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과 은희

서울에서 미란이 제주로 은희를 보러 왔다. 누가 봐도 서로가 서로에게 베프인 미란과 은희, 우리 평생 친구 하는 거다. 너한테 진 빚 죽어서도 갚을게. 소녀 시절, 은희는 미란에게 그렇게 절절한 맹세를 했었다. 철없어 한 짓이라기보단 그땐 정말 그럴 맘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삼십 년 흐른 지금도그러냐고, 누가 묻는다면? 은희는 ‘그럼!‘이라고 명쾌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이유를 꼽으라면 너무 많다. 뻑하면 남잘 갈아치우며 이혼하는 것도 싫었고, 늘 남들에게 관심받는 것도 싫었고, 긴 듯 아닌 듯 자신을 깔보는 듯한 말투도 싫었고, 무엇보다 자기가 낳은 애를 제가 안 키우고 남편에게 맡긴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걸 이제 와 까발려 뭐 할까 싶다. 구질스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냥 참고, 의리 좋은 년 소리 듣는 게 낫지. 어차피 둘 다늙어가는 마당이고, 미란이 서울살이 하는 까닭에 몇 년에 한 번 보는 게 전부이니, 대충,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절친, 베프라고 우기며, 넘어가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미란에게 성질날 때마다 미란을 이중인격자, 치졸한 년, 잘난 척하는 년 하며, 씹어 조진 일기장을 그만 미란이죄다 깡그리 보고 만 것이다. 젠장,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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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란 (여, 사십 대 후반, 마사지숍 운영)

제주 푸릉 태생. 이쁘고, 천성이 낙천적이고, 당차고, 똑똑하고, 화끈하고, 유머러스에 장난기 많고, 아쌀하다. 미란은 어려서부터 모든 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푸릉을 넘어서서 서귀포에서 가장 넓은 정원이 있는 집에, 서귀포 부시장을 지낸 고급 공무원인 아버지와 대학교수였던 엄마, 늘 전교 일등을 안 놓치는 멋진 오빠(현재 부모와 오빠는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한다), 게다가, 점입가경으 - P16

로 미란은 잘 놀고, 이쁜 데다, 공부까지 잘하고, 가난한 은희, 인권, 호식과도 격의 없이 지내는 정말 퍼펙트한 인성 좋은 멋진 친구였다. 그런 미란에게도 고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밖에서 보면 늘 인자할 것 같은 아버진, 가끔 술을 마시면,
엄마를 했고, 엄마는 제 아픔을 숨겼다. 남들 알면, 어쩌니? 엄마는 자신보다 남이었다. 그런 어느 한 날, 미란은 은희에게 이런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근데, 은희가 하는 말, ‘니네 아버지 하는 짓을 사진으로 찍으라, 그래서, 무사 그리하맨? 하고 물으맨, 그 사진을 보며 영원히 아방을 원망하려고 한다, 그리 말하라. 그것도 안 통하맨 신문사에 제보한다, 그러라. <부시장의 민낯>이란 제목으로!‘ 하하! 그런 신박한 방법이?! 미란은 은희의 조언을 실행에 옮기고, 아버진딸년의 진심 어린 협박에 그날로 술을 끊었다. 그리고, 미란의 집안은 더욱더 퍼펙트해졌다. 미란에게 은희는 그렇게 베프가 됐다. 똘똘하고, 당찬 은희, 돈이 있어 대학을 갔다면 최소 장관은 할 아이, 미란은 은희를 두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며, 정말 맘이 아팠다. - P17

서울에 와서도 미란은 제 인생이 유년 시절처럼 찬란할 줄 알았다. 그런데, 삶은 녹록지 않았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지금은 혼자 대학 시절 만나 처음 결혼한 첫사랑은 변호사였는데, 사무장과 바람이 났다.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딸 지윤이 열살 때, 야근한다는 남편에게 미란이 서프라이즈를 한다고 야밤에 사무실에 불쑥 갔다 둘의 애정행각을 보고 말았다. 미란은 구차해지기 싫어,
이혼을 요구했고, 남편은 거절하지 않았다. 위자료도 충분히 줬다. 이후, 남편은변호사 일을 접고 프랑스로 애인과 유학을 가서, 거기서 정착했다. 미란은, 이혼의 상처가 컸지만, 은희에게나 하소연을 했을 뿐, 가족은 물론 엄마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제 그만 행복해도 돼. 나 때문에 속 썩는 짓은 그만, 덕분에 사정 모르는 엄마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단 미란을 탐탁지 않아 했다. 미란은서운했지만, 훌훌 털었다. 딸 지윤이만 있으면 됐다 싶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졸업한 지윤이, 갑자기 친부가 있는 파리로 가고 싶단다. 한국 학교생활은 숨이막힌다고 했다. 미란은 딸을 친부에게 보내고 싶은 맘이 추호도 없었지만, 숨이막힌다는 말엔, 잡을 수가 없었다. - P17

살 부비고 산 남자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미란의 베프라 우기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녀의 베픈 어려서도 지금도 오직 은희 하나다. 가난하면서도 늘 당당했던 아이, 버리고 싶을 만큼 징글징글한 가족의 생계를 모두 거뜬히 짊어진 아이, 자수성가해 주변을 돕는 아이, 내가 부르면 언제든 제주에서 서울로 한달음에 달려오는 아이, 이젠 늙어버린 나를 늘 이쁘다고 치켜세우며 소피 마르소를닮았다고 하는 아이, 정은희. 힘들고 외롭고 서글플 때도 미란은 굵고 거침없는은희 목소리만 들으면, ‘야, 기운 내 새끼야! 니 옆엔 내가 있잖아! 의리!‘, 그 소리만 들으면 다시 깔깔댈 힘이 났다. 그날도 그랬다. 딸이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식을 한다고 해서, 오 년째 못 보다 가기로 했는데, 졸업식 이후 딸의 소원, 두 달간 세계일주를 같이 하기로 해서, 여비 마련하려 잘나가는마사지숍까지 정리했는데, 딸이 결혼까지 생각하는 프랑스 남자친구도 너무 보고 싶었는데, 남편이 전화해 하는 말. ‘지윤이가, 졸업식장에 내와이프랑 있고싶대, 세계일주도 나랑 양엄마, 남친이랑 가고 싶대, 남자친구는 당신이 세 번이나 결혼한 줄 모른다고... 근데 엄마가, 이 남자 저 남자랑 살았다고 말하긴 죽기보다 싫다고... 미안하다고 우네..  - P18

정은희 (여, 사십대 후반, 생선가게 운영)

미란이 첫 번째 이혼할 때까지만 해도, 은희는 완벽한 미란의 편이었다. ‘감히, 우리 미란이한테 상철 주다니! 이 개자식!‘ 은희는 미란보다 더 길길이 뛰며,
첫 남편을 욕하고 맘 아파 진심 울었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의리를 지키며 한편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일 장담하면 안 된다 했던가? 언제부턴가, 은희는미란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확한 시점도 기억난다. 지윤이를 제가 안 키우고, 전남편에게 보낸 그때, 미란은 술 취해 시원섭섭하다고 했다. 섭섭만이 아니라, 시원? 에미가 돼서 이건 뭐지? 이기적이다 싶었다. 이후, 두 번째 이혼 사유가 성격 차이인 것은 더더욱이 이해가 안 됐고, 세 번째 이혼 사유가 애를 낳기 싫어서란 말도 이해가 안 됐다. 연하남과 결혼하며, 애를 안 낳겠다니, 그러려면 첨부터 결혼한 게 잘못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일 말고도 은희가 미란에게 실망한 자잘한 일들은 너무도 많았다. 일년 전이었다. 새벽부터 죽어라 일해 피곤해 죽겠는데, 갑자기 오후에 미란에게서 문자가 왔다. ‘니가 보고 싶어, 죽을 것같아.‘ 가슴이 쿵 했다. 이혼의 상처 때문인가? 얘가 왜이러지 싶었다. 그래서,
놀라 전화를 해도 안 받고, 문자를 해도 답이 없고.. 은희는 그길로 팔던 생선을내팽개쳐놓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미란의 집에 도착해 문을 여는 순간, 깔깔대는 미란의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 그리고방 안 가득 들어찬 미란의 친구들! 이건 뭐지 했는데, 이유를 들으니 더 화가 났다. 미란이 제 친구들과 의리 게임을 했다나. 제 방에 있는 친구 중, 필요할 때 당장 달려올 친구를 가진 자가 이기는 게임이란다. 미란은 제가 이겼다며, 깔깔대고 웃었고, 은희는, 화가 나 머리꼭지까지 돌았다.  - P19

어쩌면 그 모든 말들이 사실인지도... 그런 미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때마다, 은희는 미란에게 고마운 것들을 생각해내 덮었다. 중학교 때 여자는 고등학교 갈 필요 없단 부친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 미란은 물에 제초제를 두방울타 은희에게 먹이고, 부친을 찾아가, 은희가 고등학교 못 가 자기 집에서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며, 생쇼를 해주었다. 결과는 부친의 백기, 은희는 결국 고등학교에 갔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서 더는 학업을 할 수 없어 중단했을 때도, 미란은 학교 수업 후 은희를 찾아와 공부를 가르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게해주었다. 어디 그뿐이랴, 버스비도 없는 은희는 백하면 미란의 부친 차를 얻어타고 학교를 갔고, 미란이 싸온 도시락을 얻어먹었고, 학용품이 없어,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했을 때도, 미란은 자기가 했다며 문방구 아저씨에게 울며불며 대신 무릎을 꿇어주었다. - P20

 미란이가 어쩌든 저쩌든 난 의리를 지키고, 받은 은혜를 갚아야한다(물론, 이렇게 쓸 때마다 의리도 지킬 만큼 지켰고, 은혜도 갚을 만큼 다 갚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순 없었지만). 미란이에 대한 서운함은 무덤까지 덮고 가자. 치졸하게, 어린애들처럼 옛날 일 꺼내 무엇 하나. 어차피 갠 서울, 난 제주 사는데....
잘 만나지도 못하는데... 나이 오십 돼서, 쌈질을 할 것도 아니고... 참자, 참자, 참자...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은희는 그 다짐이 평생 지켜질 줄 알았는데.... - P21

은희는 호식이 동조하는 것도 짜증나 버럭, 지랄한다 욕을 했는데, 호식이 진지하게 말했다. 미란인 니가 의릴 지킬 만큼 좋은 애가 아니라고, 지윤이 낳을때 제주서 서울 가산구완한 걸로 아니, 세 번 결혼식할 때마다 외국에 있는 부모 대신해 수발든 걸로 넌 이미 미란에게 진 빚을 다 갚고도 남았다고...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미란이가 별로였다고..그러며 자신도 모르는 어릴 적 얘길 해댔다. 내용인즉, 어려서 미란이 가난한 은희의 도시락을 싸 왔는데, 은희가 농담 삼아소시지가 없네! 그 말 했다고 미란이가 도시락을 뺏어서, 은희가 굶었다는 얘기였다. 은희는 그 말을 듣고... ‘내가 잘못했네, 그건 얻어먹는 주제에!‘ 했다. 그런데 호식 왈, 그건 니가 니 자신한테나 할 수 있는 말이지, 친구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란다. 그러며 밥 대신 물 먹으러 나가는 은희 등에 대고 미란이 ‘얻어먹는 주제에!‘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며 자신은 그때부터 미란이 인간성이 진짜별로였다고. 은희는 호식에게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어릴 때 그럴 수도 있지 했지만, 그 말이 상처가 됐다. 어떻게 지가 나한테 친구라며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 그 밤 은희는 일기장에 미란을 이중인격자 같은 년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했다. - P22

그리고 그 밤, 은희가 인정의 편에 섰다. 너 인생 왜 그렇게 사냔다. 명보 얘길했는데도, 남의 남편 안은 건, 정신 있는 년이 할 짓이 아니란다. 은희의 본심이드디어 터져 나오나 싶었다. ‘남의 남편? 난 맞고 사는 친구 안은 건데?‘ 미란은이제 은희와 진짜 한판 맞짱을 뜰 시간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피하지 말자, 그래, 한판 붙어보자, 화끈하게. 미란은 책꽂이에 꽂힌 은희의 일기장을 꺼내, 은희앞에서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은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걸 보면서.... 그런은희를 비웃고 싶었지만, 은희를 믿어왔던 시간이 무너지는 슬픔은 어쩔 수가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붉어졌다. 은희는 알까, 지금 내 맘이 어떤지... 과연, 우린 서로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상처를 안고, 사오십 년 우정을 지켜낼수 있을까? - P24

영옥과 정준 그리고 영희

그냥 둘이서 지금처럼 이렇게 가볍고 경쾌하게 심각하지 않고 쿨하게 아슬아슬하고도 짜릿하게 동네 사람들 눈 피해 잠자리나 하면서 깔깔대고 즐겁게 지내면 될걸 왜 정준은 결혼을 하자고 해서, 내 속을 뒤집는 건지. 나는 안다. 결혼은 둘만 좋다고 되지 않는 일. 가족과 가족이 만나는 일. 나는 나도 버거운 내 가족 영희를 그들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 같이 안 살면 되지 않을까? 잘하면 영희의 존재를 영원히 숨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궁리가 한창인데... 갑자기 영희가 내게로 온단다. 잠시인 줄 알았는데,
다신 저 살던 시설로 돌아가지 않겠단다. 더는 정준에게 숨길 수도 없게. 내인생을 망치는 짐 같은, 쌍둥이 언니 영희 이년, 대체 어쩌면 좋은가? - P25

박정준 (남, 서른셋, 선장)

천성이 맑고 따뜻하고, 그렇다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는 일마다 열심이고 성실해 누구에게나 신뢰가 높다. 건강하게 농사짓는 아버지 어머니 (육십대, 정준이 사는 항구와 떨어진 윗동네에서 기준과 함께 산다)가 계시고, 자신과 함께뱃일하고 잡일하는 동생 기준이 있다.
제주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서너 개의 직업을 동시다발적으로, 다시 말해, 돈되는 일은 다 한다. 물질하는 해녀들을 바다와 육지(제주는 제주와 다른 섬들도 다육지라 부른다)로 데려가고 데려오며 뱃삯을 받고, 바다나가 낚시를 해서 인근횟집에 활어나 선어를 대고, 은희의 생선가게의 경매를 돕고, 함께 오일장에서일당을 받고 생선을 팔기도 한다. 공부에 관심이 없어, 육지로 유학을 안 나간것도 있지만, 바람 없는 육지에 가면 머리가 아팠다. 뼛속 깊이 제주 사람인 것.
버려진 버스를 리모델링 해 이쁘게 카페처럼 꾸며 바닷가에 살 만큼 낭만도 있다. 곧 배 살 때 빌린 은행 대출을 갚고, 다시 대출받아 바닷가 근처에 십팔 평짜리 아파트도 살 계획이다.  - P25

이영옥(여, 삼십 대 중반, 애기해녀 1년차(하군))

정준은 영옥이 가끔 쌈닭 같긴 해도 천성이 밝고 맑고 재밌고 아쌀하고 귀엽고 무조건 사랑스럽다지만, 그건 사랑의 콩깍지가 씌인 탓, 그리고 언니 영희를대하는 자신의 혐한 꼬라질 보지 못한 까닭인 걸, 영옥은 명명백백 알고 있다.
남들 앞에선 온갖 밝은 척 착한 척 내숭 떨지만, 저 깊은 속내는 음흉하고 야멸차고 이중적인, 저만 아는 이기적인 못된 기집애. 엄마 아빠는 늘 그러셨다. 장애아이는 부모가 가족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장애아이가 지상에 오기 전 하늘에서 제 부모를 제 가족을 선택한다고. 누가 장애 가진 나를 감당할 수 있지, 누가 날 감당할 만큼 착하지? 엄마 아빠 영희가 우릴 선택했다 했다. 우리 가족은영희가 선택할 만큼 착하다 했다(그래서 그녀의 닉네임은 어려서부터 착한옥이었다. 강요된 착함. 짜증 나는 애칭이다). 그렇다면 영희의 선택은 잘못된 거다. 부모님은 착하지만 일찍 죽어버렸고, 언니 영희를 스리슬쩍 보호시설에 버리고 싶은나는 절대 착하지 않으니. - P27

옷장사를 하던 부모님(아버지는 장사치였지만, 엄마는 화가였다. 그러나 영희의 병원비며 치료비 때문에 화가이길 포기하고, 아버지 따라 장사치가 되었다)은 영옥이 열두살 때 새벽시장을 다녀오다 과로로 졸음운전을 해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했다. 부모님이 죽었단 소식은 경찰로부터 영희가 먼저 전화로 전해 들었다. 서너살의 지능을 가진 영희는 그 소식을 듣고도 울지도 않고 감사합니다, 배운 대로전화를 끊고, 앙문에 밥을 맛나게 비벼 먹으며, 해맑게, 자다 일어난 영옥에게
‘엄마 아빠가 주주, 죽었대. 죽는 게 뭐야?‘ 물었었다. 영옥은 부모님 장례식장에서 피를 토하듯 엉엉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슬프기도 하지만, 영희를 데려가지 않은 원망이 더 컸다. 그리 죽으시려면, 영희저년도 데려가시지. - P27

둘은 그렇게 18살까지 보육원에서 지냈다. 영희를 놀리는 애들과 영옥은 매일 싸우다시피 했다. 지긋지긋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후, 영희는 보육원에서하는 발달장애인 보호시설 은혜의 집으로, 영옥은 일거릴 찾아 인천 시계공장으로 그리고 다시 강원도 카페로 옷가게로 그리고 현재는 제주로 내려와 해녀학교를 나와 애기해녀가 되었다(밤엔 실내포장마차를 한다). 남들이 보면 먹고살기 위해 흘러흘러 제주로 온 듯 보이지만, 내심 영희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계획적인 이주였다. 영희와의 접촉은 거리만큼 멀어졌다. 첨엔 한 달에 두 번 시설을찾았고, 몇 년 후엔 한 달에 한 번, 다시 몇 년 후엔 두 달에 한 번, 그리고 제주 온후로는 딱 한 번밖에 가지 않았다. 영희가 끝없이 전화해 왜 안오냐? 하면, 물질해서 못 간다고, 비가 와 비행기가 못 뜬다고, 서울은 비가 안 온다고 하면, 서울은 안 와도 제주는 온다고 하고, 니가 시설에 살려면 난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렇게 갖은 거짓말을 했다. 보육원 때부터 영희를 이뻐하던 장선생님이 다행히도시설로 옮겨 영희를 알뜰살뜰 케어하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미련한 이영옥, 영원히 그렇게 점점 영희와 멀어질 수 있다고 착각하다니. - P28

이영희 (여, 삼십 대 중반, 영옥의 쌍둥이 언니, 다운증후군이면서, 그림작가(본인 생각,
남들에겐 그냥 그림 좋아하는 사람일 뿐))

나는 사람들과 영옥과 다르게 생겼다. 나는 미간이 넓고 피부가 나쁘고 눈도나쁘고 말도 더듬고, 숫자를 잘 못 세고 뚱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빤히 본다. 내가 별짓을 안 했는데도 싫어하는 눈치다. 살아생전 엄마 아빠는나만 보면, 말씀하셨다. 영희야, 넌 특별하단다. 맞다, 난 특별하다. 특별히 이상하게 생겼다. 특별하단 뜻은 남들과 다르단 뜻이다. 나는 보통이고 싶다. 사람들관심 안 받는 들풀이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원해도 난 보통이 될 수 없다.
그게 속상하다. 그래서 가끔 죽고 싶다. 그러나 나에겐 착한 영옥이가 있다. 이쁜내 동생, 눈도 반짝이고 코도 뾰족하고, 13살 때 보육원에 나를 버리려다가, 안버린 착한 내 동생,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 내 동생. 엄마가 그립고 아빠가 그립고 동생이 그리워 엄마의 그림을 보다가, 나는 그림작가가 됐다. 아무도 모른다. 나는 혼자만 그림을 그린다. 내 그림은 수천 점(공책에 빼곡한)이다. 현재 내가 작가인 건 아무도 모른다. 남들에겐 알리고 싶지 않다. 내가 작가가 된 건, 동생 영옥이가 젤 먼저 알아야 하니까(영옥이 뜸하게 오기 시작한 삼사년 전부터 그림을 그렸다, 진짜 잘 그릴 때까지 영옥이 제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랄 때까진 영옥에게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작심하고, 지금껏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 P29

나는 동생이 바빠서 못 온단 소릴 진짜 믿었다. 그래서, 내가 동생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소를 아니까. 동생이, 보내준 택배 상자의 주소를 아니까. 그래서, 복지관 알바 갔다가 동생에게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리고 기사에게 말했다. ‘제제제제, 제, 주도 서귀포시 푸푸푸릉리..‘ 그런데 웬걸, 이 택시 기사가 나를 제주도가 아닌, 경찰서에 데려다주는 게 아닌가. 그리고 다시 보호시설, 은혜의 집. 나는 울었다. 밥도 먹기 싫었고, 그림도 그리기 싫었고, 씻기도 싫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볼 수 없는 삶이라면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게 없었다. 오직 영옥이만 보고 싶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이 지나고, 장선생님이 말했다. 영옥이한테 가자, 눈물이 쏙 들어가게 기분이 좋았다. 야호! 브라보! - P30

그리고 뜨거운 연애가 시작됐다. 그러다, 영옥이 물질하는 중에 욕심을 내다 미역에 감기는 사건이 나고, 춘희와 다른 해녀들에 의해 목숨을 구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영옥은 물질이 그냥 돈이나 버는 일터가 아닌 운명 혹은 목숨공동체란 걸 몸으로 체험하게 되고, 그 계기로, 영옥은 춘희에게만은, 영희 얘길 할 수밖에 없었다. 수시로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전화(영희의 전화)를 정준은 궁금하면서도 묻지 않아주었다. 언젠간 말할 때가 오겠지.. 숨겨둔 진실은 세상에 없으니... 어떤 사연이든 내가 품으면 그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문제의 그날이 왔다. 최근 일이 많아 이 주 만에 공공칠 작전처럼 사람들 눈을 피해, 간만에정준과 모텔 잠자릴 하는 날이었다. 영옥은 그날 하루 종일 맘이 설렜다. 밤새거릴 돌아다니고, 거리의 악사 음악에 맞춰 춤도 추고 웃고, 술을 마시고, 잠자리까지 즐거웠고, 이뻤다. 그런데, 은혜의 집 장선생님의 전화가 왔다. 아, 분위기깨는 이 반갑지 않은, 짜증 나는 전화, 영옥은 욕실에서 샤워하는 정준에게 먼저갈게 하며 모텔을 나와 장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늘 영옥의 편에 서서, 따듯한말을 해주던 장선생님은 그날따라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 P31

영옥은 화들짝 놀라 다시 전활 했지만, 장선생님은 전활 받지 않았다. 그리고온 문자, 〈낼 오후 2시, 비행기 끊었다>. 하늘이 샛노랬다. 드디어 정준이 영희의존재를 알게 되겠군. 영옥은 영희가 창피했다. 가족을 창피해하는 게 부끄러워도 영희는 창피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 그날 각자의 차로 집으로 오는 길에 정준이 전화로 말했다. 얼굴 보고 말하기 부끄러워 전화로 한다며, 결혼하잔다. 그렇게 내가 심각해지지 말자 했는데, 결혼이라니. 영옥인 잘됐다. 이 김에 그냥 헤어지자 싶었다. 걱정적인 섹스 후, 곧바로 이별, 이건 좀 너무하다 싶지만, 어차피 헤어질 건데 뭐. 영옥인, 설레서 프러포를 하는 정준의 전화를 그냥 끊어버리며, 바로 성준에게 야멸차다. 맘이 안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런다고 질질 끌기도 싫었다. 질질 끌다 보면 예전처럼 내가 당한다. 스물네 살그때 제 언니 영희를 보고, 스리슬쩍 연락을 끊은 이 년 사귄 남친, 서른 살 때 영희와 놀아주며 선량한 척 자신에게 환심을 사곤 동거까지 했으면서도 결국엔영희가 싫다며 떠난 개자식에게 당한 것처럼. - P32

가 스물넷에 만난 놈, 서른에 동거한 놈과 정준이 똑같이 후지다고 했다. 딴 놈이야기에 동거한 남자가 있었다는 얘기도 화나는데 후진 게 같다니? 그 말은 더화가 났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화를 참고, 물으니, 제 언니를 첨 봤을 때 놀란 내 눈빛이 놈들과 똑같았다나.. 정준은 화도 나고 울고 싶었다. ‘나도 놀라죠!
난 멍청해서, 다운증후군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럴 수 있잖아요?! 놀랄 수 있잖아요!‘ 정준은, 악을 쓰며 울어서라도 영옥을 잡고 싶었다. 그래서 키스를 하려했는데, 저를 슬며시 밀치며 영옥이 싸늘히 하는 말, 자기랑 결혼하려면 영희와같이 살아야 한단다. 정준은 순간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머릿속에 순한 부모님이스쳐갔다. 할말 잃은 정준을 문밖에 놓고, 영옥이 문을 쾅 닫았다.
사실, 영옥은 정준이 저를 좋아하는 만큼 정준이 애타게 좋았다. 그리고 영희랑 같이 살 맘이 추호도 없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냥 어깃장이고 시험이다. 저도 못 하면서 남더러.. 대책 없는 모순덩어리, 이영옥. 빨리 은혜의집수리가 끝나, 영희(자신을 만나, 좋아서, 계속 춤을 추는)가 갔으면, 근데, 그날 잠자리에서 영희가 싱글거리며 하는 말, - P34

춘희와 은기

할머니라고 해도 전화로 어쩌다 목소리나 듣고 화상통화나 서너 번 해봤을까, 실제론 단 한 번 본 적도(은기 두 살 때 아빠 엄마가 제주에 은길 데려왔다지만, 은기 기억엔 없으므로, 은기 입장에선 생판 모르는 사이) 없는데, 갑자기 엄마가 할머니 집에 2주간 은기를 맡겼다. 서럽기 그지없다. 춘희 역시, 단 하나뿐인 손녀 은기가 이쁘긴 해도 낯설긴 마찬가지, 애 키운 지 오래돼 애한테 뭘 해줘야 좋아할지 당최 모르겠는데.. 애는 뻑하면, 성질을 피고, 징징대고 울고 떼를 쓰고, 그래도 며느리가 2주면 데려간다니, 버텨봐야지 했는데, 웬걸 며느리가 오지 않는다. - P35

현춘희 (여, 일흔 초반, 상군 해녀)

말수 적고, 일을 하는 것도 사람을 대하는 것도 까탈스럽지 않고 그저 무던하다. 어려선 명랑하단 소릴 듣기도 했지만, 세파가 그녀를 그리 말없이 덤덤히 큰어른으로 만들었다. 집이 좀 살았으면 양장 같은 기술이라도 배웠겠지만 형편안 되는 집에서 태어나 열셋에 보말 주우면서 시작한 물질이 벌써 60년. 지금은먼바다까지 나가는 해녀 중에 해녀, 상군 해녀다. 그러나, 물질로 돈 버는 것도다 옛말, 요즘 바다엔 물건도 많이 없고, 양식도 많아, 돈이 안 된다. 서운하지 않다. 그리 잡아먹으니 없을 만도 하다 받아들인다. 생계를 위해서도 있지만, 시간죽이는 데 노동만큼 좋은 게 없어서, 옥동과 여기저기 밭에 날품을 팔러 다니기도 하고, 은희 가게에서 생선 다듬기 (염장 생선(말린 생선) 만드는 것)를 하기도 하고, 또 그것들을 오일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가난한 집에 열여덟에 시집와서 억척스럽게 살며 아들 넷을 낳았지만, 현재는마흔에 얻은 늦둥이 막내 만수만 남았다. 결혼 후 십 년 만에 얻은 귀한 쌍둥이아들들은 초등학교 때 홍역을 쌍으로 앓더니 갑자기 한꺼번에 죽고, 둘째, 아니셋째(은희 인권 호식의 동창) 만영이는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스물이 되기도 전에 - P35

술 먹고 고랑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셋째가 가버린 그해, 덜컥 남편이 폐병으로죽었다. 인생 참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자식이 있으니 살았다. 무엇보다 친구 옥동 팔자도 비슷해서, 인생이란 원래 그리 힘든 것이려니 받아들였다.
막내 만수는 학생 땐 참 지독히도 그녀 속을 썩이며 학교도 안 가고, 쌈질하고, 다니더니 성인이 돼서는 에미 돈을 몽땅 털어 양식사업으로 말아먹고, 반드시 성공해 오겠다며 목포로 떠나 덤프트럭 기사가 됐다. 그리곤, 에미한테 말도없이 여자를 얻어 결혼해 살더니(식은 안 올리고, 신고만 한 것), 은기를 낳아 들고는 오 년 전(은기 두 살 때) 밝은 얼굴로 찾아왔었다. 그러며, 하는 말, ‘애는, 이제고만 낳을라고요. 그녀는 잘했다 했다. ‘많이 낳지 마라. 나는 멋모르고 많이 낳았다. 그냥 애는 낳으면 저 알아서 크는 줄 알았고, 머리가 모잘라 나 죽고 자식죽고 그리 순서대로 갈 줄 알았지, 자식 먼저 보낼 수도 있단 생각은 추호도 못했다. 잘했다, 잘했다, 자식은 근심이다, 은기 하나로 족해라.‘  - P36

손은기 (여, 일곱 살, 춘희의 손녀, 유치원생)

목포에서 엄마 아빠랑 산다. 아빠 집인 제주도는 두 살 때 왔다 하는데 기억에없고, 할머니 춘희는 가끔 일 년에 한두 번 아빠가 해주는 화상통화로 본 게 전부다. 또래에 비해서 늦된 편이라 아직 한글도 더듬더듬 읽고 숫자도 10 넘어가면 잘 모른다. 춤추는 걸 좋아하지만, 수줍음이 많아, 남 앞에선 안 하고 엄마 아빠한테만 보여준다. 아빠는 큰 덤프트럭 장거리 운전을 해 자주 못 보지만, 그래서 볼 때마다 더 반갑고 더 좋다. 어느 날 아빠가 은기의 팔에 볼펜으로 (이그림은 은기아빠 만수의 팔에 있는 문신이다. 만수는 고향을 떠나며 엄마 춘희를 잊지 않기 위해 춘희에게 있는 문신(제주 해녀들끼리 서로 공동체를 다지며 어려서 새긴 것, 그래서 조악한 그림 같은)과 같은 걸 문신가게에서 새겼다. 이 사실을 춘희는 몰랐는데, 나중에 며느리에게서 전해 듣게 된다)을 그림 그리듯 써주며 말했다. ‘은기야, 내년에초등학교 들어갈 때는 제주도로 이사하자.‘ 은기는 목포에 친구가 많아, 제주도가 싫다 하니, 아빠가 다시 말했다. ‘제주도 바다에는 달님이 백 개씩 뜬다? 엄청멋있는데! 너 진짜 그거 보러 안 갈래?‘ 은기는 그 말에 혹했다. 달님 하나도 이쁜데 백 개의 달님이라니! ‘좋아!‘ 은기는 그렇게 아빠에게 제주 이사를 허락했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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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N) 육지 사람들은 맨날 봐도 똑같은 이 바다가 뭐가 좋다고 구경하려는오는지 서울이 재밌지, 이 시골이 대체 뭐가 좋다고?! 무공해? 청장: 연라 지루해... (하고, 바다를 향해, 침을 작게 뒷 밑고, 속상한, 씩씩대며, 동아서며) 다 더럽히고 싶다.
* 점프컷 - 오일장 가는 길》영주, 땀이 잔뜩 난 속상한 얼굴로 빠르게 걸어가며, 할머니나 이름들이게 계속 건성으로 투덜대듯 일일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하는 인사가 바쁜* 점프컷 - 섭섭오일장 입구 》일 시작하는 풍경 보이는 손님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영주, 섭섬오일장 입구에서부터 계속 진성으로 인사하는 짜증 나는 그런영주의 그림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의 발소리 들리는,
(장사 물건 정리하는 가는 영주 보며) 저거 호식이 몰래미 아니?
(할망1 옆에서 장사하는 가는 영주에게) 요즘도 전교 1등 햄시냐? 어멍도이시 잘도 요망지게 커부런(기억이 안 난다는 듯 어멍이 어시 (없어)?
(크게 말하는) 영주 애기 때 도망가게 몰린?
(가면서, 그 소리 다 듣는, 싸증 난, 다른 장사꾼들에게 인사하며, N) 나를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촌동네.. 도망치고 싶다! 하루 종일 인사만하다목 떨어지겠네. 지겨워.
* 점프컷 - 할망장터 >춘희, 잡은 소라, 전복, 물미역, 해삼 등을 컬러풀한 소쿠리에 조금씩 담아서 진열하고, 쪼그려 앉아서 멍게 손질하는,
옥동, 그 옆에서 각종 곡물과 뿌리채소류를 소쿠리에 담아 진열하고 있다가, 달이, 커피 들고 뛰어와, ‘커피 배달이요!‘ 하고, 준희 옥동에게 주면, 두사람, 커피 받고, 옥동, 달이에게 돈 주려 하면,

선아
(한라산 보며) ...와..!
동석
(한라산을 보며, 투박하게) 나중에도 뭔가 사는 게 답답하면, 뒤를 봐 이렇게 등만 돌리면 다른 세상이 있잖아.. (옥동생각하며) 그저 바다만 바보처럼.
선아
(차분히 보면)
동석
(옥동 생각에 맘이 불편해, 답답하고 투박하게, 미간을 찡그리고 한라산만 보며) 울 엄마 얘기야. (답답한, 남일처럼 툭툭, 너무 무겁지 않게) 아버지가 배 타다 죽고, 동이누난 물질하다 죽고, 엄마 말 바다만 봤어. 바로등만 돌리면, 내가 있고, 이렇게 한라산이 턱하니 있는데.. 이렇게 등만 돌리면, 아버지 동이누나 죽은 바다도 안 볼 수 있는데 그저 맬 바다를 미워하면서도 바다만.. (하고, 선내로 가는)
선아
(한라산 보다 가는 동석을 보며, 편안하게) 나중에... 우리 열이 오면 같이한라산 가자?
동석
(가며, 투박하게) 나중은 나중에 얘기해, 지금 말고. 말했잖아. 난 나중은 없다고, 바람 분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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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자

마취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 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 번호가
45 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좌석번호가
11b 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리는 순리를 기억할 것 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병률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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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로 보는 것과는 다른.
활자 중독이 맞다.
슬프다.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는 것, ()들 때문에 슬프다.





한수 (눈물 흐르는 맘 아픈, 은희 못 보는 참담한)

은희
(맘 아픈, 눈물 나는, 눈물 닦고, 모질게, 그러나 맘 아픈) 니가 날 친구로생각해시민(했으면), 첨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지? 이런 데 끌고 오지 말고 잘 사는 마누라랑 별거니, 이혼이니, 그런 말을 한 순간... 넌 날 친구가 아닌, 그냥 너한테 껄떡대는 정신 빠진 푼수로 본 거라? 기지? 내 감정을 이용한 거라, 기지(그렇지)?

한수
(은희 보는, 울 것 같은, 참고, 맘 아픈, 고개 끄덕이고, 낮게) 그래.. 이용할수 있다면, 이용하고 싶었어.... 우리 애, 보람일 나처럼... 돈 때문에 지 꿈을 포기하게 하기 싫어서... 꿈 없이 사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아니까.

은희
(꿈 없이 산다는 말에 맘이 아픈, 참고, 가만 눈물 그렁해 보며) 나는 오늘, 지금.. 평생 친구 하날 잃언... (너무 맘 아픈 눈물 참고,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수건 들어, 얼굴을 파묻고, 잠시 울고, 이내 나오다, 바닥의 한수가족사진 펜던트를 들어, 보고, 한수 앞에 놓고, 자리에 앉아 술 따라 마시고, 창가 보며, 한수에게, 낮게) 가

한수
(그런 은희를 보다, 펜던트를 집어 옷에 넣고, 은희 보며, 진심으로, 눈가붉어...너한테 왜 첨부터 돈 빌려달란 말을 안 했냐고?

은희
(눈물 그렁해, 속상해, 화나 보면)

한수
(눈물 그렁해, 차분하게) 세상 재밌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너한테 맬 죽어라 생선 대가리 치고, 돈 벌어 동생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사는 너한테 기껏 하나 남아 있는, 어린 시절 나에 대한 좋은 추억... 돈 얘기로.. 망쳐놓고싶지가 않았어.

은희
(맘 아픈, 이해가 되는 속도 상한)

한수
(애써, 맘 다잡고, 눈물 흘리려 하며, 맘 아픈 진심) 그래도 너무 미안하다. 친구야 (하고, 맘 아프지만, 담백하게 일어나, 나가는)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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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면서 부끄러움이 앞다투어 튀어나온다. 제주어를 모르면서 제주 배경이야기를 쓰겠다고 한 것(어이없고 감사하게도, 대사 대부분은 배우들이 직접 제주어를 공부해 연기한 것이다), 임신 중단 경험은커녕 고민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영주와 현의 이야기를 섣불리 선택한 것, 친구와 틀어진 인연을 바로잡지 않고 흘려보낸 일이 흔했으면서 미란과 은희에겐 굳이굳이 관계를 이어가라 등 떠밀어종용한 것, 영옥 정준 영희의 이야기를 써놓고도 장애인과 그의 가족들의 아픔을 여전히 잘 모르는 것, 자식을 잃은 춘희 맘을 내 어머니를 통해 보았으나, 그건 남의 집 불구경만큼이나 피부에 와닿지 않는 아스라한 정도쯤.
으로 수십 개의 변명도 마구 튀어 오른다.  - P4

이런 부끄러움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수십 개의 변명도 마구 튀어 오른다. 드라마는 수기가 아니지. 작가는 관찰자지. 하지만, 나는 한수처럼 가족 때문에 남에게 눈치 보며 손 벌려 빚을 얻어봤고, 은희처럼 사랑이 이뤄지지 않아봤고, 영주와 현이처럼 부모 가슴에 팔뚝만 한 대못을 박아봤고, 내 선택이 누군가에겐힐난거리가 되었던 일도 겪어봤고, 자식은 아니었지만 가족 때문에 부모 때문에호식처럼 가슴치며 제 뺨 치며 울어도 봤고, 인권처럼 부모가 죽고 나서야 철이들었고, 선아처럼 우울증을 앓진 않았지만 공황장애로 부지불식간 땅이 꺼지는공포를 수시로 당하는 형제를 수년간 곁에서 지켜봤고, 동석처럼 날 낳아준 사람을(내 경우는, 아버지였지만), 이 갈며 수십 년간 자다가도 미움에 눈을 부릅떠봤고, 옥동처럼 글자도 모르는 열두 살 때부터 남의집일을 했던, 별것을 넣지 않고 된장 하나로도 된장찌개를 기막히게 끓이는 어머니도 두어봤다. 관찰과수기와 해결될 수 없는 논란거리들이 마구 뒤엉켜버렸다. 글 쓰는 내내 일필휘지는 꿈도 못 꾸고,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또 지우고의 반복과 부끄러움과 변명 - P4

만이 함께했다. 삼십 년 가까이 글 써도 노하우라곤 없는, 늘 전작을 뛰어넘어야한단 과제가 장애물이, 페널티가 되는 그래도 시간이 가고, 끝을 맞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곧 이 드라마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건 더더욱 다행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드라마를 보며 더 즐겁고 더 많이 행복해져야 하고, 나는 쉬어야 할때가 왔으니. 이 대본집은 그냥 기록일 뿐, 두고두고 남겨지기 위함은 아니다. - P5

전엔 글 쓸 때만 살아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젠 쉴 때도 살아 있는 걸 느껴보려한다. 이런저런 모양의 구름이 시시각각 떠도는 하늘과, 길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청춘들을 노인들을 노동자를 꽃잔디 보듯, 가만 긴 시간 보며 멍 때리고도 싶고, 주목처럼 근사하지 않은 멋대가리 없는 가로수 플라타너스의 허리나 발꿈치 정도를 만져보고 싶고, 때론 우러러보고, 기대보고도 싶다. 나는 글 쓰기 위해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으므로 <우리들의 블루스>가 나를또 한 뼘 키웠다. - P5

이 드라마는 인생의 끝자락 혹은 절정, 시작에 서 있는 모든 삶에 대한 응원이다. 응원받아야할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때론 축복아닌 한없이 버거운 것임을 알기에, 작가는 그 삶 자체를 맘껏 ‘행복하라!‘ 응원하고 싶다.


낼모레 죽을 거라는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일흔 중반의 옥동,
청소년기 어머니의 재가로 상처받고 이후 첫사랑부터 만나는 여자들에게 족족 채이고 가진 것이라곤 달랑 만물상 트럭 하나와 모난 성깔뿐인 마흔 초반 솔로인 동석,
남편은 물론 자식 셋을 먼저 보내고 마지막 자식마저 이제 곧 보낼 처지인 오래 산 게 분명한 죄라는 걸 증명하는 일흔 초반 춘희,
하루 이십 시간 생선 대가리를 치고 내장을 걷어내 평생 형제들 뒷바라지하고도 기껏 생색낸다는 말을 듣는 오십 줄의 처녀 은희,
수십 년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이 앙다물고 버틴 삶인데 그로 인해 이혼을당하고 자식마저 양육할 수 없단 판결을 받은 선아,
가난한 집안에서 홀로 잘나 대학을 나왔지만 그래봤자 월급쟁이 인생에, 골프선수 꿈꾸는 능력 좋은 딸이 있지만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고 다리가 꺾여 첫사랑을 속이고 돈을 빌리려는 삶 자체가 초라한 기러기아빠 한수, - P14

해녀로 물질하며 깡 좋아 먹고사는 것은 두려울 것 없지만 사랑하는 남자가선뜻 결혼하자고 프러포즐 해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평생 혹 같은 다운증후군언니를 가진 영옥과큰 욕심 없이 남들 다 서울로 갈 때도 고향 제주와 가족들 지키겠다며 선뜻 배꾼으로 남아 고작 욕심이라곤 사랑하는 여자와 제주 이 바닷가에서 단둘이 오손도손 소박한 신혼을 꿈꾼 게 전부인데 그마저도 야멸차게 거부당한 정준에게도배 속 아이라도 애 죽이는 게 어디 쉬운가? 자신들도 애 낳는 게 무섭지만 나 - P14

름 고심해 애 낳기를 결정했는데, 고등학생이 무슨 애를 낳고 키우냐? 학교와남들도 모자라 아버지들에게까지 손가락질받는 영주와 현이에게도,
자식 잘못 키웠다 욕하는 남들은 그렇다 치자, 죽자사자 키워놓은 자식에게마저도 아버지가 해준 게 뭐 있냐? 이제부터 내 인생 간섭 마라! 온갖 악담을 듣고 무너지는 아버지들 방호식과 정인권은 물론,
부모 형제 남편 자식에게까지 맘적으로 버려지고 오갈 데 없어 죽고 싶은 맘으로 마지막 실오라기라도 붙잡듯 찾아온 베프(미란의 입장에선) 은희에게 위로는커녕 귀찮고 이기적인 년이란 소릴 들은 미란과어느 날 아무 영문도 모르고 엄마와 아빠를 떠나 낯선 제주 할머니 집에 떨궈진 일곱 살 은기까지.
작가는 무너지지 마라, 끝나지 않았다. 살아 있다. 행복하라, 응원하고 싶었다.


따뜻한 제주, 생동감 넘치는 제주 오일장, 차고 거친 바다를 배경으로 14명의시고 달고 쓰고 떫은 인생 이야기를 옴니버스라는 압축된 포맷에 서정적이고도애잔하게, 때론 신나고 시원하고 세련되게, 전하려 한다. 여러 편의 영화를 이어보는 것 같은 재미에, 뭉클한 감동까지, 욕심내본다. - P15

이동석 (남, 사십 대 초반, 트럭 만물상)

제주 태생. 엄마 집이 있지만, 가지 않고, 트럭 하나에 의지해, 야채며 옷가지,
살림살이 등을 되는 대로 싣고 제주 인근 흩어진 섬들을 오가며 섬사람들에게장사해 먹고, 잠도 트럭에서 잔다. 섬마을 할머니 손님들과 시장서 일하는 초등학교 선배 은희, 인권하고나 웃고 농담을 주고받을까 대개는 별말이 없고 투박하고, 거칠다. 남들은 그를 두고 태생이 거친 놈이라 하지만, 모르는 소리. 그 역시 남들처럼 평화롭고 싶었고, 깔깔대고 웃고 싶었고, 해맑게 장난치고 싶었고,
행복하고 싶었다. 누나 동희가 가난에 떠밀려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해녀가 되어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바다에서 지랄 같은 전복 따다 죽지만 않았어도(파도에 떠밀려 온 누나의 시신, 그 손엔 머리통만한 튼실한 전복이 쥐어져 있었다. 저놈이 누날 죽었군. 그는 이후 전복을 안 먹는다), 엄마 옥동이 배꾼인 아버지가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서 죽자 기다렸단 듯이 아버지 친구인 선주에게 재가만 하지 않았더라도, 제 엄마 옥동을 식모라고 부르고, 자신을 그지새끼라고 부르는 이복형제(제 또래와 한 살 위인 형이 있었다)들에게 허구한 날 죽게 맞지만 않았어도, 그리고 참 지켜주고 싶었던 첫사랑 그 기집애가 내 순정을 열여덟 그때, 서른둘 그때, 두 번씩이나 작신 짓밟아버리지만 않았어도.. 과연 내가 지금 이 모양 이꼴일까?  - P16

민선아 (여, 삼십 대 후반)

서울 태생. 말수 적고 차분하다. 태훈은 그녀의 웃음이 이뻐 반했다지만, 자신은 모르겠다. 어려선 웃음이, 애교가 많았던 것도 같다. 엄마가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을 버리기 전까지는 일곱 살 유치원을 마치고 나온 선아를 엄마가다짜고짜 차에 태웠다. 아빠에게 간다고 했다. 대체 아빠가 어딨다는 건지, 아빠는 벌써 한 달도 넘게 집에 오지 않았는데.. 엄마는 성인오락실(도박장) 앞에 차를 세우고 선아에게 말했다. ‘오락실 들어가서 아빠한테 집에 가자 그래‘ 선아는엄마가 시키는 대로 오락실로 들어갔다. 담배 연기 자욱한 그곳에서 아빠가 배팅에 열을 내며 오락기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선아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엄마,
아빠 여깄어!‘ 근데 엄마 차가 없다. 엄마 차가 있던 자리엔 덩그러니 선아의 짐가방과 아빠의 짐가방만이 놓여 있었다. 선아는 그렇게 엄마에게 버려졌다. 아빠는 이후 선아와 살아보려고 애썼다. 엄마처럼 밥도 해주고, 학교도 보내주고,
일도 하고. 그런데 뭐든 실패했다. 그러다 아버지 고향인 제주 삼촌네로 갔다.  - P18

정은희 (여, 사십 대 후반, 생선가게 운영)

농사짓는 부모 밑에서 4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모슬포시장에서 가장 돈이 많은 장사꾼에 억척스럽고 성실하고 똑똑하고 흥도 많지만, 자수성가한 까닭에 세상에서 자신이 젤 잘났단 생각도 많다(현재 제주시와 서귀포, 모슬포점에 생선가게 운영, 그리고 이십 대에 산 서귀포 땅에 건물이 올려지면서, 동네에서 준갑부가 되었다). 아직도 처녀. 그녀의 삶은 늘 생선처럼 비리고, 생선대가리 치는 것만큼잔인했다. 딸년은 중학교만 나와도 된다는 아버지에게 반항해 16살에 농약을마실 때까지만 해도 농약은 미란의 아이디어였다. 제 집의 농약을 물에 두어 방울 타주며, 너는 이걸 마셔라, 나는 니네 집에 가, 니가 고등학교 못 가 농약 먹어 눈이 뒤집혔다고 할 테니. 은희는 미란이 시키는 대로 농약물을 마셨고, 미란에게 이끌려 온 아버진울며 은희를 업고 뛰었다. 미란이 은희 아버지 뒤를 쫓아 뛰며, ‘다 아저씨 잘못이다, 은희는 죽을 거다, 이 동네에서 고등학교 못 가는 애는 은희밖에 없다, 은희는 살아나도 챙피해 못 살 거다‘, 울며 악담을 퍼부으며 쇼를 했다. 작전은 성공. 고등학교 입학, 미란과는그렇게 절친이 됐다. 젠장할, 이 기억만 없었어도 코 푼 휴지처럼 버려버릴 년인데..)  - P25

최한수 (남, 사십대 후반, 모슬포농협 지점상)

어려선 가난이 싫어 욱하고 괜한 쌈질도 했지만, 다 지난 일, 지금은 세상 누구보다 성실하다. 돈 아끼려 혼자 밥해 먹고 술 담배 안 하고 집안 살림도 잘하고 누가 봐도 선한 웃음에 포근하고 성실한 샐러리맨, 아내와 자식 사랑이 끔찍하다. 2남 3녀 중 장남, 아버지는 술주정뱅이로 그가 초등학교 때 막내가 두 살때 도랑에 빠져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남의 집 땅에 깨농사를 지어 살림을 건사했다. 그는 공부를 잘해 서울로 유학을 갔다. 동생들은 그의 뒷바라질 위해 허리아픈 어머니 봉양을 위해 모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육지의 공장으로 식당으로일찍이 일자릴 찾아 나섰다(큰어동생만 제주에 남아, 남편과 성실히 일해 현재 말 농장을 하며 잘산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막노동하며 혼자사는 막내가 모시고 산다), 동생들은 그가 대학을 나오면 퍽이나 잘될 줄 알았을 거다. 자신들의 삶도 다 돌봐주고, 어머니도 잘 모시고. 그러나, 사는 게 어디 그리 녹록한가. 그는 대학 가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장학금을 매번 받지 못했고(제주 우등생은 서울에선 그저 그런 위치란 걸 대학가 알았다), 대학 일 학년 때 미팅에서 만난 미진과 결혼해선 맞벌이를 해 학자금 융자 결혼자금 융자받은 거 갚기에 허덕였고, 딸 보람이가 골에 재능을 보이고부터는 더더욱이 사는 게 팍팍했다. 보람이는, 어려서 자신의 골프채를 갖고 놀더니(그에게 골프는 고객 관리차 배운 거지, 허영은 없었다) 남다른 끼를 발휘해 초등학교 때는 전국에서 개최하는 모든 경기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는 아내 미진과 딸을 골프 유학을 위해 해외로 보내고 기러기아빠가 됐다(사실 그는 보람이가 골프를 그만뒀으면 했다. 근데 어린 놈이 일주일을 굶어가며, 유학을 보내달라고 떼쓰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는 그가 포기할 수가 없게됐다. 투자한 게 얼만데, 가능성만 있다면, 죽기 살기로 해봐야 하지 않나. 만약 보람이가 박인비처럼 된다면! 그의 동생들, 그의 어머니의 삶도 하루아침에 보상되지않을까. 근데, 미국으로 간 보람이는 중학교 땐 승승장구하더니 고등학교 들어서서 갑자기 성적이 곤두박질쳐 현재는 프로 2부에 있다. - P27

방영주 (여, 열여덟 살, 고등학생)

제주생, 영주는 제주가 갑갑하다. 거친 바람도, 사시사철 생선반찬도 싹 다 지겹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동네가 진저리 난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빠가 원래 망나니였단 얘기, 결국 엄마가 애 버리고 도망갔단 얘기를 모두가 알고 있는 건지. 집밖에 나서서 학교에 갈 때까지 인사만 백번 해야 하는 이 촌바닥.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다. 그리고 곧 그날이 다가온다.
이제 곧 스무 살이고, 1년만 더 버티면 서울대 의대 입학! 제주완 안녕이다! 다들 영주가 바득바득 서울대에 가려는 이유가 그곳으로 도망간 엄마 때문이라고추측하지만, 그건 자신을 모르는 소리. 영주의 솔직한 맘은 서울대 합격이라는합당한 이유로, 아빠와 멀어지고 싶었다. 어려선 아빠에게마저 버려질까 두려워 언제나 완벽한 딸이려고 노력했고, 커가면서는 딸 하나 잘 키우려고 갈수록궁상맞아지는 아빠가 보기 싫어 밖으로 나돌았다. 허술한 아빠 백업하느라 영주 자신도 고생깨나 했는데, 아빠가 딸 독립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하니심사가 뒤틀린다. 잘됐지 뭐, 대학 가면 각자 살면 되겠네?! 서울대가 허무맹랑한 꿈은 아닌 게, 영주는 부동의 전교 1등(가끔 현이가 1등을 할 때도 있지만)이다.
그렇다고 타에 모범이 되는 학생은 아니고, 뒤에선 호박씨 까고 잘 노는 날라리다. 반장인 게 학생부에 유리해서 하는 거지, 뒷골목 우두머리가 제 옷이다.  - P33

정현 (남, 열여덟 살, 고등학생)

제주생, 사람들은 나약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현은 거칠고 힘만 센 게 강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유부단하단 평가도 못마땅하다. 느긋하고, 생각이 많고, 섬세할 뿐. 부모가 초등학교 때 이혼한 후 마초 같은 아빠와 단둘이 살며, 아빠에게 매일같이 ‘이 샌님 새끼!‘란 말을 귀에 인이 박이게 들었지만, 현은 속으 - P34

로 코웃음을 쳤다. 자칭 남자라고 하는 아빠가 늘 시끄럽고 쌍욕을 입에 달고살고 새끼가 아니면 문장을 잇질 못하는 아빠가 현이 눈엔 그저 무식해 보였다. 아빠는 순대장사가 자랑스럽다고 하지만 그것도 현이 눈엔 자기 위안 같았다. 제주 오일장을 다 돌며 생고생하는 것에 비해 버는 건 푼돈이고, 볼품없고,
냄새나고, 춥고 더울 때에도 난장에서 일하는 게 뭐가 좋아. 게다가 시장에만 가면 눈치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아들 자랑을 하는 통에 장 볼 때 아니면 시장에안 간다. 너무도 비루한 아빠 인생에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 결국은 엄마도 그런 아빠에게 지쳐 떠났으니까. 그래서 현은 아빠가 남자답지 못하다며 깔아뭉개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었다. 근데, 영주가
‘너 맨날 여기서 나 기다리지, 이 샌님아‘ 했을 땐 넘어가지 못했다. 어디서 그런용기가 나왔는지, 샌님이란 말에 발끈해선, 대뜸 몸을 뻗어 키스해버렸다. 당황한 영주가 ‘너 지금 무슨 뜻이야?‘ 했을 때에도, 담담하게 ‘좋다는 뜻이다‘ 해버렸다. 그때 알았다. 아빠 말이 틀렸네, 나 샌님 아니네. 키스도, 자자는 말도, 영주가 예쁘단 말도, 사랑한단 말도 현이가 먼저 했다. 이상하게 영주 앞에서만큼은초인적인 힘이 생겨났다. 친구들도 어딘가 달라졌다고 했다.  - P35

정인권 (남, 사십 대 후반, 오일장 순대국밥집 운영)

욱하는 성질에 말도 거칠지만, 그건 못 배워 그런 것일 뿐, 천성은 그렇지 않다. 나름 인정도 많고, 의리도 있다. 호식에게까지 줄 의리는 없지만. 제주 지역오일장에서 순댓국을 팔고, 오일장이 없는 날은 가내수공업(도축장 가서 내장 받아와 손질하고, 부속 야채들 장 보고, 다듬고, 순대를 삶아내는 것까지 오롯이 그의 몫이다)으로 순대를 만들어, 근처 순대국밥집에 순대를 공급한다. 그가 첨부터 고단하고 성실한 이 삶을 살아온 건 아니다. 대대로 그의 집안은 오일장에서 순댓국을 팔아왔다. 그의 부모도 당연히 그랬다. 가난의 대물림, 아무리 순대를 팔고 썰어도 나아지지 않는 살림 형편. 그는 어릴 때 그 가난이 싫어,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 깡패가 됐다. 주먹이 세고,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맷집과 독종 기질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근접을 못 했다. 덕분에 서귀포 제주시 일대 나이트클럽 기도들의 우두머리가 됐다. 승승장구처럼 보였다. 멋진 오픈카도 타봤으니... (아내,
현이엄마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으로, 죽어라 그를 쫓아다녔던 순정 많은 여자였다. 그래서, 그냥 동거해 살았는데, 아내가 그 몰래 결혼 신고를 하고 애(현이)를 낳아 살고 있 - P39

방호식 (남, 사십대 후반, 얼음가게 운영)

살갑고, 인정 많다(인권에게 거칠지만). 가파도 출신. 부모님은 보리농사로 겨우 먹고살았다. 아래로 여동생 셋이 있지만, 모두 중졸, 그만 남자라는 이유로 서귀포에서 학교를 다녔다. 은희와 결혼을 약속하고, 부모님에게 인사하러 함께가파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은희는 결혼을 물렀다. 결혼하면 먹여 살려야할 가족이 더 느는 거네, 현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나 같아도 싫다, 너같이 가난한 새끼.‘ 옆에서 인권이 아프게 찔렀다. 그렇게 호식의 마음에 가난이 사무쳐 한탕의 유혹이 자라난 걸 그땐 몰랐다. 다시 여잘 만나 결혼해 애까지 낳고 그럭저럭 살면서도, 돈 좀 모인다 싶으면 주식으로 날려먹고, 사업에 투자했다 날려먹고, 그러다 결국 도박에까지 손을 댔고, 그 일로 인권에게 죽도록 맞으면서도 호식은 정신을 못 차렸다. 어차피 끝난 인생이란 생각이 더더더 그를 막다른 길로이끌었다. 근데,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오니, 세 살배기 영주가 울며 하는 말, ‘엄마 도망갔어, 잡아와!‘ 호식은 그때 잠깐, 영주를 두고 도망가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엎어져 잠을 잤는데, 일어나 보니, 영주가 빈 밥솥을 긁고 있었다. 정신이드는 순간이었다. 저 앨 살려야 한다. 근데, 어떻게 살리나, 일을 해야 돈을 벌 텐데 애를 맡겨둘 데가 없으니. 그는 눈이 펄펄 오는 날, 영주를 데리고 깡패질 하던 인권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 P42

양달이 (여, 스물아홉)

두 살 터울 농아 동생 별이 (수어로 대화하거나 말을 크게 해 대화한다)와 시장에서 커피장사를 하고, 해녀 일(이제 1년 됐다. 초보), 은희네 생선가게 일, 영옥의 실내포장마차 일 뭐든 다 한다. 부지런하고 밝다. 선한 부모님 두 분은 모두 농아로 푸릉마을의 돌담 쌓는 일을 한다. 동갑내기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닌 정준 동생 기준이 자길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고등학교 때 자신의친구랑 사귄 걸 알아 맘이 안 간다. 세상에서 부모님 담으로 별이가 젤 좋고, 별이와 노는 게 늘 신나고 재밌다. 남들은 별이랑 언제나 같이 살 수 있는 게 아니니, 자매라도 적당히 놀라 하지만, 달이는 결혼해도 별이랑 앞뒷집에 살 생각이다. 문제없다. 그러나 정말 문제없을까. 가끔 혼자 있고 싶어지는 마음은 대체 뭔지.. 어쨌든 그 맘은 혼자만 알았으면 한다. - P48

양별이 (여, 스물일곱, 커피장사)

상냥하고, 맑은 웃음만큼 생각도 밝고 긍정적이다. 달이별이란 카페를 내고싶은 게 꿈이다. 시간나면 그래서 달이와 함께 카페 보러 다니는 게 취미다. 둘은 쌍둥이처럼 행동도 웃음도 하는 짓도 닮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농아라고 왠지 불쌍한 눈빛이지만, 그건 괜한 걱정. 별이 자신은 농아라서 별로 불편한 게없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달이성(언니)이 있으니 충분히 사랑받고 있고, 충분히행복하다 여긴다. 근데 기준이가 짜증 난다. 달이를 빼앗아 갈까 봐서가 아니라,
달이가 물질하느라 바다 들어가는 게 늘 걱정인데 (그래서 달이가 바다 들어가면 늘함께 나가, 달이가 물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달일 좋아하는 기준도 바닷일 하는선원인 게, 맘에 안 든다. 달이의 짝은 육지에서 일하는 남자였으면 좋겠다. 바다에서 일할 거면 차라리 묵직한 정준 오빠 같은 사람이거나. - P48

박기준 (남, 스물아홉, 정준의 배에서 같이 일한다)

어려선 양아치 같았지만, 지금은 맘잡고, 형 일을 돕는다. 물론 맘 잡은 지 일년도 안 됐지만, 어려선 일 안 하고 술이나 먹고 돈이나 쓰러 다니고 여자들이나따라다녔다. 그러다 정준이가 기준이 땜에 속상하단 얘길 들은 동석이가 반 죽게 자신을 패며 말했다. 다시, 노는 거 눈에 띄면 죽는다. 그래서, 정준의 배에 올랐다. 첨엔 동석이 무서워 그랬지만, 지금은 정준이가 존경스러워 일한다. 근데형이 속을 알 수 없는 영옥일 좋아하다니, 별로다. 그리고 달인 자신이 자길 좋아한다 여기지만, 사실과 다르다. 난 별이가 좋다. 근데, 왠지 말을 못 하겠다. 사랑은 성격도 변하게 하는 건지, 부끄럽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 P49

용어정리

씬 장면(Scene)이라는 의미. 같은 장소, 같은 시간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동이나 대사가 한 씬을 구성한다.

C.U
클로즈업, 배경이나 인물의 일부를 화면에 크게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점프컷
연속성이 없는 두 장면을 붙이는 편집 방식이다.

인서트
화면의 특정 동작이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한 화면 인서트 화면이 없어도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으나 인서트를 삽입함으로써 상황이 명확해지는 한편 스토리가 강조된다.

(E)
대사와 음악을 제외한 효과음(Effect)을 뜻하며, 보통 등장인물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나는 경우에 사용한다.
- P50

플래시백
회상을 나타내는 장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인과를 설명할 때 쓰이기도 하고, 인물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플래시컷
화면과 화면 사이에 들어가는 순간적인 장면, 극적인 인상이나 충격 효과를 주기 위해 삽입되는 매우 짧은 화면을 지칭한다.

F.I.
페이드인(Fade-In). 어두웠던 화면이 점차 밝아지는 상태를 말한다.

F.O.
페이드아웃(Fade-Out), 화면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장면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N)
내레이션을 지칭하는 용어로, 장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나타낸다

몽타주
따로따로 편집된 장면들을 짧게 끊어서 붙인 화면을 말한다.

(O.L)
오버랩(Overlap), 현재의 화면이 사라지면서 뒤의 화면으로 바뀌는 기법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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