이)의 빈터라는 설이 훨씬 설득력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그 옛날에 비스듬한 평지를 놔두고 가파른 산을 어렵게 깎아 행궁을 지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경복궁 뒤 북악산은 자연산림 그대로였다. - P14

내가 지금 북악산과 청와대 답사기를 쓰고 있지만 사실 청와대는 금단의 구역이고 비공개 사항이 많기 때문에 자료 수집에 한계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통령경호실에서 2007년에 발간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이 있어 어려움 없이 답사기를 쓰고 있다. 이 - P44

책은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한 이성우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이재직 시절 심혈을 기울여 거의 완벽하게 펴낸 자료집이다.
내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2007년 염상국 대통령경호실장이 어느 날 내게 전화해 ‘청와대의 역사유적을 소개하는 책을 준비해왔는데 한번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나는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는 마음으로 흔쾌히 응했다.
이리하여 이성우 본부장이 가편집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을 가져왔는데 이를 보면서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약 500면에달하는 이 책은 북악산과 청와대 주변의 문화유산에 대한 실록, 지도, 옛사진, 신문 기사, 청와대 내부 문서 등의 관계 자료를 현장 사진과 함께총망라했다. 그뿐 아니라 낱낱 유적의 역사적 사실을 입체적으로 고증했다. 그때 나는 이건 학술조사가 아니라 수사관의 현장검증 보고서 같 - P45

다는 감동을 받았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宮)가 말하기를 서화를 보는 눈은 ‘금강안(金剛眼) 혹리(酷吏手)‘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즉, 금강역사처럼 부릅뜬눈으로 보고, 혹독한 관리가 세금을 메기는 손끝처럼 치밀하게 따져야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이야말로 ‘혹리수‘가 펴낸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나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만 재확인을 해주고 기꺼이 추천사를 써주었다. 그리고 그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시상식 때이성우 본부장에게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 책은 2019년에개정판이 발간되었다. - P46

그런데 이 뛰어난 베테랑 ‘문화재 수사관‘도 확인되지 않는다며 미제처리한 유적이 몇 있다. 대표적인 유적이 관저 옆에 있는 침류각(枕流閣) 건물이다. 이 건물은 기역자 형 한옥으로 세벌대 기단 위에 사각주추를 얹어 기둥을 올렸으며, 대들보가 5개인 5량집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다 오른쪽 한 칸은 높은 장초석(礎石)위에 누마루를 설치해 기품이 당당하다. 전후면 중앙에불발기창(실내를 밝히는창)을 두고 아래위로 띠살과 교살로 구성한 창호들도 아주 품격이 높다.
목재를 보면 1900년 전후에 지어진 왕가의 건축인 것이 분명한데 <북궐도형〉을 비롯한 모든 자료를 찾아보아도 침류각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 건물은 1989년에 관저를 신축할 때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추정컨대 원 건물의 위치는 물길이 흐르는 곁에 있었을 것이분명하다. 우선 건물 이름이 ‘계곡을 베개로 삼는다‘고 ‘침류‘라 했기 때 - P46

문이다. 또 2019년 상춘재 앞으로 옮겨놓은 천록(天祿)이라는 돌조각상은 처음에 침류각의 기단 앞에 있었다고 하는데, 천록상은 보통 물가에놓이는 조각상으로 이것은 창경궁에 있었던 천록상(국립고궁박물관 소장)과 한쌍으로 보인다. 거기에다 괴석받침과 드므까지 갖추고 있었다는것을 보면 궁궐 건축임이 분명한데 어디서 옮겨온 것인지 더욱 궁금하기만 하다. 아무튼 청와대 안에서 가장 볼 만한, 어떤 면에서는 유일하게아름다운 건물이 침류각이다.
고건축은 그 유래가 분명해야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워낙에 아름다워 유래가 불분명함에도 1997년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 P47

또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건물은 오운정(五雲亭)이라는 정자다. 청와대 관람은 관저 뒤편의 산으로 올라가는 길까지 개방되어 있다. 이 길을따라 올라가면 ‘미남불‘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그리고 ‘천하제일복지‘ 암각글씨가 나오는데 그곳에 이르는중간에 아름다운 오운정이 나온다.
이 오운정은 현재 청와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정자로 아주 멋진 건축이다. 사방 한 칸에 난간이 둘러 있는 단순한 구조지만 푸른색의 네짝여닫이 분합문(分關門) 창살의 가는 살대가 가지런하고, 우진각지붕이겹처마로 길게 뻗어 있어 단아한 가운데 무게감이 있다. 단청도 아름답다. 여기에다 멋들어진 초서로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 글씨로 우남(雲南)이라는 호와 ‘이승만 인(印)‘이라는 도장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오운정 또한 제자리가 아니다.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던 것을1989년 관저 신축 매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 P48

궁궐지」를 보면 북쪽에는 오운각(閣) 10칸, 동쪽에는 옥련정(亭) 1칸, 서쪽 가에는 벽화실(室) 9칸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북궐도형>에 그려진 옥련정의 평면도를 보면 이 오운정과 일치한다. 그래서나 혼자 생각에 혹시 세월이 많이 흘러 이승만 대통령 시절엔 옥련정과오운각을 혼동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보게 된다. - P49

오운정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미남불이라 불리우는 경주 방형대좌석조여래좌상이 나온다. 이 불상은 본래 경주 어딘가에 있던 것을1912년 데라우치 총독이 가져와 당시 남산 왜성대에 있던 총독부 건물에모셨다가 1939년 조선총독 관저가 청와대 자리에 신축될 때 옮겨왔다.
처음에는 저 아래쪽 ‘천하제일복지천‘이라는 샘터 뒤쪽으로 모셔졌는데1989년 관저를 신축하면서 지금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본래대좌가 상중하 3단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나 지금은 상단만 남아 있고 팔과 어깨, 등허리에 파손된 부위가 있어 2007년에 보존 처리했다고 한다.
이 불상의 원위치는 그동안 경주 남산 불상 계곡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초대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사오의『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1916)에서 경주 도지리(道只里) 이거사(車寺) 터를 말하면서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大正) 2년(1913) 중에 총독 관저로 옮겼다"고 언급한 것이 최근에알려져 현재 이 절터에 온 것이라는 설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불교미술사가 중에는 아직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이론을 제기하기도 하니 이거사 터의 발굴 등을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 P51

이 불상은 조형적으로 뛰어나 1917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도 실려 있다. 이 도록에서는 소장처를 왜성대라고 했다. 이불상은 상호(얼굴)가 미남형이어서 일찍부터 미남불이라는 애칭을 갖고있었던 듯하다.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에서는 이 석불을 취재하면서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경주의 보물"이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이 불상은 774년에 완공된 석굴암 본존불 양식을 이어받은 전형적인 - P51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으로 대개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견편단에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는 늠름한 자세에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후덕한 인간미를 풍긴다. 어깨와 가슴에는 볼륨감이 나타나 있고 옷주름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목에는 삼도가뚜렷이 나타나 있다. 과연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불상의 이미지를 탁월하게 나타낸 미남불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하여 이 불상은 2018년 보물 제1977호로 지정되었고, 유물 명칭은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慶州方形臺座石造如來坐像)〉으로 명명됐다. - P53

윤석열정부가 들어서고 대통령 집무실은 용산 국방부 건물로, 관저는한남동으로 옮겨가면서 청와대는 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5월 10일부터일반인에게 전면 개방되고 있다. 예상한 대로 많은 인파가 몰려 오랫동 - P55

안 금단의 지역으로 있으면서 전 대통령들이 근무하고 기거하던 청와대를 구경하고 있다. 어차피 대통령이 떠난 곳을 국민에게 개방한다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문부터 열고 보았기 때문에 많은 잡음이 일고 있다. 혹은 청와대 구관을 복원 또는 축소 복원하겠다고 했다가 국민적 반발에부딪혔고, 미술관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운을 띄우기도 했지만 그 미술관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최근에는 패션잡지의 화보 촬영 장소로 제공되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문화재청장과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장을 지낸 나로서는 청와대 개방 문제에 대해 개인 의견을 내는 것에 신중할 수밖에 없어 그동안 언급을 자제해왔지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로서 한마디 의견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P56

56현실적으로 이미 개방된 청와대의 문을 다시 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나아가서는 최종적인 개방 형태에 대해서는 명확한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청와대라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앞으로어떻게 사용할 것이라는 마스터플랜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는 대통령혹은 문화부장관이나 문화재청장 개인의 상식적인 소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단편적이고 아이디어제공이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건축설계 경기‘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이것은 세기적인 설계 경기로 국제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을 것이다. 이때 반드시 커미셔너나 코디네이터 주도하에 추진해야 한다. 지금 정부에서 해야 할 일은 뛰어난 건축가에게 이 책임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그 설계 경기는 국내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세계적인 프로젝트로 진행해야 좋은 마스터플랜도 구할 수 있고 더불어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 - P56

을 일으키며 국가 홍보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방향에서 청와대가 재정비되어 우리 시대의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간절하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