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초, 새로운 밀레니엄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몇몇 신문들이 새로운 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에 필요한, 주목해야 할 사상을 꼽았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인물이 한나 아렌트였다. 그즈음 우리나라에는 아렌트의 사상이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지금까지 그녀의 주요 저술들이 하나 둘씩 번역되었고, 학문 연구에서도 그 수준이 점차 향상되어가고 있다. 아렌트의 저술 가운데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되어온 것이 바로 이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일 것이다. 아렌트를 본격적인 정치사상가로주목받게 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사후에 출간된 『칸트 정치철학 강의와 정치의 약속』에 이르는 모든 저술들이 학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유일한 예외로 대중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어렵게 읽히는 철학적, 정치사상적 저술이 아니라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서도 깊은 고민과 더불어 이 책을 읽는다면, 오늘의 시대에 아렌트가 주는 메시지를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 P13
여기서 ‘평범성‘이라고 번역한 banality는 ‘진‘ 라고도 번역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단어가 아렌트의원의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가이다. 앞서 언급한 아이히만의 특성을생각한다면, 악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음을 아렌트가 우리에게 말하려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banality를 ‘진성‘이라고 번역한다면 우리는 이 말을 "평범하고 또익숙할 정도로 많이 접해서 진부해졌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결코 "시간적으로 오래되었다"거나 "구식"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말을 ‘일상성‘이라는 말로 번역한다면, 그 의미를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 일상적일 정도로 자주 일어나서 그만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악의 평범성을터무니없는 잔혹상이 일반화된 것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렌트의 본의와는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이다. - P15
이 책은 쉽고 평범하게 쓰인 책이지만 격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책과 관련된 첫 번째의 논쟁은 아렌트와 유대인과의 관계, 또는아렌트와 시온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1963년에 저명한 시온주의 학자인 거솜 숄렘(Gershom Sholem)은 아렌트가 "유대인에 대한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담은 유명한 공개서한을 보낸다. 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해 유대인의 민족적 관점에서 날린 직격탄이었다. 아렌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에 대한 사랑을 결여한 채 마치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보편적 관점에서 아이히만 재판을다루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사랑이란 개인의 문제이지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고응수했고, 숄렘이 시온주의자였던 점을 의식하여 아렌트는 자신이 시온주의자들을 도와주었던 독일에서의 이력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때도움을 주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숄렘이기도 했다. 나중에 아렌트는 이 논쟁을 "나와 유대인 간의 전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 P16
이렇게만 보면 아렌트는 영락없는 보편주의자이지만, 아렌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즉, 앞서 언급한 레싱의 입장을 넘어, 우리가서로 정치적으로 소통하고 좋은 삶을 나누는 근거로서의 인간됨이라는것이 있음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성이 마치 인간의 본질로서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그 책의 제목이 그 같은 고정된 인간성이 있는 것처럼 오해를불러일으킬까봐 염려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긍정적 의미의 인간성이 존재한다는 일상적 믿음이 잘 드러나는 예인 양심의 문제에서도 아렌트는 회의적이었다. 양심에 바탕을 둔 시민 불복종의 경우에도 아렌트는 양심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증될 수 있는 정도의 보편성을 지닌다는 믿음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 P18
말의 능력과 관련하여 볼 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이지만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던 것이 독일 개신교 목사인그뤼버 감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독일인으로 유일하게 예루살렘법정의 증언대에 서서 검찰 측을 위한 증인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구하기 위해 아이히만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고, 또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사태의 위험성을 알리는 등의 일을 했다. 그에 대한 반대심문에서 아이히만의 변호사인 세르바티우스는 그에게 "당신은 그에게영향력을 발휘하려고 애를 써보았습니까? 목사로서 당신은 그의 감정에 호소하고, 그에게 설교하고, 그에게 그의 행위가 도덕성에 모순된다고 말하려고 시도해 보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에 대해 그는 "행동이 말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말해 봤자 쓸데없었을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렌트는 그뤼버 감독의 대답이 상투어(cliché)를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아렌트는 단순히 말을하는 것 자체가 행동일 수 있으며, 또한 목사로서의 그의 임무는 말이쓸모가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 P20
상투어들은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심지어 죽음의 힘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현실을 느끼고 알 수 있는 능력, 나아가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자체가 결여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을 그뤼버 감독 이야기에서알 수 있다. 아렌트는 그뤼버 감독이 아이히만에게 말을 했어야 했다고했다. 말의 유용성은 말이 현실을 알게 하여 사람에게서 변화를 기대할수 있게 하는 데 있다고 아렌트는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목사의 임무가 말이 과연 쓸모가 없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목사가 영향력 있는 존재라면 그 영향력은 전적으로 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아렌트는 생각한 것이다. - P22
상투어나 관용어, 또는 최종 해결책 수행을 위해 고안된 암호화된 언어도 말이나 일상 언어와 마찬가지로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이 양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연어인지, 의도적으로 만들어져 반복적으로 사용된 인공어인지의 차이로 보인다. 상투어나 관용어 등은 늘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다. 현실-말-사유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하고, 언어가 고정되어 버림으로써 사유와 판단이 현실과 유리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아렌트가 이야기의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풀어낸 이유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단순히 과거를 기술하고 이해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미래 지향적으로 이해가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벤하비브의 말처럼 "마음을 미래로 향하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를 얻기 위해서라는것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야기는 이론과는 달리 현실의 힘을 반영하는 - P22
일상 언어를 사용한다. 일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질 자격을 갖춘다. 구체적인 현실의 힘을 반영하면서도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자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구체와 보편의 양 측면의 힘을 동시에 반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어떤 이론이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한지를 검증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은 곧 받아들여지기 위한 첫 단계에 해당된다. 실제로 수용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제시될 수 없다. 그 기준을 제시한다면 자유주의적 준거를 제시하는 것과 같은 특성이 될 수 있겠으나, 동시에 그것은 공허할 것이다. 수용의 여부는 이야기가 사람들의입에 회자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이야기되는가와 연결된다. 이때 전제되는 것은 보편적 원리나 준거가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람의 존재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아렌트가 제시한 공통감(sensuscommunis) 개념이다. - P23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주요 차이점은, 아렌트의 정치적 이론화 작업일반, 특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논의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으므로 이를 간략히 살펴보자. 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적, 법적 윤리적 이론화 작업의 주요 범주는 ‘인간의 복수성‘ (human plurality) 또는 다원성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의 복수성이 없다면 인류 또는인간성이란 말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주저 없이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행위와 말, 이 두 가지의 기본 조건이 되는 인간의 복수성은 평등과차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인간들이 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서로 그리고 자신들에 앞서 왔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또 미래를 계획하고 자신들 다음에 올 사람들의 필요를 예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들이 다르지 않다면 현재 존재하고 과거에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사람들과 구별되는 각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을 하거나 행위를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아렌트에게는 복수성이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실존적 조건이다. - P28
‘출생‘ (탄생)이란 생물학적 현상으로, 각 사람들이 이미 항상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속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출산‘(또는 노동)(노동인, homo laborans)"의 현상이다. 후자의 ‘두 번째의 탄생‘을 통해우리는 점점 더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된다고 말한다. 첫 번째의 ‘생물학적‘ 탄생과 두 번째의 상징적‘ 탄생은 동일한 인간적 공적의 연속이다. 이 둘은 동시에 발생한다. 아렌트는 『뉴욕 서평』에 하이데거의 팔순생일에 헌정하는 논문, 80세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기고한다. ‘생일‘ 은 모든 문화권에서 모든 인간 존재를 위해 축하하는 행사이다. 아렌트의 ‘탄생‘ 개념은 그녀의 정치적 이론화 작업에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탄생이란 생명의 시작이며, 인간을 사회적·정치적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탄생하는 한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의 삶을 시작한다. "어떠한 인간의 삶도, 자연 속 광야에서 살아가는은둔자의 삶조차도, 다른 인간의 현존을 직간접적으로 입증해 줄 수 있는 세계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고 아렌트는 강조한다. - P29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이데거에게는 ‘죽음‘이 현존재(Dasein)의 실존의 표지이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결코 경험할 수 없기에 하이데거는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 (Sein-zum-Tode)라고 정의했다. 죽음은현존재의 실존의 표지가 되는데,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며, 어떤 다른 사람도 나를 위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의 진정성 (Eigentlichkeit)를 입증한다. 죽음, 오직 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을 진정한 것으로 만든다. - P29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행위의 능력이다.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동료들과 어울리게 해주고, 공동의 행위를 하게 해주며, 그 재능―새로운 어떤 일을 착수하는 능력 (새로운 것의 시작으로서의 탄생)—이 없었더라면 마음의 욕망은 물론이고 정신의 생각으로도 결코 들지 않았을 일과 목표를 위해 나서게 해준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행위한다는 것은 탄생성의 조건에 대해 인간적인 응답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탄생을 통해 본질적으로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신참자로서 또 시작으로서 이 세상으로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있다. 탄생의 사실이 없다면 우리는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알지도못했을 것이고, 모든 ‘행위‘는 단순지 행태나 도착적 행동에 불과할것이다." - P30
인간은 어머니가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날에 단 한 차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탄생을 해야할 의무를 부여한다.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각각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출생시키고 세계를 자연적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변형시킨다. 더욱이 이러한 산출은 항상 이미 공동 프로젝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복수적인 세계,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는 세계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만으로는 사회적 실체인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할수 없다. ‘이성의 보편성‘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표현을 빌리자면을 믿었던 헤겔은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요, 이성적인것이 현실적이라는 말을 했을 때 쉽게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장 프랑수아 료타르는 홀로코스트가 현실적인 것이었으나 이성적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반유대주의 자체는 열정이었다.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는 그것이 헤겔적인 것이건 다른 것이건 간에 이성으로만 모든 것을판단하려고 하는 한 한계를 지닌다. - P31
그런데 그녀가 의미한 판단‘의 의미를 알 수 있는실마리들이 그녀의 저술 속에는 충분히 있다. 판단은 ‘특수한 상황에대해 그의 일반성에서가 아니라 ‘그의 특수성 안에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아렌트는 두 종류의 책을 썼다. 하나는 어떤 주제나 안건에 대해 그의 일반성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것과 관련이 되고(예컨대 인간의 조건),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정치에서의 거짓말‘, ‘리틀락에 대한 반성‘, ‘안식할 집‘과 같은 논문과 관련이 되는데, 이 논문들은 『공화국의 위기』(1972)와 책임과 판단』(2003)에 포함되어 있다. 아렌트는 판단의 기능-칸트의 발견물이 사유의 기능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판단은 항상 ‘특수자들과 아주 가까이 있는 일들‘ [예컨대시사적인 일들)과 관계한다. 물론 좋은 판단뿐만 아니라 나쁜 판단도있다는 것과 위대한 철학자라도 나쁜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헤겔과 칸트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와 슈트라우스도―정치나 다른 일에 대해 크거나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상 좋은 판단을 한다고 보증할 수는 없다. - P32
유대 민족에 대해 자행된 그의 범죄의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은 어떠한 후회도, 또 어떠한 가책의 감정도 표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렌트에 대한 비판가들 사이에 있었던 도덕적 분노에 기름을 끼없음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그리고 그와 유사한 많은 사람들은 "도착적이거나 가학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아이히만은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 데필수적이라는, 모든 현대 법체계에서 통용되는 가정" (379쪽)을 무시했다. 아이히만에 대해 이스라엘 경찰의 심문 기록은 아이히만의 ‘악의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보고를 지지한다. 아렌트가 최초의 보고를 한지 10년이 지나 사회 연구」(Social Research)에 게재된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꽤 긴 반성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수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보고를 하면서 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이론이 - P36
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특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또 그에 앞서 있었던 경찰심문에서보인 그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에서 사람들이 탐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특징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흥미로운, 아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그는 한때 자기가 의무로 여겼던 것이 이제는 범죄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판단의 규칙을 마치 단지 또 다른 하나의 언어규칙에 불과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의 다소 제한된 양의관용구에다 몇 가지의 새로운 것들을 추가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가그 관용구 가운데 어떤 것도 적용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는 전혀 어찌할 수 없었다. - P37
가장 기괴한 순간은 그가 교수대에 서서말을 하게 되었던 때로, 그는 장례식 연설에서 사용하는 상투어에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자기가 살아남아 있는 자가 아니기때문에 이 경우에는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줄곧 예상했을 사형선고의 순간에 그가 남겨야 했을 마지막 말이 무엇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건대,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그는 생각 못했던 것 같다. 마치 재판 때의 심문과 반대심문에서 드러난 불일치와 심각한 모순들로 인해 그가 괴롭게 느끼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상투어, 관용구, 관습적이고 표준화된 표현과 행위 규칙의 고수 등은우리를 현실로부터 막아주는, 즉 모든 사건과 사실들이 발생함으로써 일으키게 되는 우리의 생각하는 주의력에 대한 요구를 막아주는사회적으로 인정된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요구에 대해항상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곧 지쳐버리게 될 것이다. 아이히만 - P37
의 경우에 달랐던 점은 분명히 그는 어떠한 그 같은 주의에 대해서도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히만은 거의 초현실주의적(현실 초월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극단적으로 ‘몽상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아렌트가 위에서 언급한 인용문에서 묘사한 그의 모든 특성들을 다 더해본다면 그는 ‘몽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특별할 정도로 ‘천박하지만 ‘악마적‘이지도 또 ‘어리석지도 않은 아이히만의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 또는 ‘사유의 전적인 부재‘는 인간적 실존성을 결여하고 있고 또 그것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그는 정신병으로 무죄를 요구할 수있을 정도로 이데올로기적이거나 병리적이지 않았다. 아렌트에 따르면그의 ‘인류에 대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근본악‘이 아니었다. - P38
왜냐하면 그것은 말하자면 아무것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근본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수전 니만은 그의 잘 알려진 저서 『근대적 사유에서의 악: 철학의 대안적 역사에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악의 문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 15)로 간주했다. 첫째, 이 책은 20세기에 쓰였지만 그의 윤리적 함축은 20세기보다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둘째, 이 책은 악이라는 주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윤리적인 것의 전 영역과 관련된 것이라고 나는생각한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사유할 능력이 없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사람이라고 규정했을 때, 의미한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아렌트는 아 - P38
이히만이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106쪽). 이것은 아렌트가 인간의 복수성에 있어서 ‘평등‘ (정체성또는 동일성)의 다른 측면, 또는 다른 갈고리인 ‘차이‘라고 불렀던 것에대한 문제이다. 인간의 복수의 우선은 활동적 삶(행위와 작업과 노동)과 관조적 삶(즉, 사유) 양자를 연결시키는 조직이다. 이 양자에 대해서 아렌트는 기포드 강의에서 ‘사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의지‘ 와 ‘판단‘에 대해서도 폭넓게 논의한 바 있다. ‘특별히 천박했던 아이히만은 ‘사유‘도 ‘의지‘도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차이‘가 없으면 소통의 필요가 없다고 아렌트가 생각한 것은 옳았다. 그렇다면 ‘말‘과 ‘행위‘도 필요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우리 모두가 똑같다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차이가 없다면결국 인간의 복수성 자체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개념이 될 것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월처 (Michael Walzer)가 차이란 인간관계에서 관용을 필수적으로 만드는 반면 관용은 차이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 것은 논박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차이 (Differenz)를 구별(Unterschied)이라고 말놀이한 것은 ‘차이‘를 ‘관계적인 것과 연결지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차이는 실로 구별인 것이다. - P39
아이히만은 타인 또는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그는 또한 ‘행위‘할 능력, 또는 더 잘 말하자면 도덕행위를 ‘수행‘할 능력도 없다. 예컨대 그에게는 어떤 것을 ‘말하기‘란 언어놀이를 하는 것과 동일했다. 그는 수행행위로서의 말하기에 대한 이해, 즉 필연적으로윤리적인 발화행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그가 본질적으로 혼돈에 빠진(함께 뒤섞여버린) ‘동일주의자‘인간관계에서 차이를 알지 못하거나 차이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ㅡ라는 점이다. 예컨대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교수대 아래에서 자신의 사형선고를 ‘회피하는 것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생존‘한 것과 부적절하게 동일시했다. 아이히만은 또한 자신의 ‘복종‘과 칸트의 ‘의무‘ 또는 ‘책무‘와 구별하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국가(Der Judenstaat)를 쓴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과 같은 ‘이상주의자‘라고 잘못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그에게 ‘이상주의자‘란 단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P40
‘끔찍하게도 또 전율스럽게도 정상적인‘ 아이히만에 의해 자행된 ‘인류에 대한 범죄는 폭력의 행위(즉 홀로코스트)를 포함한다. 폭력은 차이를 지우려 할 때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이다. 인종차별주의로서의 나치즘의 경우가 그러했다. 나치즘의 반유대주의의 목표는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유대인종을 이 지구상에서 쓸어내려는, 멸절시키려는 것이었다. 전쟁도 또한 ‘전율스럽게도 정상적‘으로 되었다. 전쟁은 정치만큼이나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카를 클라우제비츠(Karl Clausewitz)에 따르면 전쟁은 폭력적 형태의 정치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치의 연장‘이라고 했던것이다. 그의 말은 20세기의 국제정치에서 당연시되었고 으레 그런 문제로 받아들였다. - P42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그리고 전체주의적으로 되어왔고, 또 그렇게 되어가게 될 이 지구상의 인류를 위해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담론에서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두 번째로 궁극적인 메시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없어 보인다. 지구상의 인류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잔인함, 죽음, 고통을 끼치는 데 이를 것이라고 필자가 두려워하는 ‘무사유‘를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갖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18) 바로 이때 인류의 역사-아무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표현을 사용하자면—는 깨어날 길이 없는 악몽이 될 것이다. - P43
"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법정 정리가 큰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세 명의 판사가 도착했음을 알렸을 때 우리는 모두 벌떡 일어섰다. 판사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검은 법복을 입은 채 옆문을 통해 법정으로 들어와 높게 만든 단 제일 앞줄에자리잡았다. 곧 수많은 책과 1500편 이상의 기록 문서로 가득 채워질긴 탁자 좌우 양편에는 법정 속기사들이 앉아 있다. 판사 바로 아래에는 피고인과 변호인, 그리고 법정 사이에서 직접적인 의견 교환을 도와줄 통역사들이 있다. 재판은 히브리어로 진행되어, 독일어를 쓰는 피고측 사람들은 대부분의 방청객들과 마찬가지로 무선 동시통역 장치를통해 재판 진행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통역사들의 불어 통역은 탁월하고 영어 통역은 참고 들어줄 만한데, 독일어 통역은 완전 코미디 수준이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이 재판을 위한 기술적 장치들은 꼼꼼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인구가운데 독일 출신이 높은 비율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피고인과 그의 변호사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인 독일어 통역을 제대로은 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새로운 국가 이스라엘의 작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이다. - P49
판사들의 행동에 극적인 요소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일부러 꾸민 듯한 걸음걸이를 하지 않았고, 그들의 맑고 강한 집중력이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청취할 때 눈에 띄게 나타났던 경직된 모습 등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증언을 무한정 끌고 가려는 검사의 시도에 대해서는 참지 않고 즉각적으로 제동을 걸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또 세르바티우스 박사(Dr. Servatius)가 격렬한 전쟁과 같은 이처럼 불편한 환경 속에 거의 혼자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기라도 하듯 판사들의 태도가 좀 지나치게 공손한 듯했지만, 피고인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항상 비난의 소지가 없었다. - P50
그러나 판사들이 아무리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외면한다 해도 그들은 마치 연극 무대에서 관객들을 바라보듯 단의 제일 윗자리에서 방청객을 마주 대한 채 바로 거기에 앉아 있었다. 방청객들은 전세계를 대표하는 듯 생각되었는데, 실제로 처음 몇 주간은 방청객들이주로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신문기자와 잡지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끈 광경을 지켜볼 수 있겠지만, 이번 경우는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비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이유로해서도 [아이히만을 처벌한다면, …… 이는 그가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가 어떤 인종차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사가 논고 서두에서 내뱉은 이 주목할 만한 말은 분명 이번기소에서 핵심 문장임이 입증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송사건은 아이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 P53
그가 보기에 이 재판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렁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방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자주 실패한 것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피고 측의 잘못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부적절하고 하찮은 증언이라도 피고 측은 적절히 이의를 제기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를 세르바티우스박사라고 불렀는데, 그는 증거 자료를 제출하는 문제에서는 보다 용감했다. 그가 원고를 방해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원고 측이 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전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의 일기를 증거로 제출했을 때였다. "제가 할 질문은 한 가지뿐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이름, 즉 피고인의 이름이 저 29권 (실제로는 38권에 언급된 적이 있습니까? ··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은 29권 가운데 어디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 더 이상 질문이 없습니다. 감사...... 합니다." - P57
그렇다면 그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었다면 유죄라고 인정했을까?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틀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피고 측은 아이히만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제3제국 시대에 가장 유명한 헌법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현재 바바리아의 교육과 문화장관으로 있는 테오도어 마운츠의 말을 인용하려 할 것이다. - P77
그는 1943년에 "총통의 명령은∙∙∙∙∙∙ 현재 법적 질서에서 절대적인 중심이다"라고 썼다). 오늘날 아이히만에게 그가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단적으로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잊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와서 자신들은 언제나 반대한 척하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수행하는 데매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마운츠 교수처럼 그도 "다른 통찰에 도달했다." 그가 한 일들은 한 것이고, 이를 굳이 부정하고싶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구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한경고로 공개적인 교수형을 당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은 그가 무엇을 우회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후회는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 P77
시간의 회오리바람 속의 낙엽처럼 그는 마법으로 차려진 식탁에서통닭이 입으로 날아드는 환상세계인슐라라피아(더 정확히 말하자면,학위와 보장된 직업과 세련된 유머의식‘을 가진, 가장 큰 악덕이란 농담 섞인 장난을 치고 싶어 참을 수 없어하는 충동인, 존경받는 속물들의 모임)에서, 정확히 12년 3개월간 지속된 천년제국의 행군 대열로 달려갔다. 어쨌든 간에 그는 신념을 가지고 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또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었다. 당에 가입한 이유를 말해달라고하면 그는 언제나 ‘베르사유 조약‘과 ‘실업‘과 같은 똑같은 진부한 표현들(clichés)을 반복했다. 또는 그가 법정에서 ‘어떠한 기대나 사전 결심 없이 그냥 당에 의해서 집어삼켜진 것과 같았습니다. 너무도 빠르고갑작스럽게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는 제대로 정보를 입수할 시간도 없었고, 알고 싶은 욕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당의 정강도 몰랐고 「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칼텐브루너가 그에게 "친위대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 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지 뭐"라고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게 전부였다. - P87
따라서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이 처하게 된 새로운 상황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그들은 1933년 1월 30일 이후로는 2급 시민이었다. 이들이 나머지 주민으로부터 거의 완벽히 분리되기까지는 몇 주 또는 몇 개월밖에 걸리지않았다. 이 일은 공포를 줌으로써,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일상적인 묵인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벽이 있었습니다"라고 베를린의 베노콘 박사는 증언했다. "독일 내에서 어디로 여행하든 나는 기독교인과 대화한 기억이 없습니다." 유대인은 이제 자신만의 법을 부여받았으므로 더 이상 법적 국외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느꼈다. 어차피 그들에게 강요된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끼리 산다면 간섭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 소재 유대인 제국대변단(모든 유대인 공동체와 조직의 전국 연합으로 1933년 9월에 베를린공동체의 주도 하에 창설되었는데, 이는 결코 나치스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의 말에 의하면, 뉘른베르크 법령의 의도는 ‘독일과 유대 민족 간에 참을 만한 관계 수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 P95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설명했다. 그가 언제나 멸시한 동화론자들이나 그를 지루하게 만든 정통파 유대인과는 달리 이 유대인은 그와 같은 이상주의자‘였다. 아이히만의 생각에 따르면 ‘이상주의자‘란 단지 어떤 ‘이상‘을 신봉하거나, 또는 도둑질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필수불가결하기도 하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는지만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 P97
이것은 불성실 (bad faith)의 교과서적인 예, 즉 터무니없는 어리석음과 허위의 자기기만이 결합한 전형적인 예인가? 아니면 이것은 단지 영원히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일기에서, 시베리아에 있는 수많은 살인자와 강간범, 도둑들 사이에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의예일 뿐인가? 그런 사람이란 자신의 범죄가 현실의 한 부분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현실을 대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경우는 평범한 범죄자의 경우와 다르다. 평범한 범죄자는 자기의 범죄집단이라는 좁은 한계 내에서만 범죄 없는 현실로부터 효과적으로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때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아이히만의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 P109
문제에 대한 그 자신의 신념은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명이 내게부여한 얼마 안 되는 재능 가운데 하나는 진실에 대한 능력입니다. 그것이 내게 달린 일인 한에서는 말이죠." 검사가 아이히만이 저지르지않은 범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기 전에도 그는 이 재능에 대한주장을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진 자센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당시 자신이 지적한 것처럼 "내가 전적으로 물리적, 정신적인 자유를소유하고 있었던" 때) 만든 정리가 안 된 장황한 메모 속에서 그는 ‘여기에 기록된 이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역사가들은 충분히 객관적이도록 하라‘는 환상적인 경고를 했다. 이러한 경고가 환상적이라고 한 이유는, 이처럼 갈겨쓴 모든 문장에서 자신의 일에 기술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직접 연관이 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철저한무지가 나타나며, 또한 그의 기억력에 엄청난 결함이 있음을 보여주기때문이다. - P112
그 후에 판사로부터 자신의 변호를 위한 증언을하고 싶으면 "선서를 한 뒤 할 수도 있고 선서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을분명히 듣고 난 뒤, 두말 않고 즉시 선서 아래에서 증언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또는 경찰심문관에게 그랬듯이, 법정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짓은 자신의 진정한 책임을 벗어나 자신의 목숨을 위해 싸우거나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매우 감정적으로 확언한 뒤, 자신의 변호인의 지시에따라 자비를 호소하는 자필 문서를 제출한 사람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이히만에게는 이것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들이었고, 그가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관용구들을 찾을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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