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 Bauhaus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독일 바이마르에 세운 조형학교, ‘집을 짓는다‘는 뜻의 하우스바우 Hausbau 를 도치한 이름으로, 순수예술과 공예는 동일한 것의 두 변형이라는 생각 아래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한 것이다. 바로크 이후 상실된 총체예술 이념의 복구, 기술과 장인성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 실용성을 근간으로 한예술과 테크놀로지의 통합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지향했으며, 위계적인 교수법 대신 상호협동과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고 협동 워크숍 체제를 지향했다. 1925년 정부의 재정 지원 취소 등으로 폐쇄 위기에 처했으나, 데사우 시에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했다. 1932년 나치의 탄압으로 데사우에서 쫓겨난 후 베를린에 사립바우하우스가 설립되었으나, 1933년에 나치에 의해 완전히 폐쇄되었다. 조형 디자인의 기능과 효율성에 초점을 둔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어 현대 조형예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P66

에리히 케스트너
작가·시인  독일  
1899. 2. 23~1974. 7. 29

잔혹한 시대의 증인이 되어

‘절대로 울지 말자!‘
하늘을 나는 교실』Das fliegende Klassenzimmer의 주인공 마르틴 탈러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급비생인 마르틴의 부모는 크리스마스 휴가가 다가오는데도 아들에게 고작 5 마르크밖에 송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섣달그믐까지 갚기로 약속하고 양복점 주인에게 빌린 돈이었다.
그러나 마르틴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8마르크의 여비가 필요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집에 오지 말고보내준 돈으로 초콜릿이라도 사먹으라고, 가끔은 썰매라도 타면서 놀라고, 그리고 절대 울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자고. "어머니, 다정하신 어머니!" 그렇게 중얼거린 마르틴은 한 번은울어버리고 말지만, 이내 ‘절대로 울지 말자! 고 다짐한다. - P67

토마스 만 Thomas Mann을 비롯하여 그의 형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수많은 문학가들이 망명했다. 쿠르트 투홀스키kurt Tucholsky는1935년 스웨덴에서 자살했다. 에른스트 톨러는 1939년에 뉴욕에서 자살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1940년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어가던도중 붙잡혀 자살했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1942년 브라질에서 자살했다. 그러나 케스트너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일에 머물렀다. 독일을 떠나는 친구 헤르만 케스텐Hermann Kesten에게 그는 "어머니를 위해서 이곳에 머물 생각일세. 그래서 언젠가 찾아올 잔혹함의 증인이 되겠어. 나치의 독재를 다룬 장편을 쓸 계획이네. 미래의 고발자로 꼭 남아 있고 싶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케스트너는 자신의 책들이 불태워지는 현장을 일부러 보러 갔다. - P70

고난의 시대를 살아남은 케스트너는 전후에도 『두 명의 로테』Das doppelteLottchen(1949), 『동물회의』Die Konferenz der Tiere(1949), 『내가 아이였을 때A‘s ich einpleiner Junge war(1957) 등의 작품을 남기고 1974년 7월 29일 뮌헨에서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문학가 이케다 히로시池田浩의 표현을 빌리면, 케스트너는 "도덕이 무너져버린 시대"에 모럴리스트가 되려 했던 인물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인물상은 단순한 것일 수 없다. 헤르만 케스텐은 이렇게 묘사한다.

정치적으로는 제한 없는 자유주의자이고 세계관에서는 과격한 휴머니스트이며, 천성적으로 이성적이고, 조심스러우면서도 돈 씀씀이가 헤프고, 내성적이면서도 결단력이 뛰어나며, 온화하면서도 반항적이고, 친절하면서도 신경질적이며, 신랄하면서도섬세한 인물이 바로 케스트너이다. - P71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

1차대전으로 독일제국이 붕괴한 후 군부, 관료, 대자본가 등보수 세력과 사회민주당의 타협에 의해 성립한 민주공화국.
1919년 1월 총선에서 승리한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파가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그해 8월 헌법을 반포하면서출범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극우 세력의 카프 반란, 좌파의 루르 봉기 등 반대파의 거센 반발에 시달렸고,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불과1923년 프랑스·벨기에 연합군의 루르 점령으로 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920년대 중반 배상 문제를 일단락하고 다시 선진공업국으로 변모하면서 짧은 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국력이 회복됨에 따라 강대한 독일 건설을 꿈꾸는 우익의 권력이 강화되고, 1929년 대공황에 휘말리면서 공화국은 급격히 쇠락했다. 실업자가급증하고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면서 극좌와 극우 세력이 강해졌는데, 분열한 좌파와 달리 우파는 군부, 관료, 자본가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나치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1933년 1월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은 14년 만에 무너졌다. - P73

숄 남매

한스 숄
반나치 저항자 독일  
1918. 9. 22~1943. 2. 22

조피 숄
반나치 저항자  독일 
1921. 5. 9~1943. 2. 22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강제수용소가 주는 짓눌린 듯한 공포감, 게슈타포 등 그물망 같은 치안 조직,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이 서로 감시하고 밀고하는 메커니즘, 그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저항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또 얼마나 "한없이고독" (잉게 숄inge Scholl)한 작업이었을까? 그러나 여기 그런 목소리를 드높인 이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백장미통신은 1942년 7월 초에 제4호까지, 그리고1943년 1월과 2월에 제5호와 제6호가 제작되어 독일 남부 각 도시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개인들에게까지 송달되었다.
1943년 2월 18일, 뮌헨 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스 숄Hans Scholl과 조피Sophie Scholl 남매는 이제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백주 대낮에 아무런 위장도 하지 않고 예방책도 세우지 않은 채 대학 본관에서 팸플릿을 뿌린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호가 된 『백장미통신』 제6호였다. 거기에는 "청산의 날이 왔다. 독일 청년들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독재체제를 청산할 바로 그날이" 라고 씌어 있었다. - P75

한스와 조피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의 태도를 증언한다. 특히 조피는 조사를 받은 뒤에도 편안히잠을 자고, 사형 직전의 면회에서도 부모가 가져온 음식을 보고 "저,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어요" 하고 입맛을 다시며 꾸러미를 펼쳐보았다고 한다. 언니잉게의 회상에 따르면, 조피는 짙은 갈색 머리에 크고 거무스레한 눈동자를 가졌으며, 아직 천진난만한 앳된 표정에 "무엇에건 킁킁거리며 코를 들이대는 어린 동물 같은 호기심"과 "대단히 진지한 태도를 함께 간직하고 있었다. 남겨진 사진이 그녀의 이런 인상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어떤 교사는 조피의 "섣불리 자신의 자주성을 관철하는 태도를 가리켜 "경망스럽다"라고 표현하기도했다. 실제로 민족재판소에서 그녀는 재판관에게 "비록 우리들의 머리는 오늘떨어지지만, 여러분들의 머리도 우리 뒤를 이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의 이런 ‘경망스러운‘ 태도는 잔다르크나 막달라 마리아를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경망스러운 이들에게는 국가권력이 휘두르는 죽음의위협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 P77

조피와 같은 감방에 있었던 엘제 게벨lse Gebel에 따르면, 그녀는 마지막순간을 앞두고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햇살이 비치는 날에 이제 난 떠나가야만해. 내겐 죽음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의 행동이 수천 명의 마음을 흔들어깨울 테니까. 분명 학생들이 저항하며 일어날 거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게벨은 대답했다. "조피, 넌 아직 몰라. 인간이 얼마나 겁 많은 짐승인지를."실제로 조피가 기대했던 학생들의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항은커녕, 숄남매와 프롭스트가 처형되고 사흘 뒤 대학 강당에 모인 학생중대는 ‘백장미‘를 매도하는 나치 학생지도자의 연설에 환성을 지르고, 숄 남매를 게슈타포에게 인계한 대학 직원에게 갈채를 보냈다. ‘백장미‘의 다른 동료들 역시 이해 2월과 3월에 연이어 체포되었고, 알렉산더 슈모렐과 쿠르트 후버는 1943년 7월 13일에, 빌리 그라프는 같은 해 10월 12일에 처형되었다.
‘백장미‘는 ‘시민적, 그리스도교적 저항이며, 그런 한계 때문에 좌절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세계는 다시 그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 P78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한국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1970년대 말 한국에 번역되어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필독서처럼 읽히며 한국 학생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나치의 ‘긴급명령‘과 유신정권이 발동한
‘긴급조치‘, 전두환 군사독재의 철권통치가 일체의 비판을 봉쇄했다는점에서 일맥상통해 이 책의 상황과 당시 한국의 상황을 유사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긴급조치 9호 세대들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반정부 페인트 낙서‘라는 저항 방식을 착안하기도 했는데, 1978년 5월 1일 서울대 강의실 벽 곳곳을 장식한 반체제 페인트 낙서, 1979년 2학기 개강 직후 연세대 독수리상 기둥에서 발견된 ‘유신철폐‘, ‘독재타도‘라는 붉은 페인트 낙서 등이 그 예이다. - P79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안네의 그런 모습에서어떤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무고한 소녀는 똑같이 무고한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
안네의 가족 8명이 25개월 동안 생활한 ‘은신처‘는 1944년 8월 4일 누군가의 밀고를 받은 나치 친위대와 비밀경찰에 의해 급습당한다. 그리고 9월 3일그들 가족은 네덜란드의 베스테르보르크 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절멸수용소로 이송되는데, 그것이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마지막이송열차가 되었다. 연합군이 이미 그곳에서 겨우 200킬로미터 떨어진 브뤼셀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이 열차에는 총 1,019명의 희생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남자 45 명과 여자 82명에 지나지 않았다.  - P83

안네의 여덟 가족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아버지 오토 단 한 명이었다. 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에 남겨진 어머니 에디트Edith는 1945년 1월 6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안네의 일기에 판단이라는성으로 등장하는 헤르만 판 펠스Hermann van Pels는 1944년 10월 또는 11월에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로 보내져 사망했다. 그의 아내 아우구스테Auguste는 몇몇 수용소를 전전했지만 사망일시와 장소는 분명하지 않다. 안네가 사랑했던페터는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1945년 5월 5일에 사망했다.
치과의사 뒤셀, 즉 프리츠 페퍼Fritz Plefter는 노이엔가 수용소에서 1944년 12월 20일 사망했다. - P83

이렇게 쓴 안네는 우리들 ‘일반 사람들‘의 책임을 계속 묻고 있다. 설령 세상 사람들 수백만 명이 안네의 일기』를 읽고 동정의 눈물을 흘릴지라도, 그것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지는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만들어진시오니스트 국가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역설을 저질러왔으며, 한편으로 세계는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또다시 대두하는 배외주의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안네의 죽음을 더더욱 희망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 P84

살바도르 아옌데
정치가  칠레  
1908. 7. 26~1973. 9. 11

칠레의 길을 위한 싸움

드브레는 앞의 인터뷰에 붙인 서문에서 아옌데를 이렇게 규정한다. "박사‘ 이면서 동시에 ‘동지‘이고, 프리메이슨 단원인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이며,전 공화국 상원의원이면서 사회주의 전사이고, 부르주아로 성장했으면서도 혁명적 확신을 지니고 있으며, 그 나라의 수도보다) 지방적 현실에 깊이 뿌리를내리고 있으면서도 철저한 국제주의자이다." 이런 아옌데 자신이 ‘칠레 역사의변증법‘에 각인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의 여러 형태와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사회운동의 결합‘의 ‘살아 있는 예이자 ‘화신‘이라고 드브레는 쓰고 있다.
따라서 아옌데가 현재의 사회 위에 "과거의 사회와 미래의 사회를 이어주는 교랑을 놓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 P88

인민연합 정부는 구리광산 등의 기간산업 및 유통·금융 부문의 국유화와철저한 농지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국내의 인플레이션과 구리의 국제가격 하락, 미국의 원조 삭감, 국제금융기관의 대출 정지 등으로 말미암아 칠레의 경제는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인민연합 내부에서도 여러 세력 간의 대립이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 중앙정보국 CIA 과 거대기업 아이티티 IT 사의 후원을 받은 우파의 정권 전복 공작이 격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 쿠데타의 징후가 분명해진 시점에서도 아옌데는이상주의자다운 완고함으로 끝까지 ‘혁명적 폭력의 선제적 행사‘를 배격하고
‘입헌적 틀‘을 고집했다. 군부 쿠데타 소식을 접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집필중이던 회상록에 서둘러 마지막 몇행을 적어넣었다. - P89

칠레에는 오랜 문민정치의 역사가 있다. 그 역사에서는 혁명은 드물었고, 보수적이고 평범하며 안정적인 정부가 많았다. 대부분의 대통령은 그릇이 작았지만, 두 명은큰 인물이었다. 발마세다José Manuel Balmaceda (19세기 말의 자유주의자)와 아옌데가 그 - P89

들이다. (………) 발마세다는 초석으로 얻는 부를 외국에 넘겨주지 않으려 저항했기 때문에 자살로 내몰렸다. 아옌데는 칠레의 또 다른 지하자원인 구리를 국유화했기 때문에 암살당했다. 두 경우 모두 칠레의 과두제가 유혈혁명을 조직했다. 두 경우모두 군인들이 사냥개 역할을 맡았다. 이들 군인들을 사주하고 자금을 제공한 세력은발마세다 때는 영국의 회사, 아옌데 때는 북아메리카의 회사였다. (네루다 회상록』) - P90

‘사회주의를 향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길‘을 목표로 한 칠레 인민연합의개혁 프로그램은 당시 ‘아옌데 실험‘으로 불리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유럽 각국과 일본 등 선진자본주의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사회주의 분파의전략 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복수정당제‘ 개념을 포함하여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아 ‘아옌데 실험‘은 사회주의 자체를 구하려는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바라는 아옌데에게 선물한 자신의 책에 "다른 길을 선택해 같은곳에 도달하려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라는 헌사를 썼다고 한다. 다른 길을택한 두 사람은 모두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 P90

빅토르 하라
연극인 싱어송라이터  칠레 ㅡ 
1938. 9. 28~1973. 9. 16

두 손이 으깨어지더라도

두 손이 으깨어진 빅토르 하라 Victor Jara………… 그의 이름은 16세기 독일의 조각가 틸만 리멘슈나이더Tilman Riemenschneider 를떠올리게 한다. 리멘슈나이더는 농민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두 번 다시 작품을 만들 수 없도록 양손을 못 쓰게 되었다. 칠레의 음악가 빅토르 하라 역시 ‘칠레 사회주의의 길‘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똑같은 일을 당했다.
1973년 9월 11일,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자 빅토르 하라는 "시민들은 각자의 일에 충실히 임해주십시오"라는 아옌데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국립공과대학으로 향하던 도중체포되었다. 임시 정치범 수용소로 변해버린 칠레 스타디움으로 연행된 하라는 일주일 후인 9월 18일 시체 공시소에서 그 - P92

의 아내 요안 하라 Joan Jara에 의해 확인되었다.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다.

빅토르 하라는 스타디움에 연행된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기타를 집어들고 인민연합 찬가 〈벤세레모스〉venceremas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화를내며 그의 기타를 빼앗았다.
하라는 손뼉을 치며 노래를 계속 이어갔다. 화가 치밀어오른 군인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그의 두 팔을 짓이겼다. 그래도 하라는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려 했다. 그러자군인들이 그를 향해 총을 쏘았다. 마치 그가 되살아날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수십발의 총탄이 그의 몸 곳곳을 파고들었다.
그때 한 군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디 한번 계속 불러봐. 이래도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 (야기 히로요八代 금지된 노래」 - P93

쿠바의 뮤지션 실비오 로드리게스silvio Rodriguez"는 이렇게 말한다. "박물관에 들어가서는 안 될 전통문화와 민속음악이 있다. 절대로 흥미를 잃지 않고한 세대에서 또 한 세대로 이어져야 하는 것, 역사의 한 순간 한 순간마다 그본질이 존재할 수 있도록 형태를 바꾸어가야 하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이 빅토르 하라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 가운데 하나이다. 노래가 현실의 뼈와 살과 혈관에 형태를 만드는 것일 때,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저 살육자들이 그 - P96

에게 퍼부은 증오야말로 진정 그것을 보여준다. 그의 최후는 그 당연한 귀결이며, 그가 스스로 바란 일임에 틀림없다."
빅토르 하라와 함께 ‘새로운 노래‘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앙헬 파라Angel Parra는 쿠데타 때 체포되었으나 반년 만에 석방되어 멕시코로 망명, 훗날파리로 이주했다. 1987년 크리스마스, 피노체트 정권의 사면 조치로 추방령이해제되었다는 사실을 안 그는 「빅토르 하라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 P97

그러나 무엇을 용서한단 말인가?
용서받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일을 내가 저질렀단 말인가?
그대의 등에 박힌 40발의 총탄이 나를 용서해주는 것인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내 아버지가?
저 3만 명의 죽은 자들과 피로 물든 마포초 강이 나를 용서한단 말인가?
(.....)
‘너는 리스트에 올라 있어."
무슨 리스트? 웃고, 생각하고, 자유로이 돌아다니고, 사랑하고, 죽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리스트?
(.....)
그리고 또 하나 자네에게 전하고 싶은 이별의 말이 있네.
올 겨울의 파리는 너무 멋졌지. 그래서 내게 베풀어준 사면을 받지 않기로 했어.
나는 한 방울 눈물 속에 조국을 꼭 안고 싶어.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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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들 가운데,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아 있는 책이 바로 데라다 도라히코‘가 쓴 수필집이다. 내 독서인생 최초의 책다운 책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이와나미 문고판으로 읽은것도 아니었다. 며칠 전 벽장 안 구석구석을 이 잡듯 뒤져보았더니 어지간히 버리기 아까웠던지, 용케 그 수필집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30년 만에 손에들고 보니 아동용 책답게 한자 옆에 일본어 독음이며 삽화까지 곁들여져 있었고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寺田集이라는 서명이 붙어 있었다. 출간한 곳은포플러 출판사. 초판은 1959년에 발간되었는데 내 책은 그 이듬해에 나온제2판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총 스무 권짜리 시리즈 중 둘째 권으로, 책 뒤에 달린 광고를 보면 첫째 권에는 요시노 겐자부로源三郞,
셋째 권 이하로는 다니가와 테츠조 아마노 데이유, 가메이 가츠,
이치로井勝一郎, 고이즈미 신조2가 갖고 있던 책은 달랑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 한 권뿐이었다. - P20

가뜩이나 무보다 문을 숭상하는 전통적 가치관을 지닌 조선인들에게
‘독서‘나 ‘지식‘이라는 말이 지닌 가치는 단연 막중한 것이었다. "아무개는 지식인이다"라는 평판은 최상의 찬사였고, 동시에 ‘무식한 놈‘이라는 말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최악의 모욕이었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지금도 여전히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데, 그가 뤼순 감옥에서 남긴 수많은 글 중 저 유명한 "一日不讀書, 口中生荊" 이라는 말이 있다. 형 집행을 기다리면서도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는 단순히 만용을 부린 사람이 아니라 지성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그의 모습이 조선 민중의 심금을 울렸으리라. - P21

"아아,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하며 이 대목에서 나는 긴 한숨을내쉬곤 했다. 작가는 홀로 남겨진 꼬마가 도토리를 주우며 즐거워하는 모습을바라보면서 "처음과 마지막이 비참했던 어미의 운명만큼은 이 아이에게 반복시키고 싶지 않다"고 글을 맺는다.
어디고 흠잡을 데 없는 문장이었다.
기승전결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물론 어린아이인 내가 그런 것까지 이해했을 턱이 없다. 다만 ‘형식‘이 가져다주는 유려한 문장 흐름과좋은 어조가 전해주는 율동감의 매력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P27

1992년 여름, 나는 중국 지란의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다. 지난날
‘간도‘로 불리던 이 지역은 조선반도의 민주, 러시아의 국정을 취하고 있어서 20세기 초엽부터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조선인들이 많이 아주했던 곳이다. 그 때문에 이 지방은 일본의 중국 침략 교두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일투쟁의 상품이 되기도 했다. - P61

왜 다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또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소년 아라이의 불행에 생각이 이르자, ‘부조리‘를 느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 테지만 거의 그와 비슷한, 왠지 더이상 감당하기 힘든 감상에 빠졌다. 단한방에 상대를 녹아웃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막내형이 우울해했던 것 역시, 아마도 그 같은 아라이의 현실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어린 시절은 참으로 좋았다. 가능한 일이라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그 같은 마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지난 시간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되짚어보면, 그리움이나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어린아이 나름의 슬픔과 괴로움이 마음속 저편에서 되살아온다. - P81

에리히 케스트너가 국외로 망명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나치스의 폭정이 장기간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신념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노모老母 곁을 떠나고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 마마보이가 많다지만 케스트너처럼 용기 있고 훌륭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사실 『하늘을 나는 교실」에서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글은 제2서문이다. 이 서문에서 케스트너는 "시종일관 재미있는 이야기만 만들면서 아이들을기만하고, 재미로 아이들 정신을 홀리려 애쓰는 아동서 작가들에게 분개하며이렇게 충고한다. - P84

어째서 어른들은 자기가 어렸을 때의 일들을 그렇게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때로는 지극히 애처로운, 가엾고 불행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변해버리는 것일까요? (……) 아이들의 눈물은 결코 어른들의 눈물보다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 P85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물을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 P85

나는 마음속으로 고상한 중산층 속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나몰라라 배신하지는 않을까? 아니, 나는 벌써 그들을 배신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자문을 내가 수없이 반복하게 된 것은, 위태로울 정도로 예민해져가는 소년기의 자의식과 불균형한 자기애의 양상을 이 작품이그만큼 능숙하게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이 글을 접한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다자이 오사무를 싫어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거의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이었다. - P121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기차는 열풍 속을 뚫고 지나가리라
기적소리 어두움 속에 울부짖듯 외치고
불꽃은 평야를 밝게 비추는데
아직, 조슈의 산은 보이지 않누나.


이렇게 시작하는 「귀향」은 곧바로 암기해버렸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래자갈 같은 인생이런가"라는 구절이 아직 열두 살도안 된, 인생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는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뒤로 얼마동안 잊고 지냈는데, 십여 년 세월이 흘러 옥중에 갇힌 작은형에게 반입할 생각에 홋타 요시에 젊은 시인들의 초상의사서詩人肖像(1968)을읽어보니, 주인공이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가나자와로 귀향할 때마다 이 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는 대목이 나와서,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때야 비로소 "모래자갈 같은 인생" 이라는 시구에 대해 나도 아주 조금은실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것이다. - P128

하기와라 사쿠타로에 마음이 이끌린 뒤부터 나는 한 권 두 권 시집을 사고,
시인 흉내도 내면서 시 비슷한 글들을 끄적이게 되었다. 따로 공책을 마련해선마음에 드는 시구들이나 경구, 혹은 자작시 비슷한 글귀들을 적어두었다. 이 공책만큼은 절대로 형들에게 발각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숨겨둘 장소를 물색하느라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시절 나는 이미 형들에게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시인의 이미지란 베레모에 루바스카 차림을 한 ‘문약한 무리‘, 비위를 거스르는 ‘뇌꼴스러운 놈들‘, 꼴사납게 ‘잘난 체하는 배부른 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행여 형들이 내 기록들을 훔쳐보고 비웃기라도 한다면 가출하는 길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고지식한 생각을 하며 괴로워했다. - P129

1970년대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
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1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독서.
으로서의인류사에 공헌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P146

또다른 하나는 ‘사춘기의 교양 콤플렉스‘ 라고 불러야 마땅할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이 분야에도 꼭 읽어야 할 책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을 읽는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자기를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도 특정 부류에 편입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과 동일한 의미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 그런 생각은 감당할 수없이 비대해져 강박관념이 되기도 했다. ‘특정 부류‘라고 막연하게 표현해까닭은, 우뚝 솟은 산 정상을 우러러볼 때 그럴 수 있듯이, 참된 지식의 거인을향한 동경과 단순한 ‘문화적 특권 계급‘에 대한 선망이라는 본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아직 미숙한 내 머리에서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 P152

에리히 케스트너나 쥘 베른에 정신이 팔려 있던 시절부터 가지이 모토지로梶井基永郞"의『레몬』, 구라타 햐쿠조출가와 그 제자의弟子,
또는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La symphonie pastorale 등을 읽게 될 때까지 불과 2~3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죽음‘과 ‘성‘이라는 인간의 두 가지 근본문제가 불현듯 내 머리를 온통 뒤덮게 되었던 것이다. 그 즈음에는 1년 사이에 내키가 10여 센티미터나 자랐던 터이므로 그런 일쯤이야 별로 이상할 것 없다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사춘기‘ 라는 극히 짧은기간 동안 너무나도 급격한 정신적 성장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잔혹할 정도의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나와 여전히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나 사이의, 그 버거운 불균형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이다. - P153

이 말을 들은 나는 완전히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경멸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 ‘읽었다‘고그녀가 자만해주었더라면 나로서도 그럭저럭 참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그녀는 그 책만큼은 읽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 만큼은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책을 많이 읽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당장 현관 서가에 꽂힌 문학전집쯤은 거의 독파했을 게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형이 읽던 ‘마의 산을 손에 쥐었다. "넌 이 책 읽을마음이 없다지만, 여차여차하고 이러저러해서 난 재미있게 읽었단다." 이 말을꼭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죽고 싶을 정도로지루해져버려, 곧바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 P160

몇 년 전 스위스의 세간티니미술관Segantini Museum을 방문하는 도중에 다보스Davos를 지나치게 되었다.
‘다보스?‘ 그때 갑자기 다보스라는 지명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왜일까?
불현듯 다보스가 ‘마의 산의 무대였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이 장소를 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다보스에 와 있는 것이다. 작가 토마스 만은 요양소에 입원한 아내의 수발을 들면서, 이곳에 3주 동안 머물며 「마의 산』을 착상하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12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눈 깜짝하는 사이 다보스를 뒤로하고, 냉랭한 고원의 대기를 헤치고 생모리2츠St. Moritz를 향해 급히 차를 모는 동안 "나・・・・・・ 그 책만큼은, 읽고 싶은 마음이영 들지 않아" 라던 소녀의 말이 귓전에 다시 울렸고, 그때 그녀의 표정까지도바로 어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 P162

그 시절의 나는 왜 모든 일에 그렇게도 과도한 의식으로 대했던 것이며, 또사사건건 거북살스러워했던 것일까? 도대체 왜 자신의 친근한 감정과 그리워하는 감정에 자연스러울 수 없었던 것일까?
눈 깜짝할 사이 저 답답하고 안타깝던 지난날에서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의 사춘기는 벌써 저 멀리 떠나간 것이다. 그러나 마의 산을 정복하지 않는 한, 나는 언제까지고 사춘기 때의 번민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마의 산은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와도 같은 존재이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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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년의 눈물은 특히나 애착이 많이 가는 책이다. 그것은 작품에대한 애착이라기보다는 소년 시절에 대한 애착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내 책 중 몇 권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은 이 소년의눈물이야말로 조국의 독자들이 읽어주었으면 하고 내가 진작부터 소망해온책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곧 그런 바람이 무리이겠다 싶어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다.
내가 이렇듯 체념했던 것은, 우선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일본 작가들의 이름이며 이들의 작품, 또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지명 등등을 한국어로 번역해내기가 녹록지 않기도 하거니와, 한국 독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이들이친숙하지 않은 만큼 그에 관한 정보가 도리어 번거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60년대 재일교포들이 살아온 삶의 현장이며, 일본사회의 주류를 향해 소수자들이 품고 있을 굴절된 심정, 또 흡사 짝사랑과도 같은,
조국을 향한 그 복잡다단한 애증의 추억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 P5

일제가 조선을 식민 지배한 결과 나는 일본 땅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민족차별정책 때문에 충분한 ‘우리말‘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일본어를 모어 사용하는 인간이되고 말았다. 그 같은 역사가 나의 ‘빼어난 일본어 표현‘을 가능케 해주었고 끝내 이런 상까지 안겨준 것이라 할진대,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상을 받을수 있었을까?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인사말에서 나는 자신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으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를 반대한다.
그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반대한다.
식민지배의 죄과를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반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어를 거치지 않는다면 나의 사고며 표현 행위마저도 모두 불가능하다. 또 이런 이유로 나의 글쓰기는 주로 일본인들의 눈에 띌 뿐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인 것이다. - P7

그 감옥 속에서 나는 더 너른 광장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조국의 동포들에게까지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처지가 특별하다거나 예외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추방당하고 모어의 공동체에서 축출된 무수한 디아스포라diaspora들이 세계 곳곳에 생겨났다. 이들 디아스포라는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의 산물인 ‘영어의 감옥‘, ‘프랑스어의 감옥‘, ‘스페인어의 감옥‘ 그 외에 여러 다른 ‘언어의 감옥‘ 에 갇혀 있으며, 저마다 더 넓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그리하여 서로 만나고 싶다고몸부림치고 있다. 재일교포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러한 여러 디아스포라들중 하나이다. 이산의 비애, 모어 상실의 고통에서 여러 디아스포라와 연대하는일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보편적 인간‘에 다가서게 만드는 길이라고, 나는믿는다. - P8

의 독자들 가운데 이 ‘조선‘이라는 단어에 당혹하거나 주저하실 분이 계실지모르겠다. 일본에서 ‘조선‘이라는 말은 음습한 민족 차별 정서를 품은 부정적어감을 풍겨왔다. 또 ‘조선인‘이란 조총련계 인사의 어휘라며 오해할 분이 계실 법도 하다. 하지만 내 국적은 ‘대한민국‘이며, 나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국가명일뿐, 재일교포를 아우르면서 민족 전체를 총칭할 경우에는 ‘조선‘이라는 말을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부모님은 당신 스스로를 ‘조선사람‘이라고부르셨고, 이 말은 내 부모님이나 그 윗세대에게는 삶의 치열한 현장에 밀착된,
지극히 자연스런 호칭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잊고 싶지 않다. 뿐만 아니라 식민 지배와 민족 차별에 저항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 여기기 때문에 평소 ‘조선‘
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4년 8월 15일
서경식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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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시인·극작가 스페인  
1898. 6.5~1936. 8. 19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

"이제 이 평원은 주검으로 가득 차게될거야…………." 친구에게이런 말을 남긴 채, 1936년 7월 13일 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는 고향 그라나다행 야간열차에 몸을실었다. 스페인 전역에 내전의 불길한 징후가 만연해 있었다. 친구들은 마드리드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충고했지만,
로르카는 끝내 그들의 말을 뿌리쳤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성페데리코 축일인 18일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로 아버지와약속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더 운명적인,
이를테면 ‘그라나다‘라는 땅 자체와 맺어진 무언가가 로르카를그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 P15

나는 우물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그라나다의 벽을 기어오르고 싶어,
캄캄한 물의 송곳에 
뚫린 심장을 응시하기 위해서.
(.....)
나는 우물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한 모금씩 음미해가면서 나의 죽음을 죽어가고 싶어,
나의 심장을 이끼로 가득 채우고 싶어
물에 상처 입은 아이를 바라보기 위해서.

- 「물에 상처 입은 아이의 카시다」 - P16

8월 16일 오후, 친구의 집에 은신하고 있던 로르카는 가톨릭계 극우정당스페인보자치연합CEDA의 의원 루이스 알론소Ruiz Alonso가 이끄는 부대에 체포당했다. 8월 19일 이른 아침 (일설에는 19일부터 20일 새벽 사이라고도 한다),
로르카는 그라나다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비스나르로 호송된 후 ‘푸엔테 그란데" Fuente Grande(커다란 샘)라 불리는 곳에서 다른 세 명의 희생자들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 더러운 남창 자식!" 이라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으면서, 그의 유해는 그곳에 있는 올리브 나무 근처에 묻혔다고 한다. - P17

로르카를 암살한 파시스트들은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그의 죽음이 ‘적색분자들의 내부 분열‘이나 어둡고 복잡한 애정(동성애) 문제 때문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1975년까지 오랫동안 이어진 프랑코 정권 시대 스페인에서로르카의 시집은 금서가 되고 암살의 진상을 입에 올리는 일도 금기시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스페인어권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감을 품으며 그의 시를읊었다. 그의 시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많은 스페인 민중의 자산이었고, 그리하여 암살당한 시인은 인간성과 자유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 P19

파블로 네루다
시인 ·외교관  칠레 
1904. 7. 12~1973. 9.23

독재에 맞서 삶을 긍정한 시인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 「한 여자의 육체」,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1924)

풍만한 여자, 살.사과, 뜨거운 달,
해초의 짙은 냄새, 가장한 진흙이며 빛,
어떤 은밀한 투명함이 당신의 원주들에 두루 열리는가?
그 어떤 옛 밤을 한 남자는 자기의 감각들로 느끼는가?
- 『100편의 사랑 소네트』(1959)

삶에 대한 긍정을 솔직하게 노래한 이런 시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군사독재와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정신적인 의지가 되고 있다. - P23

1934년, 네루다는 로르카가 있는 스페인으로 임지를 옮겼다. 하지만 "모든 것이 1936년 7월 19일 밤에 시작되었다". 프랑코의 반란과 스페인 시민전쟁의 발발, 그리고 로르카의 죽음. "스페인 전쟁은 나에게는 한 시인의 죽음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내 시를 바꾸어놓았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총살된 것이 아니라 암살된 것이다. (………) 이토록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괴물이, 이 지상에, 그의 고향에 있으리라고 대체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네루다 회상록』) 분명 스페인 전쟁은 네루다의시를 바꾸고 인생을 바꾸었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초연의 한가운데
그들은 서 있다.
타오르는 도화선처럼.
<전사한 의용병들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노래>, 「마음속의 스페인』(1937) - P25

1936년의 스페인과 1973년의 칠레, 이 두 쿠데타가 네루다의 생애에 짙은 명암을 드리우고 있다. 파시즘이라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괴물‘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생애. 그 밑바닥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에 대한 긍정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독재의 강압과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인간해방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네루다의 시가 울려퍼질 것이다. - P27

잭 시라이
스페인 내전 의용군  일본 미국 
 1900?~1937. 7. 11-

스페인에서 전사한 비국민

잭 시라이의 시신은 밤이 이슥해진 뒤에야 다른 7명의 전사한 전우들과 함께 올리브나무 아래 매장되었다. 그 묘표에는 "잭 시라이, 일본인, 반파시스트,
그의 용기를 기리며" 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전 세계 55개국에서 약 4만 명에 이르는 청년들이반파시즘과 인간해방의 이상을 위해 국제여단으로 몰려들었다. 잭 시라이는 그들 가운데 유일한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본명과 출생지, 생년월일, 가족관계, 성장과정,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의 이력에관한 문헌이나 증언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사했을 때의 나이가 서른일곱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마저도 추정에 불과하다. 시라이는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지 않는 남자였다.  - P31

그곳 일본인 사회에서는 시라이가
조선인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 그가 말이 어눌한 데다 일본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퍼졌을 테지만, 반전그룹인 일본인 노동자 클럽의 멤버조차도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음습한 차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역시 시라이가 스페인에서 차별과 빈곤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찾으려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 P33

시라이의 전사에 대해 뉴욕 주재 일본 영사관이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잭 시라이는 과거 일본인 어느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택했고, 그리고 죽었다.
(………)한 조각의 영광도 없이, 조용히 살았던 것처럼 조용히 죽었다.(이시가키 아야코, 『스페인에서 싸운 일본인 戰¬六日本人)

가족, 고향,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버림받고 거부된 잭 시라이는, 바로 그때문에 더욱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는 꿈을 향해 자신의 몸을 내던질 수 있었던것이다. - P34

국제여단 International Brigades

2차대전의 전초전이자 파시즘과 진보적 민주주의의 국제전이던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공화파 국제의용군. 내전 발발 3개월 후인 1936년10월 14일 의용군 500명이 스페인 알바세테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국적과 언어를 넘어 총 4만여 명이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참가했다. 7개 여단으로 편성되어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던 이들은 프랑코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소련이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줄이면서 1938년에 해체되었다. 많은 작가와 지식인들도 참가해, 헤밍웨이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다큐멘터리 <스페인 땅>의 대본을 썼고, 앙드레 말로는 소설 『희망』을 발표했으며, 의용군으로 참전한 조지 오웰은 르포 『카탈루냐 찬가』를 썼다. 국제여단을 다룬 영화로는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1996)이 있다. 2006년 발표된 내전희생자 명예회복법안에는 국제여단으로 참가한 외국인들이 스페인 시민권을 쉽게 취득할 수 있게 하는 조치가 포함되었다. - P35

파블로 카잘스
첼로 연주가 지휘자  스페인  
1876. 12. 29~1973. 10. 22

첼로와 지휘봉을 무기로

‘황소 같은 체력‘이라는 평을 듣던 카잘스Pablo Casals도 1973년10월 22일, 끝내 만년의 망명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심장 발작으로 영면에 들었다. 시신은 부인 마르타 카잘스Marta Casals 에의해 구리와 아연으로 만든 튼튼한 관에 안치되었다. 프랑코 정권이 쓰러지고 스페인에 민주주의와 카탈루냐 자치가 회복되면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유언이 실현될 날을 위해서였다.
"범인만이 인내를 모른다. 위대한 인간은 기다릴 줄안다" 라는 말은 카잘스의 좌우명이었다. 실제로 그는 고국 카탈루냐로 귀환할 그날을 96세를 넘길 때까지 끊임없이 기다렸다. 프랑코 역시 82세의 고령까지 끈질기게, 그러니까 카잘스가 죽은 2년 뒤까지 살아 있었던 탓에 결국 카잘스의 생환은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카잘스는 죽어서도 여전히 명예로운 귀향의 그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 P36

어느 날 프라드의 자택으로 독일군 장교가 찾아와 독일에서 연주를 하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카잘스는 "내가 스페인으로 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대답하며 히틀러가 통치하는 독일의 연주 요구를 거절했다. 나치 붕괴 후 카잘스를 찾은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은 유대인들을 보호했다고 변명했지만, 카잘스는음악적인 관점에서는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인격의 가치가 크면 클수록 그 행위에 대한 책임도 그만큼 막중하다며 엄격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않았다. 후에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이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브람스의<더블 콘체르토>Double Concerto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협주곡)를 녹음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2~3년을 미룬 끝에 거절했다. 메뉴인은 이를 카잘스의 ‘예술가로서의 독립의 한계‘를 드러내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 P39

인류가 달 표면에 내려섰을 때, 카잘스는 그것이 "금방 잊히고 말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 말을 들은 어떤 이는 "카잘스는 운송기관이 말에서 우주선으로 진화하는 것을 보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고 한다. 전세기 말에 스페인 왕실의 총애를 받던 카탈루냐의 한 음악가가 전쟁과 내란의 한 세기를 지나오면서 20세기의 "예술과 도덕의 흔들리지 않는 결합의 상징" (로맹 롤랑Romain Roland)으로 불리게 되기까지의 길은 ‘운송기관의 진화‘ 정도가 아니라 한편의 흥미진진한 대하역사소설이라 할 만한 것이다. - P40

카탈루냐 Catalua

스페인 북동부 자치지역. 바스크와 함께 대표적인 분리주의 운동 지역이다. 상공업이 발달한 경제 중심지로, 스페인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이는 고유어를 가지고 있는 등독자성이 강하다. 12~15세기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성했으며, 1469년 아라곤 카스티야 합병 후 마드리드에 정치적 주도권을 내줬다. 1640∼1659년의 대규모 반란이실패하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5~1714)에 휘말리면서 1716 년 자치권을 잃었고,
19세기 후반부터 사회주의 · 아나키즘 운동과 자치독립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1931년 공화제 실시 후 다시 자치권을 획득했고, 내전에서 인민전선의 거점으로최후까지 프랑코에 저항했다. 내전 종식 후 프랑코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카탈루냐어 사용을 금지했다. 프랑코 사후 다시 자치권을 얻으면서 급진 민족주의자와 일부 좌파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2006년에는 과세권, 사법권, 이민관할권 등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대폭 강화하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화가 피카소, 달리, 미로와 건축가 가우디 등 많은 20세기 예술의 거장을 배출했다. - P41

사코와 반제티

니콜라 사코
구두 직공. 아나키스트 이탈리아-> 미국
1891. 4. 22~ 1927. 8. 23
바르톨로메오 반제티
생선 행상. 아나키스트 이탈리아-> 미국
1888. 6. 11~ 1927. 8. 23

21세기를 상징하는 사법 살인

그는 부르주아의 위치에서 드레퓌스Alfred Dreyfus를 옹호하는것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사코를 옹호하는 것은 나자신을 적으로 삼아 파괴하려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파수견들』Les Chiens de garde)드레퓌스 사건과 사코 · 반제티 사건은 모두 세계적인 누명사건이지만, 특히 사코·반제티 사건은 가난한 이주노동자가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계급 대립의 격화와 노동자계급의 조직화, 아울러 노동시장의 세계화라는 1920년대의 시대상황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두 사람의 비극을 조명하면서 자신의 ‘정의‘의 내실을 되물었던 것이다. - P43

1920년 4월 15일, 매사추세츠 주 사우스브레인트리에서 제화회사의 회계부주임과 경비원이 피살되고 약 1만 6,000달러의 급료가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5월 5일, 사코와 반제티가 이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은 증언이나 증거 모두 근거가 빈약했고 배심원단의 구성 등 소송 절차 면에서도 문제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피고가 아나키스트였다는 점 때문에 일종의사상재판 같은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검사는 피고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병역을 기피한 점을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 "병역거부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라는 등의 질문을 반복했다. 이에 대해 사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P44

나는 이 나라에 와서 열심히 일했다. 13 년 동안이나 일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은행에 저축도 할 수 없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도 없다. 나는 인간이 인간답게 생활하는 것이야말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인간이 자연이 준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노동하며 매일 좀더 나은 생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전쟁 - P44

이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부자들을 위한것이다. 과연 서로를 죽일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나는 아일랜드 사람을 위해서 일했다. 또 독일인 친구들과 함께 일했고, 프랑스인이나 그밖의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함께 일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이들을 좋아한다. 왜 내가 이런 사람들을죽이러 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전쟁을 믿지 않는다. 내가 사회주의자를 좋아하는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 P45

이처럼 반공과 배외주의라는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사코와 반제티의 재판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1927년 6월 1일, 두 사람은 유죄 선고를 받는다. 변호사 측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매사추세츠 주지사에게 청원하려 했지만, 사코는 "아무 죄도 없는 내가 왜 ‘간청을 해야만 하는가?"라며 서명을 거부했고, 결국 반제티만이 청원서에 서명했다. 주지사는 자문위원회에 재조사를명했으나, 재판이 정당했다는 위원회의 보고서를 근거로 청원은 각하되었다.
그리고 8월 23일, 마침내 전기의자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집행 하루 전날, 반제티는 사코의 아들 단테에게 "네 아버지의 무고함을 잊지말거라. 아버지의의연하고 고결한 태도를 배워라" 라는 편지를 남겼다. 형 집행에서 반세기가 흐른 1977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공식 성명을 통해 두 사람의 무죄를 인정했다고 한다. - P46

에른스트 톨러
극작가 독일  
1893. 12. 1~1939. 5. 22

바이에른 혁명의 한 줄기 빛

1914년 7월,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 유학 중에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들은 톨러는 급히 귀국하여 자원 종군했다. 동시대의 독일 청년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애국주의의 열광과 완전한 독일인이 되겠다는 감춰진 꿈이 그를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됭 전선에서 그는 어떤 계시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참호를 파던 중, 땅속에 묻혀 있던 인간의 내장이 그의 곡괭이 끝에 걸렸던것이다.

그러자 돌연 어둠과 빛이, 말과 의미가 분리되고 나는 인간이라는 간단한 진실을 파악한다.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나의 내부에 묻혀 있던 진실이다. 오직 하나의 모든 것을 이어주는 공통성이다.
죽은 인간,
죽은 프랑스인이 아니다.
죽은 독일인이 아니다.
죽은 인간 - P49

망명의 나날 속에서도 톨러는 투쟁을 계속했다. "타인의 고통에 민ㄱ궁지에 몰린 이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이르는 곳마다 고통이 강요되던 이 시대에 실로 다망했다."(노무라 오사무) 1937년경부터 건강이쇠약해지고 불면으로 고통을 겪으며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그는 내전의 한복판에 있는 스페인을 위한 원조활동으로 늘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1939년 1월 바르셀로나가 함락되고, 2월 말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코 정권을 승인한다. 마드리드 역시 3월 말에 항복해, 인민전선은 패배하고 만다. 파시즘의 발호에 이어 세계대전으로 돌입해가는 세계의 움직임은 이제 더 이상뒤집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 P52

꿈을 꿀 수 없는 사람에게는 살아갈 힘이 없다.

지난날 자신의 작품 속에 이렇게 썼던 에른스트 톨러는 1939년 5월 22일뉴욕의 어느 호텔 방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오랜 세월 자유를 위해 싸웠던 전사는 그저 잠들고 싶었을 뿐이다. 이 지상에서는 단하룻밤도 주어지지 않았던 그 잠을 다가올 밤도, 다가올 밤도 망각은 주어지지 않고, 추억만이 되살아온다. 1919년, 1920년의 뮌헨, 레테공화국을, 활동하던 날들을, 청춘을, 넘쳐흐르던 신념을. (클라우스 만Klaus Mann) - P53

카임 수틴
화가 러시아 출신→ 프랑스에서 사망 
1893~1943.8.9

뿌리 뽑힌 자의 불안

수틴Chaim Soutine의 이름인 ‘카임‘은 히브리어로 ‘생명‘이라는의미가 있다. 하지만 파리 몽파르나스에 있는 수틴의 묘비에는 ‘CHAIME‘로 잘못 새겨져 있고, 태어난 해 역시 1894년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연인이었던 게르다 그로트Gerda Groth는 수틴의 과거가 희뿌연 안개 저편에 가려져 있었다고 말한다. 게르다 역시수틴과 같은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망명한 인물이었다. - P55

고발이듬해인 1940년 5월 10일 나치 독일은 프랑스에 총공격을 개시하고, ‘독일인 게르다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프랑스 남부 피레네에 있는 캠프에 수용되고 만다. 게르다와 헤어지게 된 수틴은 새로운 연인과 함께 나치의 추적에 떨며프랑스 중부지방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다가 1943년 8월 9일 천공성 궤양으로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사망일시는 그의 이력 가운데 유일하게 확실한 날짜이다.
포그롬의 기억에서 도망치려 했던 그는 나치즘의 악몽에 쫓기며 세상을떠났다. 그의 작품에는 20세기의 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절규가 격렬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 P59

바실리 칸딘스키
화가 러시아->프랑스  
1866. 12, 4~1944. 12. 13

대상이 나를 방해한다

1993년 여름, 나는 뮌헨 교외의 무르나우를 찾아갔다. 1909년에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가 구입해 1914년까지 5년 동안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와 생활했던 집이 그녀의 유언에 따라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 집에서 보낸무르나우 시대는 칸딘스키 개인의 삶보다도 인류 회화의 역사그 자체에 결정적인 의의를 지닌다.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와
‘청기사‘ blaue Reiter를 결성한 것이나, "물질적인 것과 추상Der적인 것 속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것을 체험하는 능력을 자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Überdas Geistige in der Kunst(1912)를 집필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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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내가 써온 책의 주제는 다양하게 나눌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줄기 가운데 하나는 미술이다. 미술을 보는 관점이나 이야기하는 위치는 정통 미술평론이나 미술사 서술과는 조금 다르며,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 나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선 민족은 19세기 이래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역사의 과정에서 많은사람들이 헤어지고 흩어졌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에서 일본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존재를
‘재일조선인‘이라고 부른다. - P163

2014년 한국에서 출간된 졸저 나의 조선미술순례는 "조선‘이란 무엇이며, ‘미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란 누구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을 다시 한번 던져보려는 시도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라는 호칭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도 한국도 모두 영어로는 (고려가 어원인) 코리아 Korea 로번역되기 때문에 영어로 코리아 또는 코리안 아트로 표기해버리면 그 속에 잠재된 문제를 놓치게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역사적, 정치적 이유에서 최근까지 ‘조선‘을 민족의 호칭으로 사용하는 일이 반쯤은 터부시되어 왔다. 한편 북한은 정식 국가명으로
‘조선‘을 사용한다. 민족의 호칭을 둘러싼 이 같은 혼란은 사실이용어가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 분단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P167

나는 나의 조선미술순례에서 의도적으로 ‘조선미술‘이라는 호칭을 썼다. 현재 한국의 많은 독자가 이 용어를 듣고 직감적으로 ‘조선왕조 시대의 미술‘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미술‘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조선미술‘의 함의를 그렇게 닫아두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좀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본 민족의 총칭으로서 ‘조선‘이라는 말을썼기 때문이다. - P167

‘한국미술‘이라는 호칭을 굳이 쓰지 않은 이유는 ‘한국‘이 가리키는 범위가 민족 전체를 나타내기에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전 세계로 널리 퍼져나가 살고 있는 조선 민족 가운데 일부를 구성하는 국가의 호칭이며, 여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물론이거니와 재일조선인 및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포괄할 수 없다.
내가 ‘조선‘이라는 호칭을 고른 또 다른 이유는 ‘학대‘를 당한말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하나의 민족을 일컫는 호칭이었지만,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민족 차별적 부담을 지게 되었고, 민족 분단과정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짐을 지게 되었다.  - P169

일본에서 ‘조선‘이라는 말은 ‘열등한 것‘, ‘후진적인 것‘을 가리키는 차별어의 뉘앙스가담겨 있으며,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북쪽 나라를 떠올리게 한다고 금기시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조선‘이라는말을 입에 담을 때 긴장과 불안, 때때로 공포마저 느끼곤 했다. 그렇기에 더욱 나는 어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이 말을 쓰고 있는셈이다.
‘나의 조선미술순례』는 내가 조선 민족의 미술가들과 만나고 나누었던 대화를 소재로 삼아 묶어낸 미술 순례의 기록이다.
책에서 다뤘던 신경호, 윤석남, 이쾌대 등 여덟 명의 미술가 중에 - P169

는 정통파적 ‘한국미술사‘ 서술로부터 주변화되거나 또는 완전히무시되어왔던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나서서 이런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이유는 ‘우리미술‘이라는 기성 개념 안에 틈을 만들어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우리미술‘이라고 말할 때는 단지 ‘조선‘이라는 장소에서 만들어진 미술을 가리키는 것 이상으로, ‘우리‘라고 하는 어떤 민족적, 국민적 본질을 가진 미적 정수 같은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래서 ‘우리‘라는 상상이 본질화되고 강화되는 경향이 생겨나는 듯하다.  - P171

 ‘우리‘라는 말을 의문의 여지없는 하나의 전제로 사용한다면, ‘우리‘의 개념을 점유하고(즉 자신들만이 ‘우리‘라고 주장하고) 타자를 배제하게 된다. 언어를 예로 들어보면, 어떤 언어를 자유롭게 쓰는 자만이 ‘우리‘에 속하며, ‘우리‘란 바로 그 특정한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순환논법에 따라 배타적인 자의식을 강고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언어‘를 ‘미식‘으로 치환해보면, ‘우리미술‘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이해할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어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인여러 조건으로 규정된 ‘콘텍스트(맥락)‘로서 이해해야만 한다고 - P171

주장한다는 편이 맞겠다. 우리는 언어나 미의식, 나아가 ‘혈통의공통성‘과 같은 상상으로 지탱되는 ‘우리‘가 아니라, 근대사의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고, 지금까지도 분단과 이산이라는현실을 체험하고 있는 그런 ‘우리‘인 셈이다. - P173

원래 영어로는 ‘조선‘도 ‘한국‘도 모두 ‘KOREA‘다. 일본인이 멸시적으로 사용한 ‘조선‘이라는 일본어 어감마저 이곳 청중에게 전달되었던 걸까.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가며 답하려고노력했다. "나는 ‘조선‘이라는 말을 학대에서 구해내고 싶습니다.
식민지 지배자가 멸시적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 말을 기피한다면 학대에서 구출할 수가 없으며, 오히려 그 학대를 추인하는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던 그때 내 뇌리에는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난어머니가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나는 일본 아이들로부터자주 "조선!"이라고 불리며 괴롭힘을 당했다. 집으로 돌아와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을 보고서 어머니는 나를 꼭 안으며 "조센은 조금도 나쁜 게 아니야. 나쁜게 아니야."라고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여주었다. 학교도 다닌 적이 없고 오랫동안 글도 읽지 못했던 어머니의 따뜻한숨결. - P175

"미술대학에 다니던 무렵은 매우 정치적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진행 중이었던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와관련된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가 내게 ‘왜 아프리카에 관한작품을 하지 않지? 정통 아프리카의 미술 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매우 서구적이고 현대식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정통 아프리카의 미술‘이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나는 런던의 어느시장에서 아프리카 천을 취급하는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내가 아프리카산이라고 생각했던 직물이 실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영국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아프리카의 아이덴티티가 식민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된 것이죠." - P187

쇼니바레는 교수가 바라는 식으로 ‘아프리카적‘인 미술을 제작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아프리카적‘인 것을 거부하고 ‘영국적인 것에 동화되지도 않았다. "아프리카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아이덴티티 자체에 대한 질문을 작품화한 셈이다. 물론 뒤집어생각해보면 "과연 ‘영국적‘이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영국 보수당의 최초 여성 당수로서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마거릿 대처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수상자리에있었다. 쇼니바레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대치는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그 시대로 되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무척 재미나죠." - P189

쇼니바레가 이 작품에서 그려낸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세상"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저렇게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지닌 아프리카 남성은 존재할수 없었다.
‘아프리카‘는 빅토리아 왕조 상류계급의 살롱을 장식한 호화로운 물건들에 새겨져 있었다. 비단과 면직물, 붉고 화려한 고급염료는 식민지가 없었다면 손에 넣기 힘든 물건이었다. 상류층이누리는 쾌적함은 빅토리아 시대의 노동계급이나 아프리카와 아시아 같은 식민지에서 착취한 부를 통해 얻은 소산이었다. 그러나쇼니바레는 그런 사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결코 훈계하듯 말하지 않는 것이다. - P193

요컨대 그는 의도적인 전략을 가지고 이 MBE라는 칭호와 놀고, 또 놀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제국 측의 입장에서도 이른바 ‘넓은아량‘을 과시하며 작가와 작품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교묘한 전략이 있을 터다. 그렇기에 쇼니바레의 유리병 속 넬슨 제독의 배가 국립 해양박물관에 상설 전시되기도 하는 것이다. 잉카쇼니바레의 전략에 대해 성급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신중해야하겠지만, 이 작가가 숙고한 끝에 펼쳐낸 전략을 무기 삼아 제국과 격투하고 있다는 점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프리카 천을 소재로 사용한 그의 작품은 귀여우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분명 유명 패션 브랜드로부터 유혹의 손길이뻗쳐왔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돌아왔다. "제 작품에는 이중성이 있어서 항상 어두운 측면이 내재합니다. 그렇지만 ‘베네통‘에는 그런 면이 없지요." - P201

그 점에서 쇼니바레는, 예를 들자면 1953년 가이아나 조지타운 출생의 여성 아티스트 잉그리드폴라드 Ingrid Pollard (1953~ )와는다르다. 나는 폴라드가 쇼니바레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갖고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폴라드의 작업에는 쇼니바레와 공통점을 보이면서도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 그녀가 카리브해 지역(가이아나)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사실과도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다. 폴라드는 아래의 글을 통해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노예들의 후예라는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 P207

조개껍데기를 찾고 있었다. 장화를 신은 내 발밑에 파도가 밀려온다. 파도가 실어다준 것은 뱃머리로부터 떠밀렸던내 형제자매들의 잃어버린 혼이다. (하기와라 히로코, 『블랙』, 마이니치신문사,2002년) - P207

일반적인 백인 남성은 느낄 수 없는 감각일 것이다. ‘전형적인영국의 풍경, 그 속에 몸을 두는 행위 자체가 ‘노예 출신의 여성‘
에게는 강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그들, 백인은폴라드의 선조를 사냥감으로 취급하며 몰이를 했고 반항하면 채찍질을, 때때로 강간도 서슴지 않았으며, 결국 죽으면 대서양에 내던져버리던 자들이었기에 백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목가적인풍경조차 그런 불안과 공포를 불러와 그녀의 마음속을 휘저어 놓았던 셈이다. 백인 주류 계층은 폴라드의 작품을 통해 그런 감각을 아주 일부만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 P211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의 미술은 우리에게 이러한 시점, 다름 아닌 ‘타자의 시점‘을 요구한다. 무척이나 힘겹지만 우리의 시야를 확실하게 넓혀주는 요구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 남성인 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아갔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말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 걸까?
잉그리드 폴라드의 작품을 알게 된 후, 스스로에 대한 그런 의문들이 복잡하게 뒤얽히고 있다. - P211

결국 1821년 로마에서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과 등졌고 그곳 신교도 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Herelies one whose name was writ in water.(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자가잠들어 있노라.)"라는 글귀가 있다.


우수는 미와 함께 산다, 죽어야만 하는 미와 함께,
그리고 작별을 고하느라 항상 그 입술에 손을 대고 있는기쁨과, 그리고 꿀벌의 입이 빨고 있는 사이에도
독으로 변해버리는, 쑤시는 듯한 쾌락 가까이서.
아, 바로 환희의 신전에
베일 쓴 우수는 그녀의 성단을 갖고 있어
정력적인 혀로 기쁨의 포도를 그 예민한 입천장에 대고
터트릴 수 있는 자 외에 누구도 그것을 볼 수가 없다.
그 영혼은 우수의 강력한 슬픔을 맛볼 것이고,
그녀의 구름 낀 트로피들 사이에 매달려 있게 될 것이다.
-존 키츠, <우수에 부치는 송시> 제3연 - P227

햄스테드에 있는 키츠 기념관은 소박하고 얌전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정원 가득한 장미가 옅은 향기를 풍겼다. 키츠가 병든 몸을 뉘었던 침대가 남아 있으며 데스마스크도 전시하고 있었다. F와 나는 이렇게 고요한 공간에 몸을 두는 것을 좋아한다. 지나가버린 한 시대의 공기가 그곳에 그대로 남아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재능에 기대어 ‘낮은 신분‘을 극복하고 이뤄낸 입신양명, 비극적인 상황마저 작품으로 전환하여 창조했던 열정, 당시에는 불치로 여겼던 결핵과의 투병, 고전과 고대를 상징하는 이탈리아를 향한 동경, 결실을 맺지 못했던 사랑, 그리고 비통하고도감미로운 죽음………. 키츠에게 해당하는 이 모든 것이 낭만주의자를 구성하는 요소다. 이러한 면에서는 터너와 공통점이 있다. 다만 터너는 오래 살았다. - P229

영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풍경화가 터너와 컨스터블은 거의동시대를 살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작품이 주는 인상은 전혀다르다. 컨스터블을 정, 평화, 조화라고 한다면, 터너는 동動, 투쟁, 혼돈이다. 전자를 삶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죽음이다. 어째서이렇게까지 대조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에게 컨스터블이 ‘마음에 드는‘ 화가라면, 터너는 ‘마음을 술렁이게 하는 화가다 그래서 더욱 터너에게 끌린다. - P233

어떤 울분과 야망이 터너를 그토록 밀어붙였던 걸까? 내상상은 그의 성장 배경,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로 향한다. 터너는 코번트가든에 있는 이발소 집 아들이었다. 결코 상류계급이나 부유층 시민이 아니었다. 이러한 출신 배경을 지닌 이들 가운데 예외적인 재능을 부여받은 자만이 ‘출세‘를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아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당시는 견고한 신분사회가동요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아주 적은 가능성이 싹트던 시대였을것이다. 마부의 아들이었던 키츠도사정은 다를바 없었다.
터너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차리고 출세를 응원했다. 아들 역시 기대에 부응하고자 부단히 솜씨를 연마했다. 하지만 터너의 어머니는 정신질환을 앓던 사람이었다. "그의 모친은 무척 신경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는데 정도가 너무나 심했기에 결국 (1800년) 병원으로 이송될 수밖에 없었다.  - P249

터너의 가족사는 밤바다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는 작은 조각배를 연상케 한다. 강풍과 거친 파도는 어머니를 비유한 것이리라. 이는 저항하기 힘든 인간의 운명이자 "결국 패배로 끝나버릴
‘덧없이 반복되는 희망‘에 불과한 싸움"인 셈이었다. 다만 순수하게 화업을 연마하는 일만이 터너가 손에 움켜쥘 수 있는 생명의끈이 아니었을까. 그 생명선은 결국 지위와 큰 부를 안겨줬지만 만년의 터너는 재산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후진 양성에 뜻을 두었고 자신의 작품을 정리하여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터너가 죽은 뒤 으레 벌어지는 유산상속분쟁으로 인해 번거로운 절차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 P251

‘도의적 책임‘에 관해서는 애매하고 넌지시 언급하지만 법적책임이나 공식 사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한다. 이것이 현시점에서 전 세계 옛 식민지 종주국이 견지하고 있는 공통된 태도다. 아시아 침략에 대한 일본의 자세 역시 마찬가지다. 블레어 정권은 "영국은 노예무역에 대해 깊은 비통함과 유감의 뜻을 표명‘
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했지만 공식적으로 ‘사죄‘한다는 언명은없었다. "완전하고도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영국 국교회 지도부와 아프리카계 영국인 일부로부터 제기됐다. 여러 인권 단체 사이에서도 일련의 200주년 기념행사는 기만적이라고 강한 불만이 오갔다. 백인의 공적에 초점을 맞추면서 노예제에 저항했던 흑인의 역할을 경시했으며, 왕실 역시 오랜 시간에 걸쳐 노예무역을 비호했다는 비판이었다. 기념 의전에서 1인 시위를 통해 항의했던 그 사람도 아마 이러한 점을 호소했을 것이다. - P259

제작 동기는 인도주의였을까, 아니면 화가로서 지닌 욕망이었을까. 어느 쪽이라고 여기서 확정할 수는 없지만, 내 개인적인견해는 후자 쪽으로 기운다. 그렇다고 터너를 비난하려는 의미는아니다. 정치적 신조는 어찌 되었든 그는 예술가로서 단호히 행동했다. 좋건 나쁘건 ‘뼛속까지 화가‘였다.
터너의 작품을 가장 풍부하게,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곳이 테이트브리튼이다. 이 미술관은 설탕 정제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리버풀의 부호 헨리 테이트 경이 자신의 회화 컬렉션을 1889년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이렇게 풍요로운 컬렉션과 미술관도 근원을 밝혀보면 노예제와결부된 대서양 삼각무역이 가져다준 결실인 셈이다. 역설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야말로 영국적‘이라고 해야 할까. - P261

영국 기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특히 그녀의 죽음과 관련하여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케임브리지의 교외 그랜트체스터를 방문했을 때 그 생각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버지니아울프의 죽음을 쓰기 위해서는 그녀가 몸을 던져 스스로 삶을 마감했던 우즈강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인 서섹스 주 로드멜마을을 찾아가 버지니아와 레너드의 자택 몽크스하우스를 보고싶다는 마음도 점점 간절해졌다. 일정상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영국에 도착하니 출발전 예정에는 없었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취재와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주제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와 역사 문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맡아야 하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 취재에 응했고 서섹스행은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 다큐멘터리는 방송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말하면 방영되었는지 어땠는지 연락조차 받지 못했다. - P271

버지니아 울프는 1941년 3월 28일 금요일, 자택 근처의 우즈강에 빠져 자살했다. 59세였다. 내가 읽은 버지니아 울프에 관한몇 권의 책 가운데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서술은 나이젤 니콜슨Nigel Nicolson의 「버지니아 울프: 시대를 앞서간 불온한 매력』, 푸른숲,2006년)이다. 저자는 버지니아의 친구이자 애인이었던 여성 저술가 겸 원예가 비타 색빌 웨스트Vita Sackville-West의 아들이다. 그는어려서부터 버지니아의 가족과 친교를 맺었던 사람이기도하다.
나이젤에 의하면 3세기에 걸친 시간과 남녀의 성을 초월한주인공의 이야기 『올랜도』는 버지니아가 비타 색빌 웨스트에게바친 문학사상 가장 길고도 매력적인 러브레터다. 블룸즈버리 그룹은 남녀를 불문하고 성에 대해 진보적이었고 동성애적 관계라도 친밀한 우정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고 있었기에 버지니아와 비타의 관계도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룹의 일원으로 경제학자였던 케인스 역시 동성애자였다. - P275

버지니아는 3월 18일에 처음으로 자살을 기도했다. 그때 남편 레너드에게 남긴 유서는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가 다시 미쳐가고있다는 걸 느껴요."라고 시작한다. "나는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어요. 내가 당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라고 한뒤 "세상 누구도 우리 두사람만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끝맺는다. 유명한 유서다.
다만 이때 버지니아는 자살에 실패하고 흠뻑 젖은 채집으로돌아와 실수로 웅덩이에 빠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후 열흘이지난 3월 28일 정오 무렵, 집에서 반 마일 떨어진 우즈강까지 걸어가 "모피 코트 주머니에 돌덩이를 쑤셔넣고 물속으로 향했다. 수영을 할 줄 알았지만 물에서 떠오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분명 끔직한 죽음이었을 것이다."(나이젤 니콜슨, 앞의 책)276 - P277

내 마음을 끌어당겼던 자살자들은, 예를 들면 토리노의 자택 아파트 4층에서 몸을 던진 아우슈비츠의 생환 작가 프리모 레비, 파리 센강 미라보 다리에서 삶을 마감한파울첼란, 망명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교외에서 약물로 목숨을 끊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1881~1942) 같은 이들이다. 앞의 두 사람이 생을 마감한 현장에는 직접 가봤지만 브라질까지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나는 이들이 패배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의 자살은 생물학적인 생명 이상의 무언가에 이를 ‘이상‘이나 ‘주의‘라고 하든, 혹은 ‘미학‘이라 부르든) 충실하고자 했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P279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서"
라고 일컬어지는 버지니아의 마지막 글도 조금은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나는 오히려 레너드라는 인물에게 끌린다. 재능 있는 작가이기도 했던 그는 제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노동당에서 국제 제국주의 문제에 정통한서기 직책을 맡았다. 이후 국제연맹헌장의 초안을 쓰고제언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정신적으로 병을 앓아 자살미수를 거듭하는 아내에게 마지막까지 충실했던 삶이었다. 처절하다고까지 말할 법한 ‘사랑‘의 형태라고 할까. - P283

실제로 레너드와 버지니아는 나치가 영국 점령 후에 구속할대상자 리스트에 올라있었다고 한다. 표면상어떠했건, 이러한 긴장감과 버지니아의 자살이 관계없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버지니아의 집안에는 정신병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어린시절에는 배다른 오빠들에게 성적 학대를 받아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기도 했다. 그녀는 문학적으로 특이한 재능을 가졌으며매우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블룸즈버리라는 지식인 모임에서 여신처럼 숭배를 받았고 작가가 된 후는 기이할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집필에 몰두했다. 버지니아울프의 자살은 가슴 아프지 - P285

만, 세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살이라는 사건 옆으로 여성차별과 인종차별, 게다가 파시즘의 위협이라는 보조선을 그어보면, 근대라는 시대에 ‘개인의 존엄‘ (그리고 이에기초한 ‘자유‘와 ‘우애‘)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야비한 폭력에 의해 압살을 당해온 역사가 한눈에 떠오른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 미국과 유럽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목소리 높여 배외주의를 외치는 세력이 늘어가고 있다. 지금과 1930년대는 서로 닮았다. ‘이 시대의 버지니아들은 여기저기의 절망속에서 생명을 끊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과거로부터는 배울 수 없는 존재일까.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이 어려운 질문을 우즈강변에서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 - P289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가 다시 미쳐가고 있다는 걸 느껴요. 우리는 다시 그 끔찍한 순간을 극복해나갈 우 없겠지요. 그리고 이번에는회복될 수 없을 것 같아요. 귓가에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하고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최선의 일을 하려고 해요.
당신은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선사해주었지요. 당신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우리 두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을 누렸어요. 이 끔찍한 병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나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어요. 내가 당신의삶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 내가 없어야 당신도 당신 자신의 일을 해나갈 수 있어요. 당신은 할 수 있을 거예요. 난 지금 이것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잖아요. 읽을 수도없어요. 다만 내가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내 인생의 모든 행복은 당신 덕분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한결같이 인내해주었고믿을 수 없을 만큼 내게 따뜻했어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잘알거예요. 만약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건 당신이었을 거예요. 나에겐 지금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당신의 따뜻함만은 지금도 확신하고 있어요. 이제 더는 당신의 인생을망치고 싶지 않아요. 세상 누구도 우리 두 사람만큼 행복할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버지니아,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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