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토박이
1993년, 서울시는 정도(定都) 600년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토박이‘를조사했다. 선정 기준을 ‘선조가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계속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으로 확정해 조사한바, 서울시민 1,100만명 중에서 해당자는 오직 3,564가구, 1만 3,583 명에 불과했다. 나는 그중 한 명인 서울토박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1960년대에도 사대문 안 서울 알토박이를 조사한다며 윤보선 대통령도 했고 누구도 했으니 해당되는 사람은 신고하라고 했다. 그때 큰아버지께 우리 집안도 신고하자고 했더니 "그런 거 신고하면 주민세만 더 내라고 할지 모르니 쓸데없이 신고할 생각하지 마라" 하셔서 못했다. - P59
오히려 한양의 서쪽인 서소문 정동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서촌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북촌의 가회동 한옥마을이요즘 말로 ‘핫플레이스‘로 떠오르자 여기에도 한옥마을이 있다는 것을내세우기 위해 서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가 분명하다. 더 정확히는 북촌의 지가가 올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생기고 들어갈 여지가 좁아지자골목골목 전통마을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이쪽으로눈길을 돌리면서부터 생긴 이름이다. 이에 종로구에서는 바야흐로 주목받는 이 동네 이미지를 부각하기위해 새로운 이름 짓기를 시도하여 세종대왕이 통인동에서 태어났다는것을 내세워 세종마을이라고 명명했고 ‘사단법인 세종마을 가꾸기회도생겨났다. 또 청계천 상류인 이곳 일대를 상촌(上村), 웃대라고 불렀다며새로 지은 한옥문화공간의 이름을 ‘상촌재(上村齋)‘라고 했다. - P61
그러나 세종마을은 동네 이미지에 맞지 않고, 웃대는 어색하여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 아무리 관(官)이 강조한다고 해도 민(民)이받아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새 시대 사람들이 새롭게 주목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이름이 서촌이니 민의 흐름에 따라 그냥 서촌이라고 부르는 게 차라리 낫겠다. 조선시대 한양의 행정구역은 국초부터 5부(部) 52방(坊)으로 구분했다. 서촌 지역은 북부(北部) 관할이었고, 이 지역엔 북부의 10개 방중 준수방(俊秀坊), 순화방(順化坊), 의통방(義通坊)이 있었고 나중에 적선방(積善坊)이 추가된 것으로 나온다. 행정구역과는 별도로 경복궁 서쪽 지역은 통상 장의동(壯洞), 줄여서 장동(壯洞)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는 필운대 · 옥류동·청풍계·백운동까지 북악산과 인왕산 일대 명이 다 들어 있다. 그러니까 서촌의옛 이름은 장동인 셈이다. - P61
이 통의동 길가에는 녹지공간으로 통의동 마을마당이 조성되어 있고, 진화랑, 아트스페이스 화랑이 있고, 조금 더 가면 문화재단인 아름지기가 나온다. 아름지기 건물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종규 교수가 설계한현대식 건물과 그 2층에 김봉렬 교수가 설계한 한옥이 잘 어우러져 건축학도들이 많이 찾아간다. 아름지기 안쪽에는 젊은 관람객들이 많이찾는 대림미술관이 있다. 길가를 길게 차지하고 있는 코오롱빌딩을 지나 고궁박물관과 마주한곳에는 항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들어서는 금융감독원 연수원이 나오고, 적선골 음식문화거리로 안내하는 골목길을 지나면 이내 광화문에서 사직단으로 뻗어 있는 율곡로와 만나게 된다. - P71
영조는 즉위 전 연잉군 시절 창의궁에서 9년간 살았고 왕이 된 뒤에도자주 찾아왔다. 창의궁은 규모가 아주 컸고 한때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사당이 설치되어 있었다. 1908년 창의궁은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갔는데 1917년 기록에 의하면 전체(통의동 35번지)가 2만 1,094제곱미터(약 6,380평)였다. 이후 ‘동척 사택 단지‘로개발되면서 2층 양옥들로 가득해 나 어릴 때는 부자 동네로 통했다. 월성위궁은 창의궁 바로 남쪽 적선동에 있었다(적선동 8-4번지). 월성위궁에는 1758년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죽은 뒤 사당이 설치되었고 이후아들 김이주, 손자 김노영, 증손자 김정희까지 약 80년간 경주 김씨 월성위의 후손들이 여기 살았다. 그래서 추사가 어린 시절을 여기서 보냈던 것인데, 1840년 추사가 제주로 유배된 뒤 이 집은 몰수됐다. 이에 월성위궁 터에는 ‘김정희 본가터‘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 P75
겸재 정선은 여기에서 52세까지 살다가 지금의옥인동 군인아파트가 있는 인왕산 아래 인곡정사로 이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산수화를 ‘진경산수‘라는 하나의 장르로 완성한 겸재는 사실천분이 뛰어난 화가는 아니었다. 몰락했어도 양반 출신이었기 때문에도화서 화원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훌륭한 스승과 뛰어난 벗들이 있었다. 장동 김씨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밑에는 겸재를 비롯해 사천 이병연, 담헌 이하곤, 이의현, 신정하 같은 제자들이 있었다. 또 관아재 조영석 같은 문인화가와 이웃에 살면서 학문과 예술을 교감했다. 그뿐 아니라 지수재 유척기 같은 노론의 대신도 가까이 살았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이들이 일으킨 문풍(文風)을 백악사단(白岳詞壇)이라고 했다. - P96
겸재가 진경산수를 개척한 결정적인 계기는 35세 때인 1711년(신묘년)금강산 기행이었다. 이때 벗 이병연이 마침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에재직하고 있어서 스승 김창흡, 벗 정동후와 김시보 등 다섯이서 금강산을 유람했고, 그때 받은 자연에 대한 감동을 화폭에 담아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牒)〉을 그린 것이 겸재가 진경산수화가로 나아가는첫 출발이었다. 이후 조영석의 증언대로 그는 그림을 그릴 때면 백악산과 인왕산을바라보며 우리 산천의 생김새를 탐구했고, 그가 그리면서 쓴 붓을 내다쌓으면 무덤이 된다고 할 정도로 끊임없는 수련과 연찬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 겸재 예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겸재 예술의 자산은 좋은 스승, 벗들과의 어울림, 학문·문학과 미술의 만남, 그리고 여행이었다고 할 수 - P96
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천 리를 여행하는 것이 문인의 길이라는 것을몸소 실천한 결과였다. - P97
서촌의 공간적 가치는 길에 있고 그 길 중간중간에는 작은 한옥들이담장을 맞대고 있는 골목이 있고 그 골목엔 역사 인물의 자취가 있고 길끝에는 유적지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인왕산이라는 아름답고 듬직한 산이 받쳐주고 조금만 올라가도 명승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과 가치가 더해진다. - P106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1950년대에 우리는 언커크가 무얼 하는 기관인지도 모르고 유솜(USOM, 미국 원조단)은 또 무엇인지 모르면서 미국에서 원조 물자로 보내주는 밀가루와 분유와 우리가 ‘빠다‘라고 부른 마가린을 배급받았다. 아무 반찬이 없어도 밥에 빠다와 간장을 넣어 비벼 먹으면 고소했다. 학교에서 겨울이면 조개탄 난로 위에 큰 양은주전자로물을 끓여 석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분유덩이를 풀어 마셨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각설탕이 있어 부잣집 아이는 그걸 까서 타 마셨다. 미국은 1956년부터 잉여 농산물을 한국에 무상 원조했다. 미국은1948년 이후 잉여 농산물이 계속 쌓여 미국 농업에 짐이 되었는데 이를바다에 버리느니 원조해주었던 것이다. 이게 더 싸게 먹혔다고도 한다. 결국 이 식량 원조는 전후 한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주었다. 밀가루 대량 원조는 쌀 위주의 우리 식생활도 바꾸어 밀가루 음식들이 발전했는데, 자장면이 큰 인기를 얻게 된 것도 이 영향이었다고한다. - P133
원조 자체는 무상이었지만 그 내용은 사실 공짜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원조 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권한은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 있어 원조 물자판매 대금의 상당 부분은 미국산 무기와 제품을 사는 데 쓰였다. 게다가 1958년에는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농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주요 원인은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잉여 농산물이 들어와 곡물가격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밀과 원이 대량으로 들어온 후 농촌에서는 목화밭과 밀밭이 사라져갔다. 이에 반해 면방직·제당·제분의 이른바 ‘삼백(三白)‘ 산업의 기업은 재벌로 성장해갔다. 기업이 원조 물자와 원조자금을 배정받는 것은 큰 이권이었기 때문에 정경유착도 관행처럼 이뤄졌고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 P133
극에 달하면서 결국 1960년 4·19혁명의 한 이유가 되었다. 화재 후 다른 곳으로 옮겨간 언커크는 1973년 12월 제28차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 결의로 해체됐다. 벽수산장에 화재 잔재가 완전히 철거된 것은 1973년 6월이었다고 한다. - P134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장인 손호연 시인의 한옥은 긴 미음자 집으로아주 단아한 구조인데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툇마루에 앉아 잠시 쉬어가고 싶게 하는 집이다. 필운동 홍건익가옥은 1935년 무렵에 세워진홍건익이라는 상인의 부잣집 한옥이다. 300평 가까운 대지에 일각문·대문채· 행랑채·사랑채·안채·별채 등 한옥의 제 요소가 언덕자락 경사면을 타고 배치되어 대갓집 한옥의 그윽한 멋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성격이 다른 세 채의 한옥을 비교해본다는 것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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