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

소설가, 시인, 에세이스트, 문학비평가 1939년 11월 18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태어났다. 시집 서클 게임(The Circle Game)」(1964)과 소설 먹을 수 있는 여자」(1967)로 이름을 알린 이래, 장르를 뛰어넘는 빼어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대표작으로 소설 시녀 이야기」 「고양이 눈 도둑 신부, ‘그레이스」와 ‘미친 아담‘ 3부작 등이 있으며, 눈먼 암살자 (2000)와
증언들(2019)로 두 차례 부커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아서 C. 클라크상,
프란츠 카프카상, 독일도서전 평화상, 미국PEN협회 평생공로상, 데이턴문학평화상 등을 수상했고,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화가, 일러스트 작가, 오페라 작사가, 극작가, 인형극 공연자로도 활동한 애트우드는 현존하는 가장 치열한 작가이자 독자로서 ‘타오르는 질문들‘을 세계에 던지고 또 답하며,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다.

「타오르는 질문들』은 나의 세 번째 에세이 및 조각글 모음집이다. 첫번째 모음집인 『두 번째 말(Second Words)』은 내가 서평을 쓰기 시작했던 1960년에서 시작해 1982년에서 끝난다. 두 번째 모음집 『움직이는표적들(Moving Targets)』은 1983년부터 2004년 중반까지 쓴 글들을 모았다. 그리고 이번 『타오르는 질문들』은 2004년 중반부터 2021년 중반까지 이어진다. 각 권에 대략 20년씩 묶인 셈이다.
각기 나름대로 격동의 시기였다. 조각글은 특정 경우를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저마다의 시간과 장소에 밀접히 연결돼 있다. 적어도 내글들은 그렇다. 또한 이 글들은 당시의 내 나이와 외적 환경에 유기적으로 엮여 있다. (내게 벌이가 있었나? 학생 때였나? 원고료가 필요했나? 나는그때 이미 내 관심사에 매진하던 유명 작가였나? 도와달라는 외침에 붙잡혀 공짜글을 써주는 중이었나?) - P11

1960년의 나는 스무 살의 독신이었고, 책을 출간해본 적도 없고, 입는 옷만 입는 대학생이었다. 2021년의 나는 알려질 만큼 알려진 81세의 작가이고, 할머니이자 과부다. 입는 옷은 여전히 한정적이다. 실패한 실험들을 통해 내가 입지 않는 게 좋은 옷들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당연히 나는 변했다. 예컨대 머리색이 달라졌다. 하지만 세상도 변했다. 지난 60여 년은 충격과 격변, 소동과 반전으로 가득한 롤러코스터였다. 1960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5년밖에 안 됐던 때였다.
우리 세대에게 그 전쟁은 매우 가깝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고, 집집에 귀향 군인과 사상자가 있었고, 우리 고등학교 선생님들 중 일부가 참전했다. 동시에 매우 멀게느껴지기도 했다. 1950년과 1960년 사이에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드러낸 매카시즘이 왔는가 하면, 노래와 춤의 개념을 뒤집어버린 엘비스도왔다. 옷도 극과 극을 달렸다.  - P12

1980년대는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과 종교적 우파의 득세로 시작됐다. 우리는 농장에서 토론토로 이사했다. (아이의 학교 문제가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1981년에 시녀 이야기』의 구상에 들어갔지만1984년까지 집필을 연기했다. 이때는 콘셉트가 억지스럽게 느껴졌던탓이다. 한편 내 ‘조각글쓰기‘의 출력 속도는 올라갔다. 아이가 학교에들어가면서 낮에 여유 시간이 생기기도 했고, 원고 청탁도 늘어났기때문이다. 산발적이고, 두서없고, 별반 유용하지도 않은 이때의 일기를 - P14

보면, 후렴처럼 등장하는 라이트모티프 중 하나가 일이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지속적인 앓는 소리다. "멈춰야 해." 나도 모르게 하는 말이다.
그때 내가 쓰던 글들의 일부는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결과였고,
이 양상은 지금껏 이어진다.
"그냥 싫다고 해." 사람들이 내게 말했고, 나도 내게 말했다. 그러나1년에 에세이 열 편을 청탁받고 그중 90퍼센트를 거절하면 1년에 한편이 남지만, 400건의 원고 청탁을 받으면 90퍼센트를 거절해도 (그러려면 얼마나 단호하고 도도해야 하는가!) 여전히 40편이 남는다. 나는 지난20년 동안 매년 평균 40편씩 썼다. 거기가 내 한계다. 멈춰야 해. - P15

우리의 연대기를 이어가자. 1989년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과 소련 붕괴했다. 누군가는 우리가 드디어 역사의 종언"에 도달했다고 했다. 자본주의가 팽창일로였고, 쇼핑이 세상을 지배했으며, 어떤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느냐가 개인을 규정했다. 여자들이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겠어? ‘소수집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내 스파이들의 전언에 따르면, 캐나다의 정치인과 정부 관료가 소수자들‘을 부르는 말은 ‘멀티에스(multi-eths, 영어와 프랑스어가 아닌 언어를 쓰는 사람들)‘와 ‘비지민(visi-mins, 백인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천만의 말씀이었다. - P15

왜 이런 제목인가? 21세기까지 우리를 따라온 문제들은 이제 화급을다투는 문제들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시대가 당대의 위기를 두고 같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확실히 우리 시대의 위기는 차원이 다르다. 우선, 지구, 세상 자체가 정말로 타오르고 있는가? 세상에 불을 질러온 것이 우리인가? 그럼 우리가 불을 끌 수도 있을까?
그리고 지극히 불평등한 부의 분배. 부의 양극화가 북미뿐 아니라사실상 전 세계에서 격화되고 있다. 이렇게 꼭대기만 무거운 불안정한구조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참다못한 하위 99퍼센트가 마침내 상징적 바스티유로 쳐들어가 불을 지르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그리고 민주주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는가? 애초에 ‘민주주의‘
는 무슨 의미일까? 모든 시민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의미라면 그런 상태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있기는 한가? 우리가 모두에 관심이 있기는 한가? 모든 젠더, 모든 종교, 모든 민족에?  - P16

예를 들어 이때의 모두는 모든 말을 뜻할까? 일각에서 입버릇처럼
‘창작자(the creatives)‘로 불리는 사람들은? 작가들과 글쓰기는? 그들우리들은 이른바 사회 친화적인 말들, 용인된 상투어들만 늘어놓는스피커에 불과한가? 아니면 우리에게 뭔가 다른 역할이 있을까? 만약그게 남들이 못마땅해하는 역할이라면 우리의 책들은 불태워질까? 그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책에 있어서 본질적 신성불가침이란 없다.
이것들은 지난 20년 동안 내가 남들에게 받았던, 그리고 스스로 던졌던 타오르는 질문들 중 일부다. 이 책에 내 답변들이 있다. 아니, 답변의 시도들이라고 해야 할까? 에세이‘란 결국 그런 거니까. 시도. 노력. - P17

나는 타오르는 질문들을 역사적 환경운동가 레이철 카슨과 배리로페즈에 대한 글들로 마무리한다. 지구에 붙어사는 우리의 미래가 갈수록 불확실해지는 지금, 두 사람의 저서가 가지는 의미가 갈수록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에게 기후 위기를 앞서 경고했던 카슨과 로페즈 같은 선각자들을 오늘날 그레타 툰베리가 대표하는 젊은 포스트밀레니얼 세대 운동가들이 계승하고 있다. 레이철 카슨의 책이 처음출판된 20세기 중반에는 부정하고, 회피하고, 미루는 것이 속 편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발을 뺄 수 없다. 우리가 계속 지구의 종(種)으로 남고 싶다면 그렇다.
얼마 안 가 포스트밀레니얼 세대가 성장해 결정권자의 자리에 앉게된다. 그때 그들이 주어진 권력을 현명하게 쓰기를 희망한다. 그리고서둘러주기를 - P22

칼턴대학교 저널리즘 &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의 칼턴 강연에 연사로초대받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보아하니 제가 네 번째 연사이고, 제 앞에 저명한 남성 연사 세 분이계셨네요. 저는 숫자 4가 늘 찝찝합니다. 숫자 3을 선호하지요. 그래서찝찝한 4를 두 세트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는 남성만 포함하고 저를 배제하는 행운의 3인조이고, 두 번째는 여성만 포함하는 세트로, 회원이현재 딱 한 사람 있는데 마침 그게 접니다. 따라서 저는 조만간 회원이늘어날 두 번째 세트의 첫 번째 회원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녁의 페미니즘입니다. 보시다시피 서두에 페미니즘과 말장난을 교묘히 섞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 위협을 느끼지 않게요. 사람들이 왜 제게 위협을 느끼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우선 저는 키가 작아요. 나폴레옹 이후로는 키 작은 사람이 위협적이었던 적 - P25

이 별로 없잖아요. 둘째, 저는 아이콘입니다. 당연히 아시겠지만 아이콘 대접은 사실상 죽은사람 취급입니다. 그런 사람이 할 일은 공원에꼼짝 않고 서서 비둘기가 어깨에 앉고 머리에 똥을 싸는 동안 청동으로 변해가는 것뿐입니다. 셋째, 저는 전갈자리입니다. 점성술에서 착하고 다정하기로 유명한 별자리죠. 우리는 어둡고 평화로운 신발 속에서조용히 사는 것을 좋아해요. 아무런 말썽도 부리지 않아요. 누군가 누런 발톱을 앞세운 거대한 마당발을 우리 위에 우격다짐으로 쑤셔 넣지만 않으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밟지 않는 이상 건드리지 않아요. 하지만 밟히면 결과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 P26

여기서 우리는 앞서 말한 노드, 즉 과학과 허구 사이의 접점으로 돌아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과학에 반대하십니까?"신기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학에 반대한다니, 무엇의 편에서무엇을 반대한다는 건가요?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없다면우리 중 많은 수가 천연두로 죽었을 겁니다. 결핵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과학자들 손에 컸습니다. 그들이 어떤지 잘 알아요. 저 자신도 과학자가 될 뻔했습니다. 문학에 납치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됐을 거예요. 친한 친척 중 일부도 과학자입니다. 그들은 프랑켄슈타인 박사 같지 않아요.
하지만 과학이란 앞서 말했듯 지식에 관한 것입니다. 반면 픽션은감정에 관한 것입니다. 과학 자체는 사람이 아니며, 가치관이 내장돼있지도 않습니다. 그 점에선 토스터와 다를 게 없습니다. 과학은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실현하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막는 도구. - P38

우리가 무엇을 원하느냐고요? 여기 그 목록의 일부를 대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금이 끝없이 솟는 지갑을 원합니다. 우리는 젊음의 샘을 원합니다. 우리는 날기를 원합니다. 말만하면 절로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나중에는 싹 치워지는 식탁을 원합니다. 급료를 줄 필요 없는투명인간 하인을 원하고, 한 걸음에 백 리를 갈 신발을 원합니다. 투명망토를 원합니다. 남들을 몰래 염탐하게요. 절대 빗나가지 않을 적들을 철저히 박살낼 무기를 원합니다. 불의를 처벌하길 원하고, 권력을원합니다. 재미와 모험을 원하고, 안전과 안보를 원합니다. 우리는 불사(不死)를 원합니다. 성적 매력이 넘치는 애인들을 떼로 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그 사랑에 충실하기를 원합니다. - P39

우리를 공경하고, 차를 몰고 나가서 박살 내지 않을 귀엽고 똑똑한아이들을 원합니다. 음악과 기막힌 향기들과 멋진 시각적 사물들에 둘러싸이기를 원합니다. 너무 덥지 않기를, 너무 춥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춤추고 싶습니다. 숙취 없이 술을 퍼마시고 싶습니다. 동물과대화하고 싶습니다. 부러움을 사고 싶습니다. 우리는 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원합니다. 희망을 원합니다. 선함을 원합니다. 그래서우리는 때로 스스로에게 우리 욕구의 어두운 면을 다룬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우리에게 오직 도구들에 대해서만, 그것들의 사용법과 생산과 유지보수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그것들이 우리의 욕망들을 어떻게 지원하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교육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토스터 수 - P39

리 학교와 다를 게 없습니다. 세계 최고의 토스터 수리공이 되면 뭐 하나요. 토스트가 더 이상 아침 식사 메뉴에서 각광받지 못하게 되면 밥줄이 끊길 텐데요. ‘예술‘은 장식이 아닙니다. 예술은 문제의 본질입니다. 예술은 우리 마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기술적 창의성은 우리의 지성뿐 아니라 정서에 의해서도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없는 사회는 거울을 깨고 자기 심장을 도려냈을 겁니다. 그럼 인간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은 아니겠죠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오래전에 말했듯, 인간의 상상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인간 세계만움직였습니다. 한때 인간 세계는 주위를 둘러싼 거대하고 막강한 자연 세계에 비해 정말 작았습니다. 지금은 날씨를 제외하면 우리가 통제 못 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갖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조종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입니다. 문학은 인간 상상의 발설 또는 표출입니다. - P40

하지만 이 책은 내내 획기적이었다. 북극 탐험역사의 전기적 사건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막대하게 기여했다. 또한이 책은 우리를 오래 매혹해온 이야기에 대한 헌사다. 프랭클린 전설은 이야기가 취할 수 있는 온갖 형태로 전해져온 이야기였다. 그것은미스터리, 가설 루머였고, 전설, 영웅담, 국가적 우상화였다. 그리고 이책 「얼어붙은 시간」에서는 흥미진진한 탐정물이 된다. 실화이기에 더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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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를 번역하고 있거든. 아이들에게는 젊은 독일인 가정교사를 구해줬는데, (운이 닿았는지) 지난2년을 릴케를, 특히 내가 옮기고 있는 바로 그 시들을 연구하는데 바친 사람이야 이 청년은 시 이야기를 할 때면 신이 나서 머리가 쭈뼛 곤두서고, 뿔테 안경이 흘러내려 코끝에 걸리는데, 중력의 기적으로 떨어지지 않고 거기 멈추곤 해. 선생이 아이들을서둘러 데리고 갈 때면, 호수 안쪽으로 그들을 멀리 데려가는자그마한 보트 위로 그들이 조그마해지는 걸 지켜봐. 그다음에는 하얗고 헐벗은 육체 둘이 보트 위에 서 있는 모습을, 그리고번쩍하고 첨벙, 그러고는 동그란 머리 둘만 물속에서 까닥거리지. 그제야 나는 릴케로 돌아가. - P352

지상에 더 이상 살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가
배운 관습들이 더 이상 소용없어지는 일,
더 이상 장미로도
그밖의 특별한 약속으로도,
인간의 운명을 그리지 않는 일은.
한때 우리였던 존재가 더 이상 아니게 되는 일,
어느 때보다도 끔찍한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일,
우리 자신의 이름마저도 부서진 장난감처럼 내버린다는 것은!
기이해, 우리의 소망을 더는 소망하지 않는 일!
얼마나 기이한가, 세계가 모두 얽혀
우주에 자유로이 떠다니는 것을 보는 일은!
죽음은 의미가 텅 빈 권태, 태양
우리가 서서히 영원을 품는.
- P353

어느 책에서 당신이 보낸 아주, 아주 오래된 편지를 찾았어.
‘비타에게로 시작하는독일군, 아니면 그 잔재는, 아침마다 자갈 위로 대포를 우르룽거리면서 옮기고, 저 멀리 군악대가 연주하는 소리가 호수 너머로 반향을 일으켜 릴케 사이사이에 내 소설을 생각하고, 조각보 이불 비슷한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진 조각들이 그저 나란히 놓여 있을 뿐 꿰매는 일은 시작하지 못했어.
야심만만한 게 나을까, 소박한 게 나을까? 후자가 안전하겠지.
하지만 안전한 건 질색이고, 우중충하게 성공하느니 영광스럽게 실패하는 게 낫겠어. 아무튼 ‘더 나은 것‘에는 관심 없어 아
‘무리 결심을 여러 번 해도 내 펜은 물처럼 자기만의 수위를 찾을 테고, 나는 내 방식대로가 아니면 쓸 수 없으니까. 적어도 무성하게 자란 내 어린 시절이 지금쯤이면 예쁘게 다듬어져 있으리라고 확신해, 그리고 그 자리에 나무처럼 울창하게 자랐길. 그러니 지켜보자고, - P354

당신의 소설을 쓰면서 왜 그렇게 소심하면서도 자만심으로가득 차 있어, 그것도 동시에? 당나귀 웨스트가 야망과 실패라...
고 부르는 게 뭔데? … 물론, 지난 10년 가까이 당신은 자르고다듬고 뿌리를 팠지. 무화과나무를 키우려면 뭘 해야 한댔더라? 그러다 보니 당신은 때때로 꼬리가 쥐꼬리처럼 되도록, 갈비뼈가 알프스 지도처럼 솟아오르도록 훈련에 시달린 경주마처럼 써. 부디 당신 소설을 써, 그러면 당신도 사실 같지 않은 세계, 버지니아가 사는 그 세계에 들어오게 될테니. 그 불쌍한 여자는 더 이상 다른 곳에서는 살 수도 없지∙∙∙ - P356

근데 당신이 "에서 샌즈가 우리에게 충고하기를" 등등을 말할대 당신이 (우리‘라는 호칭으로 의미하는 게 당신과 레너드야, 아니면 당신과 나야?
당신이 동요하도록 둬야지, 상당히 재밌거든. 그냥 이 말만 할게 와서 당신이 내내 불행할 것 같으면 오지 마.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야.
영국의 8월이 아름답다는 말은 하지 말아줘. 여기는 너무 추워서 무릎 위까지 깃털 이불을 덮고 있거든. 거의 매일 비가 내려. 정말 날씨가 몹시 사나운 동네야. 영국은 아름답다는 둥, 다운스 지역은 황금빛이라는 둥,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럼 내 운명에 반감이 생길지도 몰라. - P359

"그렇지만 당신의 톨스토이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려고 했어. 지금까지 내가 본 당신이 쓴 비평 중 최고라고 생각해. 당신의 훌륭한 글쓰기 실력은 내 공로라고 늘 생각하니까,
스스로에게도 만족했지... 당신은 여지가 있다면 마땅히 찔러야 할 곳을 정확히 찔렀어. 사진 같은 것일 수도 있었을 톨스토이의 리얼리즘을 전혀 다르게 만든 요소가 뭐냐는 문제 말이야.
그 작가의 리얼리즘은 반대로 감동적이고 흥미진진하고 그 외에도 모든 걸 갖췄지...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흥미로운 것들을쓸 때가 좋아. 그리고 할 말도 아주 많고.… 당신 소설에 관해서. 내가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때는 소설 쓰기에 관 - P360

한 아주 심오한 에세이처럼 느껴지더라고… 나는 소설을 시작할 때 감정을 느끼는 일이 핵심이라고 믿어. 그걸 쓸 수 있느냐말고, 언어가 건널 수 없는 만 건너편 저 먼 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이야. 숨 막히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도달할 수 있지. 기고문을 쓰려고 앉았을 땐, 1시간 안팎이면 쓰려고 한 생각을 확실히 포획할 단어의 그물이 내게 있어. 하지만 소설은 말했다시피,
쓰기 전에는 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게 좋은 거야. 보이기만할 뿐 그러니 아홉 달을 절망 속에 살다가 뭘 하려고 했던 건지잊었을 때에야 쓴 책이 나쁘지 않게 여겨지지 당신에게 장담하는데, 내 소설 전부가 쓰이기 전에는 일류였어…래드클리프 홀 문제는 동의해. 하지만 어쩌겠어? 그녀가 직접무죄와 존엄을 주장하는 편지를 써서 우리에게 서명을 부탁했고, 달리 보낼 사람도 없었어. - P361

그리고 우리는 결국 그걸 못 봤지. 하지만 나르텍스 열둘도 아쉽지 않을 만큼 관광한것 같아. 아무튼 나는 다른 존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어. 올여름 내내 나는 고양이처럼 예민했거든. 깜짝 놀라거나 꿈을 꾸고있거나 생각에 잠겨 있었지. 이제 나는 다시 힘이 넘치고 팔팔해졌고, 다시 한 번 삶에 굶주려 있어. 다 당신 덕분이라고 믿고있어. 그러니 이 편지는 감사장이지.
1시 15분 전이야. 버지니아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서 거의 2시간이 지났지. 내 소중한 사람,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세상모든 시빌들과 톰 엘리엇들도 나처럼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을걸, 당신이 내게 이런 존재여서 정말 감사해. 농담이 아니라, 몹시도 엄중한 진실이야. - P367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자정의 별빛에 의지해 당신이 쓴 편지는 아주아주 훌륭했어.
늘 그 무렵에 쓰도록 해. 당신의 심장을 녹이려면 달빛이 필요한 모양이니까. 내 심장은 가스 불에 바싹 익었어. 이제 겨우 9시밖에 되지 않았고 11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거든. 그러니당신이 내게 해줬던 것처럼 비애를 위로하는 말은, 나는 늘 비애에 잠겨 있으니까, 한마디도 하지 않을래. 내가 당신을 얼마나 지켜봤는지!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땠냐면 말이지!) 글씨,
어디선가 분수가 물을 흩뿌리는 동안 위아래로 솟구쳤다 가라앉곤 하는 작은 공을 본 적이 있거든. 당신은 분수야. 나는 공이고, 당신에게서만 느끼는 감각이야. 육체적으로 자극이 되면서동시에 평온을 주지... - P368

그러니까 당신은 막 돌아왔을 테고, 저녁 시간이 지났고, 나는혼자 밥을 먹었어. 내게 쓴 편지참 좋더라! 내가 당신 글을 흥미로워하면서 되새기는 거 알아? 이제는 당신 의견이 확고하게
‘선것 같아. 작가로서 내가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어. 하지만 당신의 다음 시는 주의 깊게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당신이 절정기의 톰과 리드에게 분연히 맞서는 방식도마음에 들어, 영국의 근위병이로군. 지금 무슨 말 하려다가 잊어버렸다. 뭔가 엄청 재밌는 거였는데, 이 오후에 이마와 머리카락사이에서 날 강타한 뭔가…확고하게 의견을 내세우는 것, 내가 작가를 좋아한다면 이 때문이야. 데즈먼드는 얼버무리고, 나는 너무 비약하지. 신경 쓰지마, 생각을 더 정리해서 나중에 말해줄게.
아, 맙소사! 당신이 내게 어떤 기쁨인지. - P379

내 사랑스러운 포토,
나 화 안났어. 그저 울프 부인을 못 보게 되어 실망했을 뿐이지. 내가 울프 부인을 만나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니. 그녀는 모르지만, 너와 나는 알지.
울프 부인에게 내 말을 전해줄래? 내가 화요일 1시 5분에 갈것이고, 나는 엘레나가 손톱만큼도 보고 싶지 않다고. 이렇게말하면 울프 부인은 이해할 거야. 아니면 내가 점심은 부인 혼자서 평화롭게 드시게 두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게 낫겠느냐고도 물어보렴. 저녁 먹고 같은 파티에 참석해야 하니 말이야. 올프 부인이 내게 엽서를 보낼까? 나는 둘 중에 어느 쪽이든, 혹은 둘 다 갈 수 있는데.
울프 부인에게 내가 허친슨 부인과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눴고,
허친슨 부인이 언젠가 울프 부인과 함께 여기 와서 머물고 싶어하더라고 전해줘.
사랑스러운 포토, 울프 부인에게 내가 화가 나지 않았다고 설명해줄래? 그저 슬플 뿐이라고? - P384

저 못된 포토가 노란 구슬을 온통 달고 다녀. 이리저리 굴리고 돌아다녀서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네. 앞발 털을 짧게 잘라왔는데, 당신이 이거 싫어하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이번 한 번만 한마디 해도 될까? 선물은 금지야. 우리에 온통 그렇게 쓰여있어 쟤네 성격 망쳐놔서 안 돼.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 때문에고통받는다니까. 이번 한 번은 용서해줄게. 하지만 다시는, 다시는 주면 안 돼. 당신이 나를 유혹해 붙잡은 그 밤, 그 겨울, 롱반에서, 당신이 스테인경의 종이칼을 몰래 가지고 갔지. 그래서단순한 규칙을 정해줄게. 그 칼로 당신은 우리 심장에 틈을 내고말거야. 구슬에도 같은 규칙이 적용돼. - P387

제 시간의 길이란 얼마나 중요한지 않은지 확실히 알려줬어. 전에는 베를린 전체가 순전히 혐오스럽기만 했거든. 이제는 사랑의 기운을 받은 장소들이 몇 군데 생겼지. 프린츠 알브레히트가,
포츠담 푼크툼. 심지어 브뤼켄가조차 당신의 향취를 얼마간 머금고 있어. 그러니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을 베를린까지 데려온 일이 허튼짓은 아니었지. 그리고 나는 비교철학을 하며 남은 나날을 편안히 보낼 거야. 그러면 롱반 봄이, 나이팅게일들과 당신의 커다란 침실이, 그리고 나머지 것들이 찾아오겠지. 하지만 그때쯤이면 당신 마음 상태는 변했을까? 내게 충실하지 않게 될까? 메리 크리스타벨? 맙소사, 난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거야. 안 되지, 당신의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아껴줘. - P397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여기 이기적인 병자의 소식을 하나 더 보내. 그래도 당신에게편지 쓰고 싶었고, 내 이야기뿐이어도 당신은 싫어하지 않겠지.
아직 침대에 묶여 있지만, 오늘은 정말 나아졌어. 지금 아프고오한이 드는 건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두통일 뿐인데, 지나가겠지... 아플 때면 내가 당신을 어찌나 원하는지, 이상할 정도야.
비타가 온다면 모든 게 훈훈하고 행복해질 것 같아. - P402

날이 좋으면 큐에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전에 당신이 햄스테드의 키츠 집에 데려가주겠다고 말한 적 있는데, 당신 바빠? 나는 프랜시스 비렐과 점심을 먹을 거야. 그 외에는 비어 있고, 버지니아가 보고 싶은데, 그녀는 최근에 내가 무척 심각하게 그리워하는 사람이지. 그나마 사진들이 나를 행복하게해줘. - P425

하지만 소설*은 어떻게 쓴담? 나는 걷기는 잘하지만, 소설 쓰기는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어. 쓰고 또 써도 다 써놓고 다시 읽으면 안 써도 됐겠다는 마음이 들거든. 내 주머니에서 큰 종이를 꺼내 사보이가 보이는 바위에 등을 기댄채 1908년에 정거장에서 마주치곤 했던 그 버스의 냄새를 정확하게 되살려보려고 애써 버스의 고무 없는 타이어가 내는 우르릉 소리를 그 집문을 들어서는 순간 훅 끼쳐오던 사치와 낭비의 인상을 하인들무리를 침실 문 작게 패인 홈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저녁 식사 후 통로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졸린 하녀들을 이런 인상들이 내게 그 이후 벌어진 다른 많은 일보다 훨씬 더 생생하다는걸 깨달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뭔가를 전달할 수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매달려 있고, 언젠가는 호가스 출판사라는 각인아래 서점에 진열된 모습을 보고 싶어. - P434

아마도 당신은 이런 편지는 내밀한 편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동의하지 않아. 내가 이 순간 쓰는 책은 나의 가장 내밀한 일부, 내가 가장 삼엄하게 비밀로 간직하던 순간에얽혀 있는 나의 일부야. 이 책에서 풀어낼 삶의 밀도와 비교한다면, 사랑이나 성이 다 뭐야? 하찮은 것에 불과하지. 그런 건 꼭대기에서도 외칠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내 책 - P434

에 관해 쓴다면, 정말 내밀한 편지를 쓰는 셈이야. 아주 흥미롭진 않지만 이만하면 내 말이 증명됐지? 하지만 당신은 차라리내가 포토와 버지니아가, 털 아래 바늘을 숨긴 그 보드라운 생명체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길 바라겠지. 그러니 그렇게 말할 거야. 내가 돌아가면 둘이 와서 머물 건지 아주 궁금한데? 포토는강아지들을 마음에 들어 할 테고, 버지니아는 훌륭하고 커다란침대와 11시의 커피를 좋아할 거야. 그리고 허가되거나 허가되지 않은 시간들에 그녀에게 내가 보일 모든 애정도 4일에 돌아갈 것 같아. 베를린 영국대사관 주소로 내게 보낸 편지들은 해럴드의 주머니에 들러서 내게 전해질 테고, 독일 남부 어딘가에서 며칠 중에 합류할 거거든. 아주 좋겠다. 그러니까, 편지 말이야 전달 받은 편지가 없었으니, 달리 말해 돌아가면 잘 묶인 편지 뭉치가 있단 뜻이지! - P435

아, 당신을 보기 전에 내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 당신은 절대모를 거야. 책장에 놓인 당신의 자필 원고나 내 방의 당신 사진들을 보는 일이 견딜 수 없어. 이 물건들은 죄다 여러 자루의 단도 같기만 해.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할까... 하지만내상상력이반기를 들지. 모든 것이 잘 끝나면, 나는 필시 이 일이 대단한통찰력을 주었음을 인정하게 될 거야. 단지 당신 두통이 정말로 그 일 때문이었다면 나로서는 이 상황이 잘 끝났다고 생각할 수 없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이 일은 처참하게 끝날 테니까.
당신이 나아졌는지 알려주겠어? 나는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당신에게 조바심을 내고 있어. 하지만 당신이 내가 그러리라 생각했다면 그 정도는 아니고. - P440

아니, 아프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그냥 평소의 두통이었고 다시 완전히 멀쩡해졌어옥스퍼드 학부생이 쓴 소설 원고를 읽는 중인데, 이 사람 주인공이 "우리 시대 살아 있는 최고의 시인들보다 훨씬 더 섬세한 시, 《대지》에 나온 이 구절들을 알아?"라는 대사를 하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람 책을 내지 않을 거야.
내 인생에 열정의 대상은 단 한 가지, 요리뿐이야. 끝내주는석유 난로를 막 샀거든. 뭐든지 요리할 수 있어. 나는 요리사들로부터 영원히 해방이야. 오늘 송아지 커틀릿과 케이크를 만들었어. 바보 같은 짓이란 말로 부족한, 이 책들을 쓰는 일보다 이쪽이 훨씬 낫다고 당신에게 장담할 수 있지.
....뭐, 신은 우리가 만날 수 있을지 아실 거야. 당신은 바르셀로나로 떠나겠지... - P465

돌아오면 여기 올래? 당신이 보이는 모든 것에 황홀해하고 있을까? 전에도 그리스에 가봤으니 당신기억은 더 강렬하겠지.
나도 알아.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지않을 때 뭘 경험하는지 생각하면 무서워. 맞아, 내가 당신과 함께 있으면 좋겠어.
우표 묶음은 내 것이었어. 적어도, 담배갑에 넣어놨던 우표 묶음 하나를 잃어버리긴 했으니, 그게 당신이 의자 밑에서 찾은그 물건일 거야. 고마워.
보랏빛과 황갈빛의 비탈을 보고 있겠지, 그리고 10월에 그리스에 갔던 나는 본 적 없는 온갖 야생화들도 당신이 얼마나 부러운지.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부러운지.
사는 게 너무 복잡해. 때로는 어찌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 - P472

방금 당신 편지를 받았고, 당신 편지를 받아서 아주 좋아. 하지만 당신이 알다시피 감정에 아주 민감한 나는 당신이 몹시 슬프고 뭔가 고민하거나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야. 왜 그래? 이 순간 삶이 왜 그렇게 복잡한데? 돈? 도티? 글쓰기 어찌 알겠어...
맞아, 내가 어디 있었는지, 혹은 그게 언제였는지도 거의 잘모르겠는, 여기 다시 돌아오니 정말 이상해. 아크로폴리스에서내려오는 스물셋 시절의 내 유령이 있더라. 그녀가 얼마나 가엾던지!… - P473

가장 소중한 사람,
...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이 딱 하나 있는데, 그녀는 장밋빛의붉은 탑과 홉 정원과 홉 말리는 숱이 있는 광경 말고는 아무것에도 열의가 없어. 그게 누구게? 시를 한 편 썼고, 어머니가 있고소한 마리와 해자도 갖고 있다더군. 글을 정말 못쓰겠어..
너무 사람을 많이 만나 사는 게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펜에는 머리카락이 끼었어. - P476

와, 이거 정말 신난다!
IN SI당신이 돌아온다니.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내 돌고래가 다시생선 장수의 가게로 돌아왔어! 하지만 나는 언제 비타를 만날수 있지? 우리는 일요일 오후까지 여기(루이스 385)에 있을 거야.
그다음에는 열흘 동안 런던에 가. 그다음에는 이탈리아에 가고.
전화해줄 수 있어? 당신 목소리까지 바뀌었다고 말하진 마. 그리고 언제든 어떤 제안이든, 그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도 승낙이야...
이제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돌봐야겠지. 아, 미국 전역을 보고분홍 탑으로 돌아오다니, 당신이 어찌나 부러운지. - P493

가장 소중한 당신,
편지를 전혀 쓰지 않다니, 나 정말 못됐다. 당신은 신경 쓰지않겠지만, 내가 신경 써야 할 방문객들이 빗발쳐서 도망칠 수가없었어. 다음 주는 가망이 없어. 하지만 23일 이후에는 내가아는 한 고맙게도 아무도 오지 않을 예정이야...
세상에, 당신은 정말 친절한 여자야! 당신이 레너드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나는 딱 이렇게 말했어. 게다가 이 말이 내가 만든격언을 다시 확인해주지. 레너드는 아주 마음 졸이며 우리가 당신에게 명예, 진실성, 우정, 관대함 등을 강요한다고 생각하지나는 ‘아, 하지만 비타는 원래 그런 사람인걸‘이라고 말했어. 그후에 당신 편지가 와서 그걸 확인해줬지. 하지만 1천기니를 오리 연못에, 아니면 하수구에 팽개친 건 고귀한 행동이었어.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하트 데이비스"의 실물도, 케이프의 정신도좋아하지 않아. - P518

그 책이 왔어. 그리고 새로운 시를 한두 편 읽었어. 마음에 들어. 그래, 이니드 배그널드에 관해 쓴 시가 좋았어.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할 수 있는지 알게 된 것 같아.
시인으로서 당신은 기이하게 뒤섞여 있어. 당신이 ‘구식‘인 점,
그러면서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점이 좋아. 그게 당신이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는 이유지. 자유롭고 활기차고…아, 어쩌지, 이 시들의 너머를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 - P530

3부
우정
1934-1941

두 사람의 연애는 끝났지만, 우정은 지속된다. 1939년 영국이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면서 불안해진 비타는 버지니아와 더욱 자주 만나며 다시 가까워진다. 로드멜과 시싱허스트는 둘 다공습 지대에 위치해 그들 집 위에서 공중전이 벌어진다. 1941년2월 17일, 로드멜에서의 만남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 P531

당신도 알겠지만, 내가 성이라면 못 배기잖아. 아랫마을에 있는 작은 호텔에서 출발해 일몰에 분홍빛으로 변하는 이 성을 매일 저녁 보곤 했지. 그래서 조사를 좀 했어. 이성이 비었고, 세를 준다는 거야. 제노바에 있는 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5분만에 즉시 입주하기로 했지. 여기 올라오는 길이 하나뿐이어서,
이 지역에 사는 주민 절반이 등에 우리 짐을 지고 날라야만 했어. 우리는 문간에서 붓꽃과 수선화로 만든 커다란 다발을 들고선 정원사와 테레사와 안젤라라는 완벽한 이탈리아인 하인 두사람에게 환대를 받았지. 이들은 꽤 ‘인물‘인데, ‘인물‘들은 늘 그렇듯 쉽게 지루하게 만들어.
이런 삶이야말로 제대로 사는 방법이라는 데 의심할 여지가없어. - P534

...소중한 당신, 나는 모험을 갈망해. 하지만 적어도 8과 1/2분만이라도 당신과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넣고 싶어.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단지 애정으로, 분홍빛유리 안 돌고래의 추억 말이야.
난 먼지와 쓰레기더미에 푹 파묻혀 있었어. 하지만 이제 봄이왔지・・・내 마음은 낭만적인 만남들의 꿈으로 가득해. 보랏빛 폭풍이칠 때 큐에 앉았던 일을 기억해?···그러니 내게 알려줘. 그리고 더, 더 나를 사랑해줘. 사다리에다른 가로대를 대서 내가 올라가게 해줘. 당신에게 내 새로운사랑 이야기를 했던가? - P540

세상에, 늙다리 에설 일은 정말 골칫거리겠다!
안타깝지만 그 문제라면 나 자신도 이해가 안 가니 전혀 설명해줄 수가 없어.
...확실하게 말하는데, 나는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어. 그런소리가 내 귀에 들어오면 내가 에설에게 따질 거야. 아니면 내가에설에게 편지라도 보낼까? 부활절 지나야 만날 것 같거든. 하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에설이 적이나 그저 알고 지내는 정도의 사람들에게 누구 욕을 하고 다니진 않아. 그런 말을 듣고 넘기리라고 믿을 만한 오랜 친구들에게나 그러지. 하지만 이런 일이 늘 걱정이 된단 건 나도 알아... - P544

텐트 문가에 앉아서 당신에게 편지를써 우리 주변은 온통모래 언덕이야. 하지만 어떤 감정을 당신에게 전해야 할까? 혹은 어떻게 그걸 당신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건 다른 무엇과도 달라. 계곡, 야트막한 산맥, 산마루, 봉우리, 눈처럼 순수한비탈이 모두 황금빛 모래로 만들어진 낯선 지형뿐이야. 황금빛,
맞아, 태양 아래서는 그래. 하지만 그늘이 지면 분홍빛이나 보랏빛으로 변하고, 시시각각 모양과 색깔이 바뀌기도 하지. 우리는아랍인(유목민) 일곱 명, 낙타 두 마리, 노새 한 마리, 양 한 마리(먹으려고), 가젤을 사냥하는 데 필요한 슬루기 한 마리와 함께있어. 때때로 아랍인 중 하나가 플루트나 음울한 노래의 짧은소절을 부르곤 하지. - P545

왜 ‘한때‘ 버지니아야? 왜 당신 편지에 내가 답장을 안 해? 물론 내가 당장 앉아서 답장을 쓰게 만들려는 수작이겠지? 당신이 왜 쓰레기통이야? 그리고 우리가 왜 짧은 여행을 못 가? 왜,
왜, 왜?
왜냐하면 당신은 켄트의 진흙에 주저앉아 있기를, 나는 런던의 깃발들 위에 있기를 택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게 사랑이 사그라들 이유는 아니잖아, 안 그래? 진주와 돌고래가 왜 사라져야 한다는 거야.…그러니 그만. 하지만 당신 팬이 다시 들썩이기 시작하면, 그러게 둬.
왜냐하면, 나의 소중한 비타, ‘한때의 버지니아‘라고 말하는 일이 내가 살아 있는 현시점에 무슨 효력이 있겠어? 덧붙이면 포토 또한 마찬가지지. - P561

그 책이 내일 나와 단조롭고 읽기 힘든 글이고, 당신이, 마땅히도, 안 좋아했던, 바로 그 진지한 산문 <세월>의 주제를 훨씬 더 진지하게 반복해서, 당신에게 보낼 생각을 못 했어. 하지만 감사의 뜻으로 보낼테니 읽을 필요도 없고 읽었다고 편지를쓰거나 말해줄 필요도 없어. 후련하게도, 그 책 두 권 모두 이제내 마음에서 떠났어. 그 책들을 왜 꼭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하늘만 아시겠지. - P571

내가 당신의 《3기니》에 감사편지를 아직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만 당신이 스카이 섬으로 떠났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뿐, 내가 그 책을 음미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당신은밀고 당기기를 잘하는 작가야 한순간 당신의 사랑스러운 산문으로 사람을 매료시키다가도 다음 순간 사람을 현혹하는 주장으로 화를돋우니까. 있지. 이 책은 너무 도발적이어서 편지 한 장 따위로는 감사를 표할 수가 없어. 책만큼 긴 답장이 필요할 텐데, 그럼호가스 출판사가 출판할 거리가 생기겠지. 당신과 공식적으로싸울 생각은 없어 주먹다짐이라면 내가 당신을 때려눕힐 수도있겠지만, 펜싱이라면 늘 내가 점수를 잃을 테니까. 당신이 신사의 게임을, 신사의 기술로 하는 한 당신이 이기겠지. 나는 내 생각을 썩 잘 설명하지 못해. 실은 아주 요령 없고 혼란스럽게 설명하지. 그러니 우리가 만날 때까지 이 문제는 미뤄도 될까? 그전에, 내가 당신 책을 아주 즐겁게 읽었다는 건 말해둘게. 비록책 절반을 넘기며 "아, 버지니아, 그렇지만..." 하고 외치고 싶었어도 말이야. - P572

...당연히 당신이 《3기니》를 싫어할 줄 알았어. 그래서 당신이그 문제를 언급한 엽서를 보내기 전까지 당신에게 줄 생각을 못했던 거야. 그래도 역시 잘 이해가 안 돼. 당신은 그 책의 50퍼센트에 동의할 수 없다며. 그럼, 당연히 동의못하겠지. 하지만 당신이 나의 "현혹하는 주장에 화가 돋는다고 말하니 묻는 건데,
그게 무슨 뜻이야? 당신이 잔다르크의 성격을 이해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야 있지만, 내가 잔다르크에 관해당신의 주장이 "사람을 현혹한다"라고 하면, 어떤 효과를 위해서 진실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도 아는 사실을 부정직하게 왜곡했다고 말하는 셈 아냐? 그게 당신이 말한 "현혹한다"의 의미라면 칼이 됐건 주먹다짐이 됐건 이 문제를 확실히 해결해야겠어. - P574

건초! 야단났네, 건초라고! 내가 건초를 구하러 켄트 지역의월드 전체를 구석구석 다니지 않았겠어? 건초가 없어. 우유도귀해. 그래서 당신에게 버터도 더 못 보냈어. 그리고 그런 까닭에 올해는 시싱허스트의 잔디도 전혀 베지 않고 자라게 뒀지. 건초! 아이고, 맙소사!
휘발유 쿠폰에 관해서는 레너드가 이번에 잘못 알았어. 나도레너드만큼이나 불법적인 일은 전혀 안 해. 하지만 버스로 오는걸 정말 견딜 수 있다면 호크허스트까진 쉽게 마중 나갈 수 있어. 오후에 당신을 엘런 테리에게 데려갔다가 호크허스트로 다시 태워줄게. 당신은 내게 알려주기만 하면 돼. 3월 19일과 20일만 빼면 아무 때나 괜찮아. 19일에는 위원회가 있고, 20일에는뭐가 있게? 지역 여성 학교가 있어. - P632

<뉴스테이츠먼>에서 온, ‘버지니아울프 양 앞으로 된 이 편지좀 봐. 정말 이상한 텔레파시지! 아니, 난 당신이 아냐. 작은 앵무새들은 키우지 않아.
루이는 살아남았어. 음식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고 있지. 하층계급의 소박한 새들인 것 같아. 우리가 가게 되면, 혹시 살아남으면 한 쌍 데리고 갈까? 전부 금방 죽으려나? 우리가 언제 가게 될까? 신은 아시겠지.… - P633

멍크스하우스에서 쓴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 3월28일 우즈 강에서 자살했다. 비타는 소식을 접한 뒤 3월 31일 남편 해럴드에게 편지를 썼다. "방금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 버지니아가 스스로 목숨을끊었다. 보도는 안 됐지만 레너드와 버네사가 편지를 보냈어. 레너드 말로는 버지니아가 최근 몇 주 동안 안 좋았고, 다시 미칠까봐 무서워했다.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게 사랑스러운 정신, 사랑스러운영혼을 지닌 사람이 더군다나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 (・・) 여전히, 나는 거기 가서 버지니아가 어떤 심리 상태인지 알았다면 그녀를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 P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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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지는 내버려 두고 버지니아에게 돌아가자. 신이 주신 그녀의 스타일 말고 버지니아 본인에게로 (스타일은 여성일까 Le style c‘est la femme?) 재밌는 건 당신이 내가 유일하게 제대로아는 삶의 통속적이고 즐거운 면에 무심한 인물이라는 거야. 그리고 나는 궁금해, 그게 득일까 실일까? 당신에게 득일 거야, 당신에게 말이야, 버지니아, 왜냐하면 당신은 마음속에 흥미로운일들을 충분히 쌓아놨고, 완결된 독립체니까. 물론 굳이 다른누구에게 득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프루스트의 말에공감해. "그 과거를 지나가야만 한다" faut avoir passe par la." 당신은 그랬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 방식이 아냐. - P112

... 적확한 단어에 관해서라면 당신은 아주 잘못 알고 있어 스타일은 아주 단순한 문제야. 리듬이 전부지. 일단 그걸 깨치면,
잘못된 단어를 쓸 수가 없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렇게 아침나절이 지나도록 앉아서, 아이디어와 상상 등등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으면서도 적절한 리듬을 찾지 못해 머릿속에서 내보내지 못하는 내가 있지. 리듬의 문제는 아주 심오하고, 단어보다훨씬 깊이 들어가지 풍경 하나, 감정 한 조각이 마음속에 이 파동을 만들어내는데, 이 과정은 알맞은 단어를 만들어내기 한참전에 일어나. 그리고 쓸 때 (현재 내가 믿기로는) 파동을 다시 포착해서 재생시키면 (그리고 이 과정은 필시 단어와는 아무 관계가없어 그 이후에 마음속에서 파동이 이리저리 요동치면서 단어를 부합시키지. 하지만 내 생각은 내년이면 또 달라질 게 확실해.  - P114

 공 던지기, 장난, 비속어, 저속한 짓이나 난동, 질투 중 그 무엇도. 내 이복형제들에게 분노하거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지칠 때까지 서펜타인 호수를 돈 게 전부지. 이게 내 변명이야. 나도 통속적 즐거움을 너무 모른다는 사실을 자주 의식하지만, 프루스트가 이런 길을 지나오길 했나? 아니면 당신이 당신이 식탁을 가득 채운 장교들을 놀릴 줄은 알아?···그래, 너무나 소중한 비타. 당신이 보고 싶어. 당신 생각을 해.
수많은 일이 있지만, 당신에게 빠져 있어 할 이야기가 많지 않네. - P115

내 심장은 모자, 매트리스와 사생활이 없는 환경을 넘어 당신을 향하고 있어. 나는 계속 이런 상태에서 지내. 그렇지만 조심해. 이게 사람을 미치게 만들더라고. 내 삶에 독이 되고 있어. 이에 관해서 최소한 세 사람과 말다툼을 벌였어. 이 문제에 있어내 생각은 아주 확고해. 당신이 묘사한 바로 그런 자포자기의최저점을 찍었지. 가게가 문제가 아냐, 내가 가게들을 좋아하긴해도 사생활이 문제지. 이건 내 삶을 설탕 덩어리처럼 조각조각쪼개고 있어. 아니, 그조차도 못 되지. 이건 직육면체의 품위조차도 없거든. 그냥 조각, 토막에 불과해. 게다가 사람들은 내가글을 쓰길 기대하지. 나한테 방해 없이 이틀이 주어졌다고들 하는데, 그 시간 동안 나는 잡동사니 가방, 휴지통, 쓰레기 더미라도 된 기분이었거든. - P118

개를 한 마리 입양했어. 이곳 정원은 잠정적으로 내 것이 될개들로 가득해. 다들 사막에서, 아랍인들에게 속아서 목줄에 매여 온 애들이야.
입양한 개는 우아한 걸작이야. 다리는 길고, 발끝으로 갈수록날렵하게 빠졌어. 목은 당신 손목 정도 굵기밖에 안 돼. 오늘 밤우리는 슬루기 강아지와 나는 높은 곳으로 눈을 보러 가.
‘내가 보고 싶다던 당신의 말이 따뜻한 석탄 조각처럼 마음속에서 타올라. 아, 당신이 너무나 그리워 어느 정도인지 당신은절대 믿지도 알지도 못하겠지. 하루의 매 순간이 그래. 고통스러우면서도 무척 기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당신이 알려나.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이렇게 예리하고도 지속적인 감정을 느끼니 좋다는 거야. 살아 있다는 징표니까. (말장난은 의도한 게 아냐.) - P119

... 지리적 거리가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향이란 얼마나 이상한지! 당신이 돌아온다니 나는 벌써 전과 다르게 쓰고 있어. 슬픔의 감정이 누그러진다. 당신이 멀리 떠날 때는 수평선 너머로가라앉는 것처럼 애처로웠어. 이제 당신이 떠오르니, 나는 다시기쁘네. - P126

새로운 소식은 별로 없어. 시무룩해서, 편지나 한통 받으면좋겠어. 정원이나 하나 받으면 좋겠어. 비타가 오면 좋겠어. 꼬리를 자른 강아지 열다섯 마리, 비둘기 세 마리, 가벼운 수다. 시트웰가의 파티는 끔찍한 실패였어. 당신이 시골뜨기가 된 기분을 좀 느껴보라고 그 이야기를 한 거고, 실제로 그렇게 느꼈다니까 다른 사람들의 파티가 늘 자기 파티보다 신비롭고 매력적이라는 내 관점이 맞는 셈이지. 시는 쓰고 있어? 그렇다면, 시의감성과 산문의 감성이 어떻게 다른지 알려줄래? 당신이 시에는끌리는데 산문에는 안 끌리는 이유가 뭐야?… - P127

내가 로드멜로 돌아가 있으면 좋을 텐데. 당신이 여기 오고있으면 좋을 텐데, 당신한테 그래주겠냐고 하면 좀 나아질까?
(내가 낙담에 빠진 기분인 걸 알겠지.) 여기는 아주 좋아. 당신도 알겠지만. 하지만 당신은 바쁘겠지. 그래도 당신이 런던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여긴 괜찮은 피난처이고, 내가 당신을 차에 태워 올수도 있어. 아무튼 금요일에는 볼 수 있을까? 빌어먹게도 한참남았다. 바보 같은 편지인가? 로드에서 당신이 내 버릇을 버려놨어. 죽을 만큼 행복했는데,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줘. - P130

...맞아, 내가 때로는 끝내주게 잘 쓰지. 하지만 요즘은 아니야. 저주받은 기사를 쓰느라 질척거리고 있거든. 그리고 우울한쓰레기 너머로 저 멀리서 축복받은 섬처럼 반짝이고 있는 내 소설을 보고 있어. 하지만 물에 닿을 수가 없네. - P131

사랑하는 니컬슨 부인,
목요일에는 이런 이유로 못 가지 싶어. 글을 마저 써야만 하는데, 당신이랑 있으면 유혹이 너무 강렬할 테고, 가싱턴에서(내 생각에는 이틀 밤은 보내야만 할 것 같거든..…덧붙이자면, 목요일에 공연 보고 우리집에서 단둘이 볼까?
혹시 몰라서 시빌과의 약속을 미뤄놨어. 금요일에 일찍 와. 타자기가 본능적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니컬슨 부인이라고 불렀군…물론, 당신이 시빌을 만나고 싶다면 말만해. 부엌에서 나와단둘이 래디시 먹을래? - P135

"나는 이 순간 구멍이 난 낡은 실크 패티코트를 입고 앉아있는데, 입고 있는 또 다른 드레스 상의도 구멍이 나 있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나는 드퀸시를, 리처드슨을, 다시 드퀸시를읽다가 다시 드퀸시를 읽는데, 왜냐하면 한창 그에 관해 쓰고있기 때문이고, 맙소사, 비타, 혹시 산문과 시의 근본적인 차이가 뭔지 알면 전보 좀 줄래. 그 생각으로 가여운 내 머리가 깨질것 같거든. - P142

하지만 화요일 아침에 런던에 올라갔다가 그날 점심에 로드멜로 다시 내려오지 말고, 내가 화요일에 당신을 로드멜로 태워다주면 어때? 그러면 당신이 곤란하거나 피곤할 일도 없을 것같은데. 하지만 이 문제는 당신이 와서 결정해.
당신이 마침내 로드멜에 간다니 기뻐. 이렇게 신나는 일들이많으면 당신에게 좋지않을게 분명하지만.
그리고 늙은 하다!" 이런, 이런, 당신이 조지 무어, 브리지스등등 기념비적인 인물들을 만나면 늘 그렇듯이, 거의 개종해서올걸, 당신의 동시대인들은 싫어하지만 - P143

그래, 우리가 날 좋은 날에 당신을 내내 코박고 글만 쓰게 해서 힘들었겠다. 하지만 당신이 누릴 영광을 생각해봐. 우리가 거둬들일 이익도. 당신 강아지가 내 치마에 이빨로 구멍을 뚫어망가뜨리고, L의 교정본을 먹어치우고, 카펫에도 할 수 있는 최대의 손실을 입힌 덕분에 이제 이 소득이 꼭 필요해졌거든. 하지만이 아이는 빛의 천사야 레너드가 이 아이 덕분에 신을 믿게됐다고 진지하게 말하더라. 심지어 강아지가 자기 방바닥에 하루 동안 여덟 번이나 실례를 했는데도 이런 소리를 했다니까. - P147

편지 안에 다른 편지를 쓰다니, 당신은 정말 기발해. 그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당신을 만나서 답을 줄게, 초대장 말이야.
아, 자기야, 시빌 때문에 머리가 아파 편지도 못 쓰고 정말 지루해, 당신은 제외하고, 나는 의자에 누워 있어. 그렇게 나쁘진않아. 괜히 당신의 동정심을 얻으려고 이야기하는 거야. 당신에게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려고 사람들이 야금야금 내 삶을 갉아먹는 이 끝없는 상황을 멈출 수 있도록 무슨 방법이라도 생각해보라고 당신에게 애원하려고 시빌, 아서 경, 대디가 번갈아가면서 그래. 이걸 왜 당신에게 떠넘기냐고? 심리적으로 필요해서 아닐까 싶어. 사람이 내밀한 관계에서 본능적으로 행하는 일중 하나겠지. 나는 허리에 느껴지는 이 통증에는 아주 겁쟁이야.
당신은 영웅 같을 텐데… - P157

이제 내가 버지니아와 살든지 아시아로 돌아가든지 해야 할시간인데, 전자를 할 수 없으니 후자를 해야만 해. 단것을 너무많이 먹은 사람이 느낄 법한 기분을 맛보고 있어.
하지만 <옵서버>에 실린 드링크워터 씨의 헌사는 아주 잘 빠졌더라. 위로가 되어서 마음이 편해졌어.
긴 산책에 나서야겠어, 혼자.
그럼 내일까지, 내 사랑, 아주 착하게 지내기야. 나에게도 잘해줄 거지? 나도 당신에게 잘할게. 그리고 놀에 언제 갈지도 정하자. 당신을 붙잡아 둬야겠어.

당신의 V. - P181

사랑스러운 만월(혹은 거의 만월)을 당신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방금 바깥으로 나와 안마당을 보고 있어. 이제 자정이야. 흉벽에 달빛이 비치고 서리가 내린 광경이 좋아. 화요일 밤에도 자고 갈 거지, 맞지? 그럼 내가 수요일 아침에 당신을 런던까지 태워다 줄게. 내가 당신을 다시 보기 전까지 무시무시하게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걸 기억해줘.
그나저나 나는 왜 당신이 저녁에 온다고 생각하고 있나 몰라.
아무 때나 올 수 있는 시간에 와.
난 월요일까지 여기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어. - P187

사랑하는 버지니아, 떠나기 전 마지막 작별 인사야. 천 개의조각으로 갈가리 찢겨진 기분이야. 피투성이야. 당신을 떠나기가 얼마나 싫은지 말할 수조차 없어. 당신 없이 어떻게 지낼지모르겠어. 사실 내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당신은 내게정말 중요한 존재가 됐는걸. 기차 안에서 편지할게. 내 사랑, 당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내 사랑스러운 버지니아. - P188

여기 온 이래 한 줄도 못 썼어. 정말 끔찍하지. 내가 작가라는것도 못 믿겠어. 아니, 저널리스트조차도 못 돼. 저널리스트였다면 기사를 열두 편은 써냈을 텐데. 그리고 시인은 확실히 아니야 머리가 지독하게 안 돌아가. 하지만 내 머리의 문학적 부분은 아주 이상한 것이어서 언제 갑자기 튀어 올라 네 발을 단단히 딛고 설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지. 부분적으로는 자아비판의감정이 점점 커져서 그런 것 같아. 그렇지만 그 덕분에 다른 통탄할 소설로 변하리라는 건 전혀 의심하지 않아. 아, 그때는 왜당신이 "이건 전혀 안 되겠지?"라고 말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제는 아이디어들이 생겨나도 그 전부를 그냥 접어버려서결국 아무것도 완성되지 않아. 지드의 회고록을 읽고 있는데, 내생각에 지금까지는 아주 실망스러워. 문구멍에 떨어져 있던 구슬을 제외하면 기분 좋게 읽은 구절이 별로 없어. - P203

전부 너무 어렵다.
영국 국기는 위병소 위로 무기력하게 흔들리고, 플루트 연주자가 바깥에 지나가고, 정오에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이들이 고함을 질러. 저기, 건너편에는 온갖 정부 비품을 갖춘 영사관과공관이 있어. 우리에게 경비를 제공한 그 사람들은 태양 아래서 졸거나 세부 사항들을 가늠하지. 왜 활기찬 남자들이 서류를 들고 영사관을 드나드는 모습보다 지드가 묘사한 문 안의구슬이 더 기분 좋게 느껴질까? 신의 눈으로 본다면 삶이 다 무슨 의미일지, 그 안에서 문학은 진정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알수 있으면 좋겠어.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왜 그런지, 무엇으로만들어졌는지를 들쑤시는 대신 적어도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P204

자기 자신의 판에 박힌 생각에서 잠시 벗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그래? 마음의 형태를 전부 바꾸는 거야. 갑자기 켄트와중앙아시아의 풍경처럼 전혀 다른 마음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간다면.
그러는 동안 당신에게서 편지를 한 통 더 받을 수 있으면 기쁘겠는데, 최소한 일주일은 이런 기대를 접어야 해. 이 빌어먹게무능력한 우편 체계들. 우리의 우편 가방이 아무에게 아무 쓸모도 없이 어딘가의 짐 더미 위에 놓여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아.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는데 아니,
최소한 나는 그렇다고. - P211

달콤한 자기... 맞아, 나는 당신을 점점 더 원하고 있어. 당신은 불행한 나를 생각하길 좋아하지. 다 알아. 뭐, 그래도 돼…당신이 들으면 놀라겠지만, 우리는 사랑과 항문성교에 관한이야기를 아직도 하고 있어. 그러다 모건이 자기가 계산해봤다면서, 자기는 먹는 데 3시간, 자는 데 6시간, 일하는 데 4시간,
사랑에 2시간을 쓴다고 말하더군. 리턴**은 사랑에 10시간을 쓴다고 했어. 나는 사랑에 하루를 전부 쓴다고 했지. 그건 보랏빛이 드리운 시선으로 사물들을 보는 일이라고 했어. 하지만 당신은 절대 사랑에 안 빠지잖아, 라고 그들이 말했지. - P214

내 사랑, 정말 사랑스러운 책이야! 이 책 때문에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됐어. 하지만 여전히 대체 어떻게 이런 걸 해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 이게 날 정말 혼란스럽게 만들거든. 당신에게서비롯한 것인데도 말이야. 마치 폭죽에서 터져 나온 색색의 별을저글링 하면서도 그것들이 멀쩡하게 계속 날아다니게 만드는것 같아.
물론 이걸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도 완전히 이상하지.
램지 부인이 당신 자신과 얼마나 비슷한지 당신이 아나 몰라.
하지만 아마도 그건 램지 부인이 당신 어머니여서겠지.
정말로 당신을 전보다 더 사랑하게 됐어, 이 소설 때문에, 당신은 언제나 나를 속물이라고 하고, 어쩌면 이게 속물 근성의한 형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심이야. 당신을 모른 채로 이책을 읽었다면, 당신을 무서워했을 거야. 이 책은 그 자체로 당신을 더 귀하게, 더 매혹적으로 만들어. - P234

당신은 정말 관대한 여자야! 당신 편지가 방금 도착했고, 나는 답장을 써야겠어. 비록 지금 아주 혼란스러운 상태지만.… 당신이 《등대로》에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진심이었어. 너무 심리적이고, 개인적 관계도 너무 많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거든. (이번에는 가짜로 하는 소리가 아니고) 만찬 장면은내가 여태 쓴 것 중에 최고야. 작가로서 내가 지닌 결함들을 정당화해주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이거야. 이 빌어먹을 ‘방법‘. 다른 방식으로는 특정한 감정에 도달할 수 없을 거 같거든. ‘시간이 흐르다"는 회의적이야. 파업 때문에 우울할 때 썼거든. 그 후에 그걸 다시 썼지. 그러고 나서 산문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 당신이 그걸 시로 쓸 수도 있겠다. 내가 램지 부인과 비슷한지는 몰랐네. 어머니가 열세 살에 돌아가셨으니까, 그건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관점일 거야. 하지만 당신이 램지 부인을 좋아한다니까 좀 감상적으로 기쁘다. - P236

..몸이 아픈 게 이렇게 나를 여러 명의 다른 사람으로 쪼개버리다니, 이상하지. 내 머리는 지금 상당히 명료하지만, 순전히비평과 관련해서만 그래. 읽을 수 있지. 이해할 수도 있고. 하지만 책을 쓰라고 하면 내 머리는 숨만 겨우 들이쉬듯 멈춰버리지.
책을 어떻게 써왔지? 마음속에 그려지지도 않아. 그러니 무한히겸손하지, 이 순간 내 머리는 책 좀 쓰는 비타가 있잖아, 하고머리가 말해. 그러면 내 몸이 말하지. 그건 다른 사람이잖아..…선원교육협회가 《등대로》 두 권을 구매했어. 해운업계에서 내글로 항해술을, 아니면 뱃고동을 올바르게 울리거나 실린더를제대로 다루는 법을 배우겠다니 끔찍한 생각이야. - P249

있었지. 그 사이에 당신 편지가든 인쇄된 봉투가 하나 있었어. 읽고 나서 분노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어. 과장이 아냐. 내가 당신 때문에 이렇게 질투를 느끼는지 몰랐어. 매부리코를 한 그 빌어먹을 남자가 누구야? 농담 아냐, 나 진짜 신경 쓰여. 하지만 이런경우라면, 내 탁자에도 똑같은 종류의 편지가 한 통 있거든. 아직 답장은 안 했어. 내가 어떤 답장을 보낼지, 그건 당신에게 달렸어. 나 정말 농담하는 거 아냐. 당신이 조심하지 않으면, 나는끔찍하게 지루한 사람과 바람을 피울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렇지만 당신이 착하게 군다면 편지 쓴 사람에게 포장재나 보내도록 할게. 하지만 날 우습게 보지 마. 진심이니까. - P268

친애하는 N. 부인께이야기는 끝났어요. 레이디 G. 웰즐리*께서 나를 사셨죠. 그분이 2만 5천 파운드를 계약금으로, 나머지는 융자로 지불하기로했으니, 나는 평생 그분의 것이에요. 저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입맛에 맞는 와인을 받는답니다.
하지만 냉철한 산문체로 말하자면, 당신 두 사람 사이에서 난빼줘, 내가 당신 거여도, 당신이 둘 중 하나라면 난 빼줘. 간단히말해 도티가 당신 거라면 나는 아냐. 심오한 진리가 끼어 있고,
그걸 알아내기 위해 나는 당신을 떠날 거야. 논쟁하기에는 너무덥다. 그리고 나는 너무 우울해. - P272

당신이 여기 있으면 좋겠어. 낮과 밤이 아름다워, 가을에만 볼수 있는 모습으로, 이 말은 클라이브가 오텀파이어 꽃이 절정에달하고 잘 익은 사과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시기에 할 법한 말이네. 하지만 클라이브와 같은 느낌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라고분명히 말해둘게. 아니고말고. 나의 기쁨은 순전히 미적인 성질의 것이고, 촌뜨기인 나는 선하고 근면하고 다정다감하거든. 근데 내가 탈출하는 데까지 얼마나 걸리려나? 당신이 여기 있다면절대 탈출하지 않겠지만, 당신은 나를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고떠났지. 있지, 이 무엇도 아무런 의미 없으니까 괜한 상상은 하지마. 나는 꼬리로 바닥을 톡톡 내리치며 친절하게 쓰다듬어주면 즉각 반응하는 버지니아의 착한 강아지니까. - P280

당신의 조언에 용기를 얻어서 최고인 테니슨풍으로 전통에 따라시 몇 줄을 썼어.
있잖아, 우리의 무산된 밤은 곧 만회하는 거지?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훌륭하고 평소와는 다른 밤이었어.
<올랜도》가 올라 있는 하커트 브레이스의 가을 도서 목록을얻었어. 당신이 그걸 찢어 버렸다고 그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하는거 기억하고 있었어?
잔소리를 해도 당신은 아주, 아주 매력적이야. 그리고 당신은내게 확실한 존재고. 그렇고말고. 내 바보 같은 버지니아. 내사랑, 소중하고 귀한 버지니아.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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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만남
1923-1925


1922년 12월 14일 런던에서 처음 만난 비타 색빌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는 비타가 리치먼드의 호가스 하우스를 방문한 후급격하게 가까워진다. 비타는 버지니아의 지적 능력과 문필가로서의 재능에, 버지니아는 비타의 아름다움과 귀족적인 아우라에매료되었다. 1924년 3월 울프 부부가 블룸즈버리 타비스톡 광장으로 이사하면서 두 사람이 설립한 호가스 출판사도 함께 이전한다. 버지니아는 비타에게 출판을 제안하고, 비타는 《에콰도르의 바람둥이》를 써 보낸다. 비타는 이 책을 버지니아에게 헌정한다. - P7

친애하는 비타하하! 당신이 《댈러웨이 부인》을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한편 《평범한 독자》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정말 좋았다고 하니 기쁘네요. 특히 로건 P. 스미스가 그 작품이아주 실망스럽다고 전한 직후라 더 기뻐요. 그런데 친구들이란늘 얼마나 당황스러운 존재인지요! 생각해보니, 부분적으로는두 권을 동시에 써서 벌어진 일인 것 같아요. 저는 불쾌한 의견을 무시하거나 친구들의 의견에 따라서 소설과 비평서를 경쟁붙이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때로는 《댈러웨이 부인》이, 때로는《평범한 독자》가 앞섭니다. - P30

미사여구는 우연히 만들어질지 몰라도, 거름을 듬뿍 준 토양에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서야 가능하답니다. 오래된 불꽃이 사그라들듯 내가 쓴 시에 관심을 잃던 참이었는데, 당신이 잉걸불에 부채질한 덕에 이제 제법 활활 타오르고 있어요.
왜 다른 사람들의 원고에 그토록 많은 수고를 쏟으시나요?
런던에서 당신은 당신의 머릿속에 적어도 여섯 편의 소설이 들어 있지만, 로드멜에 갈 때까지 자중하고 있다고 하셨죠? 이제로드멜에 계신데, 여섯 편의 소설은 어찌 되었나요? 오토라인,거트루드 스타인, 그리고 당신이 기절할 것 같다던 여자들 사이에서 버지니아를 위한 시간은 언제 나나요? 게다가 <보그>며 그비슷한 잡지들의 사교 모임까지 쫓아다니니 말이에요. 물론 이모든 일들 사이에서도 《평범한 독자>를 써냈고, 특히나 겐지를관찰한 바를 쓴 부분은 정말 마음에 들지만요.  - P33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소택지를, 습지를, 조약돌을, 동부해안을 몇 척의 배가 떠 있는 강을 잡초의 거친 냄새를 파란 저지스웨터를 입고 개를 붙잡고 있는 남자들을 간단히 말해 풍경전체를 마치 모두 그 작품에서 읽은 것처럼 생각한답니다. 그러나 크래브의 책을 펼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묘사라고는 여기 한 단어, 저기 한 단어, 그게 다예요. 그러니 만약 당신시‘가 당신 말대로 전부 솜진디 이야기라면, 저는 별과 남양을 꿈꾸며 저 멀리 떠나렵니다. 하지만 서둘러요, 어서 써요.
여기서 그만 줄여야겠네요 아니면 이제 왜 나는 환상을 품어도 되고, 당신은 엄밀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시작할 테니까요 나는 산문을 쓰고, 당신은 시를 쓰죠. 시는 둘 중에서 더 단순하고,
더 투박하고, 더 기본적이면서 운율과 음보로 우연한 매력까지갖추었지만, 산문이 전달하는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없어요. 우쫄거릴 건 없답니다. 당신은 말하겠죠, 아름다움을 정의하라고하지만 싫어요 전 자러 갈래요. - P36

친애하는 버지니아
당신 편지를 받으면 얼마나 좋은지.
편지를 받으면 하루를 얼마나 활기차게 맞이하게 되는지.
당신 편지를 받는 일이 너무 좋아서 아침 우편물을 열 때면가장 마지막까지 남겨두곤 해요. 아이가 마지막 초콜릿 조각을남겨두듯이.
하지만 당신이 일주일간 아팠다는 부분을 읽으니 좋은 마음이 좀 식네요. 내가 정원가꾸기나 테니스치기 같은 별볼일없는 것들을 좇으면서 원기 왕성하게 잘 보낸 매 순간에 죄책감이들어요. - P37

그리고 이 힘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이 쓰고 싶은 마음을 갖도록 그 열망에 불을 붙이는 능력도 작동하죠. 적어도 저는 그렇더라고요. 내 안에서 불꽃을 일으키려면 책장에서 어떤 책을 꺼내야 할지 딱 안답니다, 그렇지 않나요? 아니면 당신은 부싯깃인 동시에 부싯돌인가요? 그럴 것 같네요.
레너드가 아주 짜증낼만한 메시지를 좀 전해줄래요? 사과도요. 이거예요. 존 드링크워터 리뷰는 못쓰겠어요. 그 사람을너무 잘 아는데, 기분을 엄청나게 상하게 하지 않고는 쓸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네요. 레너드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려주면, 그가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존 드링크워터의 책들을 보낼게요. 이런 게 편집자를 괴롭히는 전형적인 시험 중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드네요. - P39

이것이 증명하는 바는, 내가 길게 쓸 수있는 문제인데, 우리는 그 누구도 잘 모른다는 것, 움직임과 몸짓들만 알 뿐, 연결되고 연속적이고 심오한 것은 알지 못한다는사실이에요. 하지만 간청하건대, 내게 힌트를 주세요.
..."공인되다"는 단순한 단어였는데, 이제 "항의받은 불성실한언행"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네요. 적어도 내게는 그러니까 죄악 속에서 시들어가고, 인정하건대 좋은 영어에 원래 없는 의미를 전가하는 내게는 그래요. 하지만 변치 말고 당신의 애정 어린 악당에게 편지를 보내주시길. - P42

내 스패니얼이 새끼를 일곱 마리 낳았어요. 내 고양이는 다섯마리를 낳았고요. 스패니얼이 새끼 고양이를 훔쳐서 입에 아주조심스럽게 물고 나르더니 강아지 바구니에 넣어놨어요. 그러고나서 산책을 나갔는데, 새끼를 찾던 고양이가 바구니 속에 몸을말고 들어가 강아지들에게 젖을 먹였죠. 스패니얼이 돌아와서고양이를 쫓아내고는 바구니 안에 몸을 말고 들어가 새끼 고양이들에게 젖을 물렸어요. 이 상황을 대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고양이들은 짖고 강아지들은 야옹거리고, 이게 앞으로 벌어질 일이잖아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아주 사랑스러운 가족을이룬 따뜻하고 보드랍고 어린 털뭉치들이랍니다. - P44

그래요 당신에게 내 농경시를, 더 일관성을 갖춰서 보낼게요.
지금으로서 여기에는 거미, 저기에는 새끼를 낳은 암퇘지 - 전혀 연결고리를 이해할 수 없는 상태예요. 염치없지만 당신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도움을 받을게요. 하지만 여전히 당신이모든 걸 어떻게 다 해내는지 궁금하네요.
집 전체가, 그리고 바깥세상이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때, 방 하나에만 불이 켜져 있는 느낌을 좋아해요. 불빛 하나만 내 종이 위로 떨어지는 느낌, 집중력과 내밀함을 만끽하게 해주죠. 편지란얼마나 안 좋은 수단인가요 당신은 이걸 햇빛 아래서 읽을 테고,
그러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겠죠. 당신이 인간 존재가 분리되었다고 느끼는 만큼 나는 밤을 절절하게 느낀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개인적이고, 너무나 날카로워서 아릿한, 그런 확신 중 하나죠. 나는 해가 지고, 별이 뜨고서야 숨쉬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비타 - P49

리비에라나 이탈리아, 아니면 이집트가 아니라 더 거칠고, 아름답고, 투박한 나라라는 것만 알려줄게요. 거리상으로는 아니지만, 시간상으로는 중국보다도 더 먼 곳이에요. 이상적인 여행 편지는 주소를 안 적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방주로부터 날아온 비둘기처럼 도착하겠죠. 어디서 왔는지 아무런 실마리도 담지 않으면, 풍경을 낭만적이고도 아름답게 그려내지만 지리적으로는 두루뭉술하겠죠.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일이 얼마나 즐거울까요. 잉크가 유일한 소통 수단임을 체감하며 얼마나 가슴이 미어질까요. 부재중인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부담을 당신에게 지우는 나는 얼마나 무자비한가요. - P52

1925년 10월 13일 화요일
런던, 타비스톡 광장 52번지


친애하는 비타
하지만 얼마나 오래요?
영원히?
나는 질투와 절망으로 가득 찼어요. 페르시아를 본다는 생각에, 당신을 다시 못 본다는 생각에.
의사가 나를 침대로 보냈어요. 글을 쓰는 건 절대 안 된다고합니다. 그러니 이게 내 백조의 노래 예요. 하지만 와서 나를 만나요 - P54

1925년 12월 10일
타비스톡광장 52번지


내 사랑 비타
당신은 화요일 오후 괜찮아요?
금요일이나 토요일까지 머물러도 될까요?
레너드가 와서 나를 데려가도 될까요?
드레스 가운을 한 벌만 가져가면 당신이 싫어할까요?
침대에서 아침을 먹으면 귀찮게 구는 걸까요? - P66

1925년 12월 15일
세븐오크스, 롱반, 월드


내 사랑 버지니아
당신을 수요일까지 못 만나게 되어서 너무 유감인데, 일하는사람 하나가 아파요. 내일이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전에 말한기차를 타고 오나요? 세븐오크스에 4시 18분에 도착하는 차였던 거 같은데.
아뇨, 당신이 원한다면 아침, 점심, 저녁 다 침대에서 먹어도돼요.
아뇨, 드레스 가운은 한 벌만 가져와요.
그럼요, 레너드는 언제고 좋을 때 오면 돼요.
당신이 일요일까지 있을 수 없어서 어찌나 안타까운지. 내가일요일 아침에 올라가니까 당신을 태워주면 좋을 텐데.
당신이 오면 정말 즐거울 거예요. 당신이 누구 방해도 받지않게 내가 훌륭히 모시도록 하죠.

늘 당신의
비타 - P67

2부
사랑
1926-1933


런던에서 자주 만나면서 비타와 버지니아는 점차 서로에게끌린다.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책에도 애정이 각별했다. 비타는 외교관인 남편 해럴드를 따라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버지니아에게 편지를 쓰고 책을 집필한다. 버지니아 역시비타와 꾸준히 서신을 교환하며 여러 작품을 출간한다. 두 사람의 많은 대표작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특히 문학적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버지니아의 <올랜도》는 비타를 모델로 한 소설이다. 하지만 올랜도》 출간 이후 비타의 마음은 조금씩 변했고,
각자의 생활 환경이 바뀌면서 두 사람 관계에 거리가 생긴다. - P71

눈은 내게 정말 특별한 의미가 있어. 눈은 내게 지붕에 쌓인눈을 삽으로 퍼 아래에 있는 마당으로 던질 때 들리는 둔탁하고 부드러운 푹푹 소리를 의미해. 사슴에게 먹이를 주려고 ‘이리와‘ 하고 부를 때 묘하게 우수에 젖은 소리, 공원의 모퉁이에서사슴들을 불러 모으는 그런 소리를 의미해. 이런 것들은 누군가의방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무엇인가를 의미하듯 내밀한방식으로 의미를 지니지. 이것은 개인의 일부야. - P85

나는 버지니아를 원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미물로전락했어. 잠 못 이루는 밤의 악몽 같은 시간에 당신에게 아름다운 편지를 한 통 썼는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네. 그냥 당신이보고 싶어, 여느 인간 존재라도 느낄 법한 단순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당신, 말주변 좋은 당신은 편지 어디에도 이렇게 기초적인 문장은 절대 안 쓰겠지. 어쩌면 당신은 이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지도 몰라. 그래도 당신이 빈자리를 조금은 느낄 거라고 믿어. 하지만 당신이라면 그 감정에 너무나 아름다운 표현을입혀 현실감을 다소 잃어버리게 하겠지. 반면 내 경우에이심정은 상당히 혹독해. 당신이 꽤 그리우리라고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스스로도 믿지 못할 정도로 당신이 보고 싶어. 그래서 이편지는 고통에 차서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나 다름없어. - P88

베니스.
정차역이 많긴 했는데, 역들에 서지 않는 오리엔트 특급열차일 줄은 몰랐네. 우리는 이제 베니스에 도착했는데 겨우 10분정차한대. 뭔가 쓰기엔 형편없는 시간이지. 이탈리아 우표를 살시간도 없어서 트리에스테에서 보내게 생겼네.
스위스의 폭포는 딱딱하게 얼어붙어 무지갯빛 얼음 커튼처럼바위에 걸려 있었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이탈리아는 온통 눈으로 뒤덮였고.
다시 출발한다. 트리에스테에 도착할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겠네. 이런 우울한편지 보내는 나를 용서해줘. - P89

당신이 트리에스테에서 보낸 편지가 오늘 아침 도착했어. 하지만 당신은 어째서 내가 감정을 느끼지 않거나 표현들을 지어낸다고 생각해? 당신은 ‘사랑스러운 표현들‘이 사물들에서 현실감을 빼앗는다고 했지. 그 반대야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말하려고 애써. 그러면 당신이 지난 화요일 떠난이후, 정확히 일주일 전에, 내가 손풍금을 찾으러 블룸즈버리 빈민가를 돌아다녔다는 걸 믿어주려나? 그래도 기운이 나진 않더라..… 그리고 그 이후로, 중요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어. 어째서인지 따분하고 축축해. 나는 침울해졌고, 당신이 보고 싶어. 정말 보고 싶어. 앞으로도 보고 싶을 거야. 그래도 당신이 이걸 못믿는다면, 당신은 칡올빼미에 멍청이야. 사랑스러운 표현이지? - P90

또 뭐가 있지? 당신이 지독히도 보고 싶어. 그게 아니라도 당신이 여기 올 수만 있다면 이 나라에서 정말로 대단한 걸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시도 때도 없이 분해. 그러니까 당신이 꼭 와야 해. 근데 이 문장은 꼭 내가 쓸 법한 편지를당신이 패러디해서 쓴 것 같으니까, 이 말은 참을래. - P98

실크로 만든 옷과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당신의 질투를 불러일으킬까? 아니겠지, 못된 사람, 당신은 예의 그 안개 낀 글룸즈버리 * 당신의 런던 광장들을 더 좋아할 테니까. 버지니아를훔치고 싶은 소망이 나를 집어삼켜. 그녀를 훔쳐 와, 그녀를 데리고 도망가, 그리고 위의 알파벳 순서대로 말한 사물들에 둘러싸인, 태양 아래로 그녀를 데려오자. 그리스가 당신 마음에 들었던 건 당신도 기억하잖아. 당신이 스페인을 좋아한 것도 알지. - P98

・・・ 어제가 당신이 떠난 지 4주째였다는 거 알아? 그래, 나는자주 당신 생각을 해. 소설 생각은 안 하고 말이야. 여름에 당신을 데리고 강가 목초지를 걷고 싶어. 당신에게 들려줄 수백만가지 일을 생각해. 나를 여기 남겨두고 페르시아로 사라지다니당신은 악마야! 그리고 소중한 비타, 우리는 수세식 화장실을두 군데 만들 거야. 하나는 ‘댈러웨이 부인‘이 지불하고, 다른 하나는 어느 ‘평범한 독자‘가 내는 거야. 둘 다 당신에게 헌정했지. - P101

내 사랑 버지니아당신에게 긴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야. 끝없는 편지.
넘겨도 넘겨도 끝이 없는 편지. 근데 할 말이 너무 많아. 감정이너무 복잡하고, 이집트도 지나치고, 흥분도 지나쳐. 그리고 이모두가 완벽하게 단순한 단 하나의 사실로 귀결돼. 당신이 여기있으면 좋겠어.
당신이 타비스톡 광장에 앉아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정말 쉽겠지. 하지만 시나이 해안을 보면서 동시에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내게 너무 어려워 그리고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사방에서 버지니아의 형상을 발견하는 동시에 시나이 해안을 보는일도 아주 어렵고.
이 조합 때문에 내 편지가 평소보다 말주변이 없는 거야.
당신은 마음을 더 깔끔하게 정리하고 상황을 더 잘 다스리지. - P103

아, 나의 소중한 버지니아. 런던이란 곳이 정말 존재해? 거기당신이 있고? 아니면 내가 유령 도시를 생각하며, 유령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걸까? 아프지 마. 성가신 사람들에게는 딱딱하게 굴어. 소설은 어때? 뜨거운 강풍이 불어서 나는 한 단어도 못쓰겠어. 하지만 남십자성 아래서 내 작은 저장고가 채워지면 좋겠다. 봄베이에서 당신 편지를 받지 못한다면, 실망해 죽고 말거야.
레너드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줘.

V.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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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지 않는것이다.˝

- 수전 손택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비전체주의 세계의 사람들이 전체주의 지배를 맞이할 자세를 갖게 된 것은, 한때 노년처럼 사회적으로 주변부적 조건에서 겪는 한계 경험이었던 외로움이 이제 우리 세기의 점점 더많은 대중이 매일 겪는 일상 경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대중을 무자비한 과정 속으로 내몰고 그들을 조직하는데, 이 과정은 현실로부터의 자멸적인 도피 행각처럼 보인다.
〔……) 단 한 사람의 전제적·자의적인 의지에 의해 지배당하는 모든 사람의 비조직적인 무기력보다 조직적인 외로움이 훨씬 더 위험하다. - p206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동안 제대로 등교하지 못하면서, 역설적으로 학교의 위상이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부모들도 자녀가 종일 집에 머물면 본인이 힘든 것만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이제대로 이뤄질 수 없음을 확인했다. 아이들도 오랫동안 외롭게지내다가, 학교가 다시 열리면서 예전보다 등교를 더욱 즐거워한다는 이야기를 교사들로부터 자주 듣게 된다. 학교교육에서수업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아이들 사이의 관계 맺기다. 코로나19의 후유증으로 당분간 소통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아이들은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익히면서 ‘사회‘를 복원해갈 수있다. 어른들은 그 회복력을 믿고 지지하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 P104

소통에서 양념 역할을 하며 지루한 분위기를 반전시켜주는 유머는 우스갯소리 자체보다 표정과 소리를 통해 드러나는사람들의 반응이 더 큰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줌에서는 웃는 얼굴은 보이지만 웃음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기에, 유머로 촉발되고 고양되는 집단 에너지를 느끼는 데 한계가 있다. 언젠가 카메라에 달려 있는 센서가 웃는 얼굴을 인식하여, 몇초동안 음소거 기능을 해제하고 자동으로 웃음소리를 전달해주는 시스템이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화상회의시스템을통해 우리는 소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 P109

얼굴을 자주 보는 사람들끼리도 서먹해지는 경우가 있다.
특별히 껄끄러운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관계가 어색하다.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지만 시선이 자꾸만 흩어지고, 안부를 묻거나 축하해주는데 ‘영혼‘이 없는 말로 떠다닌다. 내 말에 귀를기울이는 듯해도 건성으로 흘려듣는 것만 같다. 앞서 인용한 시구처럼 찾아온 친구를 ‘마음도 없이‘ 맞아들이고, 애인과 길게 - P122

통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가 있다. 정보가 폭증하고 두뇌에 과부하가 걸리기 쉬운 미디어환경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온전하게 대면하기 어려운 정황을 자주 맞닥뜨린다. - P123

 반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화상 시스템을 통해 서로를 오롯이 응시하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면 충만한 대면이 경험된다. 대면이나 비대면이냐가 아니라,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대면의 반대말은 비대면이 아니라 ‘외면‘이다.

‘외면‘의 사전적 정의는 ‘상대한 사람과 마주 대하기를 꺼리어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어떤 이유로 외면하는가 싫어하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가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상대에게 소홀해질 때도 있다. 왜 소홀해지는가. 상대방을 업신여기는 마음 때문일 수 있다. 또는 산 - P123

두려움이 외면을 낳기도 한다. 내 잘못이나 약점을 추궁하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불안에 휩싸이면 안으로 움츠러들면서 외부 세계를 차단하게 된다. 권력의격차가 큰 사람들 사이에는 편안한 시선이 오가기 어렵다. 힘의우열이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관계에서 약자는 강자의 눈치를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실수나 허물이 드러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열지 못하면 상대를 정면으로 응시하기가 어렵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하는가. ‘애써‘ 외면할 때가 많다. 마주하는 것이 무서워서 자꾸회피하게 되는데, 그럴수록 문제가 더 꼬인다. 상황을 직면해야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면하려고만 든다. - P124

사람들은 저마다 가치관이나 취향을 갖고 살아간다. 그것이 비슷할수록 관계 맺기가 쉬워지고 집단의 결속력도 높아진다. 전통사회에서는 대체로 동질적인 문화를 공유했기에 그 내부 갈등이 비교적 첨예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현대사회는 전혀다른 생각과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간다. 다양성은즐거움과 창의성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이질감을 자아내면서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역학 관계에 따라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배척하는 상황으로 비화되기 쉽다. 장애인이나 성 소수자가 보기 싫다는 선언은 전형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다. - P132

왜 보고 싶지 않은가. 자기를 위협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자신에게 체화된 삶의 문법에 상대방을 온전히 포섭하고 싶은 것이다. 근대적 주체는 그러한 자기 동일화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어차피 사람은 제각각이기에 자기 질서로 환원되지않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수용하려면, 자기 아닌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그것을 ‘타자성altérité‘이라고 불렀다." 결코 대상화하거나 환원할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불편함 또는불쾌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다름을 제거해버리려는 충동이 폭력적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그 에너지가 집단화되어 전체주의로 나아가기도 한다. - P133

자기 안의 타자성을 대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일 수 있다. 오랫동안 견지해온 세계관이 흔들리면서 존재가 위협받는다고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단초를 제공한 타인을, 자아의 온전함을 훼손하는 이물질처럼 여긴다. 기생충 같은 벌레로 취급하면서 아예 시야에서 사라지게끔 박멸하려고 한다. 이러한 비인간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선입관과 편견은 동질적인(엄밀히말해 스스로 동질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비좁은 응집 속에서 증폭되고, 이질적인 집단을 더욱 철저하게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나아간다.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밀어낼뿐더러 목소리도 들리지 못하게 그들의 입을 막거나 자신의 귀를 닫는다.
2022년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확보하고자 시민들에게 불편함을끼쳐가면서 지하철 시위에 나서게 된 것도, 정치인과 미디어 등사회의 주류 세력이 그들의 아우성을 묵음mute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 P135

다시 말해 혐오감은 싫음과 미움의 복합체로서, 거기에 적개심, 우월감, 두려움 등의 감정도 혼재되어 있을 수 있다. 특히공포감과 강한 친화력을 갖는다. 따라서 그 대상에 대한 태도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난다. 회피, 외면, 격리, 비아냥, 멸시, 조롱, 모욕, 악마화, 적대시, 비난, 공격, 정죄, 저주…… 이모든 것이 합성되면 이른바 ‘극혐‘이 될 것이다. 혐오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서 극단에 이르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누군가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극혐이야‘라고 서슴없이 내뱉는다. 과장법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언어와 마음은 상호 순환적이다.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감정은 증폭된다. 사회는 점점난폭해진다. - P136

사람다움은 타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나고 헤어질 때 인사를 주고받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몸짓과 표정과 말로 이뤄지는 미시적인 의례를 통해 인격에 대한 기본적 경의를 나누면서 관계의 안전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상호작용의 문법과 질서를 위반하는 것은 타자의 존엄을 위협하는 공격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방의 악수를무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리는 모욕이자, 일종의 도덕적 폭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 P140

몸짓과 표정, 말투 그리고 침묵에 배어 있는 감정을읽어내지 못해서 엉뚱하게 반응하고 만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문해력‘이 지성의 발달에서 필수적 능력으로 강조되는데, 말을이해하는 능력 (굳이 명명하자면 ‘언해력‘이 될 수 있겠다.)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것은 지적 능력의 문제인 동시에태도의 문제다. 상대방에게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지 못하면 그의 말을 속 깊게 이해하지 못한다.
왜 마음을 다하지 못하는가. 빡빡한 업무나 생계에 쫓기고있거나, 갈등 상황이나 복잡한 생각과 씨름하고 있거나, 두려움이나 분노 등 부정적 감정에 시달리고 있거나, 아니면 심신이너무 지쳐서 그렇다. 거기에 덧붙여, 적정 용량을 초과하는 정보를 처리하느라 주의력이 분산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어느 경우든,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소홀하게 여기는 태도로 나타난다. 몸으로는 함께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 귀가열려 있기는 해도 경청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 P145

아이들의 발육과 성장에 필요한 것은 유기적인 경험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표정을 읽으면서 상호작용하는 것, 울퉁불퉁한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질감을 느끼는 것, 알쏭달쏭한 공간을 탐색하면서 신체감각을 익히는 것,
아기자기한 풍광을 자유롭게 관찰하면서 상상의나래를 펴는것…… 이 모든 것이 이른바 인성교육의 필수아미노산이고 창의성의 바탕이다. - P154

부모가 스마트폰을 과용하는 또 하나의 유형이 있다. 아이를 너무 많이 촬영하는 것이다. 모처럼 공원에 아이를 데리고나온 부모가 아장아장 돌아다니는 모습을 영상에 담느라 여념이 없는 장면을 종종 접한다. 잠깐이 아니라, 영화를 찍듯이 아주 오랫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 보니 함께 놀아주지 못한다.
스마트폰에 빠져 아이를 방치하는 것보다 나을지 모르지만, 촬영할 때 아이는 단지 피사체로 격리되어 있을 뿐 부모와의 상호작용이나 교감은 없다. 부모는 영상 기록을 위해 머리를 쓰느라가슴으로 ‘지금 여기를 누리지 못한다. 그 시선은 불과 20, 30센티미터 앞에 있는 화면에 갇혀 있다. 아이도 부모 대신 카메라만 쳐다보아야 한다. - P159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공부가 직업인 나도 주의력의 지속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느낀다. 지금도 원고를 쓰면서 조금만 막히면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뉴스를 검색하고 싶어지는데, 그 습관적 욕망을 애써 억눌러야 한다. 정보 미디어가 발달할수록 생각의 근육이 퇴화하기 쉽다. 사물의 여러 모를 찬찬히 짚어보면서 깊이헤아리는 일에 점점 서툴러지는 한편, 단편적인 지식이나 뉴스에 현혹되어 엉뚱한 믿음에 사로잡힌다.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일들은 외면하면서, 정치적인 선동에 휩쓸리고 적대와 혐오에감정 에너지를 낭비하기 일쑤다. 그렇게 해서 증폭되는 반지성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안녕을 위협한다. - P169

고요함은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우리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정신적인 찌꺼기‘의 흐름을 관찰하게 한다.
고요함은 마음을 열고 여유와 인내심을 키우는 데 필요하다.
아무 도움도 안 되면서 시간을 빼앗고 고요함을 방해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잡지 기사는 피하자. 그런 눈요기는 우리를수동적인 상태로 빠뜨려 어리석게 만들 뿐이다. 고요함은 그빈 공간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고요함은 열린공간이다. 그 고요함이 우리를 이끌게 하자.
-도미니크 로로, 『심플하게 산다』에서 - P170

불필요한 것에 대한 관심을 줄이면, 주의력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역량이 늘어난다. 그리고 삶이 풍요로워진다. 주어진 환경에 일방적으로 예속되지 않고, 다각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 대화를 나누면서 말로 표현된 것이면에 깔려 있는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살필 수 있다. - P172

정보의 폭주 속에서 만성적인 주의력 결핍에 시달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행여 가족이나 가까운 동료들에게 정성이 소홀하여 섭섭하게 대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자.
주의력이 자라나려면, 마음이 고요하고 담백해야 한다. 그를 위해 과잉 섭취되는 정보를 의식적으로 줄여가야 한다. 주의력 다이어트attention diet 또는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 그러 - P172

려면, 심심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금단증세처럼 힘들겠지만, 곧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일상이 윤택해진다. 무료함속에서 마음의 부피가 자라나고 문화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안에서 솟아오르는 힘으로 인간은 자신만의 탄탄한 삶을 창조해갈 수 있다. 자아 형성의 공간을 다양하게 열어놓을 때, 우리는자기를 정당하게 사랑하며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무의식과 즐거운 소통을 할 수 있도록, 세계와 자유롭게 교섭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여백을 허락하자.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의 사물들에 물음표를 달면서 다가갈 일이다. - P173

정확한 발음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면, 구연동화 전문가들이읽어주는 목소리를 녹음이나 유튜브로 듣는 것이 더 효율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와 몸으로 함께 있으면서, 어떤 대상에 오롯이 마음을 모으는 경험이다. 존재의 온전한 연결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키워가는 만남이다. 아이들은 책을 읽으면서 부모와 눈을 포개어 또 다른 세계를 두드릴 수 있다. 그러한 탐험의 원체험은 성장하는 동안 부모 이외의 타인들과 함께, 책 이외의 다른 대상을 매개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확장될 수 있다. - P178

지성은 여러 가지 지적 역량으로 구성된다. 기억력, 이해력,
분석력, 추리력, 표현력, 판단력, 문제 해결력, 인내력, 자제력,
결단력, 추진력, 실행력, 회복력, 공감력, 상상력…… 이른바 ‘사고력‘이라는 것은 이렇듯 여러 범주로 세분화할 수 있으며, 타고난 유전자와 후천적 학습 및 경험에 의해 다르게 배합된다.
어떤 상황에서 특별히 더 요구되는 것이 있고, 생애의 단계에따라 강조되는 것이 달라질 뿐이다. 그런데 어느 역량이든 ‘주의력‘의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주의를 집중하고 목표하는 대상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아무리 지능이 뛰어나도 소용이 없다. 주의력을 훈련함으로써 수학 성적을 향상시킨 사례가 그것을 반증한다. - P190

이러한 훈련을 통해 주의력이 신장되면 인지능력의 향상에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예술적 감수성 또한 고양된다.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이 ‘알음+답다‘라는 견해가 있다. 무엇을 제대로알고 나면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는 만큼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심미적 감각은 섬세한 관찰력을 요구한다.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아야 한다.
깊이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이 드러나면서 발상과 혁신의 실마리가 된다. 인공지능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안목‘이다. 주의 깊은 관찰은 창의성의 토대를 이루고, 행복한 삶의 원천이 된다. - P191

관찰의 즐거움을 전해주는 작가로, 프랑스의 미셸 투르니에를 빼놓을 수 없다. 전통적인 이야기 형식과 신화적 상상력으로 현대사회를 조명한 그는 소설 이외에도 많은 산문을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외면일기』로, 여행을 하면서 또는 한적한마을에 혼자 살면서 겪은 일들을 틈틈이 메모해두었다가 묶어낸 책이다. 짤막한 글들이지만 평범한 일상사에서 비범한 무언가를 발견하는 눈썰미가 탁월하다. 형형색색으로 변모하는 자연에 대한 예찬, 인생의 흐름에 대한 단상, 프랑스어의 몇몇 관용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 동네 사람들과의 익살스러운 대화 둥다채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왜 썼는지에 대해 작가는이렇게 말한다. - P193

‘외면 일기‘는 사물의 겉모습이라는, 잊혀가던 외면의 고전적인 뜻을 새삼 환기시켜주었다. 겉모습은 겉치레나 꾸미기 등을 연상시키면서 부정적인 뉘앙스를 띨 때가 많다. 그러나 미셸 투르니에처럼 겉모습을 바라보면서도 표면에 머물지 않고심층의 실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외면으로 드러나는 것을 관찰하기.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을 통찰하기. 그 지성과 감성으로 내면을 성찰하기………외면과 내면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바깥을 자세히 응시하면 안쪽이 보인다. 안으로 시선을 뻗어가다 보면 겉모습이 다시보인다. - P195

보이는 것이 많아질수록 보는 것은 오히려 줄어든다. 시각정보의 범람 속에서 시선의 주체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찬찬히 살펴보고 요모조모 따져볼 때, 정보를 조합하고 지식을 창조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섣불리단정하지 않고 애매한 것을 견디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겸허하게 기다릴 줄 아는 경청의 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나는 어느 야간 대학원에서 강의할 때, 매시간 수업이 끝날무렵 불을 끄고 다 함께 음악을 듣는다. 어둠을 꽉 채우는 선율은 각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밝음 속에서 보이지 않던 삶의무늬가 드러나는 듯하다. 그리고 배움을 함께하는 동료들이 새삼스럽게 의식된다.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열리는 차원이 있다.
일상의 이면을 더듬으면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각의 씨앗을돌보게 된다. 더 나아가 미망과 맹목의 굴레를 자각하기도 한다. 이따금 조명을 끄고, 자신의 무명을 응시해보자. "인생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에게 들리는 것도 읽히는 것도 보이는 것도 아닌, 우리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말이다. - P200

어느 노인복지센터의 센터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매일방문하는 한 할아버지가 민원을 남발해 직원들을 힘들게 했다.
저녁에 귀가하고 나면 센터에 전화해서 시설의 운영 방식이나직원들의 서비스에 대해 시시콜콜 트집을 잡고 불만을 늘어놓는 것이 일과일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만으로 기분이풀리지 않았는지, 센터에 다시 찾아와서 고성을 지르며 소란을피웠다. 게다가 분을 못 이기고 112에 전화를 걸어 신고까지 했다. 경찰이 출동하여 상황을 파악했고 아무 일도 아님을 확인했다. 경찰은 노인의 마음을 달래준 다음, 차에 태워 귀가시키기로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센터장이 안타까운 마음에 물었다. "할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외로워서 그랬어" - P203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비전체주의 세계의 사람들이 전체주의 지배를 맞이할 자세를 갖게 된 것은, 한때 노년처럼 사회적으로 주변부적 조건에서 겪는 한계 경험이었던 외로움이 이제 우리 세기의 점점 더많은 대중이 매일 겪는 일상 경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대중을 무자비한 과정 속으로 내몰고 그들을 조직하는데, 이 과정은 현실로부터의 자멸적인 도피 행각처럼 보인다.
〔……) 단 한 사람의 전제적·자의적인 의지에 의해 지배당하는 모든 사람의 비조직적인 무기력보다 조직적인 외로움이 훨씬 더 위험하다. - P206

각자도생의 시대로 치달아온 세상, 코로나19로 더욱 고립되고 분절된 마음을 추스르고 ‘사회‘를 복원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어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 안에는 타인과 공명하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유전자가 살아있다. 에고의비좁은 울타리를 넘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느끼는 체험을 통해 마음은 고양된다. 사회적 감각은 인간이라는 종을 하나로 묶으면서 서로의 존엄을 일깨워준다. 그러한 자각 속에서 파편화된 ‘점‘들이 ‘선‘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면‘으로확장될 수 있다. - P216

고립과 외로움을 극복하려면 사람들 사이의 연결이 중요하ㅣ만, 관계 맺기에는 적절한 경계 또한 지켜져야 한다. ‘좋은 담함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일정한 경계와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관계에 탈이 나기 쉽다. 지나친 친밀감이집착으로 변질되어 과도한 요구를 하게 되고, 그것이 충족되지않을 때 섭섭함과 원망을 품게 된다. 자기와 다른 상대방의 고유한 영역(생각, 취향, 감정, 욕구 등)과 자율성을 간과하면서, 일방적인 지배 또는 과도한 의존으로 흐를 수도 있다. 저마다의내밀한 세계를 침해하지 않는 정도의 선線을 지킬 때, 무리하지않으면서 서로 의지하고 신세도 질 수 있다. - P227

경계는 각자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울타리다. 나를보호하면서 너를 지켜주는 방어막이다. 자기다움을 잃지 않을수 있는 한계가 명료하게 의식되고 존중되어야, 대등한 교류가가능하고 건강한 정체성과 자존감이 유지된다. 그러려면 자아의 밀실에 갇히지 않고 주책없이 상대방에게 휘둘리지 않도록균형 감각과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공감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면서 이뤄지는 정서적 지지다. 감정이입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자 하이코 에른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 P228

참된 감정이입은 모든 것을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정한거리두기를 요한다. (・・・・・…) 공감이란 단순히 ‘함께 느꼈기 때문에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배울 점을 찾고 배운 것을 적용해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잘 공감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얘기다. 공감을 통해 우리는 지식의 레퍼토리와 행동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으며, 세계와 사람에대한 이해도 깊어진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문제를 풀고 위기를 극복하며 더 깊은 원인을 포착하는 것이 모두 쉬워진다. 그래서 감정이입은 ‘사회적인 좋은 삶‘을 여는 가장 큰 열쇠다. - P228

타인의 곁에 있으면서도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최악은, 곁에 있지 않으면서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선을 넘어 훅 들어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애정도 없으면서 함부로 조언하고, 쓸데없는 질문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며, 제멋대로 평가하는 행태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신중함에서 비롯된다. 서로에게 손을내밀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관계가 지속 가능하다. ‘사이좋게 지내려면, ‘사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적절한 넓이의 사이가 확보되면, 상대방을 통해 자기의 마음을 더욱 명료하게 비추어볼 수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들고 있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려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원리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각자의 개별성과 고유한 영역에 유념해야 한다. 그렇게 형성되는 안전한 경청의 공간에서 우리는저마다의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다. - P229

타인을 충분히 배려하되,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거리를 두거나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상대방의 속 깊은 이야기나 나를 위한진심 어린 조언에는 귀를 쫑긋 세워야 하지만, 별생각 없이 툭툭 던지는 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야 한다.
"지혜란 무엇을 간과해야 하는지를 아는 기술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다. 『둔감력 수업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둔감해지는 것도 능력이 될 때가 있다. 핵심은 분별력이다. 지나쳐버려야 할 것들을 붙잡고 있지 않은가. 멈춰서 짚어보아야 할 일들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무시해도 되는 사람의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써야 할 사람에게무심하지 않은가. 피상적 판단을 거두어내자. 상투적 감정을 내려놓자. 속물적 통념에 삐딱선을 그으면서 틈새를 만들어보자.
그 자유로운 공간에서 너와 나의 진면목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 P230

이런 생물학적 역설은 사회적으로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나‘(또는 우리)는 ‘나 아닌 것‘(또는 우리가 아닌 것)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추구하지만, 이질성을 배제하면서 동질성만을추구하면 위험한 상황이 초래된다. ‘나 아닌 것‘을 받아들여야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나 아닌 것‘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자기 안의 타자성을 수용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드러나는 여러 모순을 편안하게 긍정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질 수 있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다양성이 증진되면서, 개인적으로도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 P232

도저히 상종할 수 없다고 여기던 사람들인데, 막상 얼굴을맞대고 대화하면 이해의 틈새가 열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면상황에서는 글이 아닌 말로 생각을 나누기에 표정이나 몸짓 등의 신호를 감지하면서 섬세하게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를몸으로 만나게 되면 그 ‘존재‘의 엄연함을 마주하게 되고, 상대방을 어떤 틀이나 범주로 섣불리 재단하기 어려워진다. 각자의생각에 갇히는 대신, 감정을 나누고 인격을 체감하면서 공유의지점을 탐색해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 결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감정과 상태로 헤어질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애매함을 견디는 마음이다. 우리 두뇌는무엇이든 확실하게 규정하고 싶어 하지만, 인식의 대상은 늘 분명하지 않다. 사람이든 현실이든 언제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 P243

확신을 내려놓고, 명료함을 구해야 한다.
자기를 겸허하게 비우고 경청하기. 정직하고 열린 질문으로 다가가기. 모름을 투명하게 받아들이고 순수한 삶을 향하여 함께나아가는 마음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그여백에서 상호 이해의 길이 열린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도 더욱 유연하고 우아해질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겸허한 질문과 경청은 창의성의 원동력이 된다. - P247

시선이 머무는 곳이 곧 삶이 깃드는 장소다. 깊이 응시하다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벌판(野)에 설때, 시야視野가 펼쳐지면서 가슴이 열린다. 거기서 만나는 공동의 세계에 접속하면서, 우리는 타인과 세계에 충만하게 연결될수 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산등성이를 따라가고 숲의 언저리를 찾아가고 들판도 걸어보자. 야외로 나가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멀리 닿고, 아득한 풍경에 눈길이 머문다. 시인의 말대로, 이런 습관은 눈 건강에 도움이 되고 마음의 부피도 키워준다. 그대면에서 우리는 근시안을 벗고 세상과 인생을 드넓게 조망할수 있다. 맑고 밝은 호연지기 일상을 충전할 수 있다. - P263

보이는 것이 많아지면, 보는 것이 줄어든다. 윤해서 작가의말대로 "보이는 것들이 보는 것을 가로막는다. 보여지는 것들이 보아야 하는 것들을 뒤덮는다." 그 결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방치되고 마는 사각지대가 곳곳에 생겨난다. 보아야 할 사람을 놓친다. 아예 보이지 않아서 못 보기도 하고, 보긴 보았지만 무심결에 지나쳐버리기도 한다. 코로나19 속에서 시선은 더욱 가로막혔다. 거리두기와 격리 기간이 길어지며 왕래가 두절되었는데, 그동안 번거로운 만남과 접촉에 시달리다가 홀가분해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립과 단절 속에서 생계와 일상이빈곤해진 경우도 많다. 우울증의 증가가 한 가지 지표다. 마음이 연결되는 사회적 공간을 어떻게 회복할까. - P266

3년에 걸친 비상사태는 일상의 속살을 예리하게 드러냈다.
기존의 상식들을 낯설게 바라보게 해주었다. 거기에서 존재에대한 자각이 일어났다. 삶은 거대한 그물망으로 존립한다는 것.
생명은 무한한 사슬로 얽혀 있다는 것. 우리는 서로의 일부라는것….… 길게 지나온 재난의 터널을 돌아보면서 그 여정에서 일어난 배움을 되새겨보자.
퇴계 선생은 말씀하신다.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로 흩트리지 말고, 한 가지로 올곧게 모아 만 가지 변화를 주시하라."
시선의 속도를 늦추면 마음이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의 안과밖을 넘나드는 직관이 자라난다. 로그인과 로그아웃이 유연하게 교차하고, 대면과 비대면은 순환해야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관심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 마스크 너머로 주고받던 따스한 눈빛으로 악수를 나누면서, 경청과 환대의 공간을 빚어낼수 있다. 팬데믹 시대를 건너가는 사회적 면역력은 거기에서 배양된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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