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시인·극작가 스페인 1898. 6.5~1936. 8. 19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
"이제 이 평원은 주검으로 가득 차게될거야…………." 친구에게이런 말을 남긴 채, 1936년 7월 13일 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는 고향 그라나다행 야간열차에 몸을실었다. 스페인 전역에 내전의 불길한 징후가 만연해 있었다. 친구들은 마드리드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충고했지만, 로르카는 끝내 그들의 말을 뿌리쳤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성페데리코 축일인 18일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로 아버지와약속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더 운명적인, 이를테면 ‘그라나다‘라는 땅 자체와 맺어진 무언가가 로르카를그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 P15
나는 우물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그라나다의 벽을 기어오르고 싶어, 캄캄한 물의 송곳에 뚫린 심장을 응시하기 위해서. (.....) 나는 우물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한 모금씩 음미해가면서 나의 죽음을 죽어가고 싶어, 나의 심장을 이끼로 가득 채우고 싶어 물에 상처 입은 아이를 바라보기 위해서.
- 「물에 상처 입은 아이의 카시다」 - P16
8월 16일 오후, 친구의 집에 은신하고 있던 로르카는 가톨릭계 극우정당스페인보자치연합CEDA의 의원 루이스 알론소Ruiz Alonso가 이끄는 부대에 체포당했다. 8월 19일 이른 아침 (일설에는 19일부터 20일 새벽 사이라고도 한다), 로르카는 그라나다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비스나르로 호송된 후 ‘푸엔테 그란데" Fuente Grande(커다란 샘)라 불리는 곳에서 다른 세 명의 희생자들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 더러운 남창 자식!" 이라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으면서, 그의 유해는 그곳에 있는 올리브 나무 근처에 묻혔다고 한다. - P17
로르카를 암살한 파시스트들은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그의 죽음이 ‘적색분자들의 내부 분열‘이나 어둡고 복잡한 애정(동성애) 문제 때문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1975년까지 오랫동안 이어진 프랑코 정권 시대 스페인에서로르카의 시집은 금서가 되고 암살의 진상을 입에 올리는 일도 금기시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스페인어권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감을 품으며 그의 시를읊었다. 그의 시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많은 스페인 민중의 자산이었고, 그리하여 암살당한 시인은 인간성과 자유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 P19
파블로 네루다 시인 ·외교관 칠레 1904. 7. 12~1973. 9.23
독재에 맞서 삶을 긍정한 시인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 「한 여자의 육체」,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1924)
풍만한 여자, 살.사과, 뜨거운 달, 해초의 짙은 냄새, 가장한 진흙이며 빛, 어떤 은밀한 투명함이 당신의 원주들에 두루 열리는가? 그 어떤 옛 밤을 한 남자는 자기의 감각들로 느끼는가? - 『100편의 사랑 소네트』(1959)
삶에 대한 긍정을 솔직하게 노래한 이런 시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군사독재와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정신적인 의지가 되고 있다. - P23
1934년, 네루다는 로르카가 있는 스페인으로 임지를 옮겼다. 하지만 "모든 것이 1936년 7월 19일 밤에 시작되었다". 프랑코의 반란과 스페인 시민전쟁의 발발, 그리고 로르카의 죽음. "스페인 전쟁은 나에게는 한 시인의 죽음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내 시를 바꾸어놓았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총살된 것이 아니라 암살된 것이다. (………) 이토록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괴물이, 이 지상에, 그의 고향에 있으리라고 대체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네루다 회상록』) 분명 스페인 전쟁은 네루다의시를 바꾸고 인생을 바꾸었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초연의 한가운데 그들은 서 있다. 타오르는 도화선처럼. <전사한 의용병들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노래>, 「마음속의 스페인』(1937) - P25
1936년의 스페인과 1973년의 칠레, 이 두 쿠데타가 네루다의 생애에 짙은 명암을 드리우고 있다. 파시즘이라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괴물‘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생애. 그 밑바닥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에 대한 긍정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독재의 강압과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인간해방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네루다의 시가 울려퍼질 것이다. - P27
잭 시라이 스페인 내전 의용군 일본 미국 1900?~1937. 7. 11-
스페인에서 전사한 비국민
잭 시라이의 시신은 밤이 이슥해진 뒤에야 다른 7명의 전사한 전우들과 함께 올리브나무 아래 매장되었다. 그 묘표에는 "잭 시라이, 일본인, 반파시스트, 그의 용기를 기리며" 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전 세계 55개국에서 약 4만 명에 이르는 청년들이반파시즘과 인간해방의 이상을 위해 국제여단으로 몰려들었다. 잭 시라이는 그들 가운데 유일한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본명과 출생지, 생년월일, 가족관계, 성장과정,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의 이력에관한 문헌이나 증언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사했을 때의 나이가 서른일곱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마저도 추정에 불과하다. 시라이는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지 않는 남자였다. - P31
그곳 일본인 사회에서는 시라이가 조선인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 그가 말이 어눌한 데다 일본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퍼졌을 테지만, 반전그룹인 일본인 노동자 클럽의 멤버조차도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음습한 차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역시 시라이가 스페인에서 차별과 빈곤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찾으려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 P33
시라이의 전사에 대해 뉴욕 주재 일본 영사관이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잭 시라이는 과거 일본인 어느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택했고, 그리고 죽었다. (………)한 조각의 영광도 없이, 조용히 살았던 것처럼 조용히 죽었다.(이시가키 아야코, 『스페인에서 싸운 일본인 戰¬六日本人)
가족, 고향,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버림받고 거부된 잭 시라이는, 바로 그때문에 더욱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는 꿈을 향해 자신의 몸을 내던질 수 있었던것이다. - P34
국제여단 International Brigades
2차대전의 전초전이자 파시즘과 진보적 민주주의의 국제전이던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공화파 국제의용군. 내전 발발 3개월 후인 1936년10월 14일 의용군 500명이 스페인 알바세테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국적과 언어를 넘어 총 4만여 명이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참가했다. 7개 여단으로 편성되어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던 이들은 프랑코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소련이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줄이면서 1938년에 해체되었다. 많은 작가와 지식인들도 참가해, 헤밍웨이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다큐멘터리 <스페인 땅>의 대본을 썼고, 앙드레 말로는 소설 『희망』을 발표했으며, 의용군으로 참전한 조지 오웰은 르포 『카탈루냐 찬가』를 썼다. 국제여단을 다룬 영화로는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1996)이 있다. 2006년 발표된 내전희생자 명예회복법안에는 국제여단으로 참가한 외국인들이 스페인 시민권을 쉽게 취득할 수 있게 하는 조치가 포함되었다. - P35
파블로 카잘스 첼로 연주가 지휘자 스페인 1876. 12. 29~1973. 10. 22
첼로와 지휘봉을 무기로
‘황소 같은 체력‘이라는 평을 듣던 카잘스Pablo Casals도 1973년10월 22일, 끝내 만년의 망명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심장 발작으로 영면에 들었다. 시신은 부인 마르타 카잘스Marta Casals 에의해 구리와 아연으로 만든 튼튼한 관에 안치되었다. 프랑코 정권이 쓰러지고 스페인에 민주주의와 카탈루냐 자치가 회복되면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유언이 실현될 날을 위해서였다. "범인만이 인내를 모른다. 위대한 인간은 기다릴 줄안다" 라는 말은 카잘스의 좌우명이었다. 실제로 그는 고국 카탈루냐로 귀환할 그날을 96세를 넘길 때까지 끊임없이 기다렸다. 프랑코 역시 82세의 고령까지 끈질기게, 그러니까 카잘스가 죽은 2년 뒤까지 살아 있었던 탓에 결국 카잘스의 생환은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카잘스는 죽어서도 여전히 명예로운 귀향의 그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 P36
어느 날 프라드의 자택으로 독일군 장교가 찾아와 독일에서 연주를 하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카잘스는 "내가 스페인으로 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대답하며 히틀러가 통치하는 독일의 연주 요구를 거절했다. 나치 붕괴 후 카잘스를 찾은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은 유대인들을 보호했다고 변명했지만, 카잘스는음악적인 관점에서는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인격의 가치가 크면 클수록 그 행위에 대한 책임도 그만큼 막중하다며 엄격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않았다. 후에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이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브람스의<더블 콘체르토>Double Concerto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협주곡)를 녹음하자고 제안했을 때도 2~3년을 미룬 끝에 거절했다. 메뉴인은 이를 카잘스의 ‘예술가로서의 독립의 한계‘를 드러내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 P39
인류가 달 표면에 내려섰을 때, 카잘스는 그것이 "금방 잊히고 말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 말을 들은 어떤 이는 "카잘스는 운송기관이 말에서 우주선으로 진화하는 것을 보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고 한다. 전세기 말에 스페인 왕실의 총애를 받던 카탈루냐의 한 음악가가 전쟁과 내란의 한 세기를 지나오면서 20세기의 "예술과 도덕의 흔들리지 않는 결합의 상징" (로맹 롤랑Romain Roland)으로 불리게 되기까지의 길은 ‘운송기관의 진화‘ 정도가 아니라 한편의 흥미진진한 대하역사소설이라 할 만한 것이다. - P40
카탈루냐 Catalua
스페인 북동부 자치지역. 바스크와 함께 대표적인 분리주의 운동 지역이다. 상공업이 발달한 경제 중심지로, 스페인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이는 고유어를 가지고 있는 등독자성이 강하다. 12~15세기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성했으며, 1469년 아라곤 카스티야 합병 후 마드리드에 정치적 주도권을 내줬다. 1640∼1659년의 대규모 반란이실패하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5~1714)에 휘말리면서 1716 년 자치권을 잃었고, 19세기 후반부터 사회주의 · 아나키즘 운동과 자치독립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1931년 공화제 실시 후 다시 자치권을 획득했고, 내전에서 인민전선의 거점으로최후까지 프랑코에 저항했다. 내전 종식 후 프랑코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카탈루냐어 사용을 금지했다. 프랑코 사후 다시 자치권을 얻으면서 급진 민족주의자와 일부 좌파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2006년에는 과세권, 사법권, 이민관할권 등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대폭 강화하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화가 피카소, 달리, 미로와 건축가 가우디 등 많은 20세기 예술의 거장을 배출했다. - P41
사코와 반제티
니콜라 사코 구두 직공. 아나키스트 이탈리아-> 미국 1891. 4. 22~ 1927. 8. 23 바르톨로메오 반제티 생선 행상. 아나키스트 이탈리아-> 미국 1888. 6. 11~ 1927. 8. 23
21세기를 상징하는 사법 살인
그는 부르주아의 위치에서 드레퓌스Alfred Dreyfus를 옹호하는것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지만, ‘정의‘의 이름으로 사코를 옹호하는 것은 나자신을 적으로 삼아 파괴하려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파수견들』Les Chiens de garde)드레퓌스 사건과 사코 · 반제티 사건은 모두 세계적인 누명사건이지만, 특히 사코·반제티 사건은 가난한 이주노동자가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계급 대립의 격화와 노동자계급의 조직화, 아울러 노동시장의 세계화라는 1920년대의 시대상황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두 사람의 비극을 조명하면서 자신의 ‘정의‘의 내실을 되물었던 것이다. - P43
1920년 4월 15일, 매사추세츠 주 사우스브레인트리에서 제화회사의 회계부주임과 경비원이 피살되고 약 1만 6,000달러의 급료가 강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5월 5일, 사코와 반제티가 이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되었다. 재판은 증언이나 증거 모두 근거가 빈약했고 배심원단의 구성 등 소송 절차 면에서도 문제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피고가 아나키스트였다는 점 때문에 일종의사상재판 같은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검사는 피고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병역을 기피한 점을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 "병역거부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라는 등의 질문을 반복했다. 이에 대해 사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P44
나는 이 나라에 와서 열심히 일했다. 13 년 동안이나 일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은행에 저축도 할 수 없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도 없다. 나는 인간이 인간답게 생활하는 것이야말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인간이 자연이 준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노동하며 매일 좀더 나은 생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전쟁 - P44
이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부자들을 위한것이다. 과연 서로를 죽일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나는 아일랜드 사람을 위해서 일했다. 또 독일인 친구들과 함께 일했고, 프랑스인이나 그밖의 다른 나라 사람들과도함께 일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이들을 좋아한다. 왜 내가 이런 사람들을죽이러 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전쟁을 믿지 않는다. 내가 사회주의자를 좋아하는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 P45
이처럼 반공과 배외주의라는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사코와 반제티의 재판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1927년 6월 1일, 두 사람은 유죄 선고를 받는다. 변호사 측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매사추세츠 주지사에게 청원하려 했지만, 사코는 "아무 죄도 없는 내가 왜 ‘간청을 해야만 하는가?"라며 서명을 거부했고, 결국 반제티만이 청원서에 서명했다. 주지사는 자문위원회에 재조사를명했으나, 재판이 정당했다는 위원회의 보고서를 근거로 청원은 각하되었다. 그리고 8월 23일, 마침내 전기의자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집행 하루 전날, 반제티는 사코의 아들 단테에게 "네 아버지의 무고함을 잊지말거라. 아버지의의연하고 고결한 태도를 배워라" 라는 편지를 남겼다. 형 집행에서 반세기가 흐른 1977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공식 성명을 통해 두 사람의 무죄를 인정했다고 한다. - P46
에른스트 톨러 극작가 독일 1893. 12. 1~1939. 5. 22
바이에른 혁명의 한 줄기 빛
1914년 7월,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 유학 중에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들은 톨러는 급히 귀국하여 자원 종군했다. 동시대의 독일 청년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애국주의의 열광과 완전한 독일인이 되겠다는 감춰진 꿈이 그를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됭 전선에서 그는 어떤 계시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참호를 파던 중, 땅속에 묻혀 있던 인간의 내장이 그의 곡괭이 끝에 걸렸던것이다.
그러자 돌연 어둠과 빛이, 말과 의미가 분리되고 나는 인간이라는 간단한 진실을 파악한다.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나의 내부에 묻혀 있던 진실이다. 오직 하나의 모든 것을 이어주는 공통성이다. 죽은 인간, 죽은 프랑스인이 아니다. 죽은 독일인이 아니다. 죽은 인간 - P49
망명의 나날 속에서도 톨러는 투쟁을 계속했다. "타인의 고통에 민ㄱ궁지에 몰린 이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이르는 곳마다 고통이 강요되던 이 시대에 실로 다망했다."(노무라 오사무) 1937년경부터 건강이쇠약해지고 불면으로 고통을 겪으며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그는 내전의 한복판에 있는 스페인을 위한 원조활동으로 늘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1939년 1월 바르셀로나가 함락되고, 2월 말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코 정권을 승인한다. 마드리드 역시 3월 말에 항복해, 인민전선은 패배하고 만다. 파시즘의 발호에 이어 세계대전으로 돌입해가는 세계의 움직임은 이제 더 이상뒤집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 P52
꿈을 꿀 수 없는 사람에게는 살아갈 힘이 없다.
지난날 자신의 작품 속에 이렇게 썼던 에른스트 톨러는 1939년 5월 22일뉴욕의 어느 호텔 방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오랜 세월 자유를 위해 싸웠던 전사는 그저 잠들고 싶었을 뿐이다. 이 지상에서는 단하룻밤도 주어지지 않았던 그 잠을 다가올 밤도, 다가올 밤도 망각은 주어지지 않고, 추억만이 되살아온다. 1919년, 1920년의 뮌헨, 레테공화국을, 활동하던 날들을, 청춘을, 넘쳐흐르던 신념을. (클라우스 만Klaus Mann) - P53
카임 수틴 화가 러시아 출신→ 프랑스에서 사망 1893~1943.8.9
뿌리 뽑힌 자의 불안
수틴Chaim Soutine의 이름인 ‘카임‘은 히브리어로 ‘생명‘이라는의미가 있다. 하지만 파리 몽파르나스에 있는 수틴의 묘비에는 ‘CHAIME‘로 잘못 새겨져 있고, 태어난 해 역시 1894년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연인이었던 게르다 그로트Gerda Groth는 수틴의 과거가 희뿌연 안개 저편에 가려져 있었다고 말한다. 게르다 역시수틴과 같은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망명한 인물이었다. - P55
고발이듬해인 1940년 5월 10일 나치 독일은 프랑스에 총공격을 개시하고, ‘독일인 게르다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프랑스 남부 피레네에 있는 캠프에 수용되고 만다. 게르다와 헤어지게 된 수틴은 새로운 연인과 함께 나치의 추적에 떨며프랑스 중부지방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다가 1943년 8월 9일 천공성 궤양으로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사망일시는 그의 이력 가운데 유일하게 확실한 날짜이다. 포그롬의 기억에서 도망치려 했던 그는 나치즘의 악몽에 쫓기며 세상을떠났다. 그의 작품에는 20세기의 뿌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절규가 격렬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 P59
바실리 칸딘스키 화가 러시아->프랑스 1866. 12, 4~1944. 12. 13
대상이 나를 방해한다
1993년 여름, 나는 뮌헨 교외의 무르나우를 찾아갔다. 1909년에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가 구입해 1914년까지 5년 동안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와 생활했던 집이 그녀의 유언에 따라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 집에서 보낸무르나우 시대는 칸딘스키 개인의 삶보다도 인류 회화의 역사그 자체에 결정적인 의의를 지닌다.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와 ‘청기사‘ blaue Reiter를 결성한 것이나, "물질적인 것과 추상Der적인 것 속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것을 체험하는 능력을 자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Überdas Geistige in der Kunst(1912)를 집필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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