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엄청난 절대악의 현상은 평범성,
즉 생각하기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판단하기의 무능에서 비롯된다.

그는 노인이었고 전통적인 유대인의 창 없는 모자를쓰고 있었고, 작고 아주 약해 보였으며, 듬성듬성 난 흰머리와 수염을길렀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이름은 유명했으며, 사람들은 검찰 측이 왜 그와 더불어 그 그림을 시작하기를원했는지 이해했다. 그는 1938년 11월 7일에 17세의 나이로 파리에 있는 독일 대사관으로 걸어 들어가 3등 서기관인 젊은 참사관 에른스트폰 라트를 총으로 살해한 헤르셀 그린즈의 아버지 진델 그린즈판이었다. 이 암살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학살극, 즉 최종 해결책의 사실상 서곡인 이른바 11월 9일의 유리의 밤을 촉발시켰는데, 이 일이 일어난 것과 아이히만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린즈의 행위의 동기에대해서는 명료하게 밝혀진 적이 없었는데, 검찰이 함께 법정에 세운 그의 형은 이상할 정도로 이 점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은 그린즈판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던 약 1만 7000명의 폴란드계 유대인을1938년 10월의 마지막 며칠 동안 독일 영토에서 추방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고 법정은 당연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설명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일반에게 알려지고 있다. 헤르셀 그린스판은 학교를 끝까지 다닐 - P317

수 없었던 정신병자였고, 수년 동안 파리와 브뤼셀에 있는 학교의 문을두드려보았지만 두 곳 모두에서 쫓겨났다. 그를 재판한 프랑스 법정에서 그의 변호사는 동성애 관계에 대한 혼란스런 이야기를 도입했고, 그를 인도받은 독일인들은 그를 결코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았다는 소문이 있다. 마치 형법을 위반한 유대인은남겨두었다는 ‘아우슈비츠의 역설‘을 입증하는 것처럼.) 폰 라트는 상당히 부적합한 희생자였다. 그는 자신의 반 나치스적 견해와 유대인에대한 동정심 때문에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의 동성애 이야기는 아마도 게슈타포가 조작한 것 같다. 그린즈판은 파리에 있던 게슈타포 요원들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사용된 도구로 행동했을 수 있다. 게슈타포는 일석이조(독일에서 대량학살을 일으킬 구실을 만들고 동시에나치 정권의 반대자를 제거하는 것)를 노렸을 수 있는데, 그들은 이 두길을 동시에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즉 폰 라트를 유대인 소년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동성애자라고 중상하면서 동시에 그를 ‘세계 유대인‘의 희생자요 순교자로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 P318

그게 어찌 된 간에 1938년 가을에 폴란드 정부가 독일에 있는 모든폴란드계 유대인 거주자들이 10월 29일부로 국적을 상실할 것이라고포고한 것은 사실이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독일 정부가 이들 유대인을 폴란드로 추방하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한때문이었던 것 같다. 진델 그린즈판과 같은 사람이 그러한 포고가 있었다는 것을 과연 알기라도 했을까 하는 점은 단순한 의심 이상의 것이다. 그는 1911년에 25세의 젊은이로 독일로 가서 하노버에 잡화점을열었고, 거기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여덟 자녀를 낳았다. 1938년 파국이다가왔을 때 그는 독일에서 27년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서류를 변경하여 귀화를신청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와 검찰이 그에게 한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말을 아껴가며 윤색하지 않고 분명히 그리고 확실하게 말했다. - P318

"1938년 10월 27일, 목요일 밤 8시에 경찰이 와서 우리들에게 7번지역 (경찰서]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신은 바로 되돌아 올 수 있으니 여권 외에는 아무것도 지참하지 말고 오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린스판은 자신의 가족, 아들과 딸과 아내와 함께 갔다. 그가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부는 앉고 일부는 서서 울고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경찰은 ‘사인해, 사인해, 사인해‘ 라고 소리지르고 있었고…… 저는 사인을 해야 했습니다. 모두가 그랬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사인을 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내 기억에 게르숀 질베르였던 것 같은데, 그는 구석에서 24시간 동안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연주회장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마을 전체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고 약 600명가량 되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금요일 밤까지 약 24시간 정도 대기했는데……맞아요. 금요일 밤까지였어요.....그러고는 그들은 우리를 경찰 트럭에 죄수를싣는 화물차에 차량 한 대당 약 20명가량을 태워 기차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리에는 ‘유대인놈들을 팔레스타인으로!‘라고 외치는 사람들 - P319

싣는 화물차에 자랑습니다. 거리에는 ‘유대인놈들을 팔레스타인으로!‘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 검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기차로 독일과 폴란드 국경에 있는 노이벤센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도착한것은 안식일 아침 6시였습니다. 라이프치히, 쾰른, 뒤셀도르프, 에센비더펠트, 브레멘 등에서 온 기차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약 2만 명가량 되었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인 10월 29일이었습니다……. 국경에 닿았을 때 우리는 누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누가 10마르크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검색당했습니다. 차액은 뺏겼지요. 이것이독일 법이었습니다. 10마르크 이상은 독일 밖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는것이지요. 독일인들은 ‘당신들이 올 때 그 이상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까 그 이상을 가지고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폴란드 국경으로 1마일을 조금 넘게 걸어가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폴란드 영토로 몰래 들어가기를 독일인은 원했기 때문이었다. "친위대 요원들이 우리에게,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채찍질을 해댔고, 길에 - P319

피를 쏟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짐가방을 빼앗았고, 우리를아주 야만스럽게 대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독일인들의 포악한 야수성을 처음으로 본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달려! 달려!‘ 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저는 얻어맞고 도랑에 빠졌습니다. 제아들이 저를 도와주며 달려요 아빠, 달려요. 아니면 죽게 되요!‘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출입이 자유로운 국경에 도달하자…….… 여자들이 먼저 갔지요. 폴란드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어요. 그들은 폴란드 장군과 우리의 서류를 검토할 몇몇 관리들을 불렀어요.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폴란드 시민이며, 우리가 특별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를 들여보내기로 결정났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을 약 6000명의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데려다 주었는데, 우리는 1만 2000명이었어요. 비는 심하게내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졸도할 정도였어요. 도처에서 노인들이 보였어요.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당했어요. 음식은 없었고, 목요일 이후로우리는 아무것도 먹질 못했지요…"  - P320

그들은 군사기지로 끌려가 "다른 곳에는 방이 없어 마구간으로 넣어졌다. "내 생각에 그날은 폴란드에서의 둘째 날이었던 것 같아요. 첫째 날에는 빵을 실은 트럭이 포즈난에서 왔었는데 그날은 일요일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나는 프랑스로 편지를 썼지요…… 내 아들에게 ‘독일로는 편지를 더 이상 쓰지마라. 우리는 이제 즈바스진에 있다‘고 말이지요."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아마 10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을 24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무자비하고 아무 필요도 없었던 이 파괴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어리석게도 모든 사람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은 그가 법정에서 하루종일 이야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끝없는 심리 속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곧 알게 되었다. 이이야기에는 (적어도 시처럼 변형이 이루어지는 영역이 아니라면) 오직의로운 사람만이 소유하고 있는 마음의 있는 그대로 직접 드러나는 결백성, 영혼의 순수성을 필요로 했다. 이 이전과 이후 어느 누구도 진델 - P320

그린즈판의 빛나는 정직성에 필적하지는 못했다.
그린즈판의 증언이 극적인 순간‘을 조금이라도 닮은 어떤 것을 만들어 냈다고는 아무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순간이 몇 주일 후에 나타났는데, 그 순간은 바로 란다우 판사가 재판 진행을 정상적인형사재판 절차에 따르도록 거의 필사적인 시도를 했을 때 예기치 않게일어났다. 증언대에는 시인이자 저술가인 아바 코너가 있었는데,
그는 증언을 했다기보다는 대중들에게 익숙하게 연설을 하고 또 청중으로부터 방해받는 데 분개한 사람처럼 쉽게 방청석을 향해 연설했다.
그는 주심 재판관으로부터 간결하게 대답하도록 주문을 받았는데, 그는 여기에 대해 분명히 싫은 내색을 나타냈다. 자신의 증인을 옹호하려는 하우스너 씨는 ‘법정이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불평을 할 수 없다는말을 들었다. 이것도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처럼 약간 긴장이 조성된 무렵에 증인은 우연히 독일군 야전 하사관(Feltwebel) 안톤 슈미트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 P321

이 이름이 청중들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이름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야드 바셈이 수년 전 히브리어판 『회보』에슈미트에 대한 이야기를 썼고 미국에 있는 수많은 이디시어로 된 신문에서 그 기사를 받아셨기 때문이다. 안톤 슈미트는 폴란드에서 부대 대열에서 이탈한 독일 군인들을 모으는 순찰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일을 하던 도중 그는 유대인 지하요원들과 부딪히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저명한 요원인 코브너 씨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위조 서류와 군 트럭을 제공하면서 유대인 유격대원들을 도와주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돈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 일은1941년 10월에서 1942년 3월까지 5개월 동안 지속되었다가 안톤 슈미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검찰 측이 이 이야기를 이끌어 낸 것은 코브너 씨가 아이히만의 이름을 슈미트에게서 처음으로 들었다고 말했기때문인데, 슈미트는 코브너 씨에게 ‘모든 것을 조정한 사람은 아이히만이라는 소문을 군대에서 들었다고 했다.)외부로부터, 즉 비유대인 세계로부터 받은 도움이 언급된 것은 이번 - P321

이 결코 처음은 아니었다. 검찰 측이 "당신은 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을 증인들에게 한 것과 동일한 빈도로 판사 할레비는 증인들에게 "유대인은 어떤 도움을 받은 적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 대답은 다양하고도 불확정적인 것("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반대했어요"라든가 기독교 가정으로 숨은 유대인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
전체 1만 3000명 가운데 대여섯 정도)이었지만, 대체로 상황은 놀랍게도 폴란드가 다른 동부 유럽 국가들보다는 나았다. (불가리아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인이 없었다는 점을 앞서 말했다.) 현재 폴란드 여인과 결혼하여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한 유대인은 전쟁 기간 동안 자기 아내가어떻게 자기와 12명의 다른 유대인을 숨겨주었는지 증언했다. 다른 사람은 전쟁 전부터 사귀어 온 한 기독교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수용소에서 이 기독교인 친구에게로 탈출하여 도움을 받았다. 이 기독교인친구는 나중에 유대인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 P322

한 증인은폴란드 지하조직이 많은 유대인에게 무기를 공급했고, 또 수천 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폴란드인 가정으로 데려가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했다. 그 위험은 엄청나게 컸다. 한 폴란드인 가정은 여섯 살 난 유대인 여자아이를 입양한 이유로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모든 가족이 몰살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유의 이야기가 독일인에 대하여 들려진 처음이자 마지막 경우는 슈미트에 대한 이야기였다. 독일인을 포함한 다른 이야기들은 단지 기록으로만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특정한 명령에 사보타주함으로써 한 독일 장교가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인데, 그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문제가 힘러와 보르만 사이의 서신에 언급될 정도로 아주 심각한 것으로 여겼다.
코브너가 독일 하사관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 말하는 데 걸린 몇분 동안 쉿 하는 소리와 함께 법정이 조용해졌다. 이것은 마치 청중들이 안톤 슈미트라는 이름의 사나이를 기리기 위해 통상적인 2분간의 묵념을 하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 2분 동안 칠흑 같 - P322

은 알 수 없는 암흑 한가운데 갑작스런 섬광이 비친 것처럼 명백히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어떤 생각(만일 이러한 이야기가 더 많이 이야기될 수 있기만 한다면, 오늘 이 법정이 이스라엘에 있건 독일에 있건 유럽 어느 곳에 있건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에 있건 상관없이, 모든것이 얼마나 완전히 달라질 것인가)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런 이야기가 곤혹스러울 만큼 부족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으며, 이이유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해왔다. 나는 이러한 이유의 요지를, 독일에서 간행된 전쟁에 대한 나름대로 성실하게 쓴 몇몇 비망록들 가운데 한 편에서 나온 표현을 빌려 말해보겠다. 러시아 전선에서 복무한독일 의무관 외과의사인 페터 밤은 『보이지 않는 국기』(UnsichtbareFlagge, 1952)에서 세바스토폴에서 있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말한다. 일반 병사들과 분별하기 위해 그가 ‘그밖의 사람들‘이라고 부른 친위대 이동 학살대에 의해 유대인들은 징집되었다. 이 유대인들의 품위있는 모습에 대해 이 책은 칭송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이전의 일반 우편이 있었던 감옥의 제한된 지역으로 투옥되었는데, 그 인근에는 장교 숙소가 있었고 거기에 페터 밤의 막사가 있었다. 이후 그들은 이동가스차량에 탑승했는데, 거기서 그들은 몇 분이 지나 죽었고, 운전사는즉시 시신을 시외로 운송하여 큰 웅덩이 속으로 하역했다.  - P323

망각의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위해 단 한 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 불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아니다. 만일그러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진다면, 이는 오늘의 독일을 위해서, 단지 독일의 해외에서의 위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슬프게도 혼란스러운내면적 조건을 위해서도 실질적으로 아주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단순하며 모든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교훈이란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최종 해결책이 제안된 나라들의 교훈은 대부분이 지 - P324

역에서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일이 어디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 지구가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남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도 않고 또 그 이상의 것이 합리적으로 요구되지도 않는다. - P325

1945년 11월에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을 때 아이히만의 이름이 거북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에 비슬리케니는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아이히만의 유죄에 대한확증적인 증언을 했는데, 여기에 따라 아이히만은 사라지는 편이 더 낫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수감자의 도움을 받아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뤼네부르거 하이데로 갔는데, 그곳은 함부르크에서 5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황야였다. 거기서 그의 동료 수감자 중 한 형제가 그에게 벌채 노동자로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거기서 오토 헤닝거라는 이름으로 4년간 머물렀는데 아마도 거기서 그는 죽도록 지겨웠던 것 같다. 1950년 초 그는 친위대 퇴역군인들의 비밀조직인 오데사(ODESSA)와 연락하는 데 성공하여 그해 5월 오스트리아를 거쳐이탈리아로 넘어갔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정체를 다 알고 있는 한 프란체스코 신부가 그에게 리하르트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망명자 여권을 만들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보내주었다. 그는 7월 중순 그곳에 도착하여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가톨릭 신자, 총각, 무국적자, 나이는 37세(실제 나이보다 일곱 살 어림)인 리카르도 클레멘트로 신분증과 노동허가를 받았다. - P330

그는 여전히 조심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의 아내에게 자신의 친필로 편지를 써서 ‘그녀의 아이들의 삼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는 여러 거친 일 (외판원, 세탁소 일, 토끼 농장의 인부)을 했으나 모두임금이 형편이 없었는데, 1952년 여름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왔다.
(아이히만의 부인은 당시 오스트리아 주민이었지만 스위스 취리히에서독일 여권을 취득했는데, 이름은 본명을 사용했고 아이히만의 ‘이혼녀‘
라고 되어 있었다.) 그녀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하자마자 아이히만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외곽에 있는 수아레즈에 있는 메르세데스벤츠 공장에서 처음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었는데, 처음에는 기능공으로, 나중에는 공장장으로 일했다. 넷째 아이가 태어나자 그는 그녀와 재혼했는데, 아마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실제 - P330

 그리고 1959년 아이히만의 양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리고 1년이 지나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린츠에서 발간된 신문의 부고에는 후손의 이름으로 아이히만 부인의이름이 실려 있었는데, 이는 이혼과 재혼의 모든 이야기와 모순되는 것이었다. 1960년 초 아이히만이 체포되기 몇 달 전 그와 그의 아이들은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난한 외곽지역에 원시적인 벽돌집 건축을 완성했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이곳에 아이히만의 가족은 정착했다. 그들은아주 가난했고 아이히만은 끔직한 삶을 영위했음이 분명했다. 아이들조차도 이러한 삶에 대한 보상이 되질 못했다. 그 아이들은 "교육을 받는 데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재능을 발전시킬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다."
아이히만의 유일한 보상은 자신의 정체를 이미 드러내보인 나치스광역단체 요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데 있었다. 1955년에는 이러한일이 마침내 과거 무장 친위대 요원인 네덜란드의 언론인 빌렘 S. 자센과의 인터뷰로 이어졌는데, 자센은 전쟁기간 동안 자신의 네덜란드 국적을 버리고 독일 여권을 취득한 자로 나중에 벨기에의 궐석재판에서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 P331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수수께끼는 이스라엘 정보부가 아이히만의 은신체를 어떻게 알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해서 더 일찍 알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이 실제로 이러한 조사를 수년간 진행해 왔다는 전제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그렇게 실제로 했는가는 미심쩍어 보인다.
그런데 체포자의 신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도 남기고 있지 않다.
사적인 ‘복수자들‘이 했다는 이야기는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정보부에의해 발견되었다"고 벤구리온이 1960년 5월 23일 이스라엘 국회에 보고하여 환호를 받은 것과 처음부터 배치되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을 그곳에서 데려온 엘알 비행기의 주조종사인 츠비 토하르와 아르헨티나항공사의 관리인 야드 시모니를 지방법원과 항소심에 증인으로 소환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벤구리온의 선언에 대해 언급했다. 검찰총장은 수상이 ‘아이히만이 정보부에의해 발견되었다는 사실만을 인정‘했을 뿐, 그가 정부요원에 의해 납치되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반박했다. - P332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 30분, 아이히만은 늘 하던 대로 일터에서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하차하자마자 세 사람이 그를 체포하여 1분도 채 안 걸려, 대기하던 차로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외곽에 이미 세를 얻어 놓은 집으로 데려갔다. 어떤 약물이나 밧줄, 수갑 등도 사용하지 않았고, 아이히만은 이것이 전문적인 작업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으며, 어떠한 불필요한 폭력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는다치지 않은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즉각 독일어로 "나는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Ich bin Adolf Eichmann)고 말했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손에 잡혔다는 것을 안다"고 덧붙였다. (그는 어떤 신문에서 자기를 발견하면 체포하라는 벤구리온의 명령을 읽은 적이 있다고 나중에 설명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과 그들의 죄수를 이스라엘로 데려다 줄 엘알 비행기를 기다리는 8일 동안 아이히만은 침대에 묶여 있었다. 이것이 이 모든 일 가운데 그가 불평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가 체포된 다음날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이의가 없다는 것을 서면으로진술하도록 요구받았다.  - P335

물론 그 진술서는 미리 준비된 것이었고 그가해야 할 것이라고는 그것을 베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문장으로 쓰겠다고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는 다음에 보는 것과 같은데 다만 그 첫 문장은 준비된 진술서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진술인, 나, 아돌프 아이히만은, 이제 나의 진정한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에 재판을 더 이상 회피하려는 것이 불필요하게 되었음을 명백히 알게 되어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에 선언한다. 이에 따라 나는권위 있는 법정, 재판정에 서기 위해 이스라엘로 여행할 준비가 되었음을 명백히 한다. 내가 법적 자문을 받을 것을 명백히 이해했으며, [이다음부터는 미리 준비된 진술서를 베낀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서 있었던 나의 공적 활동의 마지막 수년간의 사실들에 대해 어떠한 윤색함도없이 기록하여, 미래의 세대들이 그 참된 실상을 알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나는 이 선언을 위협을 받거나 어떤 밀약에 따라 한 것이 아니라 내 - P335

그리고 이러한 죄책감 콤플렉스와 같은 사실이 제게는 말하자면 마치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과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내면생활의 핵심 속의 한 점이 되었고, 그 주위로 많은 생각들이 결정체처럼 얽혔지요. 이것이 바로.... 수색대가제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도...... 제가 도망가지 않은 이유입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죄책감에 대한이 대화를 한 후에 저는 잠적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것도 또한 제가 이 심문이 시작될 때 서면 진술서에서…… 제자신을 공개처형하라고 제안한 이유입니다. 저는 독일의 청년들로부터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제가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 젊은이들은 무엇보다도 지난 전쟁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들이 한 일들에 대해 결백하기 때문이죠." ‘지난 전쟁‘을 그는다른 맥락에서는 ‘독일제국에 강요된 전쟁‘이라고 여전히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는자기 자신을 버리고 독일로 자발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이 질문을그가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독일 법정이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다룰 때 필요한 ‘객관성‘을 아직도 상실한 채 있다고 대답했다. - P337

1961년 6월 29일, 공판이 시작된 4월 11일에서 10주일이 지나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증거제출을 끝냈고, 세르바티우스 박사가 피고를위해 변론을 개시했다. 8월 14일, 114회의 공판이 있은 다음 모든 심리가 종결되었다. 그리고 법정은 4개월 동안 휴정에 들어갔고 12월 11일에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다시 개정했다. 이틀 동안 5차례의 개정을 거듭하면서 세 판사가 244 항목으로 이루어진 판결문을 낭독했다. 검찰이주장한 ‘음모‘ 죄는 기각되었는데, 이 항목으로 그는 ‘주요 전범‘이 되어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자동적으로 책임지도록 되어있었다. 그들은 비록 몇몇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면소를 시키기는 했지만 15개의 기소 항목 모두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다른 죄목과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범했다. 즉 1)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살상함으로써 2)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신체적인 파멸로 이끄는상황으로 몰아감으로써, 3) 그들에게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해를 끼침‘으로써, 4)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유대인 여성들의 출산을 금하고 임신을 방해함으로써 이 민족을 파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유대인에 대해범죄를 저질렀다는 4가지 기소 항목에 따라 유죄판결을 내렸다.  - P339

 그의부서는 제국의 영역으로부터 3만 명의 집시들을 ‘소개‘하는 업무를 담당했는데, 그가 세부사항들을 아주 잘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은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집시들도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제거되기 위해 이송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는 결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유죄인 것과전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집시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유죄였다. 12항은 리디체에서 93명의 아이들을 이송한 것과 관계되는데, 리디체는 하이드리히의 암살 후 거주민이 학살당한 체코의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 아이들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지막 세 항목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범죄적‘이라고 분류된 네 개의조직 가운데 아이히만이 세 조직 (친위대, 보안대, 그리고 게슈타포)의요원인 사실에 대한 것이었다. (네 번째 조직인 나치스당 고위간부조직은 언급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아이히만이 당 지도자의 일원이 아니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1940년 이전에 그가 이 조직에 든 멤버십은 경미한 위반을 이유로 제한법규(20년)에 해당되었다. - P341

이러한 범죄들이 희생자의 수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범죄에 개입한 사람들의 숫자의 측면에서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졌기때문에,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증가한다."
판결문 낭독 다음에는 모든 일들이 관례대로 진행되었다. 검찰 측에서 일어나 한 차례 더 사형언도를 요구하는 긴 연설을 했는데, 죄를 경감시켜줄 상황이 아니라면 사형언도는 자동적이었다. 그리고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간결하게 응답했다. 피고는 ‘국가적행위‘를 수행했으며, 그에게 일어난 일은 미래에 어느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전 세계가 이 문제를 직면할 것이며, 아이히만은
‘희생양‘이었고, 현 정부는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국제법에 어긋나게도 그를 예루살렘 법정으로 내던졌다는 것이었다.  - P342

이후 아이히만의 최종 언도가 나왔다. 정의에 대한 그의 희망들은 무산되었다. 비록 그가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했다 하더라도 법정은 그를믿지 않았다. 법정은 그를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는 다른 수많은 낮은 계급의 전범들만큼 그렇게 지나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책임‘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며, 이제는 책임이있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설명해 달라고 소환할 수도 없다고 강력하게불만을 제기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살이나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자기들을 떠나거나, 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그는 ‘희생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세르바티우스가한 말을 확인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대신해서고통받아야 한다는 그의 깊은 확신‘이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 P3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