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히만은 ‘내면적 이주자‘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오늘에 와서 자기들은 사태를 ‘약화시키고‘ 또 ‘진짜 나치스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한 한 가지 목적에서 그 직책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공무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국무성 차관을 지냈고 1953년에서 1963년까지 서독 대법원 인사부장을 지낸 한스 글로브케 박사의 유명한 경우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이 재판 기간 동안 언급된 이 같은 범주에 속하는 유일한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처벌을 경감시키려는 활동들은 살펴볼 가치가 있다. 글로브케 박사는 히틀러가 권좌에오르기 전에 프러시아의 내무성에서 근무했는데 거기서 유대인 문제에대해 다소 성급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름을 바꾸기 위해 허가를 받으려고 신청한 사람들에게 ‘아리인족의 혈통이라는 증명‘을 요구한 첫번째 지시를 내렸다.  - P200

세르바티우스 박사의 질문보다 더 적절한 것은 아이히만이 이 일에대해 마지막 진술에서 한 말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반복했다. "그 누구도 제게 와서 제가 의무를 수행하면서 한 어떤 일에 대해서 저를 책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뤼버 감독조차도 그렇게 했다고 주장 못하지않습니까."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제게 와서 고통을 줄일 방도를 찾았습니다만 실제로 제가 그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뤼버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추구한 것은
‘고통을 줄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나치스가 인정한 기존의 범주들에 따라 고통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 범주들은 애초부터 독일계 유대인에 의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그리고 특권적 범주(폴란드계유대인과 구별하여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일반적인 유대인과 구별하여참전용사요 훈장 받은 유대인으로서, 최근에 귀화한 시민과 구별하여독일 태생의 선조를 가진 가족들로서 등등)를 수용함으로써 존경받는유대인 사회의 도덕적 붕괴는 시작되었다.  - P204

이처럼 아이히만이 본디오 빌라도처럼 느낄 수 있었던 기회는 많았지만,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그는 무엇이든 느낄 필요를 상실하게 되었다. 일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고, 이것이 총통의 명령에 기초한 이땅의 새로운 법이었다.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다. 그는 명령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법을 지키기도 했다. 아이히만은 이러한 구별이 중요하다는 것을 흐릿하게나마 알고 있었으나, 피고 측도 판사도 이 문제에 대해 그를 심문하지않았다. ‘상부의 명령‘ 대 ‘국가적 행위‘라는 낡아빠진 구절이 끝없이 오갔을 뿐이었다. 이 구절들은 뉘른베르크 재판 기간 동안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토론 전체를 지배했다. 이는 전례가 전혀 없는 일에 대해 마치 전례가 존재하며, 또 그 전례에 속한 기준에 따라 재판이 가능하다는환상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 P209

본질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 병사들이 명백히 범죄적인 명령을수행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이상으로 이 문제 전체와 연관된 것이있는가에 대한 아이히만의 애매한 생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경찰심문이 진행될 때였다. 이때 그는 갑자기 자기가 전생애에 걸쳐 칸트의 도덕 교훈, 특히 칸트의 의무에 대한 정의에 따라 살아왔다는 것을아주 강조하며 선언하듯 말했다. 이것은 표면상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칸트의 도덕철학은 맹목적인 복종을 배제하는 인간의 판단 기능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문관은 이 점에 집중하지 않았지만, 라베 판사는 호기심에서였는지 아니면 아이히만이 자신의 범죄와 연관하여 감히 칸트의이름을 거론한 데 대해 분개해서였는지 간에 피고에게 질문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정언명법에 대한 거의 정확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말하려 한 것은,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P210

 "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안다면 승인할그러한 방식으로 행위하라" " 라는 식으로 말이다. 칸트는 분명히 이런종류의 어떤 것도 말할 의도를 갖지 않았다. 반대로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그 순간 입법자이다. 인간이 자신의 ‘실천이성‘을 사용하여 법의 원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발견한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무의식적 왜곡은 그 자신이 ‘어린아이가 가정에서 사용할 칸트라고 불렀던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가정적으로 사용하는 가운데 남게 되는 칸트적 정신이란, 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행해야 한다는 요구, 단순한 복종의 요구를 넘어서서 법의 배후에 있는원리 (법이 발생하는 원천)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뿐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그 원천은 실천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이 말하는칸트의 가정적 사용에서 그 원천은 총통의 의지였다. 최종 해결책의 수행에서 보인 끔찍이 공들인 철저함. - P211

독일에서 ‘어린아이의 정신상태를 형성하는 데 칸트의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 사실, 즉 법은 법이고 예외는 없다는 점에서 아이히만이 칸트의 교훈을 따랐던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8000만독일인들‘이 ‘품위 있는 유대인‘을 갖고 있었던 시절에 아이히만이 오직 두 번의 그러한 예외를 승인했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인정했다. - P211

아이히만에게 다가온 마지막 양심의 위기는 1944년 3월에 있었던 헝가리로 가는 임무와 함께 시작 되었는데, 이때는 붉은군대가 카파치아산맥을 지나 헝가리 국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헝가리는 1941년에히틀러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웃하고있는 나라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얼마간의 영토를 더 얻으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헝가리 정부는 그 이전부터 반유대주의를 공공연히 표명했는데, 이제는 새로이 획득한 영역에서 모든 무국적 상태의 유대인을 이송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반유대적행위는 무국적자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최종 해결책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었고, 사실상 그 당시 유럽에서 ‘서에서 동까지 샅샅이 뒤지려는 세부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계획과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헝가리는 작전을 수행하는 데 우선순위에서 후순위로 다소 밀려 있었다. 무국적 유대인은 헝가리 경찰에 의해 러시아 인근지역으로 내몰렸고, 그 지역의 독일 점령 당국은 이들이 몰려오는 것에 반대했다.  - P213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헝가리로 새로 들어온 이 30만 명의 유대인의 안전은 망명을 제공하려는 헝가리의 열성 덕분이 아니라 이 한정된 수의 사람들을 위해 별도 행동을 취하는 것을 독일이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1942년 독일 외무성의 압력으로 헝가리는 모든 유대인 망명자들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독일 우방국의 진실성에 대한 시금석이 전쟁의 승리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유대인 문제의 해결‘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을 독일 외무성은항상 명확히 했다. 외무성은 이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걸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아이히만은 거부했다. 기술적인 이유에서 그는 ‘헝가리가 헝가리계 유대인을 수용하도록 준비될 때까지 이러한 행동을 연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 P214

 모든 것은 그가 이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반복한 말처럼 ‘꿈처럼 흘러갔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자신의 명령과 자기의 새로운 친구들의 희망 사이에 약간의 사소한 차이점들을 어려움이라고부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예를들어, 붉은군대가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함께 따라 그는 이 나라가 "동부에서 서부로 샅샅이 훑어 내리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부다페스트의 유대인이 처음 수주일 또는 수개월동안소개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상당히 유감스런 문제였는데, 왜냐하면 헝가리인들은 그들의 수도가 유대인이 없는 지역이 되기를 원한 것이다. (아이히만의 ‘꿈‘은 유대인에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악몽이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토록 많은사람들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이송되어 처형된 적이 없었다. 2개월도 - P215

채 되지 않아 147량의 열차가 대당 100여 명씩, 43만 4351명의 사람을밀폐된 화물차에 싣고 이 나라의 서쪽으로 이송했는데, 아우슈비츠의가스실도 이렇게 많은 수를 거의 해결할 수는 없었다.
어려움은 다른 부분에서 나타났다. 이 세 사람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자신들이 ‘유대인 문제 해결‘을 도와주라는 명문화된 명령을 받지 못했다. 이 세 사람은 각각 다른 집단에 속해 있었고 따라서 다른 명령 계통에 서 있었다. 기술적으로 말하면 빙켈만은 아이히만의 상관이었지만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는 아이히만이 속해있던 제국중앙보안본부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외무성 소속의 베젠마이어는 이 두기관으로부터 독립해 있었다. 여하튼 아이히만은 이들 양자로부터 명령받기를 거부했고, 그들이 자기와 함께 있는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최악의 어려움은 네 번째 사람으로부터 나왔는데, 그는힘러가 상당수의 유대인, 그것도 중요한 경제적 지위를 아직도 누리고있는 유대인이 머물고 있는 유일한 유럽 국가에 ‘특별 임무‘를 주어 파견한 사람이었다.  - P216

베허의 활동은 힘러의 완전한 승인 하에 이루어졌고, 또한 아이히만의 제국중앙보안본부 내의 직속상관인 뮐러와 칼텐브루너를 통해 아이히만에게 전달된 이전의 ‘철저한 명령들과는 아마도 정면으로 대립했을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이히만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허와 같은 사람들은 부패했지만 그러한 부패상이 아이히만의 양심의 위기를 조장했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이러한 유혹에는잘 넘어가지 않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 당시까지 수년 동안 그는 부패에둘러싸여 지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이자 부하인 디터 비슬리케니 총돌격대장이 벌써 1942년에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유대인 구호위원회로부터 슬로바키아에서 오는 이송을 지연시키는 대가로 5만 달러를 받은 것을 몰랐다고 생각하기는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1942년 가을에 힘러가 새로운 친위대 대원을 모집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외화를 얻기 위해 슬로바키아 유대인에게 출국 허가서를 판매하려고 한 사실을 아이히만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 P219

검사가 대법원 심리에서 강조한 것처럼, 히틀러가 트럭을 얻기 위해 유대인을 교환하는 협상에 대해 칼텐브루너로부터 들었을 때 "히틀러의 눈에는 힘러의 권위가 완전히 손상되었다." 힘러의최근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 히틀러는 힘러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을 완전히 중지시키기 겨우 몇 주일 전에야 호르티 편으로 최후 통첩을 보내 힘러에게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조치들을 헝가리 정부를 통해 지체됨이 없이 수행하라"고 말하도록 했다.
헝가리 유대인의 소개를 중지하라는 힘러의 명령이 부다페스트에 도달했을 때, 아이히만은 베젠마이어로부터 온 전문에 의거하여 "총통으로부터 온 새로운 결정을 요구하라"고 협박했는데, 이 전문에 대해 판결문에서는 ‘100명의 증인이 할 수 있는 것보다도 유죄를 더 입증하는것이라고 했다. - P223

문명화된 나라들의 법에서는 비록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성향이 때때로 살인의 충동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추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땅의 법은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대량학살 조직자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너는 살인할지어다"라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제3제국의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악을 인식하게 되는 특질(유혹이라는 특 - P226

질)을 상실했다. 수많은 독일인들과 많은 나치스, 아마도 엄청난 수의그들은 살인을 하지 않으려는 도둑질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이웃이 죽음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려는(유대인은 그들이 알고 있는 운명의 장소로 이송되었기 때문. 비록 물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소름 끼치는 세부사항을 잘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익을 취함으로써 이 모든 범죄의 공범자가 되지 않으려는 유혹을 분명히 받았을것이다. 그러나 맙소사, 그들은 그러한 유혹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배워버렸다. - P227

아이히만이 본디오 빌라도처럼 느껴 자신이 무죄라는 의미에서 손을씻었던 1942년 1월의 반제회의와, 대량학살이 마치 유감스러운 실수일뿐이었던 것처럼 히틀러의 등뒤에서 최종 해결책이 폐기된 1944년 여름과 가을 힘러의 명령이 내려졌던 그 사이에, 아이히만은 어떠한 양심문제 때문에 번민하지 않았다.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그러나 그에게 더욱 중요한 ‘유대인 문제의 해결‘로 바쁜 다양한 국가 및 당 사무실들 사이의 권위 영역에 대한 무수한 음모와 싸움의 한가운데에서, 그의 생각은 흔들리는 조직과 행정 문제로 완전히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주된 경생자들은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였는데 이들은 힘러의 직접 명령을 받는 자들로 그와 쉽게 접촉할 수 있었으며 직책상 항상 아이히만을 능가했다. 그리고 새로운 국무차관이자 리벤트로프의 부하 마르틴 루터 박사의 지휘 하에 있던 외무성은 유대인 문제에 아주 활동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 P229

유대인은 부유하거나 가난한 차이가었지만 그래도 유럽 국가들과 친선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지난150년간 그 관계는 꽤나 좋았고, 또 영광의 순간들이 너무나 많아 중부및 서부 유럽에서는 그것이 관례가 된 듯했다. 따라서 이 민족이 결국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신념은 더 이상 유대인 공동체의 다수에게는 그다지 중요성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 문명의 틀을 벗어난 유대인의삶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만큼 그들은 스스로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유럽을 그려볼 수도 없었다.
세상의 종말은 비록 놀랄 만큼 단조롭게 진행되기는 했어도 유럽에존재한 국가들의 수만큼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것은 유럽 민족의 발전에 익숙하거나 민족국가 체제의 등장에 익숙한 역사가들에게는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나치스에게는 커다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나치스는 반유대주의가 모든 유럽을 통일하는 공통분모가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 확신했다. 이것은 커다란, 많은 대가를 지불 - P232

한 오류였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나라에서 반유대적 태도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이 금세 드러났다. 한층더 성가셨던 일은 그것이 손쉽게 예견되기는 했어도 독일의 ‘근본적‘
다양성이 완전히 평가된 것은 나치스가 ‘인간 이하의 야만적 무리들로간주하기로 결심한 동부 유럽 사람들(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그리고 어느 정도는 루마니아 사람들)에 의해서뿐이었다는 점이다. 유대인에 대해 남들과 같은 증오감을 보여주지 않았던 사람들은 스칸디나비아 민족들(크누트 함순과 즈벤 헤딘은 예외였음)이었는데, 이들은 나치스에 따르면 독일과 피를 나눈 형제였다. - P233

그러나 외국에있는 동안 그것을 지니고 있음으로써 유효한 여권을 모종의 아주 의심스런 방법으로 획득한 것이다. 이것은 특히 남미계 국가들에서 그러했는데, 이 나라의 해외 주재 영사들은 유대인에게 아주 공공연히 그런여권을 판매했다. 그런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은 그들의
‘모국‘으로 들어갈 권리를 제외하고는 영사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포함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외무성의 최후통첩은 적어도오직 명목상으로만 시민권을 가진 이 유대인에 대해 외국 정부들로부터 최종 해결책을 적용하는 데 동의를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자국 내에 항구적인 주거지를 마련하고 있지 않은 수백 또는 수천의 유대인에게 스스로 도피처를 제공할 호의를 보이지 않은 정부들이그러한 유대인 전체가 추방되고 제거되는 날 별반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은가? 아마도 그것이 논리적이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곧 보게 되는 것처럼 합리적이지는 않았다. - P240

1943년 6월 30일, 히틀러가 희망한 것보다 한참 지난 뒤에 제국(독일, 오스트리아 및 보호국들에서 유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포가이루어졌다.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실제로 이 지역에서 이송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 통계에 따르면1942년 1월까지 이송되었거나 이송될 사람들의 수 26만 5000명 가운데 탈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 수백, 기껏해야 수천의 사람들이 숨거나 전쟁 기간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이다. 유대인의 이웃의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이었는가는 1942년 가을 당 자문단이 발행한 회보에 나타난 이송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식 설명을 통해 가장 잘 예시된다. "어떤 점에서는 이러한 아주 어려운 문제들이 오직 무자비한 강인성(rücksichtsloser Härte)에 의해서만 우리 민족의 영원한 안전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사태의 본질이다." - P240

제3제국의 지도자들이 극찬한 특성인 ‘무자비한 강인성은 자신의나치 과거에 대해서는 대충 말해버리는 데 진정한 천재성을 발휘한 전후의 독일에서는 종종 좋지 않은(ungut)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마치 이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적 사랑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행동하는 데 통탄스럽게도 실패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여하튼 ‘유대인 문제 고문관‘으로 아이히만사무실에서 (정규 외교적 임무 또는 군사요원, 보안경찰대 지역사령관등에 덧붙여) 다른 나라로 파견된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덕성을 최고도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즉 1941~42년 가을과 겨울, 그들의 주요 임무는 해당국의 다른 독일인 관료들, 특히 명목상의 독립국에 있는 독일 대사들과 점령 지역에 있는 제국 최고 책임자들과 만족할만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두 경우 모두 유대인 문제에서 사법권에 대해서는 항상 갈등이 있었다. - P241

1942년 여름과 가을 동안 2만 7000명의 무국적 유대인(파리에서 1만8000명, 비시 정부에서 9000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그때 프랑스 전역에는 대략 7만 명의 무국적 유대인이 남아 있었는데 독일인들은 첫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프랑스인들이 유대인을 이송하는 데 아주익숙하므로 이제는 더 이상 이 일을 꺼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여 독일인들은 프랑스계 유대인도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단지 행정적 처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일이 국면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유대인을 독일인에게 인도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히만이나 그의 요원들로부터가 아니라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들로부터) 힘러가 이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자마자 즉각 포기하고는 프랑스계 유대인을 남겨두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재정책‘에 대한 최초의 소문이 프랑스에 도달했다.  - P244

프랑스의 반유대주의자들이나 비반유대주의자들도 외국계 유대인이 어떤 다른 곳이라면 그곳으로 이주하기를 바랐을 터이지만, 반유대주의자들조차도 대량학살의 공범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따라서프랑스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생각해보았던 조치, 즉1927년 이후(또는 1933년 이후)에 유대인에게 부여한 귀화권의 박탈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했다. 이 조치가 이루어졌더라면 5만 명의 유대인이 더 이송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무국적 상태에 있거나 외국 출신의 유대인의 이송과 관련하여 끊임없는 어려움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여, 프랑스로부터 유대인을 소개시키려는 모든 야심찬 계획들이 사실상 ‘취소‘되어야 했다. 수만 명의 무국적자들이 숨었고, 또한 수천 명이 이탈리아령의 프랑스 지역인 코테 다주르로 도피했는데, 그곳에서 - P244

유대인은 출신지와 국적에 상관없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1943년여름, 독일이 유대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또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막 도착한 그때 겨우 5만2000명의 유대인만이 이송되었고, 이 숫자는 전체 유대인 수의 20퍼센트도 채 되질 않았다. 그리고 이 가운데 단지 6000명만이 프랑스 국적을 소유하고 있었다. 프랑스 군을 위해 만들어진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 전범들조차도 ‘특별대우‘를 위해 분류되지 않았다. 1944년 4월, 연합군이 프랑스에 발을 디디기 두 달 전에는 이 나라 안에 아직도 25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고,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나치스는 확고한반대에 직면했을 때 ‘강하게 남아 있을 수 있는 인력이나 의지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이 문제의 진실은 게슈타포 요원들조차도 무자비함과 연약함을 같이 지니고 있었던것이다. - P245

덴마크와 스웨덴을 갈라놓은 5마일 내지 15마일의 바다를 가로질러10월 어느 좋은 날 모든 유대인을 싣고 페리호는 떠났다. 스웨덴은5919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는데, 이 가운데 적어도 1000명은 독일 태생이었고 1310명은 반쪽 유대인이었으며, 686명은 유대인과 결혼한 비유대인이었다. (덴마크계 유대인의 절반가량은 그 나라에 남아 은신처에서 전쟁 기간 동안 살아남은 것 같다.) 비덴마크계 유대인은 이전보다 살기가 나아졌고, 모두가 노동허가를 받았다. 독일경찰이 체포한 수백 명의 유대인은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늙거나 가난해서 제때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소식을 들었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못했다. 덴마크 기관들과 사람들이 끝없는 ‘소란‘을 일으킨 덕분에 수용소에서 이들은 어느 다른 집단보다 더 큰 특혜를 누렸다. 48명이 죽었지만 이 숫자는 그 집단의 평균연령을 고려해 보았을 때 특별히 많은것은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지났을 때 아이히만이 숙고해서 내린 의견은 "여러 이유에서 덴마크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행동은 실패였다"는반면, 이 별난 베스트 박사는 그 작전의 목표는 많은 유대인을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덴마크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것이었는데, 이 목표는 달성되었다‘고 선언했다. - P255

이탈리아는 독일에게 유럽 내의 유일한 진정한 동맹이었고, 동등한취급을 받았으며 주권 독립국가로 존중을 받았다. 그 동맹은 아마도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두 개의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서로 묶어주는최고 종류의 공통이해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무솔리니가 한때 독일의나치 집단들에서 크게 칭송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이탈리아가 잠시 머뭇거리다 독일제국과 연합했을 때는 그것은 과 - P256

거의 일이었다. 나치스가 이탈리아의 파시즘보다 스탈린식의 공산주의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솔리니의 편에서는 독일에 대한 큰 신뢰나 히틀러에 대한 큰 경탄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특히 독일에서 최고위층의 비밀에 속했으며, 전체주의의 국가형태와 파시즘적 국가형태 사이의 깊고 결정적인 차이점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세상에 전적으로 이해된 적은 없었다. 그 차이점들은 유대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다. - P257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는 예하 부서에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은 즉각적으로 ‘필요한 조치‘를 따라야 한다는 회람 통지를 내렸다. 그리고 최초의 타격은 로마에 있는 8000명의유대인에게 가해졌는데, 이들은 이탈리아 경찰을 신뢰하지 못한다는이유에서 온 독일 경찰 부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유대인은 과거 파시스트들로부터 제때에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고 7000명이 탈출했다. 독일인들은 늘 그렇듯이 저항에 부딪히면 양보하다가, 이제는 이탈리아 유대인이 비록 면제 대상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송되지는 않았고이탈리아 수용소에 수용되기만 했다. 이 ‘해결책은 이탈리아에는 충분히 ‘최종적‘이었던 것 같다. 북이탈리아에서는 대략 3만 5000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어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1944년 봄 붉은군대가 루마니아를 점령하고 연합군이 로마에 진입했을때, 독일인들은 약속을 깨고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이송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간 7500명 가운데 겨우 600명만이 돌아왔다. 그래도 이것은 당시 이탈리아에 살던 모든 유대인의 10퍼센트에훨씬 못 미치는 숫자였다. - P261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그 재판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전반적 그림‘
을 재구성한 판결문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판결문에서 나치스가 통제한동부 및 남동부지역과 민족국가 체계를 지니고 있던 중부 및 서부 유럽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북으로는 발틱 해에서 남으로는 아드리아 해에 이르는 혼합 민족들로이루어진 지대, 그 대부분이 지금 철의 장막 안에 있는 이 지역은 당시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른바 계승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국(북으로는 러시아 제국, 남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남동으로는 터키 제국)의 점령 하에서 수세기 동안살아온 수많은 민족 집단들에게는 새로운 정치적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 결과 생겨난 민족국가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정치적 제도의 모범으로 삼은 구 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적 동질성을 비슷하게라도 가진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그 결과 이 나라들은 현 정부에 격렬히 적대적인 거대한 민족 집단을 가지게 되었다. - P263

이송작업은 크로아티아인들 자신, 특히 강력한원인 우스타쉐 당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은나치스에게 각 유대인의 이송비로 30마르크씩 지불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주자들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독일의 공식적 ‘점령지 원칙‘에 따르면 이것은 모든 유럽 국가에 적용 가능한 것이었는데, 이에따라 국가는 자신의 국경 안에 머무르다 살해당한 유대인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나치스가 ‘점령지 원칙‘을 항상 준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회피하는 방법은 많았다. 독일인 사업가들은 유대인이 이송되기 전 그들로부터 직접 무엇이든 사들였고, 돌격대 지휘관 로젠베르크도 처음에는 독일의 반유대주의 연구본부를 위해 모든 히브리인,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다가 곧 자신의 활동을 넓혀 값진 가구나 예술 작품들까지 모아들였다.) 유대인이 크로아티아에서 이탈리아 점령지로 탈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래의 기한이었던 1942년 2월은 맞추어지지 않았지만, 바돌리오의 쿠데타 이후또 다른 아이히만의 사람이었던 헤르만 크루마이가 자그레브에 도착했고 그래서 1943년 가을까지 3만 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센터로 이송되었다. - P266

그제야 독일인들은 이 나라가 아직도 유대인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초의 반유대인 법에서 ‘크로아티아의 이익에기여하는 모든 유대인을 ‘명예 아리안족‘으로 바꾸는 이상한 조항을 독일인들이 발견했다. 이러한 유대인의 수가 이 개입 기간 동안 당연히크게 증가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재산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떠난아주 부유한 사람은 제외되었다. 이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사실은 친위대 정보부(돌격대장 빌헬름 회의 지휘 하에 있었는데, 그는 먼저 예루살렘에서 피고 측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나 그의 선서 진술서는 검찰에 의해 사용되었다)가 정부수반에서 우스타쉐당의 지도자에 이르기까 - P266

지 크로아티아의 거의 모든 지배자들이 유대인과 결혼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의 유대인 가운데 살아남은 1500여 명(유고슬라비아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5퍼센트)은 분명히 모두가 이처럼 고도로 동화된, 그리고 극도로 부유한 유대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동부의대중들 가운데 동화된 유대인의 비율은 종종 약 5퍼센트로 추산되기 때문에, 동부에서 동화가 가능한 경우 유럽 다른 지역에서보다도 생존하는 데는 더 나은 가능성을 제공해주었다.
세르비아의 인접국들에서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세르비아에서는 독일 점령군이 거의 첫날부터 러시아 전방에서의 전투와 비견할 수 있을정도의 유격대 전투를 치러야 했다. 나는 앞서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멸절과 아이히만이 연결된 유일한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법정에서는 "세르비아 유대인을 다루는 일상적 명령 체계가 우리에게는 아주분명하게 인지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에따르면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는 이 지역의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어떠한 유대인도 이송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모두 현장에서 해결되었다.  - P267

불가리아는 발칸반도의 국가들 가운데 어느 나라보다도 나치 독일에대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를 대가로 상당한 정도의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고마워하지 않았으며, 그 정부도 국민도 ‘무자비한 강인성‘ 정책이 시행되도록 할 만큼 부드럽지 않았다. 이것은 유대인 문제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불가리아 군주 정부는 본국의 파시스트 운동인 라트니치에 대해 염려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운동은수적으로도 적고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없었으며, 의회는 상당히 존중받는 정치체였고 왕과도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하기를 거부했으며, 동부 전선에 ‘지원병‘으로서 상징적인 원정군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장놀라운 것은 반유대주의가 집단마다 강력히 퍼져 있던 혼합 민족지역가운데 속하는 불가리아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도무지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 P268

그것은 동부 및 남동부 유럽의 모든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중앙보안본부에 아주 자극받은 어조로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보고한 사람도 베케를레였다. 그 결과 붉은군대의 진주와 더불어 반유대 법안들이 폐기될때까지 불가리아 유대인도 이송되거나 자연사가 아닌 죽임을 당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여러 민족들이 섞여서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독특한 경우에 해당하는불가리아인들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나는알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가리아 공산주의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기억한다. 그는 나치스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독일에 머물러 있었는데, 1933년 2월 27일 베를린 의사당에서 일어난 의심스런 화제 사건으로 인해 나치스는 그를 고소했다. 그는 독일 최고법정에서 재판을받았고 괴링과 대면했는데, 디미트로프는 마치 자기가 재판을 진행하는 것처럼 괴링에게 질문을 했다. 반 데르 루베를 제외한 모든 피고들이 무죄 석방된 것은 그의 덕분이었다. 그의 행동은 너무나 당당하여전 세계의 경탄을 샀으며,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음과같이 말하곤 했다. "독일에는 한 사람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는 불가리아인이다." - P271

모든 측면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호르티는 이송을 중지하라는 명령을내렸다. 아이히만에 대한 가장 최악의 증거 가운데 하나는 그가 ‘오랜바보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7월 중순에 부다페스트 근교의 집단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던 또 다른 1500명의 유대인을 이송시켰던 것이다. 유대인 관료들이 호르티에게 보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사무실에 두 대표 집단의 위원들을 소집시켰고, 거기서 훈세 박사는 그들을열차가 헝가리 영역을 벗어날 때까지 다양한 이유를 들어 억류시켰다.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은 이 에피소드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비록 판사들이 "피고는 호르티에 대한 그의 승리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고 확신" 했지만, 아이히만에게는 호르티가 그리 대단한 인물이아니었기 때문에 확인은 다소 의심스럽다. - P287

이것은 헝가리를 떠나 아우슈비츠로 가는 마지막 열차인 것 같다.
1944년 8월에 붉은군대가 루마니아에 있었는데, 아이히만은 그곳으로그의 가망 없는 일을 하러 갔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호르티 정부는 아이히만 부대의 퇴각을 요구할 만큼 충분한 용기를 보였고, 아이히만 본인은 베를린에 자신과 요원들이 돌아갈 것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를린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왜냐하면10월 중순에 상황이 한 번 더 급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이 부다페스트에서 불과 100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자 나치스는 호르티 정부를 전복하여 활 십자가인 리더 페렌츠 잘라시를 국가수반으로 임명하는 데 성공했다. 학살 시설이 거의 해체될 지경이었으므로 더 이상의운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같은 때 독일의 노동력 부족 상황은점차 심각해졌다. 이제 5만 명의 유대인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자와40세 이하의 여자)을 제국으로 이송시키는 허가를 얻기 위해 헝가리 내무장관과 협상한 사람은 제국 전권대사 베젠마이어였다. 그는 자신의보고서에 아이히만은 5만 명을 더 보내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 P287

이 행진은 힘러의 지시로 중단되었다. 원래의 지시에 명시된 나이제한과 상관없이, 그리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었던 예외와상관없이, 헝가리 경찰은 도보로 보내진 유대인을 마구잡이로 체포했다. 도보로 행진한 이들은 활 십자가인이 호송했는데, 이들은 그들에게서 물건을 뺏는 등 극도로 야만적으로 이들을 대했다. 그러고는 그것이끝이었다. 원래 80만 명의 유대인 인구 가운데 대략 16만 명 정도가 부다페스트 게토(교외 지역은 유대인이 다 소개되었음)에서 살아남은 것같고, 이 가운데 수만 명은 임의의 학살 희생자가 되었다. 1945년 2월13일 이 나라는 붉은군대에 항복했다.
이 학살에 대한 헝가리의 주요 피의자들은 모두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아이히만을 제외한 독일인 주도자들은 수년간의 수형생활로 벌을 받았다. - P288

나치스가 동부라고 말할 때 이는 폴란드와 발틱 연안 국가들 그리고점령된 러시아 영토를 의미했다. 이것은 4개의 행정 단위로 나뉘었다.
제국과 합병된 폴란드 서부 지역들로 이루어진 바르테가우는 책임자아르투르 그라이저의 관할이었고,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백러시아의 다소 불특정한 지역을 포함하는 오스틀란트는점령당국의 지위를 가진 리가의 관할이었으며, 폴란드 중부 지역의 일반정부는 한스 프랑크의 관할이었고, 우크라이나는 알프레트로젠베르크의 동부점령지역청의 관할이었다. 이 나라들은 검찰의 소송장에서는증거가 처음으로 제시된 나라들이었지만 법정에서는 마지막으로 다루지게 되었다. - P293

의심의 여지 없이 검찰과 판사 양측은 서로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게된 데에는 탁월한 이유가 있었다. 동부는 유대인 고통의 중심적 장면에해당하며 모든 이송작업의 소름끼치는 최종 종착지였고, 이 장소에서는어떠한 탈출도 거의 가능하지 않았으며, 생존자의 수는 거의 5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더욱이 동부는 전쟁 이전에는 유럽에서의 유대인 인구의 중심지였다. 300만 이상의 유대인이 폴란드에서 살았고 260만 명이 발틱 국가들에서, 그리고 300만으로 추산되는 러시아 유대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백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에 살고 있었다.  - P293

이 생존자들이 현재 이나라 인구의 20퍼센트가량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재판 당국에 자발적으로 몰려가고, 또일부 문서 증거를 준비하도록 위탁받은 야드 바셈에게 가서 자신들이증인이 되겠다고 했다. ‘강력한 상상력‘이 발동된 최악의 경우들, 즉‘아이히만이 결코 간 적이 없는 여러 곳에서 그를 보았다‘고 한 사람들은 배제되었지만, 재판 당국이 명명한 ‘유대 민족의 고통에 대한 증인들 56명이 원래 계획된 15명 내지 20명의 ‘배경 증인들‘ 대신에 결국법정에 섰다. 전체 121회 공판 가운데 23회가 전적으로 ‘배경‘ 문제에할애되었는데, 이때 ‘배경‘이란 말은 이 재판에 명백한 관련이 없다는것을 의미했다. 검찰 측 증인들에 대해서는 피고나 재판관에 의한 반대신문이 거의 없었지만, 판결문에서는 아이히만과 연관되는 증거라고해도 그것이 어떤 다른 관련사항이 함께 제시되지 않으면 채택되지 않았다.  - P294

판사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들이 5명 가운데 1명꼴로 살아남은 나라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민감하고 또 거북스럽게 된 것은 피고에 대해서가 아니라 배경 증인들에 대해서였다. 하우스너 씨는 ‘비극적 다수의 희생자들을 불러모았는데, 이들은 이처럼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고, 이들 각각은 법정에서 시간을보낼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판사들은 일반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 또는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검사와 논쟁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일단 증인이 증언대에서자 증언 사이에 끼어들어 짧게 끝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란다우 판사가 말한 것처럼, "증인의 명예와 그가 말하려는 사안 때문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해, 이 사람들이 법정에서 어느 누구라도 증언을 못하게할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또한 비록 증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이 단지이 재판의 부산물로 간주될 뿐이라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말해 이들이 ‘증언대에서 자신의 피맺힌 한을 쏟아 부을 때 그 세부사항의 정확도에 대해 누가 감히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 P297

이외에도 다른 난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이스라엘에서도 재판에 출두한 사람은 유죄가 판명 날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된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경우 이것은 완전히 허구에 불과했다.
그가 예루살렘에 등장하기 전에 유죄임이, 어떠한 합당한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죄임이 확정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감히 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납치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벤구리온 수상은 1960년 6월 3일 날짜의 서신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왜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 법에 대한 형식상의 위반‘을 범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전 유럽에 걸쳐 거대한 그리고 전례 없는 규모로[우리 동족 6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이다"라고 썼다. 범죄에 대한 의혹이 실질적이면서 합당하다고입증되어야 하지만 합당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도가 아닌. - P297

뉘른베르크에서 피고 측 변호인단의 일원이었던 세르바티우스 박사보다 피고에 대한 이 같은 결정적인 불이익에 대해 더 잘 의식하고 있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우선 그가 왜 이 일을 하겠다고 했는지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훨씬 더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일 것이다. 이 질문에대한 그의 대답은, 이 일이 "단지 사업상의 문제일 뿐"이며, 그는 "돈을벌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뉘른베르크의 경험으로부터 보건대이스라엘 정부가 그에게 지불할 총액(그가 계약한 액수는 2000달러였음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적절한 액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비록 린츠에 있는 아이히만의 가족이 1만 5000마르크를 따로 그에게 주기로 했지만 말이다. 그는 거의 재판 첫날부터 자신이 비용을 적게 받는다고 불평하기 시작했고, 그 후 곧 아이히만이 ‘미래의 세대‘들을 위해 옥중에서 쓸 어떤 ‘비망록‘이라도 판매할 수 있게되기를 바란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와 같은 사업 거래가 적절한 것이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희망은 좌절되었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 정부가 아이히만이 옥중에서 쓴 모든 문서들을 압류했기 때문이다. (그 문서들은 지금 국립문서고에 보관되고 있다.) 8월에재판이 휴정하여 12월에 속개하는 사이의 기간 동안 아이히만은 한 권의 ‘책‘을 썼고, 피고 측은 항소심이 열리기 전의 검토 과정에서 그것을‘새로운 사실적 증거‘로 제시했다. 물론 새로 쓰인 그 책은 새로운 사실적 증거가 아니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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