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국왕은 아침부터 조용히 전쟁터를 바라보며 결정적 시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아마도 세 시간이 흘렀다. 오직 결정적시기가 문제였다. 톱니바퀴는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분쇄기가 덜컹거리며 온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티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전쟁터가점점 좁혀졌고, 검정개미떼가 물밀듯 쇄도하며 스당을 포위했다. 도시의 유리창이 반짝였고, 왼쪽 카신 교외 부근에서 가옥이 불타고 있었다. 그 너머로, 동슈리와 카리냥 쪽 인적 없는 들판에는 눈부시게 작열하는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즉 정오의 불타는 태양 아래 뫼즈강의 많은 물, 짙은 녹음을 뽐내는 나무들, 광활하게 펼쳐진 기름진 땅, 풀이무성하게 자란 푸른 초원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프로이센 국왕에게 필요한 것은 명료한 정보였다.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그는 자기가 부리는 말들의 동향을 확실히 파악하고자 했다. 그의 오른쪽에서 대포 소리에 놀란 제비들이 푸드덕 날아올라 이리저리맴을 돌더니, 하늘 높이 솟구쳐 남쪽으로 사라졌다.
- P316

앙리에트는 그녀를 찾는 죽어가는 두 눈, 단말마적 임종의 고통, 시체를 흔드는 발길질까지, 모든 것을 보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손을 가만히, 노여움에 차서 이로 깨물었다. 바이에른 병사가 끔찍한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녀를 넘어뜨렸고, 때려죽일 기세였다. 둘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웠다. 피 묻은 붉은 턱수염과 머리칼, 광기로 뒤집힌 그 병사의 크고 푸른 눈을 그녀는 결코 잊지않을 것이었다.
잠시 후, 앙리에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선명히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서 빨리 남편 곁으로 가서, 남편을 집으로 데려가 밤새워지키고 싶은 한 가지 욕망밖에 없었다. 하지만 악몽을 꾸는 듯, 남편에게로 한 걸음 뗄 때마다 온갖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또다시 격렬한 일제사격이 터졌고, 바제유를 점령한 독일군 사이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프랑스 해병대가 들이닥친 것이었다. 전투가 너무도 치열하게 전개되었기에, 그녀는 왼쪽 골목으로, 공포에 질린 주민들 틈으로 몸을피했다. 그러나 그 전투는 그다지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스스로포기한 진지들을 되찾기는 이미 가망이 없는 듯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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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 빅서 해안은 텅 비어 있고, 나는 넘어신 바로 그 자리에누운 채로이다. 바다 안개가 사물들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수평선에는 돛대 하나 보이지 않고, 내 앞 바위 위에 수천 마리 새들이있다. 다른 바위에 물개 일가가 있다. 아비 물개는 지치지도 않고 파도 위로 솟아오른다. 고기를 입에 물고, 번들거리며, 헌신적으로,
이따금 제비갈매기들이 너무도 가까이 내리앉아 나는 숨을 죽이지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내 오랜 욕망이 깨어 일어나 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조금만 더, 그러면 새들이 내 얼굴 위에 내려앉고, 내독과 품속으로 파고들어, 나를 온통 뒤덮을 텐데 하고... 마흔네살에, 나는 아직도 어떤 본질적인 애정을 꿈꾸는 것이다. 하도 오랫동안 꼼짝않고 해변에 누워 있었더니 마침내 펠리컨과 가마우지 들이 나를 빵 둘러 원을 만들고 말았다. 조금 전에는 물개 한 마리가 파도에 실려 내 발치까지 왔었다. - P9

"엄마한텐 말하지 마, 어쩔 수가 없었어. 엄마이기 때문이라는 건알지만, 그것도 역시 아름다운 하나의 사랑이라는 건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결국 너를 갖고 싶어 하게 만들었단 말이야…… 널 그처럼사랑해주는 여자는 평생 또 없을걸, 그건 분명해."
그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사십 줄에 들어서야 나는 겨우 그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토록 어려서, 그토록 일찍, 그토록 사랑 받는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나쁜 버릇을들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어디에나 다 있는 일인 줄 알고,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요구하게 된다. 바라보고 갈망하고 기다린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인생은 그 여명기에, 결코지키지 않을 약속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다. 그다음부터는,죽는 날 까지 찬밥을 먹어야 한다. 그다음부터는 어떤 여자가 당신을 안아서가슴에 품어준다 해도 조사에 불과할 뿐, 우리는 버림받은 개처럼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무덤으로 돌아와 짖어대는 것이다. 이제다시는, 이제 다시는, 이제 다시는 사랑스런 팔들이 당신의 목을두르고, 아무리 달콤한 입술이 사랑의 말을 속삭여도, 당신은 계속달려야만 한다. 당신은 너무도 빨리 샘을 지나쳤고, 그리고 바닥나도록 다 마셔버렸다. 다시 갈증에 사로잡힐 때, 사방으로 몸을 던져보아야 샘물은 없고, 신기루뿐이다. 여명의 첫 빛 속에서 당신은 사랑에 대해 매우 압축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세세한 자료들을 잔뜩 머릿속에 넣고 있다. 그리하여 어디를 가도 비교라는 독을 품고다니면서, 전에 한 번 받았던 것을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한다.
나는 어머니들로 하여금 자기 자식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단지 어머니들에게 누군가 달리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내 어머니에게 애인이있었다면, 나는 샘물들 주변에서 매번 갈증으로 죽어가며 인생을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진짜 금강석에 정통하다는 것, 그것이 내겐 불행이었다.
- P37, 36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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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정말지도력도, 군사적 재능도, 단순한 상식도 없는 것인가? 그러나 병사들은 자기들을 곤경에서 구해준 이 유일하게 현명한 결정이 만족스러웠기에 더이상 지문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했다. 장군들부터 졸병들까지모두가 파리 가까이 가면 다시 강군이 되리라고, 바로 거기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동이 트자마자 부지에를 떠나 르센으로 행군해야 했다. 이내 병사들이부산하게 움직였고, 나팔소리가 울렸으며, 명령이 교차했다. 후미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벌써 군사 장비 마차와 병참 장교 마차가 선두에서출발했다.
- P131

가로질러 불토부아로 이동했으며, 3군단은 연락망을 확보하기 위해 왼쪽, 즉 벨빌언덕에 진지를 구축했다.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이옥고 106 연대가 뫼즈강을 향해 음울한 행군을 시작했을 때, 모리스는 연로한 데로 부인의 얇은 커튼에 비친, 방안을 끝없이 오가던 황제의 음울한 그림자를 다시 떠올렸다. 아! 대패가 확실한데도 왕조의안녕을 위해 사지로 급파되는 이 절망의 군대여, 이 파멸의 군대여! 진격하라, 진격하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빗속으로, 진창 속으로, 전멸을향해!
- P147

병사들은 길 양쪽 가장자리로 열을 지어 걸었고, 장교들이 두 대영 사이로 지나갔다. 랭스에서 야영한 다음날 샹파뉴에서 병사들이 했던 즐거운 행군, 농담과 노래로 떠들썩했던 행군, 프로이센군을 따라잡아 격퇴하리라는 희망 속에서 배낭을 가볍게 들어올렸던 행군과는 전혀 달랐다. 이제 분노와 침묵 속에서 그들은 어깨를 짓누르는 소총과배낭을 저주했고, 지휘부를 더이상 믿지 않았으며, 절망에 사로잡힌 채 채찍질을 두려워하는 가축떼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발을 그저 앞으로옮길 뿐이었다. 이 가련한 군대는 자기들의 십자가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 P153

장은 다시 수통을 채우러 갔고, 그 물을 단숨에 마셨다. 실은 그의 얼굴도 흙빛으로 변해 있었고, 너무 굶주려서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자, 다시 행군! 힘내, 모리스, 동료들을 따라잡아야 해!"
모리스는 장의 품에 몸을 맡겼고, 어린아이처럼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어떤 여자의 품도 그의 가슴을 그렇게 따듯하게 덥힌 적이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극도의 비참함 속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가운데,
한 존재로부터 포근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은 그에게 더없는 위로가 되었다. 더욱이 그의 가슴과 맞닿아 있는 한 존재가 애당초그가 혐오했었던 무지렁이 농부라는 것이 이 순간 우정과 감사를 한없이 증폭시켰다. - P172

이것이야말로 원초적 우정, 일체의 문화와 계급 이전의 우정, 자연이라는 적의 위협 앞에서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하나로 결합한 두 인간의 우정이 아닐까? 그는 장의 가슴속에서 인류가 뛰는소리를 들었고, 구원자인 장이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한편 장은 자신의 감정을 분석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과 달리 천부적 재능과 지성을 갖춘 친구를 보호한다는 기쁨을 맛보았다. 무시무시한 폭력과 강간을 당한 아내가 비참하게 죽은 뒤로 그는 자신에게는감정이 없다고 믿었고, 인간이란 모두 고통의 원인이므로 사악하지 않은 인간들조차도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가슴속에 우정이 흘러넘쳤다. 굳이 포옹할 필요도 없었다. 그토록달랐음에도 둘은 서로에게 깊이 감동했고, 내면에서 진정으로 교감했다. 레미로 가는 이 끔찍한 도로 위에서, 두 남자는 서로에게 기대며 마침내 연민과 고통을 공유하는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 P173

‘안 돼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선부른 결정이에요. 언젠가 당신은 후회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정말 착한 사람이야. 이, 사랑해요,
삼다.
그는 입맞춤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하늘이 내려준 지복에,
이제는 영원히 사라졌다고 여긴 행복한 삶을 더이상 기부할 힘이 없었다. 그녀는 억누를 수 없는 열정으로 그를 꼭 껴안았고, 되찾은 보물인암, 이제 아무도 자기한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자기만의 보물인 양 그에게 사랑의 입맞춤을 퍼부었다. 잃어버렸던 그를 되찾았어, 또다시 그를 잃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거야.
- P200

대니의 짙푸른 경사지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왼쪽 창의 구릉지대도 화염에 휩싸이 있었다. 땅에서 솟은 듯한 대포들은 발이 늘어나는 벨트 같았다. 누아에서 1개 포병대가 발랑을 폭격했고,
바들랭쿠르에서 1개 포병대가 스당을 공격했으며, 마르페 아래 프레누아에서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1개 포병대가 도시 위로 쏘아올린포탄은 7군단이 포진한 플루앙고원에서 폭발했다. 바이스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언덕들이, 푸른 계곡을 닫으며 언제나 눈을 즐겁게 해주었던 언덕들이 돌연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요새로 변한 채 스당의 성채를 파괴하는 모습을 단말마적 고통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벽토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져내리는 바람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총탄 한 발에 경계벽 너머 그의 집 전면 모서리가 떨어져나갔다. 그가분노하며 소리쳤다.
"우리집을 박살낼 작정이군, 날강도 같은 놈들이!"
바로 그때 그의 등뒤에서 퍽하고 물컹한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한 병사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앳된 얼굴의 이 병사는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첫 사망자였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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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보건실에 비치된 생리대도 차마 부끄러워 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너희 생리대도 없다며, 온 세상이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어쩐지 죄스러웠다. 박완서의 단편 『도둑맞은 가난』에 나오는, 가난을 체험하러 나온 사장 아들이 된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오만한 사람이 ‘해봤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딱 그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영역의 가난에 대해서 더 겸손해야 했다. 더 살펴야 했다. P238


   벌써 오래 전에 마친...책이다.
   호평 일색이어서 구입했던 산문집인데 나에겐 많이 아쉬웠다. ˝골목˝을 갖지 못하고 살아서 그랬을까? 우리가 한 때 후일담, 후일담하던 아류로만 읽혀서 씁쓸했다.

   그러나 뒤쪽으로 갈수록 저렇게 빛나는 페이지들이 있어서 초반의 아쉬움을 뛰어넘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치욕한 순간을 맞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어린 나를 서늘하게 떠올리게했다.

  곧 사라질 ˝여가부˝, 도대체 ‘뭣이 중한디!!‘ 묻고 싶다.






그런 내게 『못나도 울 엄마』는 현실이 더 잔혹할 수 있다는 것, 내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이 삶이라는 것, 그 삶을 끝끝내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소공녀』 속의 인자한 부자 아빠 대신 『못나도 울 엄마』 속의 괴팍한 할머니가 내 부모라고 나타난다면 나는 과연 작정한 대로 키워준 부모와 이별할 수 있을까. 몇 번을 고쳐 생각해도 도저히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내게 있어 책은 꿈이고 판타지였다. 책을 많이 읽으면 성공한다거나 책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거나 하는 믿음을 가졌던 적은 없다. 그런 건 내가 모르는 세계였다. 오히려 나는 책에 있는 텍스트와 현실을 자주 혼동했다. 나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어떤 동물들처럼 현명할 것이고, 『십오 소년 표류기』의 소년들처럼 고난에 빠져도 맞서 싸울 것이며, 『작은 아씨들』의 베스처럼 끝내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의연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책에 있는 권선징악의 세계, 주인공은 끝내 승리하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미래는 마땅히 그런 모습으로 찾아올 거라고 믿었고, 그 믿음 속에서 나는 늘 안전했다. 그런데 미래가 결코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면? 책이 처음으로 내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 P30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정말 알기는 알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철거 지역에 살았으니 철거민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인기척을 내는 일 말고 철거민으로서 애써본 적도 싸워본 적도 없었다. 집을 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한 건 내 부모였고, 내 형제였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살았지만 같은 심정 같은 처지였을 수는 없다. 아무도 못 본 꽃을 내가 본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르포인 『4천원인생』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감정이 지나갔다. 아, 이건 내가 겪어본 삶이다, 싶다가 바로 그 말을 삼켰다. 그 삶을 겪은 건 내가 아니라 내 가족이고 내 친구였다. 유통 업체에서 일해본 적은 있었지만, 아르바이트였다. 연말 대목에는 보수가 많다고 해서 나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가 열두 시간 가까이 서 있어야 하는 육체노동과 마냥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에 질려 하루 이틀 만에 그만두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거의 한 달 가까이 일을 했다. 등록금을 생각하면 그 정도 힘든 걸로 그만둘 수 없었다. 방학 동안 여행 다니는 친구들과 견주면 나는 내가 위기의 이십 대인 척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 또한 돌아갈 학교가 있는 ‘대학생 알바‘일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 동갑내기 점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 나도 유통 업체 노동자의 삶을 알아, 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이다. 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 그러므로 나도 너와 똑같이 경험해봤다는 말이나 한 발 더 나아가 해봐서 안 가는 말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많은 인생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시련에 혹독하거나 냉정하기 쉽다.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 - P45

비교적 쉼터에서 가까운 텃밭을 분양받았는데도 소금기만 없다면 그 밭을 가는 동안 흘린 내 땀으로 물을 줘도 될 지경이었다. 잡초는 또 왜 그렇게 잘 자라는지, 내 밭의 잡초만 열심히 뽑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농사를 포기한 사람들의 밭에서 원래 심은 농작물과 알아서 뿌리내린 잡초들이 무성하게 숲을 이뤄 오가는 길에 발목까지 잠겼다. 내가 이토록 열과 성을 다해 텃밭을 가꾸는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아 잡초가 숲이 되도록 버려놓은 텃밭 주인들에게 미움이 절로 솟았다. 글은 당연히 한 줄도 쓰지 못했다. 흙내 나는 소설은커녕 ‘텃밭일기‘라고 거창하게 제목을 달아놓은 메모장도 한 문단을 채우지 못했다.
그 농사의 마지막은 사십 도가 넘는 고온이 계속되던 날 중 하루였다. 가을 농사를 위해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땅주인의 요청에 따라 텃밭 정리를 해야 했다. 지열에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지주를 뽑아내고 남은 작물을 정리하면서 나는 다시는 이 밭에 오지 않으리라, 적어도 가을에는 오지 않으리라, 이를 박박 갈았다. 고작 세 평 밭을 정리하면서 애초에 내가 꾸었던 꿈을 하나하나 반성했다. 삶이라니, 땀이라니, 땅에 대한, 농사에 대한 이해라니, 그 무엇 하나 가당한 것이 없는 오만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배웠다. 순간의 경험이, 체험이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 지나가는 자는 머무는 자의 고충을, 행복을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안다는 말은, 알겠다는 말은 매우 오만하고 경솔한 말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농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아니, 농사 흉내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말이 맞겠다. 땅을 대한다는 건, 삶을 이해한다는 건, 폼으로 낭만으로 자랑삼아 될 일이 아니었다. P148,149
- P148

고통은 왜 누군가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설득되어야 하는가. 고통을 설명해야 하는 건 기금을 모집할 때만이 아니다. 공적 기금이나 후원이 필요한 이들도 스스로 자신의 고통이나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 결핍과 아픔과 절망을 누군가의 특정한 이름으로 노출하고 공감을 얻는 사회를 두고 ‘고통의 포르노‘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고통의 증명‘을 강박처럼 요구하는 사회는 맞는 것 같다. 세상 어딘가에 기근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 전쟁이 있고, 세상 어딘가에 학대가 있고, 세상 어딘가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연민과 연대가 가능할 수는 없을까. 얼마나 아픈지 묻지 않고 돕는 사람들의 연대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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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구석들 창비세계문학 88
에밀 졸라 지음, 임희근 옮김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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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글징글하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게 이 책을 마친 소감이다. 세상의 속물이란 속물들의 집합소인 ˝집구석들˝은 신랄하고 빡치는 독설가가 옆에서 계속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는 환청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뼛속까지 그득한 욕망 덩어리들은 현재 진형형으로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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