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에는 정치가 ‘대중적‘이 되었지만, 아직 방송을 잘 이용하지는않는다. 정치인들이 라디오 방송을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잘 활용하는 사람은 아직 거의 없다. 그들은 집회에서 소리치듯 라디오 마이크에 소리를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의 메시지를 영화와 음반을 통해 퍼뜨리는 실험을 하고 있지만 이 방법들은 아직은 새롭다. 신문과 집회로는 이미 나치 지지자가 된 사람들을 만날 수있다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포스터가 필요하다. 1932년 초,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우리의 전쟁은 주로 포스터와 연설로 치러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많은 포스터가 놀랍도록 비슷해 보인다. 웃옷을 입지 않고 주걱턱인 근육질 노동자가 손목에 묶인 쇠사슬을 끊는다. "인제 그만!"이라는 글도적혀 있다. - P207
또 다른 정치 포스터에서는 웃옷을 입지 않은 주걱턱 근육질 노동자가 칼을 들고 있다. 노동자는그 칼로 "나치 독재"라고 표시된 머리 셋 달린 뱀을 벤다. 중앙당의 자매당인 바이에른인민당의 포스터다. 또 다른 정치 포스터에도 반쯤 벗은 근육질 노동자가 등장한다.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심한 고통을느끼고 있다. 갈고리 십자가 모양으로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에 그리스도처럼 묶여 있다. 그리고 "하켄크로이츠 제국의 노동자"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사회민주당의 포스터다. 자유주의 성향의 독일국가당독일민주당의 후신은 일부만 벗은 게 아니라 완전히 벗은 근육질 남자를 등장시켜차별화했다. 독일인민당은 최소한 허리에 천은 둘렀다. 스프여성이 등장할 때는 옷을 모두 입고 있다. 얌전한 옷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묶고, 꿈꾸는 듯 눈을 반짝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오른팔을 올리고, 독일국가당과 함께 하는 "통합, 진보와 국가 공동체" 의 미래를 바라본다.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단호해 보이는 두 여성 중 한 명은 미래를 생각하며 웃는다. 나머지 한 명은 침울한 표정으로 "우리 여성"은 민족사회주의당(나치)에 투표하고 있다고 말한다. - P208
브뤼닝은 사실 선거 후 몇 개월 동안 사회민주당에 의존했다. 그가 불황을 이기려고 활용하는 어떤 긴급명령이든 사실 국회의 과반수 투표로 뒤집힐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이 ‘관용‘이라고 부르는 방침으로 보뤼닝 정부를 거듭거듭 지원했다. 브뤼닝의 정책으로 노동자 계급은 끔찍한 실업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사회민주당은 브뤼닝이 아무리못마땅해도 히틀러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지원했다. 브뤼닝이 물러나면 히틀러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게 분명하고, 히틀러는 최악이 되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더라도 ‘관용‘은 고통스러운 방침이었다. 때문에 사회민주당 핵심 지지자 중 많은 수가 화가나고 환멸을 느꼈다. - P210
슐라이허는 나치와 협력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유권자들이 왜 나치를 지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점이 한 가지 이유였다. 나치의 지지 기반은 불안정해서 정부 압력이나 지속적인 반대만으로도 흩어진다고 슐라이허는 생각했다. 또 대다수 나치 지지자가 사실공산주의자이고, 나치가 해체되면 공산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걱정되는 점은 공산당이 너무 강력해져 제어할 수 없게 되는 일이다. 많은 나치 당원이 공산주의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모스크바‘가 오래전에깨닫고, 그들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다고 슐라이허는 의심했다. 또 다른 이유는 슐라이허가 히틀러를 완전히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1939년 전에는 수많은 독일인과 세계 정치인들이 히틀러를 과소평가했다. 1931년 10월에 두 차례 만났지만, 슐라이허가 히틀러를 개인적으로만나도 평가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첫 만남 후 슐라이허는 히틀러가 "연설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흥미로운 남자"라고만 개인적으로 기록했다. 슐라이허가 나치 지도자에 대해 유일하게 고민한 점은 그가 자신의계획대로 움직일 것인지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당선에 도움이 될 것이란 점을 보여줘 그를 유인해야 한다." - P211
군대식 사고방식을 가진 브뤼닝은 자신을 힌덴부르크 대통령 부하로여겼고, 어느 정도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자기 정부의 각료들을 우파로 바꾸고, 자신이 외무부 장관을 맡았다. 이전에 국가인민당 소속이었지만 후겐베르크의 극단주의에 반대해서 당을 떠났던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가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이미 국방부 장관을 맡고 있던 빌헬름그뢰너 장군이 내무부 장관을 겸했다. 그러나 나치는 물론이고, 후겐베르크와 국가인민당의 주요 인물들은 계속 브뤼닝 정부를 반대했다. 브뤼닝은 여전히 국회에서 사회민주당에 의존했고, 따라서 우파가 보기에 프로이센의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슐라이허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좌절감도 커졌다. 16브뤼닝의 엉뚱한 충성심은 자신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바람에 총리 자리에서 빨리 물러나게 되었다. - P215
힌덴부르크는 은혜를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선거 결과로 브뤼닝을 비난했다. 힌덴부르크는 조금이지만 선거운동을 해야 했고 두 차례나 선거를치러야 했다며, 히틀러나 후겐베르크가 아니라 브뤼닝을 비난했다. 힌덴부르크의 불만은 계속 쌓였다. 실직자들을 동프로이센의 파산한 농촌사유지에 정착시키는 방안이 불경기를 이겨내기 위한 브뤼닝의 구상 중 하나였다. 힌덴부르크가 동프로이센 노이데크의 할아버지 집에서 지냈던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귀족 지주들은 그 구상을 정말 싫어했다. 힌덴부르크와 가까운 사람들은 브뤼닝 총리를 "농업 볼셰비키"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한편 1932년 봄에는 아마도 정치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돌격대 금지 문제도 있었다. - P219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독일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점점 더 심해지는 정치폭력은 대부분 나치 돌격대가 벌인다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를 했던 1932년 3월과 4월에 돌격대는 비상대책반을 소집했고, 히틀러가 승리하면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돌격대를 금지하는 안은 정말 타당했다. 하지만 이는 나치, 특히 돌격대를 이용하려는 슐라이허의 바람, 그리고그의 목적과 맞지 않았다. 슐라이허의 생각은 사건에 따라 오락가락했지만, 1932년 4월에는 돌격대를 금지하면 나치가 순교자처럼 보이게 되고, 다가오는 주의회 선거에 나쁜 영향을 줘서, 힌덴부르크의 평판이 나빠질것으로 예상했다. - P219
슐라이허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5월 2일 저녁에 브뤼닝과 개인적으로만날 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브뤼닝은 특유의 침착하고, 합리적이고, 무신경한 태도로 슐라이허가 계속 뒤에서 조종할 수만은 없다고 설득하려고 했다. 슐라이허가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서서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말했다. 그리고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에 영향력을 발휘해서 브뤼닝이몇 달 더 총리 자리를 지킨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슐라이허가 자신과의 대화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느낀다는 사실을 브뤼닝은 알아차렸다. 브뤼닝보다 인간관계에 능숙한사람이라면 누구든 예측할 수 있는 결과였다. 슐라이허가 간 질환을 앓는다는 사실을 알던 브뤼닝은 "앉아 있는 슐라이허 장군의 얼굴은 잿빛과누런색을 오갔고, 피곤하고 거의 아파 보였다. 몇 분 후 그는 흥분해서 나를 쏘아보았다. 누구든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몇 년 동안 그 얼굴의 특징을 보아온 사람이라면 ‘이제 끝났다‘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 P220
슐라이허와 나치는 함께 모의하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원하는 일들이 있었다. 돌격대 금지를 무효로만들고, 브뤼닝과 그뢰너, 프로이센의 브라운-제베링 정부를 무너뜨리는일이었다. 33슐라이허가 상처 입은 감정과 브뤼닝과 그뢰너에게 복수하려는 욕망때문에 어떻게 그렇게 나치와 합의를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않다. 또한 실질적인 우익 정부를 세우려는 좀 더 장기적인 전략과도 들어맞는 합의였다. 그들의 합의가 독일 민주주의에는 재앙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두 달 동안 모든 게 그들의 합의대로 진행됐다. - P222
1932년 4월 말, 브뤼닝과 그뢰너는 "날씨가 눈부신 날에 차를 타고 라인강을 따라 " 달리면서 보통 때보다 더 길고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가졌다. 달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브뤼닝의 마지막 기대는 하나씩 무너졌다. 그뢰너는 슐라이허가 자신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뢰너는 슐라이허를 어떻게 만났는지, 그가 경력을 쌓도록 어떻게 도왔는지 이야기하면서 "슐라이허를아들처럼 좋아했다"라고 말했다. 34Ne브뤼닝은 그뢰너에게 전쟁 때 최고사령부에서 일한 경험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그뢰너는 힌덴부르크에 관해 이야기했다. 1919년 여름부터힌덴부르크의 인격에 ‘심한 의구심‘을 가졌다고 그뢰너는 말했다. 군대가 계속 독일을 지킬 수 있다고 힌덴부르크가 약속하면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지 않으려고 했다. - P222
파펜은 군대를 떠나 정치계에 들어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파펜은중앙당에 들어갔고, 1921년에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념적으로는 국가인민당이 더 잘 맞았지만, 그는 국가인민당이 너무 신교도 색채가 강하다고 생각했다. 독일 정치에서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였다. 파펜은 첫 의원 임기 중 연설을 많이 했고, 이후10년 동안 때때로 여러 고위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중앙당의 주요기관지인 《게르마니아Germania)의 대주주가 되었지만, 파펜은 점점 더 자신의 당에서 고립되었다. 당의 규율을 자주 어겼고, 1925년 대통령 선거때에는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와 대결하는 힌덴부르크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파펜은 다시 한번 힌덴부르크의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1932년까지 파펜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라기보다 그저 연줄이 좋은 사람일 뿐이었다. 50파펜은 어느 모로 보나 귀족이었다. 온화하고, 세련되고, 항상 우아한옷차림이었다. 분위기가 세속적인 데다 가볍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프랑스어도 능통했다. 어느 면에서든 카리스마가 없고 진지한 브뤼닝과는 정반대였다. - P227
브뤼닝은 긴급명령을 이용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였다. 의회민주주의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의회 과반수의 지지를 끝까지 받았다. 브뤼닝 내각은 이론보다 실제에서 더 민주적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힌덴부르크와 슐라이허는 브뤼닝 내각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파펜 내각은 완전히 달랐다. 브뤼닝은 의회의 교착 상태에 대처하기 위해 긴급명령에 의존했지만, 펜과 슐라이허는 의회 정치를 완전히 끝내기 위해 긴급명령을 이용했다.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일기 작가 하리 케슬러 백작은 금방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브뤼닝이 물러나면서그저 "당장 의회민주주의가 멈췄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계의 위기가 높아지기도" 했다고 보았다. "아마 제3제국이란 축복을 기대해서인지" 베를린 증권거래소의 주가가 급등했다고 케슬러 백작은 냉소적으로 기록했다. - P229
1932년 7월 31일, 나치는 선거에서 이제까지 중 가장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38.3% 득표율로 국회에서 230석을 차지했다. 큰 차이로 이제 독일의최대 정당이 되었다. 두 번째로 큰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21.5% 득표율에133석으로 한참 뒤처졌다. 완전 자유선거에서 나치가 그렇게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일은 이후에도 없었다. 1931년 이후 경제 상황이 너무 나빠졌고, 외국 세력들에 휘둘리는 상황에 대한 독일 국민의 분노가 점점 더치솟고 있는 데다, 종교로 분열된 독일의 독특한 정치 구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놀랍지 않았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같은 신교도 농촌 지역이 또다시 나치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했다. 선거일 밤, 독일 북부와 동부를 휩쓴 나치 돌격대의 폭력이 개시되었다. 폭력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사회민주당 본부와 어느 진보적인 신문사에10여 차례 방화를 저지르면서 여섯 명을 살인하고, 지방 관리나 공산당정치인을 살인하려고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돌격대의 폭력은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까지 퍼졌다. - P233
슐라이허의 참모는 나치를 선제공격하는 일까지 포함해 내란에 대처할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회의하면서 간단히 기록한 메모들을 보면 나치에대한 슐라이허의 생각이 드러난다. 늘 그렇듯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다. 슐라이허는 "협력할까? 그렇지 않으면 싸워야 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분위기로 치른 선거의 결과는 용두사미였다. 정치적 교착 상태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치는 최대 정당으로 남았지만, 득표율은37%에서 33%로 떨어졌다. 나치 지지자 중 일부가 신교도 중산층 진영에계속 머물면서 국가인민당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정치적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파펜이 슐라이허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시작했다. 이 ‘신사 기수‘는명망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걸 즐겼지만, 일에는 별로 열의가 없었다. - P243
파펜은 오트가 한 말을 힌덴부르크에게 보고했다. 또한 대통령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은 파펜에게 계속 총리를 맡길 수도있었다. 그 경우 파펜은 국방부 장관을 바꾸고 싶어 했다(그가 더는 슐라이허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걸 이해할 수 있다). 아니면 대통령이 슐라이허를 총리로 임명할 수도 있었다. "육군원수 출신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내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라고파펜은 몇 년 후 회고했다. 마침내 일어선 대통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여보게 파펜, 내가 마음을 바꾼다면 나를 악당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렇지만난 너무 늙어서 삶의 끝자락에서 내란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폰 슐라이허 씨가 운을 시험해 보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악수했고, 파펜은 힌덴부르크의 뺨에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굵은 눈물‘을 보았다. - P247
여러 해 동안 정치 무대 뒤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장군은 이제 무대 앞으로 나섰다. 12월 3일, 슐라이허는 55세에 독일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폭을 넓힌 연립정부에 자신의 운을 걸어보려고 했다. 우익의 자리를 지키면서 내란 없이 정치적인 안정을 찾으려고 마지막으로 필사적으로 노력하려고 했다. 그가 이용한 오트의 모의전은 파펜을 몰아내는 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효과는 곧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 P248
1933년 1월 30일이다. 그날 아침 아돌프 히틀러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독일 총리로 취임했다. 이제 히틀러 추종자들이 횃불을 들고 베를린 중심부를 거쳐 행진하며 축하한다.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 그리고 조금더 엘리트층이고 검은색 제복을 입은 나치 친위대가 눈에 띈다. 그러나히틀러 총리와 함께 새로 들어서는 정부는 연립정부여서 철모단 같은 다른 우익 단체 대표들도 함께 행진하며 축하한다. 히틀러 운동에서는 독일 국민이 하나가 되었던 1914년 8월과 등을 찔린1918년 11월이라는 두 순간의 차이를 항상 강조한다. 1933년 1월은 나치입장에서 1914년 8월로 돌아간 날이다. 횃불을 든 사람들이 히틀러 총리관저 창문 앞을 지나가고, 라디오 방송에서 헤르만 괴링은 이런 분위기는오직 1914년과 비교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 P253
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우리 기억은 1914년 8월의 활기찬 시기로 되돌아간다. 그때도 오늘처럼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라고 보도한다. 나치의 괴벨스와 로베르트 라이Robert Ley 같은 인물들은 그들의 ‘혁명‘이 사실 1914년 8월에시작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독일이 하나되었다는 게 히틀러 총리 취임의 의미 중 정말 중요한 요소다. 1929년 이후 브뤼닝, 슐라이허, 펜과 힌덴부르크 모두 분열된 독일우파를 통합할 방법을 찾았다. 또한 나치가 기성 정치권을 지지하도록 끌어들일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히틀러를 총리로 만들기 위해 특히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많이 설득해야 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제 옛 총리관저 창문 앞에 서서 나치 돌격대원들의 연주를 듣는다. 돌격대 악단은프로이센 병사들이 육군 원수를 찬양할 때 연주하는 전통적인 행진곡을 - P253
연주하면서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은 <라인강의 파수꾼〉 같은애국적인 노래를 부른다. 이러한 모습이 힌덴부르크가 소망해 온 국가통합이다. 1월 30일의 분위기를 보면서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한 게 잘한 일이라고 안심한다. 몇 주 후 그는 딸에게 편지하면서 "사람들의 애국심이 치솟는 모습을 보니 아주 흐뭇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통합을 지켜주시길 기도한다"라고 쓴다. - P254
슐라이허의 오른팔인 오이겐 오트는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주장하라고조언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만난 슐라이허는 조언대로 했다. 슐라이허는 ‘임시정부‘ 시나리오를 제시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시나리오가 가장 그럴듯하고 헌법적으로도 큰 문제없이 권력을 유지할 방법이었는데, 왜 그 방법을 우기지 않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슐라이허는 1월 13일에베를린에서 언론인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임시정부 시나리오대로 하면과반수를 이루는 파괴적인 정당들이 계속 내각의 행정명령을 부결하면서 경제를 망칠 수 있고, 결국 정부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사실은 다른 이유가 더 있었을 수 있다. 총리 시절 슐라이허와 이야기를 나눈 많은 사람은 그가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기진맥진하고, 더는 총리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 기자는 1월중순에 슐라이허가 창백해 보이고, "전보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다"라고기록했다. 슐라이허는 늘 그러듯 "과대망상증이 없어서 안타깝다" 라고자신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는 체념, 심지어 안도까지 느끼며 1월말의 종말로 향했다. - P270
1월 29일 카이저호프 호텔에서 괴링은 괴벨스에게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 프리크가 내무부 장관, 괴링이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 후겐베르크가 경제부와 농업부 장관이 될 것"이고, 새로 선거를 하기 위해 국회를 해산할(그들은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약속했다)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괴벨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파펜 말이 맞을까? 누가 알까?"라고 말하면서 믿기지 않아 했다. 히틀러와 측근들은 슐라이허와 국방부 관리들이 군사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사실 몇몇 관리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고 의논했지만, 슐라이허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치의 핵심 인물들은 1월 30일 새벽 다섯시까지 카이저호프 호텔에서 밤을 새웠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면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뒤이어 히틀러가 취임 선서를 하러 대통령 집무실로 갈 시간이 되었다. - P276
1월 30일에는 히틀러의 위치가 압도적으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나치가 11명의 각료 중 세 자리만 차지했다. 히틀러 총리 외에 빌헬름프리크가 내무부 장관, 헤르만 괴링이 무임소 장관이었다. 철모단을 대표하는 프란츠 젤테 Franz Selate가 노동부 장관을 맡았다. 나머지는 기성 우파인물이었다. 파펜이 부총리,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Konstantin von Neurath 가외무부 장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경제와 관련한 장관 다섯 가지 직책을 차지했다. 노이라트와 재무부 장관 슈베린 폰 크로지크, 교통부 장관파울 폰 엘츠-뤼베나흐Paul von Eltz-Ribenach와 법무부 장관 프란츠 귀르트너(중앙당의 눈치를 보면서 보류하는 인상을 주려고 지명을 며칠 미뤘다는 파펜과슐라이허 내각의 장관에서 유임되었다. 안정성과 지속성을 약속하는 듯했다. 독일인 대부분은 내각 안의 보수주의자들의 존재, 힌덴부르크의 권위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 군대가 있으니 분명 히틀러가 함부로 행동할수 없을 것으로 믿었다. 파펜은 여느 때처럼 바보같이 확신했다. 그는 한친구에게 "우리가 그를 고용했지"라며 "몇 달 안에 궁지로 몰아넣어 꼼짝 못 하게 할거야" 라고 말했다. - P278
히틀러 집권을 걱정한 사람들이 못 보고 넘어간 것 같은 중요한 점이 한가지 있다. 프로이센 주정부를 넘어뜨린 펜의 1932년 쿠데타 때문에 프로이센의 핵심 부서가 독일 정부 소속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을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려고 준비했다. 그렇게 하면 괴링과 나치가 중요한 권력 요소인 프로이센주의 경찰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슐라이허는 프로이센 경찰이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파펜에게 쿠데타를 일으키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슐라이허의 뒤를 이은 사람들은 그렇게 주도면밀하지 않았다. 나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총리 자리가 아니었다. 총리는 그저 권력을 넓히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괴벨스는 "첫 단계! 계속 싸워야 한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다음에는 히틀러 총리 아래 보수 성향 장관들의 이름을 적었다. "이 사람들은 얼룩이야. 지워야 해." " ‘얼룩‘을 ‘지우려는‘ 나치의 욕망과 괴링이 장악한 경찰이 이후 몇 달동안 펼쳐지는 독일 역사를 판가름하는 조건이 된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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