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은 오늘날 전통 한옥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북촌이 이렇게 명소로 부각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동안 이 일대를 개발규제 구역으로 묶어놓았던 것을 20여년 전부터 한옥보존지구로 지정하고 적극적으로 재정비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관광객들의 소음으로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부작용과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원래의 분위기가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를말하기도 하지만, 관광객들이 북촌을 거닐면서 즐기는 것을 보면 마치잃어버린 전통마을을 찾아온 듯한 기쁨이 스며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많이 찾아와 우리 전통문화의 체취를 느끼는 모습에서 나는 기특함과 뿌듯함을 느낀다. - P151
‘북촌 8경‘
북촌 1경 창덕궁 전경: 돌담 너머로 창덕궁의 전경이 잘 보인다. 북촌 2경 원서동공방길: 창덕궁 돌담길 따라 빨래터까지 올라가는 길. 북촌 3경 가회동 11번지: 한옥들과 전통문화 체험 공방이 있다. 북촌 4경 가회동 31번지 언덕: 기와지붕들 너머의 북촌 조망. 북촌 5경 가회동 골목길(내리막) : 한옥들이 맞대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북촌 6경 가회동 골목길(오르막) : 한옥 돌담들이 길게 뻗어 있다.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 1930년대에 지은 한옥밀집지구이다. 북촌 8경 삼청동 돌계단길: 경복궁·인왕산이 조망되는 돌층계길. - P152
북촌 답사를 백송에서 시작하는 것은 백송 자체도 자체려니와 개화파의 스승인 환재(齋) 박규수(朴珪壽, 1807~76)의 집이 여기 있었기 때문이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실학사상에 젖어 있어 16세 때 벌써 ‘태양, 지구, 달‘에 대해 읊은 시가 남아 있다. 18세 때 효명세자의 벗이 되어 1827년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뒤에는 세자의 명으로 『연암집(燕巖集)』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자 박규수는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며 18년간 은거에 들어갔다. 42세 때인 헌종 14년(1848)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로 있던 54세 때 (1860), 청나라 함풍제가 영. 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으로 열하(熱河)로 피신하여 조선 조정에서 문안사(問安使)를 보낼 때 자원하여 할아버지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그곳을 다녀왔고,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서세동점의추세에 대한 넓은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 P158
박규수의 재동 백송나무 집의 사랑방에는 북촌에 사는 똑똑한 양반 자제들이 모여들어 그의 훈도를 받았다. 유길준은 ‘어렸을 적 한시를 지어 박규수 대감에게 보여드렸더니 재주가 이토록 뛰어난데 왜 시무(時務)의 학문을 하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박영효는1931년 이광수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화파의 신사상은 모두 내 일가인 박규수 대감 집 사랑방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나의 형 박영교가 모두 재동 박규수 대감 집 사랑에서 모였지요. - P159
박규수는 예술을 보는 안목도 높아서 타계하는 바로 그해 가을에 작자 미상의 <죽석송월도(竹石松月圖)〉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기도했다.
무릇 그림은 예술의 하나로서 학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그림을 홀대함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형상이 아니라 뜻을 추구하는) 사의 화법이 유행하면서 대상을 정확히 그리는 것을 폐기했기 때문이다. 정밀하게 그리는 공부가 부족하고 그 번거로움을참지 못하여 단지 물줄기와 바위를 소략하게 그리고 적당히 수묵번지기에 그치면서 그것을 예스러운 간략함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이것이 고매한 선비가 여가로 그린 것이라면 소중히 여길 만하지만 사람마다 이와 같이 하여 심지어 직업화가인 화원들까지 기법과 힘쓰는바가 여기에 그친다면 그림의 세계는 망하고 말 것이다.
문인화풍의 유행이 지나쳐 그림의 본도를 잃음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만보자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2권에서 말한 바 있듯이박규수는 이처럼 세계를 보는 눈이 넓었고, 현실을 보는 눈은 깊었으며, 예술을 보는 눈은 높았다. - P161
광혜원은 2주 만에 이름을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바꾸었고, 1904년 미국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의 재정 지원으로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에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면서 기부자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병원이라고 했다. 그렇게 제중원이 남대문 밖으로 이사 간 뒤, 이 자리에는 1908년 순종의 칙령으로 공조(工曹) 뒤뜰(현 종로구 도렴동)에 설립된 관립한성고등여학교가 1922년에 새 교사를 짓고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이 학교가 경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그리고 1945년 경성여보가 정동으로 이사 가면서 이 자리에는1941년에 개교한 경성제3공립고등여학교가 창덕여자중(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들어왔고, 창덕여중·고가 1989년 방이동으로 이사 간 뒤1993년에 지금의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이 땅에 서린 역사가 이렇게길다 보니 만보자의 발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다. - P163
다시 발길을 옮겨 비탈길을 올라가면 고갯마루에 중앙고등학교 후문이 나오고 길 건너 감사원이 보인다.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면서 북악산자락에 감싸인 삼청동 골짜기가 내려다보인다. 옛 사람이 이렇게 전망좋은 곳에 정자 하나 마련하지 않았을 리 없는데 여기엔 여흥 민씨의 세도가 민태호가 1870년대 중반에 지은 ‘취운정(雲亭)‘이 있었다. 민태호가 갑신정변 때에 개화파에 의해 참살당한 뒤에는 그의 아들로 민승호(명성황후의 오빠에게 입양된 민영익의 차지가 되었는데 이곳은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한 곳이어서 더욱 유명해졌다. 유길준은 1881년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의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참가해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이때 일본의 문명개화 - P178
론자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한동안수학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민영익이 미국으로 가는 보빙사(使)의 단장을 맡으면서 수행원으로 참가할 것을 권유하자 이듬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때 유길준의 나이 27세로 일행 중 유일하게 영어와 일어를 쓰고 말할 줄 알았다. 사절단 업무가 종료된 후에 유길준은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머물며 수학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되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해야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변의 위협을 감내하고 1885년12월에 귀국했다. 유길준은 여지없이 갑신정변 개화파 일당으로 몰려체포되었다. 다행히 그의 재능을 아끼던 한규설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 - P179
할 수 있었고 한규설은 자신의 집에 그를 머물게 했다. 그러자 보빙사로함께 갔던 민영익이 유길준에게 자신의 취운정에서 연금생활을 하는 편의를 제공했다. 그 기간이 무려 6년이나 되었다. 이때 유길준은 그동안메모해온 것을 바탕으로 『서유견문』을 집필해 1895년에 출간했다. 이책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한문혼용체를 구사하여 서양 근대문명을 소개한 유길준의 ‘나의 서양문화답사기‘였다. - P180
이재완의 맹현 집에는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함께 살아 이 저택을맹현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들은 이달용, 이규용이고 손자는 사진작가 이해선(李海善, 1905~83)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낸 이해영(李海英, 1925~79)이다. 이 맹현댁은 1930년대 토지 분할 매각으로 점점 축소되다가 한국전쟁 후 안국동, 계동으로 흩어져 살고 결국은 대저택이사라졌다. 2019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이라는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중 한 파트인 ‘왕실종친의 삶‘에는 이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복식·가구·식기 등이 마치 고궁박물관 유물처럼 전시되었다. 더욱이 며느리 안동 김씨와 풍산홍씨는 궁중요리의 맥 - P186
을 이어 서울의 전통 음식: 북촌 맹현 음식물을 중심으로」(이귀주 지음, 고려대출판부 2012)에 구절판·냉채·메밀국수 등이 소개될 정도다. 나는 누구나 그렇듯 왕손이니 귀족이니 하며 능력이 아니라 신분으로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사라져야 밝고 건강한 민주사회가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유산의 관점에서 볼 때 왕족과 귀족이 누린 고급문화 자체는 귀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거의 독점적인 세련된 문화 형식을 나 같은 서민도 누릴 수 있게 확산되는것이 사회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P187
이러한 나의 주장에는 얼마든지 반론이 있을 수 있고, 또 오해의 소지도 많다. 그러나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에서 맹현대의 생활문화가 빠졌다면 그것은 평범한 민속이거나 가난한 문화의 나열이 될 수도있었던 것이다. 내가 북촌의 한옥마을 대갓집을 보면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맹현댁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이유도 그런 생각에서나온 것이다. 이는 유럽의 왕족과 귀족문화가 시민문화로 확산되어가는과정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바다. 각설하고 맹현은 진짜 고개다운 고개여서 여기는 가회동과 삼청동을가르는 기준이 되고 있다. 맹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대단히 아름다워 북촌 8경 중에서 4경부터 8경까지가 모두 이 주위에 모여 있다. 만보자는 이제 그 한옥마을의 진수를 보기 위해 한옥 지붕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고샅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P187
이렇게 일본인들이 북촌으로 진출하려던 추세에 정세권은 도시형 개량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함으로써 조선인의 주거지역을 확보해 오늘날북촌 한옥마을을 지켜낸 것이다. 그는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한 식민지 민족자본가이자 민족운동가였다.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일제에 맞서 신간회 · 조선물산장려운동·조선어학회 등에 참여하며 언론인안재홍, 국어학자 이극로 등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명망가들의 계몽운동 차원에서 일어났지만 정세권의 참여로 실천력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정세권은 낙원동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어 기증했고 재정을 담당했다. 또 이극로의 열정적 국어운동에 감명받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관을지어주고 역시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 P197
이처럼 민족운동을 지원하면서 일제의 탄압으로 구금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고 뚝섬의 토지 3만 5천여 평을 강탈당하기도 하면서 정세권의주택사업은 자연히 쇠락의 길에 빠졌다. 8·15해방 이후에는 행당동에거주했는데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 때 비행기 폭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리고 1950년대 말 고향 고성으로 낙향하여지내다가 1965년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금년(2022) 5월 3일 경남고성군은 정세권의 생가를 정비한 준공식과 함께 전시회를 열어 그의위업을 기렸다. - P197
계동에 있는 북촌문화센터는 ‘계동마님댁‘이라는 번듯한 한옥을매입해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 북촌은 최근 20년 사이에 전통이 있는 한옥마을로 새로 태어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통 한옥마을로서 북촌이 이룩한 명성을 유지하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관(官)이 주도하는 것보다북촌 사람들이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적인 사실은 그사이 아름다운 한옥들이 북촌에 재탄생했다는 점이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21세기 들어와 신축하거나 리모델링한 시내 한옥 중 우수한 것을 골라 ‘서울 우수 한옥 인증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첫해에 가회동의 채연당·지우헌·가회동성당, 계동의 한옥 게스트하우스인 락고재 등 14곳이 선정되었다. - P198
한옥의 현대적 계승에 전념하고 있는 건축가들의 의미있는 성취가가회동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2007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아름다운한옥‘으로 선정했고 디자이너 양태오가 사무실과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능소헌과 청송재는 건축가 김영섭의 작품이다. 서울산업대 나성숙 교수의 봉산재, 건축가 최욱이 지은 가회동 오설록 티하우스, 건축가 황두진의 무무헌 등이 있다. 이 아름다운 한옥을 내부까지 구경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다. 이에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은 2016년부터 ‘행복작당‘이라는 오픈하우스 행사를 진행했다. 행복이 가득한 집』 발행인의 가옥인 지우헌에서 출발해, 건축가들이 지은 한옥을 중심으로 하여 취죽당, 이음 더 플레이스 박실 작가의 한옥인 시리재, 한옥 호텔인 자명서실, 노스텔지어서울(히든재, 블루재, 힐로재) 등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이 행복작당은큰 호응을 얻어 지금도 해마다 열리고 있다. 이렇게 북촌 한옥은 자기 변신을 이루며 한옥마을의 전통을 한편으로는 지키면서 한편으로는 재창조해나가고 있다. 이리하여 만보자는북촌 답사의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아! 아름다워라. 우리 한옥이여!" - P199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의 거리는 인사동(仁寺洞)이다. 세계의 수도에는 한결같이 연륜을 자랑하는 독특한 문화예술거리가 있다. 베이징의 류리창(琉璃)은 고미술품 상가로, 도쿄의 간다(神) 고서점거리로, 뉴욕의 소호(SoHo)는 화랑가로,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és)는 문학인들이 드나들던 카페로, 모스크바의 구(舊)아르바트(Arbat)는 유서 깊은 건물에 기념품 가게가 가득한 차 없는 거리로 유명하다. 이에 비할 때 서울의 인사동은 그 모두가 한곳에 모여있는 전통문화거리다. - P201
이처럼 인사동 거리에는 항시 문예의 향기와 인간적 체취가 넘쳐난다. 인사동 거리의 이런 모습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씩 하나씩 쌓이고 쌓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인사동에 있던 고서점들이 문을 닫고 화랑들이 떠난 자리에 카페와 관광상품 가게들이 들어서는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문기(文氣)가 없어져가고 있음을 아쉬워하나, 젊은이들은 오히려어르신들이 만들어놓은 문예의 향기 속에서 자신들을 맞이해주는 공간으로 이곳을 즐기고 있다. 이처럼 인사동은 세대에 세대를 거치면서 변하고 변하면서 오늘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가히 서울답사일번지로삼을 만하다. - P203
태화관
일제강점기 초기 인사동의 가장 큰 명소는 태화관泰和館)이었다. 태화관은 인사동 네거리를 동서로 관통하는 인사동5길의 서쪽 들머리에있는 태화빌딩 자리에 있었다. 태화관은 대한제국 시절에 궁내부 전선사장(司長)으로 궁중음식과 왕실 잔치를 도맡았던 안순환(安連煥, 1871~1942)이 운영한 요릿집이었다. 안순환은 1910년 강제 한일합병으로 조선왕조가 멸망해 궁에서 나오게 되자 지금의 동아일보사 자리에 2층 양옥을 짓고 명월관(明月館)이라는 국내 최초의 유흥 음식점을 차렸다. 대단한 호황을 누리던 중 명월관이 불타면서 1918년에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본래 이 집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헌종 사후궁에서 나와 살면서 순화궁(順和宮)으로 불리던 곳으로 1907년 경빈 김씨 사후 흥선대원군의 사위이자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이 한동안 살았다. 그러다 1911년이완용이 매입하여 살다가 1913년 옥인동 저택이 완공되어 그리로 이 - P208
사하면서 세놓은 것을 1918년에 안순환이 들어와 태화관을 차린 것이었다. 전하기로는 이완용은 집에 벼락이 떨어져 놀라서 급히 이사했다고 한다.
태화관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33인(지방에 있는 4인은 불참)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기념비적인 장소이다. 이날 태화관을예약한 것은 손병희(孫秉熙, 1861~1922)였다. 손병희에게는 몇 해 전에 후처로 들인 기생 출신 주옥경(卿, 1894~1982)이 있었는데 그녀는 14세에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가 기예를 배우고 19세에 서울로 올라와 명월관에서 근무했다. 기명은 산월山月)이었다. - P209
주옥경은 마음씨가 곱고 노래와 서화에 능해 손님들의 귀염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기둥서방이 없는 기생 모임으로 무부기(無夫妓) 조합을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21세 되는 1914년에 손병희와 결혼해 명월관을 떠났지만 그런 인연으로 손병희는 태화관 사교1호실을 무리 없이 집결 장소로 잡은 것이다.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손병희는 태화관이 일본경찰에게 피해를 입지 않도록 최린(崔麟)을 시켜 안순환이 직접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고발하게 했다. 그리고 오후 2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 선언서 낭독에 이어 손병희의 선창으로 "대한독립 - P210
만세"를 제창했다. 그리고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온 80여 명의 일본 경찰에게 모두 연행되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35,000부를 찍었는데 첫 문장 "오등(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에서 조선(朝鮮)이 ‘선조(朝)‘로 잘못 인쇄되어 재판(再版) 때는 이를 바로잡았다. 현재 기미독립선언서 초판 원본은 몇 부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가 자필로 다음과 같이 쓴 부전지가붙어 있는 것이 유명하다.
이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3월 1일 하오 2시 탑동공원 안에서 각 학 - P211
교 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한 후 이 선언서를 뿌렸다. 나는 그때 뿌리고난 선언서 한 장을 보존하여 후손에 전한다. 나는 그때 휘문의숙 4년생으로 연령이 19세였다. 월탄 박종화
태화관 건물은 3·1운동 2개월 뒤인 5월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어서6월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普成社, 조계사 극락전 앞마당 회화나무부근)도 화재로 불타버렸다. 일본경찰은 실화라고 발표했지만 그걸 믿는사람은 없었고 모두 일제의 방화에 의한 것으로 의심했다. 보성사터 인근 수송공원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손에 쥐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 P212
고서점과 헌책방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농부 철학자 윤구병(尹九炳)은 9형제 중 막내로 형님이 일병이부터 팔병이까지 있는데, 바로 위 윤팔병(尹八炳, 1941~2018)은 본래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 넝마주이의 왕초이자 빈민운동의 대부였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한문과일어를 익혔고 사회과학서도 많이 독파해 인생관과 사회관이 뚜렷했다. 그리고 학생운동 하다 수배당해 도망다니는 속칭 ‘도발‘들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용돈도 준 의리로 유명하다. 윤팔병은 1985년 넝마주이 70여 명을 데리고 강남의 10여개 아파트단지에서 나오는 재활용품을 모으는 넝마공동체 작업장을 열었다. 어느날 그가 그림마당 민으로 나를 찾아왔다. 넝마를 인간 취급하지 않아 - P226
마』라는 잡지를 내려고 하는데 표지화 좀 추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중미술 그림 중 강렬한 이미지를 하나 골라주었더니 즉각 ‘그림에 서정성이 없다‘고 싫다며 컬러가 있는 걸 원했다. 그래서 박불똥의 컬러 사진 작품을 보여주었더니 "불똥이는 좀 관념적이구먼" 하고또 거절했다. 그래서 결국 이철수를 추천해 그가 그린 <거인의 아침>이라는 채색 목판화가 ‘넝마』 창간호를 장식했다. 확실히 철학과 인생이 있는 분이었다. 이후 나는 그를 ‘팔병이형‘이라고 불렀는데 1990년대 어느 날 강남의 영동고등학교 앞을 지나다가 고서집‘이라는 서점이 있어 들어가보았더니 팔병이 형이 주인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무슨 책이라도 하나 사드리고 싶었지만 참고서, 잡지, 싸구려 소설들로 꽉 차 있고 내가 볼 책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인사 - P227
만 드리고 가려는데 팔병이형 뒤쪽 책꽂이에 서울대 도서관에서 규장각 소장본을 영인본으로 펴낸 두툼한 장정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3책이 꽂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형님, 저 책이나 내가 사드리고 싶은데요" 하니 정색을하고 안 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값을 후하게 쳐드릴 건데요" 했더니 팔병이형은 찬찬히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가 보다시피 여기 있는 책들은 수준이 낮아요. 그래서손님이 잘 보이는 내 머리 위에 이 거룩한 책을 꽂아둔 거예요. 이게 있으면 ‘고서점‘이고 이게 없으면 ‘헌책방‘이 되는 거야. 뭘 좀 알고나 산다고 해."
윤팔병 형의 생애 마지막 직함은 ‘아름다운 가게 이사‘였다. - P228
통문관에는 ‘적서승금(積書勝金)‘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책을 쌓아두는 것이 금보다 낫다는 뜻이다. 이렇듯 선생은 누구 못지않은 애서가이자 훌륭한 서지학자, 국학자셨다. 2006년 10월 15일, 향년 97세로세상을 떠나시며 선생은 유언으로 수목장을 해달라고 하셨다. 진실로인생을 잘 사신 인사동의 큰 어른이셨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15년 11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나는 화요일 저녁마다 조계사 문화관에서 ‘화인열전‘을 주제로 공개 강좌를 열고 있었는데, 미소를 머금은 동안(童顔)과 걸음걸이가 이겸로 선생을 빼닮은 백발 어른이 내게로 다가와서는 "내가 통문관 셋째요"라는 것이었다. 고려대 중문과의 이동향 명예교수였다. 이교수는 요즘 선친 유품을 정리하다 이게 나왔다며 얇은 서첩 두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표지를 보니 한 권은 이직이라는 문인이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대해 쓴 『단원화평(檀園畵)이고, 또 하나는 그림과 글씨의 기원에 관해 - P232
쓴 『서화연원(書畵淵遠)』이라는 필사본이었다. 책장을 넘기자 표지 안쪽에는 안국동 우체국 수령증이 붙어 있는데 놀랍게도 ‘수취인 유홍준‘으로 쓰여 있었다. 깜박 잊고 부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 책갈피에는 이동향 교수가 내게 쓴 한문 편지가 들어 있었다. 번역하면 이렇다.
물각유주(物各有主,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는 법)인데, 이제 이 소책자가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또한 선친의 뜻입니다. 청컨대 웃으면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지금 이겸로 선생을 기리는 ‘산기문화재단‘의 이사직을 맡아 한국학저술상을 후원하고 고문서학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오늘날 인사동의 고서점들은 모두 폐업하고 떠났지만 오직 통문관만이 손자인 이종운 씨가 가업을 이어받아 남아 있다. - P233
통인가게는 『인간문화재』(어문각 1963)의 저자인 예용해 선생과 잡지『뿌리 깊은 나무』의 한창기 선생 등 안목 높은 고미술 애호가들의 단골이었다. 통인가게라는 이름도 한창기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통인가게에서 민예품을 많이 구입한 예용해의 컬렉션은 국립민속박물관과 서울공예박물관 두 곳에 기증되었고, 한창기 컬렉션은 고향인 순천시에 기증되어 낙안읍성의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본래 건물 앞에는 작은 마당이 있어 보기에도 아늑했는데 인사동길이 관광 거리가 되면서 지금 그 자리엔 승효상이 병산서원 만대루을 본받아 설계한 한옥 누대 건물에 제과점 태극당이 들어와 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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