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리노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가 평소처럼 돈을 빌려달라고 할 줄 알고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리노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리노는 자기 어머니가 사라졌다고했다.
"언제?"
"2주 전에요."
"그런데 왜 이제야 내게 전화하는 거야?"
내 말투가 자신을 탓하는 것처럼 느꼈는지 리노는 당황했다. 사투리를 섞어가면서 어머니가 나폴리 시내에 바람 쐬러 간 줄 알았다고횡설수설했다. 사실 약간 빈정대며 말하기는 했지만 리노에게 특별히 화가 나거나 그가 원망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 밤에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시는 거니?"
"어머니가 어떤지 아시잖아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2주 동안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어디 정상이니?" - P15

리노 어머니의 이름은 라파엘라 체룰로다. 하지만 나만 빼고 모두들 그녀를 ‘리나‘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를 ‘라파엘라‘라고도 ‘리나‘
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지난 60년 동안 내게 그녀는 ‘릴라‘였다. 만약 내가 그녀를 갑작스레 리나나 라파엘라라고 부른다면 그녀는 우리의 우정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릴라는 30년 전부터 내게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싶다고 말하곤 했다. 사라진다는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녀는 도망가거나 신분을 바꾸거나 머나먼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살을 생각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록 리노 같은 아들이 자신의 몸에서태어났고 그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릴라가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릴라는 말 그대 - P17

로 증발하기를 원했다. 그녀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뿔뿔이 흩어져서 그녀에 대한 그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릴라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잘 알고 있다고믿기 때문에, 그녀가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사라지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P18

다시 며칠이 지났다. 혹시나 해서 이메일과 우편함을 확인해보기는 했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는 릴라에게 자주 내 소식을 전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사이에 정해진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릴라는 내게 편지를 쓰거나 이메일을 보내는 것보다는 통화를 하거나 내가 나폴리에 갈 때 만나서밤새 수다 떠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서랍을 열어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철제 상자를 꺼내보았다. 이미 정리한 물건이 많아서 남은 것은 얼마 없었다. 특히 릴라와 관련된 물건은 많이 버렸고 이 사실을 릴라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살펴보았지만 정말 그녀와 관련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사진한장, 티켓 한장, 선물 하나 없었다.
릴라와 관련된 물건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랐다. 릴라는 어쩌면 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과 관련된 물건을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일까. 사실 그녀와 관련된 물건을 간직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니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 P18

릴라의 장롱을 보러 간 리노는 장롱이 깨끗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확인했다. 여름옷, 겨울옷 할 것 없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장롱 안에는 낡은 빈 옷걸이들만 걸려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집 안 구석구석을살펴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는 릴라의 신발도, 얼마 되지않은 책 몇 권도, 사진도, 영상이 담긴 필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한물간 플로피 디스켓과 함께 컴퓨터도 사라졌다. 릴라가 마법사처럼 기막힌 솜씨로 다루던 전자기기들도 모두 사라졌다. 릴라는아직 펀치 카드를 널리 사용하던 60년대 후반에 벌써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할 정도로 전자기기를 잘 다뤘다. - P19

나는 전화를 끊었다. 리노가 다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 생각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릴라는 극단적이었다. 릴라는 흔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무한대로 확장시켰다. 그저사라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66년이라는 세월을 통째로 지워버리려 하고 있었다. - P20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나는 불현듯 화가 났다.
‘좋아. 이번엔 누가 이기는지 보자.‘
나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한 최대한 상세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P21

그날 저녁 돈 아킬레의 현관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층계를 난간을따라 한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가기로 결정한 바로 그 순간 릴라와 나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도 은은한 보랏빛으로 물든 뜰과 따스한 봄날 저녁 공기에서 느껴지던 다채로운 향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릴라와 나는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누가 더 용기 있는 아이인지를 입증하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든 학교 밖에서든 우리는 이놀이에 푹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다. 릴라가 어두운 맨홀 구멍 속으로 팔을 쑥 집어넣으면, 나도 그녀를 따라 내 팔을 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럴 때면 바퀴벌레가 살결 위를 스멀스멀 기어 다니거나 쥐가팔을 물어뜯을까봐 두려워 심장이 두근거리곤 했다 - P25

릴라는 그 순간 자신이 계단을 오르고 있는 데에는 정당하고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애당초 그런이유 따위는 잊은지 오래였다. 확실한 것은 내가 그곳에 있는 이유는 릴라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어린 시절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공포의 대상에게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네 번째 난간에 도착했을 때 릴라가 예상치 않은 행동을 했다. 그녀는 멈춰 서서 내가 다가서기를 기다렸다. 내가 다가가자 릴라는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이 행동은 이후 우리 둘의 관계를 영원히 바꿔놓았다. - P28

릴라와 내가 돈 아킬레의 현관 앞까지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릴라때문이었다. 시간관념이 아직 없을 때여서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일이 일어나기 열흘에서 한 달쯤 전에 릴라가 내 인형을 손에 들고 있다가 갑자기 지하창고 바닥으로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돈 아킬레의 집을 찾아가는 지금은 공포의 대상을 향해 함께 계단을올라가고 있지만 릴라가 내 인형을 던져버린 그날은 미지의 세계를향해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갔었다.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릴라와 나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그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야만 했다. - P29

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그때 난 너무 어렸다. 심지어는 내 인형마저도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내가 내 인형에게 말을 건네면 그녀도 내게 응답해왔다. 내 인형은 셀룰로이드로 만든 얼굴과 셀룰로이드로 만든 머리카락, 셀룰로이드로 만든 눈을 가지고 있었다. 기분 좋을 때가 흔치 않은 내 어머니가 기분 좋을 때 만들어준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있었는데 너무나 예뻤다. - P29

모든 것이 아름다우면서도 두렵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철조망사이 틈새로 빠져나온 지하창고의 어둠이 갑작스레 우리의 인형을빼앗아갈 수도 있었다. 가끔 인형을 팔에 꼭 안고 있기도 했지만 구부러진 그물망 옆에 놓아둘 때가 더 많았다. 지하창고의 차가운 공기와 창고 아래서 들리는 무엇인가가 기어가는 소리며 끼익 거리는소리, 땅바닥을 긁는 소리 같은 온갖 위협적인 소리에 인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누와 티나는 행복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매일같이 느끼는 공포는그들의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바위와 건물, 들판과 거리를 거니는사람들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밝은 빛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그 빛 사이에 어두운 구석과 폭발 직전의 억눌린 감정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태양빛 아래에서 우리를두려움에 떨게 하는 모든 것을 지하창고의 어둠 탓으로 돌렸다. - P31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후두염, 파상풍, 출혈성 티푸스, 가스, 전쟁, 기중기, 돌담, 노동, 폭격, 폭탄, 결핵에서 화농까지 목숨을 앗아가는 단어들로 가득 찬 그런 세상이었다. 아주 일상적인 일들도 죽음의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땀을 많이흘린 다음 두 손목에 물을 살짝 적시지 않고 급하게 차가운 수돗물을 들이켜다 죽기도 했다. 갑자기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서 죽기도 했고 기침하다 숨이 막혀 죽기도 했다. 검붉은 색으로 잘 익은체리를 먹다 씨가 목에 걸려 죽는 일도 있었고 미제 껌을 씹다 무심코 삼켜 죽기도 했다. - P34

나는 처음에는 건물 모퉁이에 숨어서 릴라가 오는지 훔쳐보았다.
하지만 릴라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그녀 곁으로 다가가 돌멩이를 집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녀와 함께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내 행동에는 확신이 없었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며 많은 일을 했지만 확신에 차서 해낸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내 행동과 내가 항상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릴라는 달랐다. 그때 우리가 여섯 살이었는지 일곱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둘이 돈 아킬레의 집 현관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을때가 아마도 여덟 살이나 아홉 살 정도였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 - P35

주 어렸을 때부터 릴라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아이였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국기의 삼색으로 채색된 펜이든, 돌멩이든, 어두운 계단의 난간이든, 손에 움켜쥔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녀는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을 이미 잘 알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실행할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정확한 손놀림으로 나무 책상에 펜촉을 꽂아놓거나, 잉크를 적신 종잇조각으로 무장하거나, 돌멩이를 던져 동네 사내아이들을 맞히거나, 돈 아킬레의 집 현관 입구까지 걸어가거나 어떤행위든 상관없었다. 릴라는 어떤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 P36

내겐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우리의 유년기는 폭력으로 가득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매일매일 별의별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게 기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힘들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고 타인들도 우리 인생을 힘겹게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나는 학교 선생님과 교구 신부님의 친절한 태도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런 태도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여자아이였는데도 말이다. - P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