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실제로 철저히 했던 유일한 것은 철저히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이었다.

-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



사진은 말하기보다는 불러일으키고, 설명하기보다는암시하는 능력 덕에 수많은 사진 중 한 장을 골라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사용하려는 역사학자나인류학자, 예술사가 들에게 매력적인 재료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그 사진이 본래 가지고 있던서사적 맥락이나, 사진을 만든 사람의 의도 또는원래의 관객들이 소비하던 방식과 관련이 있을 수도있고 없을 수도 있다.

- 마사샌드와이스Martha Sandweiss



『알레프』를 쓸 때 내가 겪은 가장 큰 문제는 월트휘트먼이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던 일, 즉 끝없이많은 것을 제한된 목록으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보르헤스가 묘사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서 영감을 받은 연구자가 내가 처음은 아니다. 이 기묘한 글에 의하면 "동물은다음과 같이 나뉜다. (a) 황제 소유의 동물, (b) 방부처리된 동물, (c) 훈련된 동물, (d) 젖먹이 새끼 돼지, (e) 인어, (f) 우화 속동물, (g) 떠돌이 개, (h) 이 분류에 속한 동물, (i) 미친듯이몸을 떠는 동물, (j)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은 동물, (k) 아주 가느다란 낙타의 털로 만든 붓으로 그린 동물, (1) 그 외의 동물,
(m) 방금 꽃병을 깨뜨린 동물, (n) 멀리서 보면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
이 글에서 수행한 사진에 대한 연구가 비록 이 분류만큼철저하거나 기발하지는 못해도, 사진이 가진 무한히 다양한가능성을 어떻게든 순서대로 정리하려고 했던, 좋은 의도를지닌 앞선 시도들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워커 에번스는 제임스 조이스나 헨리 제임스 같은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무의식적인 사진가"였는지가 "특별히 다루기 좋아하는 주제"라고했다. 월트 휘트먼에게 무의식적이라는 것은 없었다.  - P17

책을 쓰다 보니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로 미국인의 사진또는 미국을 찍은 사진에 대해서 다루게 되었다. 그럴 의도는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특별한 사진가나 사진을 정해 놓지 않았다. 누구든 어떤 사진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사진가와 본 적 없는 사진도 많았다. (나는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어쩌다 관심을 가지지못한 중요한 작가들(예를 들면 어빙 펜)도 있었고 예전에 이미글을 썼거나 더 할 이야기가 없는 작가들(카르티에 브레송과로버트 카파)도 있었다. 더 길게 쓸 생각이었지만 짧게밖에 쓰지 못한 작가들(외젠 아제, 이제 예는 그만 들겠다)도 있고 처음엔 다룰 생각이 없었지만 꽤 많이 다루게 된 작가들도 있다. 마이클 오머로드 Michael Ormerod가 그중 한 명으로 이 책의 여러 주제가 그의 사진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것은 전혀의도치 않은 행운이었다. 그는 미국의 사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영국인으로 작가가 파견한 대리인이나 마찬가지다. - P27

내가 1980년대 후반 재즈에 대한 글을 쓸 때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것이 그 글을 쓸 수 있는 전제 조건이라고 여겼던것처럼, 나는 사진에 대해서 쓰려면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이선행되어야 한다는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음악과그 음악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채워 줄 만한책이 거의 없었다. 사진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사진의 개념혹은 스티글리츠의 표현대로 "개념 사진"에 대해서는 수전 손택이나 존 버거, 롤랑 바르트가 쓴 훌륭한 책들이 있다. 사진의 역사나 역사 속 다양한 장르와 흐름에 대해서도 책 분량의뛰어난 연구서가 많다. 큐레이터들이나 학자들이 특정 사진가에 대해 쓴 매우 수준 높은 책과 에세이도 수없이 많이 있다. 사진가들도 그들의 매체에 대해 굉장히 잘 설명했다.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졌다. 기준이 워낙 높았기에 그 아래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이앤 아버스의 말대로 내가 ‘사물의 특성에 관한 어떤 미세한 부분만큼은 독점할 수 - P28

있기를 바란다.
도로시아 랭은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카메라 없이 보는법을 가르쳐 주는 도구"라고 말했다. 나는 사진가는 아니지만, 내가 만약 사진가였다면 찍었을 사진이 이제는 보인다. - P29

이 사진을 실제로 보기도 전부터 나는 어느 정도 이 사진을 알고 있었다. 열일곱 살 때 워즈워스의 서곡 7권에서 처음 그 사진을 어렴풋이 보았다. 워즈워스는 런던에서 있었던한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북적이는 스트랜드가를가로질러 오던") 그는


벽 앞에 서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설명하는 글이 적힌 종이를 가슴에 건채,
얼굴을 꽂꽂이 들고 있는 한 눈먼 남자의 모습에
마음을 뺏겼다.


워즈워스는 이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시인의 마음이 달려가는 동안, 그에게는


이 표시 안에 하나의 유형,
또는 상징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나는 마치 또 다른 세상으로부터 훈계를 듣는 것 - P32

처럼,
굳어 버린 그의 얼굴과 보이지 않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백 년 이상의 간극을 두고, 하나는 시에 하나는 사진에기록된 두 만남이 이만큼 일치하는 것은, 눈먼 남자가 곧 하나의 유형 또는 상징이라고 한 워즈워스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그‘가 ‘그녀‘로 바뀌고, 사진에 대한 설명이 길 뿐이다. 워즈워스는 ‘보이지 않는 두 눈‘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스트랜드와 피사체 간의 관계를 예측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까지 한다. - P33

워커 에번스는 1930년 브루클린에서 예술가 벤 샨을 만났다.
몇 년 뒤 에번스는 그에게 사진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봐봐, 벤, 별거 없어. 그늘에서는 조리개 값을 9로, 밝은 곳에서는 45로 맞추고 셔터는 20분의 1초에 놓고 흔들리지 않게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돼!" 그 후에 샨은 에번스를 따라 로이 스트라이커가 기획한 농업안정국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사 - P51

이에 둘은 로어이스트사이드를 어슬렁거리며 거리의 사람들을 촬영했다. 에번스의 전기를 쓴 벨린다래스본에 의하면 그들은 "라이카 위에 스트랜드가 20년 전 로어이스트사이드에서썼던 것과 비슷한) 잠만경을 달고 서로를 촬영하는 것처럼 꾸며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다." 성격이나 작품 면에서 둘의 닮은 점이라고는 그게 전부다.
에번스는 신중하고 냉정하며 내성적이고 고상했던 반면 (다섯살 더 많은) 샨은 "예술가보다는 노동자처럼 보였고 에번스에따르면 지나치게 나서는 경향이 있었다. 이 경향은 1932년에서 1934년경 14번가에서 찍은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의 사진에고스란히 드러난다. [7] 건장하고 강인한 이 남자는 사진가의정치 성향을 대표하고 있다. 샨과 같은 좌파적 충성도를 가진사람이 보통 그렇듯 아코디언 연주자 역시 동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생계를 꾸리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더 큰 투쟁에 더욱 고집스럽게 헌산하고 있다. - P52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는 아우구스트 잔더나 다른 사진가들의 사진에도 등장하지만 내가 특별히 이 피사체와 연결 짓게되는 사진가는 바로 앙드레 케르테스다. 조지 시르테시GeorgeKertész」에Szirtes가 쓴 시 「앙드레 케르테스를 위하여 For André I따르면,


아코디언 연주자는 눈먼 지식인이다.
그는 거대한 타자기를 가지고 다닌다.
악기가 긴 모자처럼 양옆으로 늘어나면서 자판에서날개가 자라지만,
병에 걸린 듯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고만다.


시르테시가 염두에 둔 사진은 헝가리 에스테르에서 찍은 사진으로, 사진 속 사람은 시각 장애인이 아니다. (그는 선글라스가 아니라 안경을 끼고 있다.) 아코디언은 우리에게 너무 확실한시각 장애인의 상징이어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의 실제상황은 보이지 않게 되는 듯하다  - P54

케르테스는 자신의 고통을 부풀리고 악화시켰지만, 돌아보면 그가 당한 모욕은 믿기 힘들 정도다. 그는 사진계의 거장 중 하나였지만 길거리 연주자처럼 최소한의 하찮은 인정과 그의 재능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행인들이 컵에 떨궈 주는동전에 만족해야 했다. 그의 시선은 예리하고 아름다우며 섬세하고 따뜻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런 무시 때문에 그는 예전 헝가리에서의 더 행복했던 날들을 향수에 젖어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감정은 예전에 찍은 사진들이 사라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케르테스는 한 여인에게 원본 필름이 가득 들어 있는가방을 맡기고 파리를 떠났었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그녀와필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필름들은 나중에 기적적으로 나타나, 1963년 프랑스국립도서관과 뉴욕 현대 미술관의 개인전을 통해 세계적인 찬사와 뒤늦은 명성을안겨 주며 그의 인생에 동화같은 결말을 선사했다. - P59

「유랑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나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The Blind Accordionist와 같은 예전사진들의 묘한 점은 돌아갈수 없는 고향에 대해 당연히 느끼는 목가적인 감정이 전부가아니라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고향에 살고있던 20대 케르테스의 시선이 처음부터 - 옛날이 옛날이 되기 전부터 - 앞으로다가올 상실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섯 살에 카메라를 갖게 되자마자 카메라가 있었다면 찍었을 것이라고 머릿속에 그려온 대로, 카메라가 저평가되고 환영받지 못하고 제대로 사용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사진을찍었다. 그 사진들은 추억을 담은 사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그의 운명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예언으로 시작했다.  - P60

- 또는 오로지 - 오래전에 본 무언가를 다시 보게 된 것만은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다. 시간은 별개의 두 사건을 포용하기위해) 늘어났다가 두 순간을 가깝게 하기 위해)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1959년에 케르테스가 들은 선율이 1922년에 들었던 선율과 똑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망상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그들 - 사진가와 그의 대리인인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 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결론은 그동안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그 순간이 있었고 지금은 이 순간이 있을 뿐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코디언이 줄어들었다가 늘어날 뿐 선율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들판에 흩뿌려진 양귀비다.
우리는 피가 뿌려진 소박한 십자가다.
이 짧은 운율에 감춰진 감정을 주의해라.
지혜롭게 행동하라. 선한 마음을 가지라 - P61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아버스로 하여금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게 만든 요소다. 1960년대 초반 그녀는 문도그Moondog라는 이름의 시각 장애인 거리 예술가에게 매료되었다. 1960년 마빈 이즈리얼에게 쓴 글에서 그녀는 "그는 자신
‘만의 바다를 가진 섬만큼 짙고 동떨어진 공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독립적이고 연약하다. 그리고 세상은살아 움직이고 있을 때조차도 마치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그림자와 냄새, 소리로 인식된다."라고 표현했다. "문도그의 믿음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안 보이는 것을 믿고 그는 보이는것을 믿는다." 『알레프』에서 보르헤스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자는 이곳을언뜻 본 후 눈물을 흘리는데, "사람들에 의해 이름을 빼앗겼지만 누구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은밀한 가상의 대상인, 상상할 수 없는 우주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을 글로 쓰는 것은 "절망감"을 수반한다. 그가 쓰는 것은 "언어가 연속적이기 때문에 연속적인" 반면, 그가 본 것은 "동시적"이라는명백한 이유 때문이다. - P80

아버스는 "자신의 표정을 속일 수 없다."는 이유로 시각 장애인들 찍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자신의 표정을 모르기 때문에 가면을 쓰지 않는다." 아버스의 작업 전체를 보면 이 말은 정확하면서도 그만큼 오해의 소지가 있다. 다양한 정신 병원의 환자들을 촬영한 말년의 작업은 이 개념을 정신적인 실명의 영역까지 극단적으로 끌고 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핼러윈 행진을 위해 가면을 쓰고 차려입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대해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외의 상황에서 아버스의 작업이 가지는 힘은 사람들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가면과 그 가면을 잡아당기는 카메라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감에 의해 만들어진다. - P83

아버스 자신도 자신의 작업이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게 만든 자아 인식의 부재만큼이나 사람들이 가진 자아 인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보여 줬으면 하는 모습이 있지만그와는 다르게 보이게 되고, 사람들이 보는 것은 바로 그 모습이다. 거리에서 누군가를 보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결점부터 잡아낸다. 우리가 이런 특이한 점을 갖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히다른 모습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겉모습은 세상에게 우리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라는 신호를 주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기를 바라는 것과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것 사이에 있다. - P84

9개월 후 - 게드니가 사진을 찍고 2년이 지난뒤 - 아버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로 아버스의 피사체는그녀가 숨겨진 마음을 표면적으로 분출시키는 방법으로 "기괴한 사람들"을 찍은 것처럼, 그녀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재현한 것이 되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와 다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게 이 모든 것이 조금이나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은 당신의 불행과 같지않다." 그렇지만동시에 "모든 차이점은 닮은 점이기도 하다." 웰티가 주장한대로 아버스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했다면 아버스는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가진 고통과 두려움을 드러내었다. - P87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다고 했던 그때 아버스는 "마릴린 먼로와 헤밍웨이의 얼굴에 드리워진 자살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자살이 거기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진의 예지력에 대한 아버스의 믿음은 어느 정도 빌 브란트에게서 나온 것이고 빌 브란트의 믿음은 앙드레 브르통에게서부터 온 것이다. (1948년에 촬영한)여배우 조지핀 스마트의 눈에 있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브란트는 "사진가의 목표는 피사체의 미래 전체를 실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예견해 주는 의미 있는 유사성을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스는 "내가 사진찍지 않는 이상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믿었던 반면, 브란트는 "내가 본 것을 찍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보고 있는 것을 찍는 것이다."라고 하며 그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그의 목재 코닥 카메라가 볼 수 있는 것을 강조했다.  - P88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아버스의 관심은 그녀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느꼈던, 보다 전반적인 매력의 일부였다.
죽기 바로 전 아버스는 학생들에게 "명료함에 열중해 보고 나니 "내가 사진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진정한 물리적 어두움. 어두움을 다시보게 된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이다." 아버스가 이렇게 "모호함에 대한 관심을 자각하게 된 것은 브란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라사이 덕분이었다. - P89

그 보잘것없는 도구인 눈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것.

보르헤스「밤의 역사History of the Night」


브라사이가 그의 친구 케르테스가 퐁뇌프의 야경을 장노출로 촬영하는 것을 본 다음 날 처음 카메라를 샀다는 것과, 케르테스가 그에게 자신의 첫 카메라를 빌려준 것, 그리고 브라사이가 케르테스의 접근법과 스타일을 사실상 훔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그에게 뭘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하고 노출은 얼마나 길게 줘야 하는지 등 야간 촬영에 대한 속성 수업을 해 주었다. 나중에 그는 내 야간 촬영 스타일을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게 그가 거의 평생에 걸쳐 한 일이었다." - P90

파리의 그늘진 삶을 담는 사진가였던 그는 사진이 그를
"그늘 밖으로" 이끌어냈다고 했다. 예술가와 도시 모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낸다. 정신 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도 비슷한방식으로 작동한다. 브라사이는 1931년 발터 벤야민이 명명한 "시각적 무의식"을 찾아다니며 잠든 도시를 배회했다. 이는 센강 위의 다리들을 찍은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다. 다리 위로는 거대한 파리의 대로들이 보이고아치 아래에는 독특한 모양으로 일그러진 반영을 만들며) 어두운 강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적인 안정과-그것이 만들어낸 부작용이자 - 어긋나는 충동을 은밀히 상기시키는 부랑자들과 노숙자들이 불빛에 비쳐 희미하게 보인다.
그들이 예술가들이나 작가들에게 발휘하는 힘은 거의 중력에 가깝다. - P92

파리의 회랑들을 촬영한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아치들은 멀어질수록 작아지는 어두운 터널로 이어진다. 도시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곳에서 우리는 밤의 무법자와 범죄자로 이루어진 낯익은 - 즉,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본 적 있는 - 무리를 보게 된다. 그 무리에는 성노동자와 동성애자들, ‘센‘ 척하는 앨버트와 그의 ‘일당‘이 있다. 결국 이 사진들은 당신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준다. "버튼을 누르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게 될 구절에서 리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문이 열린다." 어디에서 찍었든 브라사이의 사진은 결국 같은 장소, "늘 같은 계단, 늘 같은 방으로 인도한다. - P93

손은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실 손에는 자신만의 문명과 자신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 릴케


손이 그리기 어려운 걸로 악명 높은 것을 생각하면, 힘들이지않고 손을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은 사진의 엄청난 장점중 하나다. 이처럼 카메라는 사람의 손을 보여 주는 방법이자 손이 가진 불확실성과 한계를 회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윌리엄 헨리폭스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은 자신의 부족한 손재주 -좋아하는 물건 하나도 제대로 그릴 수 없는 무능력 에 절망하여 카메라 옵스큐라에 투사된 이미지를 "종이 위에 안정적으로 새겨 고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연의 연필을 사용하여 "빛으로 그린 그림"
을 만드는 데 성공하자, 1839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지금까지어떤 사람의 손도 이 그림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선을 그리지못했다."고 단언했다. 1906년에도 이 일은 충분히 신기하고 요긴한 일이어서 조지 버나드 쇼는 "인간의 손이라는 투박한 도구로부터 벗어났다"는 이유로 "예술가이자 사진가인 앨빈 랭던 코번을 칭송했다. - P96

 랭이 손을 강조하는 것은 농부나 공장 노동자를 환유적으로 일손이라고 축소해서 부르는 언어 관습을 다분히 문자 그대로, 시각적으로 연장한 것이다. 티나 모도티가 1920년대 중반 멕시코에서, 세탁일을 하는 여자와 연장 위에서 쉬고 있는 노동자의 손을 화면에 꽉 채워 찍은 사진에서도 거의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인간성이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에 담기는가. 랭과 모도티는 굽히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 방식을 설명하면서 랭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대로 다 이야기하는 수다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무 뒤에 숨어 당신이 자기를 보지 못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이 당신이 알아내야 할 사람이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주저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설득력 있는 진술이 나올 수도 있다. - P100

존 스타인벡은 로버트 카파가 "생각을 찍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카파가 찍은 것은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로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만화가들은 말풍선을 점선이나 하이픈으로 그려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지만, 사진가들에게는 그런 유용한 방법이 없다.) 사진이 발명된 순간부터 사진가들은 이 간극을 극복하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없애보려고 했다. 한 가지 방법은 똑똑하고 진지한 - 예를 들어 칼라일 같은 사람을 이용해 그의 눈 뒤로 두뇌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1906년 앨버트 비글로 페인은 마크 트웨인의 집 현관 앞에서 그의 사진을 찍는 작업을 했다.  - P102

 동등한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 만난 것이다. 누가와 누구를이 정확히 동등하다.
친구 사이가 절대적으로 평등해지는 순간이 있다. 때로는 이 순간이 평생 지속되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 주고받는 것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사진에는 역사적이면서도 전기적인 순간이 담 - P121

겨 있다. 이 순간은 존 버거에 따르면 스트랜드가 찍은 인물사진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으로, 순간이 지속되는 시간은초 단위가 아니라 순간과 평생과의 관계로 측정된다. 스트랜드를 찍은 이 사진에서는 두 사람의 평생이다. - P122

우정은 어느 순간 함께 보낸 시간의 추억과 다가올 미래가 균형을 이루는 시점에 이른다. 지나온 추억의 양이 미래에만들어질 추억보다도 많음을 무언으로 깨달으면서부터 우정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그 뒤로 둘 사이의 우정은 추억밖에남지 않아 온전히 추억에만 기대게 되며, 그 추억을 지키기 위해서는 둘 사이를 끝내는 것이 최선임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때문에 때로는 우정이 사실상 끝났음을 알고 상당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스티글리츠와 스트랜드에게는 아직 그 순간이 오지 않았었다. 그 순간은 1932년 스트랜드가그의 말대로, 스티글리츠가 만든 새로운 갤러리인 "아메리칸플레이스를 떠나면서" 찾아왔지만, 두남자가 부인들에게 버림받은 그 여름 스트랜드가 찍은 스티글리츠의 사진은 그 시간을 - 그들에게 추억밖에는 남아 있지 않고 더 이상 함께할미래는 없는 순간을 - 미리 보여주고 있다. - P124

그들사이에 나이 차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들 사이에는 그들의부인들이 사실상 함께 도망가 버렸다는, 다른 종류의 동등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떠남으로써 아내의 부재 외에 그들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이드러났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그들에 관한 사실만이 남았다.
· 우정이 동등해지는 단계가 있다면 어느 한쪽이 그 단계가 지나간 것을 깨달아 균형이 깨지는 순간도 있다. 양쪽 다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냉랭하고 불안한 평형이 새롭게 자리잡는다. 서로에게 느끼던 안정감과 편안함 대신 불안감이 찾아온다. 이 불안감은 - 그 증상 중 하나로-이에 대해 얘기할수 없기 때문에 더욱 심해진다. 스티글리츠의 수다가 끝나고스트랜드가 찍은 사진은 말하지 못해 남겨진 모든 것을 담고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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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뭔 말인지도 모를, 양자역학이니 뭐니 하는 문장들이 이토록 강하게 끌어당기다니.


모치즈키가 논문을 발표한 지 1년 뒤인 2013년 12월,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수학자 여러 명이 증명을 연구하기 위해옥스퍼드에 모였다. 세미나가 시작되고 며칠 동안은 열의가넘쳤다. 일본인 수학자 모치즈키의 모호한 논리가 이해력에굴복하기 시작했으며 사흘째 밤 커다란 진전이 있으리라는소문이 인터넷 토론방과 전문 웹사이트에 퍼졌다. - P78

나흘째 모든 것이 무너졌다.
일정한 시점이 지나자 아무도 증명의 논증을 더는 따라갈수 없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적 정신의 소유자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으며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치즈키가 세미나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 P79

모치즈키 신이치가 자신의 추론을 증명하려고 만들어낸새로운 수학 분야가 너무 기이하고 추상적이고 시대를 앞선탓에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스 캠퍼스에서 온 이론수학자는미래에서 온 논문을 연구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내가 알기로 이 논문을 접한 사람들은 다들 매우 논리적이지만, 논문을 읽은 뒤에는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모치즈키의 체계를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만큼 따라갈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은 이 체계가 첫눈에 보이지 않는숫자들 사이의 기본적 관계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모치즈키는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연구자들이 내 연구를 이해하고 싶다면 우선 자신들의 뇌에 주입되어 오랜 세월 동안 당연하게 여겨진 사고 패턴들을 비활성화해야 한다. " - P79

절의 내부처럼 단아한 그의 연구실 창문에서는 다이몬지산이 보인다. 1년에 한 번 오본 축제 때 승려들은 그 산에서양팔을 뻗은 사람 모양의 거대한 한자大ㅡ를 태운다. 이글자는 ‘거대하다 크다. 기념비적이다‘라는 뜻으로, 어마어마한 호언장담을 표현할 때 쓰인다. 모치즈키는 자신의 새수학 분야를 바로 이런 식으로 명명했는데, ‘우주적 타이히뮐러이론‘이라는 이름에는 겸양이나 농담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 P81

‘a+b=c‘ 추론은 수학의 뿌리에 가닿는다. 그것은 정수의덧셈 성질과 곱셈 성질 사이에 심오한 뜻밖의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만일 증명된다면 이 추론은 수많은 해묵은 난제를 마치 마법처럼 해결할 수 있는 막강한 연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치즈키의 야심은 그보다 훨씬 컸다. 그는 추론을 검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학자들로 하여금 정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도록 하는 새로운 유형의 기하학을창안했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수학자 중한 명이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창조력을분출하여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획기적으로 바꿨다. 모치즈키가 1996년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그로텐디크의 추론 하나를 증명한 뒤였으며, 이 일본인 수학자가 아직 학생일 때 그를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가 그로텐디크를 스승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 P83

문이다. 수, 각 곡선, 방정식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으며 그어떤 구체적인 수학적 대상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였다. 그의 제자 뤼크 일뤼지는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사물의 조화에 남달리 민감했다. 새
‘로운 기법을 도입하고 주요 정리를 증명했을 뿐 아니라 수학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켰다."
공간은 그가 평생 천착한 주제였다. 그는 천재성을 여지없이 발휘하여 점의 개념을 확장했다. 미천한 점은 그의 눈길이 닿자 무차원의 위치에서 벗어나 복잡한 내부 구조를 품은 채 부풀어올랐다. 남들이 깊이, 크기, 너비가 없는 단순한위치를 본 바로 그곳에서 그로텐디크는 우주 전체를 보았다.
그토록 대담한 제안을 내놓은 사람은 유클리드 이후로 아무도 없었다. - P86

유능한 권투 선수였고 베토벤의 후기 4중주곡과 바흐에열광했으며 자연을 사랑했고 "태양과 생명으로 가득한, 자그맣고 나이 많은 올리브나무"를 존경했지만, 수학을 비롯한이 세상 무엇보다 더 몰두한 것은 글쓰기였다. 그의 글은 광기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그가 어찌나 열정적으로 썼던지원고 여기저기에 연필심이 종이를 뚫은 자국이 남았다. 계산을 할 때면 공책에 방정식을 쓴 다음 거듭거듭 겹쳐 썼는데,
급기야 각각의 기호가 하도 굵어져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되었다. 그는 흑연을 종이에 긁는 신체적 쾌감에 사로잡혔다. - P90

한 세대의 교수와 학생 전부가 그로텐디크의 꿈에투신했다. 그가 우렁차게 강연하면 그들은 필기를 하고 그의논증을 확장하고 초고를 써서 그에게 교정받았다. 공동 연구자 중에서 가장 헌신적이었던 장 디외도네는 해가 뜨기도전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전날의 필기를 검토했다. 그러면 그로텐디크가 여덟시 정각에 교실에 들이닥쳐 새로운 개념들을 전개했는데, 연구소 계단을 오를 때 이미 머릿속에서 자기 자신과 논쟁을 벌이던 것들이었다. 그로텐디크의 세미나는 열두 권의 책으로 묶였다. 2만 쪽이 넘는 이 대작은 기하학, 정수론, 위상수학, 복소해석학을 통합했다. - P91

그로텐디크는 하나의 방정식에 들어맞는 수학적 우주를통째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의 토포스는 무한해보이는 공간으로,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한다. 그로텐디크는이것을 "이 세계 모든 왕의 모든 말과, 모든 가능 세계의 모든 왕의 모든 말이 한꺼번에 물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넓고깊은 강바닥에 비유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려면 완전히새롭고 50년 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가져온 변화만큼 급진적인 우주 관념이 필요했다. - P92

그는 필요하다면 몇 시간이든 제 의지대로 자고 일어나 연구에 온 정력을 쏟을 수 있었다. 아침에 개념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이튿날 새벽까지 낡은 남포등의 불빛 아래서 눈을찡그린 채 책상 앞에서 꼼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친구이브 라드겔레리는 이렇게 회상한다. "천재와 함께 연구하는일은 매혹적이었다. 이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로텐디크는 다른 어떤 말로도 묘사할 수 없다. 그는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웠는데, 그것은 이 남자가 어떤 인간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P93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크루즈 캠퍼스의 한 교수는 그를일컬어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강연하는 것을 듣고서 처음 든인상은 우리의 지적 진화를 앞당기기 위해 머나먼 태양계의외계 문명에서 지구로 파견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로텐디크가 불러일으킨 수학적 풍경은 아무리 급진적이었을지언정 인위적이라는 인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수학자의 훈련된눈으로 보면 이 풍경은 마치 자연환경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텐디크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보다는 풍경이 스스로자라고 발전하기를 바랐다. 그 결과는 마치 각각의 개념이제 나름의 생명 충동을 따라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듯한유기적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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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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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머리를 식히려고 정세랑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시작했다가 전혀 가볍지 않은 글에 살짝 밀어두었다. '버지니아 울프'를 마치고 나면 다시 시작하리라. 할 말이 꽤 많아지는 작가다.}라고 지난주에 적었다.

작가 정세랑. [나무위키]에서 소개되는 작가의 프로필은 이렇다.

편집자로 일하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단편소설을 많이 썼고 장편도 자주 책으로 내는 편이다. 초기엔 장르소설, 특히 SF에 주력했는데 이만큼 가까이 이후로는 일반적인 순수문학 작품도 병행해서 쓰고 있다.

1984년생이며 2010년에 등단하여 이쪽 작가 중에서는 신참인 편.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출신이며 국어국문학을 이중 전공했다. 판타스틱 2010년 1월 호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2014년 '이만큼 가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피프티 피플로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덧니가 보고 싶어 (2011/11) 지구에서 한아뿐 (2012/6) 이만큼 가까이 (2014/3) 재인, 재욱, 재훈 (2014/12)

보건교사 안은영 (2015/12) 피프티 피플 (2016/11) 섬의 애슐리 (2018/6) 옥상에서 만나요 (2018/11)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 (2019/6) 목소리를 드릴게요 (2020/1) 시선으로부터, (2020/6)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2021/6) 아라의 소설 (2022/8)

이렇게 작품이 많은데 그동안 내가 읽은 건 고작 장편 하나, '이만큼 가까이'다. 소설, 그것도 한국 소설에 진심인 편이라고 떠들면서 이유야 어찌 됐든 부끄러운 결과다. 덧붙일 필요는 없지만 굳이, 스스로라도 납득될만한 이유를 대자면 '이만큼 가까이'를 읽고서 내 취향이 아니라고 접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게 읽힌 정세랑 작가는 젊고 명랑하고 환하고 밝았다. 태생적으로 어둡고 음침한 데다 부정적인 시선을 장착한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이 밝고 환함이다. 밝고 환한 곳에서는 어둠은 기생하기 어렵다. 하지만 작가 여행 산문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으면서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다. 작가가 장착한 밝음은 가장 어두운 순간들을 외롭고 치열하게 통과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내 앎은 그토록 얄팍했던 것이다.

책은 첫 번째 뉴욕에 가게 된 이유를 밝히면서 "여행을 왜 즐기지 않느냐면"으로 시작한다.

"어렸을 때 아팠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소아 뇌전증을 앓았다. 부모님은 수학여행이나 수련회를 갔을 때 내가 발작을 일으킬까 봐 걱정하시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길 바라셨던 듯한데, 이렇게 두 번째 챕터에서 시원하게 말해버린다. 문학 출판계에 들어와 가장 좋았던 건 사람들이 아팠던 이야기, 아픈 이야기를 무척 아름다운 방식으로 마구마구 해버린다는 점이었다. 첫 회사에서 한 시인의 인터뷰 자리에 갔던 적이 있는데 나와 같은 소아 뇌전증을 앓으셨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셔서 듣고 있다가 놀라움과 해방감을 느꼈다. 말해도 되는구나. 왜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약한 부분을 햇볕 아래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전 연령대에서 천 명에 네다섯 명은 뇌전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머릿속에서 전기 신호가 다르게 달린다는 이유로 맞닥뜨려야 하는 위험과 오해는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혹시 같은 병을 앓았거나 앓는 분이 이 책을 읽는다면 지지하는 마음을 보내고 싶다.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것은 내가 쓰는 글들이 다소 엉뚱하고 기괴하다 보니 혹 오해를 더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쓰러지는 발작이 가장 위험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나의 경우 잠들었을 때 부분 발작을 일으켰다. 숨을 쉴 수 없어서 깼다. 마치 거인이 내 목을 밟고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험한 시점에 다시 호흡이 돌아왔다. 오류가 난 컴퓨터를 억지로 껐다 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때로 얼굴 일부나 한쪽 팔이 마비되기도 했다. 누워 있을 때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상의 가능성이 적었지만, 늦은 밤 혼자 겪으며 내면이 천천히 조각되었다. 치료를 위해 계절마다 대학병원의 층층을 엄마 손을 잡고 오락가락했다. 『 피프티 피플』을 쓴 것은 친지 중에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이가 많아 인터뷰 대상자를 소개받기 쉬워서였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뇌파검사를 위해 머리카락 속에 풀을 잔뜩 바르면 『프랑켄슈타인』에 나올 만한 헤어스타일이 되었고, MRI 기계 속은 몸이 굳도록 추웠다. 그런 유년의 기억들이 내 안에 남아 있어서 병원 이야기를 쓰게 된 것 같다. 혼자 느끼는 외로움도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친밀감도 극대화되는 공간을 소설 안에 세워본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즐기지 않았다. 낯선 상황에서 피곤하면 발작이 일어나곤 했으므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피했다. 치료를 받고 성장하며 발작은 사라졌고 다행히 아직 재발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재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발작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뉴스에 그렇게 사망한 이의 사례가 보도되면 먼 나라의 모르는 사람인데도 슬퍼진다. 얼마 전에는 할리우드의 배우 캐머런 보이스가 겨우 스무 살의 나이에 뇌전증으로 인한 수면 중 발작으로 사망했다. 할리우드의 배우라서 알려진 것이지, 비슷한 죽음은 지구 곳곳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현대사회에서도 모두가 평균수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똑바로 마주 본 사람들이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더 잘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어떤 일을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에 ‘만약 내가 4년 후에 죽는다면 후회할까? 8년 뒤라면?‘

하고 가정해 보는 것만으로도 한결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아팠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미래완료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꿈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70대에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며 50권까지 쓰는 것이지만, 충분한 수명을 누리지 못한다 해도 요절한 사람이 아니라 열한 살에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지 않고 있는 힘껏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뵐 때마다 무병장수를 빌어주시는 독자분들께 부응하기 위해 건강검진을 열심히 받고 있긴 하다.

어쨌든, 발작을 빼도 딱히 건강한 젊음이었던 적은 없다. 박카스 광고나 국토대장정 포스터에 좀처럼 이입을 못 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의학의 혜택 속에 살아왔다. 전근대에 태어나지 않아 행운이었다고 안도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여행에 대한 욕망이 약했다. 여행은 건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고 일상의 루틴을 유지하는 선에서 큰 기쁨을 느끼는 나머지 여행까지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큰 결심을 하고 여행을 갈 때는 바탕화면에 유서에 가까운 지시 사항을 남기고, 담당 편집자님께 그때까지 쓴 원고를 예약 메일로 전송해두기도 했다. 매번 살아 돌아와서 잘 취소했지만…….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상태가 너무 신기하지 않은지? 꼭 개인적 얘기, 사람들 얘기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렇다. 지구가 초속 30킬로미터로 빙글 뱅글 날아가고 있는데 그 위에서 온갖 동식물이 38억 년 동안 생겨났다 멸종했다 하며 보글보글 지내왔다는 것이……. 우주는 죽어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어떻게 다들 살아 있지? 거의 매일 놀란다. 심장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뛰었다니? 신경을 쓰지 않는데 호흡이 계속된다니? 산책만 나가도 흥미로운 발견을 하고 화분에 새잎이 나면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다. 다른 요인들도 있지만 환경 주의자가 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아팠던 청소년이 쉽게 경이로워하는 어른으로 자란 것이다. 경이의 스위치가 반발력 없이 딸깍딸깍 눌리고 말아서, 다른 아팠던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얼마나 비슷한 성향일지 궁금해진다. 나의 노래 부르며 행진하는 스머프 같은 성격이 (특히 동료 작가들에게) 좀 부담스럽다는 평을 들을 때도 있는데, 나름의 맥락이 있다. 어둡고 죽어 있는 우주에서 기적 같은 지구에 산다는 것이 신기해, 냉소와 절망에 빠졌다가도 빨리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개념의 여행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여행을 좋아하는 것에 가까웠다. 잘 쓰인 여행 책, 화질 좋은 여행 프로그램,

친구들이 다녀와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보여주는 사진들을 즐기며 충분히 만족해버리는 편이어서 스스로 여행을 떠나는 편이 아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다면 말이다. - P13~17"

작가, 정세랑. 새로이 알게 되었는데 담담하고 차분하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의 병력을 밝히는 순간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둠과 참담함을 건너왔을까 싶어서 아득해졌다. 본인이 로또에 좀처럼 맞지 않는 것은 이미 로또 같은 부모를 가졌기 때문이라는데 아픈 아이를 지켜보고 손을 잡고 대학 병원 층층을 다녔을 엄마의 타는 속내가 보여서 먹먹하다.

'모든 원인이 상대방의 탓인 것만 같고, 다른 집 자식들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저 팔자소관으로 내몰지도 않고, 그 분노를 폭발시키지도 않고' 보살핌과 치료와 믿음을 보여준 그 부모님은 작가의 로또가 맞다. 작가는 다른 뜻으로 말했는데 나는 어쩐지 그렇게 오독한다.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그러나 어쩌면 매우 환경과 훈련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헌사에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라고 쓴 것은 아부나 효도가 아니라 사실 진술에 가까웠다. 나의 부모님은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가난과 싸우며 고학했고, 결국 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났다. 경영대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엄마는 과의 유일한 여성이었다니 1970년대 중반은 대체 어떤 세상이었는지…….

두 분은 경제성장기에 사회인이 되어 여유가 생기자 억눌렸던 것을 해소하려는 듯,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여행 등 문화적 경험에 탐닉했다. IMF 때를 비롯해 주춤거린 시기야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내 멈추지 않았다. 먹는 것에도 입는 것에도 집을 가꾸는 데에도 심드렁한 채, 신발은 길에서 만 원짜리를 사더라도 책은 매주 사들여 탑을 쌓았다. 그런 부모님 곁에서 자라는 동안 나 역시 예술을 사랑하고 즐길 수밖에 없도록 빚어진 것이다. 믿을 수 없이 큰 혜택을 받고 컸다. 무형의 것을 받아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복권 당첨이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것이니 살면서 세상에 갚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p39,40"

나도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면……. 부러움도 한가득이지만 그걸 시기하는 병을 극복해야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라면은 결국 같은 결과일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 온 결과이고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지금, 여기의 나. 지금 여기의 가치관이나 생각들이 나를 만들어 간다. 그런데 나는 왜, 복권 당첨 같은 부모님을 만나지도 못했는데 로또가 안 되는 걸까? 왜?

뇌전증, 간질이라 불리는 이 병은 나와도 무관하지는 않다. 중학교 때 급우의 발작을 본 적이 있다.

평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존재감이 낮은 친구였는데 갑자기 쓰러져서는 몸이 비틀리며 떨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입에 거품이 가득하고 눈이 뒤집히는 놀라운 상황에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빙 둘러서있기만 했다. 아무 조치도 못하는 건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때마침 나타나신 양호선생님의 침착함이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그 친구의 경련과 경직의 순간은 길지 않았는데 그 상황의 여파는 오래갔다. 오후 내내 양호실에 누워있다가 연락받은 가족이 데리러 왔는데 할머니였을까? 엄마였을까? 왜소하고 까무잡잡하게 나이 드신 분이 당시의 우리들에 비해 한참 작은 그 친구가 당신보다는 훨씬 큰데도 어깨를 감싸 안고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그 후로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장기간의 결석 이후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 병증의 충격을 직접 겪었다.

유독 내 주변에만 그랬던 건지 그 시절이 그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이후 발작을 목격할 일은 많았다. 시집간 큰언니가 세 들어 살던 안집의 몇 살 위 언니가 주기적으로 그랬고, 동갑의 한 동네 남자애의 경련을 목도하기도 했다. 유전이라고 쉬쉬하면서 끝끝내 숨기던 몹쓸 병이었기에 숨기다가 드러나면 더 깊숙하게 숨어버려야 하는 병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숨기는 것만이 능사였던 시절, 아픈 걸 견디며 일상을 사는 것만도 버거울 텐데 주변에서 누구라도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당사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어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단지 가끔 그 친구 이름을 떠올려보았다. ㅍ.ㅅ.ㅅ. 내게 지나쳐온 세월만큼 그 친구도 세월을 지나왔을 것이다. 그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말도 섞어본 적이 없을지 모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수업 시간을 빼고는 교실에 붙어있지도 않았던 나는 몇 친구 말고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속으로 혼자 안부를 묻고는 했다. 죄책감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아픈 엄마를 지켜보는 막막함을 견디고 있었다. 아픈 사람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속이 타들어가는 조바심과 안타까움과 치밀어 오르는 짜증이 많아지고 있었는데, 그 친구의 발작으로 팽창하던 분노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만 특별하게 불행하지 않다고, 나보다 더한 친구도 있다는 생각이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아픈 친구한테……. 그런 몹쓸 생각이 오래 미안했다. 그래서 이름이나마 기억하면서 마음 안에 두었던 것이다. 오래 아프면서도 가끔 그 이름을 생각했다. 어딘가 고장이 나고 아프다는 건, 한편으로는 다른 어딘가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나는 아픈 시절을 건너왔기에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약만 잘 복용하면 조절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는 그 병에서 자유로워져서 고만고만하게 늙어가고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덧붙여서 나도 이렇게 그 친구를 놓아 보낸다.

"그날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개인이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을 비행기 승객들, 매일매일 출근하던 직장인들, 전망대에 올라 희열에 찼을 관광객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던 구조 대원들이었다. 메모리얼파크 바깥에는 그날 순직한 구조 대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었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역사교육을 전공하며 공부한 자세한 내용들은 많이 잊었지만 그것 하나는 배운 것 같다. 배운 것을 자꾸 현실과 비교해 보며 다급함에 종종거릴 때가 있다. - P116"

우리 모두가 아는 뉴욕 무역 센터가 무너진 곳에는 '메모리얼 파크'가 있다. 그곳에 선 작가의 심경이, 작가의 정신과 삶과 글쓰기의 방향까지 짐작하게 한다. 작가, 정세랑을 응원하게 만든 감동적인 부분이 이 챕터였다. 집단의 이름으로 쉽게 사라지는 개인을 호명하는 일을 이 작가에게서 기대해 본다. 모든 시작은 개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중받을 때, 각각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 한 우주를 이룰 때, 세상은 조금씩 평화를 향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정혜윤 피디를 작가로서 좋아하고 모든 책을 찾아 읽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렇게 '세월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날 나는 앤서니와 헤어져 유리창을 찾아보았다. 추모관은 아주 넓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창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시 머물렀다. 나도 유리창 앞에 서보았다. 그 유리창 앞에 서 있었을 성호 아버지 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 성호 생각도 났다. 아이들 생각도 났다. 그리고 그날 어느 창가에 서 있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날 죽었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그것이 유리창 너머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내 눈앞에 있던 것은 9·11의 어두운 건물 파편들이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그 파편 너머,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상상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폐허만을 보게 되리라는경고처럼. - 정혜윤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 P194"

"열네 살 된 딸아이가 오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는 난생처음 브루클린에서 맨해튼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 혼자서, 딸아이는 오늘 밤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현재 뉴욕에는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으며, 아내와 나는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사는 친구들에게 딸아이를 재워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딸아이가 세계 무역 센터 지하를 지나간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쌍둥이 빌딩이 폭삭 주저앉았다.

우리 집 꼭대기 층에서 보면 연기가 도시의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늘은 바람이 브루클린 쪽으로 불어와서 화재현장의 냄새들이 집의 모든 방으로 들어왔다. 화염에 휩싸인 플라스틱, 전선, 건축자재, 시체들의 고약한 냄새, 코를 찌르는 그 악취, - 폴 오스터의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P430"

2001년 9월 11일을 우리는 지켜보는 사람이었다면 뉴욕의 작가 '폴 오스터'는 당사자다. 지금 막 마친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는 그랬기에 충격적이다. 배가 서서히 잠겨가면서 뒤집히는 걸 보고 있던 그때처럼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최근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물난리에 속절없이 죽어간 이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다.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작가, 정세랑의 여행이야기이면서 사는 이야기고 친구들과 함께(여행 동행에서 인생의 동행이 된 남편까지 포함해서) 나누는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여행을 권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제주를 아끼면 제주에 가는 횟수를 줄이라 한다. 하와이가 너무 좋았지만 아마도 안 가게 되는 이유도 그럴 것이라고. 심각하게 수긍되는 말이다. 좋아하면 아끼고 귀하게 대해야 한다. 좋아한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은 상대를 망가뜨리는 스토킹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면 상대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려본다.

'떠나라'라고 등 떠미는 사회에서 지적질 받을 텐데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들이 좋았다. 정말 지구를 사랑하는 우리는, 우리의 지구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 정치적인 거 말고, 보이는 거 말고, 진짜로.

소비를 줄여야 한다. 결국은 소로처럼 살아아 한다는 건데. 내가, 될까? (갸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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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전날 밤 건강진단에서 의사들은 나치 지도자 헤르만 괴링의 손톱과 발톱이 새빨갛게 물든 것을 발견했다. 진통제 디히드로코데인을 하루에 백 알 넘게복용하다 중독된 것이었다. 작가 윌리엄 버로스가 묘사했듯 이 약물은 자극성은 코카인만큼 약하지만 효능은 코데인의 두 배로 헤로인과 맞먹기에 미국 의사들은 괴링을 법정에 세우기 전에 의존증부터 치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연합군에 체포될 당시 괴링이 가지고 있던여행 가방에는 2만 회 넘게 투약할 수 있는 디히드로코데인이 들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 독일에 남아 있던 생산분의 사실상 전부였다. 그의 중독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 - P9

다. 독일 국방군 거의 전원이 페르비틴을 지급받았으니 말이다. 이 메스암페타민 알약을 복용한 병사들은 몇 주일 내리잠도 자지 않은 채 광적인 흥분과 악몽 같은 혼수를 오가며 정신 착란 상태에서 싸웠다. 과다 복용한 병사 중 상당수는 걷잡을 수 없는 희열에 사로잡혔다. "사위가 쥐죽은듯 고요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해진다. 마치 내가 조종하는항공기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독일 공군의 한 조종사가 몇 년 뒤쓴이 문장은 치열한격전의 현장이 아니라 지복의 환상을 목격하는 고요한 환희를 회상하는 듯하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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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처음으로 읽은 최고의 고전 소설은?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To the Lighthouse』이다. 나는 열여덟 살 때 울프의 소설 『파도The Waves』와 『올랜도Orlando』를 읽었는데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서 그 후 51년 동안 울프를 독서목록에서 지웠다.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 『등대로』는 내가 읽어 본 소설 중 손꼽을 만큼 아름다운 작품에 속한다. 이 소설은가슴 깊이 파고들어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고 계속해서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길고 반복적인 문장들이 이루는 음악, 절제된감정의 깊이, 미묘한 구조적 리듬들이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한구절을 서너 번씩 읽으며 되도록 천천히 음미했다. p228


현재 침대 옆 탁자에 있는 책들은?

두 권뿐이다.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에서 나온 제임스볼드윈의 『에세이 모음집Collected Essays』과 『초기 장편 및 단편 소설들Early Novels and Stories』. 고등학교 때(1965년에 졸업했으니 오래전이다) 이후 최근까지 볼드윈은 읽지 않다가 요즘 쓰는 소설이 주로 1950년대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해서의무적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의무감은 금세 기쁨과 경외감,
감탄으로 바뀌었다. 볼드윈은 픽션과 논픽션양 부문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이며 나는 그를 미국의 20세기 거장 반열에 올리고 싶다. 그의 대담함과 용기, 엄청난 감정의 폭(끓어오르는분노에서부터 섬세함의 극치를 이루는 다정함까지)뿐 아니라글 자체의 질, 끌로 정교하게 다듬은 듯한 우아한 문장들 때문이기도 하다. - P226

가장 최근에 읽은 위대한 작품은?

프랜 로스의 오레오Oreo』이다. 1974년 작은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된 이 소설은 거의, 어쩌면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2015년에 뉴디렉션스 출판사에서 다시 나왔다. 안타깝게도 로스가 쓴 유일한 소설이고, 더욱 안타까운 건 로스가 1985년에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신명 나는 작은 걸작이며, 내가 최근에 우연히 발견한 아주 유쾌하고, 웃기고, 지적인 소설 가운데 하나이다. 이 독창적인 작품은 학구적인 산문체와 흑인 속어, 이디시어가 매우 효과적으로 섞인 경이로운 혼합 언어로 쓰였다. 이책을 읽으며 백 번은 폭소를 터뜨렸는데, 2백 페이지 조금 넘는 짧은 작품이니 평균 한 페이지 건너 한 번씩 박장대소한 꼴이다. - P227

잘 알려지지 않은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서양의 잡초들Weeds of the West 』. 삽화가 풍부한 628페이지 분량의 안내서로 마흔 명의 잡초 전문가가 쓰고 서양 잡초 학회에서 펴냈다. 컬러 사진이 아주 화려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야생화의 이름들이다. 유럽전호Bur Chervil, 파리잡이개정향풀Spreading Dogbane, 해골잎돼지풀Skeletonleaf Bursage, 끄덕이는도깨비바늘NoddingBeggarsticks, 뻣뻣한매의수염Bristly Hawskbeard, 솜방망이Tansy Ragwort, 복된밀크시슬Blessed Milkthistle, 가난뱅이풀Poverty Sumpweed, 누운땅빈대Prostrate Spurge, 영원한완두콩 - P228

덩굴Everlasting Peavine, 원추버들Panicle Willowweed, 배찢는브롬Ripgut Brome. 수많은 풀이 실려 있고, 그 이름들을 혼자소리 내어 읽는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노라면 어김없이 기분이좋아진다. 미국 땅의 시들이다. - P229

가장 들려주고 싶은 뉴욕 이야기는?

나의 뉴욕 이야기는 아주 많다. 오랜 세월 뉴욕에서 살면서수십 가지 이야기가 생겨났다. 최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 하나가 이민자를 향해 증오를 쏟아 내고 있으니, 여기서는 이민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주로 이용하는 브루클린 지역의 문구점 주인은 중국 출신이다.
조수는 멕시코 출신이고,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자는 자메이카에서 왔다. 몇 개월 전 어느 쌀쌀한 오후에 물건값을 치르려고 계산대 앞에 서 있는데 자메이카인 계산원이 내가 코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추운 날씨였으니까). 그는 못 본 척하거나콧물을 닦으라고 말해 주는 대신 클리넥스 통에서 휴지를 뽑더니 계산대 너머로 몸을 기울여 코를 닦아 주었다. 무척이나부드러운 손길이었고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허락도 없이 내 몸에 손을 댄 건 잘못된 행동이었을까?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보기드문 친절이었으므로,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브루클린 인민 공화국에서의 삶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였다. - P229

이 책에 포함된 번역자의 목록이 보여 주듯 현대영미 시인들은 프랑스 시를 많이 번역했다. 유명한 몇 명만 나열해도 파운드, 윌리엄스, 엘리엇, 스티븐스, 베케트, 맥니스, 스펜더,
시버리, 블랙번, 블라이, 키넬, 레버토브, 머원, 라이트, 톰린슨,
윌버 등이다. 이들은 프랑스 시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시를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시를 쓰지 않았다면 현대 미국 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 선집은 프랑스 시에 관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영미 시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목적은 프랑스 시를 원어로 제공하면서 동시에 영미시인들이 번역한 시를 함께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선집은 우리 시사(史)의 한 장으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 - P244

이 시선집은 아폴리네르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책에 포함된 시인 중 가장 일찍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의식적
‘인 현대어로 시를 쓴 최초의 시인도 아니지만, 20세기 초반의미학적 열망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아한 연애 서정시와 과감한 실험, 운문시, 자유시, <형태> 시 등 범위가 다양한 시들에서 그는 새로운 감수성을 표현했다. 과거의 시 형태에 많이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자동차, 비행기, 영화의 세계에자연스럽게 적응했다. 입체파 화가들의 적극적인 옹호자였던그의 주변에는 우수한 화가와 작가가 많이 모였는데, 이를테면자코브, 상드라르, 르베르디 등이 아폴리네르 서클의 핵심 구성원들이었다. 이 세 시인과 아폴리네르의 작품을 통칭하여 입체파라고 부른다. 시의 기법이나 어조 면에서 네 사람은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만, 그래도 작품의 인식론적 기반이라는 관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녔다.  - P251

키스 월드롭은 이렇게 썼다.
<시는 통으로 된 한 개의 작품으로, 이미지나 플롯에 따라 전개되지 않는다. (…………) 이 주장은 다음의 전제를 포함한다. 1. 일상 언어는 논리에 의존한다. 2. 허구에서는 특정 단어가 다른단어를 뒤따를 필요가 없다. 3. 따라서 자유로운 선택, 즉 욕망이 창출한 구문을 상상할 수 있다. 『국가』는 이러한 상상력이발휘된 《서사시》이다. 이러한 논증을 펼치는 것은 (・・・………) 프로젝트를 아예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제시된 것은 일련의 감정이 아니다. (・・・・・・) 시는 아주 조심스럽게 창작된다. 안마리 알비아크는 합리성을 거부하지만 그래도 명백히 높은 지성을 발휘해 가며 시를 쓴다.> - P274

프랑스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축자의 정확성보다는 시의 감각을 전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때문이다. 시의 효과는 단어에만 있지 않고 음악, 침묵, 형태로나타나는 단어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도 있다. 독자가 그러한총체적 체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원시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는 시인이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278

말라르메가 스물아홉 살이던 1871년 7월 16일, 둘째 아들.
아나톨이 태어났다. 말라르메 집안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당시 그는 아비뇽에서 파리로 근무지를 옮기는 협상을 진행하는 중이었데, 11월말에야 겨우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그의 가족은 모스쿠가 29번지에 정착했고 말라르매는 폭탄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말라르메 부인은 지독한 난산 끝에 아이를 낳았다. 아나톨은 생후 몇 달 동안 건강이 너무 안 좋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목요일에 그 애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말라르메 부인은 10월 7일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애의 조그만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 같았습니다. (…...) 나는 아주 슬프고낙담했습니다. 그 애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어요. 의사들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하니 이제하느님의 뜻에 맡겨야지요. 그렇지만 이 자그마한 아이가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아 너무나 슬픕니다.> - P279

다른 편지는 몽테스키우에게 보낸 것이다. 〈엄청난 주의 덕분에, (파리로 돌아온 이래)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있습니다.
(……) 우리 아이는 며칠 심하게 고통을 당하여 자그마한 몸의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아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침을 발작적으로 했고 (……) 하룻낮, 하룻밤 내내 온몸을 떨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끔찍한 바람을 끊임없이 맞고 선 사람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밤을 꼬박 새웠고, 희망과 공포의 감정이 뒤범벅되어 밤새 안정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 나의 병든 아들은 침상에 누운 채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습니다. 사라져 버린 태양을 기억하는 하얀 꽃처럼.>이 두 통의 편지를 쓴 다음 말라르메는 그것들을 부치기 위해 우체국에 갔다. 아나톨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사망했다. - P286

서리시을 때의 느낌을 전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한편으로는조심스러웠다. 공책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나 개인적인이야기를 출판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시인 말라르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귀중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여기 쓰인 문장들이 설사 한숨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바로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우리에게 귀중한 것이 된다. 공책들의 적나라함은(………) 그것들을 출판하는 일을 바람직하게 만든다. 그러한 특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데 유용하다. 말라르메의 그 유명한 침착성은 아주 활발한 감수성의 충동, 혹은 광기와 착란에 가까울 정도의 충동에 바탕을 둔 것이다. (……) 공책들이 보여 주는 구체적인 사례 덕분에 그 몰개성, 그 객관성이 실은 인생의 가장 주관적인 충동과 연결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 P287

 말라르메는 대체로 이렇게 생각한 듯하다. 아나톨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질병은 나의 책임이다. 아들에게 생의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몸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앗아 갈수 없는, 나의 생각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아나톨을 글로 바꾸어 그 애의 생명을 연장하고 싶다. 문자로 아들을 부활시키고 싶다. 시로 묘비를 세우는 작업은 죽음의 존재를 말살할 것이다. 말라르메가 볼 때 죽음이란 죽어 가는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이었다. 아나톨은 너무 어려서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이 주제는 기록 전편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아직 살아 있고 말라르메가 죽을때에야 비로소 함께 죽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적인 죽음, 즉하느님이 없는 죽음, 구제의 희망이 없는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적어 놓은 감동적인 이야기로, 말라르메 미학의 은밀한 뜻을 드러낸다. 바로 예술을 종교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 P289

렘브란트가 죽어가는 아들 티투스를 그린 초상화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든다. 렘브란트가 어린 시절의 활발하고 씩씩한 티투스를 여러장의 그림으로 남겼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죽어 가는 티투스의초상화를 제대로 바라보기가 무척 힘들다. 스무 살이 미처 안된 티투스는 질병으로 너무 수척해져서 노인처럼 보일 지경이다. 렘브란트가 그 초상화를 그릴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죽어 가는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도 캔버스 위에 아들을 그리기 위해 손을 단단히 고정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렘브란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힘을들였을지 상상해 보라.
자연스러운 이치로 보아 부모는 자식을 땅에 묻지 않는다.
자식의 죽음은 모든 부모에게 궁극적인 고통이다. 아무리 소박할지라도 우리가 인생에 기대할 수 있다고 여긴 모든 바람을산산조각 내는 잔인한 공격이다. 자식을 잃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벤 존슨은 말라르메가 부정(父情) 때문에 아들이 <그가 부러워할 만한 상태>에 이미 도달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탄식했다.  - P290

 책을 읽다 보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한다. 페이지를 넘겨 다음 응모 글로 넘어가면 완전히 다른 사람, 완전히 다른 환경, 완전히 다른세계관을 마주하게 된다. 다름은 이 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우아하고 세련된 글도 있지만 조잡하고 서툰 글도 많다. <문학>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 글은 소수이다. 문학적 기량이 부족한 저자들의 글을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만드는 요소는 다른 무엇, 날것 그대로의 솔직함이다.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폭소 한 번 터뜨리지 않고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독자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이 이야기들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나는 개인적 체험의전선에서 보내온 특보라고 부르고 싶다. 이야기들은 개별적인미국인들의 사적 세계를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흔적을 거듭 발견하게 된다. 개인의운명은 복잡한 방식으로 사회의 지배를 받는다.  - P326

 소피아는 언니 엘리자베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남편과헬텔(소피아가 장난스럽게 오무 씨라고 칭한)의 우정에 관해이렇게 썼다. <이 성장 중인 남자의 생각이 호손 씨의 위대하고다정하며 이해심 가득한 침묵에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는 게 나에겐 더없는 기쁨이지. (……) 그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데도 사람들이고해 신부를 대하듯 가장 깊은 속마음까지 털어놓는 게 놀라워> 멜빌은 호손과 그의 작품들을 만나면서 인생의 근본적인전환을 이룬다. 그는 호손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흰 고래에 관한 이야기 (전통적인 형태의 먼 바다 모험 소설로 기획된)를 쓰고 있었지만, 그 작품은 호손의 영향 아래 깊이와 넓이를 더해갔고 지칠 줄 모르는 맹렬한 영감 속에서 가장 풍성한 미국 소설들 가운데 하나인 『모비 딕 Moby-Dick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첫 페이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 <그의 천재성에 대한 경탄의 표시로 이 책을 너새니얼 호손에게 헌정한다.> 호손은 레녹스에 머무는 동안 달리 이룬 게 없다 하여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멜빌의 뮤즈 역할을 해준 것이다. - P355

이제 우나는 충분히 지쳐서 장미와 금 빛깔의 황혼에 푹 잠겼다가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런아버지가 있고, 눈앞에 그런 풍경이 있으며,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니 우리가 그 아이에게 걸지 않을 희망이 무엇이 있겠어요?
일전에 그 아이와 줄리언이 아버지의 미소를 두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른 사람의 미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같은데 아마 그 사람은 태펀 씨였을 거예요. 우나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줄리언, 그래도 우리 아버지 미소만 한 건 없어!》줄리언이 대답했어요. 《아, 그럼, 아버지 미소만 한 건 없지!》》 우나가서른셋이라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고 여러 해가지난 1904년,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이 당시 유명 잡지였던 『아웃룩The Outlook에 추도문을 실었다. 거기에 우나가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그에게 한 말이 인용되어 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 유쾌해질 수 있었어요. 마치 소년 같았죠.
세상에 아버지만큼 훌륭한 놀이 친구는 없었어요.> - P363

나는 나는 기억한다! Remember를 얼마나 여러 번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발견한 건 1975년 출간직후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몇 년에 한 번은 다시읽었으니 도합 일고여덟 번은 읽었을 것이다. 분량이 길지는않지만(초판이 138페이지밖에 안 된다) 놀랍게도 나는 조 브레이너드의 이 작은 걸작을 그토록 여러 번 읽었음에도 다시책을 펼칠 때마다 처음 만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뇌리에 깊이 박혀 지워지지 않는 몇몇 구절을 제외하면 나는 기억한다』에 기록된 거의 모든 기억이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것이다. 장기간 기억에 담아 두기엔 내용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삶이 소용돌이치며 변하는 회고의 콜라주에 꽉 들어차 있어서 누구라도 전체를 다 기억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내가 다시 그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많은 부분을 기억한다 하여도기억하지 못하는 내용이 많다. 나는 기억한다』는 늘 새롭고기이하며 놀라운 책으로 남아 있다. - P383

이상이 나는 기억한다』를 이루는 다양한 주제들이다. 이 책의 많은 미덕들 가운데 하나는, 육체적 삶의 상세한 감각들에강한 초점을 맞추고(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의 기분, <똑바로 설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빠르게 맴을 도는> 기분, 난생처음배 속에서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암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 1940년대와 1950년대, 1960년대 미국 풍경의 지극히평범하고 사소한 세부 사항들을 아름답게 기록한 동시에 특정한 남자 - 겸손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젊은 조 브레이너드-의 초상을 너무도 정확하고 거리낌 없는 화법으로 제시하여 우리 독자들이 그 초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보기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의 기억들은 끊임없이, 시간이나 장소의 제한 없이 잇따라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한순간 뉴욕에 있다가 다음 순간 털사나 보스턴에 있고, 20년전에 대한 회고가 지난주의 기억과 나란히 선다.  - P392

브레이너드의 책에 담기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것도 흥미롭다. 우리가 책상에 앉아 자신의 나는 기억한다』를쓴다면 대부분넣게될내용들 말이다. 브레이너드의 책에는형제자매와의 갈등, 잔혹 행위나 신체적 폭력, 분노의 폭발, 복수충동, 비통함이 없다. 지나가는 말로 케네디 암살 사건, <한국>(인용 부호를 붙여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선거 운동의 슬로건 <나는 아이젠하워를 좋아한다 I Like Ike>를 언급한 부분을 제외하면 정치적이거나 공적인 문제, 국가 행사에 관한 기억은 없다. 몬드리안, 피카소, 반 고흐는 언급하지만 브레이너드 자신이 시각 예술가로서 이룬 발전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으며, 보스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전부 읽었다는 말은 있지만 그가 소설의 열렬한 독자였음에도 그 외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관한 기억은 없다. 슬픔도, 분노도 없고 눈물도 거의 없다. 감정적 고통이나 심오한 내적 혼란을 암시하는 내용은 하나뿐이다 - P393

오늘 아침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내가 맨 처음한 일은 살만 루슈디를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루슈디를 생각한 지도 벌써 4년 반이 되어 갑니다. 이제 그것은 나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었습니다. 펜을 들고 글을 쓰기시작하기 전에 바다 건너편에 있는 동료 소설가를 생각하는것입니다. 나는 그가 또다시 24시간 동안 살아남기를 기도합니다. 영국의 보호자들이 그를 죽이려 드는 자들 - 벌써 그의번역자를 한 사람 죽였고 또 다른 번역자에게 상처를 입힌 자들의 눈을 피해 그를 꽁꽁 숨겨 놓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기도가 더는 필요 없는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살만 루슈디가 나처럼 세계 어디서나 자유롭게 길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 P409

우리는 그것을 좋아할 필요도 없고 그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시될 권리를 옹호하고 나서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이건 검열이나 예술적 자유에 관한 논쟁이 아닙니다. 공적기금의 사용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예술가들에게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작품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브루클린 박물관 큐레이터들은 작품들이 불쾌감을준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전시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물관 운용 기금을 대는 시 정부는 불쾌한 예술을 홍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P422

열네 살 된 딸아이가 오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는 난생처음 브루클린에서 맨해튼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 혼자서,
딸아이는 오늘 밤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현재 뉴욕에는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으며, 아내와 나는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사는 친구들에게 딸아이를 재워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딸아이가 세계 무역 센터 지하를 지나간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쌍둥이 빌딩이 폭삭 주저앉았다.
우리 집 꼭대기 층에서 보면 연기가 도시의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늘은 바람이 브루클린 쪽으로 불어와서 화재현장의 냄새들이 집의 모든 방으로 들어왔다. 화염에 휩싸인플라스틱, 전선, 건축자재, 시체들의 고약한 냄새, 코를 찌르는그 악취, - P430

내 머리를 잘라주는 이발사가 고통스러운 얼굴로빈이발소 앞에 서 있어서걸음을 멈추고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말이 몇 시간 전에옆 골동품점 주인이 사위와 통화했는데 사위가 세계 무역 센터107층사무실에 갇혀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통화가 끝나고 한시간도 안 되어 그 건물은 무너졌다.
나는 온종일 텔레비전 화면 속 끔찍한 영상들을 지켜보고 창밖의 연기를 내다보면서, 세계 무역 센터 완공 직후인1974년 8월 쌍둥이 빌딩 사이를 건넜던 내 친구, 고공 줄타기예술가 필리프 프티를 생각했다. 지상 460미터 높이의 줄 위에서 춤추는 작은 남자, 그 아름다움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 바로 그곳이 죽음의 장소로 변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생각하니 섬뜩하다.
우리 모두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수년 전부터 그 가능성을 이야기해 왔지만, 막상 비 - P431

극이 터지고 보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끔찍하다.
미국 땅에서 마지막으로 외국인의 공격이 벌어진 때는 1812년이었다. 오늘 발생한 사건은 전례가 없으며 이 공격의 결과는분명 끔찍할 것이다. 더 많은 폭력, 더 많은 죽음, 그리고 더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다.
마침내 21세기가 시작되었다.

2001년 9월 11일 - P432

작년 9월 세계 무역 센터에 가해진 잔인무도한 공격을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하는 건 온당한 일이다. 뉴요커들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폭격을 맞은 건 우리 시였다. 우리는 3천 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가증스러운 광신주의를 이해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한편, 그날 우리가 겪은 경험을 가족적 비극으로 받아들였다. 대부분이 깊은 애도 상태에 빠져 몇 날, 몇달을 집단적 슬픔에 사로잡힌 채 무거운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다녔다. 그만큼 우리 모두와 밀접한 사건이었으며, 뉴요커중에 그 공격으로 친구나 친척을 잃지 않은 사람을 직접, 혹은한 다리 건너서라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 수를 계산해 보면 충격적인 결과가 나온다. 희생자 3천 명에 그들의 직계 가족, 확대 가족, 친구들, 이웃들, 직장 동료들을 더하면 갑자기 수백만이라는 숫자로 불어나는 것이다. - P437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왜 하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걸 안다면아마도 그 일을 할 욕구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할 수있는 말은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그 욕구를 느끼기 시작했다는것이 전부이지만, 그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글쓰기, 특히 이야기하기 수단으로서의 글쓰기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세계라고 부르는 곳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상상 속 이야기들 말입니다. 확실히 그건 이상한삶입니다. 몇 시간, 몇 날, 몇 해를 홀로 방에 틀어박혀 펜을 들고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종이 위에 글을 적으려고 분투하는 삶이니까요.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고 싶은 걸까요?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입니다. 그래야만 하니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 P447

다시 말해, 예술은 무용합니다. 적어도 배관공이나 의사나 철도 엔지니어가 하는 일에 비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무용함은 나쁜 것일까요? 실용적 목적이 결여됐다고 해서 책이나 그림, 현악 사중주는 단순한 시간 낭비일 뿐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술의 가치가 바로 무용함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행위는 우리를 이 행성에 거주하는 다른 모든 생명체와 차별화하는 동시에근본적으로 우리를 인간으로 정의해 줍니다. 그저 최대한 잘해내는 것 외엔 아무 목적도 없이, 그 행위의 순수한 기쁨과 아름다움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 뛰어난 피아니스트 댄서가되는 데 요구되는 노력을, 그 장시간의 연습과 훈련을 생각해 - P448

보십시오. 지극히도, 그리고 장엄하게도 무용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그 모든 고통과 노력, 그 모든 희생을 바치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설은 여타의 예술과 조금은 다른 영역에 존재합니다. 소설의 매개체는 언어이며, 언어는 우리가 타인들과 공유하는 것, 우리 모두의 공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배우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향한 갈망을 키워 갑니다.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잠들기 전 듣는 이야기를 얼마나열렬히 즐겼는지 알 테지요. 어머니나 아버지가 어둑어둑한 방에서 곁에 앉아 동화책을 읽어 주던 순간을 말입니다. 자녀를둔 사람은 동화책을 읽어 줄 때 넋을 잃고 듣는 아이의 눈빛을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우리의 갈망은 왜 이토록 강렬한 것일까요? 동화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경우가 많으며 참수, 식인, 기괴한 변신, 사악한 마법 따위의 요소가 등장합니다. 그런 소재들이 어린아이에겐 너무 충격적이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가 제공하는 체험은 아이가 완벽히 안전하게 보호받는 환경에서 자신의공포들과 마음의 고통들을 대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이이야기의 마법입니다. 이야기는 우리를 지옥 밑바닥까지 끌고내려갈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무해합니다. - P449

그렇지만 저는 소설의 현 상태, 그리고 미래를 낙관적으로봅니다. 책에 관련해서는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늘 언제나 독자는 오직 한 명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소설은특별한 힘을 지니며, 제 견해로는, 그래서 소설이라는 형식은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소설은 작가와 독자가동등하게 기여한 협업의 결과물이며, 낯선 두 사람이 지극히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저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고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할 사람들과 평생대화를 나눠 왔으며, 앞으로도, 숨이 멎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 P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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