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전축이 어떤 단어인지 아니?"
"아니."
"그리스어야."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새 리노는 나를 버려두고 동생과 춤을 추러 갔다. 릴라는 가녀린 탄성을 터뜨리며 내게 춤 설명서를 건넨 다음 오빠와 함께 날아다니듯 춤을 췄다. 나는그녀가 책을 꽂아놓은 곳에 춤 설명서를 놓아두었다. 지금 릴라가뭐라고 한 거지? 전축은 이탈리아어지 그리스어가 아니다. 순간 전쟁과 평화』 아래 페라로 선생님의 도서관 분류번호가 붙은 너덜너덜한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그리스어 문법』이었다. 문법책이라니. 그리스어라니. 릴라는 헐떡거리며 내게 말했다.
"나중에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전축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줄게."
나는 할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 P182

릴라는 내가 고등학교에 가기도 전에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한건가? 나는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도 여름 방학동안에 혼자서 공부했단 말인가? 릴라는 왜 항상 내가 해야 할 일을나보다 빨리, 나보다 더 잘하는 걸까. 내가 따라가면 도망가면서 정작 자신은 언제나 내 뒤를 쫓아와 나보다 앞서나가려 하는 걸까. - P182

나는 한동안 릴라를 피했다. 그만큼 화가 났다. 나도 그리스어 문법책을 빌리려고 도서관에 갔지만 우리 도서관에 비치된 유일한 그리스어책은 체룰로네 온 식구가 번갈아가며 빌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칠판에 그려진 그림을 지우듯이 나에게서 릴라를 지워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 자신이 연약하게 느껴졌고 모든 것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것처럼 느껴졌다. 평생 그녀를 뒤쫓아 다니거나 반대로 그녀가 나를뒤쫓아온다고 생각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어느 경우건그녀보다 못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릴라를 찾았다. 나는 그녀가내게 넷이서 함께 추는 춤의 일종인 카드리유 춤을 가르쳐주게 내버려두었다. 내게 이탈리아어 단어를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쓰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내버려두었다. 릴라는 학기 시작 전에 나도 그리스어알파벳을 익히기를 원했고 결국 내게 그리스어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내 얼굴의 뾰루지는 늘어만 갔다. 나는 영원히지속될 것 같은 자신감 부족과 수치심에 시달리며 질리올라네로 춤추러 갔다. - P183

한사코 벗어나길 바랐지만 내 느낌은 강해져만 갔다. 언젠가 릴라가 그녀의 오빠와 함께 왈츠를 춘 적이 있다. 얼마나 멋들어지게 춤을 추던지 모든 사람이 그들의 독무대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줄 정도였다. 나도 매혹되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둘 다 아름답고 호흡이 잘맞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릴라가 애늙은이같은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뛰어나게 편곡을 하면 원곡의 익숙한 멜로디가 잊히는 것처럼 말이다.
릴라의 얼굴은 균형이 잡혀가고 있었다.  - P183

정작 내가 릴라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는데 릴라는 계속해서 그리스어 어미변화를 물어보았다. 보아하니 나는 아직도 1학년 과정에 머물러 있는데 릴라는 벌써 3학년 과정까지 진도를 나간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푹 빠진 아이네이스』에 대해서도 물었다.
릴라는 책을 며칠 만에 몽땅 읽어치웠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도 학교진도에 따라 2권 중간 정도까지밖에 읽지 않았다. 특히 디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학교에서 배우기도 전에 릴라에게서 디도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다. 어느 날 오후 릴라는 내 가슴에 깊이 각인된 화두를 던졌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들의 인생만 황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삶도 황폐해지는 거야."
릴라가 정확하게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개념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이 개념을 우리 동네의 더러운 길, 먼지가 이는 공원, 새로 들어선 건물들로 망가진 들판, 가정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연관시켰다. - P207

그 시절 나는 자신감에 넘쳤다. 학교에서는 완벽한 모범생이었다.
이 이야기를 올리비에로 선생님께 전하자 선생님도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노와의 만남도 이어나갔다. 우리는 매일같이 솔라라네 주점까지 산책을 했다. 지노가 내게 빵을 하나 사주면 우리는 그것을 함께나눠먹고 집까지 다시 걸어 돌아오곤 했다. 이따금 나보다도 릴라가내게 더 의존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나는 동네의 경계를 넘어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릴라처럼 벽돌공,
자동차 정비공, 야채장수, 식료품점 주인, 구두수선공과 어울리는 대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함께 지냈다. 이제 릴라가 디도나 영어 단어 암기법이나 3인칭 어미변화나 파스콸레와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 말할 때면 약간 불안해하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수 있었다. 드디어 릴라가 자신도 나만큼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게 증명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았다. - P212

1958년 12월 31일 저녁에 펼쳐진 대결의 이런저런 이유 가운데는 빈곤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보상받고 싶은 리노의 심리도 있었을것이다. 그는 폭죽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집착해봤자 솔라라 형제와 맞붙을 사람은 아무도없다는 사실을 리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그해에도 솔라라 형제는 며칠에 걸쳐서 밀레첸토 트렁크에 폭죽을 잔뜩실어 날랐다. 그들은 연말 밤 폭죽으로 날아가는 새를 죽이고 개고양이, 쥐를 놀라게 하고, 온 동네 건물을 지하창고에서부터 지붕까지 휘청이게 할 셈이었다. 리노는 그들의 움직임을 증오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체면을 세울 정도의 폭죽이라도 마련하기 위해서 파스콸레와 안토니오, 특히 그나마 수중에 약간의 돈이 있는 엔초와 흥정을 벌였다. - P218

릴라는 할 말을 잃었다. 처음에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수차례에 걸쳐서 파스콸레가 너를 좋아한다고 했지만릴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어느 찬란한 봄날,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한 표정으로 그녀 앞에 서서 사랑을 애원하며 거절하면 자신의 삶은 의미를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의 감정을 해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릴라는 아주 조심스럽게 직접적으로 안 된다고 하지 않고 거절할 표현을 생각해냈다. 그녀는 자신도 파스콸레를 좋아하지만 그 감정은 연인에 대한감정과는 다르다고 했다. 파시즘이며 레지스탕스, 왕정, 공화당, 암시장, 라우로 장군, 네오파시즘, 기독교 민주당, 공산주의 등 자신에게 해준 수많은 이야기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라고했다. 하지만 사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자신은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 P240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릴라와 공부하고릴라와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이었는지를 의미한다. 동네의 범주를 벗어난 외부세계의 사물과 사람, 풍경과 책에 쓰인 사상을 대하면서도 릴라를일종의 정신적인 지지대이자 자극제로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의미한다.
그렇다. 디도를 주제로 한 작문의 논리전개는 순전히 내가 생각해낸 것이고 유연한 문장을 구축하는 능력도 내 것이었다. 그러니 디도에 대해서 쓴 글은 나의 글이다. 하지만 주제를 발전시킨 것은 릴라와 함께한 게 아니었는가. 우리는 건설적인 자극을 주고받지 않았는가. 내 정열은 릴라의 열정 덕분에 커진 것이 아닌가. 선생님들이그토록 좋아했던 ‘사랑이 없는 도시‘라는 주제를 발전시킨 것은 나지만 아이디어는 결국 릴라의 것이 아니었던가.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P246

우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 흥미를 끌지 못하는 존재였다. 행여 우리와 시선이라도 마주칠 때면 성가신 듯 즉시 다른 쪽으로 시선을돌렸다. 그들은 철저히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리노와 파스콸레는 이미 알고 있던사실을 재확인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우울해했고 험상궂게 굴었던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가야한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났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나를 비롯한 여자아이들은 처음으로 이런 경험을 하고 야릇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매혹되고 있었으며 우리 모습이 못나게 느껴지면서도 우리가 제대로 교육받고 좋은 옷을 입고 화장을하고 장신구를 달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우선은 그날 저녁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웃으며 비아냥대기시작했다. - P252

나는 말 그대로 다시 피어났다. 넬라인카르도라는 올리비에로 선생님의 사촌은 바라노에 살고 있었다. 일단 버스로 바라노에 도착한다음에는 손쉽게 넬라 아주머니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거대한 몸집의 친절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명랑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노처녀였다. 휴가차 섬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에게 방을 모두내주고 자신은 조그만 방 한칸과 부엌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부엌에서 지내기로 했다. - P274

밤마다 식탁을 꺼내고, 받침판을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아내 침대를 만들었다가 아침이면 깨끗이 정리해야 했다. 몇 가지 꼭지켜야 할 임무도 주어졌다.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나서 넬라 아주머나와 손님들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영국에서 온 부부 한쌍과 그들의 두 아이가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컵과 그릇을 닦고, 저녁 식사 상을 차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설거지를 하는 것이었다.
이 일들만 마치면 나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었다. 나는 테라스에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책을 읽었다. 가파르게 뻗은 순백의 길을따라 넓고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해변까지 걸어 내려가기도 했다.
그 해변은 마론티 해변이었다. - P275

모든 일이 만족스러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도,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일도, 상을 치우는 일도, 동네에서 산책하는 일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가며 마론티 해변까지걸어가는 일도, 햇볕 아래 누워 책을 읽는 일도 좋았다. 수영하다가다시 해변으로 나와 책을 읽는 일도 좋았다. 아버지도, 동생들도, 어머니도, 매일같이 걷던 고향의 길도, 정원도 그립지 않았다.
유일한 그리움의 대상은 릴라였다. 내 편지에 답장한 통 없는 릴라. 내가 없는 동안 릴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나는 두려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것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어온, 살면서단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릴라의 삶의 일부분을 놓침으로써 내 삶의 밀도와 중요성까지도 희석될 것 같아 두려웠다.
릴라의 침묵에 내 걱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섬에서 보내는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편지에다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물처럼 넘치는 내 글과 이에 대비되는 그녀의 침묵은, 빛나는 듯 보이는 - P277

나의 삶은 실은 무미건조해서 남아도는 시간에 매일같이 그녀에게편지를 쓰고 있는 데 비해 암울한 듯 보이는 그녀의 삶이야말로 실은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빌라 아주머니는 영국인 가족이 7월 말에 떠나고, 8월 초에는 나폴리에서 섬으로 휴가를 보내려는 가족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전해주었다. 교양 있고 친절하고 우아한 사람들로 작년에 이어 올해두 번째로 아주머니 집에서 휴가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훌륭한 신사로 아주머니에게 언제나 멋진 말을 해준다고 했다. 장남은훤칠한 키에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건장하며 잘생긴 17세 소년이라고 했다. - P278

나는 이미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자갈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래사장은 차가웠고 달빛에 거무스름한 잿빛을 띠었다. 바다는 잔잔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외로움에 사무쳐 울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 걸까. 여드름도 깨끗이 사라졌고 다시 예뻐졌다고생각했었다. 햇볕과 바다 덕분에 몸매도 날씬해졌는데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내게 전혀 관심이 없다. 내 몸에 낙인이라도 찍힌 것일까. 내 운명은 무엇일까. 빠져나오기 힘든소용돌이처럼 내 생각은 어느새 우리 동네를 향하고 있었다. - P290

어둠으로 밀쳐낸 그의 아들에 대한 믿음직스러운 대안이자 내 편지침묵으로 일관하는 릴라의 대안이 되었다. 나는 나중에야 이러한사실을 깨닫고 놀랍다고 생각했다. 릴라와 니노는 서로를 잘 알지못하고 친하게 지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비슷한 점이 아주 많은 것같았다. 둘 다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 누구도 원하지 않으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언제나 명확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틀렸다면? 마르첼로를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도나토 아저씨를 그렇게 끔찍하게 여길 이유는 또 무엇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릴라와 니노 둘 다 좋아했고 각각 다른 의미에서 이들이 그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니노가 증오해 마지않는 그의 아버지는 나를 비롯한 모든 아이를 존중해주었다. 그날 밤마론티 해변에서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평안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그런 도나토 아저씨가 고마웠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니노와릴라가 섬에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쁘게 느껴졌다. - P295

나는 다시 책 읽기를 시작했다. 릴라에게 답장이 없으니 이제부터는 편지를 보내지 않겠다는 내용의 마지막 편지를 썼다. 대신 사라토레 집안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마리사와 피노, 막내인 치로와 친남매가 된 것 같았다. 특히 치로는 나를 아주 좋아했다. 나와 있을 때만 투정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놀았다.
우리는 함께 소라를 찾곤 했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나를 경계심없이 애정과 호감을 갖고 대했다. 아주머니는 내가 식탁 정리를 할때도, 방 정리를 할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아이들을 돌볼 때도, 책을 읽을 때나 공부를 할 때도 무엇을 하든지 꼼꼼하게 한다고 칭찬해주곤 했다. - P295

릴라가 보낸 편지였다. 나는 편지 봉투를 급히 찢었다. 글씨가 빽특히 채워진 다섯 장의 편지지가 봉투에서 나왔다. 나는 단숨에 편지를 읽어 내려갔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정말 그랬다. 우선 편지 내용보다 먼저 내게 충격을 준것은 글에서 릴라의 목소리가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편지의 첫 문장에서부터 나는 『푸른 요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학교 과제물을 제외하고 내가 읽은 릴라의 유일한 글이다.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어린 시절 왜 『푸른 요정이 그토록 마음에들었는지 깨달았다. 지금 내가 릴라의 글을 읽으며 놀랍게 여긴 특징들이 『푸른 요정』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릴라는 글로써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내 글이나 도나토 아저씨가 쓴 기사나 시와는 달랐다. 과거에 읽었거나 그 당시에 즐겨 읽던 작가들의 글과도 달랐다.  - P299

릴라의 글은 섬세했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문법이완벽했다.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었고 문어체의 어색함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글을 읽는 동안 그녀의 모습이 보이고, 그녀의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글씨에 실린 릴라의 목소리에 흔들렸고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할 때보다 더 강하게 빨려들었다. 글에서는 구어체에 남아 있을법한 쓸데없는 잔가지와 혼란스러움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레코나 체룰로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제우스 신의 머리에서 태어난 사람쯤 되어야 사용할 수 있을 법한 논리 전개였다.
그녀에게 보낸 내 유치한 편지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그 과장된 어조 경박스러움, 거짓된 명랑함과 고통이 부끄러웠다. 릴리는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내 작문에 9점을 주어 헛된 희망을 갖게 한제라체 선생님에게 경멸과 원망을 느꼈다. 그 편지는 열다섯 살이 되 - P299

는 내 생일날, 내가 사기꾼인 것을 깨닫게 했다. 학교에 간 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내 앞에 놓인 릴라의 편지가 그 증거였다.
그러고 나서야 편지 내용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릴라는 내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다. 그때까지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은 것은 내가 햇살 아래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기뻤기때문이고, 사라토레 가족과 잘 지내기를 바라서였다고 했다. 니노와사랑에 빠지고, 이스키아 섬과 마론티 해변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자신의 불행 때문에 내 휴가까지 망치고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침묵을 깬 다급한 필요성을 느꼈다고 했다. - P300

난 릴라의 편지를 읽고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언제나처럼 릴라의세계는 빠르게 내 세계를 잠식했다. 7. 8월에 내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초조해졌다. 그날은 해변에 나가지 않고 릴라에게 진지하게 답장을 쓰려 했다. 릴라의 편지처럼 본질적이고 깔끔하면서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 같은편지 말이다. 평소에는 편지를 쓰는 일이 그토록 쉬웠고 특별히 고칠 필요도 없이 앉아서 단숨에 여러 장의 편지지를 채워내곤 했는데 이번에는 쓰고 고치고 또다시 써보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니노의증오와 그 증오의 원인이 된 도나토 아저씨와 멜리나의 정사, 사라토레 가족과의 관계, 심지어는 릴라가 처한 상황에 대한 걱정조차도 - P303

릴라의 글은 얼마나 매혹적이었던가. 냄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불안감이 커져 갔다. 릴라는 냄비의 광채를 좋아했다. 냄비를 닦을때면 반짝거리게 하려고 특별히 정성을 들였다. 4년 전 릴라가 돈 아킬레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핏방울이 구리 냄비 위로 흘러내렸다고이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자신의 앞에놓인 힘든 선택에서 비롯된 불안감과 고통을 구리 냄비에 묻어두었다가 일종의 계시인 양 터뜨린 것이다. 마치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갑작스럽게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말이다. 릴라가 없었다면 내가 이런 상상을 할 수나 있었을까.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 모든 것을 내 삶에 녹여낼 수 있을까.
나는 불을 껐다. 옷을 벗고릴라의 편지와 니노의 파란 책갈피를가지고 침대에 누웠다. 내게 가장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 P305

를 다시 읽었다. 냄비들은 반짝이고, 테이블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천장은 숨 막히게 무겁게 느껴졌다. 밤공기와 바다가 사면에서 벽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나는 릴라의 글솜씨에 또다시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는 형상화할수 있고 나는 그럴 수 없는 것 때문에 눈물이 앞을 흐렸다. 물론 학교에 다니지도 않고, 이제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도 않는데 릴라가그토록 뛰어나다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했다. 동시에 그 기쁨은 나를 불행하게 했고 나는 이런 감정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다. - P306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서는 잘 자라고 속삭이고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꽤 오랜 시간동안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혀의 감촉과 내 몸을 어루만지던 그의손길, 내 몸을 누르던 손의 압력을 떨쳐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니노는 내게 경고했었다.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도나토 아저씨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내 육체에남은 그 기분 좋은 느낌 때문에 내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기억하는 한 그때까지 한번도 육체적 쾌락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느낌을 알지 못했기에 막상 경험하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새벽 동이 터올 무렵 나는 정신을차리고 짐을 챙겼다. 침대를 정리한 다음 빌라 아주머니에게 짧은감사의 편지를 남기고는 그곳을 떠났다. - P307

향이 뒤섞인 냄새만이 짙게 퍼져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한 달 전에 준 현금을 챙겨서 섬에서 떠나는 첫 배를 탔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른 아침 햇살 아래 파스텔 빛의 섬 모습이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릴라에게 이야기를 해줄 만한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번만은 그녀도 이보다 더 강렬한 체험을 내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도나토 아저씨에 대한 혐오감과 자신에 대한 경멸감이 너무나 커서 릴라에게 차마 이야기를 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예기치 않게 끝난 그해의 여름 휴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 P308

틈이 나자마자 나는 릴라를 찾아갔다. 뜰에서 릴라를 부르자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고는 현관으로 달려 나왔다. 릴라는 나를 포옹하고입을 맞추며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내게 칭찬을 퍼부었다. 나는 그녀의 넘치는 애정 표현에 잠시 넋이 나갔다. 한 달이 조금 넘는기간이었는데 릴라야말로 많이 변해 있었다. 그새 소녀가 아닌 어엿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나이도 열여덟 정도는 되어보였는데 내게는어른처럼 느껴졌다. 예전에 입던 옷들이 깡동하고 꽉 끼어보였다.
마치 몇 분 만에 갑자기 성장한 것처럼 그녀의 몸을 필요 이상으로조이고 있었다. 키도 더 컸다. 등이 꼿꼿해졌다. 전반적으로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가녀린 목과 창백한 얼굴에서 섬세하고 비범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나는 릴라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길을걸으면서도 계속 주변을 둘러보고 뒤를 돌아봤지만 내게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 P309

걱정하는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수컷들 간의 규칙을 어겼고 나는 릴라와 스테파노의 가까운 관계를 숨기기 위해서 갑자기 이일에 말려든 것이다. 내 존재는 우정일 수도 있는 릴라와 스테파노의관계를 감추기 위해 필요했다. 물론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 같지는 않았지만, 그날 드라이브를 하면서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나고있었는데 릴라는 일부러인지 아니면 자신도 잘 몰라서인지 내가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 옛날 잉크를적신 종잇조각을 던져댔을 때보다 훨씬 강도가 센 지진이 다가오고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릴라에게 정말로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릴라는 그런 아이니까. 그녀는 단지 균형을 되찾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모든 균형을 깰 수 있는 아이였다. - P315

그해 9월 릴라의 삶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었다. 나는 이스키아 섬에서 니노와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버지의 입술과 손에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왔다. 내면에 남아 있는 달콤함과 끔찍함이 뒤섞인 감정 때문에 밤낮으로 울며 시간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미처 내 감정에 뚜렷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전에,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니노의 목소리와 그의 아버지의 콧수염이 남긴 불쾌한느낌을 옆에 제쳐두었다. 이스키아 섬은 희미해져서 내 머릿속 한구석에 있는 은밀한 곳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릴라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내 모든 마음을 내주었다. - P322

릴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렇다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 논의의 최종 목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릴라의인생에서 마르첼로를 내쫓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일들은 우리의 계획을 중심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정도였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도록 놓아두거나 필요할 때 약간 조율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나와 릴라는 우리가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실제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언제나 스테파노였다.
정확하게 사흘 후, 그는 약속대로 구둣방에 가서 치수도 맞지 않는 신발을 샀다. 체룰로 부자는 만 리라까지 흥정할 심산으로 자신없는 태도로 2만 5천 리라를 요구했다. 스테파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기에 릴라의 그림에 대한 가격으로 2만 리라를 더 지불했다. 그는 그림이 마음에 들어 액자에 넣고 싶다고 했다. - P324

이 모든 일이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났고 결국 릴라는 결과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신발 제작 계획의 돌파구를 마련해 리노를 비롯한 가족 모두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마르첼로를 깨끗이 처리했다. 동네에서 가장 촉망받고 부유한 젊은이의 예비 신부가되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아무것도 없을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학교가 평소보다 더 암울하게 느껴졌다.
나는 선생님들을 흡족하게 못할까봐 다시 공부에 파묻혔다. 밤 11시까지 악착같이 공부하다가 시계를 새벽 5시 30분으로 맞춰놓고서야 잠이 들었다. 릴라를 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대신 스테파노의동생인 알폰소와의 관계가 돈독해졌다. 여름 내내 식료품점에서 일했는데도 알폰소는 재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낙제점을 받은 모든 과목,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를 7점으로 통과했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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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1








˝광주 수산시장의 대어들.˝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거즈 덮어놓았습니다.˝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된 여러 시신들 사진과 함께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글이다.



˝우리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글알도 꽉 차 있답니다~˝



요리 전의 통통한 꽃게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글이다.

이 포스팅에 ‘좋아요‘는 500여 개이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은 무려 1500개가 넘었다.

‘좋아요‘보다 댓글이 더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문득 영화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범인을 찾은 듯 관객들을 꿰뚫어보는 송강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오른다.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









악의 평범성 2







˝불교 승려들이 숲을 지날 때 혹 밟을지도 모르는 풀벌레들에게

미리 피할 기회를 주기 위해 방울을 달고 천천히 걷는다는 말에

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얼마나 많은 생물들을 밟아버렸던가.˝



득음의 경지에 이른 어느 고승이나 성자의 얘기가 아니다.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한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의 말이다.

전 친위대원을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만들고

가난하고 소박한 생을 최고의 삶으로 꿈꾼 사람이기도 했다.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악의 평범성 3





몇년 전 경주와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때 포항의 한 마트에서 정규직은 모두 퇴근하고

비정규직 직원들만 남아 헝클어진 매장을 수습했다.

밤늦게까지 여진의 공포 속에 떨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아기 엄마들이었다.

목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세상이다.

지진은 무너진 건물의 속살과 잔해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간의 부서진 양심과 잔인한 본성까지도 보여준다.

정말 인간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불쑥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이산하시인의 시집 [악의 평범성]중에서











이월, ‘한나 아렌트‘와 함께했다.

어느 책을 읽어도 이산하시인의 ‘악의 평범성‘이 내내 따라다닌다.

‘아히히만‘은 과거의 독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곁에 있다.

내 안에도 있다.



바람이 차다.

골목을 휘돌아치는 익명성의 바람은 더욱 ‘매섭다.‘

그래도



삼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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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릴라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믿었다. 내 머릿속에는한 손에는 누의 머리를, 다른 한손에는 티나의 머리를 들고 긴 팔을흔들거리며 지하터널을 뛰어다니는 돈 아킬레의 기형적인 형상이자리 잡았다. 나는 너무나 괴로웠고 그 때문에 성장통이 왔다. 조금나아졌나 싶다가 다시 앓아눕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일종의 촉각장애를 앓고 있었다. 내 주변의 생명체들이 각자의 생활 리듬에 맞춰 바삐 움직이는 동안, 손가락 아래 딱딱한 표면이 말랑말랑하게 변하거나 안에 있는 내용물과 표충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며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몸도 만져보면 부은 듯했다. - P68

이 사실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공처럼 부풀어 오른 뺨과 톱밥으로 채운 손과 너무 익은 마가목 열매 같은 귓불과 커다란 빵 덩어리 모양의 발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몸이 나은 후 다시밖으로 나갔을 때 학교며 거리며 나를 둘러싼 공간 자체가 변한 것같았다.
주변 세상이 어두운 두 극 사이에 낀 것처럼 느껴졌다. 양극의 한쪽에는 지면 밑에서 건물의 지반과 인형이 떨어진 어두운 동굴을 압박하는 거대한 공기방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위에서 우리들의 인형을 훔쳐가버린 돈 아킬레가 살고 있는 건물 5층을 짓누르는 거대 - P68

한 구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두 개의 거대한 구체가 철로 만든 봉 끝에 고정되어 건물, 길, 들판, 터널, 선로를 지나며 이 모든 것을 납작하게 해버리는 상상을 했다.
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과 사물과 함께 그 사이에 끼어서 짓눌린느낌이었다. 입에서는 기분 나쁜 맛이 났고 계속되는 구역질에 기진맥진해 있었다. 모든 것이 나를 짓누르며 옥죄어 들어와 결국에는내 몸이 역겨운 크림처럼 짓뭉개질 것만 같았다.
그런 불편한 상태는 상당히 오래갔다. 사춘기 중반으로 들어설 때까지 몇 년 동안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느낌이 막 시작되었을 때 즈음, 나는 예기치 않게 처음으로 남자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다. - P69

터널 맨 오른쪽 입구는 암흑에 싸여 있었다. 그때까지 그렇게 어두운 곳으로 들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터널은 한없이 길었고 반대편 끝에 보이는 빛나는 둥근 출구는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발소리와 함께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은빛 물줄기와 물웅덩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잔뜩 긴장한 상태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릴라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크게 울려 퍼지는 자신의 소리를듣고 웃었다. 우리는 함께 또는 각각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 P93

아직 남은 시간은 많았고 가족 중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을 것이다. 자유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나는 항상 그날 여행의 전반부를 생각한다. 터널에서 나온 순간과 끝없이 펼쳐진 곧은 길을 마주했을 때의 그 느낌. 리노는 그 길의 끝에 바다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미지에 노출된 듯한 그 느낌을 즐겼다. 그때의 느낌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나 돈 아킬레의 집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를때의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날 태양은 잔뜩 낀 구름 위에 떠올랐고 어디선가 강한 탄내가났다. 우리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무너져내린 담벼락을 따라서사투리로 이야기하는 소리와 뭔가가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간간이흘러나오는 낮은 건물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P94

릴라가 있어서 내가 길을 잘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갔지만 느낌으로는 릴라가 나보다 열 걸음은 더 앞서 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항상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만년2등이었던 나는언제나 1등인 릴라라면 가는 법과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 바다까지가는 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릴라라면 온 세상이 머릿속에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그 때문에라도 우리 주위를 둘러싼 세상이 엉망이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느낌에 나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나는 하늘이 아닌 땅속 깊은 곳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빛줄기를본 것을 기억한다. 땅의 표면에서 보는 그 빛은 어딘가 빈곤하고 불결해보였다. - P95

얼마 후 우리는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릴리는 걷는 속도를 늦췄고 나 역시그녀를 따라 속도를 늦췄다. 내게 못된 장난을 치려다가 후회하는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릴라의 시선과 두세 번 마주쳤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릴라가 너무 자주 뒤쪽을 바라보고 있다는사실을 깨닫고 나도 덩달아 뒤를 돌아보았다.
릴라의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우리 동네와의 경계선인 터널의 모습이 자취를 감춘 것은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다.
우리는 이미 익숙하지 않은 길에 들어섰고 우리 앞에 펼쳐진 길도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 P95

1958년 12월 31일 릴라는 처음으로 경계의 해체를 경험한다. 경계의 해체는 내 표현이 아니다. 단어가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를 극대화해서 릴라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릴라는 사람이나 사물을 구성하는 윤곽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1959년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옥상에 모인 그날 밤, 릴라는 생전 처음 경계의 해체를 강렬하게 체험한다. 그때만 해도 그 느낌이 무엇인지정확히 규정짓지 못했기에 혼자서만 간직했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1980년 11월 어느 날 밤에 이르러서야, 옥상에서 경험했던 현상에대해 내게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결혼도 하고 자식도둔 36세의 여자가 되어서도 때때로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고백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 P113

그 사건은 내 기억 속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사내들을 끌어당기는자석 같은 내 몸의 힘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그보다 더 그 사건이 뇌리에 남은 이유는 릴라라는 존재가 카르멜라뿐 아니라 요구 사항 많은 유령처럼 내 주위를 맴돌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단순히 혼란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혀 결정을 내렸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도 바로 도망쳤을 것이다. 릴라와 함께있을 때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나는 분명 릴라의 팔을 잡아끌면서 어서 가자고 속삭였을 것이다. 그러다 릴라가 남기로 결정을 내리면그녀 옆에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옆에 없으니,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나는 릴라가 했을 법한 결정을 내렸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마음을 그녀에게 내준 것이다.
지노가 그런 제안을 했을 때 내 안의 자아를 뒤로 밀어내고 싸움할 태세를 갖출 때 릴라가 취하는 건방진 눈빛, 억양, 몸짓을 모방하고는 흡족해했다. 순간 약간 걱정이 되었다.  - P124

릴라는 열정적으로 나를 그 언어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래서인지사람들의 발을 편안하고 튼튼하게 감싸는 신발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리노와 페르난도 아저씨야말로 동네에서 가장 뛰어난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릴라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가면 구둣방에서 일도 할 수 없고 아버지는 한낱 시청 수위에 지나지 않는나는 릴라가 누리는 특별한 혜택에서 제외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학급에서도 의미 없이 자리만 채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개월이 지나도록 나는 교과서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거나 힘을 얻지 못했다. 불행함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로 집으로 돌아갈 때면작업장 구석에 있는 릴라만의 작업 공간인 작은 탁자 앞에서 일하고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구둣방을 지나가곤 했다. - P126

그렇다. 게다가 이 말을 할 때의 릴라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퉁명스러웠지만 이제까지 그녀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힘없는 목소리였다. 릴라는 어떤 소설인지 영화에서 살인자의 딸이 피해자의 아들을사랑하게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카르멜라에게 이야기해줬다고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구일 뿐 현실이 되려면 진실한 사랑이 생겨나야 한다고 했다.
카르멜라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 날부터 알폰소와 사랑에 빠졌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녀의 말은 다른 소녀들에게 멋있게보이려고 만들어낸 거짓말일 뿐이고 이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알 수 없었다. - P136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나이가 기껏해야 열두살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지나가는 트럭 뒤로 일어나는 먼지와 파리사이로 타는 듯이 뜨겁게 달아오른 길을 따라 걷는 우리의 모습은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던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서로의 몸에의지하며 걸어가는 두 노인네 같았다.
나는 그 누구도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둘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돈 아킬레의 목에 칼을 꽂은 것이 전직 목수인 알프레도 아저씨가 아니라 하수구의 생명체이고, 살인자의 딸이 희생자의 아들과 결혼한다면 기억하는 한 언제나 존재했던온 동네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장막이 조금이나마 걷힐 것이라는 사 - P136

실을 아는 사람도 우리밖에 없었다.
사물, 사람들, 건물, 거리가 참아내기 힘든 무엇인가를 내포하고있어서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게임을 하듯이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내야만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인데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그녀, 나와 릴라뿐이었다.
라는 뜬금없이 하지만 우리가 나눴던 모든 대화가 결국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듯이 이렇게 물었다.
"우린 아직 친구지?"
"그럼. - P137

"그럼 내 부탁좀 들어줄래?"
릴라와 다시 가까워진 그날 아침, 나는 릴라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줬을 것이다. 집에서 도망칠 수도 있고, 동네를 떠나 농장에서 잘 수도 있고, 나무 뿌리로 연명할 수도 있었다. 수챗구멍을 지나하수구로 내려갈수도 있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워지더라도 집에되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내게 부탁한 건별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 순간에는 약간 실망했다. 릴라는 하루에한 번씩, 한 시간이라도 괜찮으니 라틴어 책을 가지고 저녁 시간 전에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다.
"성가시게 굴지 않을게."
릴라가 말했다.
릴라는 내가 낙제한 것을 이미 알고 나와 함께 공부하고 싶어했다. - P137

하지만 나는 경외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같은날 파스콸레같은 어두운 매력이 있는 청년의 관심을 받았고, 새로운 학문을 향한 문이 눈앞에 열린 데다, 얼마 전까지 같은 동네 더군다나 우리 집맞은편 건물에 살던 사람이 책을 출판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마지막 사실은 우리도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릴라가 옳았음을증명했다. 물론 릴라는 책 쓰기를 포기했지만 나라면, 파스콸레의사랑에 힘을 얻고 그 어렵다는 고등학교라는 곳에서 공부를 해낸다면 도나토 아저씨처럼 혼자서 책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면 릴라가 구두그림과 구두공장으로 돈을 벌기 전에 내가 먼저 부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63

나는 다음 날 몰래 파스콸레와 약속한 장소에 나갔다. 그는 작업복 차림으로 헐떡거리며 나타났다.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고 여기저기 하얀 석회 자국이 튀어 있었다. 함께 걸어가면서 나는 그에게 도나토 아저씨와 멜리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최근 일어난 일을종합해볼 때 멜리나가 미친 것이 아니고 도나토 아저씨가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으며 아직까지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파스콸레가 내 이야기에 민감하게반응하면서 맞장구칠 때도, 이 모든 일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도나토 아저씨가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철도청 직원이 페라로 선생님이 도서관에 비치해뒀다가 빌려줄 수도 있는 그런 책의 저자가 된 것이다. - P163

그래. 그녀도 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겉모습뿐 아니라 표현하는 방식까지도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이야기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익히 알고 있던 그녀만의 재능이 한층더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그때보다 훨씬 뛰어나게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자연스러운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현실을 단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어떠한 기운을 불어넣어 똑같은 현상이라도 더 강렬하게 느껴지게 했다. 릴라가 그런식으로 말할 때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시도했을 때의 결과가 꽤 좋다는 사실에 흐뭇해했다.
나는 카르멜라나 다른 아이들과는 이런 면에서 다르다고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 애들과는 달리 나는 릴라가 내게 이야기를 하는그 순간, 그곳에서 함께 불타오를 수 있었다. 열중해서 이야기할 때릴라의 손놀림, 몸짓, 눈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릴라와 함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불현듯기쁨은 사라지고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내가 잘못 짚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벽돌공이자 공산당이며 살인자의 아들인 파스콸레는 내가 좋아서 구둣방까지 나를 데려다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릴라였던 것이다. - P167

아! 그때 그 바다의 모습이란・・・ 그날 바다는 심하게 요동쳤고 파도소리가 요란했다. 세찬 바람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옷은 몸에착 달라붙었으며 머리카락이 흩날려 이마가 드러났다. 아버지와 나는 그 진경을 바라보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바다 반대편 길에자리를 잡았다. 파도가 하얀 계란 거품을 이고 있는 시퍼런 금속관처럼 맹렬히 굴러 들어와서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감탄사를 연발하며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이 있는 길까지 밀려와서 수천 개의 빛나는 파편으로 부서졌다. 릴라가 없는 것이 어찌나 안타까웠던지.
거센 돌풍과 굉음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 그 엄청난 광경을 온몸으로 흡수하면서도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이, 너무나 많은 부분이 미처손에 쥘 새도 없이 흩어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P178

아버지는 마치 내가 떠내려가기라도 할 것처럼 내 손을 꼭 잡았다. 실제로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달려 나가서 길을 건너 바다의빛나는 파편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무시무시하면서도 빛과 소리가 충만했던 그 순간, 나는 새로운 도시에 홀로 남게 되는 상상을 했다. 새로운 인생을 앞두고 나 자신도 새로워져서 말이다.
나는 거칠게 변화하는 모든 것에 완전히 노출되겠지만 분명 승리할 터였다. 나는, 나와 릴라는 오직 함께 있을 때만 발휘할 수 있는그 능력으로 색채와 소리와 사물과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취합해 이야기를 만들고 힘을 부여했을 터였다.
동네에 돌아오니 긴 여행을 마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는친숙한 길과 스테파노와 피누차의 식료품점 모습, 과일을 파는 엔초 - P178

의 모습, 주점 앞에 서 있는 솔라라 형제의 밀레첸토 모습이 펼쳐졌다. 솔라라 형제에 대해 말하자면 이제 그들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어머니는팔찌에 얽힌 일을 알지 못했고, 아무도 리노에게 그날 일어난 일을전하지 않았다.
나는 릴라에게 그날 내가 지나간 길의 전경과 이름, 요란스러운소음과 찬란한 빛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만약에 내가 아닌 릴라가 그날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면 나는 호응하며 때때로 맞장구를 쳐줬을 것이다. 내가 직접 그 광경들을 보지 않았더라도 생기를 띠며 흥분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질문도하고 의문도 제기하며 언젠가는 꼭 그 길을 같이 걷자고 그녀를 설득했을 것이다. 나와 함께할 때 그 경험은 더욱 풍성해지고 나야말로 릴라의 아버지보다는 훨씬 좋은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니 말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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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리노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가 평소처럼 돈을 빌려달라고 할 줄 알고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리노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리노는 자기 어머니가 사라졌다고했다.
"언제?"
"2주 전에요."
"그런데 왜 이제야 내게 전화하는 거야?"
내 말투가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느꼈는지 리노는 당황했다. 사투리를 섞어가면서 어머니가 나폴리 시내에 바람 쐬러 간 줄 알았다고횡설수설했다. 사실 약간 빈정대며 말하기는 했지만 리노에게 특별히 화가 나거나 그가 원망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 밤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시는 거니?"
"어머니가 어떤지 아시잖아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2주 동안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어디 정상이니?" - P15

리노 어머니의 이름은 라파엘라 체룰로다. 하지만 나만 빼고 모두들 그녀를 ‘리나‘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를 ‘라파엘라‘라고도 ‘리나‘
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지난 60년 동안 내게 그녀는 ‘릴라‘였다. 만약 내가 그녀를 갑작스레 리나나 라파엘라라고 부른다면 그녀는 우리의 우정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릴라는 30년 전부터 내게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싶다고 말하곤 했다. 사라진다는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녀는 도망가거나 신분을 바꾸거나 머나먼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살을 생각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록 리노 같은 아들이 자신의 몸에서태어났고 그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릴라가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릴라는 말 그대 - P17

로 증발하기를 원했다. 그녀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뿔뿔이 흩어져서 그녀에 대한 그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릴라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잘 알고 있다고믿기 때문에, 그녀가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사라지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P18

다시 며칠이 지났다. 혹시나 해서 이메일과 우편함을 확인해보기는 했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는 릴라에게 자주 내 소식을 전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사이에 정해진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릴라는 내게 편지를 쓰거나 이메일을 보내는 것보다는 통화를 하거나 내가 나폴리에 갈 때 만나서밤새 수다 떠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서랍을 열어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철제 상자를 꺼내보았다. 이미 정리한 물건이 많아서 남은 것은 얼마 없었다. 특히 릴라와 관련된 물건은 많이 버렸고 이 사실을 릴라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살펴보았지만 정말 그녀와 관련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사진한장, 티켓 한장, 선물 하나 없었다.
릴라와 관련된 물건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랐다. 릴라는 어쩌면 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과 관련된 물건을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일까. 사실 그녀와 관련된 물건을 간직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니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 P18

릴라의 장롱을 보러 간 리노는 장롱이 깨끗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확인했다. 여름옷, 겨울옷 할 것 없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장롱 안에는 낡은 빈 옷걸이들만 걸려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집 안 구석구석을살펴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는 릴라의 신발도, 얼마 되지않은 책 몇 권도, 사진도, 영상이 담긴 필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한물간 플로피 디스켓과 함께 컴퓨터도 사라졌다. 릴라가 마법사처럼 기막힌 솜씨로 다루던 전자기기들도 모두 사라졌다. 릴라는아직 펀치 카드를 널리 사용하던 60년대 후반에 벌써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할 정도로 전자기기를 잘 다뤘다. - P19

나는 전화를 끊었다. 리노가 다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릴라는 극단적이었다. 릴라는 흔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그저사라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66년이라는 세월을 통째로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 P20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나는 불현듯 화가 났다.
‘좋아. 이번엔 누가 이기는지 보자.‘
나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한 최대한 상세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P21

그날 저녁 돈 아킬레의 현관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층계를 난간을따라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기로 결정한 바로 그 순간 릴라와 나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도 은은한 보랏빛으로 물든 뜰과 따스한 봄날 저녁 공기에서 느껴지던 다채로운 향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릴라와 나는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누가 더 용기 있는 아이인지를 입증하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든 학교 밖에서든 우리는 이놀이에 푹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다. 릴라가 어두운 맨홀 구멍 속으로 팔을 쑥 집어넣으면, 나도 그녀를 따라 내 팔을 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럴 때면 바퀴벌레가 살결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니거나 쥐가팔을 물어뜯을까봐 두려워 심장이 두근거리곤 했다 - P25

릴라는 그 순간 자신이 계단을 오르고 있는 데에는 정당하고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애당초 그런이유 따위는 잊은지 오래였다. 확실한 것은 내가 그곳에 있는 이유는 릴라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어린 시절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공포의 대상에게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네 번째 난간에 도착했을 때 릴라가 예상치 않은 행동을 했다. 그녀는 멈춰 서서 내가 다가서기를 기다렸다. 내가 다가가자 릴라는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이 행동은 이후 우리 둘의 관계를 영원히 바꿔놓았다. - P28

릴라와 내가 돈 아킬레의 현관 앞까지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릴라때문이었다. 시간관념이 아직 없을 때여서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일이 일어나기 열흘에서 한 달쯤 전에 릴라가 내 인형을 손에 들고 있다가 갑자기 지하창고 바닥으로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돈 아킬레의 집을 찾아가는 지금은 공포의 대상을 향해 함께 계단을올라가고 있지만 릴라가 내 인형을 던져버린 그날은 미지의 세계를향해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갔었다.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릴라와 나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그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야만 했다. - P29

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그때 난 너무 어렸다. 심지어는 내 인형마저도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내가 내 인형에게 말을 건네면 그녀도 내게 응답해왔다. 내 인형은 셀룰로이드로 만든 얼굴과 셀룰로이드로 만든 머리카락, 셀룰로이드로 만든 눈을 가지고 있었다. 기분 좋을 때가 흔치 않은 내 어머니가 기분 좋을 때 만들어준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있었는데 너무나 예뻤다. - P29

모든 것이 아름다우면서도 두렵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철조망사이 틈새로 빠져나온 지하창고의 어둠이 갑작스레 우리의 인형을빼앗아갈 수도 있었다. 가끔 인형을 팔에 꼭 안고 있기도 했지만 구부러진 그물망 옆에 놓아둘 때가 더 많았다. 지하창고의 차가운 공기와 창고 아래서 들리는 무엇인가가 기어가는 소리며 끼익 거리는소리, 땅바닥을 긁는 소리 같은 온갖 위협적인 소리에 인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누와 티나는 행복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매일같이 느끼는 공포는그들의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바위와 건물, 들판과 거리를 거니는사람들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밝은 빛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그 빛 사이에 어두운 구석과 폭발 직전의 억눌린 감정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태양빛 아래에서 우리를두려움에 떨게 하는 모든 것을 지하창고의 어둠 탓으로 돌렸다. - P31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후두염, 파상풍, 출혈성 티푸스, 가스, 전쟁, 기중기, 돌담, 노동, 폭격, 폭탄, 결핵에서 화농까지 목숨을 앗아가는 단어들로 가득 찬 그런 세상이었다. 아주 일상적인 일들도 죽음의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땀을 많이흘린 다음 두 손목에 물을 살짝 적시지 않고 급하게 차가운 수돗물을 들이켜다 죽기도 했다. 갑자기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서 죽기도 했고 기침하다 숨이 막혀 죽기도 했다. 검붉은 색으로 잘 익은체리를 먹다 씨가 목에 걸려 죽는 일도 있었고 미제 껌을 씹다 무심코 삼켜 죽기도 했다. - P34

나는 처음에는 건물 모퉁이에 숨어서 릴라가 오는지 훔쳐보았다.
하지만 릴라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그녀 곁으로 다가가 돌멩이를 집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녀와 함께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내 행동에는 확신이 없었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며 많은 일을 했지만 확신에 차서 해낸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내 행동과 내가 항상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릴라는 달랐다. 그때 우리가 여섯 살이었는지 일곱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둘이 돈 아킬레의 집 현관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을때가 아마도 여덟 살이나 아홉 살 정도였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 - P35

주 어렸을 때부터 릴라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아이였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국기의 삼색으로 채색된 펜이든, 돌멩이든, 어두운 계단의 난간이든, 손에 움켜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을 이미 잘 알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실행할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정확한 손놀림으로 나무 책상에 펜촉을 꽂아놓거나, 잉크를 적신 종잇조각으로 무장하거나, 돌멩이를 던져 동네 사내아이들을 맞히거나, 돈 아킬레의 집 현관 입구까지 걸어가거나 어떤행위든 상관없었다. 릴라는 어떤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 P36

내겐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우리의 유년기는 폭력으로 가득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매일매일 별의별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게 기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힘들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고 타인들도 우리 인생을 힘겹게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나는 학교 선생님과 교구 신부님의 친절한 태도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런 태도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여자아이였는데도 말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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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기 2년 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가 매우 못생겼다고 했다. 신혼시절 장만한 리오네 알토 구역 산 지아코모 데이카프리가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아버지는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나폴리의 모든 공간도, 얼어붙을듯 차가운 2월의 창백한 햇살도, 아버지가 내뱉은 문장까지도.
나만 혼자 그곳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빠져 헤매고 있다. 내게 완성된 이야기를만들어주려는 문장들 사이에 실은 무의미한 문장들일 뿐인데,
진정 나의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는데.
나는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완결 짓지도 못했다. 내 글은 혼란일 뿐,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고 있는지, 그저 구원 없이일그러진 고통의 나열일 뿐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지금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이마저도. - P9

나는 아버지가 책상 앞에 앉아 자로 선을 그어 사진의 일부를직사각형 속에 넣고 선밖으로 색이 삐져나오지 않게 사인펜으로 꼼꼼하게 도형을 색칠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정말이지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직사각형은 사진 속에 있던 무언가를 지운 흔적이고 그 새까만 도형 밑에는 틀림없이 빅토리아 고모의 모습이 감춰져 있을 것이다.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부엌에서 칼을가지고 와서 아버지가 가려놓은 사진의 일부를 조심스레 긁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사진을 긁어내면 하얀 종이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안해서 작업을 멈췄다. 이것이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일로 나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더 식어버릴까봐 두려웠다. - P23

고모와의 두 번째 만남은 첫 만남보다 더 강렬했다. 나는 그때처음으로 짧은 순간에 모든 감정을 욱여넣을 수 있는 공간이 내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통난 거짓말에 대한 부담감, 부모님을 배신했다는 수치심, 그들이 받았을 상처로 인한 괴로움은 어머니가 현관문을 닫는 순간 철로 만든 새장 같은 엘리베이터 유리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건물 입구를 지나 차에 들어가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빅토리아 고모 옆에 앉는 순간, 나는 생소한 감정을 경험했다.
그것은 그날 이후 내가 종종 느끼게 될 감정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환경과 나를 향한 변치 않을애정을 이기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정으로 인해 나는 때로는 안도감을 느꼈고 때로는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위협적이면서도 포근한 여인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 P91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유년 시절 동화 나라로의 회귀는아버지뿐 아니라 나의 책임을 덜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모든 악의 기원에 빅토리아 고모의 마법이 있었다면 현 사태는 내가 태어난 순간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 고모를 찾게 만든 그 어둠의 힘은 이미오래전부터 작용하고 있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예수님이 내쫓지 말라고 한 아이들처럼 죄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해졌다. - P188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방과 후에 일어난 일로 인해 그 팔찌가 내게만 사무치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내 방 침대 머리맡서랍장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어머니는 서랍에서 팔찌를 꺼내들고 그것이 마치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팔찌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사악한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새 어머니의 어깨가 축 처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뼈만 앙상한 데다 등이 굽어 있었다. - P189

이웃 사람들, 길을 지나다니는 행인들,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할 것 없이 하나같이 눈에 거슬렸다. 특히 어머니가 그랬다. 어머니는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진을 마시고 매사에 느린 말투로 투덜거렸다. 내가 공책이나 책을 사야 한다고 할 때마다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넌덜머리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아버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해어머니가 날이 갈수록 헌신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아내와 최소한 지난 15년간 바람을 피웠는데도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고 나는 그런 어머니의 태도에 질려버렸다.
나는 무관심한 표정 연기를 그만두고 일부러 나폴리 사투리와 표준어를 섞어가며 어머니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영화관에라도 가든가 춤이라도 추러 가라고 고함을 쳤다.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 남편이 아니니 죽은 셈 치라고 했다. - P239

솔직히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내용을 잘 모르겠다. 내게 그날 강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아름다운 입과 목에서 나오는 매혹적인 소리의 흐름이었다. 나는 로베르토의 목젖이 지구에 바글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복제품이 아니라 실제로인류 최초의 남성이었던 아담의 숨결에 의해 진동하는 것처럼그의 툭 튀어나온 목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조각한 듯한 두 눈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강렬했던가. 긴 손가락과 빛나는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 P256

나는 인간을 이토록 연약하게 만든 하나님 아버지가 싫었다. 인간을 끊임없이 고통에 노출시키고 이토록 쉽게 부패하게 만든그가 싫었다. 우리가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배고픔과 목마름질병과 공포, 잔혹함과 교만함, 때로는 불신으로 인한 배신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좋은 감정까지도 어떻게 다루는지 바라보고만 있는 그가 싫었다.
동정녀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자신의 창조물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자들이 겪는 최악의 상황에 몰아넣은 것도 싫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그 힘을 인류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찮은 놀이에만허비한 아들도 싫었다. 자기 어머니는 홀대하면서 아버지인 하나님에게는 화낼 용기조차 없는 아들이 싫었다. 자기 아들을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두고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은 하나님이 싫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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