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이 불탔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불이 났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10대 때부터 공산당 운동가였던 리나 하고 Lina Hag의 말이다. 리나는남편도 공산당 청년 모임에서 만났다.
화요일 오후 리나의 아파트 문 앞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회색 모자를 쓴두 사람이 나타난다. ‘악랄한 입과 노르스름한 얼굴도 점점 더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차갑고 불쾌한‘ 소리가 들린다. 경관들은 서두른다. "그들은 내가 점심거리를 불 위에 올려놓았고, 아기를 돌보고 있어서 꼼짝도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리나는 훗날 회고한다. 그들은 상관하지않는다. 경찰들은 리나의 딸을 이웃에 맡긴 후 옷걸이에서 그의 코트를벗겨서 던졌다. 그들은 "가자! 서둘러!"라고 말한다. 리나는 그 경찰들이새 주인들에게 ‘충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죄수들로 감옥을 채워야 한다. 리나의 말대로, "역사상 가장 피를 덜 흘린‘ 혁명에는 희생물이 필요하다."
1933년 2월 28일이다. 전날 밤에는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다.
"계단을 내려갈 때 아파트 여기저기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닫지만, 소리가 들린다." 거리로 나서자 갑자기 정말 추워진다. 리나는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느낀다. 창문마다 그를지켜보고 있다.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라고 썼다. 경관들은 리나를 고테스첼 교도소로 데려가 독방에 감금한다. - P283

그들은 리나의 남편을 이미 체포했다. 남편 알프레트 하그Alfred Haag는뷔르템베르크 주의회의 공산당 의원이다. 28세의 최연소 의원이다. 리나는 남편을 외국으로 도피시키려고 했지만, 남편은 거절했다. "내가 돌볼노동자들을 두고 떠나? 이제?"라며 남편은 아내의 제안을 거절했다. 새벽 다섯 시에 돌격대원들이 그를 잡으러 왔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장롱을 열어젖히고, 옷들을 꺼내서 집어던지고, 서랍을 뒤집어놓고, 책상을 샅샅이 뒤졌다"라고 리나는 기억했다. 그들은 사실 특별히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난폭한 행동을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돌격대원들이 알프레트를 데려가려고 준비할 때 리나는 남편에게 "당신은 의원이잖아요!"라고 말했다. 돌격대원 중 한 명이 비웃었다. 그는
"의원이라니, 너네도 들었어?"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어서 하그 부부에게 "너네는 빨갱이잖아! 너희 쓰레기 같은 범죄 조직은 이제 깨끗이처리될 거야!"라고 외쳤다. - P284

리나는 창가에서 돌격대원들이 알프레트를 끌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돌격대원들이 남편을 때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봤다. 리나는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하도록 딸을 창가에서떼어놓아야 했다.
리나는 크리스마스 특사 때 풀려난다. 알프레트는 그렇게 운이 좋지 않다. 정치범들끼리 정보를 주고받고, 리나는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게슈타포가 리나의 옛 친구를 뜨겁게 달아오른 난로에 밀어붙여 죽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프레트 소식도 듣는다. 알프레트는 오베러 쿠베르크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도 체포되기 전과 똑같이 용기 있게 행동했다. 그가 나치 깃발에 경례하지 않겠다고 하자 교도관들은 그를 잔인하게 - P284

다렸다. 교도관들의 강요로 "나는 더러운 놈입니다. 나는 노동자들에게거짓말하고, 그들을 배신했습니다!"라고 외치며 언덕을 기어올라야 했던적도 있다. 알프레트의 얼굴은 피범벅이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 ‘
리나 하그가 체포된 지 몇 주 후 돌격대원들이 마리아 얀코프스키 Mariabeamski의 현관에 들이닥친다. 얀코프스키는 베를린 쾨페니크 구의회의사회민주당 의원이다. 돌격대원들은 얀코프스키를 쾨페니크 본부로 데리고 간다. 그곳의 뜰에서 돌격대원들은 옷을 벗기고 나무판에 눕힌다.
그 후 검정-빨강-금색의 공화국 국기로 덮은 다음 2시간 동안 채찍, 곤봉과 쇠막대기로 마구 때린다. 때리면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노동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고, 국기를 "검정-빨강-똥"이라고 말하라고 한다.
그들은 "네가 실직 노동자들을 속였지? 불매운동을 할 나치 관련 기업 목록을 준비했지?"라고 물었다. 얀코프스키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때마다 괴롭히는 사람 중 한 명이 그의 얼굴을 낡은 넝마 조각들 사이로 밀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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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코프스키는 훗날 "최소한 백 대 이상 맞은 후 난 나무판에서 떨어졌다. 그들이 나를 다시 끌어올린 후 얼굴을 너무 심하게 때려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라고 회고한다. 돌격대원들은 "무엇보다 독일"이라는 구절이 들어간 독일 국가를 부르라고 한다. 1922년 이후 공식적인 국가가되었지만, 훨씬 오랫동안 국가인민당을 상징하는 노래였다.
돌격대원들은 사회민주당을 떠나고, 다시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매주 목요일마다 나치 사무실에 보고하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도록 얀코프스키에게 강요한다. 그 후 갑자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라고 그는 훗날 이야기한다. 그들은 그에게 물 한잔과 옷을 준다. 돌격대 지휘자는 부하 한 명에게 "숙녀를 밖으로 모셔다드려라"라고 명령하고, 정중하 - P285

게 인사한다. 돌격대원들은 얀코프스키를 거리에 두고 간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그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그는 간신히 살아남고, 평생 구타후유증으로 고생한다. 그리고 화재 사건 직후 자신이 체포되었던 사실을해외 언론에 알린다. 나치는 ‘잔혹 행위를 거짓 유포한 혐의로 얀코프스키를 기소한다. 2이것이 나치가 "전국 봉기"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1932년 8월에는 잔혹한 포템파 살인사건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았었다. 이제 1933년봄이 되자 돌격대원들은 법적인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다.
리나 하그는 "눈길을 돌리는게 낫다.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독일에서 그렇게 많은 걸 보는 일은 좋지 않다"라고 쓴다. - P286

히틀러가 총리가 되고,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경찰을 장악한 게 무슨의미인지 곧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1933년 2월 초부터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평화주의자, 지식인과 언론인, 예술가, 인권운동가와 그들의 언론 등 나치에 반대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겨냥해 법적 조치를 하거나 경찰을 동원하는 일들이 꾸준히 일어났다. 2월4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경찰이 정치 집회를 해산하고, 단체 결성을 금지하고, 언론을 폐쇄하는 광범위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법령에 서명했다. - P286

2월27일의 국회의사당 화재가 그렇게 중요해졌다. 히틀러 정부는 총선거를 다시 치르기 엿새 전에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일어난 화재가 테러범의 방화이자 공산주의자 폭동의 서막이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 아침, 비상사태를 이용해 공식적으로는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 비공식적으로는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으로 알려진 긴급명령을 내각이 통과시키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 긴급명령은 언론과 집회의 자유, 우편과 전보의 비밀유지, 무단으로 수색·체포구금되지 않을 자유를 단번에 없애버리면서 민주적인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의 중심을 뒤흔들었다. 국회의사당이 불타는 순간부터정부는 전국에서 수천 명을 체포하면서 반대파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은 12년에 걸친 히틀러 독재정권의 법적 토대가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 긴급명령을 히틀러 제국의 헌법이라고 불렀다.  - P287

판데르 뤼버가 혼자 행동한 게 아니라면 누군가의 음모에서 희생양이된게 거의 분명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음모였을까? 공범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고, 우리는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933년 2월의 상황에서 나치가 아니면 누가 경찰이 찾을지도 모르는(아니면 적어도 찾고 싶어 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여러 공범자를 국회의사당에 드나들게 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식적인 논쟁 말고도 나치 돌격대의 특정 집단이 범인이라는몇몇 구체적인 증거도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서 1933년에 나치의 비밀경찰 간부였던 루돌프 딜스와 한스 베른트 기제비우스Hans Bernd Gisevius는 돌격대원이었던 한스 게오르크 게베어 Hans GeorgGewehr가 국회의사당 화재의 주범이었다고 증언했다. 게베어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1933년에 그는 돌격대원들 중 방화 전문가로 유명했다. 게베어는 국회의사당에 불이 났던 밤에 어디에 있었는지에 관해 일관성도 신뢰성도 없는 말을 했다.  - P289

한편 돌격대원들은 불을 질렀든 아니든 화재 사건 후 며칠과 몇 주 동안마음껏 폭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폭력, 그리고 그러한 폭력 때문에 생긴공포가 반대파를 억누르고 새로운 정권에 대한 지지를 단단히 확보하는데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그게 집권하기 오래전부터 나치가 생각했던 일이었다. 1932년 8월에 히틀러와 힌덴부르크가 만난 직후, 펜 정부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에르빈 플랑크는 브뤼닝 정부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헤르만 핀더 Hermann Prinder에게 히틀러가 총리가 되면 나치가 돌격대를 국회로 보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퓐더는 이를 기록하며 "그뿐 아니다. 헬도르프 백작(베를린 돌격대 지휘관)은 돌격대를 며칠 동안 풀어놓으면 명단에 기록한 5천 명 정도의 반대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를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라고 썼다. 또한 백작의 말이 사실인지 의심하며 "나는 분명 나치의그러한 행동을 그냥 넘기지 않겠다"라고 썼다. 팬더가 서술한 일들은 국회의사당 화재 이후 실제로 벌어졌다. - P290

결국 나치에게 필요했고, 나치가 계획해 온 계기를 국회의사당 화재가제공했다. 공산주의 쿠데타 미수 사건이 나타났기 때문에 나치가 돌격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폭력 행위가 나타나면 공산주의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게 나치의 전략이었다. 그러려면 적당히 부정직하고 언론조작을 잘해야 했다. 괴벨스의 주된 임무였다.
괴벨스는 1933년 11월의 마리뉘스 판데르 뤼버 재판에서 증언하면서나치가 공산당원의 폭력에 대처했다고 설명하는 사례를 잘 보여줬다. 괴벨스는 1930년에 호르스트 베셀Horst Wessel이라는 나치 돌격대원이 살해당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공산당원이었던 노동자들을 전향하게 해서나치로 많이 데리고 왔던 나치 운동가를 겨냥한 계획적인 암살이라고 했다. - P294

그 시대 독일에는 여론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독일인이 나치의 선전을 받아들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증거에 따르면, 이미 나치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선전을 믿었고, 나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브라운슈바이크에 살던 한여성은 3월 초에 네덜란드에 사는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치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외국 언론에 이야기해서 사회민주당언론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서 "더는 놀랄 필요도 없어.
외국 언론은 언제나 나치에 대한 그런 가짜 뉴스를 퍼뜨리니까"라고 썼다.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얼마나 사랑하고, 찬양하고, 숭배하는지 어떤 외국인도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 P295

괴벨스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나 히틀러나루덴도르프와 달리, 다른 종류의 정치 선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상업광고를 본떠서 정치 선전을 했다. 괴벨스는 광고가 간단하면서도 어느정도 잠재의식에 파고드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소비자에게영향을 주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귀에 쏙 들어오고 기억하기 쉬운 구호가 정말 중요했다. 괴벨스는 뭐든 금방 배우는사람이었다. 히틀러의 이미지를 포장하고 선전하는 기술은 당대 최고의상업광고에 맞먹을 만큼 세련되거나 더 뛰어났다. 23 히틀러가 괴벨스를새로 만든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으로 임명하자 독일의 광고 전문가들은(일거리를 잃었다고 생각해서) 어느 정도 실망하기도 했지만,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다. 정부는 그들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규모로 광고를 해서광고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보여줬다. 광고 전문가들은 괴벨스도 자신들처럼 광고 전문가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 P296

1차 세계대전 경험 때문에 더욱 비합리성을 받아들이게 되기도 했다.
그 전쟁에는 합리적인 면이 하나도 없었다. 기관총의 포화 속으로 천천히걸어 들어간 게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희생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전쟁에서 얻을 수 있었던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4년 내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원초적인 증오를 강조하는 선전을 계속해서 들어야 했다.
히틀러는 의도적인 부정직성, 대중의 비합리성에 대한 걱정, 그러면서도 이러한 비합리성에 빠져들고 싶은 욕망 등이 모든 걸 모두 이용했다.
나치가 역사를 해석하는 열쇠로 인종을 강조하고, 모든 문제의 해답을 인종에서 찾았던 사고방식은 전쟁 전의 비합리성 그리고 전쟁 때의 폭력에서 자라났다. 인종에 대한 나치의 사고방식은 대놓고 반지성적이었다.
"피 끓는 생각"이 나치의 좌우명이었다. - P298

합리성에 대한 거부는 나치 운동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극우파 대부분이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서구 자유자본주의에 대한 거부와 맞물릴때가 많았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은 독일 ‘문화‘를 찬양하면서 자신이 깎아내리던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자본주의 ‘문명‘과 비교했다. 그는 나중에 마음을 바꿨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보수 성향 민족주의 작가 에트가어 율리우스 융은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은 "1789년에 거둔 승리의 상징"이었다고 경멸하듯이 썼다.
1789년에 거둔 승리는 다시 말해 프랑스혁명의 자유주의,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의미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계몽주의 운동으로 인해 뒤늦게 유럽 한복판에 등장했다", 독일인은 "전통, 혈통과 역사 정신으로 계몽주의 운동에 반대해야 한다고 융은 말했다."
당대 상황을 예리하게 관찰한 사람들은 나치가 비합리성에 호소하면서어떻게 이득을 얻었는지 잘 알았다. 훗날 미국에서 경영관리 전문가로 유명해진 피터 드러커 Peter Drucker 도 예리한 관찰자였다.  - P299

드러커는 역사학자들이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도 계속 알아내려고 애쓰는 몇몇 나치즘 요소를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나치와 파시즘의 주장이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도 잃어버린 분위기에서자라났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회문제에도 건설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어서 나치 사상은 그저 모든 것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상반되는 것을 모두 반대하기까지 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신앙심이깊은 사람과 무신론자를 모두 반대하고,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모두 반대하고, 무엇보다 유대주의를 반대했다.
이를 특별히 예리하게 관찰한 드러커는 사람들이 나치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데도 나치즘이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에 적대적인 언론, 적대적인 영화계, 적대적인 교회와 적대적인 정부가 나치의세력이 커지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 P300

나치의 거짓말, 나치가 하는말의 모순 그리고 나치가 얼마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하는 일은 또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지 지치지 않고 알려줬다"라면서, "만약 나치의 약속이 합리적이라고 믿어야 나치 당원이 될 수 있었다면 아무도 나치당원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결론을 분명하게 내렸다. 28드러커는 나치 선동가의 말을 듣고는 그 말이 나치 사상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농민들이 모여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곳에서 그가 선언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우리는 빵값이 내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빵값이 오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빵값이 변하지 않기도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민족사회주의(나치)의 빵값을 바란다‘라고 선언했다." 논리적인 일관성이 없는 분노와 증오가 만족스러운 사회 발전을 결 - P300

코 이뤄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치는 이러한 식의 비합리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즘은 "기적을 통해서만 과제를 이룰 수 있었다. 높은 빵값, 낮은 빵값, 변하지 않는 빵값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유일한 희망은 이것들과는 다르고, 아무도 본 적이 없고, 이성을 벗어나는 어떤 빵값에 있었다"라고 드러커는 말했다. 그 결과, 빈곤층과 소외계층을 위해 가장 열심히 싸워온 독일인이 대중의 민주주의 역량에 가장 환멸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1930년 선거에서 나치가 처음으로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을 때 프로이센주총리 오토 브라운은 민주주의 사상이 실패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보다 "갑자기어깨에 얹힌 책임감을 감당할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상당히 많은 독일인"에게 실패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 P301

1933년 초, 노련한 사회민주당 정치인이자 변호사인 볼프강 하이네 Wolfgang Heine는 친구 카를 제베링에게 편지하면서 "내가 보기에는 노동자 계급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가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 같다"라고 썼다. 제베링은 답장에서 "말할 것도없다"라면서 동의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정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 주어진권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에른스트 톨러 Ernst Toller는 1933년에 추방당한 후 완성한 우울한 자서전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이성에 지쳤다. 생각하고 성찰하는 일에 지쳤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성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통찰력과 지식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는지 의문스러워 했다." 관찰력이 뛰어난 정치 전문 기자 콘라트 하이덴 역시 독자들이 나치가얼마나 진실을 외면하는지를 파악하게 하고 나치의 거짓말에 잘 대응하게 이끌지 못하는 자신에게 좌절했다.  - P301

히틀러가 실제로 의회 토론에 참여한 건 이날뿐이었다. 사회민주당 대오토 벨스 Otto Wels 는 일어나 반대 의견을 말했다. 나치의 돌격대원들과 친위대원들이 사회민주당 의원들을 협박하고, 많은 좌파 의원들이 이미투옥되어 구타와 고문, 죽임까지 당하는 상황에서 벨스는 유창하고 감동적일 뿐 아니라 용기 넘치는 연설을 했다. "상대가 우리의 명예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는 언젠가 나치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갈것이며, 전 세계적인 비극에도 우리의 명예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면서, "자유와 생명은 뺏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명예는 가져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치의 정치 깡패들이 조롱하면서 비웃고, 큰소리로 욕설과 협박을 퍼붓는 가운데 벨스는 히틀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수권법도 영원불멸한 신념을 파괴할 힘을 당신에게 주진 못합니다... 우리는 박해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우리 나라의 우리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들의 확고한 신념, 애국심은 칭송을 받아 마땅합니다. 끝까지 신념을 지키는 용기, 굳건한 믿음이 더 밝은 미래를 보장합니다"라고 연설을 마무리했다.  - P309

그날 늦게 투표를 했고, 사회민주당 외의 모든 정당은 수권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14년 동안 공화국의 정신적 지주였던 중앙당 그리고 오랜 자유주의 정당인 독일인민당과 독일민주당이 모두 나치의 기세와 위협 앞에서 그들의 원칙을 버렸다.
하인리히 브뤼닝은 2차 세계대전 후 그와 몇몇 독일 국회의원들이 수권법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수권법의 지속 기간을 6개월로 제한하면서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으로 빼앗은 시민의 자유를 되돌려주는 법률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었다.
포츠담의 날에 가르니존 교회 행사 직전, 국가인민당의 원내 대표 에른스트 오베르포렌이 브뤼닝에게 이 계획을 이야기했고, 다음 날에는 오베르포렌의 친구 오토 슈미트 하노버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와 저녁을 먹을때 브뤼닝을 초대했다.  - P310

브뤼닝은 수권법이 2차 심사에 부쳐져서야 이를 깨달았다. "모든의석 뒤에 나치 친위대원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슈미트 하노버가 지나가면서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라고 브뤼닝은 회고했다. 슈미트 하노버는전날 밤 모임이 누설되었고, 자신은 감시당하고 있으며, 법률 개정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권법의 진짜 의미는 국회가 히틀러 정부에 4년 동안 입법권을 준다는것보다는,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뜻과 상관없이 권력을 휘두를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이 히틀러를 견제하던 보장책 중하나가 단번에 사라졌다. 이후 넉 달 동안 법치주의와 자유 같은 다른 보장책들도 대부분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고, 히틀러의 권력은 거침없이 강화되었다. - P311

대도시 베를린은 거의 완전히 박살났고, 독일 대부분을 외국 군대가점령했고, 독일인 수백만 명이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에서 사망했다. "우리가 1933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총통님!"이라는 몬케의 말은 진지했다. 히틀러도 동의하는 듯했다. 그리고 놀라운이유를 댔다. 1년 반만에 너무 빨리 권력을 잡아서 옛 체제가 아직 너무많이 남아 있었다고 히틀러는 말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가 아직 살아있을 때 권력을 잡았고, 기성 보수주의자들과 협상해야 했다. "여기저기에서 타협해야만 했지"라고 그는 불평했다. 믿을 수 없는 관리들을 많이임명해야만 했고, 그 때문에 정보가 자주 밖으로 새어 나갔다고 설명했다. 히틀러는 또 하머슈타인-에쿠오르트 슐라이허 그리고 사실 "이러한해충들 주변의 모든 패거리"에 "인정사정없이 책임을 물을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집권 18개월 후에는 자신의 태도가 훨씬 너그러워졌고, 어쨌든 독일의 경제·정치 상황이 크게 좋아지고 있었다고 했다. 히틀러는 "너무 친절했던 걸 나중에 후회했지"라고 말했다.
재임 초기에 대한 그 자신의 평가(친절해서 잘못되었다는)는 완전히 틀렸다. 총리가 된 후 18개월 동안 히틀러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기성 보수 세력이었다. 그들만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권력의 지렛대를 조절해서 히틀러를 총리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만이 히틀러를 제거할수도 있었다. 51기성 보수 세력, 그리고 히틀러 모두 이 사실을 알았다. - P313

히틀러를 지키는 ‘총통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부대원들이 보르지궁을 장악한다. 힘러의 친구로 게슈타포 고위 관리인 안톤 둔케른이 지휘하는 부대다. 친위대 정보 조직인 보안대(SD)의 사복 장교도 그곳에 있다. 베를린보안대 우두머리인 헤르만 베렌츠가 지휘한다. 친위대원들은 외부와 연결된 전화선을 모두 끊어버린 후 사무실 문마다 무장 경비병을 배치한다. "
파펜의 직원들은 조심스럽고 침착한 태도로 상황을 받아들인다. 헤르베르트 폰 보제는 "오늘 우리 모두 딱 걸렸는데"라고 동료들에게 썰렁하고 으스스한 농담을 한다. 다른 직원은 무력 저항은 하지 말자고 하면서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의연히 버티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하인리히 힘러가 직접 습격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제는 "좋은 조짐이 아니다"라고 무미건조하게 말한다. 동료들을 안심시키려고 태연한 척하지만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아차린다. 보제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가족에게 전해달라며 동료들에게 서류 가방, 도장이 새겨진 반지, 지폐 조금 등 자기 물건을 건넨다. - P319

그러나 히틀러가 권력을 얻자 융은 갑자기 신념을 바꿨다.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융이 보기에 나치는 그저교육받지 않은 대중의 의견이 세상에 달리 표출되었을 뿐이었다. 융은 폭력적이고, 법을 무시하고, 정직하지 않고, 반지성적이고, 기독교 원리를무시하는 나치를 경멸했다. 또 자신이 《열등한 자들의 지배》라는 제목의유명한 책을 쓴 걸 후회한다고 말했다. 13 어느 날에는 사회민주주의자 기자에게 "이제 사회민주주의자 누구하고도 팔짱을 끼고 싶다" 라고 말했다. 융이 1933년 2월에 친구 루돌프 페헬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 가장주목할 만하다. 루돌프 페헬은 《도이체 룬트샤우Deutsche Rundschau, 독일 전망》이라는 지식인층 대상 보수 성향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융은 "이 사람이권력을 잡은 데는 우리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어. 우리가 그를 제거해야해"라고 썼다.  - P323

사실 융의 생각은 1929년 정도부터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의 소수자 권리와 관련된 문제의 해결책으로 연방제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1924년에는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융이 유럽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정착시킬 방법으로 새로운 형태의 유럽연방을 구상했다는 사실이 더욱더 놀랍다. 15 프랑스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꿈꾼 유럽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융은 하나의 정치 연합체가 아니라 연방국가가 모인 연방 형태의 유럽을 구상했던 것 같다. 16그러나 융의 저돌적인 성격이나 낡은 사고방식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나치가 너무 제멋대로이고, 너무 대중적이라는 생각 때문에도 나치를 싫어했다. 또 기독교가 독일과 유럽 정치를 구성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생각했다. 융은 나치의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에 반대했지만 생각이 진보 - P323

적으로 바뀐 건 전혀 아니었다. 유대계 독일인이 탄압받는 건 그들 자신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융은 철강왕의 재정 지원을 받는 사람으로서 정치적인 글을 쓸 때 기업가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항상 신경을 썼다. 그러나 나치를 비판할 때는 두려움 없이 공격하고, 대놓고 빈정거릴때가 많았다. 17 1933년 6월, 그와 가톨릭 신자인 그의 친구 에트문트 포르슈바흐Edmund Forschbach는 베네딕토회인 마리아 라흐 수도원에서 열린 가톨릭 학술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법학자 카를 슈미트가 나치의 전체주의 방식 그리고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을 없애버린 방식을 찬양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융은 모든 정당이 없어져야 한다면 왜 나치는 없어지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이제 정당들이 사라진 나라에서분명 나치도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나치 지도자가 "저녀석을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보내야 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 - P324

부총리실 집단의 계획대로 되려면 파펜이 곧장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연락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파펜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머무는 노이데크 집을 급히 찾지 않도록 설득했다. 부총리실 참모들은스스로 좌절감에 빠져 있었지만, 파펜부총리는 히틀러의 말을 고분고분들으면서 더는 연설 내용을 퍼뜨리지 말라고 직원들에게 명령하기까지했다. 그다음 파펜은 며칠 동안 베를린을 비웠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을만나러 동쪽으로 간게 아니었다. 북쪽의 킬과 함부르크를 거쳐 베스트팔렌에서 가족 모임에 참석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정치적 실수를인정하는 일이 거의 없던 파펜이 1934년 6월의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인정했다. 그러나 파펜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만났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P339

다음 날, 게슈타포가 융을 체포하고 그의 아파트를 뒤졌다. 게슈타포는 웅이 파펜의 마르부르크 연설문을 썼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연설문 원고료로 파펜이 융에게 얼마를 줘야 할지 말다툼하면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였다. 파펜은 융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스트팔렌에서 날아와 융을 풀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도 괴링도 파펜을 만나주려고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파펜이 "그의 융 선생 때문에 " 자신을 만나려고한다고 로젠베르크에게 경멸하듯 말했다. 그러면서 히틀러 자신이 직접명령해서 융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게슈타포의 우두머리 하인리히 힘러는 융이 왕정 복귀를 주장하는 ‘오스트리아의 왕정복고주의자‘ 집단과 관련되었다는 몇몇 유죄 입증 자료를 찾아냈다고파펜에게 말했다.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하지만, 융은 며칠 안에 풀려날 것이라고 힘러는 약속했다.  - P343

히틀러는 총통 겸 총리‘라는 공식 직함을 얻었다. 모든 군인과 공무원은 히틀러에게 개인적으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이제 히틀러가 독재통치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졌다. 그를통제하거나 길들이려는 노력은 모두 완전히 실패했다. 제도적인 기반이있어야 정치적으로 제대로 맞설 수 있다. 1934년 늦여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당, 노동조합, 국회, 내각, 연방주와 돌격대 모두 힘을잃었다. 군대만 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군대 규모를 늘리기만 하면 장교와 병사들은 만족했다. 1934년 8월부터 시곗바늘이 전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영국과 미국을 물리치고, 독일이 동유럽에서 거대한 땅을 차지하면서 경제 강국이 되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렇다고 융과 보제의 희생이 모조리 헛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희생을본보기로 저항세력이 계속 나타났다. 1938년에 비슷한 집단(군대와 보수파정치인들)에서 시작되었고, 시간이 흘러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발퀴레 작전으로 이어졌다. - P347

"무슨 일이 있어도 계획대로 쿠데타를 해야 한다. 실패하더라도 쿠데타를 시도해야 한다. 실제로 성공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독일 저항운동 조직이 세계와 역사 앞에서 목숨을 걸고 결정적인 시도를 했다는 게 중요하다. 다른 모든 건 상관없다"라고 트레스코는 말했다."
융과 보제도 슈타우펜베르크, 트레스코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확실히 결함이 있는 영웅이었다. 자신이 속한 계층, 배경과 시대의 편견에서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고, 목숨을 잃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하면서 히틀러를 집권하게 했다는 죄책감을 갚았다. 암흑의 시대에 목숨을 걸었던그들의 용기 덕분에 독일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도덕적 토대를 가지게되었다. - P348

언론인들은 종종 복잡한 정치 과정을 간단한 공식으로 줄이려고 한다. 그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선거‘나 ‘항의 투표현 정치에 불만을 표하기 위해 비주류후보에게 던지는 표‘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왜 무너지고, 히틀러와 나치가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지 간단한공식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나치 운동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겪은 유럽의 각종 위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기에는 유럽 전역, 특히 패전한 나라들(패전한 것처럼 느꼈던 이탈리아에서도)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편 나치가 그 시대에 잘 맞기는했지만, 1932년까지도 힌덴부르크가 사망한 후 히틀러가 그렇게 권력을 - P348

차지하리라고 미리 내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 사람도 거의 없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차지하는 데는 분노와 증오만큼, 계산착오와 근시안이 많은 역할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나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지점을 살폈다. 패전의 충격 가운데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전쟁에 대한 특정 이야기를 믿었다. 명백하게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필요해서였다. 독일인 대부분은 1914년 8월의 태양 아래 나라가 멋지게 하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배신과 비겁함 때문에(등을 찔려서) 1918년 11월의 차가운 빗속에서 패전했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어느 부분도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나치는 8월과 11월을 끊임없이 대조하면서, 11월의 반역을 물리치면 하나되었던 8월로 돌아갈 수 있다고 약속했다. 국민이 과거를 어떻게 믿고 있는지는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이상으로 중요하다. - P349

지는 과거가 실세.
사실 독일은 영국과 미국, 프랑스의 압도적인 경제력에 기진맥진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서구의 세계 질서에 적응할지, 저항할지가 독일인에게던져진 질문이었다. 독일의 안과 밖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세계에 통합되고 이웃 국가와 평화롭게 지내는 독일이 곧 민주적인 독일이다. 세계를 향해 날을 세우는 독일은 전례 없이무자비한 독재국가가 된다.
초인플레이션 그리고 히틀러의 1923년 11월 비어홀 폭동 시도로 최고조에 올랐던 5년간의 정치·경제 위기를 겪은 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새로운 민주주의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한 가운데 독일은 국제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돌아왔다. 용기 있고 능수능란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같은 정치인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슈트 - P349

레제만은 국내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세계에서 독일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그가 극복해야 할장애물이었다.
독일의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반민주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대기업은 노조를 약하게 만들고, 국가가 관리하는 임금 중재 제도를 없애고 싶었다. 군대는 무기 구매 비용을 더 확보하고 싶었다. 농부들은 독일 농업을 집단 파산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하는 농산물 수입과 무역 협상을 중단시키고 싶었다. 불만의 뿌리는 같았다. 세계에서 독일의 위치가 1차 세계대전 패배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경제력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기업·군대·농부들은 똑같은 해결책을 들먹였다. 독일의 최대 정당인 사회민주당(군국주의에 반대하고, 국제 협력을 좋아하고, 민주주의·노동자·도시를 수호하는)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었다. 이는 사실상 사회민주당이 만들어낸 민주주의를 끝내고, 농부·군인·대기업 경영자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 기반을 찾는다는 뜻이었다. - P350

바이마르 공화국은 다른 종류의 분노와 증오로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독일 국민은 온갖 이유로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종교, 성 정체성과 도덕의 전통을 깨뜨리는 대도시가 싫었다.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특히 동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 후에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을 보고 불안해졌다. 기독교와 가톨릭 집단 모두 전쟁과 혁명으로 인한스트레스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심해졌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불만이 특히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신교도들 사이에서 합쳐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너무 유대인과 가톨릭의 세력이 강하고, 너무 현대적이고, 너무 도시적이고, 결국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했다고 느꼈다. 반유대주의 같은 문화코드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향한 불만을 실제 이상으로 표현한다. 반유 - P350

대주의 때문에 독일의 민주주의가 끝장나거나 히틀러가 등장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는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몹시싫어하는 민주적인 세계 질서를 비판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18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뒤집으려고 했던 집단 중 히틀러 같은 인물이통치하는,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독재정부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각자의 문제를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다. 또한 반대 세력과 타협하는 게 죽도록 싫었다. 나치가 불만세력, 특히 농촌 지역신교도의 분노를 가장 잘 포섭한다는 걸 증명하면서 정치 방정식이 바뀌었다. 1929년 이후의 어느 정도 세력 있는 반민주연합에 히틀러와 나치가 빠진 적이 없었다. - P351

그들의 관심사는 유권자의 과반수 표는커녕 최다 득표도 이끌어낼 수 없어서였다. 반면 히틀러는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군대를 재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을까? 독일의 보수적인 정치 엘리트는 점점 더 히틀러와 협력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히틀러와 나치 운동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지 않으면자신들이 자기 이익을 너무 많이 포기해야 했다.
장검의 밤은 히틀러를 향해 주류 정치인들이 추파를 보낸 일의 결말이었다. 후겐베르크에서 브뤼닝, 펜과 슐라이허, 융과 보제까지 보수주의자들은 차례차례 허를 찔리고, 밀려났다. 그들은 적잖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배신당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대한 지휘관이자 통합의 주역으로서의 명망을 지키면서 우파 민족주의 정부를만들겠다는 대단히 중요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결국, 힌덴부르크 - P351

는 한때 ‘보헤미아 졸병‘이라며 무시했던 히틀러에게 사로잡혔다. 그러고는 히틀러가 1930년대 초의 정치적 분열을 극복하고, 자신의 명망을 지켜줬다고 믿으면서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사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총리로 임명하는 바람에 자신이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지키려고 했던 명망을 분명히 그리고 영원히 망쳐버렸다.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종말은 갈수록 배타적인 음모론과 비합리성에 치우치는 문화 속에서, 거대한 반정부 운동이 엘리트들의 복잡한 이기주의와 결합한 결과였다. 바이마르에서의 민주주의 종말을 이국적인 나치 깃발,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돌격대원들의 행진과 분리해 바라보자. 갑자기 모든 게 가깝고 친숙해 보인다.
바이마르 시대 독일 정치가들은 대체로 교활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순진한 면이 있었다.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P352

문명국가에서는 히틀러에게 투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그의 재임 기간이 짧고, 힘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독일은 법을 잘 지키기로 유명한 데다 문화적인 나라였다. 독일 정부가 어떻게 제도적으로 독일 국민을 야만적으로만들 수 있었을까? 유대계 독일인은 독일에 깊이 동화되었고, 애국심이넘쳤다. 많은 유대계 독일인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져도 고향인 독일을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독일인이고 독일인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  라고 빅토르 클렘퍼러Victor Klemperer는 일기에 썼다. 그는 유대교 랍비의 아들이자 1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로 독일에 머무르기로 했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트레블링카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바비 야르 학살이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마지막 몇 달 동안 이뤄진 죽음의 행진을 1933년에 상상 - P352

할 수 있었던 독일인은 거의 없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순진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통 몰랐기 때문에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나중에 태어난우리에게는 당시 독일인보다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다. 그들의 사례를참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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